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파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제 1 부)

지난번 예배 때는 합격한 본분 이행에 관해 이야기했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네 가지 기본 조건 중 첫 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항목이다. 지난번에는 본분 이행의 정의와 여러 원칙에 관해 교제했고, 몇 가지 예를 들어 불합격한 본분 이행의 갖가지 양상에 관해 교제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선민들에게 이런 문제를 전부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실과 이런 본분 이행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등을 분명히 알려 주었다. 이런 것에 관한 교제를 마친 후, 사람은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합격점에 이를 수 있는지, 본분을 이행할 때는 어떤 점에 주의해야 하고, 어떤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지, 어떤 일을 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멸망에 이르는지 대체로 이해하게 되었다. 어떻게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지에 대한 교제를 통해 이 측면의 진리에 관해 개념적으로 어느 정도 기초적인 이해와 인식이 생겼느냐? 각 항목의 본분을 이행할 때 너희는 각 부류 사람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어떤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 이런 구체적인 내용들이 분명히 이해되었느냐? (아직 분명히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합격한 본분 이행이란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분류해서 교제할 필요가 있겠구나.

하나님 집의 사역은 크게 몇 가지로 나뉜다. 하나님 집의 모든 사역 가운데서 제일선에 있는 사역은 복음 전파 사역이다. 이 사역은 관련된 인원이 많고, 관련 범위 또한 무척 넓으며, 사역량도 방대하다. 이는 첫 번째 사역이자 교회의 전체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하나님의 경륜 중 복음 확장 사역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역이니 반드시 첫 번째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그럼 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의 직명은 무엇이겠느냐? ‘복음 전파자’이다. 두 번째, 교회의 내부 사역 중 가장 중요한 본분은 무엇이겠느냐? (리더 일꾼입니다.) 그렇다. 교회의 각급 리더 일꾼으로, 각 팀의 책임자와 팀장도 포함된다. 이 본분이 가장 중요하다. 그들이 맡고 있는 업무는 전부 중요한 사역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부류이다. 세 번째, 복음 확장 사역 중 어떤 본분이 비교적 중요한 사역이겠느냐? (특수 본분들입니다.) 그렇다. 글쓰기, 번역, 뮤직, 촬영, 디자인, 외부 업무 등 각종 특수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들이다. 이것이 세 번째 부류이다. 네 번째는 주로 평범한 본분 이행으로, 접대, 요리, 물품 구매 등 후방 업무 사역에 속하는 본분이다. 이 본분은 너무 구체적으로 세분화할 필요는 없다. 다섯 번째 부류는 가정 환경이나 건강 상태 등의 이유로 시간이 날 때만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도 힘닿는 데까지 본분을 이행하는 부류에 속한다. 이것이 다섯 번째 부류이다. 이 외에,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섯 번째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본분 이행과 관계가 없는데, 왜 한 부류로 구분했겠느냐? 그들 또한 교회의 인원이라고 할 수 있기에 마지막 부류로 나열한 것이다. 그들이 설교를 많이 듣고 진리를 깨달아 자발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겠다고 요청할 경우,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한, 또 자질이 너무 떨어지지 않고 악인이 아니어서 교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한 본분을 이행하도록 허락해서 회개의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방금 총 여섯 부류에 관해 이야기했다. 교회의 인원은 기본적으로 다 여기에 속한다. 나머지는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량이 작고 진리에 대한 이해가 너무 얕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어떤 사람은 자질이 좀 있다고 할지라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원칙을 모르니 어떤 본분도 이행할 수 없다. 그들이 2~3년쯤 믿어 본분을 이행하게 되면 각 부류의 본분 이행 인원으로 구분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 이 여섯 부류에 관해 분명히 구분했다. 첫 번째, 복음 전파자. 두 번째, 교회의 각급 리더 일꾼. 세 번째, 특수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 네 번째, 평범한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 다섯 번째, 시간 날 때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 여섯 번째,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인원. 몇 가지 유형을 나열한 이 순서는 어떤 원칙에 근거한 것이겠느냐? 사역의 성질과 사역에 필요한 시간, 사역량, 그리고 책임지는 사역의 중요성을 근거로 구분한 것이다. 예전에 본분 이행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기본적으로 본분 이행과 관련된 다양한 측면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하는 진리 원칙에 따라 교제했을 뿐 분류를 나누지는 않았다. 각 부류 사람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어떤 진리에 진입하는 데 집중해야 하는지 등에 관해서도 세부적으로 교제하지 않았다. 이제 이 측면의 진리를 완벽히 교제하고, 유형별로 하나하나 이야기하겠다. 그러면 분명해질 것이다.

