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제 2 부)

이어서 사람의 자질 측면에 관해 교제하겠다. 한 사람이 자질을 갖추었는지를 판단하려면 그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과 태도를 이해하는지, 자신이 서야 할 위치와 준수해야 할 원칙, 지녀야 할 태도를 아는지를 보면 된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모두 이해한다면 자질이 있는 것이다. 반면, 네가 이해한 것이 실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배치한 이 모든 것과 무관하다면 너는 자질이 없거나 부족한 것이다. 베드로와 욥의 진실한 분량, 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궁극적으로 얻고 수확한 것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이냐? 그들은 절대로 지금 너희가 누리는 것처럼 항상 진리를 교제해 주고, 공급하고, 붙들어 주고, 도와주고, 관리하고, 감독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깨달은 진리는 대부분 혼자 인식하고 체험한 것, 일상생활 속에서 스스로 조금씩 이해하고 체험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뛰어난 것이다. 사람이 이런 자질도 없고, 진리와 구원받는 일을 대하는 이런 태도도 갖추지 못했다면 매사에 진리를 구하지 않고 진리 실행에 집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욥과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하지만, 한동안 부러워하다가 곧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고, 자기 역시 일이 닥치면 욥이나 베드로가 했던, 성경에 등장한 말들을 뱉을 수 있을 거라며 그 일을 간단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복음서를 제외하면 신약 성경에 가장 많이 실려 있는 것은 바울의 서신이다. 또한, 같은 시기 바울과 베드로가 한 사역이 비슷한데도 바울의 이름이 베드로보다 훨씬 유명하다. 이 두 가지 일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이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을 알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은 바울의 서신 중 많은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바울의 명언으로 스스로를 고취시킨 결과 그들은 그릇된 길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심지어 수많은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반면, 베드로는 잘 등장하지도 않고 글을 통해 어떤 주장을 한 일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심오한 도리나 거창한 구호와 이론으로 당시 형제자매를 가르치고 돕는 일도 없었고, 대단한 이론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일도 없었다. 그저 착실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족게 하기를 추구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그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의 차이다. 결국,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어 멸망했지만, 베드로는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걸어 온전케 되었다. 그들이 걸어간 길에서 너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을 기뻐하지 않는지, 사람의 어떤 표출과 태도를 기뻐하지 않는지, 사람이 걷는 길은 어떤 길인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중시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바울에게 자질이 있었느냐? 바울의 자질은 어떤 수준이었느냐? (뛰어났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많은 도를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구나. 바울의 자질이 뛰어났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질이 부족했습니다.) 어째서 바울의 자질이 부족했다고 하느냐? (그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 역시 예수가 전하는 도를 들은 적이 있으며, 당연히 그가 사역하는 기간에도 성령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하고, 그렇게 많은 서신을 쓰고, 그렇게 많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왜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도리만을 읊었겠느냐? 이는 어떤 자질이겠느냐? 이게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이 밖에도 당시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고 주의 제자들을 체포했다. 그 후 예수가 하늘에서 큰 빛으로 바울을 치자 바울은 자신에게 닥친 그 큰일을 어떻게 대하고 인식했느냐? 그는 베드로의 인식법과 달랐다. 그는 ‘주님이 나를 치셨어. 나는 죄를 지었으니까 빨리 사역을 많이 해서 만회해야 해. 공을 세워 과오를 덮으면 상을 받을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가 스스로를 인식했느냐? 그는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제가 예수님을 대적한 것은 본성이 악독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적그리스도의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대적했으니 좋은 사람이 못 됩니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이런 인식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의 서신에는 이 일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그는 이 일에 어떤 관점을 가졌느냐?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역하게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큰 빛이 자신을 비췄기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나님께 중용되기 시작한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그것이 상과 면류관을 받기 위한 가장 강력한 증거이자 밑천이라고 여겼다. 이 밖에, 그는 속으로 자신에게 가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가시는 무엇이었느냐? 그가 광적으로 예수를 대적했기에 하나님이 그를 징벌하여 병이 나게 한 것이다. 그는 이 일을 어떻게 대했느냐? 그의 마음속에는 늘 병이 있었다. ‘그 일은 내 인생 최대의 과오야. 