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한다 (제 2 부)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하고, 어떤 이들은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데도 어째서 진리 실행을 어렵게 느끼는 것이겠느냐? 어째서 이미 깨달은 진리조차 실행해 내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이것이 대체 어찌된 일이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냐?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실행해 내지 못하느냐? (진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사람의 본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인성과도 관계가 있고, 사람의 본성과도 관계가 있다. 인성이 없는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없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가 쓸모없다고 여기고, 진리를 실행하면 손해를 보며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것은 바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누가 그에게 밉보이면 속으로 ‘그에게 복수할 거야.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에게 보여 주겠어’라고 생각한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 반드시 그렇게 하겠느냐? 악한 생각을 품는 것은 사람의 본성에 지배된 것이지만, 그런 악한 생각이 나올 때 모든 사람이 악한 생각에 따라 행동하고 자신의 악한 생각을 순순히 따를 수 있겠느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몇 가지 상황이 있겠느냐? (때로는 환경이 허락하지 않아서 자신의 악한 생각대로 할 수 없기도 하고, 때로는 그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어서 그 생각이 악하다는 것을 알고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어떤 이들은 마음속 악한 생각을 따르고, 기회만 있으면 악을 저지른 후 만족해하는데, 이들이 바로 악인이다. 악인은 마음속으로 어떤 악한 생각을 품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의 악한 생각을 실현할 기회를 찾으려 한다. 그의 악한 생각을 자기 행동으로 변화시키고, 악을 마음속 생각에서 실제 행동으로 전환해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그는 이성이 없고 자제하지 않으며, 양심으로 구속하지도 않는다. 또한 자신을 반성하지도 않고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적당한지 적당하지 않은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자신과 타인에게 어떤 영향이나 피해를 미칠지 등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데다가, ‘배짱이 없으면 장부가 아니지. 사람은 악하고 독해야 해. 독하지 않으면 아무에게나 괴롭힘 당할 수 있어. 누구나 악인을 두려워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생각할수록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고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면 그의 행동이 이성과 양심의 구속을 받는 것이겠느냐?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 구속을 받지 않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와 동시에 물건을 내던져 화풀이를 할 수도 있지만, 정말로 그에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하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째서 하지 않는 것이겠느냐? (그의 양심과 이성이 그의 악행을 단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양심과 이성,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그렇게 판별할 줄 안다. ‘내가 이렇게 해선 안 돼. 이렇게 하면 남을 해치고 나 자신도 손해를 입을 거야. 이렇게 하면 응보를 받지 않겠어?’ 그는 이런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선한지 악한지 판별할 수 있다. 그는 한바탕 화를 내고 난 뒤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해야지. 됐어. 앞으로 그와 왕래하지 않으면 돼. 교훈을 얻었으니 앞으로는 속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복수할 필요도 없어.’라고 생각하며 참는다. 이 ‘참는다’는 어떤 기반 위에서 생겨난 것이냐? 양심과 이성,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 사람으로서의 마지노선, 그의 선택과 방향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의 방향이 무엇이냐?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 악한 일을 하지 말자는 생각에 그는 결국 참는 것을 택하고 그 일을 하지 않는다. 비록 그도 화가 나서 홧김에 독한 방법을 생각해 내고 모진 말을 몇 마디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에게 하라고 하면 그는 손을 놓고 걸음을 멈추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의 악이 그의 생각 범위 내에서 통제되고 행동이나 사실로 바뀌지 않는다. 똑같이 악한 생각이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은 조금 전에 말한, 악한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과 본성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느냐? (이런 사람의 본성은 선한 것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그는 악한 마음에 통제당하지 않습니다.) 이 두 부류 사람은 본성에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남들이 그를 폭로하고 질책하거나 책망하고 훈계하면 마음속에 원한이 가득 차서 불복하고 불만을 표출하며 보복하는 태도를 보인다. 반면 어떤 사람은 올바르고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말이 옳으면 받아들이고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 두 부류의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양심이 있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째서 그런 사람이 양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겠느냐? (그의 양심이 작용하여 자신의 악한 마음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바로 그런 것이다. 그는 양심이 작용하여 그의 사상을 통제하고 인도하고 소통할 수 있다. 그에게는 양심의 작용이 존재한다. 