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성장의 여섯 가지 기준 (제 1 부)

지금 너희는 생명 진입 측면에서 길이 있느냐? 발전이 있느냐? 생명 진입에 발전이 있음을 나타내는 기준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고 있느냐? 영적 상태에 나타난 어떤 변화, 그리고 과거와 다른 어떤 모습에서 네가 스스로 생명이 성장했음을 느끼고, 혹은 형제자매가 네 생명이 성장하고 성품에 변화가 시작됐음을 알 수 있겠느냐? 생명 진입의 측면에서 발전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영적 상태로 볼 때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더 이상 막연함을 느끼지 않고 방황하지 않으며, 실행할 길이 있다고 느낀다. 또 하나님을 믿는 것이 구원받기 위함이고, 진리를 추구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 길을 또렷이 볼 수 있고, 또 이 길을 갈 수 있으면, 우선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편안함과 위안이 찾아온다. 그럼 지금 너희 마음속에 이런 편안함과 위안이 있느냐?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이 닥쳤을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그런 환경이 모두 자신의 부족함을 겨냥해 하나님께서 배치하신 것이며, 모두 자신에게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때 마음이 편안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평소에 너희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어떤 내적 상태인지와 관계없이 우선적으로 넓은 측면에서 보면 너희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이 길을 선택한 것이 옳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이 길이 인생의 바른길이라고 확실히 믿고, 계속 이 길을 걸어가겠다는 결심과 의지가 있으며 딴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내적 상태가 있느냐? (있습니다.) 그것은 한 가지 측면의 변화이며 생명이 성장했음을 보여 주는 첫 번째 기준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너희는 많은 일에 대해, 예를 들면 사람이나 세상, 이 사회, 인생의 길, 인생의 목표와 방향, 사람이 생존하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사상과 관점상의 변화가 생겼느냐? (어느 정도 변화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주 설교를 들으면서 본분 이행이나 행동, 생각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지만, 사람과 일, 인생 목표와 방향에 대한 관점에 정말로 변화가 있느냐? 만일 이 측면에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생명 진입과 관련된 것이다. 네가 얼마나 변화했느냐가 네게 생명 진입이 얼마나 있느냐를 증명한다. 지금 많은 이들이 이 측면에 대해 흐리멍덩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볼 줄 모르며 자신에게 닥친 일과 환경을 체험할 줄도 모른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와 비교하면 표면적으로는 정확하고 진리에 부합하는 관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일이 닥쳤을 때 적용하지 못하고 자신을 비춰 보지도 못한다. 이것이 진실로 변화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런 것은 모두 참된 변화가 아니다. 사람이 생명 진입 측면에서 발전이 있는지 보는 기준이 이제 몇 가지냐? (두 가지입니다.) 이것은 우선 이상(異象) 측면에서의 진리, 이론 측면의 두 가지 기준이다.

실행의 측면에서도 사람의 생명 진입에 발전이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우선 가장 초보적이고도 기본적인 기준은 네가 매일 무엇으로 바삐 보내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네 마음이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서 평온함을 찾을 수 있고, 또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비중이 얼마나 되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다. 네가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적인 일 때문에 바쁘게 보내고, 자기 생활을 위해 고생하느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할 시간을 낼 수 없으며, 진리 묵상에 마음을 들이지 않는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비정상적이다. 다시 말해, 너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고 하나님을 믿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항상 이런 내적 상태로 산다면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점점 작아지며, 작은 일만 닥쳐도 소극적이고 연약해진다. 그러면 사람의 내적 상태가 점점 비정상적으로 변하게 된다. 다시 말해, 네가 하나님을 믿는 상태 속에 있는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정상적인 내적 상태 속에 있는지, 네가 이런 정상적인 내적 상태로 사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매일 육적인 삶의 많은 일들이 네 마음을 차지하는 시간 외에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지, 이것이 바로 실행 측면의 첫 번째 기준이다. 어떤 이들은 하루에 육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 외에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진리를 교제하는 시간이 거의 없고, 대부분의 시간을 바깥 일에 쏟으며 육적인 즐김을 위해 산다. 이것은 패괴 성품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이 항상 패괴 성품 속에서 살면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과 패역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비정상적이 된다.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수호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중요합니다.) 얼마나 중요하겠느냐? 어째서 중요하겠느냐?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면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면 생명 진입이 없습니다.) 아마 너희는 도리상으로 이 의미를 이해하겠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측면의 진리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분명하고 명백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감성적인 인식만 조금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너희에게 묻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말하거나 행동하고 처신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항상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하나님과 무관하다면, 그가 하는 그 모든 것이 진리와 관계가 있겠느냐? (관계가 없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겠느냐? 어떤 기반 위에 있는 것이겠느냐? 