먼저 복음 전파자가 깨달아야 할 진리에 관해 교제하겠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깨닫고 갖춰야 할 최소한의 진리는 무엇이냐? 어떻게 해야 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너는 반드시 복음 전파와 관련된 이상(異象) 측면의 진리를 갖추어야 하며, 복음 전파의 원칙을 파악해야 한다. 복음 전파의 원칙을 파악한 후에는 어떤 진리를 갖추어야 사람의 관념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분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에게 전해도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하면 안 되는지 먼저 이 원칙을 이해해야 한다. 전해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전한다면 헛수고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환을 불러일으키기가 쉽다. 이는 반드시 이해해야 할 부분이다. 이 밖에, 전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해도 네가 한두 마디 말이나 고명한 도리를 좀 말한다고 해서 바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쉽지는 않다. 어쩌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다가 인내심이 바닥나서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을 포기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랑과 인내입니다.) 사랑과 인내를 지녀야 한다. 사랑이 전혀 없다면 인내심도 없을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는 이상 측면의 진리를 깨닫는 것 외에도 크나큰 사랑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야 복음 전파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 복음 전파의 본분을 어떻게 정의해야겠느냐? 어떻게 바라보아야겠느냐? 복음 전파자는 다른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과 어떤 다른 점이 있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말세 사역과 하나님이 왔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혹자는 그들을 ‘복음 사자’, ‘보냄을 받은 자’, ‘강림한 천사’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정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 복음 전파자의 사명은 무엇이냐?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이미지냐? 어떤 역할을 하느냐? (전도자입니다.) 전도자, 사자, 그리고 또 뭐가 있느냐? (증인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정의한다. 그럼 이런 정의가 정확하겠느냐? 흔히들 ‘전도자’, ‘증인’, ‘복음 사자’ 등 비교적 고상한 말을 쓰는데, 이 세 가지는 자주 들리는 단어이다. 사람이 이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의 직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하든 ‘복음’이라는 두 글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럼 이 세 가지 말 중 어떤 것이 이 측면의 본분과 그나마 관계가 있고 적절하며 이성적인 호칭이겠느냐? (전도자입니다.) 많은 사람이 ‘전도자’라는 호칭이 비교적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증인’이라는 호칭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느냐? (있습니다.) ‘복음 사자’라는 호칭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느냐? (없습니다.) 복음 사자라는 호칭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먼저 ‘전도자’라는 호칭이 적절한지 이야기해 보자. ‘전(傳)’이란 전하고 전파하고 전달하고 선전한다는 의미이다. ‘도(道)’는 무슨 의미이냐? (참도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말하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도’란 하나님이 사역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그 참도를 의미한다. 먼저 전도자에 관해서는 이렇게 해석하고 정의하겠다. 이제 ‘증인’이라는 호칭에 대해 말해 보자. 증인이 증거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세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증거한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호칭은 상대적으로 적절해 보인다. 복음 사자는 어떠하냐? ‘복음’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나님이 사역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돌아왔다는 이 좋은 소식, 희소식을 말한다. ‘사자’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사자’라는 두 글자를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일 것이다. 즉, 하나님이 친히 사람을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거나 하나님이 어떤 시기에 어떤 사람을 보내 하나님의 말씀이나 중요한 소식을 전하게 할 때 그 사람을 가리켜 사자라고 한다. 그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모두 이런 역할을 수행하겠느냐? 이런 사역을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들이 하는 것은 어떤 사역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그 사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증거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 사명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그것은 피조물의 본분입니다.) 이는 사람의 본분이다. 하나님이 일찍이 너에게 하나님의 새 사역과 복음을 전파하라고 분부하고 알려 주고 부탁했든 그렇지 않든 네게는 이 복음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전하고 전파하여 그들이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으로 오고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게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는 사람의 본분이자 직책일 뿐, 하나님이 파견했다거나 보냈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므로 ‘사자’라는 단어를 여기에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럼 이 단어를 쓰는 것은 어떤 성질을 갖겠느냐? 거짓되고 거창하고 공허한 성질을 갖는다. ‘사자’라는 단어는 너무 거창하고 부적절하다. 구약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사자’라는 역할은 없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전체 경륜 사역 기간에 그런 역할은 없었다는 뜻이다.