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제 3 부)

지금 너희는 자신이 하나님 집 사람인지 아닌지 분명히 알 수 있느냐? 진정으로 하나님 집에 들어왔느냐? 내가 방금 교제한 내용에 근거하여 판단할 수 있겠느냐? 자신이 이미 하나님 집 문으로 들어갔다고, 하나님 집의 일원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느냐? (확신할 수 있습니다.) 확신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미 토대가 생겼고, 하나님 집에 뿌리를 내렸다는 의미이다. 토대가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 집 밖의 사람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해도, 남들 앞에서 너 스스로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일원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너를 모른다고 한다면 이는 문제 아니겠느냐? 이것이 사람에게 복이겠느냐, 아니면 화겠느냐? 이는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 집 사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고, 선행을 예비하여야 하며, 마음을 하나님에게 향해야 하고, 하나님을 크게 높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먼저,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잘못된 관점과 태도, 행동, 그리고 자기가 걷고 있는 잘못된 길을 바꿔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하며, 이것이 기초이다. 그다음은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요구한 대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러한 것에 도달하면 하나님은 만족할 것이고, 네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조금씩 진정한 피조물, 합격한 피조물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네가 여전히 하나님 집 밖의 사람이고,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 집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구원받고 싶다고 말한다면 이는 황당무계한 소리 아니겠느냐? 너희는 지금 채찍질과 징계를 체험했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하여 하나님을 믿는 토대가 생겼다. 이는 좋은 일이다. 다음 단계는 진리 이해를 기초로 생명 진입을 이루는 것이며, 이러한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아 살아 내고, 본분 이행과 하나님이 부탁한 모든 일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받을 희망이 생긴다. 너희 중 대부분이 자질이 떨어진 편은 아니고 평범한 수준은 되니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다만 인성 면에서 결함과 문제가 좀 있다. 혹자는 게으르고, 혹자는 허풍 치기를 좋아하며, 혹자는 거만하고, 혹자는 둔하고 무감각하고 강퍅하다. 이는 성품 문제이다. 인성과 성품 면에서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체험 과정에서 진리를 구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 받아들이고 깨달은 진리를 기초로 체험하고 깊이를 더하면 생명이 조금씩 성장할 것이다. 생명이 있어야 희망이 있고, 생명이 없으면 희망도 없다. 지금 너희는 자신에게 생명이 있는지, 마음속으로 진리를 이해하고 있는지, 체험과 경험이 있는지, 하나님에게 얼마나 어느 정도로 순종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모호하다면 생명 성장을 이루기가 무척 힘들다.

교회에서 큰 힘을 좀 쓰거나 위험한 일을 몇 가지 한 후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그가 한 일에 의하면 칭찬해야 마땅하지만, 그의 성품과 진리에 대한 태도를 보면 혐오스럽고 역겹다. 그는 진리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싫어하기까지 한다. 이 점은 역겹기 이를 데 없으며, 이런 사람은 아무 가치가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자질이 부족한 것, 얼마간 나쁜 습관이 있는 것, 패괴 성품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질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사람에게 반감을 갖거나 그 사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며,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부족한 자질과 어리석음을 혐오하지 않고,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는 것도 혐오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가장 혐오하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싫어한다면 이 한 가지만으로도 하나님은 영원히 너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정해진 일이다. 네가 진리를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대할 때 너는 경시하며 냉담하고 교만한 태도를 보일 것이고, 심지어는 반감을 갖거나 저항하거나 거부할 것이다. 네게 이런 모습이 있으면 하나님은 너를 몹시 싫어할 것이며, 너는 구제 불능일 것이다.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정말 진리를 사랑하지만 자질이 좀 부족하고 견식이 부족하며 어리석다면, 늘 잘못을 저지르지만 고의로 악을 행하지는 않고 그저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진리 교제를 듣고자 하며 진리를 갈망한다면,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간절한 마음과 갈망하는 태도로 대하며 하나님 말씀을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가끔 어리석은 일을 저질러도 하나님은 너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진리를 갈망하는 네 마음을 좋아하며, 진리에 대한 네 간절한 태도를 좋아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를 긍휼히 여겨 언제나 은혜를 베푼다. 하나님은 네 부족한 자질과 어리석음을 보지 않으며, 네 과오 역시 보지 않는다. 네가 간절한 마음, 갈망하는 태도로 진리를 대하기 때문이다. 너에게는 진심이 있다. 그 진심과 그런 태도 때문에 하나님은 늘 너를 긍휼히 여길 것이며, 성령은 네게 역사할 것이다. 그러면 네게는 구원받을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반면, 네 마음이 강퍅하고 방종하며 진리를 싫어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와 관련된 모든 일을 마음에 담는 법이 없으며 마음 깊이 반발하고 멸시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어떤 태도로 대하겠느냐? 