다른 부류의 사람에게도 양심의 작용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고, 작용할 수 없으며, 그저 가끔 생각은 하지만 조금 지나면 역시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의 양심은 장식품일 뿐이므로, 그에게는 양심이 없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 어떤 부류가 상대적으로 인성을 가졌느냐? (양심과 이성이 작용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양심이 작용할 수 있는 사람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고, 자신의 악행을 통제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네가 그에게 착한 일을 시키고 진리 원칙에 따라 일 처리하게 하지만, 그의 양심이 작용하지 못하므로 옳은 일임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길 좋아한다. 시비를 논하고 사람을 판단하며 사람에게 아부하고 알랑거리는 일을 하고 싶어 하고 또 아무 생각 없이 그 일을 한다. 너희는 어떤 부류이냐? (저는 자신이 무골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골호인은 양심과 이성에 구속받느냐? 옳고 그름을 구별할 능력이 있느냐? (저는 무골호인도 사실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알고 있지만, 정의감이 부족하고 교회의 사역을 지키지 않으며 사탄의 철학이 비교적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제게 한 가지 일에 대해 물었을 때 당사자가 그 자리에 없다면 저도 사실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가 그 자리에 있으면 저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여지를 두고 말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추구하지 않지만 자신의 갖가지 내적 상태에 대해 사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지금 너는 자신이 진리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우선 차치하고,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패괴 성품을 차츰 개선시키고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면 천천히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 너는 먼저 자각하고 있는 일에서부터 변화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양심과 이성으로 느낄 수 있고 사상으로 인식하거나 판별할 수 있는 잘못된 내적 상태와 말, 마음, 생각, 관점 등, 인식할 수 있는 이런 측면에서 먼저 바뀌기 시작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변화에 도달할 수 있다면 너는 적잖은 수확을 거둘 것이고, 적어도 너는 양심과 이성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다. 너는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자신의 잘못된 내적 상태를 분별할 줄 알며, 진리에 있어서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도록 노력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면 일 처리에 원칙이 생기고,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의 본분 이행은 합격점에 이를 수 있다. 네가 진리를 깨닫고 자신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한다면, 네 어려움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말을 할 때 마음속에서 계속 가로막고 있는 무언가가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을 보아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항상 듣기 좋은 말로 빙빙 돌려서 말하고, 남에게 상처를 줄까 봐 걱정하고, 체면과 감정, 인간관계를 고려했지만, 이제는 말을 에두르지 않고 일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지적하고 자기 책임을 다할 수 있으며, 네 마음속에 주저함이나 어려움이 없게 될 것이다. 또 속마음을 직접적으로 털어놓고 자연스럽게 말하며 다른 요인의 통제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원칙에 따라 일하고 처세 철학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되며 체면을 내려놓고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일들이 점점 분명해지면 체면이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을 것이고, 말할 때도 감정이나 체면에 통제당하지 않고 바른 말을 할 수 있으며 마음도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너를 교란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줄어들어, 너는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고 내려놓을 수 있고 그것들의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있다. 네가 진리를 실행할 때, 또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말할 때, 패괴 성품에 통제당하지 않고 마음이 고통스럽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양심이 평안하다고 느끼고,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표정과 동작이 자연스럽고 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변화가 아니겠느냐?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처신해야 한다. 이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사람됨의 원칙을 알지 못하면서 무슨 진리 실행을 운운하겠느냐? 진리 실행은 빈말을 하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다. 삶 속에서 어떤 일을 만나든, 그것이 사람됨의 원칙이나 일을 바라보는 관점, 본분 이행과 관련되는 문제라면 선택을 하게 된다. 이때, 진리를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근거와 원칙을 찾은 다음 실행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렇게 진리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길,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는 어떤 원칙을 지켜야겠느냐? 원래 네 관점은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는 것이 훌륭한 처세법이라는 것이다. 남들과 두루두루 어울리면서 타인의 체면을 해치지 않고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으면 나중에 함께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는 이런 관점에 얽매여 누가 나쁜 일을 하거나 원칙을 위배하는 것을 보아도 침묵을 지키고, 남에게 미움을 사느니 차라리 교회의 사역이 손해를 입는 편을 택하며, 누구와 지내든 두루두루 어울리고, 말할 때도 인지상정과 체면을 고려해 항상 듣기 좋은 말로 상대를 기분 좋게 했다. 설령 어떤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을 보아도 참는 쪽을 택하고, 뒤에서 말할 뿐 그를 만났을 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처신이 어떠하냐? 이는 무골호인이 아니냐? 