그가 하는 모든 것의 출발점, 동기, 목표, 원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이겠느냐? 사람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과 무관하다면 그 사람은 무엇에 따라 일하는 것이겠느냐? 그 행동의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의 철학입니다.) 사탄의 철학에 따라 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람이 일하거나 본분을 이행할 때 그가 행하는 것과 살아 내는 것이 모두 하나님과 무관하다는 것은 진리와 무관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 사람이 날마다 바쁘게 사는 것은 무엇에 따라 일하는 것이겠느냐? 사탄의 독소, 사탄의 패괴 성품에 따라 일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생활하고, 처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생명 진입에 발전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세 번째 기준이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정상적인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 진입에 발전과 변화가 있는지를 가늠하는 실행 측면의 기준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일지 너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일이 닥쳤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임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가 아닐까요?) 그렇다.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신에게 닥친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로 순종할 수 있는지를 보고 평가하는 것이다.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이 순종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로 순종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것에 순종한 후에 사람이 어떤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 이것은 사람의 생명 진입 중 어떤 측면을 검증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에게 진실한 믿음이 있는지 검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이 있는지 검증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큰지 검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가지 측면이다. 또 다른 것이 있느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검증하는 것도 한 가지 측면이다. 또 다른 것이 있느냐? (진리를 사랑하는지입니다.) 그렇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인지 검증하는 것이다. 모두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순종할 수 있는지는 네가 일에 직면해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즉 반발하는지 받아들이는지로 판단한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다. 종종 일이 닥쳤을 때 비록 네가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일이 네 관념과 맞지 않을 때는 순종하기가 조금 힘들고, 네 마음에 맞거나 네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때는 순종하기가 비교적 쉽다면, 그것은 순종하는 정도가 부족한 것이 아니냐? 가끔 순종하고 일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순종을 의미하겠느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나 하나님이 안배한 것에 대해 어떤 일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어떤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것은 문제가 된다.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냐? 가령 하나님이 너를 멍청이라고 한다면 너는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니 틀림없이 옳겠지.’라고 생각하며 하나님 말씀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아멘 한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80~90퍼센트는 순종하는 셈이다. 하지만 체험하는 과정에서 가끔 자신이 똑똑하고 멍청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도 있는데, 그것은 10퍼센트가 깎인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완전한 순종이 될 수 없다. 여기에 정상적인 내적 상태가 있다. 언제까지 체험해야 네가 이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느냐? (어느 날 드러나 자신이 멍청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참된 인식이 생길 때입니다.) 그렇다. 어느 날 네가 자신의 본성, 성품, 일 처리 원칙, 자신의 인품, 자질 등 여러 측면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면, 너는 깨닫게 될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멍청하구나. 생각이 조금도 또렷하지 않고, 말도 분명하게 하지 못하며 일 처리도 잘하지 못해 일이 닥치면 흐리멍덩하게 넘겨 버리고 무슨 일이든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는구나. 설령 진지하게 대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하니 이것이 멍청이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너는 체험할수록 하나님 말씀이 옳고, 그것이 바로 너에 대해 얘기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그 말에 점점 더 순종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지만, 제일 처음에 하나님이 바란 것은 무엇이겠느냐? 너를 멍청이라고 할 때 하나님이 바란 것은 너의 반항과 무성의한 태도이겠느냐, 받아들이는 태도이겠느냐?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바란 것은 사람의 받아들이는 태도다. 사람은 이런 내적 상태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얼마나 많이 인식할 수 있든 간에 우선 받아들이고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네가 자신이 그저 조금 멍청할 뿐 하나님이 말한 멍청이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일단은 받아들여야 한다. 체험하는 과정이나 성품의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인성과 자신이 드러내는 패괴 성품, 일하는 태도와 효과, 본분을 이행할 때의 갖가지 내적 상태에 대해 점차 인식하게 되고, 자신이 약간 멍청한 것이 아니라 많이 멍청해 실제로 멍청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너는 멍청이라는 하나님의 폭로에 대해 이의도 반발심과 관념도 사라져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한다. 너는 하나님의 폭로를 사실의 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냐, 아니면 너에 대한 정죄로 받아들이는 것이냐? (사실의 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폭로는 사실에 부합하며 바로 진리로,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여야 한다. “‘멍청이’라는 세 글자가 진리입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느냐? 