하나님이 과연 내 죄를 사해 주실지 모르겠어. 다행히 예수께서 목숨을 살려 주시고 복음 전파 일을 맡기셨으니 속죄의 기회가 온 거야.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해. 어쩌면 죄 사함을 받는 건 물론이고, 면류관과 상을 받을지도 모르잖아. 그럼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그는 항상 그 가시를 떨쳐 버리지 못해 마음이 혼란스러웠고, 늘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 큰 과오를 어떻게 만회하지? 어떻게 해야 이 잘못을 상쇄해서 내 앞날이나 면류관을 얻는 데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려면 많이 사역하고 대가를 치르고 서신을 쓰고 뛰어다니며 사탄과 싸우고 아름답게 증거해야 해.’ 그는 이 일을 이렇게 대했던 것이다. 그에게 뉘우치는 마음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는 전혀 뉘우치지 않았고, 나아가 스스로를 인식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었다. 이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자질에 문제가 있으며,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한 가지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그의 인성과 추구 때문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의 자질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했고, 다음과 같은 의식도 없었다. ‘사람은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어 그 본성이 너무 나쁘고 사악하구나. 사람에게 사탄과 적그리스도의 본성이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근본 원인이니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께 구속되어야 해. 그럼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구속을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고, 자기가 왜 예수를 대적하고 정죄하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비록 그가 스스로를 괴수라고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 일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어떻게 하면 그 큰 죄를 상쇄할지, 어떻게 하면 죄를 지은 상황에서 공을 세워 속죄하고 결국에는 여전히 면류관과 상을 받을 수 있을지만 고민했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는 그 속에서 진리를 깨닫거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진리를 이해하는 측면에서 바울은 누구보다 뒤처지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바울의 자질 또한 가장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구원에 이르려면 반드시 합격한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최소한 자질이 평범하기라도 해야지 너무 떨어져서는 안 된다. 즉, 반드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진리를 어느 수준까지 이해하든, 최소한 이해한 진리 위에서 스스로를 인식해야 하며, 어떻게 진리를 실행할지 알아야 한다.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다. 왜 그렇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겠느냐? 일상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일을 진리와 연관 지을 수 있고, 하나님 말씀과 결부시켜 바라보고 대할 수 있으면, 하나님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다. 그럼 이것을 기초로 하나님 말씀의 심판,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이게 된다.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말씀의 심판,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일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기 전에 적어도 일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고, 조금은 변화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행사를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 관점으로 대할지 알아야 한다. 이는 모두 진리와 관계가 있다. 사람이 단순한 종교적 구호나 종교 의식, 규례로 제멋대로 대한다고 해서 진리와 관계되는 것도 아니고, 또는 사람에게 몇 가지 좋은 행위가 있다고 해서 진리 실행과 관계되는 것도 아니다. 그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네가 인식하고 체험하고 마주하는, 네 주변의 일에서 너는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마음속으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진리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 밖에, 하나님이 네게 시킨 일, 하나님이 너를 대하는 방식과 태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있어 너의 태도와 관점은 반드시 진리와 관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 진입을 이룰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네게 역사할 수가 없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규례를 지키고 도리를 늘어놓으며 외식하는 종교인들을 보아라. 그들의 외적 행위는 무척 훌륭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역사하지 않겠느냐? 그들이 행한 일, 그들의 모든 좋은 행위는 진리와 관계가 없으며, 그들이 겨우 이룬 행위상의 변화 역시 성품 변화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와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걷는 길에 관해 말하든, 아니면 사람의 인성과 자질에 관해 말하든 사람은 최소한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을 지녀야 한다. 그 조건은 바로 사람이 반드시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 하며,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자질을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진리를 대하는 태도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에 근거해 판단해야 한다. 