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진실로 변화할 수 있다 (제 3 부)
너희 중에는 젊은이가 매우 많고, 가정을 이루지 않은 이도 매우 많다. 너희가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한 지도 몇 년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너희는 지금 집이 그리우냐? 부모가 그리우냐? 늘 부모를 그리워하는 내적 상태에서 사느냐? 부모를 그리워하는 내적 상태를 말해 보아라. 이것이 현실적 체험이다. (갓 해외에 왔을 때는 엄마와 언니가 정말 그리웠습니다. 예전에는 줄곧 그들에게 의지했었기 때문에 혼자 나왔을 때 늘 그들을 그리워했습니다. 하지만 해외에 와서 이렇게 많은 것을 체험하니, 지금 가장 떨어질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기도하니 그들이 그립지 않습니다.) 이는 두 가지 내적 상태이다. 첫 번째 내적 상태는 무엇이냐? 늘 집이 그립고, 엄마와 언니가 그리운 것이다. 이런 내적 상태의 세부 사항은 무엇이냐? 바로 일에 임해 자신이 이것도 할 줄 모르고 저것도 할 줄 모르니 무력감을 느끼고, 가족이 옆에 없으면 안 되고 의지할 곳이 없다고 느껴, 아침에 눈 뜨자마자 그들을 생각하기 시작해 저녁에 자기 전까지도 생각하는 것이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이런 내적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그들을 그리워하겠느냐? 환경이 변하고, 그들을 떠나서 마음속으로 그들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원래 늘 그들에게 의지하던 습관 때문이다. 서로 의지해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삶 속에서 많은 것들이 이미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었으니, 그들이 매우 그리운 이런 내적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들이 그립지 않은 것은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 것이겠느냐?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으며, 패괴 성품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고, 마음으로도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게 되어 사람의 운명이 모두 하나님 수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사명이 있고, 저 또한 저의 사명이 있으니, 지금은 그들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었느냐? (저는 해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말해 보아라. 해결되었느냐? (일시적으로는 해결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는 해결되었다. 만약 어느 날 자매를 한 명 만났는데, 그 자매의 생김새와 말투 혹은 너를 대하는 방식이 너의 어머니나 언니를 특히 많이 닮았다면, 너는 어떤 느낌이겠느냐? (또다시 그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또 그리움이라는 내적 상태에 빠지게 되니,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일은 어떻게 해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가족을 그리워할 때 모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보통 어느 한 사람을 그리워할 때, 가족을 그리워할 때, 집을 그리워할 때, 분명 마음 상했던 일들은 생각하지 않고 기뻤던 일, 행복하고, 아름답고, 즐거웠던 일을 생각한다. 엄마가 너를 어떻게 돌보고 아끼고 사랑했는지, 아빠가 너에게 어떤 좋은 물건을 사 주었는지 등 모두 이런 좋은 일들을 생각하니 생각을 멈출 수가 없고, 생각하면 할수록 내려놓지 못하여 자제하지 못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지금까지 엄마를 떠난 적이 없어요. 엄마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죠. 엄마의 다정한 딸이었어요. 이번에 이렇게 긴 시간 나와 있는데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나요?” 보고 싶은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의 육체가 바로 이렇다. 패괴된 인류는 정 속에서 산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살아야 사람답지. 가족조차 생각하지 않고, 그리워하지도 않고, 의지처도 없으면, 그런 내가 그래도 사람이겠어? 그건 동물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가족 간의 정과 우정이 없고 다른 사람을 그리워할 줄 모르면, 사람들은 인성이 없으며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이 맞느냐? (틀립니다.) 사실 부모를 그리워하는지 여부는 별로 큰 문제는 아니다. 그리워해도 괜찮고, 그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 어떤 사람은 독립적이고 어떤 사람은 부모에게 애착이 강하다. 하지만 오늘 너희가 본분 이행을 위해 집을 떠나고 부모를 떠났다. 이는 우선 이야기하자면 본분을 이행하려는 마음과 의지가 있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버릴 의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어려움은 한 번 힘을 쓴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한 번 힘을 내어 좋은 일을 하거나 좋은 행위를 좀 한다고 해서 패괴 성품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 도리를 모두 알지 않느냐? 그렇다면 부모를 그리워하는 이 일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집을 떠나 독립적으로 2~3년 생활하고 성장해 그다지 부모를 그리워하지 않으면,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이겠느냐? 아니다. 그에게 누구와 가장 친하냐고 물어보면, 입으로는 상투적인 말을 한다. “저는 하나님과 가장 친해요. 하나님은 저와 가장 친밀하신 분이에요!”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지도 않고, 나를 돌봐 주시지도 못하지. 