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추구해야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를 해결할 수 있다 (제 2 부)
어떤 이들은 자신의 뜻에 따라 일을 한다. 그들은 원칙을 어겨 책망 훈계를 받은 후 입으로는 자신이 교만하다고, 진리가 없어 잘못을 저질렀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원망한다.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내가 나선 건데 결국 문제가 생기니 나한테 책임을 뒤집어씌우네. 바보짓 한 거 아닌가? 다음엔 나서지 말아야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이러한 태도는 어떠하냐? 회개하는 태도이냐? (아닙니다.) 그럼 이것은 어떤 태도이냐? 이는 교활하고 간사해진 것 아니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번에 큰 화를 초래하지 않아 다행이야. 한 번 좌절하면 그만큼 교훈을 얻는다고 했잖아. 다음부터는 조심해야지.’ 그런 사람은 진리를 구하지 않고 잔꾀와 꿍꿍이로 그 일을 대하고 처리한다. 그러면 진리를 얻을 수 있느냐? 얻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은 회개가 없기 때문이다. 회개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자신이 잘못한 일을 인식하고,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지, 자신이 드러낸 패괴 성품은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반성하고 진리를 받아들인 후 진리에 따라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태도이다. 꿍꿍이만 궁리하여 예전보다 더 교활해지고, 수완이 더 뛰어나고, 더 잘 은폐시키고, 더 잘 다루게 된다면, 이는 더 이상 간사함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수완과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너는 회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교활하고 간사하게 변했다. 하나님 눈에 너는 너무 강퍅하고 사악하다. 네가 겉으로는 잘못을 인정하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회개하는 태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 일이 생겼을 때나 생긴 후 네가 전혀 진리를 구하지 않고,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지도 않으며, 진리에 따라 실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너의 태도는 사탄의 철학과 논리, 수단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사실은 문제를 회피한 것이다. 그럴듯하게 문제를 포장해 아무런 흔적이나 빈틈이 보이지 않게 하고, 나중에는 자신이 아주 똑똑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이 본 것은 이런 모습이지, 일이 임했을 때 네가 진실로 반성과 자백을 하고 회개한 후 진리를 구하며 진리에 따라 실행하는 모습이 아니다. 너의 태도는 진리를 구하거나 실행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도 아니라 사탄의 수단과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허상을 보여 주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드러냄에 반발하며, 하나님이 너에게 배치해 준 환경에 경계하고 대항하는 것이다. 너는 마음을 더 닫아 버려 하나님과 간격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겠느냐? 광명 속에서 살면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네가 진리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과도 멀어지면 틀림없이 흑암 속에 빠져 이를 갈며 애곡할 것이다. 사람이 이러한 내적 상태인 경우가 많으냐,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늘 자신을 이렇게 일깨우는 사람이 있다. ‘이번에 책망을 들었으니 다음에는 조심하고, 눈치 빠르게 행동하자. 매사에 정신 바짝 차려야 손해를 안 보지. 눈치 없는 사람은 바보라니까.’ 자신에게 늘 이렇게 깨우쳐 주고 일깨워 주면,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일이 닥쳤을 때 너는 한 방면의 진리를 구해 깨닫고, 그 방면의 진리를 얻어야 한다. 진리를 깨달으면 어떤 효과를 볼 수 있겠느냐? 한 방면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 방면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이 왜 너에게 그 일을 하려 하는지, 하나님이 왜 네게 그런 요구를 하는지, 하나님이 왜 환경을 마련해 너를 그렇게 채찍질하고 징계하는지, 왜 그 일로 책망하고 훈계하는지, 그리고 네가 왜 그 일로 넘어지고 실패하며 드러났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을 깨닫게 되면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생명 진입이 있게 된다. 이런 것들을 깨닫지 못하고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은 채 무조건 거부하거나 반항하면서 자신의 수단으로 이를 은폐하고 허상으로 모든 사람과 하나님을 대한다면, 너는 영원히 진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너에게 정직한 태도,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종하는 태도가 있다면, 어떤 일을 만나 아무리 마음이 괴롭고, 체면이 구겨지더라도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한편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옳으니 저는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태도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스스로를 반성해야 한다. 자신의 행위는 과연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어느 방면의 진리를 위배했는지를 반성하고, 또 자신의 속셈을 해부하면 자신의 실제 내적 상태와 실제 분량을 잘 알 수 있다. 