전문적인 업무는 매우 빨리 배우지만 진리만 들었다 하면 멍해지고, 졸리고, 속으로 어리둥절해서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혹자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으면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교양이 높으니 자질이 좋다고 생각한다. 교양이 높다고 자질이 좋다는 뜻이겠느냐? 그것은 자질이 좋다는 의미가 될 수 없다. 사람의 자질을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이해도를 통해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말재간이 좋고 머리를 잘 굴리며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매우 능숙하지만, 설교를 들을 때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체험 간증을 얘기할 때 글귀와 도리만을 늘어놓아 문외한처럼 보이며,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집을 위해 일을 처리한다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에게 진리 원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제 너희는 이 일이 이해되었을 것이다. 하나님 집을 위해 일을 처리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본분 이행이다. 본분 이행이라고 하면 진리,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되고 사람됨의 원칙, 다양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 및 방법과 관계가 있다. 이 문제들은 다 사람이 본분 이행에서 성과를 내고 합격할 수 있을지 여부와 관계된다. 본분 이행과 관련된 이 문제들이 진리와 관련되지 않겠느냐? 만약 진리와 관련되는데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너의 그 잔머리에 기댄다면 문제를 해결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몇 가지 일에서 실수가 생기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은 네가 행한 일이 진리와 관련되지 않고 순전히 외부의 일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외부의 일을 처리한다고 해도 원칙이 있어야 하고, 모두의 눈에 적절하게 보여야 한다. 만약 너에게 어떤 일을 원칙대로 처리하라고 했는데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돌발 상황이 벌어진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할 것이다. 너는 경험에 따라 그렇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경험에 따랐다가 공교롭게 방해와 교란을 일으켜 일을 망쳤다면, 이는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겠느냐?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원칙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리나 원칙과 관련된 일만 만나면 처리하지 못하고 자기 뜻이 튀어나오니, 결국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이익에 해를 끼치고 너 자신도 못난 꼴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의 경험과 수단으로 문제를 처리하는 게 소용이 있느냐? (소용없습니다.) 어째서 소용없겠느냐? 사람의 경험과 수단은 진리가 아니며, 하나님의 선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사람의 경험과 수단으로 문제를 처리한다면, 이는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이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궤변을 늘어놓는다. “저는 이 일에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속으로는 깨달았지만 많이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죠. 조금만 더 노력하고 고민한다면 저도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예전에 이방인들과 일을 처리하고 교섭할 때는 이런저런 방법과 수단을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니 어떻게 할지 몰라서 제 뜻대로 처리한 겁니다. 그러니 실수가 나오는 것도 정상적이죠.” 그가 스스로를 인식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인식하지 못했겠느냐? 이것은 진리와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그는 이 일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고 어떻게든 감추려고만 했다. 자신은 행위에서 실수와 착오가 있었을 뿐 진리와는 관계가 없다고, 진리를 깨닫지 못해 패괴 성품대로 일을 처리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여겼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일이 닥쳤을 때 계속 원인을 찾고 핑계를 대면서 자기는 그저 실수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 반응은 진리를 구할 줄 모르는 것이고, 두 번째 반응 역시 진리를 구할 줄 모르는 것이며, 세 번째 반응도 여전히 진리를 구할 줄 모르고 스스로를 인식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는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지적하고 폭로하고 교제해도 그는 자신이 어긴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자신이 실행해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아무리 지적해도 이런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즉,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네가 아무리 명확히 진리를 교제해 줘도 그는 그것이 진리임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만의 이유와 변명, 혹은 실수나 착오로 사실을 감추고, 자기가 진리를 어기고 패괴 성품을 표출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즉,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어떤 패괴 성품을 표출하고 얼마나 많은 패괴된 내적 상태가 생길지라도 그는 자기가 드러낸 패괴 성품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며, 자신의 패괴 본질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또한, 이 일에서 어떻게 진리를 구하고 스스로를 인식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러한 것을 하나도 모른다. 영적으로 무감각하여 이런 일에 전혀 느낌이 없는 것이다. 이게 바로 자질이 부족한 모습이다.