사실 그 세 글자가 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 세 글자의 본질, 즉 사람이 가진 그 측면의 성품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과 평가가 진리라는 뜻이다. 사실은 바로 이런 것이다. 너희를 멍청이라고 하면 너희의 현재 분량으로 기본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다. ‘멍청이’라는 말이 듣기 거북한 말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러하냐?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실 멍청이라는 말은 욕설이 아니라 점잖고 문명적인 말인데 왜 못 받아들이겠어? 우리는 그것보다 더 엄한 말도 들어 보았고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렇게 점잖은 말은 당연히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이것은 너희가 얼굴이 두꺼워서 그렇게 점잖고 문명적인 말은 너희에게는 별로 자극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냐? 그런 것이냐? 사실 그렇지 않다. 점잖은 말이든 엄한 말이든 너 스스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너를 평가하는 말이 옳은지 그른지, 너의 본질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면, 설령 듣기 좋고 점잖은 말이라도 너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 자신의 본성 본질에 대해 참된 인식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에 관련된 것이다. 너희가 더 엄한 말을 들어 보았고, 더 엄한 말을 받아들이고 참고 넘겼기 때문에 ‘멍청이’라는 심하지 않은 말이 너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으로, 사실 자기 자신과 진정으로 대조해 보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순종하거나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다. 만약 네가 그 말을 진리로 받아들여 자신을 비춰 본다면 너 자신에 대한 인식이 더 깊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멍청이라고 한 것은 네가 그 표현이나 단어, 정의를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 속에 담긴 진리를 이해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한 사람을 멍청이라고 말할 때 그 속에 담긴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멍청이’라는 말의 표면적인 뜻은 모두 이해하겠지만, 멍청이의 태도와 성품이 무엇이고,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멍청하고 어떤 일을 할 때 멍청하지 않은지, 하나님이 어째서 이렇게 사람을 폭로하는지, 멍청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지, 멍청이가 원칙에 따라 일할 수 있는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 수 있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혐오하는지 구분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 사람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모호하고 흐리멍덩하고 또렷하지 않으며, 어떤 일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예를 들면, 이 일을 이렇게 하면 규례를 지키는 것인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인지 대부분의 상황에서 알지 못하고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며, 이 일이 하나님이 좋아하는 일인지 혐오하는 일인지도 알지 못하고 구분하지 못한다. 또한 이렇게 실행하는 것이 사람을 통제하는 것인지 정상적으로 진리를 교제해 사람을 돕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이렇게 사람을 대하는 원칙이 옳은지 그른지, 패거리를 만드는 것인지 사람을 돕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이 원칙을 고수하고 입장을 지키는 것인지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자신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틈만 나면 거울 보길 좋아하는 것이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인지, 허황된 행동인지, 아니면 정당한 행동인지도 알지 못한다. 또 성격이 좋지 못하고 조금 이상한 사람은 성품이 좋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느냐? 사람들은 흔하고 자주 접하는 많은 일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멍청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면 너희를 멍청이라고 한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금 보면 대다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받아들인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자신의 내적 상태를 비춰 보고 자신이 어떤 일에서 멍청하게 행동하고 어떤 일에서 또렷하게 행동하는지 성찰하고, 자신의 내적 상태와 대조하여 자신의 패괴를 파헤쳐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런 일들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을 멍청이의 대열에 포함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실행하는 것이 어떠하냐? 이것이 완전한 인식이겠느냐? (아닙니다. 진리를 구하여 그 측면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 너희는 평생을 멍청이로 살고 싶으냐? (아닙니다.) 누구도 멍청이가 되길 원치 않는다. 사실 이렇게 교제하고 해부하는 것은 너희가 스스로 멍청이 대열에 포함시키라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정의를 내리든, 어떻게 폭로하든, 어떻게 심판하고 형벌하고 책망하고 훈계하든, 최종적인 목적은 너로 하여금 그런 내적 상태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고 멍청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멍청이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우선 자신이 어떤 일에서 멍청하고 항상 도리를 따지고 글귀와 도리, 이론 사이를 맴돌면서 구체적인 일이 닥치면 흐리멍덩해지는지 알아야 한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면 여러 진리에 대해 또렷이 알게 되고, 그러면 일할 때 멍청한 짓을 저지르는 경우도 줄어든다. 네가 여러 진리를 깨닫고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면 일을 처리할 때 손발이 묶이지 않고 결박당하거나 통제당하지 않는다.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거나 다른 사람과 교제한 후에 정확한 실행 원칙을 찾아내고, 진정으로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으면 너는 멍청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네가 어떤 일을 꿰뚫어 보고 진리를 정확히 실행할 수 있다면 그런 일에서 멍청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마음속이 저절로 환해진다.