역시 엄마가 제일 친하지. 나는 엄마가 열 달 품어 낳은 자식이라, 나를 제일 예뻐하고,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잘 아는 사람도 엄마야. 내가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엄마가 곁에서 위로하고 도와주고 보살펴 줬어. 지금 집을 떠나 있으니 병이 나도 엄마처럼 돌봐 주는 사람이 없어. 하나님이 좋다고는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얼굴도 보지 못하는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거야? 이는 비현실적이야.’ 그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이 가장 친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도 마지못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사실 그는 마음속 깊이 여전히 엄마가 가장 친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엄마가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줘서 내가 하나님을 믿었고, 엄마가 없다면 나도 없어.’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진리를 깨달았겠느냐? (깨닫지 못했습니다.) 너의 엄마는 그저 너를 낳고 이십여 년 동안 너를 키웠을 뿐이다. 너의 엄마가 너에게 진리를 베풀어 줄 수 있느냐? 너에게 생명을 베풀어 줄 수 있느냐?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너를 구원할 수 있느냐? 너의 패괴 성품을 정결케 할 수 있느냐? 이것들을 모두 할 수 없다. 부모의 은혜와 사랑은 너무 한정적이다. 하나님은 너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줄 수 있고, 사탄의 권세와 죽음에서 벗어나도록 사람을 구원할 수 있으며,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 줄 수 있다. 이 사랑은 크지 않으냐?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운 너무도 큰 사랑이다. 부모의 사랑보다 백배, 천배 더 크다. 만약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부모에 대한 감정이 그렇게 깊을 수 있겠느냐? 여전히 명절 때마다 밤낮으로 그리워할 수 있겠느냐? 그가 진리를 깨달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훨씬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만약 사람이 몇 년 동안 하나님을 믿고도 여전히 부모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보다 크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은 바로 눈이 먼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구원받지 못한다. 사람의 패괴 성품이 해결되지 못하고, 사람의 영적 생명이 일정 분량까지 성장하지 못한다면 네가 몇몇 구호들을 외칠 수는 있지만 네가 해낼 방법은 없다. 이는 네가 그럴 만한 분량이 없기 때문이다. 너는 네가 갖고 있는 역량만큼의 일만 할 수 있으며, 네가 갖고 있는 분량만큼의 검증만 견뎌 낼 수 있다. 네가 깨달은 진리 실제만큼만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또 그만큼의 진리 실제만을 살아 낸다. 이에 상응해 너는 그만큼의 드러내는 패괴 성품과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 이는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언젠가 네가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면 네 어머니, 네 부모가 더는 제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그들 역시 패괴된 인류 중 하나이며 패괴 성품은 모두 같다고, 그들은 그저 너와 혈연관계가 있을 뿐 다른 차이는 없다고 여길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이다. 너는 더 이상 가족의 시선으로나 육적 관계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할 것이다. 주로 그들의 어떤 면을 봐야 하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봐야 하고, 세상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봐야 하며, 일을 처리하는 그들의 관점을 봐야 한다. 가장 핵심은 하나님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봐야 한다. 이 몇 가지를 분명히 보게 되면 그들이 과연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분간할 수 있다. 언젠가 그들 또한 너처럼 패괴 성품을 지닌 사람임을 깨닫는다면, 나아가 그들이 네가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마음씨가 선량하고 너를 진실로 사랑하는 게 아님을, 너를 진리로, 인생의 바른길로 절대 이끌어 주지 못함을 깨닫는다면, 또 그들이 너한테 행한 것들이 너에게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인생의 바른길을 걷는 데 조금의 가치도 없었음을 깨닫는다면, 그 외에 그들의 많은 행동과 관점이 진리에 어긋난 육적인 것임을, 그것이 경멸스럽고 역겨우며 증오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너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더는 그들을 그리워하거나 보고 싶거나 염려하거나 떠나지 못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부모로서의 사명을 완수했으니 이제 그들을 가장 가까운 사람, 우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감정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으며, 감정과 혈육의 정에서 진정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 네가 감정과 혈육의 정에서 빠져나왔을 때, 너는 그런 것들이 네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된다. 그때 너는 가족, 가정, 육적 관계가 진리를 깨닫고 감정에서 벗어나는 데 있어 장애물임을 알게 된다. 