그런 다음 진리를 구하면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원칙에 부합하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실행하고 체험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하게 된다. 진리가 네 내면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네 생명이 되고, 패괴 표출 문제는 모두 점차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일이 임했을 때 너의 태도와 관점, 내적 상태가 점점 더 긍정적인 쪽을 향하게 되면 너와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겠느냐? 혹시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점점 줄어들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네 의심, 추측, 오해, 원망, 패역, 대항 역시 점점 줄어들 것이다. 이런 것들이 줄어들면 일이 닥쳤을 때 너는 쉽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도하며 진리를 구하고 실행의 길을 구하게 된다. 너에게 일이 닥쳤는데 간파하지 못하고 뭐가 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데다가 진리도 구하지 않는다면 큰일이다. 너는 분명 사람의 방법으로 처리할 텐데, 처세 철학이나 교활한 방식, 빼어난 수단이 다 동원될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이다. 어떤 사람은 일이 닥쳤을 때 진리에 마음을 쓰지 않고, 늘 사람의 수단으로 처리할 생각만 한다. 결국 한참을 시달린 끝에 안색마저 어두워져도 진리를 실행해 내지 못한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이토록 가련하다. 지금 네가 기꺼이 본분을 이행하고 버리며 헌신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아직도 오해와 추측, 의심, 원망, 나아가 패역, 반항 등이 있거나 또는 각종 방식과 수단으로 하나님께 대항하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를 거부하는 것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진리가 너에게서 주인이 되기는 매우 힘들 것이며, 너는 무척 피곤하게 살 것이다. 사람이 늘 이렇게 소극적인 상태에서 늪에 빠진 것처럼 몸부림치고 고통받으며 시시비비 속에서 살아가는데 어떻게 진리를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구하려면 먼저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한동안 체험하면 어느 정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진리를 깨닫기가 쉽다. 늘 옳고 그름을 연구하고 시시비비에 얽매이면 진리를 발견하거나 깨달을 수 없다. 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가 생겨나고, 오해가 생겨나면 원망하기 쉽고, 원망이 터져 나오면 대항하게 된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심각한 과오가 되며, 과오가 많아지면 각종 악행을 저지르게 된 것으로, 징벌받게 된다. 시종일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네가 본분을 잘 이행하고, 말을 잘 듣고, 모범적으로 행동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이고, 성도의 품위를 갖추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런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네가 하나님을 대하는 여러 가지 잘못된 관점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주된 목표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고, 패괴 성품이 해결되면 사람이 하나님에게 품고 있는 오해는 사라진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된다. 패괴 성품이 해결되면 동시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점차 개선되고 갈수록 정상적이 된다. 그러므로 패괴 성품이 해결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추측과 의심, 시험, 오해, 의구심, 원망, 심지어 대항까지도 조금씩 해결된다. 사람의 패괴 성품이 해결되면 어떤 모습이 즉시 나타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가 달라지고,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대할 수 있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개선된다. 사람이 깨달은 진리를 실행에 옮길 수 있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본분을 이행하며 무성의하게 본분을 이행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을 기만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가진 관념과 오해도 갈수록 줄어들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도 갈수록 정상적이 되고 본분을 이행할 때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게 된다. 패괴 성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람과 하나님은 영원히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또 사람은 하나님을 대할 때 순종하는 마음도 없고, 이방인처럼 패역이 너무 많아서 속으로 늘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할 것이다. 그러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 원망을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게 가능한 일이냐? 결코 가능하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란 사람은 생각이 단순해서 관념이나 오해, 원망 같은 게 없어요. 