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사자’라는 호칭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그런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류 가운데 이런 역할은 없고, 이 두 글자와 연관되거나 상관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사자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는 이 크고 방대한 사역과 그리 큰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세 단계 사역에 사자라는 역할은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을 언급하지 마라. 그 말은 유치하다. 사람이 ‘복음 사자’라는 호칭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한다. 사람은 피와 살로 구성된 육이면서 또한 패괴된 인류이다. 사자가 어떤 유형인지 너희는 아느냐? (모릅니다.) 모르면서 감히 그 호칭을 쓴다면 이는 사칭이다. 딱 잘라 말하건대, 사자는 인류와 관계가 없으며, 인류는 ‘사자’라는 두 글자와 무관하고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복음 사자, 사자의 강림, 사자의 사역 등의 일은 기본적으로 구약 아브라함 시대에 이미 일단락되고 끝맺음 되었다. 하나님이 정식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기 시작한 후로는 더 이상 ‘사자’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 된다. 어째서 더 이상 써서는 안 된다고 하겠느냐? (사람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감당하고 못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패괴된 인류와 무관하며, 패괴된 인류 중에는 이런 역할이 없고, 이런 호칭도 없다. 이제 ‘전도자’라는 단어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도’라는 단어를 비교적 객관적이고 정확하고 깊이 있게 정의한다면 과연 어떤 의미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좀 두루뭉술한 표현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이 이번에 사역을 한다는 이 복음, 사역만을 가리키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복음 전파자가 전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복음 전파자가 하는 사역은 ‘도’와 얼마나 관계가 있느냐? 그들은 자신이 이행하는 본분 범위 안에서 과연 어떤 사역들을 하느냐? 그들이 하는 일은 말세 하나님이 이미 땅에 와서 어떤 사역을 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등 기본적인 소식을 복음 대상자에게 알려 주어 상대가 듣고 받아들인 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뿐이다.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면 그들은 복음 전파 직책을 다한 것이다. 그럼 그들이 사람에게 알려 주는 그 소식 안에 ‘도’의 함의가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소식’과 ‘복음’ 두 가지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럼 ‘도’와는 관계가 있겠느냐? (관계가 없습니다.) 어째서 관계가 없겠느냐? ‘도’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 가장 간단한 말로 해석하자면 ‘길’이다. ‘길’은 ‘도’에 대한 정의를 개괄하는데, 이는 비교적 구체적인 해석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도’는 하나님이 선포한, 인류를 구원하여 사탄의 패괴 성품과 결박,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는 모든 말씀이다. 이렇게 말하면 정확하고 구체적이지 않으냐? 그럼 ‘전도자’라는 단어로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을 정의하는 게 적절하겠느냐? (부적절합니다.) 전도자의 본분은 복음 전파보다 훨씬 크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증거하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호칭이다. 평범한 복음 전파자가 전도자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복음 전파는 그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역을 간략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전도자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며, 전도자가 이행하는 본분에 이르지도 못한다. 그러니 그들을 전도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전도자라는 호칭은 비교적 고차원적이다. 복음 전파자는 이 호칭에 닿을 수 없으니 이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제 남은 것은 ‘증인’이라는 표현 하나구나. 증인이 증거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세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전파하고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면 적절하겠느냐? 증인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증인이지 복음의 증인이 아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증인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그럼 이 ‘증거’라는 말을 여기에서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세부적으로 파고든다면 ‘증거’라는 단어를 여기에서 쓰는 것 역시 적절하지는 않다. 복음 전파자는 그저 하나님이 발한 음성을 하나님 말씀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하나님의 현현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뿐, ‘증거’라는 두 글자의 진정한 의미에는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증거’란 그가 교제하고 전파하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고,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과 관련된다. 지금 그들은 그저 사람들을 교회로,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하는 장소로 데리고 올 뿐, 하나님의 성품과 소유, 어떠함, 사역을 증거하는 것 같은 사역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증인이라는 호칭이 그들에게 적합하겠느냐? 정확히 말해 너무도 부적합하고 부적절하다. 지금 복음 사자, 전도자, 증인이라는 세 단어를 따져 보고 헤아려 보았다. 복음 전파자들에게 이런 호칭을 쓰는 것은 전부 부적절하다. 이 단어들이 종교적으로 생겨났든, 아니면 하나님 집 사람들이 자주 쓰는 것이든 전부 적합하지 않고 적절하지도 않다. 이제 이것은 한 가지 질문으로 이어진다. 호칭이 중요하겠느냐, 중요하지 않겠느냐? (중요합니다.) 중요하겠느냐? 예를 들어, 네가 원래는 장삼(張三)이라고 불렸는데 이제 이사(李四)라고 불린다고 해서 너라는 사람이 달라지겠느냐? 너는 여전히 너 아니겠느냐? 그러니 어떻게 부르든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데 왜 이 몇 가지 단어를 해부하겠느냐? 사람이 복음 전파의 본분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이 본분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정의하며, 어떻게 그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지, 어떻게 그 본분을 대해야 할지 알게 하여 반드시 먼저 그 본분에서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정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호칭 역시 정확해야 한다.

