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순종해야 진실한 신심이 생긴다 (제 2 부)

사람의 관념에 가장 맞지 않는 일 하나를 교제해 보자.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다. 사람에게 40년은 반평생이다. 사람이 80세까지 산다고 하면, 인생의 반이 지난 것이다. 광야의 생활 환경이 어떠했겠느냐? 너무나 열악한 생존 환경으로 인해 마주치는 수많은 어려움 말고도, 더 중요한 문제는 그 40년 동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도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환경을 마련해서 그를 연단한 일이 사람의 관념에 맞느냐? 사람에게 진실한 믿음이 없다면 보통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처음 2년 정도는 그나마 열의가 있다. ‘하나님이 나를 검증하시는구나. 하나님이 계시니 두렵지 않아! 하나님이 나를 죽게 두지 않고 숨만 붙어 있게 해 주시면 살아남을 수 있어.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살자. 난 신심이 있어.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겠어!’ 이때는 곁에 양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양도 줄어들고, 온종일 그칠 줄 모르는 세찬 바람에, 인기척 하나 없는 깊은 밤이 찾아오면 사람은 외로워진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보이는 것이라곤 별과 달밖에 없다. 특히 흐리고 비가 와서 달조차 보이지 않으면 외로움은 더욱 커지고, 어느새 신심은 식어만 간다. 신심이 식어지면 원망과 오해의 마음이 고개를 든다. 곧 사람의 내적 상태는 가라앉기 시작하고, 갈수록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하나님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버린 것만 같아서 하나님의 존재에 의문이 생기고, 신심은 갈수록 작아진다. 진실한 믿음이 없으면 너는 시간의 검증, 환경의 검증을 이겨 내지 못한다. 하나님의 검증을 이겨 내지 못하면, 하나님은 너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 네게 나타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지를 보려 하고, 네게 진실한 믿음이 있는지를 보려 한다. 바로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 손안에 있지 않으냐? 모두 하나님 손안에 있고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네가 광야에 있든 달에 있든, 하나님 손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이 네게 나타나지 않는데 너는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주재를 볼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은 존재하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이 진리가 네 마음에 뿌리내려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하면 이 말씀을 네 생명, 네 삶의 동력, 네가 살아가는 신심과 힘으로 바꿀 수 있겠느냐? (기도해야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실행의 길이다. 네가 가장 힘들 때, 가장 하나님을 느낄 수 없을 때, 네가 가장 괴롭고 고독할 때,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 네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힘이 생긴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의 주재를 느낄 수 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고 네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네 곁에 있음을, 하나님이 너를 버리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이 너를 버리지 않았음을 느낄 때, 진실로 하나님이 네 곁에 있음을 느낄 때 네 신심이 증가하지 않겠느냐? 네게 진실한 신심이 있다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지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러면 신심에 관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느냐? 그저 성경을 붙잡고 글귀를 억지로 외우기만 한다고 진실한 신심이 생기느냐? 역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어떻게 보냈느냐? 그때는 성경도 없고, 곁에 있어 줄 사람도 없었다. 오직 양들만이 그와 함께했다. 모세는 분명 하나님이 이끌어 주었다. 비록 성경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인도했는지,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났는지, 그에게 말을 건넨 적이 있는지, 하나님이 그를 광야에서 40년을 살게 한 이유를 알려 주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을 거하면서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그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곁에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고 외로웠던 그가 어떻게 광야에서 40년을 살 수 있었느냐? 진실한 믿음이 없었다면 어느 누구도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것은 이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에게 그 일은 말이 안 된다. 사람의 관념 상상과는 너무나 맞지 않는다! 이것은 전설도 아니고 천일야화도 아닌, 확실히 존재하고 바꿀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느냐? 네가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을 가지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하나님은 너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한 가지 사실이다. 너에게 이런 진실한 신심이 있고, 하나님에 대해 이런 진실한 인식이 있다면, 네 신심은 충분히 크다. 어떤 환경을 마주하든, 그리고 그 환경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든 그것이 네 신심을 없앨 수는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을 사는 동안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게 진리를 공급한 적도 없었다.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 말씀이 담긴 책도 없었고, 곁에는 하나님 선민도, 마음을 털어놓을 이도 없었다. 혼자서 외롭게 보낸 광야에서의 생활, 오직 기도에만 의지한 삶 덕분에 모세는 결국 진실한 신심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 일을 했겠느냐? 하나님은 그에게 부탁이 있었고, 그를 크게 쓰려 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하려던 사역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단련했다. 