그런 건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네가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해서 관념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 네가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해서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일을 피할 수 있느냐? 사람이 어떤 패괴를 드러내든, 그것은 사람의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은 누구나 사탄 본성에 따라 살아가고, 사탄 성품이 내면에 뿌리박혀서 본성 본질이 되었다. 사람에게는 그걸 없앨 방법이 전혀 없고, 오직 진리와 하나님 말씀으로만 모든 패괴 성품 문제를 조금씩 해결할 수 있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개선되었는지 여부는 어느 부분에서 나타나느냐? 사람과 일, 사물을 만났을 때 너의 태도와 관점이 어떤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네 태도와 관점이 사탄의 처세 철학이나 지식 이론에서 비롯되고, 네가 그런 것을 네 인생철학, 또는 인생의 격언으로 삼는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냐? 너는 진리를 얻었느냐? (아닙니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고, 아마도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네가 진리 실제에는 진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네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일을 만났을 때 네가 바로 감정이 격해져서 책상을 치며 욕을 하고, 거부하고, 순종하지도 않는다면 이것은 어떤 문제냐? 이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이냐? 왜 진리를 구하지 못하느냐? 그것은 네 마음속에서 아직도 진리가 주인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만한 일도 차분히 대처하지 못하고, 그깟 사소한 일에도 추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네가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서툴고, 화가 났다 하면 진리를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야 어떻게 생명 진입을 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지만, 어떤 일을 만나도 이방인처럼 사탄 철학에 기대 살면서 결코 진리를 구하지 않고, 본인이 사람이나 일을 대하는 관점을 바꾸지 않는다. 비록 이렇다 할 악을 행하거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겉보기에도 좋은 사람 같지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생명 진입이 없고,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다. 이들이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느냐? 아마 아주 힘들 것이다. 하나님을 오래 믿은 사람들 중에는 무슨 일을 만나든 “내가 볼 땐 어떻다.”, “나는 이렇게 저렇게 할 생각이다.”, “내 생각은 어떻다.”, 혹은 “옛말에 틀린 말이 하나 없다.”, 혹은 “유명인사 아무개가 그러더라.” 등과 같은 말을 즐겨 쓰는 사람들이 있다. 항상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사탄에 속하는 사람이고, 마음속에 진리가 조금도 없다는 증거다. 일이 생길 때면 늘 “하나님 말씀이 이러이러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말씀을 하신 적 있죠.”라고 한다든가 “하나님 집 설교에서 그러더라고요.”, 또는 “하나님 말씀 찬양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라고 하는데, 늘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문제를 고민한다면 그것은 네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진리 실제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 믿는 사람은 무슨 일이 생겨도 우선은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했는지 잘 생각해 보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본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근거가 되고, 출발점이 되고, 근원이 된다. 이것은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당연한 태도가 아니냐? 이는 최소한 갖춰야 할 태도다. 사람은 지금 매일같이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막상 일만 닥쳤다 하면 어머니가 그랬다느니, 옛말이 어떻다느니, 유명한 아무개가 그랬다느니, 속담이 어떻다느니, 속설이 어떻다느니 하는 소리만 늘어놓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먹고 마신 것이냐? 사람의 그런 태도와 반응에서 사람이 아직도 진리를 얻지 못했고, 진리 실제에도 진입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말에서 이방인의 어조를 엿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무감각하고 아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의 무감각하고 아둔한 모습은 어떻게 생겨나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서입니다.) 외양이 무감각하고 아둔한 사람은 내면이 어떻겠느냐? 바짝 메말랐다. 다시 말해, 진리의 양육과 목양을 받지 못해 굶주렸고, 아직도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은 무감각하고 아주 힘들게 살아가며 반응도 무척 느리다. 그뿐만 아니라 일이 닥쳤을 때도 아주 무력하다. 언제나 “하나님, 저는 방황하고 있습니다!”, “앞이 막막합니다!”, “저는 길이 없습니다!”와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런 게 좋은 말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왜 아직도 이런 말을 따라 하느냐? 아주 유행어가 되어 버렸다. 