방금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에 대한 몇 가지 호칭과 표현에 관해 간략히 분석했다. 증인, 전도자, 복음 사자 등 몇 가지 호칭과 정의는 모두 정확하지 않다. 어째서 정확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런 명칭에 부합하는 실질적인 사역을 전혀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행사와 사역, 본질을 증거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사역을 한 적이 없고, 그들이 이행한 본분 또한 그런 것이 아니므로 증인이라는 호칭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전도자라는 호칭도 마찬가지로 그런 성질을 갖고 있으며, 복음 사자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이 호칭은 너무도 공허하며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에게 씌운 감투이다. 사자라는 호칭은 어떻게 비롯되었느냐? 인류의 교만한 성품이 커져서 생겨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감투를 씌우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몇 가지 비교적 실질적인 것들, 언뜻 이 본분과 관계가 있어 보이는 호칭들은 전부 적합하지 않다. 다른 것은 더더욱 적합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으니 더 이상 하나씩 나열하거나 해부하지는 않겠다. 이 몇 가지 호칭이 전부 부적절한 이상, 우리는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이행하는 본분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보도록 하자. 종교계에서는 복음을 전해 사람을 얻는 것을 어떻게 칭하느냐?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람을 얻는 것을 두고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그들이 만나서 하는 말은 전부 자기가 어떤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고,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 하는 것들로, 서로 누가 맺은 열매가 많은지,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등을 비교한다. 왜 그런 것을 비교하겠느냐? 그들이 표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열매를 맺은 개수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엇이겠느냐? 공로,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밑천이다. 이렇게 서로 비교하는 그들이 복음 전파 사역을 본분으로 여기겠느냐? 그들은 왜 열매를 맺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겠느냐? 그들은 그것이 천국에 들어가고 복을 얻고 상을 받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여긴다. 만약 이러한 것과 무관하다면, 그들이 서로 만났을 때 그런 것을 비교하겠느냐? 다른 것을 비교할 것이다. 상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관계있는 것 말이다. 복음을 전해 사람을 얻고 열매를 맺는 일은 천국에 들어가고 상을 받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렇기에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고 상을 받기 위해 누가 복음을 전해 더 많은 사람을 얻었는지, 누가 더 많은 열매를 맺었는지 질리지도 않고 비교한다. 그 후 천국에 들어가고 상을 받을 밑천을 더욱 늘리고 확신을 키우기 위해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을 얻고 더 많은 열매를 맺을지 마음속으로 계산한다. 복음 전파 본분을 대하는 각 부류 사람의 태도는 이렇게 전부 드러났다. 그들의 이런 복음 전파 태도와 출발점이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함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그릇된 관점이다. 그들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상을 받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렇게 거래적인 성격을 띤 본분 이행은 분명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위배되며, 하나님의 뜻에도 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혐오를 산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든 그들의 마지막 종착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복음 전파를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고, 복과 상을 받기 위한 길, 교량으로 삼았다. 그들이 이 본분을 이행하고 이 부탁을 받아들인 속셈은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기 위한 것도,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복과 상을 받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맺은 열매가 얼마나 되든, 그들은 증인도 아니고 전도자도 아니다. 그들이 한 사역도 본분을 이행한 것이 아니라 복을 받기 위해 고생하며 힘을 쓴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복과 상을 받는 데 있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얻는 것을 이용해 하나님과 거래했으며, 그것을 대가로 상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얻으려 했다. 이 문제가 심각하지 않으냐? 이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냐? 이는 복음을 팔아넘긴 것이다. 복음을 ‘팔아넘김’으로써 그 대가로 복을 받는 것, 이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성질을 띠지 않느냐? 그들의 이런 속셈과 행위 방식, 그리고 일 처리 성질은 이런 본질을 지닌다. 복음을 팔아넘겨 상을 얻는 것은 마치 교계에 있는 소위 ‘전도자’들의 문제와 같다. 