네가 그들과 그러한 혈육 관계, 그러한 육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은 너를 마비시키고 오도하여 그들이 너에게 제일 잘해 주고, 그들이 너와 가장 친밀하며, 그들이 너를 가장 잘 보살펴 주고, 그들이 너를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너는 그들이 도대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네가 진정으로 감정에서 빠져나왔을 때 간혹 그들이 생각나면, 너는 여전히 지금처럼 이렇게 애타게 그들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걱정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이다. 너는 “제가 가장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사람은 엄마예요. 저를 가장 사랑하고, 가장 잘 보살펴 주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랍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런 것을 깨달았을 때, 너는 여전히 눈물이 날 정도로 그들을 그리워하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게 어려움이 있는 문제와 일에서 만약 그 방면의 진리를 얻지 못하고 그 방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면, 그러한 어려움과 내적 상태에 빠져들게 되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 방면의 어려움과 문제를 생명 진입의 핵심 문제로 삼아 진리를 구해 해결한다면, 너는 이 방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려움과 문제에서 공과를 배우게 된다.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너는 자신의 부모, 가족과 더 이상 그렇게 친밀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고, 또한 네가 그들의 본성 본질을 더욱 분명히 보게 되어 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 네가 진정으로 가족을 꿰뚫어 보게 되어 “우리 엄마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니, 본질적으로 악인이고 마귀입니다. 우리 아빠는 늘 무골호인이고 늘 엄마 편에 섰어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실행하지 않으니,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엄마 아빠의 태도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불신파이고 마귀입니다. 저는 철저하게 그들을 저버리고, 그들과 선을 긋겠어요.”라고 말하게 되면, 네가 진리의 편에 서서 그들을 저버릴 수 있게 된다. 네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분별해 낼 때, 그들에게 여전히 감정이 있겠느냐? 여전히 혈육의 정이 있겠느냐? 여전히 그런 육적인 관계가 있겠느냐? 없다. 이런 감정의 일을 네가 또 억제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어려움은 도대체 무엇에 의지해 해결한 것이냐? 진리를 깨달아 해결한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앙망하여 해결한 것이다.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이것들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네가 여전히 억제할 필요가 있겠느냐? 여전히 괴로워할 필요가 있겠느냐? 여전히 그렇게 크게 고통받을 필요가 있겠느냐? 여전히 다른 사람이 너와 교제하며 너를 설득할 필요가 있겠느냐? 필요 없다. 네가 혼자서 처리할 수 있다. 식은 죽 먹기인 것이다. 다시 되돌아가 이야기하자. 그들을 그리워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면, 마땅히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합니다.) 이는 원칙적인 말이고 흰소리이다. 좀 실제적인 말을 해 보아라. (하나님 말씀과 결부하여 그들의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합니다. 즉, 그들의 본질에서부터 분별하면 혈육의 정과 육적 관계를 저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 바로 사람의 본성 본질을 분별하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사람의 본성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해야만, 사람의 본성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 사람의 감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너는 우선 혈육의 정과 육적 관계에서 빠져나와 네가 가장 깊은 감정을 갖는 사람을 먼저 분석하고 분별하여라. 이 해결 방법은 어떠하냐?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가장 깊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을 분별하고 분석하려면, 얼마나 마음이 독해야 하는가!”라고 말한다. 너에게 분별하라고 하는 것은 그들과 연을 끊으라는 것이 아니다. 모자 관계와 부녀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철저하게 버리고 영원히 왕래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족에게도 마땅히 책임을 다해야 하지만, 그들에게 속박받거나 얽매여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니, 이 원칙을 갖춰야 한다. 만약 여전히 그들에게 속박받거나 얽매인다면, 너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게 되고,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을지도 보증할 수 없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너에게 이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지금 저는 진리를 깨닫지 못해 사람을 분별할 줄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네게 그런 분량이 없다면 우선은 분별하지 마라. 네가 충분한 분량을 갖춰 이런 검증을 견뎌 낼 수 있고 자발적으로 이렇게 실행할 수 있게 되면, 그때 이 방면의 진리를 실행해도 늦지 않다.