그의 무엇을 단련했느냐? (신심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신심을 단련한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고자 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호의, 사람이 말하는 강건함, 사람이 말하는 능력과 재능, 그리고 혈기를 단련한 것이었다. 당시 모세가 애굽을 떠난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그가 혈기를 부려 애굽인 한 명을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를 쓸 수 있었겠느냐?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를 썼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는 애굽인을 미워해서 늘 혈기를 부리려 했다. 만약 또다시 살인을 저지른다면 그건 큰일이 아니냐?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라고 일을 시켰는데, 만약 바로 왕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그가 그 앞에서 혈기를 부린다면 큰일 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그렇게 행동해서야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할 것이다. 그의 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쓸 수 없었다. 혈기를 지닌다는 것은 사람에게 커다란 금기다. 혈기를 지니고, 늘 천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늘 사람의 방법으로만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면,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도 없고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너를 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설령 쓰더라도 성사는 고사하고 되려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애굽인을 때려죽인 다음 광야로 도피했을 때 하나님은 광야의 환경을 빌려 그의 의지와 혈기, 그의 호의, 열정, 의기, 그리고 민족의 이익을 지키고 민족을 위해 나서려는 영웅적 기개를 단련했다.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뜻, 혈기, 천성에 속한다. 하나님은 왜 몇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안배해 그와 함께 지내도록 하지 않았겠느냐?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했을 것이다. 그런 환경은 결국 모세를 어떤 사람으로 연단했느냐? 그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진실한 신심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혈기가 모두 단련되어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가 광야에서 나왔을 때도 혈기가 있고 영웅적 기개가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알 수 있느냐? (모세는 자신이 말을 잘 못한다고 했습니다.) 말도 잘 못하는데 자기 뜻이나 충동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 일을 보면, 하나님이 한 사람을 온전케 하고 한 사람의 신심을 온전케 하려는 것은 그 사람을 쓰고 안 쓰고와는 관계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은 바로 그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뜻을 깨닫고, 진실로 완전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불순물도 없고, 소위 사람의 영웅적 기개와 의기, 웅대한 포부도 없고, 혈기, 사람의 호의, 열정 등 소위 신념이라고 하는 것도 없다. 사람의 뜻에서 나온 그런 것들, 즉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소위 비교적 적극적이고 좋고 긍정적인 그런 것들은 누구나 추앙하고 추구하며, 그런 것에 기대어 살고자 한다. 그게 바로 사람의 신념이다. 그런 것이 없어지면 사람은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할 수 있고, 상상과 인위적인 호의에 기대어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게 된다. 또한, 사람이 다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성분은 늘어난다.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성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당신께서 이렇게 하시면 사람 관념에 맞지 않고, 저렇게 하시면 사람이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당신이 하신 그 말씀은 잘못되었습니다. 말투가 잘못되었습니다. 이것은 방식이 잘못되었고, 어휘 사용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조언이나 제안을 하겠느냐? 그런 것이 모두 단련되어 없어지면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께 조언이나 제안을 하지 않고 진실로 순종하게 된다. 또한, 이성적이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광야에서 40년간 단련되면서 모세는 하나님의 존재를 진실로 느꼈고, 사람이 혼자서는 결코 생존할 수 없는 환경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루 또 하루를 견뎌 내고, 일 년 또 일 년을 간절히 바랐는데, 결국 살아남았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보았다. 그것은 우연도 아니고, 전설도 아니다. 그 어떤 우연도 없었고, 그 어떤 돌발적인 요소도 없었다. 모두가 진실이다. 그는 하나님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이 진짜로 모든 것을 주재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한 사역이 일단 이런 효과에 이르면 사람의 마음에는 변화가 생긴다. 사람의 관념 상상이 사라지면 사람은 그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느끼고 자신을 내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때도 사람이 “주여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는 식으로 말하겠느냐? (아닙니다.) 그때가 되면 사람은 관념대로 말하며 하나님을 막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고, 사람 뜻에서 비롯된 일도, 자기를 내세우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살아야 하느냐? 사람이 살아 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주관적으로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게 된다. 객관적으로는 순리를 따르고 기다리며 하나님 뜻을 구하게 되며,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선택 없이 무조건 순종하게 된다.