이제 몇 가지 예에 결부시켜 사람의 자질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교제해 보자.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은 일 처리를 질질 끌고 대충 건성으로 한다고 얘기하면, 자질이 좋은 사람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자신에게도 그런 내적 상태가 있고, 몸이 안 좋을 때나 소극적이고 게으를 때 늘 그런 내적 상태와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게다가 머릿속에 일부 장면이 떠오르면서 자기가 어떤 일에서 늦장을 부리고 건성으로 했는지 대조해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된 실태를 폭로하고 있고, 그것이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은 진리라고 인정한다. 그는 오해나 관념 없이 전부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게 바로 자질이 좋은 것이다. 그가 이 말을 듣고 맨 처음 보인 반응은 스스로에게 대조해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에게도 그런 내적 상태가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내적 상태나 일상생활과 연결 지은 후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그 내적 상태를 분명히 알 수 있으며,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이런 반응을 보인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어떻겠느냐? ‘늦장을 부린다’라든가 ‘대충 건성으로 한다’라는 말만 해서는 안 된다. 그의 모습을 폭로하면서 그의 행동과 결부하여 직접적으로 지적해 줘야 한다. “당신은 평소에 흐지부지하고 진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의 본분 이행은 대충 건성으로 하는 건데 왜 자각하질 못하죠? 몇 번을 말해 줬습니까? 그게 바로 대충 건성으로 하는 거고 늦장을 부리는 거라고요.” 이렇게 지적해 주면 그는 자신이 어떻게 늦장을 부리고 건성으로 했는지 반성할 것이다. 진정으로 반성하고 인식한 후에는 자신의 잘못임을 인정하고 고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일정한 일과 일정한 내적 상태뿐이다. 그는 네 말이 자기 상상과 맞아떨어져야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평범한 것이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에게 사역을 하려면 공을 들여야 한다. 사실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해야 그가 진심으로 탄복할 수 있다. 그럼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내적 상태를 보이겠느냐?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나사가 빠져 있고 생각이 단순해서 어떤 일을 직면하든 밝히 알지 못하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 또 분명히 말해 주거나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사람이 없다면 혼자서는 생각해 내지 못한다. 그래서 자질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더 직설적으로 말해 줘야 하며, 예를 들고 사실에 초점을 맞춰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해 줘야 한다. 그래야 성과가 좀 난다. 너는 “그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건 늦장을 부리고 건성으로 하는 겁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럼 그는 가장 먼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느냐? “제가요? 제가 늦장을 부렸다고요? 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본분 이행에 관한 일을 생각합니다. 먼저 본분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외출할 때도 어떻게 해야 그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지 생각하죠. 저는 늦장을 부리거나 건성으로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 일에 적잖이 공을 들였다고요!” 그의 첫 번째 반응은 먼저 네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인식도 하지 못하며, 늦장을 부리면서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그에게 반드시 어떤 태도가 늦장을 부리고 건성으로 하는 것인지 설명해 주어야 한다. 진심으로 탄복하게 설명해 줘야 받아들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외부의 일을 제대로 못 하고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진리나 원칙 실행,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된 일이라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더더욱 이르지 못할 것이다. 네가 아무리 말해도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말을 많이 할수록 그는 더 혼란스럽고 어지럽다고 느껴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자가 바로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이다. 진리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이런 모습을 보인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소용이 없다. 네가 아무리 말해도 그는 알아듣지 못하며, 기껏해야 도리와 규례에 관련된 것들만 좀 이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진리를 자세히 교제해 줄 필요가 없다. 그저 간단히 어떻게 하라고 시킬 수밖에 없다. 그가 그것을 지킬 수만 있어도 괜찮은 편이다.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은 이해력이 전혀 없고, 심지어는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사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해 줘도 그는 대조하지 못한다. 이것을 가리켜 자질이 부족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는 것에 대해 자질이 좋은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아라. 