많은 사람이 감정 때문에 무의미한 고통을 수없이 받는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전부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고통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사람은 늘 감정에 얽매여 진리를 실행하거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감정에 얽매이는 것은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데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주며, 생명 진입에도 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감정에 얽매이는 고통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무의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닫는 한편, 그런 육적인 관계의 본질을 간파하고 밝히 알아야 한다. 그러면 육적인 감정의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믿지 않는 부모에게 심하게 핍박을 당한다. 결혼 상대자를 찾거나 직장을 찾으라고 강요당한다. 무엇을 하든 다 괜찮지만, 하나님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부모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까지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부모의 마귀 진면목을 보게 되고, 그때서야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게 된다. ‘정말 마귀네. 가족으로 대해서는 안 되겠어!’ 그 후로 감정의 얽매임과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탄은 혈육의 정을 이용해 사람을 속박하고 결박하려 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속아 넘어가기 쉽다. 많은 경우 부모나 가족을 위해 괴로워하고 눈물 흘리며 고통받고 대가를 치르는데, 이는 어리석고 무지한 행동이다. 자신이 자초한 일로, 사서 고생이다. 그런 고통은 아무 가치도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헛수고로, 하나님께 전혀 기억되지 않는다. 생고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네가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아 그들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되면, 너는 거기에서 해방되어 그 고통들을 감내한 것이 무지하고 어리석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누구를 원망할 수 없고 그저 눈먼 자신, 어리석은 자신,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일을 밝히 알지 못한 자신을 원망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감정의 문제는 해결하기 쉽지 않으냐? 너희는 해결했느냐? (아직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실행 길을 우리는 아직 실행하거나 진입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런 일이 임할 때, 참고할 근거가 하나 생겼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이든 아니면 너희가 생각하는 길을 이야기했든, 내가 이렇게 많은 것을 이야기했는데, 이는 너희에게 이런 것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이 닥치면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 해결 방법이 생기게 된다. 육적 감정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때, 진리의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기 수월해진다. 만약 늘 가족이라는 이 육적 관계에 얽매이게 되면 진리를 실행할 수 없다. 진리를 깨닫고 구호를 외칠 줄 알아도 여전히 실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구할 줄 모르고, 어떤 사람은 비록 진리를 구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이 진리를 확실히 교제해 줘도 그다지 믿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저 도리로 여겨 들어 보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면 감정에 얽매이는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다. 해결하지 못하면 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 얽매이고 결박당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고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니, 결국 너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을 자격이 없다. 어느 날 재난 속에 떨어져 징벌을 받게 되어 이를 갈며 울어도 소용이 없다. 아무도 너를 구할 수 없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으면 결과가 어떨지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으냐?
오늘 우리는 어떤 내용을 교제하였느냐? 사람의 내적 상태, 패괴 성품을 교제하였다. 또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지, 일이 닥치면 어떻게 정확하게 대해야 하는지, 마땅히 어떤 관점을 지녀야 하는지, 자신의 패괴 성품을 어떻게 인식하고, 분석하고, 해결해야 하는지 교제하였다. 생명 진입이라는 이 공과는 반드시 보습해야 한다. 언제 보습하든, 언제 시작하든 모두 늦지 않다. 그렇다면 언제가 늦은 것이겠느냐? 죽으면 늦은 것이다. 살아만 있다면 늦지 않다. 지금 너희는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이지, 죽은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란 무엇인지, 죽은 사람이란 무엇인지, 너희가 진정 분명히 알고 있느냐? 영어로는 늘 이렇게 말한다. “I’m still alive(나는 아직 살아 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이겠느냐? 바로 일이 닥치면 어찌할 줄 모르거나 혹은 이미 이 사회의 흐름에 말려들었거나 혹은 자신이 매우 타락했음을 느낀 후에, 바늘로 자신을 찔러 아직 감각이 좀 있으면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마음이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아직 살아 있으니, 마땅히 추구해야 하고, 마땅히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예전에는 타락해서, 예전에는 세속을 따라 사악한 흐름 속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다시 분발해 또다시 타락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 보아라. 서양인은 참도를 찾지 못했고, 삶과 인생에서도 부득이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들의 한탄 가득한 말에는 일종의 의기소침과 부득이함이 있다. 즉, 매우 무기력한 정서가 말 속에 있어 종종 자신이 마치 사람 같지 않게 산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귀신이라도 그렇게 살아야 하고, 동물이나 짐승이라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방법이 없다. 숨이 붙어 있는 한 그렇게 살아야 한다. 갈 길이 없어 사는 것이 가련하다. 그렇다면 너희가 지금 이런 것이냐? 만약 너희가 어느 날 한탄할 때, ‘아, 나는 아직 살아 있고, 내 마음은 죽지 않았어.’라고 느낀다면, 만약 사람이 사는 게 그 지경이라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미 매우 위험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미 매우 위험하다. 너희는 절대 이런 말을 하지 마라. “나는 아직 살아 있어.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해 산송장이지만, 마음은 아직 살아 있어. 마음속에 있는 그 약간의 바람과 이상이 여전히 이 육체를 지탱하고 있어.” 절대 이 지경까지는 가지 마라! 이 지경까지 가면 이미 만회하기 쉽지 않다. 지금 너희의 상태는 꽤 괜찮아 보인다. 네가 이방인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어도 그는 전혀 감각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엄한 말로 너희를 책망 훈계하면, 너희는 약간의 감각이 있느냐?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책망과 훈계에 임해서야 비로소 자신을 인식하고 통회한다. 이런 사람은 아직 지각이 있는 사람으로, 마음이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너희가 아직 깨어 있고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만약 진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만약 사람이 한사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지경까지 이르면, 그것은 완전히 죽은 것으로 구제 불능이다. 지금 교회에는 죽어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정말 많다. 이런 사람들은 육체가 숨을 쉬고 있다고는 해도 사실 영이 없는데,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이고 산송장이다. 이런 사람은 이미 완전히 드러나고 도태되었다.
2016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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