당시에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나오도록 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런 일을 맡겼을 때, 모세는 어떻게 반응했느냐? (자신은 말주변이 없어서 말을 잘 못한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것만 우려했던 것이다. 그가 말주변이 없어 말을 잘 못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맡긴 일에 거부감을 가졌느냐? 그는 어떻게 대했느냐? 바로 엎드렸다. 엎드렸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순종하여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엎드렸다. 다른 선택도 없이 어려움이 있어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재빨리 움직였다. 모세는 어떻게 자기가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이 맡긴 일을 받아들일 수 있었느냐? 그의 마음속에 진실한 신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만사 만물을 어떻게 주재하는지 어느 정도 체험했고, 그 40년의 체험으로 하나님의 주재가 전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흔쾌히 하나님이 맡긴 일을 받아들이고 두말하지 않고 그 일을 하러 나섰던 것이다. ‘나섰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가 하나님을 진실로 믿었고, 진실로 의지했고,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두려움도, 선택도, 거절도 없다. 완전히 믿었기에 신심 가득 하나님이 맡긴 일을 가지고 행동에 옮기러 나섰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맡기시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뤄질 수 있어. 하나님이 내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오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하자.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니 하나님이 역사하실 거고 힘도 더해 주실 거야. 사람은 협력하기만 하면 돼.’라고 믿었다. 모세는 이런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탁한 일을 본인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있느냐? 절대 없다. 사람이 겁을 먹었다면 애굽의 바로를 만날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애굽의 바로는 마왕이고, 수중에 군대도 있어. 그의 말 한마디면 나를 죽일 수도 있는데, 내가 무슨 수로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온단 말인가? 애굽의 바로가 내 말을 들어줄까?’ 이것은 바로 거절하고 반발하고 거역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한 신심이 아니다. 당시의 환경은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에게 불리했다. 사람이 봤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간에 홍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홍해를 건너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모세가 그 일을 완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랐겠느냐?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자기는 말주변이 없어서 자기 말을 따를 사람이 없을 거라고만 했지 하나님이 맡긴 일을 거절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나오라고 했을 때 그는 엎드려 받아들였다. 왜 그런 어려움을 말하지 않았겠느냐?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그가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지, 애굽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이스라엘 백성이 당시 어떤 상황인지 몰랐겠느냐? 이런 일들을 꿰뚫어 보지 못했겠느냐? 그런 것이냐? 절대 아니다. 모세는 슬기와 지혜가 있었고, 평생 못 잊을 만큼 세상의 일들을 직접 겪고 체험했기에 이런 것들을 너무나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맡긴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가 몰랐겠느냐?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이 맡긴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느냐? 그에게 신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쌓은 경험으로 하나님의 전능을 믿었다. 그래서 아무 의심 없이 자신감 넘치게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어떤 일들을 체험했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의 체험 중에는 그가 매번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나 하나님과 가까워질 때마다 하나님이 항상 그를 이끌어 주고 인도하셨던 일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을 어기지 않으신 것을 보고 하나님께 진실한 신심을 가졌습니다.) 그것도 한 가지다. 또 있느냐? (40년의 광야 생활 속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주재를 확실히 목격했습니다. 그는 살아남았고, 잘 견뎌 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재를 진실로 믿게 되었습니다.) 또 있느냐? (하나님은 일찍부터 모세에게 많이 역사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일, 노아시대에 홍수로 세상을 멸하신 일, 아브라함에 관한 일 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쓴 모세오경에 그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그런 행사를 모두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전지(全智) 전능을 알았기에 그는 하나님이 그를 이끄는 이상 그 일을 반드시 완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행사를 보고자 했고, 하나님이 그를 빌려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그를 도와주고, 어떻게 그를 인도하시는지 보고자 했습니다. 그에게는 그런 신심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광야에서 40년을 체험한 모세가 하나님께는 이루지 못할 일이 없고 사람은 하나님 손안에 있음을 느낄 수 있지 않았겠느냐? 넘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는 그의 가장 진실한 체험이다. 그는 광야에서 40년을 살면서 생명에 위협이 되는 일을 너무 많이 겪었다. 자신이 계속 살 수 있을지 몰라 그저 매일 살길을 찾으며 하나님의 보호를 구했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그 40년 동안 그는 하나님의 주재와 보호를 아주 깊이 느꼈다. 그래서 후에 하나님이 맡긴 일을 받아들일 때 그의 첫 느낌은 분명 이랬을 것이다. ‘하나님께는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셔. 하나님이 이룰 수 있다고 하신 일은 분명 이뤄져. 하나님이 이런 일을 맡겨 주신 이상 분명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실 거야.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거야.’ 사람이 무슨 일을 하려 할 때는 미리 계획하고 대비하며 사전 준비를 잘해야 한다. 하나님이 일할 때도 이런 게 필요하겠느냐? 하나님은 필요하지 않다. 모든 피조물은 얼마나 큰 세력을 가졌든, 얼마나 대단한 재주와 능력을 갖췄든, 얼마나 난폭하든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모세는 그러한 신심과 인식, 체험이 있었기에 마음속에 아무 의심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심은 몹시 진실하고 순수했다. 신심이 넘쳤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진실한 믿음이란 무엇인지 얘기했다. 너희가 말해 보거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사람의 신념이냐, 아니면 사람의 진실한 믿음이냐? (사람의 진실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사람의 진실한 믿음이다. 진실한 믿음이란 무엇이냐?