그럼 지금 하나님 집에서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과 그들 사이에는 공통적인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무엇이냐? 바로 복음을 팔아넘겨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것이며, 그리하여 복을 받고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이 일을 이렇게 말한다면 누군가는 불복하겠지만, 분명 많은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복음 전파자 중 많은 이가 사람을 얻은 후에 자기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공을 세웠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게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제가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영원히 하나님을 믿지 못했겠죠. 당신이 이 복음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아서입니다. 저한테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죠.” 상대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로 그는 늘 이 일을 마음에 두고 물어본다. “당신은 누구 덕에 복음을 얻게 됐습니까?” 하지만 상대는 생각 끝에 “당신이 복음을 전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성령이 역사하신 겁니다. 당신의 공이라고는 할 수 없겠네요.”라고 대답하고는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상대가 입을 닫자 화가 나서 계속 물어본다. 그가 계속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는 무엇이겠느냐? 공치사를 하는 것이다. 또 어떤 복음 전파자들은 전한 대상이 교회에 들어갈 조건이 돼도 교회에 넘겨주지 않는다. 혹자는 몇 사람에게 전한 후 넘겨주지 않으며, 또 혹자는 20~30여 명에게 전하여 교회 하나를 세울 정도가 되었는데도 교회에 넘겨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러겠느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아직 토대가 견고하지 못합니다. 이들의 토대가 견고해지고 의심을 품지 않고 쉽게 미혹되지 않을 정도가 되면 그때 교회에 넘기겠습니다.” 하지만 반년이 지나 그들에게 어느 정도 토대가 생기고, 교회에 들어갈 원칙에 부합돼도 그는 여전히 그들을 넘겨주지 않는다. 그는 직접 그 사람들을 이끌려고 한다. 이는 어떤 의미겠느냐? 만약 얻을 이득이 없다면 그가 기꺼이 그 사람들을 이끌려고 하겠느냐? 그가 바라는 이득은 무엇이겠느냐? 그 사람들에게서 이익을 꾀하고 이점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들을 교회로 넘긴다면 그런 이득을 얻지 못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분별해야 한다. 이는 교계의 많은 목사와 장로가 참도임을 분명히 알고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나아가 신자들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사실 그 이유는 명리 때문이다. 만약 신자들이 참도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교회에 얹혀살지 못할 것이다. 이 복음 전파자들은 복음 대상자가 교회에 들어가는 순간 자기를 잊어버릴까 봐, 그렇게 되면 교회에 얹혀살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을 넘겨주지 않는 것이다. 그럼 언제 넘겨주겠느냐? 그 사람들이 모두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순종하게 되면 그제야 교회에 넘겨준다. 그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간 후, 인성이 괜찮고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며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은 자주 설교를 듣고 얼마간 진리를 깨닫고 그를 분별하게 되어 “그 사람은 적그리스도나 바울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후 그와 다시 만나면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화를 낸다. “양심도 없군요! 제가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다면 당신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참도를 얻을 수 있었겠어요?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이끌어 준다고 어머니 같은 저를 까맣게 잊은 겁니까?”라고 말하며 ‘어머니’ 운운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이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분명 좋은 작자가 아닐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해 얻은 자들은 누구의 사람이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비록 복음을 전하면서 공을 들였다고는 하나 그가 얻은 사람은 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지 그를 믿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가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자기 손안에서 통제하여 자신을 따르게 하려고 한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길에서 강도질을 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가로막고, 그들이 모두 그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가게 하며, 자신이 모든 것을 전달해 주려고 한다. 이는 교회에 얹혀살려는 것 아니겠느냐? 그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어떤 행위냐? 사탄에게 속하는 행위이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정체를 드러내 교회와 하나님의 선민들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각지 교회 어디에나 존재한다. 