다른 사람들이 본인이 거짓말하고 기만하는 내적 상태를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했는지 이야기하고, 거짓말한 내적 상태와 사례를 말하면, 자질이 좋은 사람은 듣고 나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내적 상태에 대조하면서 자기가 어떤 일에서 거짓말을 했는지, 일할 때의 속셈은 어떤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또 그는 자기가 일상생활 속에서 드러낸 것에서 자신의 속셈과 동기, 생각을 성찰함으로써 자기가 한 어떤 말이 거짓말이고 간사함을 내포한 말인지 알아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체험 간증을 듣고 도움을 얻으며 수확을 거둔다. 몇 가지 원칙만 말해 줘도 그는 이해하고, 적용할 줄 알며, 그 후에는 그 말을 진리 원칙으로 삼고 자신의 실제로 만들어 조금씩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체험 간증을 들을 때, 명확한 사례는 스스로에게 대조할 수 있지만, 명확하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표현해 내지 않는 것들은 대조하지 못한다. 이 밖에, 진리 원칙에 대한 이해도 얕아서 마치 도리와 같고, 자질이 좋은 사람보다 이해도가 많이 떨어진다. 그럼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어떻겠느냐? 다른 사람의 간증을 들을 때, 상대가 어떤 것들이 거짓말이고 빈말인지, 어떤 것들이 간사한 내적 상태인지 아무리 해부해도 그는 스스로에게 대조해 보지 못하고, 자신을 돌아보거나 인식하지도 못한다. 그는 거짓말하고 간사하게 구는 자신의 내적 상태를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너무 정직해서 거짓말할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 누가 거짓말로 기만해도 분별할 줄 몰라 쉽게 속아 넘어가며, 다른 사람이 교제하는 진리 원칙에는 더더욱 이르지 못하고, 이해력이 전혀 없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모습이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자질의 사람 중 성품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누구겠느냐?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겠느냐? (자질이 좋은 사람입니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진리 실제에 더 빨리, 더 깊게 진입한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진입이 늦고 얕은 편이며,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아예 진입하지 못한다. 이런 차이가 있다. 보아라,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느냐? 바로 사람의 자질에 있고,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진리를 사랑하고 자질이 좋은 사람은 진리 실제에 무척 빨리 진입하여 생명을 얻는다. 반면,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고집스럽고 무감각하여 진리 진입도, 생명 성장도 느리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어리석고 완고하고 교만하고 멍할 뿐만 아니라 무감각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반응이 느린 데다가 진리에 대한 이해도 굼뜨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늘 도리만 말하고 구호만 외치며 규례만 지키기에 생명이 없다. 또 진리를 깨닫지 못하므로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도 못한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는 사람은 내면에 생명이 있겠느냐?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일이 닥쳤을 때 자기 뜻대로 어리석게 행동하며 이쪽에 치우쳤다 저쪽에 치우쳤다 하면서 정확한 실행의 길을 얻지 못한다. 또 마음이 늘 갈팡질팡하고 무기력해서 더없이 가엾어 보인다. 최근 일이 닥쳤을 때 갈팡질팡한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렇게 많은 도를 들어 놓고 왜 아직도 갈팡질팡한단 말이냐? 그들은 정말 갈팡질팡하는 표정을 보이고, 무감각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다. 혹자는 “제가 어디가 무감각합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유행하는 것들에 제가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데요. 컴퓨터니, 휴대전화니, 게임기니 하는 것들 모두 다룰 수 있다고요. 멍청한 건 그런 것들을 하나도 쓸 줄 모르는 당신들이겠죠. 어쩜 그렇게 자질이 부족합니까?”라고 말하는데, 그 정도 잔재주는 한 가지 분야에서의 특기이자 끼일 뿐 전혀 자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에게 설교를 듣고 진리를 교제하라고 하면 영적으로 심각하게 무감각하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어느 정도로 무감각하겠느냐?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었으면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여부조차 분명히 알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며, 자기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네가 그에게 스스로의 자질이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보면 그는 “자질이 좋은 사람보다는 좀 부족할지 몰라도 자질이 평범한 사람보다는 훨씬 낫지요.”라고 말한다. 이 정도로 자질이 부족하다. 이는 좀 멍청한 것 아니겠느냐? 자질이 너무 떨어지면 멍청해 보인다. 어떤 측면에서든 진리나 원칙과 관련되기만 하면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이르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여기까지 교제했는데, 자질이 좋은 것이란 어떤 것이고 자질이 부족한 것이란 어떤 것인지 판단이 되느냐? 무엇이 자질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자질이 부족한 것인지 이해하고, 자신의 자질과 본성 본질을 정확히 바라보는 것은 자기 인식에 도움이 된다. 자기 위치를 정확히 설정하면 어느 정도 이성을 갖추게 되며, 자기 주제를 알게 되어 건방지게 굴기가 쉽지 않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좀 착실하고 편안하게 임할 수 있다. 즉,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게 된다. 사람이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면 수많은 문제가 생긴다. 어떤 문제가 생기겠느냐? 분명히 평범한 자질을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스스로가 자질이 좋다고,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마음속에 항상 리더가 되어 남들을 이끌고 싶다는 충동을 품게 된다. 