하나님이 어떤 이들을 멍청이라고 했을 때 사람이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체험한 후에 자신이 정말로 아무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도 분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신이 몹시 멍청하고 자질도 형편없다고 느끼며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다. ‘멍청이’는 듣기 좋고 점잖은 말인데도 사람은 한동안 체험해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듣기 거북하고 점잖지 못한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힘들 것이다. 하나님 말씀 중에 사람을 폭로하고 심판하는 말들은 정곡을 찌르고 엄한 편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량이 너무 작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런 말을 들으면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견디지 못하며, 자신의 존엄이 손상되고 어린 마음이 자극과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너희를 특히 불편하게 하고 하나님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생각에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 어떤 것들이냐? 예를 들면, 천한 놈, 구더기, 더러운 귀신, 개돼지보다 못한 놈, 짐승 등과 같은 말들이다. 이런 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일반적인 문명인들이 이런 말을 하느냐? 너희는 모두 교육을 받았고 점잖고 차분한 말투를 중요하게 여기며 말하는 방식과 완곡한 말투를 중시한다. 또 그 누구의 존엄과 체면도 손상하지 않고, 말하거나 일할 때 남들에게 여지를 주고, 최대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려고 하며, 남의 상처와 단점을 까발리지 않고 남을 괴롭거나 난처하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일반인의 처세 원칙이다. 이런 처세 원칙은 어떠하냐? (그런 사람들은 무골호인으로, 간사하고 약삭빠릅니다.) 교활하고 약삭빠르고 간교하고 음흉하다. 사람의 웃는 얼굴 뒤에 악독하고 음흉하고 떳떳하지 못한 것들이 많이 숨겨져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남들과 접촉하고 교류할 때 상대가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이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그에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해야 해. 자칫 그의 체면을 상하게 했다가 그에게 괴롭힘 당하면 어떻게 해?’ 그래서 말을 안 하면 그만이지만 일단 입을 열면 완곡하고 듣기 좋고 아부하고 띄워 주는 말만 한다. 상대를 만나자마자 “와!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봐요. 선녀가 아니십니까? 화장을 하지 않고도 이렇게 예쁜데 화장을 하면 우린 더 상대가 안 되겠어요. 게다가 이 몸매 좀 봐요. 뭘 입어도 예쁘겠어요! 이렇게 예쁘고 근사한 옷은 당신 같은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거예요!”라고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는다. 누가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지만 사실 그가 마음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틀림없이 속셈과 동기가 따로 있을 것인데, 그것은 떳떳하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아주 음흉하고 사악하고 비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을 역겹게 한다. 상대와 헤어진 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험담을 늘어놓는데, 온갖 듣기 거북하고 분풀이하는 말만 골라서 한다. 그의 말 속에 공격성과 악독함이 담겨 있다! 조금 전에 아부하는 말을 하고 난 뒤에 속마음이 답답하고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서 그를 깎아내리고 모욕함으로써 마음의 평형을 찾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어둡고 이기적이며 비열하다. 이런 처세 방식은 역겹고 혐오스럽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바로 간사한 사람이다. 이방인 중에 이런 사람이 아주 많고, 하나님 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할 때 떳떳하지 못한 비열한 속셈과 동기를 품고 있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다 한다. 사실과 조금도 맞지 않는 말을 하고, 과장된 말도 할 수 있다. 그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할 때는 언제나 다른 속셈과 목적이 있는 것이고, 듣기 거북한 말을 할 때는 분풀이하는 말만 골라 하고 아무리 악독한 말도 다 지껄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어떠하냐? 겉으로 드러난, 위선적이고 교활하고 간사한 성품 외에 그의 본성은 대체 무엇이냐? 바로 악독한 것이다. 너무도 악독하다! 그가 누군가를 칭찬할 때 상대가 그에게 칭찬해 달라고 했느냐? (아닙니다.) 그는 왜 칭찬하는 것이냐? (자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는 개인적인 속셈과 목적을 위해 사람을 놀리고, 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않으며 아무리 낯간지러운 말도 다 할 수 있다. 이것이 악독함이 아니냐? 그런 다음 자기 마음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뒤에서 사람을 공격하고 욕하고 모욕하며 온갖 험한 말로 분풀이를 한다. 이것이 악독함이 아니냐? 너무 악독하다! 이 일을 통해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다. 그가 남들 앞과 뒤에서 하는 행동에 진심과 본심은 조금도 없고, 진리와 인성에 부합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순전히 악하고 독한 것뿐이다. 패괴된 인류의 말 속에 온갖 독소가 들어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말을 믿을 수가 있겠느냐? 