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길 (제 2 부)

지금 너희가 정직한 사람이 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체험하고 있느냐? 성과가 있느냐? (가끔은 실행했지만 가끔은 잊기도 했습니다.) 진리 실행을 잊을 수가 있단 말이냐?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문제를 보여 주는 것이냐? 너희가 정말로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다. 너희는 진리를 실행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어떻게 해야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어떤 이성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항상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했으므로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삼아 추구해야 한다. 사람이 어떤 진리를 갖추고 어떤 실제에 진입해야 비로소 정직한 사람이 되고 또 베드로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고 이해해야 하며, 길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정직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될 희망이 있다. 만약 네가 정직한 사람과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 특히 진리를 받아들이고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을 깔본다면, 네가 항상 이런 사람을 깔본다면 너는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사악한 자이다. 충성스럽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 진리를 실행하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르는 사람을 깔볼 수 있다면 너는 부정적인 사람으로, 긍정적인 사람이 아님이 분명하다.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와 직결된다. 긍정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는 사람이 마음속으로 무엇을 동경하고 좋아하느냐에 달려 있다. 너는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분명히 구별하고, 경계를 명확히 할 수 있고 옳은 입장에 설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편에 서고 진리의 편에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네 마음가짐이 완전히 정상적인 것이며, 너는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깔본다면 너는 사탄의 편에 선 사람이며 부정적인 인물이다. 어떤 이들은 정직한 사람을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고 무시하고, 말재주가 좋고 수단을 부리고 입에 발린 말로 남을 잘 속이며, 높은 자리에 서서 거창한 설교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면 너는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너는 바리새인을 본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바른길에 들어설 수 없고 외식하는 바리새인에 속한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고 동경하는 것을 추구한다. 지금 너희는 마음속으로 무엇을 동경하고 있느냐? 아마 너희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좋아하는 것과 혐오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데, 어떤 일에서 사탄의 편에 섰는지도 모른다. 가끔 말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지만 행동하면 진리에서 벗어난다. 이는 진리가 없으면 굳게 서지 못하고 왼쪽으로 치우쳤다가 오른쪽으로 치우쳤다가 하며 계속 흔들리게 된다는 뜻이다. 막 설교를 듣고 나서는 진리를 깨달은 것 같아서 바른길로 가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내면이 어두워지면 또 치우친 길로 가게 된다. 이런 사람이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겠느냐? 설령 바른길을 선택한다 해도 나아갈 수가 없다. 그의 내적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를 조금도 깨닫지 못한 흐리멍덩한 사람이다. 온종일 얼떨떨해서 입으로는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일이 닥치면 착한 사람을 깔보고, 입으로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일이 닥치면 간사한 사람이 된다. 착한 사람이 이끌면 착한 사람을 따르고, 악인이 이끌면 악인을 따른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겠느냐? 온전케 할 리 없다. 조건에 한참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을 깔보고, 정직한 사람을 깔보고, 정성스럽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을 깔보고, 진리를 추구하고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 고통받는 사람을 깔보면 이런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므로 구원받을 수 없다. 마음씨가 선량한 사람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속으로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고, 긍정적인 사람과 접촉하길 좋아하기 때문에 많은 이로움을 얻을 수 있다.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설사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진리를 얻을 수 없다. 