혐오와 반감, 끝없는 노로 대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두 가지 특징은 무엇이냐? 널리 긍휼을 베푸는 것과 크게 노하는 것이다. ‘널리 긍휼을 베푼다’에서 ‘널리’란 하나님의 긍휼 안에 관용과 인내, 포용, 지극한 사랑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널리’의 의미이다. 사람이 우매하고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만 어리석고 자질이 부족하다면 하나님은 너를 ‘널리 긍휼을 베푸는’ 태도로 대할 것이다. 긍휼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느냐? 인내와 포용이 포함된다. 네 어리석음을 인내하고 포용하며, 네게 충분한 믿음과 포용을 베풀어 줌으로써 너를 붙들어 주고 공급해 주며 도와주어 네가 조금씩 진리를 깨닫고 성장하게 한다. 이는 무엇을 기초로 이뤄지겠느냐? 진리를 사랑하고 갈망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기초로 이뤄진다. 이는 사람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에 반감을 갖고 있다면, 심지어 진리를 증오하며 한 번도 진리를 중요하게 여긴 적이 없다면, 언제나 자신의 공을 말하고, 자기가 어떻게 사역했는지, 얼마나 경험이 많은지, 어떤 것들을 체험했는지,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중시하고 또 어떤 큰일을 맡겼는지 등을 이야기한다면, 자신의 밑천과 공로, 능력을 말하면서 스스로를 뽐내지만 진리를 교제하거나 하나님을 증거하는 법이 없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 후의 인식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교제하는 법도 없다면 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설교를 듣습니까?”라고 묻는데,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이 다 진리를 사랑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형식만 취하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 집에서 그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진리를 대하는 이런 태도에 관해 하나님은 어떻게 그 성질을 정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한다고 할 것이다. 그의 성품에는 가장 치명적인 것, 교만함이나 간사함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근거하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노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노할 때, 때로 그 사람을 질책하거나 징계하고 징벌한다. 만약 사람이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인내하고 기다리고 살펴볼 것이며, 환경이나 다른 어떤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잠시 그러한 불신파를 이용하여 봉사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당한 환경이 갖춰지고 때가 무르익으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들은 봉사할 자격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노이다. 하나님은 왜 크게 노하겠느냐? 이는 하나님이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을 몹시 증오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크게 노한다는 것은 진리를 싫어하는 이런 부류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가 정해졌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디로 보내겠느냐? 사탄의 진영으로 보낸다. 하나님은 그들을 싫어하고 그런 사람에게 노하기 때문에 그들을 문전박대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 집의 문에 들어서지 못하게 할 것이고, 그들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지도 않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노하는 한 가지 모습이다. 이 밖에,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 더러운 귀신, 악령, 불신파와 동일시하며, 때가 되면 그들을 도태시킬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처리 방식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노이다. 도태된 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구원을 또 누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은혜시대의 사람은 늘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 아무도 침륜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이 말이 패괴된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마음이자 태도를 의미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겠느냐? 전부를 구원하겠느냐, 아니면 일부만 구원하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일부의 사람을 구원하고, 어떤 사람들을 포기하겠느냐? 이 일은 많은 사람이 꿰뚫어 보지 못하고 남들에게 그저 도리만 떠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 아무도 침륜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너무 많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을 구원하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고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사람이니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 멸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고 더없이 광대하며 위대하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은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그 은혜와 사랑을 베풀기를 원치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그들에게 거저 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태도이다. 진리를 싫어하고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밥 동냥하는 거지처럼 누구에게 구걸하든 속으로는 주인을 공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헐뜯고 증오한다. 