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알아야 진리 추구에 유익하다 (제 3 부)

사람이 자신의 패괴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이는 좋은 일이다. 네가 자신의 패괴를 발견하고 정확하게 인식할수록, 자신의 본질을 인식할수록 구원받을 가능성이 더 커지고, 구원받는 데에 더 가까워진다.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할수록 늘 자신을 훌륭하고 괜찮다고 여기게 되는데, 그럼 너는 구원받는 길과는 아직도 멀었고 아주 위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본분을 잘 이행하며 진리를 교제하고 실행할 줄 안다고 늘 우쭐댄다면, 이는 그의 분량이 아주 작고, 유치하며, 생명이 성숙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구원받을 희망이 크고, 구원받는 길에 들어설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자신의 패괴 성품을 진실로 인식하는 사람인데, 깊이 인식하는 사람일수록 구원받는 데 더 근접한 사람이다. 자신의 패괴 성품이 모두 사탄의 본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식하고, 자기가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했고, 그 어떤 진리도 실행하지 못하며, 패괴 성품에만 의지해 살고 있음을 깨닫는 것, 또 자기가 정말 인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살아 있는 마귀이자 사탄임을 깨닫는 것이 자신의 패괴 본질을 진정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인식한다면 문제가 매우 심각한 것 같겠지만 사실 이것은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좋은 일입니다.) 이것이 좋은 일인데도 어떤 사람은 자기가 마귀 사탄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는 소극적으로 변해 ‘이젠 끝장이야. 하나님께서 날 원하지 않으셔.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질 테고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가 있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자신을 알아갈수록 점점 소극적이 되면서 ‘난 완전히 끝장이야.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임했어. 이건 징벌이자 보응이야. 하나님이 나를 더 이상 원하지 않으신 거야. 구원받을 희망도 사라졌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이렇게 착각할 수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사실, 자기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수록 오히려 더 희망이 있으니 소극적이 되지 말고 포기하지 마라. 자신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는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자신의 패괴 성품, 각 부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질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변할 생각이 없다면 문제가 된다. 이런 사람은 무감각한 것이고,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을 살려 내기란 쉽겠느냐? 이미 죽었으니 살려 내기란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고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그리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겠느냐? 우선 양심 지각이 있어야 한다. 어떤 일이 닥치든 그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기 위해 일하고 있음을 마음속으로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비록 제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이건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거역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도 안 됩니다. 저는 순종하고 자신을 저버려야 합니다.” 그에게는 이런 양심이 있는 것이다. 또 이성 측면에서 그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이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항상 옳고, 하나님께서 나를 심판하고 형벌하시는 것은 내 패괴 성품을 정결케 하시기 위해서야.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어떻게 대하시든 모두 합당한 것이지.’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이성이 아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에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 “저는 인격과 존엄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신이 저를 그렇게 대하시는 것을 전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성이 있는 것이냐? 이는 사탄의 성품이고, 정상인의 이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고 그를 피조물로 인정하지 않는다. 네가 “저는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저를 어떻게 대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저를 나귀로 삼으시든 말로 삼으시든, 그 무엇으로 삼으시든 상관없습니다. 제게는 자신의 선택과 요구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고 치자. 그럼 본분 이행이 조금 고생스럽고 힘들다고 고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 순종해야 한다. 어떻게 순종해야 하겠느냐? 