너무 교활하지 않으냐? 이는 사람됨의 원칙에 어긋난 것이다. 이런 식의 처신이 비천하지 않으냐? 이런 자는 좋은 사람이 아니며, 이런 처신은 귀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든, 사람답게 처신하는 측면에서 원칙이 없다면 너는 사람됨에 있어 실패한 것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 인정받지도, 기억되지도, 열납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 이 문제를 발견한 후에 네 마음이 괴로우냐? (괴로울 것입니다.) 괴롭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네가 여전히 진리를 좋아한다는 증거다. 네게 진리를 좋아하는 마음과 진리를 좋아하려는 의지가 있고, 네 양심은 여전히 지각이 있고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네 패괴가 아무리 깊고 패괴 성품이 아무리 많아도, 네 인성 속에는 여전히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본질이 있다. 네게 지각이 있다면 자신이 인성, 성품, 본분 이행, 하나님을 대하는 이런 측면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관점, 입장, 태도와 관련된 말과 행동을 할 때 언제나 지각이 있어서, 자신의 관점이 옳지 않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포기하기가 쉽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고 싶어도 실행해 낼 수 없으면, 마음속으로 발버둥치고 괴로워하고 고통받고 가책을 느낀다. 이것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인성이 겉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심의 지각이다. 인성 속에 양심의 지각이 있고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성분이 있으면, 너는 이런 느낌이 들 것이다. 이런 느낌이 든다는 것은 네가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대할 때 판별 능력이 있다는 증거다. 너는 이런 것들을 대할 때 경시하거나 냉담한 태도로 대하지 않고 무감각하지 않으며, 지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각이 있는 사람이다. 네게 지각이 있다면, 옳고 그름,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다. 네게 지각과 판별 능력이 있으면 이런 부정적인 사물과 옳지 않은 관점, 패괴 성품을 증오하기가 쉽지 않겠느냐? 비교적 쉽다. 진리를 깨달으면 부정적인 사물과 육에 속하는 것을 증오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최소한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갖추고 있고, 양심의 지각이 있기 때문이다. 양심의 지각은 매우 귀중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은 매우 귀중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정의감은 매우 귀중하다. 이것은 정상적인 인성 가운데 가장 배울 만하고 귀중한 세 가지다. 네가 이 세 가지를 갖추면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고, 한 가지나 두 가지만 갖춰도 일부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다. 양심의 지각과 관련해서 예를 들어 보자. 악인이 교회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할 때 너는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느냐? 명백한 악행을 네가 알아챌 수 있느냐? 분명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악한 사람은 나쁜 짓을 하고 선한 사람은 좋은 일을 한다. 이것은 일반인들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만약 네게 양심의 지각이 있다면, 네 속에 느낌과 견해가 있지 않겠느냐? 느낌과 견해가 있다면 그것은 진리 실행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것이다. 너는 그것이 악행임을 알아채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분별해 낸 뒤에 그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선민들이 그 일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한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 이것이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느냐? 여기서 어떤 방법으로 진리를 실행했느냐? (들춰내고 고발하고 제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렇게 하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너는 네 책임을 다한 것이다. 그런 일이 닥쳤을 때 네가 깨달은 진리 원칙에 따라 행동하면 그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일 처리에 원칙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게 양심의 지각이 없다면 악인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고 네가 지각할 수 있겠느냐? (지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각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가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그에게 미움을 사서 뭣 해? 그럴 필요가 있겠어?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겠어?’ 이런 사람들이 악인의 악행을 들춰내고 고발하고 제지하겠느냐? 절대로 그럴 리 없다. 그는 진리를 깨달아도 실행해 낼 수 없다. 이런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겠느냐? 그에게는 양심도 이성도 없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겠느냐? 그가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양심과 이성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다. 그는 자기 이익이 침해받지 않도록 지키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의 사역이 피해를 입든 말든, 하나님 선민의 이익이 손해를 입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 문제를 발견해도 내버려두고 상관하지 않고, 남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아도 못 본 척하며, 그의 이익만 해치지 않으면 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그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다. 그는 책임감이 전혀 없고, 양심이 작용하지 못한다. 이런 모습으로 볼 때, 그에게 인성이 있는 것이겠느냐?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인성이 없는 사람이고,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모두 악인이자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라서 어떤 나쁜 짓도 다 저지를 수 있다.
