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알아야 진리 추구에 유익하다 (제 2 부)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냐? 우선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 다음 사람에게 협력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자신을 저버릴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사욕을 기꺼이 내려놓아야 한다. 사욕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체면, 지위, 허영, 각 측면에서의 자기 이익, 자신의 계획, 욕망, 장래, 종착지 등등 당장의 것이든, 앞으로의 것이든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네가 진리를 구해서 이런 패괴 성품들을 해결하며 하나씩 돌파해 나가고, 조금씩 포기할 수 있다면, 너의 진리 실행은 점점 쉬워질 것이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을 것이며, 네 분량도 차츰 자랄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달아 이런 사욕들을 조금씩 꿰뚫어 볼 수 있고 포기할 수 있게 되면 네 성품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너희는 지금 어느 정도까지 변화했느냐?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너희는 기본적으로 이런 성품 변화 측면의 진리 실제에 아직 진입하지 못했다. 그러면 지금 너희는 어떤 분량을 갖고 있고 어떤 내적 상태로 살고 있겠느냐? 대다수가 본분 이행에서 맴돌며 망설인다. ‘본분을 이행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지?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가끔은 건성으로 대하는 것이 심해서 마음에 가책을 느끼기도 하고, 하나님에게 죄스러움과 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본분을 잘 이행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겠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틀만 지나도 다시 소극적으로 변하고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진다. 계속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이 분량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분량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충성심을 갖고 본분을 이행할 것인지 교제할 필요가 없고,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이행해야 하고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교제하지 않아도 너희가 본분을 받아들여 자기 사명으로 삼고 아무런 요구도, 불평도, 선택도 없이 잘 이행해 낼 수 있다면, 너희는 어느 정도 분량을 갖추게 된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하는지 항상 교제해야 한다. 어째서 이런 것들을 항상 교제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줄 모르고 원칙을 파악하지도 못했으며, 본분 이행에 관한 각 항목의 진리를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또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도리만 조금 이해했을 뿐이면서도 실행하고 진입하지 않으려 하고, 고생하길 원치 않으며 항상 육적인 안일함을 누리려고 한다. 또 자신의 선택이 아직도 너무 많고 내려놓지 못하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 손에 맡기지 않는다. 여전히 자신의 계획과 요구, 사적인 바람, 생각, 장래 등이 주도하고 너를 통제할 수 있다. ‘이 본분을 이행한다면 앞으로 전망이 있을까? 여기서 기술을 배울 수 있을까? 하나님 집에서 앞으로 발전성이 있을까?’ 항상 이런 것들을 궁리하고, 본분 이행이 조금만 고생스럽고 힘들거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조금만 적어도 괴로워하며, 시간이 길어지면 마음이 씁쓸해지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므로 여전히 진리를 교통해 다독여 줘야 한다. 이러면 분량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성품 변화와 관계가 있느냐? 아직 이르다. 너희가 본분 이행에 있어서 알아야 하는 진리 원칙을 모두 파악하고 이 관문을 통과하면 본분 이행이 합격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성품 변화까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본분을 이행하든 하나님을 섬기든 어쨌든 항상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어떤 잘못된 관점이나 패괴 성품이 드러나든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본분 이행이 합격점에 이르러 하나님에게 칭찬받을 수 있다. 패괴 성품의 문제는 반드시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분별할 줄 모르면 해결할 수 없다. 어떤 것이 패괴 성품이고 어떤 것이 패괴 성품이 아닌지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음식이나 옷차림, 생활 습관, 조상의 유전, 전통 관념 등 이런 것 중에는 전통문화나 풍습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가정 교육이나 가족의 유전으로 인해 생겨난 것도 있으며, 지식이나 식견 부족으로 인해 초래된 것도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큰 문제가 아니고, 인성의 좋고 나쁨과도 무관하며, 학습을 통해 식견을 쌓으면 어느 정도는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나 잘못된 관점, 패괴 성품의 문제들은 반드시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하는데, 이는 사람의 교육으로 바꿀 수 없다. 요컨대 네 관념과 생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내려놓고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면 사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진리와 무관해 보이는 많은 문제도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간접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패괴 성품에 관한 문제만 진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패괴 성품과 관계없는 문제들, 사람의 행동이나 일 처리 방식, 관념, 습관 같은 문제들도 반드시 진리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데, 그래야만 철저히 해결할 수 있다. 