그가 마음속으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얻고 싶어도 얻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감정 그리고 관념과 상상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 대해 교제했는데 혈기라는 한 가지 측면이 더 있다. 이것도 역시 패괴 성품이 표출된 모습 중 하나다. 패괴된 사람은 혈기에 속한다. 혈기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혈기 속에 감정의 성분, 기분의 성분이 있느냐?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분이 있느냐? 이런 것들이 모두 있다. 이것은 성품의 측면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혈기가 아니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그 사람의 방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리다.”라는 것은 혈기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으며, 만약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 등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혈기다. 혈기는 화가 날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지 않았을 때도 자주 나타난다. 이를테면 사람이 사탄의 성품에 따라 살고, 누군가의 말이 거슬리거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꾸짖으려 하거나 누가 자신에게 불리하면 보복하려는 마음이 든다. 이런 게 혈기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혈기에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지위를 내세워 말하거나 사람을 꾸짖는 것입니다.) 지위라는 유리한 조건을 이용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타인을 꾸짖어 화풀이하는 것도 역시 혈기다. 사실 사람은 혈기를 드러낼 때가 아주 많다. 사람의 언행에서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은 많은 경우 사람의 사심, 욕망, 원망, 증오, 분노에서 나오는데 이것들은 모두 혈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혈기를 드러내는 것은 증오, 분노, 복수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매우 광범위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자세한 얘기는 접어 두기로 하자. 패괴된 사람은 모두 혈기가 있다. 혈기는 사탄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정상적인 인성의 이성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에는 더더욱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패괴 성품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모두 혈기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것이 혈기가 아니겠느냐? (혈기입니다.) 은혜를 원한으로 갚는 것은 어떠냐? 역시 혈기다. 그럼 노발대발하는 것은 어떠냐? 그 역시 혈기다. 일이 닥쳤을 때 비이성적이며 ‘앞뒤 가릴 것 없이 내 분부터 풀어야겠어. 결과가 어떻든, 원칙이 뭐든, 그가 누구든 간에 우선 화부터 풀고 보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혈기라 한다. 혈기란 결국 무엇이냐? 바로 패괴 성품이고, 사탄의 성품이다. 혈기에는 이성이 눈곱만치도 없다. 혈기는 일종의 야성이고, 그 본질은 짐승 같은 본성의 분출로, 정상적인 인성의 이성은 조금도 없다. 비이성적인 모습은 곧 제정신을 잃거나 추태를 부리고, 스스로 단속하지 못하고 폭발하며,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혈기다.

성품이 변화되려면 가장 기초적인 것은 네가 자신의 패괴 성품이 주로 몇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또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 네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네 내적 상태가 어떤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의 모든 내적 상태는 패괴 성품에서 비롯되며, 때로는 한 가지 패괴 성품에서 다양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내적 상태가 생길 수 있는데, 네가 이것을 모두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또 분별한 다음 인식이 조금 생긴 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서 드러나는지, 어떤 측면의 문제에 속하는지 해부하고 알 수 있어야 한다. 분명하게 인식한 후에는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적합한지 알게 된다.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안다고 해서 실행해 낼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바로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패괴 성품이 사람의 진리 실행을 가로막는다면,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면 진리를 실행하기가 쉬워진다.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에게 변화가 나타났다는 의미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일에서 패괴 성품을 해결했다고 해서 그 패괴 성품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여전히 튀어나와 사람의 진리 실행을 교란하고 가로막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또 진리를 구해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이 일에서는 패괴 성품을 해결했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또 어떤 일에서 다른 패괴 성품이 생겨나 사람의 진리 실행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이것이 무슨 문제이겠느냐? 