마음속에 늘 이런 것들이 들어 있으니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 사람이 늘 이런 것들에 교란되며 불안해하고 평온을 찾지 못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을뿐더러 어리석고 낯부끄러운 일, 비이성적인 일을 저질러 하나님의 혐오를 사게 된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해결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절대로 안 된다. 반드시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이 왜 그런 사상을 가졌는지, 왜 야심이 그렇게 큰지, 그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단순히 묵상하기만 한다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문제의 근원을 찾아야만 제대로 해결할 수 있다.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만 야심과 욕망이 사라진다. 그렇게 되어야 착실히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더 이상은 그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날뛰고 거들먹거리면서 자기는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고, 분수를 지키면서 처신할 수 있다. 그럼 이런 패괴 성품은 너를 교란할 수 없을 것이며, 너는 훨씬 성숙해질 것이다. 적어도 단정하고 바른 성도의 품위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고 단언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집에 왔으면, 최소한 양심과 이성을 지녀야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방인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처럼 굴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뭐가 어렵습니까? 저는 수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라고 말하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단순한 일은 아니다. 올바른 마음가짐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지녀야만 하나님에게 열납될 수 있다. 짐승 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면 하나님은 증오하고 혐오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일방적으로 원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네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다. 이 일의 결정권은 하나님 손에 있다. 하나님이 너를 인정해야 네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고 진리를 구하며 수시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성령의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너를 무지한 백성,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이라고 한다면 너를 신경이나 쓰겠느냐? (그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에게 은총과 축복 등 표면적인 것들만 좀 줄 뿐 너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실제적인 의미 측면에서 보면, 너는 절대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다가가거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을 따르는 자’로 인정하기 전에 너는 어느 정도 변화를 이뤄 하나님에게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네 본분과 모든 언행, 생각을 검증하고 네게 역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사람의 행위와 태도, 인성의 표출, 행동, 마음과 생각,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하나님에게 혐오와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이 혐오하고 반감을 갖는 이들의 손을 잡고 하나님 집으로 이끌어 들어오겠느냐? (그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겠느냐? 그 느낌은 어디에서 왔겠느냐? 다 꾸며낸 것이다. 이는 좀 비이성적인 데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즉 창조주가 그를 따르는 사람을 택하는 데는 반드시 기준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고,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은 사람과 다르다. 너는 친구를 사귈 때 상대의 인품을 볼 것이고, 그와 생각이 맞는지, 그의 성격은 어떤지, 너와 공통적인 취미가 있는지, 생김새는 어떤지 등을 볼 것이다. 네가 사람을 고르는 데도 기준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겠느냐? 혹자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택하십니까? 하나님에게 그렇게 다가가기가 힘든 건가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 집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건가요?”라고 하는데, 사실 어렵지 않다. 하나님 집의 문턱은 높지 않지만 기준이 있다. 첫째, 최소한 경건한 태도를 지니고 안분지족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둘째,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 셋째, 성도의 품위에 맞는 언행을 보여야 한다. 최소한 좋은 언행과 몸가짐, 교양을 갖춰야 할 것이다. 만약 네가 이 최소한의 것조차 갖추지 못한다면, 솔직히 말하건대 하나님은 너를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을 믿는 몇몇 사람을 대할 때 너는 그들의 일 처리와 태도, 표출을 보아라. 하나님이 왜 그들에게 그렇게 반감과 혐오를 품겠느냐? 그들에게는 인성도, 양심도, 이성도 없으며,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성도의 품위조차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 직접 손을 잡고 하나님 집까지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인성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는 바보밖에 없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늘 짙은 화장을 하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등 이방의 댄서들보다 더 요염하게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사생활이나 처세를 보면 이방인들과 다를 게 없다.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그들은 부정할 수 없는 이방인이자 불신파다. 