진리는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생 목표나 생명의 근간, 생존 원칙 등이 될 수 있고, 사람의 모든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가능하다. 지금 가장 관건은 무엇이냐? 많은 문제의 발생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사람이 많은 일의 본질과 근원을 꿰뚫어 볼 수 없는데 이 역시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럴싸하게 말할 수 있겠느냐? (모두 글귀와 도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도리를 말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평소에 공허한 말과 도리를 늘어놓거나 구호를 외치지 말아야 하며, 실제적인 말을 많이 하고 진리를 많이 실행하며 스스로를 인식하고 해부하는 말, 사람들이 들으면 도움이 되고 이로운 말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런 자가 진리 실제를 갖춘 사람이다. 도리와 공허한 말, 외식하는 말, 사람을 기만하는 말,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은 하지 마라. 어떻게 해야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우선 그런 것들의 추함, 어리석음, 황당함을 인식하고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육을 저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이성이 있어야 한다. 이성을 갖춘 사람일수록 정확하고 적절하게 말하고, 인성이 성숙한 사람일수록 실제적인 말을 하고 쓸데없는 말은 적게 하며, 마음속으로 그 공허한 말이나 과장된 말, 거짓된 말들을 혐오하게 된다. 어떤 이는 허영심이 너무 강해서 항상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을 위장하면서 사람들 마음속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길 바란다. 또 남들이 자신을 보고 하나님을 잘 믿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특별히 감탄하기를 바란다. 그가 항상 이런 속셈을 품고 자신을 위장하려고 하는 것은 패괴 성품에 지배당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는데, 이는 사람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근원이자 가장 해결하기 힘든 문제다. 성령이 역사하거나 하나님이 몸소 온전케 해 주어야만 사람의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고 성품 변화도 이룰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해결할 수가 없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말씀에 따라 자신의 패괴 성품을 반성하고 인식해야 하고, 하나님이 폭로하고 심판하는 모든 말에 대조하여 패괴 성품과 패괴된 내적 상태를 일일이 파헤쳐야 한다. 말하고 행동하는 속셈과 목적부터 깊이 파헤치고,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부터 분석하고 분별해야 하며, 마음과 생각 속에 담겨 있는 것조차 하나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조금씩 해부하고 분별한다면 자신에게 패괴 성품과 사탄의 독소가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자신의 패괴 성품과 본성 본질을 차츰 분명히 알게 될 것이고, 자신이 사탄에게 깊이 패괴됐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가 매우 소중하며 패괴된 인류의 성품 문제와 본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패괴된 인류에게 처방해 준 이 약은 매우 효과적이며, 그 어떤 묘약보다도 귀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에게 구원받기 위해 기꺼이 진리를 추구하고, 모든 측면의 진리를 점점 더 소중히 여기고, 점점 더 힘 있게 진리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이런 생각을 마음에 품었다면, 이미 어느 정도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고 참도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만약 체험이 더 깊어져서 마음속으로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생명 성품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행위가 조금 변하기는 쉬워도 생명 성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패괴 성품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 세심해야 하고, 속셈과 내적 상태를 하나하나 성찰하는 데 집중하고, 말할 때의 속셈과 습관적으로 쓰는 방식을 항상 성찰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인식하게 될 것이다. ‘항상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을 위장해서 사람들 마음속에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건 사악한 성품이야. 그건 정상 인성의 표출이 아니고 진리에도 부합하지 않지. 그 사악한 화법과 속셈은 모두 잘못된 거니까 고치고 떨쳐 버려야 해.’ 이런 인식이 생긴 후로는 자신의 사악한 성품이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을 점점 분명히 느끼게 될 것이다. 원래는 사악함이 남녀 사이의 삿된 욕정과 사욕이라고만 여기며, 자신에게도 그런 면에서 사악한 모습이 있기는 하지만 성품이 사악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사악한 성품에 대해 인식이 없는 것이다. ‘사악함’이라는 단어의 표면적인 의미는 이해한 것 같지만 사악한 성품에 대해 인식하지도 분별하지도 못했는데, 사실 ‘사악함’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너 자신이 이 측면의 성품을 드러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반성하고 인식하기 시작하고 근원을 깊이 파헤치면, 자신에게 정말로 그런 성품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어서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자신이 말하는 똑같은 방식에서 자신의 속셈을 계속해서 성찰하고 파헤치다 보면, 자신에게 분명 그러한 성품과 본질이 있다는 것을 점점 더 정확하고, 진실되게 정의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 자신에게 정말로 사악한 성품이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너는 그것을 증오하고 혐오하게 된다. 자신을 아주 좋은 사람, 품행이 바른 사람, 정의감이 있는 사람, 정인군자, 착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다가 자신에게도 교만하고, 강퍅하고, 간사하고, 사악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본성 본질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스스로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게 되고,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된다. 