패괴 성품이 깊이 뿌리내려져 있으니 사람이 진리를 구함으로써 하나님 말씀 안에서 문제의 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여러 번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만 패괴 성품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그 어떤 패괴 성품도 단번에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런 것이 아니다.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분별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런 내적 상태는 옳지 않아. 그러면 옳지 않은 내적 상태는 어떻게 생겨난 걸까? 내 마음속에 왜 이런 내적 상태가 생겨난 걸까? 하나님 말씀에서는 이런 내적 상태를 어떻게 폭로했지? 어떤 측면의 패괴 성품으로 초래된 걸까?’ 이렇게 반성하고 인식해서 확실히 분별해야 한다. 패괴 성품에 대해 인식하면 그것을 저버릴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진리 실행을 가로막는 문제가 차츰 해결되고 진리를 쉽게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 추구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이렇게 패괴 성품을 끊임없이 해결한다는 의미이다. 진리 실행의 길이 점점 넓어지고 걸림돌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각 측면의 진리를 실행할 수 있을 것이며 드러내는 패괴 성품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패괴 성품을 철저하고 완전하게 벗어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특수한 일에서는 여전히 패괴 성품을 조금 드러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더 이상 사람의 진리 실행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이것은 좋은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생명 진입의 길은 멀고도 길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 멀고도 길다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우리는 모두 한 측면의 패괴 성품이 여러 가지 상황에서 다양한 내적 상태를 생기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겉으로 볼 때 이런 내적 상태가 옳든 그르든,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이든 이런 내적 상태는 모두 한동안 사람을 통제할 수 있고, 사람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사람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내적 상태들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사실 모두 사람에게 있는 사탄의 본성과 사람의 패괴 성품으로 생겨난 것이다. 겉으로 보면 내적 상태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패괴 성품이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 자기 내면에 있는 사탄의 본성에 따라 살고, 패괴 성품에 따라 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진리를 위배하고 하나님에게 대적하게 된다. 만약 진리로 너의 패괴 성품을 해결해 너의 옳지 않은 내적 상태를 바로잡지 않으면, 너는 사탄 성품의 통제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네가 리더이고, 교회에 어떤 본분을 이행하기에 알맞은 사람이 있는데, 네 눈에는 그가 하찮게 보여서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너는 이렇게 묵상해야 한다. ‘내가 왜 이렇게 하는 거지? 내가 왜 그를 불공평하게 대하는 걸까? 어떤 것의 지배를 받은 것일까?’ 여기에 상세한 내용이 있지 않으냐? 네가 그를 공평하게 대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무슨 문제이겠느냐? 네 선입견 때문이고, 네 취향 때문이며, 네 싫어함 때문이다. 사람에게 교만한 성품이 있기 때문에 이런 여러 가지가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틀림없이 교만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만한 성품 때문에 네 내면에 이런 상태가 생겨난 것이다. 속으로 그를 무시하면서 그의 좋은 점은 얘기하기도 싫고, 그를 공정하게 평가하기도 싫고, 그에게 적합한 본분이 있어도 그에게 이행하도록 하기가 싫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만한 성품으로 초래된 결과다. 사람은 성품이 교만해 속마음도 검고, 시선도 비딱하고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도 편향된다. 이는 반드시 자기반성과 자기 인식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네가 자신의 패괴된 내적 상태와 패괴 성품을 확실히 보고 파악한 후에 진리를 구해 해결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사람에 대한 선입견과 올바르지 못한 견해를 바로잡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로잡겠느냐?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여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그다음에는 너 스스로 협력하려는 마음과 자신을 저버리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나는 앞으로 그러지 않을 거야. 그가 자질이 좀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정확하게 대할 거야. 그가 이 분야의 본분을 이행하기에 적합하다면 그가 이행하도록 안배할 거야. 