처음에는 순종하는 것이 힘들고 괴로워 그저 도망치고 싶고 거절하고 싶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며, 문제의 본질을 분명히 파악한 후에 실행의 길을 찾고, 진리 실행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며 조금씩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성이 있는 것이다. 너는 우선 이런 이성을 갖춰야 한다.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나면, 사람은 또 무엇을 갖춰야 하겠느냐? 염치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사람에게 염치가 있어야 하겠느냐? 잘못을 저지르고 패역과 교활함, 간사함을 드러냈을 때, 그리고 거짓말하고 기만했을 때 의식이 있어야 하고, 염치가 있어야 한다. 그로써 이런 행동이 진리에 어긋나고 존엄이 없는 것임을 알고, 뉘우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사람에게 염치가 없으면 그는 뻔뻔한 사람이니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완전히 끝이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소 귀에 경 읽기이고, 아무리 말해도 지각하지 못하니 이를 염치가 없다고 말한다. 염치가 없는 사람이 뉘우칠 수 있겠느냐? 염치가 없으면 존엄도 없기에 이런 사람은 뉘우칠 줄도 모른다. 뉘우칠 줄 모르는 사람이 돌아설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돌아설 수 없는 사람은 손에 쥔 악을 내려놓지 않는다.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 3:8),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을 갖춰야 하겠느냐? 이를 위해선 사람에게 염치와 양심 지각이 있어야 하고, 잘못을 저지르면 마음에 가책을 느끼고 뉘우칠 줄 알아야 하며, 잘못된 방법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돌아설 수 있는데, 이는 인성에 최소한 갖춰야 하는 것이다. 양심, 이성, 염치 외에 또 무엇을 갖춰야 하겠느냐?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다. 악인이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겠느냐? 악인은 사악하고 흉악하고 악독한 것들을 좋아하며, 부정적인 것과 관계있는 모든 것을 좋아한다. 긍정적인 사물을 얘기할 때 이 일이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하면 듣기 싫어하고, 거기에 관심도 없다. 그러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진리를 아무리 훌륭하게 교제해도, 말을 아무리 실제적으로 해도 그는 관심을 갖지 않고, 심지어 적대시하고 반항하기까지 한다. 반면 놀고먹는 얘기를 하면 그는 두 눈을 번뜩이고 흥이 돋는다. 이것이 바로 성품이 흉악하고 사악하며, 마음씨가 착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할 수가 없다.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어떻게 보겠느냐? 멸시하고 우습게 보고 비웃을 것이다. 정직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면 이렇게 생각한다. ‘정직한 사람은 손해만 보니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어! 정직한 사람이 되려는 너는 바보야. 너처럼 본분을 이행하면서 고생만 하고, 제 살 궁리도 안 하고, 자기 몸도 안 챙기다가 쓰러지면 누가 신경이나 쓴대? 나는 과로하면 안 돼.’ 누군가가 “우리 적당히 합시다. 바보같이 계속 열심히 일하지 말고, 살길을 마련해 놓고 나서 적당히 힘을 쓰면 돼요.”라며 그의 생각에 부합하는 말을 하면, 그는 기뻐한다.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충성을 다해 헌신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에 대해 말하면, 그는 반감을 가지며 혐오하고 귀를 닫아 버린다. 그런 사람은 흉악한 사람이 아니냐? 이런 부류의 사람은 모두 성품이 흉악하다. 네가 진리를 교제하고 실행 원칙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그는 반감이 생겨 듣기 싫어한다. 그는 이것이 그의 체면에 먹칠하고 그의 존엄을 훼손하며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는 속으로 ‘온종일 진리며 실행 원칙이며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만 말하는군. 정직한 사람이 되면 밥 먹여 주나? 솔직히 말하면 돈을 주나? 속임수를 쓰면 이득을 볼 수 있다고!’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무슨 논리겠느냐? 도둑놈의 논리이다. 이 성품이 흉악하지 않으냐? 이것이 마음씨가 착한 것이겠느냐? (착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얻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봉헌하고, 헌신하고, 포기하는 것은 모두 목적이 있어서다. 그는 진작에 계산해 놓았다. 자기가 하나를 바치면 몇 개를 더 얻을 수 있어야 수지가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이는 사악하고 흉악한 성품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구할 줄 모르고, 항상 스스로 계산하고 안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결과 몇 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수확 없이 아무런 진리도 깨닫지 못한 채 그 어떤 체험적 간증도 말하지 못하는데, 그때서야 후회한다. 그러고는 역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뜻에 따라 계획하면 당장에는 매우 똑똑한 것 같지만 진리를 얻지 못하니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사람은 모두 이런 실패를 겪어야만 진리를 깨닫고 깨어나며, 생명에 어느 정도 손실을 입어야 바른길과 지름길로 나아간다. 만약 처음부터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시행착오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많은 일을 겪고 실패와 좌절을 맛본 뒤에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고 이런 일을 꿰뚫어 보게 된다. 그러고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다. 