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진실한 신심이다. 진실한 신심이 실제로 나타나는 상황은 어떤 것이냐? 현실 생활에서 사람이 하는 모든 활동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고 정하신다고 믿습니다. 사람이 만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하나님에게는 못 이룰 일이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든 다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더 생각해 보아라. 진실한 신심을 갖춘 모습은 또 어떻게 나타나느냐? (모세의 신심은 일반 신자와는 달랐습니다. 창세기를 쓸 때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었고,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이루어지고, 명령하시면 견고히 선다고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이루어지고 응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 방면에서 하나님께 진실한 신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믿는 그 정도 신심에만 그치지 않고, 천지 만물을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믿었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이룬다고 절대적으로 믿었고, 하나님의 전능함을 믿었습니다. 그런 신심이 없었다면 그는 창세기를 써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말씀들은 성령의 계시나 묵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사람이 믿기 때문에 있는 사실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떤 것이냐? (사람이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신심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기초 위에 세워진다. 하나님은 네가 입으로 인정하면 존재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네가 믿거나 말거나, 인정하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나님은 영원히 창조주이고, 영원히 모든 것을 주재한다. 왜 사람에게 이런 인식을 심어 주려 하느냐? 그것이 사람의 무엇을 바꿀 수 있느냐? 어떤 이들은 말한다. “우리가 당신을 믿으니까 당신이 하나님이신 겁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슨 소리냐? 황당한 소리다. 하나님은 “네가 믿지 않아도 나는 하나님이다. 네 운명도 내가 주재하고, 너는 그걸 바꿀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신론자가 아무리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해도 그의 운명 역시 하나님의 주재 아래 있고, 역시 하나님의 징벌에서 도망칠 수 없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하나님 말씀은 네 생활 방식, 인생의 목표와 추구 방향을 바꾸고, 네가 선택하는 길을 바꾸고, 네 인생의 의의를 바꿀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고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것을 믿지만, 정작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는 순종하지 않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안배가 각기 다르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그는 늘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추구하며 큰일을 하려고 한다. 결국 번번이 벽에 부딪혀 크게 실패하고 나서야 고개를 숙인다. 그가 만약 정말로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다면 그렇게 했겠느냐? 그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우선 하나님 뜻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와서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사탄 권세에서 벗어나 인생의 바른길을 걸으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 뜻을 깨달았다면 그는 하나님 요구에 따라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인식하기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늘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추구하다 결국에는 실패로 끝난다. 그때야 비로소 속에 있는 말을 내뱉는다. “이건 운명이야. 하나님이 정하신 일은 누구도 바꿀 수 없구나!” 그때 그가 또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모든 것이 하나님 손안에 있음을 믿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전과는 다르지 않겠느냐? 전에 얘기했던 도리보다 훨씬 실제적일 것이다. 예전에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그저 입으로만 인정하고 믿었다. 그러나 막상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진리를 실행하지도 못한다. 속으로는 여전히 스스로를 의지하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가 속으로 믿는 하나님 말씀과 입으로 내뱉는 도리는 그의 행동 원칙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그가 하나님 말씀은 모두 진리이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는 순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가 깨달은 것은 진리 실제가 아니라 도리나 글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입으로는 하나님의 주재를 믿는다고 하면서 실생활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다. 늘 자신의 길만 고집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추구하려 하면서 하나님 요구를 거스른다. 이것이 진실한 순종이냐? 여기에 진실한 신뢰, 진실한 신심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도 없으니 너무나 가련하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신심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그는 최소한 하나님 말씀이 진리이고 그것은 모두 응하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 요구대로 실행하는 것이 인생의 바른길임을 믿는다. 또한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고, 언제나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며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살아 낸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주재를 믿을 뿐만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구하고 이에 순종한다. 자신에게 패역이 있으면 스스로를 반성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여 하나님께 순종한다. 이렇게 실행하면 네가 믿고 인정하는 진리는 너의 생명 실제가 되어 너의 생각, 생활, 네 모든 인생의 길과 방향을 주도하게 된다. 그럴 때 너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신심이 생긴다. 네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진정으로 순종해서 생겨난 진실한 신심, 그런 신심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다. 그렇다면 이 진실한 믿음은 어떻게 얻는 것이냐?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여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얻는 것이다.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심이 더욱 커지고, 하나님을 인식할수록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게 된다. 진실한 믿음은 이렇게 얻는 것이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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