심지어 주인의 것을 빼앗아 자기의 소유로 만들지 못해 한스러워한다. 이런 거지에게 주인이 먹을 것을 베풀고 싶겠느냐? 분명 그러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가 진짜 불쌍한 게 아니라 너무나 가증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주인은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주인이 음식을 개에게 줄지언정 그 거지에게 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주인의 진짜 마음이다. 너희는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맞서는 사람이 아니냐? 설령 그가 대놓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본성 본질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저는 당신의 말씀을 잘 듣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진리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저는 제게 득이 되고 유익한 사람을 믿거든요.”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방인의 태도가 이렇지 않더냐? 진리를 대하는 네 태도가 이렇다면, 이는 대놓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대놓고 하나님을 적대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겠느냐? 그럴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노하는 이유다. 진리를 싫어하는 이런 부류 사람의 본질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본질이다. 하나님은 이런 본질을 가진 자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들은 원수이자 마귀이니 하나님은 절대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며, 결국 재앙을 내려 멸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밥 동냥하는 거지가 주인의 밥을 먹으면서 주인을 욕하고 조롱하며 헐뜯는 것도 모자라 공격한다면 주인이 그를 미워하지 않겠느냐? 분명 미워할 것이다. 그를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가 자기한테 먹을 것을 준 주인에게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주인을 헐뜯고 조롱하며 공격하니, 이런 사람에겐 양심과 이성, 그리고 인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주인이 그 거지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겠느냐? 그에게 주었던 것을 다시 빼앗은 후 그를 내쫓을 것이다. 그런 것은 개나 짐승에게 줄지라도 그에게 주지 않는다. 이 결과는 거지의 자업자득이다. 하나님이 한 사람 혹은 한 부류의 사람에게 크게 노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기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한 사람이 진리를 싫어한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구원에 결점이 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용서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행위의 일종이 아니며 일시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닌 사람의 본성 본질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 만약 네게 가끔 진리를 싫어하는 패괴 표출이 있다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네 패괴 표출이 진리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진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인지 성찰해야 한다. 이는 네가 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깨우침과 도움이 필요하다. 네가 만약 진리를 싫어하는 본성 본질을 가지고 있어서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심한 반감만 품은 채 진리를 적대시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너는 악인이 분명하니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그저 신앙이 다른 것뿐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으로, 특히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방인들은 모두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은 존재라는 사실을 예로 들어 보자. 이는 사실이 아니냐? 이는 진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절대적으로 믿고 인정하며, 그 사실과 그 진리를 받아들여 하나님을 믿는 토대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람은 하나님이 지은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인도와 주재를 받아들이기를 기꺼이 원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사람은 하나님이 지은 존재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인정하지 않는 것 외에 또 어떤 반응을 보이겠느냐? 그는 너를 비웃고 모든 면에서 이 일로 약점을 잡으며 비방하고 빈정대고 멸시할 것이다. 그는 그 말을 경멸하고, 그 사실을 경멸하며, 심지어는 그 말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에게 빈정대고 헐뜯고 멸시하고 적대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증오스럽지 않으냐?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야.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니 정말 배은망덕하고 심각하게 양심이 없는 데다가 대역무도한 존재야. 그야말로 사탄의 부류라고!’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생각하겠느냐? 그가 그 말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왜 이런 반감이 들겠느냐? (진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이 말을 한마디 평범한 말이나 이론, 혹은 신앙으로 생각해 존중했다면 너도 그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반감과 반발, 경멸, 그리고 이 진리를 폄하하는 주장과 태도, 성품을 보자 분노가 솟구친 것이다. 이런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타인의 신앙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일에 관해 말하면 비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너도 반감이나 혐오가 들지 않으며, 친구로 지내면서 적이 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사실, 함께 지내도 무방한 이방인들이 있다. 