그러면 바른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성품이 사악하고 흉악한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늘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려 한다. 그는 ‘운명이 하나님 손안에 있다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고?’라며 항상 의구심을 품는다. 똑같이 하나님 집의 설교 교제를 듣는데도 누구는 들을수록 힘이 나고, 내적 상태도 좋아지고 변화도 생기는데, 누구는 들을수록 복잡하고 역부족이라고 느낀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다. 이 외에 설교 교제를 들으면 마음속에 거부감이 들고 아무런 흥미가 생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를 통해 사람의 각기 다른 본성이 드러난다. 염소와 양,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모두 드러나는 것이다. 한 부류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또 다른 부류는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런 말들을 틀에 박힌 말로 여기는 사람이다. 설사 알아듣더라도 실행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가 자신의 계획과 사리사욕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 믿어도 변화가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 이 두 부류 사람들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으냐? 진정으로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뭐라고 하든 영향을 받지 않고 한결같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이 최고의 원칙이라고 믿는다. 사악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생각들이 갈팡질팡한다. 오늘 복을 받을 가망이 있어 보이면 온 힘을 다해 모두에게 선행을 보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지만, 시간이 흘러도 하나님이 축복해 주지 않으면 속으로 후회하고 원망하다가 결국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시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데 내 생각엔 꼭 맞는 말은 아닌 것 같아.’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눈앞의 이익밖에 모르는데,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흉악함이 아니겠느냐? 그는 누구와도 거래하려 하는데, 심지어 감히 하나님과도 거래하려 한다. ‘나는 이득을 봐야겠어. 그것도 지금 당장! 기필코 이득을 보고야 말겠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강경하냐? 그의 성품이 흉악하다고 한다면 지나치겠느냐?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가 흉악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느냐? 시련과 재난이 조금 닥치면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지도 않으면서 손해 봤다고만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많이 헌신했는데 하나님은 날 축복해 주지 않으셨어. 대체 하나님이 계시긴 한 걸까? 이 도가 옳은 걸까?’라며 의구심을 갖는다. 그가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것은 그가 기꺼이 원하거나 진심에서 우러나 헌신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데, 이렇게 그는 드러나는 것이다. 욥이 시련을 겪을 때 그의 아내가 뭐라고 했느냐?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불신파이다. 화가 닥치자 하나님을 부인하고 저버리려 했다. 하나님이 복을 내릴 때는 “여호와 하나님, 당신은 위대한 구주이십니다! 당신께서 제게 이렇게 많은 재산을 주시고 저를 축복하셨으니 저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당신은 저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했지만, 그녀의 재산을 앗아갔을 때에는 “당신은 저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라고 했다. 그러고는 “당신도 하나님을 믿지 마세요.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강도가 재산을 빼앗아 가게 내버려 두실 수 있나요? 어째서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 않은 거죠?”라고 욥에게 말했다.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이는 흉악한 성품이다. 일단 이익에 손실이 생기거나 자기 목적과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즉시 노발대발하며 반역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버리는 유다가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많으냐? 이렇게 비교적 확실한 악인과 불신파는 지금도 교회에 일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개중에는 단지 내적 상태만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성품만 있을 뿐 꼭 이런 부류의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네가 이런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변화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필요합니다.) 이런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본성 역시 흉악할 것이다. 네게 이런 흉악한 성품이 있으면 너는 언제든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고, 적대할 수 있다. 이런 패괴 성품이 하루라도 변화하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수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게 된다.