심각한 경우, 손안에 수십 명, 심지어 백여 명을 틀어쥐고 있으며, 정도가 덜한 경우 3~5명에게 전하고는 늘 상대가 자신에게 감사하기를 바라고 그들을 만날 때마다 옛날 일을 들먹이면서 그들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의 일을 끄집어낸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는 의도는 무엇이겠느냐? 은혜를 잊지 않게 하는 한편, 그들이 하나님 집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복음을 전했기 때문임을, 그의 공로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가 이 일을 언급하는 데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는 상대를 욕한다. 첫 번째로 뭐라고 욕하겠느냐? (양심이 없다고 욕할 것입니다.) 그의 그런 말이 이성적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비이성적이라고 하겠느냐? (그는 잘못된 위치에 서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의 본분이자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 그것이 자신의 공로라고 생각할 뿐 자신의 본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공로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먼저, 그는 서 있는 위치가 잘못되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은 협력할 뿐이다. 하나님이 사역하지 않으면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느냐? 다음으로,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의 공로가 아니고, 그에게는 어떤 공로도 없다. 그것은 사람의 본분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얻으려 할 때 그가 그저 약간 협력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을 구원하고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니 그와는 무관하다. 그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저 전달 사역을 하는 것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사람에게 전하는 것일 뿐이니 은혜니 뭐니 언급할 만한 건 못 된다. 그러므로 상대가 그를 무시해도 양심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복음 전파의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들이 자주 생기지 않느냐? 너희는 이런 패괴를 표출한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심하게 표출했느냐? 사람을 욕할 정도였느냐? 사람을 미워할 정도였느냐? 사람을 저주하고 통제하려는 정도까지 갔느냐? 네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그를 독점하고 통제하며 네 소유로 만들려고 하고, 하나님에게 바치지 않고, 네가 복음을 전한 상대는 네 충실한 자식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느냐? 많은 사람이 복음 전파를 열매 맺는 것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으면 그 사람은 그의 열매이니 그의 부하가 되어 오직 그의 명령만 들어야 하고 그를 신이나 주인으로 여겨야 한다는 이런 생각을 가진 적은 없었느냐? 설사 이렇게 눈에 띄게 드러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해도 이런 측면의 패괴 성품이 있었을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이냐? 기본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 제대로 서 있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복음 전파를 자신의 본분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복음 전파를 본분으로 여긴다면, 네가 어떻게 행동했든,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얻었든 그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며, 자기가 다해야 할 책임, 의무이니 공로를 논할 것은 못 될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진리에 부합한다. 그럼 복음 전파자 중 일부는 왜 자기가 전해서 얻은 사람을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고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하겠느냐? 그들의 본성이 너무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며, 또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이러한 측면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어리석고 교만하고 미개한 일을 저질러 모두가 역겨워하고 하나님도 혐오하는 것이다.

사람은 일을 좀 하고 밑천이 좀 생기고 공을 좀 세우면 뽐내고 싶어 하며, 남을 통제하고자 하고, 그것으로 거래해서 상과 좋은 종착지를 얻어 내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교환물로 삼기도 한다. 그것으로 어떤 교환을 하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복음 대상자 집에 갔는데, 그 집이 무척 가난해서 그 사람을 얻은 후에도 이렇다 할 이득을 얻지 못할 것 같아 상대에게 흥미를 잃는다. 심지어는 상대를 무시하고 늘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리더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을 거예요. 설령 믿을지라도 진리는 얻지 못하겠죠.” 이렇게 핑계를 대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상대가 받아들였다면 너는 어떻게 해명할 것이냐? 너는 왜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리 없다고 했느냐? 왜 그렇게 함부로 재단했느냐? 