이런 말을 듣고 있으면 왜 그리 어색할까? 무슨 좋은 말도 아니니 따라할 필요도 없다. 그런 유행을 중요시하지 말고, 진리를 중요시하고, 자신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중요시해야 한다. 일이 생겼을 때 사람이 지니는 관점과 태도, 속셈, 출발점을 통해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있지 않는지 반성해야 한다. 반드시 반성해야 한다. 어떤 일이든 네가 사탄 철학이나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하는지, 아니면 진리를 구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결하는지, 혹은 절충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지, 네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네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장 명확히 드러낸다. 만약 언제나 사탄 철학과 사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쪽을 택한다면 그 결과는 진리를 얻지 못하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 인도를 얻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에 대해 관념과 오해가 생겨나 결국에는 하나님께 버림받고 도태될 것이다. 만약 네가 범사에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결할 수 있다면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 인도를 얻을 것이고, 갈수록 진리를 깨닫고 갈수록 하나님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한동안 이렇게 실행하고 체험하면 패괴 성품이 점차 정결케 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경우도 줄어들어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완전히 합하게 된다. 언제나 절충하는 방식을 택한다면 그것은 사실 여전히 사탄 철학에 기대어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살면 영원히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드러나 도태되는 수밖에 없다. 잘못된 방식을 택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셈이다. 그렇다면 얼른 바로잡아야 한다. 늦기 전에 방향을 돌려서 올바른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그러면 아직 구원받을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올바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려면 스스로 구하고 모색해야 한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한동안 체험하고 나면 바른길을 찾기 마련이다.
방금 교제한 내용이 무엇이냐? (진리를 추구하면 주로 무엇을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교제하셨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여러 가지 잘못된 관점과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다고 교제하셨습니다. 또 일이 생겼을 때 사람의 관점과 태도, 의도가 무엇인지, 사람이 사탄 철학,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그 일을 대할 것인지, 아니면 진리를 구해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교제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기억하기가 쉽다. 관건은 일이 생겼을 때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맞춰 볼 수 있느냐, 실행 원칙을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원칙을 적용할 줄 알면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진리를 실행할 수 있으면 진리 실제가 생겨난다. 진리를 깨닫는 것이 진리를 얻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진리를 실행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항상 진리를 실행하여 진리 실행이 원칙에 완전히 부합할 때, 이것이 바로 진리를 얻은 것이다. 글귀와 도리를 얘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 자질이 훌륭하다고 볼 수는 없고, 일이 생겼을 때 진리를 구해 해결할 수 있어야 이해 능력이 있는 것이다.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떤 형제자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상대가 너에게 그의 문제점을 지적해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이는 네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대하는지와 관계가 있다. 너는 이 일을 진리 원칙으로 대할 것이냐, 아니면 처세 철학으로 대할 것이냐? 너는 상대의 문제점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핑계를 댄다. “지금은 제 분량이 작아 알 수가 없네요. 언젠가 확실히 알게 되면 그때 얘기하겠습니다.”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처세 철학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건성으로 대하는 것 아니겠느냐? 본 만큼 말하면 된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때 모른다고 하는 것은 진심이다. 하지만 생각이 있고 파악한 것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미움을 살까 봐, 피차 간에 감정이 상할까 봐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처세 철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혹은 상대가 그릇된 길을 걷는다는 것을 알아챘다면, 사랑으로 돕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문제점을 지적해 상대가 반성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모르는 체한다면, 이는 사람을 해하는 것 아니겠느냐? 