사람의 말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너무도 믿을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살면서 말하고 행동할 때 일거수일투족과 모든 생각과 마음 하나하나에서 드러내는 것들이 온통 사탄의 성품으로, 사탄의 본성 본질을 오롯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못하느냐? 사람이 눈이 멀어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말하는 ‘구더기’, ‘천한 놈’, ‘마귀’, ‘짐승’ 같은 말들에 대해서는 관념과 거부감을 갖고, 심지어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의 본성 본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자신에게 사탄의 성품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좋은 면도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바로 살아 있는 사탄임을 진정으로 알지 못합니다.) 사람 스스로 사람의 본성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보는 것만큼 정확하고 철저하고 진실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상 사람의 본성 본질 속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과 완전히 적대적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본질, 사람의 본성을 본다. 하나님은 사람이 겉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일을 하는지 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는 것은 사람의 속마음과 본질, 본성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호칭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겠느냐? 바로 사람의 본성 본질, 사람이 드러내는 패괴 성품에 따라 정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들었으니 “하나님이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한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느냐?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이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한다.”라고 말한다. 그럼 너희는 이 말을 경험한 적이 있느냐? 진정으로 체험해 보았느냐?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이해했느냐? 흐리멍덩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한다는 것이 자신이 어떤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거나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일을 하면 하나님이 안다고, 자기 마음속에 어떤 더럽고 패괴되고 지나친 욕망이 있으면 하나님이 안다고, 설령 나쁜 짓을 저지르고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모두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마 하나님이 사람을 감찰할 때 그저 표면적으로 존재하고,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그런 것들만 감찰하겠느냐? 이것을 하나님이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느냐? (본성 본질이 있습니다.) 본성 본질의 것을 사람 스스로 의식할 수 있느냐? 느낄 수 있느냐? 인식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느낄 수 없다. 그럼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진실로 인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에서 폭로하고 하나님께서 드러내셔야 사람은 비로소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본성 본질을 감찰하는 것을 사람은 느낄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밝혀 주었을 때, 또 사실로 드러났을 때 사람은 진심으로 승복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마음도 있고 생각도 있고 관점도 있다. 이것들은 가장 표면적인 것들이다. 때로는 입 밖에 내어 말하는 것, 또 때로는 그저 일시적인 마음이나 마음속에서 나오는 생각, 일시적으로 살아 있는 생각 같은 것들이 모두 가장 표면적인 것이다. 이런 살아 있는 생각이 일시적으로 네 행동에 영향을 미치거나 네 행동을 주도할 수 있다. 하지만 네 인생의 방향과 목표에도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주도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그러면 네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네 행동을 주도할 뿐 아니라 네 인생의 방향과 목표까지도 주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느냐?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것이자 사람의 폐부 속에 감춰진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사람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시킨다. “하나님이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폐부란 무슨 의미겠느냐? 사람의 심장과 폐부에서 무엇이 생겨나느냐?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생각이냐?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실제로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의 본성 본질 속에 존재하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것들이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사람의 가장 진실한 생각이다. 심지어 때로는 그 자신조차도 모른 채 그것에 따라 살아간다. 그는 그것들을 잃고, 그것들에게서 얻는 원동력을 잃으면, 자신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너희는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다 복을 받고자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사람은 다 복을 받고, 상을 얻고, 면류관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이런 생각은 모든 이의 마음속에 다 들어 있지 않느냐? 