그가 믿을지 믿지 않을지,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냐? 알 수 없다. 그런데 너는 왜 그 사람을 얻지 않았느냐? 그 사람에게 편견이 있었고, 그를 무시했으며, 사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너는 그를 얻지 못했다. 이런 식의 본분 이행은 직무 유기이다. 너는 사랑과 책임을 전혀 다하지 않았다. 그럼 하나님은 그것을 공로로 보겠느냐, 아니면 과오로 보겠느냐? (과오로 보실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과오이다. 그 과오는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냐? 네가 그 사람에게서 이득을 얻지 못한 것이 원인 아니겠느냐? 그에게 복음을 전해 봤자 아무 이익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너는 반감과 앙심을 품고는 그가 구원의 은혜를 얻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고는 이유와 핑계를 찾아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이는 심각한 직무 유기이자 과오이다! 취할 만한 이득이 없다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어떤 태도냐? 복음을 팔아먹는 전형적인 태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팔아먹겠느냐? 구체적인 내용과 과정을 말해 보아라. (그는 자신이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 여부에 근거하여 상대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를 판단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상품으로 삼아 판매하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이익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이익을 볼 수 없을 것 같자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자신의 사유 재산으로 여기면서 돈과 세력이 있고 잘 먹고 잘 입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한테 복음을 전하면 앞으로 나도 그의 집에서 머물면서 좋은 것을 먹고 입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어떤 행위냐? 복음을 팔아먹는 전형적인 행위이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이 새 사역을 한다는 기쁜 소식을 상품으로, 자신의 사유 재산으로 취급하여 가는 곳마다 사기를 치며 사적인 이익과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얻어 냈다. 이것이 본분 이행이겠느냐? 이는 ‘장사’라고 한다. 복음을 판매해 이익을 얻은 것이다. 판매란 거래의 방식으로 자기가 보유한 물건을 팔고, 그 대가로 원하는 돈이나 물질을 얻는 행위이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복음을 판매했느냐? 복음 대상자에게서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 의미는 ‘나에게 이익이 되면 복음을 전하겠지만, 콩고물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으면 핑계를 대고 복음을 전하지 않을 거야. 그건 거래가 성공하지 못한 거야.’라는 것이다. 어째서 거래가 성공하지 못했겠느냐? 그가 이익을 꾀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부류를 뭐라고 부르겠느냐? ‘강호의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즉, 진실된 것은 없고 도처에서 속임수로 사기를 치며 입을 놀려 돈과 이익을 얻는 것이다. 이런 복음 전파가 본분 이행이겠느냐? 이는 100% 악행이다. 그들의 행동은 본분 이행과 무관하다. 그들은 복음 전파를 본분으로 삼거나 자신의 직책이나 의무, 하나님의 부탁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것을 하나의 일, 직업으로 여겨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어 내고 자신의 이익과 요구를 충족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부유한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먹고 입고 거하는 것 모두 좋아지자 떠나기를 원치 않으며, 복음 대상자 앞에서 우는소리를 한다. “이곳은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고 축복해 주셨군요. 집집이 차가 있고 이층 양옥에서 살잖아요. 좋은 옷을 입고, 끼니마다 고기를 먹고요. 저희 고향은 안 그렇답니다.” 복음 대상자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고향이 그렇게 가난하다면, 저희 집에 자주 와서 머물다 가세요.” 그리고 그에게 선물을 안겨 준다. 이것이 바로 또 다른 형태로 얻어 내고 돈과 물질을 강탈하는 행위이다. 그들이 강탈하는 근거는 무엇이냐? “우리는 아무 대가 없이 당신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했죠. 당신들은 이렇게 큰 복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여 저희에게 좀 베푸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갖가지 방식으로 형태를 바꿔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물질과 돈을 강탈한다. 이들이 복음 전파를 기회로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첫 번째 행위는 복음을 팔아넘기는 것이다. 이는 가장 심각한 성질을 띤다. 그다음은 다른 형태로 강탈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어느새 주머니가 두둑해지고 삶이 여유로워진다. 혹자는 “삶이 여유로워지는 것은 좋은 일 아닙니까? 하나님의 축복 아닐까요?”라고 말하는데, 그건 헛소리다! 개인의 간계와 수법으로 재물을 강탈하고 사취하고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말을 하다니, 이는 어떤 성질을 띤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축복하지 않는다. 그럼 사람이 왜 그런 인식을 갖고 있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지닌 야심과 탐욕스러운 사탄 본성 때문이다.