만약 네가 그를 한 번 도와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닌 데다가 고약한 성미에 성품도 흉악하고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과는 말을 섞지 않는 것이 차라리 현명하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데도 네가 그와 말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랑이 없는 것이다. 형제자매와 이렇게 함께 지내면서 잔머리를 굴리고 지능을 겨루며 늘 상대를 웃음거리로 삼으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 안에는 일종의 성품이 담겨 있는데, 완전히 사탄 철학으로 살면서 말과 행동이 정상 인성의 이성 범위를 벗어나고, 일 처리도 진리 원칙을 따른 것이 아니다. 그럼 진리 원칙을 따른다면 이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어떻게 해야 진리에 부합할 수 있겠느냐? 몇 가지 원칙이 있겠느냐? 첫째, 최소한 사람을 쓰러뜨려선 안 된다. 우선 그의 약점이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그를 쓰러뜨리지 않을지 생각해야 한다. 이는 최소한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만약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데 그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한다. 손 놓고 있거나 웃음거리로 삼는다면, 이는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 해하는 것으로, 그런 자는 양심도 이성도 없고 사람에 대한 사랑도 없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있다면 형제자매를 웃음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그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고, 어떻게 된 일인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해야 한다. 회개할 수 있을지 여부는 그의 몫이다. 네가 책임을 다했다면, 설령 그가 지금 당장은 회개하지 않을지 몰라도 언젠가 깨달음을 얻게 되면 너를 원망하거나 고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형제자매를 대할 때는 최소한 양심과 이성의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 빚지지 말되, 도와줄 수 있는 만큼 도와주어야 한다. 이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형제자매에 대해 사랑과 진리 원칙으로 대해야 한다. 이런 자가 바로 가장 좋은 사람, 마음씨가 가장 선량한 사람이다. 물론, 진정한 형제자매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떡으로 배만 불리고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형제자매가 아니다. 진정한 형제자매를 대할 때는 진리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든, 어떤 길을 걷든 사랑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최소한 어떤 성과를 내야겠느냐? 첫째, 그를 쓰러뜨리거나 소극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둘째, 그를 도와 잘못된 길에서 돌이킬 수 있게 해야 한다. 셋째, 그가 진리를 깨닫고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사랑으로 도와주어야 얻을 수 있는 성과이다. 만약 진실한 사랑이 없다면, 이 세 가지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며, 한두 가지 성과를 낼 수 있다 해도 다행이다. 이 세 가지 성과는 또한 사람을 도와주는 세 가지 원칙이기도 하다. 너는 이 세 가지 원칙을 모두 알고 파악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너는 정말 그의 어려움을 알고 있느냐? 이것 또한 문제 아니겠느냐? 너는 ‘그가 겪는 어려움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내가 그를 도울 수 있을까? 내가 분량이 너무 작아 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도 함부로 말한다면 잘못된 길로 인도할지도 몰라. 또 그의 이해 능력은 어떨까? 자질은 어떨까? 그는 고집스러운 사람일까?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일까?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일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일까? 만약 내가 그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에게 교제해 줄 때 나를 질투하지 않을까? 소극적으로 변하지는 않을까?’ 등을 모두 생각해야 한다. 확실하게 생각해 본 후 그에게 가서 교제하며, 그의 문제점에 맞춰 하나님 말씀 몇 단락을 읽어 주어라. 그가 하나님 말씀 속에서 진리를 깨달아 실행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되고, 그는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이 간단하겠느냐?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만약 진리를 깨달았다면, 단 몇 마디만으로 상대가 깨우침과 도움을 받게 할 수 있다. 사랑으로 남을 도울 때 관건은 문제에 맞춰서 하나님 말씀을 몇 단락 교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 하나님 말씀의 교제 없이 사람의 말만으로는 아무리 얘기해도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저 권면만 할 줄 아는 사람은 남이 어떤 문제에 부딪히든 이런 식이다.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으세요.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 되고, 소극적이 되지 않을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돼요.” 