누구나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이는 사실이다.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항상 말로 내뱉지 않아도, 나아가 복을 받으려는 자신의 속셈과 욕망을 숨겨도, 마음 깊은 곳의 그 욕망, 그 속셈과 동기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사람이 영적인 이론을 얼마나 많이 알고 어떤 체험과 인식이 있든, 어떤 본분을 이행할 수 있든,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으며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든,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복받으려는 속셈은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다. 또 사람은 언제나 이 복받으려는 속셈을 위해 고생을 마다치 않고 바쁘게 뛰어다닌다. 이는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 아니더냐? 복을 받으려는 속셈이 사라진다면 너희는 어떤 기분이겠느냐? 어떤 태도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겠느냐? 마음속에 숨겨진 복받으려는 그런 속셈을 정말로 완전히 없앤다면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되겠느냐? 아마 많은 사람이 소극적이 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의욕이 사라질 것이다. 영혼을 잃어버린 듯 하나님 믿는 일도 무의미하다고 느낄 것이다. 마음을 잃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복받으려는 속셈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본분을 이행하거나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이 가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고, 복받으려는 속셈에 대해 인식이 있고 이미 포기했으며, 지금은 그런 속셈에 지배되거나 속박받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복받으려는 속셈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사람은 일을 바라볼 때 그저 겉면만 본다. 시련이 임하지 않았을 때는 사람은 스스로 훌륭하다고 여긴다. 교회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을 위해 계속 헌신하면 자기에게 변화가 있다고, 더는 열성과 일시적인 감정에 의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끊임없이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해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고 실제 변화가 조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의 종착지, 결말과 직접 관계된 일이 닥쳤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겠느냐? 그때 본모습이 낱낱이 드러난다. 그럼 그런 환경은 사람에게 구원이자 온전케 되는 것이겠느냐, 드러나고 도태되는 것이겠느냐? 좋은 일이겠느냐, 나쁜 일이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이자 온전케 되는 것이니 좋은 일이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드러나고 도태되는 것이므로 나쁜 일이다. 사람이 한동안 체험하고 나면 누구나 시련과 연단의 환경이 임하게 되지 않느냐?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겠느냐? 여기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는 실제 내적 상태를 알고, 사람을 안다. 하나님은 사람의 본성 본질을 속속들이 또렷하게 알고 있다. 사람이 한동안 성적을 거두고 좋은 일을 조금 하고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며,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일 수 있고 일이 닥쳤을 때 어느 정도 순종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으면, 자신이 아주 훌륭하고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섰으며 이미 구원받고 온전케 됐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가장 의기양양하고 우쭐거리고 있을 때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 형벌이 닥친다. 이런 환경으로 사람은 드러난다. 사람의 분량이 드러나며, 사람의 패괴 성품도 드러나고 사람의 본성 본질 속에 있는 것,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도 드러난다. 이렇게 드러나는 것은 사실 사람에게 좋은 일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한다면 이런 드러남과 환경은 사람에게 있어서 정결함이다. 사람의 무엇을 정결케 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너의 무리한 요구, 지나친 욕망을 정결케 한다. 그리하여 네가 옳은 관점을 갖고 다시는 그런 지나친 욕망을 위해 하나님과 거래를 하거나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게 된다. 대신 네 마음은 점점 더 하나님께 순종하게 될 것이다. 무엇을 얻길 바라지 않고 오로지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함으로써 네 마음이 점점 더 순결해져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기만을 바라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게 되는 성과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사람에게 이것이 정결함이 아니겠느냐? 사람에게 이런 정결함이 필요하지 않으냐?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을 폭로하지 않고 정결케 하지 않으면 사람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사람의 사탄 본성에 따라 살면 사람이 어떤 길을 가겠느냐? (사탄을 따르고 하나님을 대적할 것입니다.) 그럼 그런 사람도 복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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