그런 이방인은 참도를 받아들여 하나님 집 사람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함께 지내고 교류하는 것이 가능하다. 최소한 그는 양심과 이성이 있고, 너를 음해하지 않으며, 뒤에서 너를 해치지 않으니 교류할 수 있다. 진리를 폄하하는 사람, 즉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너는 마음속으로 분노가 솟구칠 것이다. 그러니 그와 친구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친구가 될 수 없는 것 외에도 너는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만약 네게 그를 어떻게 대할지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입니다. 이는 사실이자 진리죠. 이 얼마나 위대하고 신성한 일입니까! 그런데 당신은 이 일을 받아들이기는커녕 폄하하고 있으니 정말 양심이 없군요! 만약 하나님이 제게 권력을 주신다면 저는 당신을 저주하고 멸하여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이런 심정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정의감이다. 하지만 보통은 이성이 있기에 상대가 마귀임을 간파하면 얽히지 말고 멀리하며, 그가 말을 걸어도 대충 응대하면 된다. 이것이 지혜이다. 하지만 너는 이런 사람과는 가는 길이 다르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알고 있다. 그는 절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한 그들은 짐승이자 마귀로, 우리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마귀와 접하기를 원치 않는다. 보지 않는다면 모를까, 보는 순간 반감이 생기니 영원히 보지 않아야 마음이 평안하다. 늘 이방의 마귀들에게 하나님 집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자는 팔이 밖으로 굽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 못난 인간이다. 이렇게 황당한 짓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항상 마귀와 교류하는 사람은 전부 불신파로, 절대 하나님 집 사람이 아니니 언젠가는 사탄에게 돌아갈 것이다. 누가 형제자매이고 누가 이방인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가장 어리석은 자이다. 불신파나 마귀에게 하나님 집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이고 개 발에 편자를 갖다 붙이는 격이다. 그들은 개돼지와 같은 존재로, 짐승에 속한다. 네가 그들에게 하나님 집 일을 말해 봤자 멍청해 보일 뿐이다. 또 그들은 네 말을 듣고 함부로 하나님 집과 진리를 폄하할 테니, 네 그런 행동은 하나님에게 죄송하고 빚진 것이다. 하나님 집의 일을 절대 그런 불신파나 마귀에게 말하지 마라.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하며 폄하하는 사람은 누구나 싫어하고 거부감을 갖고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겠느냐?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하나님의 생명 그리고 하나님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질은 전부 진리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원수이다. 이것이 어디 하나님과 합하지 않는 문제에 그치겠느냐? 이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노는 더없이 크다.

너희는 지금 다들 어느 정도 토대가 있고, 하나님 집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각종 내적 상태를 돌아보며, 어느 정도 성품 변화의 수확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가치 있는 일이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다. 최소한 하나님이 열납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가 욥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친히 사탄과 내기를 하면서 주는 시련을 받을 자격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네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얼굴빛 가운데서 이뤄진다면 하나님은 너를 지키고 보호해 줄 것이며, 하나님을 따르는 자,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인정해 줄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너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은 후로 하나님의 도를 어떻게 준행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네 행위와 진심에 만족했기에 너를 하나님 집으로 이끌어 훈련시키고, 책망과 훈계,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 얼마나 큰 복이냐! 처음에 너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던 하나님 집 밖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첫 번째 검증을 받아들이고 이겨 냈다. 그 후 하나님은 친히 너를 하나님 집으로 이끌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으며, 부탁을 맡기고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을 안배했다. 그리하여 너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얼마간 사람의 본분을 이행하게 됐다. 보잘것없는 사역일지라도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얻은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것이니 그 복은 더없이 크다. 내세에 면류관과 상을 받는 것은 물론, 이번 생에도 그런 것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들은 이런 진리와 네가 누린 하나님의 은혜, 긍휼, 보살핌과 보호, 그리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각종 징계와 채찍질,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이 모든 진리의 공급 등, 얻은 것이 얼마나 많으냐! 마지막에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외에도 하나님은 너를 사탄의 진영에서 완전히 구원해 하나님을 인식하고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사람, 하나님 집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이 복이 크지 않으냐? (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너를 하나님 집으로 이끌어 데려온 후 이렇게 말씀했다. “너는 복이 있구나. 