이런 사람도 겉으로 보기에는 진심으로 믿는 것 같으며, 버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듯하다. 또 핍박과 환난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들이 살아 내는 것을 보아라. 그들이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이겠느냐? 정직한 사람이겠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겠느냐?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겠느냐? 절대 원할 리 없다. 그들은 하나님 집에 섞여 들어온 이방인이다. 그들은 하나님 집 문밖에 있으며, 문 안으로 들어온 적이 없다. 그들이 하나님 집을 위해 하는 일들은 전부 거들고 힘쓰는 것뿐이다. 그들은 교우이지 하나님 집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도, 야생 동물도 원하지 않는다. 혹자는 자기가 하나님을 오래 믿어 밑천이 좀 있고 몇몇 중요한 본분을 이행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 집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며, 교회를 손에 넣고 주무르려고 한다.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의 혐오를 산다. 그들의 본질,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근거로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 집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 집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왜 그들이 하나님 집에서 일을 하게 하겠느냐? 이는 그들에게 일을 거들거나 임시직 같은 업무를 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일을 거들고 임시직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정말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말을 잘 듣고 순종하게 된다면, 또 진리를 받아들이고 성도의 품위를 갖추며 얼마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진심으로 일을 처리하게 된다면 이러한 검증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 집에 받아 줄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 집 사람이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이 하는 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부탁이야말로 본분이다. 하나님 집 밖에서 하는 것은 본분 이행이 아니라 하나님 집을 위해 일을 거들고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런 사람은 힘쓰는 자에 속한다.

이제 너희가 하나님 집의 일원인지 가늠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은 기간으로 본다면 당연히 하나님 집의 일원이 맞겠지만, 그것이 정확한 판단 방식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에 근거해서 가늠해야겠느냐? 진리를 들은 후 네 내면에 반응이 있는지, 진리를 어겼을 때,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했을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양심의 가책과 질책, 징계가 느껴지는지 등에 근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판단하는 말을 하면 징계가 임해 입안에 부스럼이 나고, 어떤 사람은 대충 건성으로 일을 처리하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징계로 병에 걸린다. 이런 일을 언급할 때 그는 마음속 깊이 후회하고 회개할 수 있다. 이런 태도를 지닌 사람이 바로 하나님 집의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하나님 집 사람, 자기 집안 사람으로 대할 것이며, 채찍질하고 징계하고 질책하고 책망 훈계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 집의 사람이다. 네가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회개할 줄 알게 되면 하나님 역시 너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 생명 진입을 이루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인생의 방향이 모두 달라지며,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가 점차 커지고 변화한다면 너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 된 것이다.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 집에 도움이 되는 일은 많이 하지 않고, 나쁜 일은 적잖이 한 사람들이 있다. 거짓말하고 기만하고, 대충 건성으로 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제물을 훔쳐 먹고, 이간질하고,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고 망치는 등 나쁜 짓을 숱하게 저질러 놓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도 없고 마음속으로 후회하거나 미안해한 적도 없다면, 이런 자는 하나님 집 밖에 있는 사람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집 밖에서 살고, 일 처리에 이렇다 할 원칙이 없으며,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에 흥미가 없다. 그저 일을 처리하고 바삐 뛰어다니며 힘을 쓰고 자신을 뽐내고 밑천을 모으는 데 집중할 뿐이다. 그는 교회 사역도, 자신의 본분도 대충 건성으로 대하며,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기만행위를 한다. 심지어는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후회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징계를 느끼지도 못한다. 이런 자는 하나님 집 사람이 아니다. 언뜻 보기에 이런 부류는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헌신하려는 열의가 꽤 크고 믿음도 있고 기꺼이 바치고자 하는 것 같다. 또 진리를 무척 좋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리를 실행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설교만 들었다 하면 졸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며, 반감을 갖는다. ‘이런 교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하나하나 지적해서 사람이 스스로를 인식하게 한 후에 진리를 좀 깨닫게 하고, 마지막에 순종하게 하는 것뿐이잖아. 나는 이런 걸 다 이해하고 있는데 왜 또 교제하는 거지?’라고 말이다. 