자신에게 이런 모습과 내적 상태가 있음을 말로만 인정하거나 대충 인식하면 진실로 증오할 수 없다. 이 패괴 성품의 본질이 사탄의 추태임을 알아야만 진실로 자신을 증오할 수 있다. 진정으로 스스로를 인식하여 증오하기에 이르려면 어떤 인성을 갖춰야겠느냐?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 공평, 공의를 사랑하고 양심과 지각이 있어야 한다. 또 마음씨가 선량하며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모두 진정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증오할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잘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 입으로는 얼마간 자신을 인식하는 말을 할지 몰라도 진리를 실행에 옮길 수 없고, 진실한 변화도 있을 수도 없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일례로, 자질이 부족한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자질이 부족한 데다가 천성적으로 소심하고 겁이 많아. 아마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성실하고 못난 사람일 거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구원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기도 해.’ 이것이 진실한 자기 인식이냐? 이것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말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없겠느냐? 소심하면 패괴 성품이 없겠느냐?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았겠느냐? 사실 그들도 사악하고 교만한 성품이 적지 않다. 또 그것이 아주 깊이 감춰져 있으며, 보통 사람보다 더 완고할 것이다. 어째서 아주 깊이 감춰져 있다고 하겠느냐? (그는 항상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는 이런 허상에 기만당하고 미혹되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미 괜찮은 편이니 하나님의 심판을 받거나 정결케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심판하고 사람의 패괴를 폭로하는 하나님의 그 말씀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 수완 있고 성품이 교만한 사람들, 악인, 남을 미혹하는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들에게 한 말씀이지, 자기 같은 사람에게 한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 같은 사람은 이미 충분히 훌륭하다고, 청렴하며 세상에 조금도 물들지 않고 오점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신을 이렇게 정의하는데 진실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분명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이 왜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지,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는지, 패괴 성품이 어떻게 정결케 되는지 등의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분명히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가 드러내는 이 잘못된 관점들은 그가 터무니없는 사람이고 황당한 사람임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터무니없게 이해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강요한다. 이것 역시 사악한 성품 중 하나다. 사악함은 일종의 성품이다. 남녀의 품행 문제에서만 국한해서 나타날 때는 약간의 삿된 욕정과 사욕을 모두 사악한 성품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삿된 욕정과 사욕이 너무 심각해 항상 음란한 일을 일삼거나 동성애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사악함에 속한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항상 삿된 욕정과 사욕을 사악함이라고 말하고, 사악함을 삿된 욕정과 사욕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분별력이 없는 것이다. 사악한 성품은 인식하기가 가장 어렵다. 너무 간사하고 음험한 사람들은 모든 행동이 사악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나서 ‘내가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말하지 않으면 모두들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어. 활짝 열고 교제하며 인식한 것을 조금 얘기해야겠어. 인식하고 나면 이 일은 넘어가는 셈이지. 내 진짜 속셈을 남들에게 들키거나 간사한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 돼.’라고 생각했다고 해 보자. 이는 어떤 성품이냐? 기만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활짝 여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거짓말을 하고 나서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내 속셈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하며 남의 속을 떠보거나 내막을 알아보기 시작한다면 이것 역시 사악함이다. 사악한 성품은 사람이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남들이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음험하고 간사하게 일 처리를 하는 것, 음모와 간계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것 모두 사악함이고, 좋은 일을 한다는 기치를 들고 나쁜 짓을 하면서 남을 속이고 남들이 자신을 위해 힘쓰게 만드는 것은 가장 사악한 행위이다. 큰 붉은 용과 사탄, 마왕들은 누구보다 사악하며, 무릇 마귀는 다 사악하다.