양심의 지각이 없는 이런 사람들이 선행과 악한 일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옳고 그름에 대한 의식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이 패괴된 인류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는 모든 인류가 아주 나빠서 그는 가장 나쁜 사람이 아니며 대다수가 그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그에게 사람에게는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하고 선행을 예비해야 한다고 하면, 그는 그것이 모두 사람을 속이는 말이니 믿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의 지각이 없는 이런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진리 실행의 가치와 의의를 결코 인식할 수 없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진리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의 본성 본질 속에 진리를 좋아하는 성분이 없기 때문에 진리를 좋아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영원히 알 수 없고, 그의 마음속에는 긍정적인 사물이 부정적인 것이고, 부정적인 사물이 긍정적인 것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똑같이 취급한다. 그가 일을 처리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옳고 그름,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응보든 상을 내리는 일이든, 또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든 그저 자신에게 이롭기만 하면 된다. 그의 관점은 환경에 따라 변하고, 자신에게 어떻게 이로운지에 따라 변하며, 또 자기 소망과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자신에게 유리한 관점을 고수한다. 이런 인성과 본성 본질로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실행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실행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느냐? (양심의 지각과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능력, 정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너희는 어떤 것을 갖췄느냐? 이 세 가지 가운데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과 정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것, 이 두 가지는 도달하기가 조금 힘들 수 있다.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도달하기가 몹시 어렵다. 하지만 양심과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최소한 양심과 이성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하고, 적어도 남을 해치지 않으며,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기 이익을 꾀하는 일은 없어야 하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양심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양심이 평안함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무슨 일을 하든 양심과 이성에 부합해야 한다. 이것이 좋은 사람의 기준이다. 자질을 조금 갖추고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면 더 좋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진리를 구해서 자신이 원칙을 위배하지 않았는지 항상 반성할 수 있다. 네 마음속 깊은 곳에 판단 기준이 있느냐? 잘못을 저지르고 원칙을 위배하고 무성의하게 대하고 육적인 관계를 지켰을 때 너 스스로 지각이 있느냐? 지각이 있다면 너에게 약간의 양심이 있는 것이고, 양심의 지각이 없다면 그건 큰일이다. 적어도 양심의 지각이 있어야 구원받을 희망이 있고, 양심의 지각조차 없으면 너희는 위험하다. 하나님은 인성이 없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양심의 지각이 인성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겠느냐? 네가 직접 경험한 것,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 네가 마음속으로 하고자 하고, 하려고 계획한 것, 또 이미 한 것들은 모두 양심에 따라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 또한 네 됨됨이와 행동에 최소한의 마지노선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열심히 추구하면서도 순하고 조용한 사람을 보면 너는 무시하는 마음이 든다. 그를 괴롭히고 싶고 말로써 공격하고 조롱하고 싶은 마음을 늘 가지고 있어서 가끔씩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네 마음속에 지각이 있느냐, 없느냐? 네 그런 생각과 행동이 잘못됐고 추하다는 것을 알겠느냐?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성질인지 인식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인식할 수 있다면 양심의 지각이 있는 것이다. 너 자신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관점이 추한지 아름다운지도 분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판단 기준이 없다면, 그것은 인성이 없는 것이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인성이 없다. 최소한의 인성조차 알지 못하면 너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이 어째서 유다에게 주님을 팔아넘기는 역할을 안배했겠느냐? 그의 본성에 따라 안배한 것이다. 유다는 주님을 팔아 자신의 영달을 얻은 자이고, 하나님은 그런 자를 구원하지 않는다. 그가 돈을 훔칠 수 있다면 그에게 양심이 있는 것이냐? (없습니다.) 그것은 양심이 없는 것이다. 특히 그는 감히 주님의 돈을 훔쳤으므로 양심과 이성이 없는 자이며 마귀다. 그는 나쁜 짓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았다. 그는 양심의 지각이 없고 구속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물을 훔쳐 쓸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제물을 훔쳐 쓸 수 있다면 이것이 어떤 인성이겠느냐? (악인입니다.) 인성이 없는 것이다. 인성이 없다는 첫 번째 표시가 바로 양심의 지각이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양심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는 이런 최소한의 것도 갖추지 못했는데, 이는 바로 인성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그런 일을 하는 것도 정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에게 주를 팔아넘기는 역할을 안배한 것이다. 그에게는 이런 일에 힘을 쓰게 한 것이 가장 어울리고 이것은 결코 재료를 낭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일은 모두 옳다. 유다가 돈주머니에 든 돈을 훔쳤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자 그는 하나님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양심에 지각이 없었고,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결과를 맞이했느냐? 결국 주를 팔아넘기고 배신하는 크나큰 죄를 짓고 천고의 죄인이 되어 목을 매 자살하고 배가 터져 죽었다. 이런 사람을 애석하다고 할 수 있느냐? 인성이 없는 짐승이 이런 징벌을 받은 것은 조금도 애석하지 않다.
