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분 이행에 관한 말씀 (발췌문 36)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야 진정으로 즐겁네> 이 찬양의 가사가 매우 실제적이니, 몇 구절 골라 교제해 보겠다. 우선 “육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키네”라는 구절을 교제해 보자. 이는 어떤 내적 상태이냐? 사람이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킬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은 어떠하냐? 양심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피조물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께 보답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킬 수 있다. 즉, 본분을 이행할 때 진지하게 책임감을 가지며, 건성으로 대충 하거나 꾀부리거나 책임을 미루지 않고, 또한 태도가 단정하며, 정상적인 내적 상태와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고, 양심적이고 이성적이며, 하나님을 배려하고, 본분에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다. “육을 걱정하지 않고”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여기에도 여러 내적 상태가 있다. 크게는 자신의 육적 장래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앞날을 위해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나중에 늙으면 어떻게 될지, 부양해 줄 사람이 있을지,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범사에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며 제대로 된 본분 이행을 최우선 순위에 놓는다.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하나님의 부탁을 지키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면, 조금은 사람다운 모습을 갖춘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사람다운 모습을 갖춘 것이다. 최소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충성심이 있고, 마음과 뜻을 다해야 한다. 무엇을 가리켜 ‘본분을 지킨다’고 하겠느냐?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도망치거나 본분을 내팽개치거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을 가리켜 ‘본분을 지킨다’고 한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일을 맡았는데 지켜보는 사람도 독촉하는 사람도 없다고 해 보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본분을 지키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는 것은 첫걸음이자 한 측면이다. 다른 측면으로는 마음과 뜻도 다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마음과 뜻을 다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어떤 요구를 하든 전부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본분을 자신의 일로 여겨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이 단속하고 지켜보고 점검하고 독촉하고 감독하지 않아도, 나아가 책망과 훈계가 없어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 본분을 이행하는 건 내 책임이고,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야. 이 일이 내게 주어졌잖아. 또 나는 원칙을 들었고 그 원칙에 관해 파악도 했어. 그러니 한결같이 열심히 해야 해. 최선을 다해 이 일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고.’ 계속 그렇게 하면서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킨다는 것이며,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모습이다. 그럼 사람이 무엇을 갖춰야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킬 수 있겠느냐? 먼저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양심이 있어야 한다. 이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이 밖에,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면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일편단심으로 충성해야지, 딴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며, 책임을 지지 않거나 자신의 취미나 기분에 따라 일을 처리해서도 안 된다. 이는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충성하는 것이겠느냐?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기분, 환경, 사람, 일, 사물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부탁을 받아들이겠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거야.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러니까 이걸 내 일로 간주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 어떤 식으로든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할 거야.’ 네게 이러한 내적 상태가 있으면 양심의 지배를 받을 뿐만 아니라 충성하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효율과 효과를 따지지 않고 일을 끝내는 것에 만족하면서 그저 힘을 다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양심의 기준에 지나지 않으며 충성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요구 기준은 양심의 기준보다 약간 높다. 이것은 단지 힘을 다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까지 다해야 한다. 항상 본분을 자신이 해야 할 일로 여기고, 이 일에 대해 부담을 가지며, 사소한 실수라도 저지르거나 조금이라도 대충대충 하려는 내적 상태가 있으면 가책을 받고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돼. 하나님께 정말 죄스러워.’라고 생각해야 한다. 진정으로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누가 감독하든 안 하든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여겨 본분을 이행한다. 하나님이 그에 대해 기뻐하든 않든,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는 항상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이것이 바로 충성심이다. 이는 양심의 기준보다 높지 않으냐? 양심의 기준은 많은 경우 외부적인 일의 영향을 받거나 혹은 그저 힘을 다하면 그만인 것이라 순결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 하지만 충성심을 얘기하자면, 충성스럽게 본분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순결도가 높은 것으로, 이는 그저 힘만 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고 너의 몸과 마음을 모두 본분에 쏟아야 하는 것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때로는 육적으로 고통을 좀 겪어야 한다. 대가를 좀 치러야 하며, 본분 이행에 모든 생각을 집중해야 한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거나 본분 이행을 지체시키지 않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면, 대가를 치를 수 있어야 한다. 육적 가정, 개인사, 개인의 이익을 모두 버려야 하고, 자신의 허영심, 감정, 육적 즐거움, 심지어 청춘, 결혼, 장래, 운명 등등 이런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버려야 하며, 기꺼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그러면 충성심이 있는 것이고, 이렇게 살면 사람다운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양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양심의 기준에 더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충성심으로 자신을 가늠하고 자신에게 요구하며 이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추구한다. 세상에 이런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하나님 선민 중에서도 어쩌면 천 명, 또는 만 명 중에 한 명 겨우 있을까 말까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의 삶은 가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 아니겠느냐? 당연히 삶이 가치 있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다음 가사를 보자. ‘자질은 매우 부족하나 나에게는 정직한 마음이 있네.’, 이 말은 듣기에 참 현실적이고 여기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들어 있다. 어떤 요구이냐? 