교회에 들어왔으니 구원받을 희망이 생긴 것이다.” 너는 아직 어찌 된 일인지 감을 잡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사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너에게 주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은 또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진리를 공급하고, 책망 훈계하고, 너에게 본분을 주고 부탁을 맡기는 이 모든 행사로 네 생명을 조금씩 성장시키고 있으며, 네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배하는 사람이 되게 하고 있다. 지금 사람은 이 약속을 얻지 않았느냐? 약속이 이루어지고 실현되는 날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다. 사실, 너희 중 일부는 이미 얻었다. 몇몇은 의지만 있을 뿐 아직 얻지 못했는데, 이는 너희에게 이 약속을 붙들고 실현할 의지가 있는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시간 맞춰 조금씩 사람에게 베풀어 준다. 그러니 너는 자신이 어리석거나 자질이 부족하다고, 혹은 나이가 어리거나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짧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네 생명 진입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 한편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실제 분량과 자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판단하며, 자기 주제를 알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긍정적인 측면에서 진리를 더 깊이 있게 인식하게 함으로써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도록 한다. 바로 이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이루는 것은 사실 무척 간단해서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려울 게 없다. 사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어려움은 무엇보다 크다. 이는 본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진실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아마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고, 언제나 진리를 폄하하고 멸시한다면, 이런 본성을 가진 너는 변화하기가 쉽지 않다. 설령 변화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태도가 바뀌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네가 행한 일이 하나님의 태도를 바꿔 놓는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태도가 바뀔 정도는 아니고 하나님이 마음속 깊이 너라는 사람의 본질을 계속 싫어한다면 너는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 그러니 너희는 스스로를 성찰해야 한다. 만약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에 반발하는 내적 상태가 있다면 무척 위험할 것이다. 수시로 이런 내적 상태가 생기고, 또 수시로 이런 내적 상태에 빠진다면, 혹은 네가 아예 이런 사람이라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진다. 진리를 싫어하는 내적 상태가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난다면, 이는 분량이 작은 것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의 패괴 성품 자체에 그런 본질이 있어 이런 내적 상태가 생기는 걸 피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적 상태가 본질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한때의 기분 때문에 내적 상태가 생겨 진리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지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 본질이 야기한 것은 아니다. 일시적인 내적 상태는 바로잡을 수 있다. 어떻게 바로잡아야겠느냐? 얼른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그 측면의 진리를 구함으로써 진리를 인정하고 진리와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되면 그 내적 상태는 해결된다. 하지만 해결하지 못한 채 계속되게 내버려두면 위험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저는 자질이 부족해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니 추구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필요도 없겠죠. 하나님은 왜 저한테 이런 자질을 주신 걸까요?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으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공의를 부정했으니, 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이자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나타난 데는 배경이 있으니 이런 내적 상태가 생겨난 배경과 근원을 해결해야 한다. 근원을 해결하면 너의 그 내적 상태도 사라진다. 어떤 내적 상태는 병증과 같다. 예를 들어 기침이라고 하면, 감기나 폐렴 때문에 나타났을 테니 감기나 폐렴을 치료하면 기침도 나아진다. 병의 근원을 해결하면 병증도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싫어하는 내적 상태 중 일부는 병증이 아니라 암과 같다. 병의 근원이 안쪽에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병세도 발견되지 않지만, 일단 발병하는 순간 치명적이며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런 사람은 늘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이방인처럼 언제나 진리를 폄하한다. 입으로는 말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폄하하고 거부하고 반박한다. 그게 어떤 진리일지라도, 예컨대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정하는 것,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일할 때 대충 건성으로 하지 않는 것,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 등 어떤 측면의 진리일지라도 그는 받아들이거나 인정하거나 신경 쓰지 않으며, 심지어는 반박하고 폄하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으로, 하나의 본질이다. 이런 본질이 사람에게 어떤 결말을 초래하겠느냐? 