그게 그리 간단한 일이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말만 하면 바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것이냐? 사람이 진리를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나님 사역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이냐? 만약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극적이 되지 않을 것이고, 그다지 어려운 일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도리를 얘기하고 구호를 외친다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은 더더욱 간단하지가 않아서, 권면하는 말 몇 마디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게 할 수는 없다. 설령 하나님 말씀을 교제해 그 당시에는 상대가 유익을 얻게 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은, 한 번 진리를 교제해서 패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알아듣게 교제했다고 그 즉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겪어야 효과를 낼 수 있다. 글귀와 도리만으로 사람들을 권면하는 자는 모두 가장 얄팍한 사람이다. 아무런 진리 실제도 없고, 글귀와 도리로만 남을 돕는 것은 아무 효과도 없다. 이를 두고 건성으로 대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을 대하는 것은 진정성이 없다. 아주 위선적이고 선량하지 않은 마음이다. 한 마디로, 이런 사람은 외식하는 사람에 해당한다. 남을 동정하는 마음,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남을 돕겠느냐?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반드시 진리를 깨닫고 문제의 본질을 간파한 다음, 사람들에게 진리 원칙에 따라 이를 명확히 교제해 주고, 또한 실행의 길을 알기 쉽게 교제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상대는 진리를 깨달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실행할 길이 생겨서 비로소 문제가 해결된다. 이런 일을 모두 겪어야 하는데, 실제로 체험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진리는 교제하면 할수록 분명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그만큼 실행 길이 생긴다. 진리를 정말로 깨닫고 나면 어떻게 진리를 실행할지 알 수 있다. 하나님 믿는 일은 이렇게 체험해야 한다.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다 보면, 문제가 해결될 때마다 패괴 성품도 하나씩 해결된다. 해결된 문제가 많을수록 패괴 성품도 그만큼 해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문제를 해결할수록 사람의 패괴 성품은 줄어들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실제는 더 많아진다. 그러는 동안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된다. 문제를 많이 해결하고 진리를 많이 깨달을수록 실행의 길도 그만큼 많아진다. 또한, 문제를 많이 해결하고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될수록 진입하는 진리 실제도 많아진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과정이다. 즉, 끊임없이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고, 문제가 해결되면 또다시 문제를 발견하고, 또다시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나중에 해결한 문제도 많아지고 진리도 많이 깨닫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겨도 혼자서 빨리 해결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의 분량이 점점 자라난다. 그러면 갈수록 문제가 줄어들고, 어려움도 줄어들고, 패괴 표출도 분명 줄어든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가 많아지고 체험 간증도 점점 많아진다. 바로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 성품이 변화하게 된다. 최종에는 하나님과 합할 수 있고, 패역이 모조리 사라지고, 어떤 일에서든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분량이 자라서 완전히 구원받은 것이다.
진리 실행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정말 간단하다. 하지만 사람이 이해 능력이 부족하고, 마음이 거기에 없어서 늘 소홀히 다루고, 건성으로 대충 대한다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진리를 얻는 것이냐? 교활한 수단으로 얻는 것이냐, 아니면 강제로 손에 넣는 것이냐? 둘 다 아니다. 네가 현실 생활을 살면서 조금씩 쌓고, 구하고, 체험하고, 모색하면서 점차적으로 얻게 된다. 성령도 이렇게 인도한다. 가끔 너에게 건넨 그 말씀을 너는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겠지만, 진리를 구하고 또 일상을 살다 보니 깨닫게 되고, 마음이 밝아지고 길이 생긴다. 너는 얻었는데 남들은 아직 얻지 못했다면, 너는 그 방면의 진리에서 발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너만 덤으로 얻은 것이다. 일부 진리의 세부적인 내용은 체험과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 경험하는 과정에서 네가 깊이 체험하고 자세하게 체험할수록 더 정확한 길을 찾게 되고, 어느새 너는 그 길을 따라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게 된다. 네가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더 많은 깨우침을 얻고, 더 많은 진리의 세부 내용을 알고, 더 많은 진리 실제를 알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다. 