욥은 확실히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복을 내릴 때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고, 하나님이 징계하고 앗아갈 때도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가 체험하면서 마지막에 이르러 늙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그때 욥이 어떻게 행동했느냐?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양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증거했다. 여기에 사악한 성품이 있느냐? 흉악한 성품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재산이 사라졌는데 그가 반역을 저질렀느냐? 원망을 쏟아 냈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여기에는 양심과 이성,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 등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하는 것들이 있다. 우선 그에게는 양심이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내려 준 것임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또 그에게는 이성이 있었다. 그에게 이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말이 무엇이냐? (그는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의 시련을 진실하게 체험하고 인식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 자신의 진실한 분량과 인성을 드러낸 말이다. 욥은 또 무엇을 갖추고 있었느냐? (진리를 사랑합니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빼앗은 사건에서 그가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는 진리를 구했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는 모습 중 하나이다.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자신에게 일어난 이런 일들에 대해 그는 원망하지 않았다. 이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습이 아니겠느냐? 또 진리를 사랑하는 더 중요한 모습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가장 실제적이고 정확한 모습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평소에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람에게 유익하며 그 속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진리이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나님이 너를 축복할 때는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빼앗아 갈 때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너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욥은 받아들이고 그 말을 진리로 여겼다. 그가 진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그의 모든 재산을 빼앗았을 때 그는 그렇게 큰 손실을 입고 그렇게 중한 병에 걸렸음에도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에게 유익하며 그 속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다.”라는 말이 진리임을 마음속으로 알았기 때문에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말이 옳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가 진리를 사랑했다고 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그를 시련하든 그는 모두 받아들였다. 앗아가는 방식이든, 강도를 당하는 방식이든, 아니면 그의 몸에 종기가 나게 하는 방식이든 이 모든 것은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욥은 어떻게 대했느냐? 그가 하나님을 원망했느냐?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진리를 사랑하고 공평과 공의를 사랑하는 모습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척 공평하고 공의로우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모두 옳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저는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눈에 피조물은 그저 구더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든 상관없으며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옳고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원망하지 않았다. 이것은 진실로 진리를 사랑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다 실제적인 모습이 있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큰 손해를 입고 어려움을 겪어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사랑하는 모습이다. 그는 자신의 어려움을 이겨 내고, 자신의 어려움을 이유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자 진실한 순종이다. 진실로 순종해야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떤 이들은 평소에는 도리를 잘도 말하며 큰소리치지만 큰일이 닥치면 항상 하나님에게 요구하며 끊임없이 간구한다. ‘하나님, 제 병을 거두어 주세요! 제 재산을 되돌려 주세요!’ 이것이 순종하는 것이냐? 이런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거짓말로 사람을 현혹시키기를 좋아한다. 그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은 재산과 이익이다. 욥은 물질적인 이익과 그의 모든 재산을 담담하게 대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고 마음속으로 그런 일들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는 “사람이 평생 버는 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벌지 못하게 하시면 당신은 한 푼도 벌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벌게 하시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큼 벌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이 진리가 그의 마음속에 뿌리내려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라는 말씀이 욥에게 의심이 아닌 감탄이 되자 이 말씀이 그의 생명이 되어 그의 마음속에 담긴 것이다. 욥의 인성에는 또 어떤 것이 있었느냐? 그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것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이었느냐? 그는 차라리 자신이 죽을지언정 하나님이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는 어떤 품성이고 어떤 본질이겠느냐? (선량함입니다.) 그의 이런 선량함은 몇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느냐? 하나님을 배려하고 이해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흡족게 한 것이다. 사람이 이런 것들을 두루 갖추면 인격을 갖게 된다. 인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시련과 사탄의 시험 가운데 굳게 서서 증거하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내면, 그리고 사람의 기준을 충족하고 어느 정도 진리를 갖추면 비로소 인격을 갖게 된다. 인성 본질 측면에서 보면, 욥에게 선량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생일을 저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죽을지언정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고 그를 걱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이런 인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선량한 인성과 본질이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헤아릴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사람은 무감각하고 냉혹해진다. 다시 바울과 대조해 보면, 그는 욥과 정반대였다. 바울은 항상 자기 생각만 하고 게다가 하나님과 거래까지 하려 했다. 면류관을 얻고자 했고, 또 그리스도가 되어 그리스도를 대신하고자 한 것이다. 면류관을 얻지 못하자 하나님께 이치를 따지며 소송하려 했다. 이 얼마나 이성적이지 못한 모습이냐! 이는 염치가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탄의 패괴 성품이 있으면 변화해야 한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한다면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고, 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마음에도 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 생명을 얻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이런 피조물을 원한다.

2018년 7월 13일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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