바로 자질이 부족해도 괜찮지만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역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너는 어떤 상황, 어떤 배경에서도 반드시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정직한 말을 하며, 정직하게 일을 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도 마음과 뜻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며, 꾀를 부리지 말고,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이 되지 말고, 거짓말하거나 기만하지 말아야 하며,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진리에 근거해 일을 해야 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자질이 너무 부족해 아무리 해도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늘 합격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마음과 힘을 다해서 일을 하지만 늘 원칙을 파악하지 못해 성과가 여전히 별로 좋지 않다 보니, 결국에는 자신의 자질이 부족함을 원망하게 되고 소극적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자질이 부족하면 길이 없는 것이냐? 자질이 부족한 것은 죽을병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구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예전에 하나님은 정직하지만 우매한 사람들 때문에 슬퍼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우매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많은 경우 우매함은 자질 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진리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깊이 깨닫지 못하고, 늘 겉으로 보이는 글귀, 도리, 규례만을 이해하는 데 그친다. 그래서 많은 문제들을 꿰뚫어 보지 못하며,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원칙을 파악하지 못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원하지 않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길과 방향은 무엇이냐?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입으로 말만 하면 정직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정직한 사람의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정직한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는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다. 둘째, 정직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모든 일에서 진리를 구하고 실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네가 스스로 무척 정직하다고 말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이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겠느냐? 네가 “저는 자질이 부족해도 마음은 정직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본분이 임했을 때, 고생할까 두려워하고 잘 이행하지 못하면 결과에 책임을 지게 될까 두려워 핑계를 대며 거부하거나 다른 이가 이행하도록 제안한다면, 그것이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겠느냐? 그것은 분명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직한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반드시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며, 자신이 이행해야 하는 본분에 충성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 드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측면의 모습이 있다. 하나는 정직한 마음으로 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육적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딴마음을 품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을 꾀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정직한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 너의 마음과 사랑을 전부 본분에 사용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직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며 보여 줘야 하는 모습이다. 만약 네가 깨닫고 알게 된 것을 행하지 않고, 50~60%의 힘만 쓴다면 이는 마음과 힘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사리는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며 몸을 사리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을 쓰지 않으며, 반드시 도태시킨다. 하나님은 오직 정직한 사람에게만 본분을 이행하게 한다. 충성스럽게 힘쓰는 자라 해도 반드시 정직한 사람이어야 한다. 언제나 건성으로 임하고 몸을 사리는 사람은 전부 간사한 사람이자 마귀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모두 도태될 대상이다. 혹자는 ‘정직한 사람으로 살려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기만 하면 돼. 사실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건 쉬워.’라고 생각하는데, 이 주장이 어떠하냐?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그렇게 좁은 범주의 일이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너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어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정직한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다. 그러므로 정직한 마음이 더없이 귀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무엇이겠느냐? 그 마음은 네 행위를 지배하고 네 내적 상태를 바꿔 놓으며, 네가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께 인정받게 한다. 이 마음은 더없이 귀하다. 네가 그렇게 정직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러한 내적 상태로 살 것이고, 그러한 행위와 노력이 있을 것이다. 이 가사들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모든 구절이 다 문자적 의미처럼 단순하지 않으니, 곰곰이 생각해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수확이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가사를 살펴보자. “매사에 충성을 다해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하리.”라는 이 말에는 실행의 길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어려움이 닥치면 소극적이 되어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런 사람은 문제가 있다.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겠느냐? 그는 왜 어려움이 닥치면 자신이 소극적으로 변하는지, 왜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지를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만약 그가 자신을 반성하고 진리를 구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사람의 최대 어려움은 주로 패괴 성품의 문제이지만, 진리를 구할 수 있다면 패괴 성품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만 하면 모든 일에 충성을 다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 ‘매사’는 무슨 일이든,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일이든 리더 일꾼이 너에게 배치한 일이든, 아니면 갑자기 너에게 닥친 일이든, 그것이 네가 해야 하고 네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라면 충성을 다해 네가 맡은 책임과 본분을 다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듣기에 이 원칙은 약간 거창해 사람이 이르기에 다소 어려운 듯하다. 좀 더 현실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바로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본분을 지키고 제대로 이행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리더 일꾼을 하든 아니면 어떤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든, 모두 어느 정도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는데,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되겠느냐? 진리 원칙을 지키지 못해도 되겠느냐? 만약 각 측면의 진리를 네가 다 깨닫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자 본분을 지키는 것이며,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행의 길이다. 