인성이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양심과 이성에 따라 처리한다. 그의 사람됨의 마지노선은 최소한 양심의 기준보다 낮지 않다. 스스로 잘못된 일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자기 행동을 스스로 단속한다. 양심은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알려 주기 때문에 양심 있는 사람은 모두 양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게 된 뒤에도 양심이 계속 작용하기 때문에 자신이 간파하지 못하는 많은 일을 적어도 양심에 따라 대하고 처리해야 한다. 이런 기초 위에서 진리를 깨닫게 되면 진리 원칙에 따라 대하게 되고, 과연 진리 원칙에 적합한지에 대해 양심도 지각할 수 있고 작용할 수 있다. 원칙에 위배되고 육적인 이익을 보호한다면 이것은 패괴 성품에 지배된 것이다. 양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지각도 있다. 만약 진리를 깨닫고도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양심의 참소가 있지 않겠느냐? 마음이 평안하겠느냐? 사람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너희가 평소에 일상 생활에서 사람을 대할 때든 일을 할 때든 양심의 지각이 뚜렷하게 나타나느냐? 때로는 가책을 느끼거나 꾸짖음을 당하는 것 같고, 때로는 마음이 불안하거나 참소를 받는 것 같고, 또 때로는 마음이 고통스럽고 발버둥치는 것 같지 않으냐? 너희에게 이런 느낌이 있느냐? 만약 그런 느낌이 든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다면 너희는 매우 위험하다. 누구든 양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거짓으로 믿는 것과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너희가 말해 보아라. (양심의 지각을 가진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가 느낀 꾸짖음, 괴로움, 참회, 가책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꾸짖음을 느낄 수 있다면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지각이 전혀 없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믿지 않고, 잘못을 저질러도 가책이 없으며 이런 지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또 어떤 점이 있느냐? (양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잘못을 저지르면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반성하고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줄 압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일이 닥쳐도 양심이 작용하지 않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전혀 없기 때문에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진리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불신파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일이 닥쳐도 우선은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양심 속에서 옳고 그름, 좋고 나쁨에 대한 지각이 생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는 그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 말씀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기 때문에 처세할 때나 모든 일을 할 때 마음속에 판단 기준이 있다는 점이다. 이 기준이 무엇이겠느냐? 그가 진리를 알든 모르든 간에 그는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삼을 때가 더 많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으면, 그는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당연히 하나님 말씀으로 판단하고, 최소한 자신의 사상과 관념이 모두 진리가 아님을 안다. 그러므로 일이 닥치면 그의 양심의 지각이 그에게 하나님 말씀에 따라 행해야 한다고 일러 준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실행하지 못하면 그는 양심이 평안하지 못하고 고통스럽다. 예를 들어, 사람과의 육적인 관계를 지키는 일, 안일함을 탐하는 일, 무골호인으로 사는 일 등이 부정적인 사물임을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 속에 폭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판단하면 그것들은 모두 부정적인 사물이고, 사람의 패괴 성품이 드러난 것이며, 모두 사람의 본성이 초래한 것이다. 그가 이런 것들을 드러낼 때 그의 마음이 기쁘고 통쾌하겠느냐, 괴롭고 고통스럽겠느냐? 그의 마음이 칼에 찔린 듯한 괴로움에 발버둥칠 것이다. 매번 이런 일이 닥칠 때마다 그는 진리 원칙에 따라 처리하지 못하고, 감정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해 마음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런 고통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이냐? 이것은 양심의 지각이 있다는 전제하에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깨달은 뒤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는 이런 고통, 꾸짖음, 참소를 느끼고, 마음속 깊이 자신을 증오하고 역겨워하고, 심지어 자신을 경멸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란 사람은 입으로는 그럴싸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족게 하겠다고 우렁차게 구호를 외쳤지만, 정작 일이 닥치자 자기 체면만 고려했구나. 몇 번이나 시도해도 이런 속박을 깨뜨리지 못했어. 사람에게 미움을 사기 싫어한 결과 항상 하나님께 미움을 사고 말았어.” 오랜 시간이 흐르면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자신에 대한 견해가 생기게 된다. 어떤 견해이겠느냐?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도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자신도 위장에 능하고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자신을 부인하기 시작하고 다시는 자신을 믿지 않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효과에 도달한 것이냐? 하나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양심에 지각이 생기고 양심이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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