네가 체험하고 실행할 줄 안다면, 진리 실행은 어렵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실행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진리 실행이 아주 추상적이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대학에 가는 것보다, 무슨 첨단 기술을 연구하는 것보다도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그것은 마음 쓰는 일이다. 어떤 전공 지식이나 이론도 그것을 배우려면 전부 기억력에 의존하고 두뇌 분석과 연구에 의존해야 하지만, 진리를 얻는 것만큼은 마음을 써야 한다. 마음을 써서 느끼고, 음미하고, 공을 들여 체험하다 보면, 서서히 진리를 실행하는 길을 정확히 찾을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그러면 보물을 얻게 된다. 진리를 얻는 비결이 무엇이냐? 먼저 네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처리할 때, 사탄의 사상과 논리, 처세 철학, 수단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막다른 길이다. 네가 사탄 철학으로 살아간다면 영원히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일이 닥쳤을 때 네가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이 사람의 방법과 수단으로 처리하고 해결하려는 것이라면, 늘 개인의 이익과 체면만을 지키려 한다면, 그것은 막다른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만약 문제가 생겼을 때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구해 하나님이 그렇게 안배한 것이 어떤 공과를 배우고 어떤 진리를 깨달으라는 뜻인지 알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든 무감각하고, 난감해하고, 방황하고, 무기력하고,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리를 얻을 기회를 많이 주었다. 다만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잘못된 길을 택하는 바람에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패괴 성품 속에서 살면서 모두 지위와 허영, 이익, 욕망을 위해 살아간다. 패괴된 인류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조금씩 차이는 있어도 대동소이하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얼마가 되든, 하나님을 믿은 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체험함으로써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패괴 성품이 차츰 해결되고, 패괴 표출이 점점 적어진다. 이것이 이방인과는 완전히 다른 점이고, 이 둘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이는 진리 추구를 통해 이룬 변화가 아니냐? 한 이방의 마귀가 하나님을 믿은 후로 진리를 얻고 사람답게 사는 진정한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을 믿고서 거둔 수확이자 하나님을 믿고서 이룬 성과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은 뒤에도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변화가 없고 여전히 이방인과 똑같다. 이런 사람은 도태될 것이다. 어째서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똑같이 본분을 이행하는데도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느냐? 관건은 사람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읽을수록 마음이 밝아지고, 설교를 들을수록 더 잘 이해해서 늘 발전이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읽기 싫어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일에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못하고, 벗어 버리지 못한다. 아닌 척해도 숨길 수 없고,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가 없다. 패괴된 인류는 모두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기 때문에 이방인이건 하나님 믿는 사람이건 사탄 패괴 성품의 본질은 사실상 똑같다. 그래서 다들 지위와 체면, 이익,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다투는 이유가 무엇이냐? 한 가지 일을 두고 피 터지게 싸우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전부 그런 것들 때문이다. 그 방식이 무엇이고, 수단과 형식이 어떻든, 사실 그 목적은 같다. 사탄은 왜 반 공중으로 내쫓겼느냐? (하나님과 지위를 두고 다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본래 모습이다. 지금 사탄의 ‘유전자’가 패괴된 인류에게 퍼져서 사람을 패괴시켰다. 사람은 사탄과 같은 부류가 되었고, 사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살아 내는 것은 사탄과 똑같다. 네가 사탄의 본성 본질에 내포된 이런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조금씩 해결한다면, 구원을 받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패괴 성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진리를 실행하기 싫어하고 마음대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책망과 훈계를 받고 한동안 소극적이 되고 괴로워한 다음 겨우 진리에 따라 실행합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 그렇다. 다른 사람이 재촉하고 밀고 당겨야 겨우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진리를 실행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이냐? 지금 어떤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주로 패괴 성품의 방해에서 비롯된다. 그게 다 사람이 명예와 이익, 지위를 사랑하고, 허영과 체면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와 다툼, 논쟁은 전부 누가 더 잘났는지를 겨루는 것이고, 거기서 남을 굴복시킨 사람이 고개를 쳐든다. 