성품 변화를 추구하려면 먼저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패괴 본질을 꿰뚫어 보고 해부하며, 패괴 성품에서 생겨나는 각종 내적 상태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스스로를 인식한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패괴된 내적 상태와 성품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어야 육과 사탄을 증오하고 성품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사람이 이런 내적 상태를 인식하지도, 대입하지도, 대조하지도 못하면 성품 변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성품에 변화가 나타나려면 반드시 패괴 성품에서 비롯되는 각종 내적 상태를 인식하는 한편, 패괴 성품에 지배당하지 않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품 변화의 시작이다. 패괴된 내적 상태가 생기는 근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알고 있는 글귀와 도리만으로 자신을 단속한다면, 설사 좋은 행동을 하고 겉으로는 어느 정도 변화가 있다고 해도 성품 변화라고 할 수 없다. 성품 변화라고 할 수 없다면 다수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겠느냐? 봉사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저 힘만 쓰고 사무적인 일로 바쁘게 지내는 데 그치는 것이다. 그 또한 본분을 이행하고 있지만 대부분 일하는 것만 중요하게 여길 뿐 진리를 구하지 않고 모두 힘만 쓰는 것이다. 가끔 기분이 좋을 때는 힘을 많이 쓰고, 기분이 별로일 때는 힘을 덜 쓰다가 나중에 반성하고 후회하며 힘을 좀 더 쓰는데, 그것으로 회개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니고 진정한 회개도 아니다. 진실한 회개는 자기 인식과 행동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행동이 변화해 육을 저버리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으며 행동이 보기에 원칙에 부합해야 진실한 회개이다. 그러고 나면 조금씩 말과 행동에 원칙이 생기고, 완전히 진리에 부합하게 된다. 이때부터 생명 성품의 변화가 시작된다. 지금 너희는 어느 단계까지 체험했느냐? (겉으로 보기에 좋은 행동이 조금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아직 힘쓰는 기간에 속한다. 어떤 이들은 힘을 조금 쓰고는 공을 세웠으니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항상 이렇게 궁리한다.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보실까? 내가 이렇게 많이 힘쓰고 고생했는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러면서 계속 진실을 캐내고 싶어 하는데, 이는 어떤 성품이냐? 간사하고 사악하고 교만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믿으면서 힘을 좀 쓰고는 복을 받고 싶어 하지만 진리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강퍅한 성품이 있지 않으냐? 지위의 복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강퍅함 아니겠느냐? 그는 항상 ‘하나님은 내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이렇게 고생한 것을 기억해 주실까? 내게 축복을 내려 주실까?’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 마음속으로 늘 이런 것을 계산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거래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내면에 있는 몇 가지 패괴 성품이 농간을 부리는 것이다. 늘 하나님과 거래하려 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언제나 복을 받기만 원하며, 손해를 보지 않고 이득만 보려고 하고, 항상 잘못되고 비뚤어진 방법을 쓰는데, 이는 사악한 성품에 지배당한 것이다. 그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힘을 좀 쓸 때마다 따진다. ‘내가 이렇게 많이 힘을 쓰면 복을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많은 고생을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모든 걸 버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정말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실까? 하나님께서 나라는 사람을 인정하실까?’ 날마다 이런 문제를 궁리하는데 하루라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본분을 이행하거나 대가를 치르기도 싫어지며,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더더욱 싫어진다. 그는 늘 이런 일에 속박되고 결박당할 뿐 진실한 믿음은 전혀 없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진실하다는 것도,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기만 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그는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며, 설령 진리를 추구하려고 해도 기운이 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도 못한다. 그는 본분을 이행할 때 늘 문제가 생기고, 소극적이고 연약한 상태에 빠지며,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하고, 재난이 닥치거나 체포당하면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자신을 원치 않는다고 판단하고 자포자기해 버린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흉악함 아니겠느냐? 그러다가 원망하는 마음이 들면 어떻게 행동하겠느냐? 틀림없이 소극적으로 변해 일을 게을리하고 자포자기하며, 리더 일꾼은 모두 거짓 리더이고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하고, 심지어는 대놓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판단할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냐? 흉악한 성품에 지배당한 것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과 사탄의 논리에 따라 바친 것이 있다면 반드시 돌려받아야 하고, 돌려받는 것이 없으면 바치지 않는다. 복수심을 품고 본분을 내팽개치거나 거절하며 빚을 받아내려고 하니 이것이 흉악함 아니겠느냐? 이것이 어떤 점에서 바울과 비슷하겠느냐? (바울은 자신이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리고, 싸워야 할 싸움을 다 싸웠으니 반드시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이 서로 일치한다. 그렇다면 너희에게는 바울과 같은 모습이 있느냐, 없느냐? 너희는 이렇게 대조할 수 있느냐? 하나님 말씀에 따라 대조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인식할 수 없다. 패괴 성품의 본질을 인식해야만 진정으로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다. 표면적인 옳고 그름만 인식하고, 자신이 마귀이고 사탄이라고 인정한다면 그것은 너무 두리뭉실하고 공허한 것이다. 이는 깊은 척하고 위장하고 속이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자기 인식은 영적인 척하는 것이고,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간사한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를 인식하는지 본 적이 있느냐? 