그는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가책과 징계가 없다. 마치 마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자들은 모두 하나님 집 밖에 있는 사람으로, 이방인에 속한다. 처음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일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자신이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그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그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며, 기꺼이 본분을 이행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잔머리와 약간의 열정, 그리고 야심으로 인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사역해서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는 데 매진하며, 하나님 집에서 지위를 얻으려고 한다. 그는 ‘난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각 곳에서 명망을 쌓고 위신을 세웠어. 교회에 제대로 발을 붙였다고. 어디를 가든 형제자매들에게 우러름을 받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이런 명성을 얻었으니 된 거야. 이게 바로 생명이 있는 거라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정의하시든, 그런 건 참답게 대할 필요 없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부류겠느냐? 엄밀히 말하자면 불신파다.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겠느냐?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단 한 번도 회개하거나 스스로를 인식한 적이 없으며, 무엇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인지 깨달은 적도 없다. 그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며, 본분 이행의 기치를 들고 자신의 경영을 하면서 자기 욕망과 취향을 충족시킬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많은 도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관해,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에 관해 전혀 개념이 없다. 그렇게 많은 도를 들었지만, 그 도가 과연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은 너무 패괴되어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마음 깊이 해 본 적이 없으며, 진리와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갈망과 동경을 마음 깊이 느껴 본 적도 없다. 이는 문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무척 큰 문제이다. 하나님과 진리, 구원받는 것이 그들에게는 하나의 구실이나 논조, 구호에 불과하니 문제가 심각하다.

너희가 보기에 바울과 베드로의 가장 명확한 차이는 무엇인 것 같으냐? 바울은 오랜 세월 사역하면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헌신하고 봉헌했으며, 또 숱한 고생을 했지만 그가 걸어간 길은 진리와도,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나 성품 변화와도 무관했으며, 구원받는 것과는 더더욱 무관했다. 그렇기에 그의 명성이 얼마나 높든, 그가 글을 써서 남긴 내용이 후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든 그는 진실로 예수를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예수를 진실로 인식하지 않았고, 예수가 유일한 참하나님임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평범한 한 사람임을 인정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에게 진실로 순종하지 않았다. 그저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얻으며, 교회를 설립하는 등 자신이 직접 목양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인정받으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속내를 감찰하였기에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베드로는 묵묵히 일을 하면서 마음속에 늘 예수가 자신에게 한 말을 품고 있었다. 그는 예수의 요구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식하기를 추구했다. 그 기간에 그는 하나님의 질책과 책망, 훈계, 심지어 꾸짖음까지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어떻게 꾸짖었느냐?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마 16:23)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꾸짖는 말일 뿐 결말을 정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럼 바울이 사역할 때 하나님이 그를 꾸짖은 적이 있느냐? (없었습니다.) 먼저, 주관적인 요소에서 보면 하나님은 그를 꾸짖은 적이 없다. 이 밖에, 객관적인 요소에서 보면 그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거나 구하지 않았고, 구원의 도를 구하지도 않았기에 이러한 것을 받아들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한 사역은 그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힘을 쓰면서 큰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힘쓰는 자로 남겨 두겠지만, 큰 악행을 저지른다면 결말은 달라지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차이가 있었다. 한편, 베드로가 받아들인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질, 꾸짖음은 무척 많았다. 표면적으로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은 그를 좋아하지 않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을 보면 이런 자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고 기뻐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를 채찍질하고 훈계하여 그가 조금씩 성장하고 진리에 진입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마지막에는 진실한 순종과 변화를 이루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구원이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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