누가 더 식견이 뛰어나고, 수준이 높고, 권위가 있고, 결정권이 있는지, 이런 것을 두고 쟁탈전이 끊이지 않는다. 그 뒤에 감춰진 것이 바로 사탄의 성품이고, 모두가 명예와 이익, 지위만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 점을 간파하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최소한 이렇게 쉽게 해결이 가능한 표면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점차적으로 사람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추측, 의심, 원망,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대항, 시험, 힘겨루기를 해결해야 한다. 이런 것을 철저하게 해결하면 사람은 변화하여 욥처럼 되고, 하나님 눈에 온전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왜 욥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겠느냐? 하나님이 그에게 내린 시련을 보면 욥이 하나님께 대항하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생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을 체험하면서 그의 거역과 대적은 이미 처리되고 해결되었다. 그런 소극적인 요소들이 해결되자 하나님의 시련이 임했을 때 그가 보인 모습은 여느 패괴된 인간과는 달랐다. 그가 시련 도중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했던 이 말이 도리이냐? 절대 도리가 아니다. 이 말은 꽤 무게가 있다. 지금껏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말은 욥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고, 욥의 개인적 경험과 체득에서 우러난 말이다.
너희는 매일 패괴를 너무 많이 드러내고, 늘 사탄 성품으로 살면서 별로 변화하지도 않은 자신을 보면 속으로 걱정되지 않느냐? (걱정됩니다. 가끔 괴롭기도 합니다.) 걱정되는 것도 정상이고, 괴로운 것도 정상이다. 아무리 걱정스럽고 괴로워도 냉정함을 잃지 말고 패괴 성품을 어떻게 해결할지 구해야 한다. 이런 자세가 바른 자세다. 만약 네가 몇 년을 시달렸는데도 패괴 성품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건 큰일이다. 그 괴로움이 다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나의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내가 가진 어떤 패괴 성품이 해결되었는가? 어떤 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게 되었는가?’ 항상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원래 이런 일만 생기면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을 오해했어. 지금은 이런 일이 생겨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그건 네가 과거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뜻이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으면 하나님을 대하는 너의 태도가 달라진다. 자연스레 하나님께 경외심이 생기고 순종하는 자세가 생긴다. 이것은 평범하게 존중하는 차원이 아니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거나, 혹은 동경하고 사랑하고 미련을 품고 의지하는, 이런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진실한 경외다. 현재의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다. 그것은 너무나 요원한 일이다. 너희는 지금 무엇부터 추구해야 하느냐? 무슨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의심하지 마라. 어떻게 해야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느냐?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다음으로는 자기 관념과 맞지 않는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오해하지 않겠느냐? 역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서서히, 하나씩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를 깨뜨리고 해결하게 된다. 언젠가 아무리 커다란 환난과 시련에 맞닥뜨려도 반항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이 어떻게 시련을 내리든 순종할 수 있다면, 그때는 성공한 것이다. 지금 너희는 모두 어떤 단계에 있느냐? 일이 생기면 너희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인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옳은가?’ 심지어 이런 생각도 한다. ‘하나님이 어딨어? 하나님이 정말 있는 거야? 난 왜 느껴지지 않지?’ 이런 생각, 이런 내적 상태가 아직도 많은데, 그건 옳지 않다.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기까지 아직도 멀었으므로 계속 노력하고 추구해야 한다. 지금은 분량이 너무 작고, 진리 실제를 갖추기 위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자기는 됐다고, 실제가 조금 있으니까 천당에 들어가 천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만한 실제로는 아직 멀었다. 설령 날개를 달아도 너는 천사가 아니다. 자신을 너무 훌륭하고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마라. 자기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 너는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느냐? 네가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한 사람이냐? 이 기준에 맞춰 가늠하면, 너는 하나님 요구에 이르기에 아직 멀었다. 아직 몇 년은 더 체험해야 한다.
2018년 3월 11일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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