이렇게 하기 쉬우냐, 어려우냐? 만약 이행하는 본분이 네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라면, 너는 이를 자신의 책임이자 의무이며 당연히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매우 행복하고 즐겁고 편안해할 것이다. 이는 네가 원해서 하는 것이고, 네가 충성을 다할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네가 싫어하는 본분이나 이행해 본 적 없는 본분을 맡게 된다면, 충성을 다할 수 있겠느냐? 이는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노래를 잘하는 너에게 찬양팀에서 이행하는 본분은 네가 좋아하는 일이자 기꺼이 이행하고자 하는 본분이다. 하지만 만약 너에게 난이도가 좀 있는 복음 전파라는 다른 본분을 맡긴다면, 순종할 수 있겠느냐? 너는 고민을 하다가 말한다. “저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바로 복음 전하러 가기 싫다는 뜻이다. 뻔히 그런 뜻인데도 너는 계속해서 “저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요.”라고 말한다. 리더 일꾼이 아무리 “복음 전파를 연습해 보세요. 진리로 많이 무장하면 당신의 생명 성장에도 더 유리합니다.”라고 권해도, 너는 여전히 계속 “저는 노래하는 걸 좋아해요. 춤추는 것도 좋아하고요.”라고 말하며 아무리 얘기해도 복음 전하러 가기 싫어한다. 왜 싫어하는 것이냐? (흥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흥미가 없기 때문에 가기 싫어하는데, 이는 무슨 문제이겠느냐? 이는 기호와 개인의 입맛대로 본분을 선택하는 것으로, 순종이 없는 것이다. 순종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만약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면, 너는 진실한 순종이 별로 없는 것이다. 이 일의 경우, 진실하게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어떻게 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이때 이 측면의 진리를 묵상하고 교제해야 한다. 모든 일에 충성을 다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려면 한 가지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며, 하나님이 맡기는 모든 부탁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네 입맛에 맞거나 흥미를 갖는 것이든, 네가 싫어하는 것이든,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어려운 것이든, 너는 다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한다.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배우고 체험하고 진입도 해야 한다. 고생하고 수고스럽고 모욕을 당하며 고립된다 할지라도 충성을 다해야 한다. 이렇게 실행할 수 있어야 모든 일에 충성을 다하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 너는 그것을 자신의 사업이 아닌 본분으로 여겨 이행해야 한다. 본분을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행하라고 맡긴 일이다. 사람의 본분은 바로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 그것이 바로 너의 본분이다. 네가 하나님의 요구대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맡긴 부탁임을,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임한 것임을 확실히 깨닫는다면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본분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본분 이행 과정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모든 난관을 극복할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탁을 절대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본분도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어떤 본분을 부탁하든, 어떤 어려움이 있든 거부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실행의 길이다. 다시 말해, 매사에서 진리를 실행하고 충성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점은 어디에 있겠느냐? ‘매사’라는 말에 있다. 이 ‘매사’는 네가 좋아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고, 네가 잘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으며, 더욱이 네게 익숙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로는 서투를 것이고, 때로는 배워야 할 것이며, 때로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때로는 고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이라면 너는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충성을 다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실행의 길이다. 어떤 일이 생기든 진리를 구해야 하고,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지 확신한다면 그렇게 실행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가사에는 “마음에 거리낌이나 간사함 없이 빛 속에 살아가네.”라는 구절이 더 있다. 이 길은 누가 준 것이냐?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마음과 영을 하나님께 완전히 열어 놓았고, 숨길 것도, 피할 것도 없다는 뜻이다. 또한,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털어놓았으니 이것은 온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의미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과 간격이 있겠느냐? 없다. 그러면 하나님께 쉽게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를 가리켜 간사하다고 해도, 교만하고 독선적이라고 해도 그는 다 인정한다. 그는 인정하기만 하면 끝인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진리 원칙을 향해 노력하며, 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치고,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시정할 수 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수많은 잘못된 행동 방식을 고치게 되고, 간사함, 기만, 대충 임하는 것 등이 점점 줄어들며, 살아갈수록 점점 더 광명정대해지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목표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면 빛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사람이 빛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행한 일이므로 사람이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사람이 빛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며, 일이 닥칠 때마다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는 법을 알고 양심과 이성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비록 의인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보기에는 제법 어느 정도 사람다운 모습을 갖춘 것이다. 최소한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지 않게 되었으며, 일이 닥치면 진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으니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게 된다. 비록 진리를 깊이 깨닫지는 못했지만 말을 듣고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고, 악에서 떠날 수 있다. 그에게 맡긴 임무나 본분을 마음과 뜻을 다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신뢰할 만하며, 하나님도 마음을 놓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빛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빛 속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마음을 숨길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을 수 있겠느냐? 여전히 뒤에서 떳떳하지 못한 꼼수를 부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의 마음은 완벽하게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고, 감추고 숨긴 게 없다. 그는 하나님에게 마음속 말을 할 수 있으며, 무슨 일이든 다 하나님이 알 수 있도록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조금도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기준에 도달하면, 사람의 삶이 수월해지고 자유로워지며 해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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