하나님에게 혐오받고 내쳐지며 도태된 후 파멸하는, 더없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오늘 교제한 이런 내용이 너희에게 뭔가 도움이 되었느냐? (네, 자질이 좋은 것이란 어떤 것인지, 자질이 부족한 것이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고, 제 자질에 대해서도 진실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일이 닥치면 스스로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교만하고 독선적으로 굴지 않고 착실히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든 너희의 생명 진입에 도움이 된다. 만약 너희가 이러한 말을 너희의 일상생활과 결부시킨다면 내가 한 말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조금 깨달을 때마다 일 처리는 조금씩 더 정확해지고 길이 넓어진다. 만약 깨달은 진리가 적고, 자신의 실제 분량이나 자질에 대해서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면 일 처리가 늘 부정확할 것이며, 언제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자신에게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또 관념과 상상에 기대 일을 처리하면서도 깨닫지 못한 채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고 여기며, 관념과 상상을 진리 원칙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일을 처리하면 오류가 심각해진다. 이런 관념과 상상, 지식, 학문이 마음속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 사람은 진리를 구하지 않게 된다. 진리가 네 마음속에서 2순위, 3순위, 심지어 최후 순위라면 너한테서 권세를 잡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의 성품과 사람의 관념, 철학, 지식, 학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네게서 주도권을 잡고 있으니 하나님이 네게 행하는 사역에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네게서 생명이 되지 못했으면 너는 구원받기까지 무척 멀리 떨어져 있으며, 아직 구원받는 길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 조급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긍휼을 베풀어야 너를 구원받는 길에 오르게 할 수 있겠느냐? 만약 너희가 전통문화 지식, 사탄의 철학 속에서 빠져나와 하나님 말씀과 진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진리 원칙으로 관리 감독하며,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법을 배운다면, 진정으로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 된 것이고, 독립적인 생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된 것이다. 지금 너희는 아직 부족하고 갈 길이 멀다. 그저 약간의 생명만 있을 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관용에 기대 살아가야 하니 분량이 너무 작다. 만약 너에게 한 가지 사역을 맡긴다면 독립적으로 완수할 수 있겠느냐? 그 사역을 잘해 낼 수 있겠느냐? 일을 엉망으로 만든다면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욕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일을 반만 하고 어디론가 놀러 간다면, 이는 성격이 침착하지 않은 것 아니겠느냐? 이는 불성실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본연의 업무에 힘쓰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자는 누군가가 지켜보고 관리해야 본분을 좀 이행한다. 어떤 이는 30~40대가 되어서도 이런 작태를 보이는데, 그럼 끝이다. 그는 평생 어떤 일도 해내지 못할 것이다. 만약 네가 20대고, 하나님을 믿은 지 2~3년밖에 되지 않았다면 그래도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이런 사람은 분량이 작은 사람이다. 성격이 침착하지 않고, 미덥지 못하며, 늘 하나님이 지켜 주고 보호하고 일깨우고 인도해야 하는 사람, 언제나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서 은혜에 기대 살아가고, 하나라도 부족하면 안 되는 사람은 분량이 너무 작은 것이다. 너희가 지금 바로 이런 상태에 있다. 너희에게 한마디라도 덜 하면, 때때로 착오가 생기고 일이 엉망이 된다. 한마디 덜 하면 엉망이 되니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희 모두 성인 같지만, 사실 영적 생명은 성장하지 않았다. 비록 본분 이행에 의지와 진심을 좀 보이고, 진실한 믿음도 얼마간 있다고는 하나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고, 본분을 이행할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인도, 지시에 기대 나아가며,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너희에게 어떤 부분만 드러났겠느냐? 널리 긍휼을 베푸는 부분이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사역 원칙이다. 지금 너희는 왜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을 누리지 못하겠느냐? 그런 분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희의 분량은 너무나 보잘것없고, 너희가 깨달은 진리는 너무나 적어서 그 무엇도 꿰뚫어 보지 못하며, 일이 닥치면 멍해진 채 어찌할 바를 모른다. 너희는 늘 걱정만 끼치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하나하나 가르쳐 줘야 해서 마음을 졸이게 한다. 너희에게는 한마디라도, 한 번이라도 말을 덜 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일도 두세 번 말해 줘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또 잊어버려서 몇 번 더 말해 줘야 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는 생각이 없는 멍청이로, 힘쓰는 것조차 합격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결코 쉽지 않다. 자질이 너무 떨어져서 진리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분량이 작지만, 어떤 일이든 한두 번, 두세 번 체험하면 배워서 할 줄 안다. 진리를 교제했을 때 이해하고 깨닫고 파악한다면 자질이 있는 사람이다. 자질은 있지만 분량이 작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체험의 깊이나 진리에 대한 이해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뿐이다. 체험이 많아지고 깨닫는 진리가 깊어지면 분량은 자연히 자랄 것이다.

2019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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