복음 전파자는 모두 숱한 고생을 한다. 종교인들로부터 박해와 집중 공격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사탄 정권에 넘겨지는 등 조금만 조심하지 않으면 큰 붉은 용에게 체포되기 쉽다. 그런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일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는 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조금만 고생해도 원망을 입에 달고 다닌다. 어떤 복음 전파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정말 많은 말을 했는데 물 한 잔 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상대가 물을 따라 주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느냐? 그 복음 전파자의 말에는 한 가지 성품이 숨어 있다. 그 함의인즉슨, 복음을 전할 때는 누림과 이익이 있어야 가치가 있지 고생하거나 물 한 잔 얻어 마시지 못하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강요와 거래의 의미가 들어 있다. 복음 전파가 항상 거래의 성질을 띤다면 그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겠느냐? 그는 본분 이행에서 그 정도 고생조차 하지 않으려 하며, 작은 일 하나만 생겨도 소극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해서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그는 또 “물만 안 따라 주는 게 아니라 점심때가 됐는데 밥도 안 주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상대가 그에게 밥을 주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는 왜 몇 년 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늘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접대하는지, 어떤 먹고 마실 것을 주는지, 어떤 선물을 주는지에 신경 쓰겠느냐? 설마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겠느냐? 이는 인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에게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이 밖에, 복음을 전할 때는 어떤 측면에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 그는 왜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냐? 어째서 조금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냐? 복음을 전해 주는데 상대가 물을 따라 주지 않고, 식사 대접도 안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겠느냐? 그것은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그것은 우리의 본분이다. 거기에는 어떤 부차적인 조건도 없다. 상대는 너에게 먹을 것, 마실 것을 주거나 네 시중을 들거나 너를 웃는 낯으로 대해 줄 의무도, 네 말을 경청하고 네게 순종해야 할 의무도 없다. 만약 네가 상대에게 그런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태도이니 이 일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상대가 하나님 집에서 규정한 복음 전파 원칙에 부합하는 한, 우리는 그에게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다. 설사 그가 지금은 좋은 태도를 보이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언제까지, 어느 정도로 인내해야겠느냐? 그가 너를 거부하고 집에 들이지 않으며, 네가 아무리 이야기하고 전화해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을 통해 약속을 잡아도 안 되며, 네게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 복음을 전할 방도가 없다. 이럴 때는 네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본분 이행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모든 방법을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고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사람을 2~3년 동안 접하면서 여러 차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했는데도 그가 받아들이려는 뜻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 보자. 하지만 그 사람이 이해력이 뛰어나 확실히 복음 전파 대상에 속한다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먼저, 절대 그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계속 정상적으로 교류하면서 그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고 하나님 사역을 증거해야 한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 언젠가 그가 깨달음을 얻으면 참도를 알아볼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인내하며 끝까지 견디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어째서 그렇게 해야겠느냐? 이는 피조물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그와 교류한 이상, 너는 그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가 하나님 말씀과 복음을 듣고 돌아서기까지 중간에 수많은 과정이 있을 것이고,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너는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돌아서는 날, 너는 그를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 집으로 인도해야 한다. 이는 너의 의무이다. 무엇을 의무라고 하겠느냐? 미룰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책임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식이 아무리 말을 안 듣고 말썽을 부려도, 혹은 병이 나서 밥을 먹지 않는대도 어머니로서 어떤 의무가 있겠느냐? 그녀는 네가 자기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한결같이 너를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해 줄 것이다. 네가 그녀를 어머니라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그녀는 네 곁을 지킬 것이며 매분 매초 너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네가 그녀를 어머니라고 믿고 그 품으로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 그녀는 줄곧 그렇게 너를 지키고 보호할 것이다. 이것을 바로 거부할 수 없는 책임이라고 한다. 만약 복음 전파자가 이렇게 실행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이런 사랑을 보인다면 이는 복음 전파의 원칙을 지킨 것이니 100%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늘 자신만의 이치를 내밀고 조건을 따진다면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이는 본분 이행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면서 늘 복음 대상자한테 문제와 어려운 점이 많고 자질이 떨어진다고 트집을 잡을 뿐,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면서 그를 얻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나 가족이 많은 어려움을 갖고 있고 자질이 떨어진다면, 사랑으로 대했을 것이다. 이는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에게 사랑이 있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늘 객관적인 조건에서 원인과 이유를 찾거나 누구를 보든 못마땅해하고 자기보다 못나게 여기며, 항상 복음을 전할 대상이 없다고 생각해서 결국 한 사람도 복음을 전해 얻지 못했다. 이런 복음 전파에 원칙이 있겠느냐? 그는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는 사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전부 복음을 전할 대상이다. 분명히 드러난 악인이나 그릇된 부류에게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된다. 만약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본분을 이행하고 남을 대할 때 원칙을 지닐 것이다.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든, 혹은 그가 얼마나 많은 패괴 성품을 드러내든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귀찮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고 하나님 사역을 증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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