그는 언제나 자신의 작은 문제를 큰 문제로 다루고, 자신이 마귀나 사탄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저주하기까지 하지만, 자신이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어떤 악을 행했는지는 말하지 않고 내면의 더러움과 패괴를 해부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마귀이고 사탄이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다고만 말할 뿐이다. 온갖 공허하고 두리뭉실한 말로 자신을 정죄하여 남들에게 ‘진정으로 스스로를 깊이 인식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줌으로써 사람들이 그를 영적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부러워하게 한다. 하지만 그는 몇 년 동안 이렇게 인식한 후에도 진실로 회개하지 않고, 어떤 일에서도 진리를 실행하거나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생명 성품에도 전혀 변화가 없다. 그래서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 이는 진정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위장과 기만으로, 그 사람은 외식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자기 인식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 그의 말이 얼마나 듣기에 그럴싸하고 그의 인식이 얼마나 깊이가 있는지에 중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겠느냐? 그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지, 진리 원칙을 고수하고 교회의 사역을 지킬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사람에게 진실한 변화가 있는지를 알려면 이 두 가지만 봐도 충분하다. 이것이 사람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원칙이다. 그가 하는 말이 얼마나 듣기 좋은지가 아니라 그가 처리하는 일이 어떤지를 봐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자기 인식에 대해 얘기할 때 겉보기에는 무척 진지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면에 어떤 잘못된 마음과 옳지 않은 생각이 있는지 남들에게 말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지만, 말만 할 뿐 진실로 회개하지 않고, 일이 생겼을 때 진리를 실행하거나 원칙을 고수해 교회의 사역을 지키지 않으며, 그 어떤 변화된 모습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솔직하게 교제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는 이런 자기 인식이 진정한 회개이고 진리 실행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인식한 지 몇 년이 지나도 변화가 없다. 이런 식의 자기 인식은 형식만 취하고 과정만 거친 것 아니겠느냐? 성과가 전혀 없다면 이는 자기 우롱 아니겠느냐? 예전에 내가 어떤 곳에 갔는데 막 도착했을 때 기계로 풀을 베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기계가 왱왱 소리를 내서 소음이 너무 심했다. 그 후로 그곳에 두세 번 더 갔는데, 갈 때마다 똑같은 모습이기에 “너희는 풀을 베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어이쿠, 사실 저는 하나님께서 오신 걸 보고 풀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괴롭네요.”라고 대답했다.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 말을 듣고 그가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성실한 사람이며,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미혹될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겠느냐? 이 일을 어떻게 판단해야 정확하겠느냐? 이 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본분 이행에 책임을 다하지 않았어. 그런 행동은 보여 주기식 아니겠어?’ 풀을 베는 사람은 남들이 이렇게 생각할까 봐 한발 앞서 그런 말로 남의 입을 막아 버린 것이다. 이는 말주변이 뛰어난 것 아니겠느냐? (뛰어납니다.) 사실 그는 어떻게 대응할지 미리 생각해 두었다가 선수를 쳐서 너를 미혹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그를 아주 순수하고 솔직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한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저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얘기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먼저 인정해 버릴 거예요. 제가 이렇게 교묘하게 말하는데 당신이 뭐라고 하실 수 있겠어요? 저는 이렇게 할 것인데 당신이 절 어쩔 수 있겠냐고요?’ 여기에 몇 가지 성품이 드러나느냐? 우선 그는 남들에게 모든 걸 다 알고 있고, 잘못을 저지르면 회개할 줄 안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위장과 거짓말로 허상을 보여 주며 남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한 것이다. 꾀가 많은 그는 이런 말로 남들을 어느 정도로 미혹할 수 있는지 알고 있고, 남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미리 다 예상하고 있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바로 사악한 성품이다. 또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것이 건성으로 하는 행동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위장해서도, 체면이 서는 일만 해서도 안 된다는 걸 지금에서야 안 것이 아니라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행동했겠느냐? 이는 강퍅함이 아니겠느냐? 외식하는 것이고, 강퍅하고 사악한 것이다. 너희는 분별해 낼 수 있겠느냐? 타인만 분별할 줄 알고 자신은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어찌 된 일이겠느냐? 진정으로 스스로를 분별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남도 분별할 수 있다. 남을 분별할 줄만 알고 자신은 분별할 줄 모른다면 이것은 사람의 성품과 인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진리를 타인과는 대조하면서 자신과는 대조하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며,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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