다른 이가 나와 관계가 좋다고 하더라도 그 본분을 이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면 쓰지 않을 거야. 나는 그를 쓸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한다. 그런 내적 상태를 바로잡은 것 아니냐? 이것은 한 방면의 실행이 아니냐? 이는 한 방면의 실행인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냐? 네가 협력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 소망을 조금도 내려놓지 않는다면 이러한 결과가 나올 수 있느냐? 절대로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협력이 아주 중요하다. 너는 진실로 협력해야 한다. 즉, 진리를 향해 노력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그렇게 하려고 선택하지 않고 진리를 향해 노력하지 않으면 협력하지 않는 것이다. 진실한 협력이란 진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진리에 순종하려는 태도와 결심이 있어야만 네가 네 개인적인 속셈과 취향, 이유를 저버릴 수 있다. 그러면 네 잘못된 내적 상태가 바뀌게 된다. 다른 사람의 상황이 어떻든 관계없이 그의 말이 옳고 진리에 부합하는 이상 네가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항상 사람에게 선입견이 있고 사람을 업신여긴다면, 비록 그를 쓰기는 하지만 그와 대화를 많이 하고 싶지 않고,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그를 업신여기고 내적 상태가 아직 완전히 돌이키지 못한 것이라면 이는 패괴 성품의 나쁜 뿌리가 아직 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사소한 내적 상태가 너를 이렇게나 힘들게 하는데, 이는 성품의 문제 아니겠느냐? 이것은 바로 사람의 본성 본질의 문제이다. 너는 이런 옳지 못한 내적 상태를 돌이켜야 한다. 사람의 결점을 발견했다고 해서 사람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분명히 우수한 점도 있고 장점도 있을 것이다. 그와 교제를 많이 하며 그를 많이 알아보아야 한다. 네가 그의 장점을 보게 되고 확실히 그가 이 분야의 본분을 이행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너는 점차적으로 자신의 비열함과 부끄러움을 인식하게 된다. 또한 이렇게 그에게 본분을 안배해 주고 이렇게 그를 대하는 것이 공정하고 진리에 부합하는 것임을 점차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 너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를 언급할 때마다 너는 양심이 편안하고, 하나님께 떳떳하고 진리를 실행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에 대한 너의 견해가 바뀔 것이다. 이는 어떻게 달성한 것이냐? 하나님이 한 것이다. 진리가 네 안에서 조금씩 작용하여 너의 내적 상태를 변화시키고 바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또다시 같은 일이 닥쳤을 때, 네가 꼭 같은 방법으로 이 사람을 대했던 것처럼 대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어쩌면 또 다른 내적 상태가 나타나거나, 혹은 다른 환경, 사람, 일, 사물이 나타나 네가 진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검증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과 자신의 소망을 저버리겠다는 너의 결심을 검증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련이다. 언제 어떤 사람을 대하든, 너와 관계가 좋은 사람이든 아니면 나쁜 사람이든, 너를 가까이하는 사람이든 혹은 멀리하는 사람이든, 네게 아첨하는 사람이든 혹은 아첨하지 않는 사람이든, 그가 어떠한 자질을 가졌든 이 모든 것과 상관없이 네가 모두 공평하고 올바르게 대할 수 있다면, 너의 내적 상태는 철저하게 바뀌게 된다. 네가 자신의 상상이나 감정에 따라 사람을 대하지 않고, 또한 혈기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지 않을 때, 너는 이 방면의 진리를 얻게 된다. 아직은 안 된다. 네 내면에 있는 온갖 패괴 성품이 아직 네 행동을 통제하고, 네 생각과 마음을 통제하고 있다. 그런 것들이 네 내면에서 이미 네 본성이 되어 너를 통제하고 있고, 진리는 아직 네 생명이 되지 못했다. 너는 그저 어느 정도의 좋은 행위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좋은 행위의 이면에, 네가 드러내거나 네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갖가지 내적 상태와 마음은 모두 네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너의 이런 내적 상태와 모든 마음이 이성적으로 변해 원칙과 진리에 부합하게 되고, 패괴 성품이 네 마음과 행동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면, 너의 성품에 참으로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너는 자신의 패괴 성품을 저버리거나 자신을 억제할 필요 없이 곧바로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자신이 이렇게 하는 건 당연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진리가 네 생명이 된 것이다. 너희는 아직 안 된다. 아직 한동안 더 추구해야 한다. 도리를 조금 깨닫고 열심만 조금 있는 것으로는 안 된다. 여전히 분량이 너무 작은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고 진리를 실행하고, 체험 간증을 얘기하고 진실한 인식에 대해 얘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실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실제 분량이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증할 줄 모르고, 체험이 너무 얄팍하다.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설교를 많이 듣고, 찬양을 많이 배워야 한다. 많은 일을 체험한 후에 하나님 말씀을 진정으로 깨닫고, 하나님 말씀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사람의 생명이 되기에 너무나 충분하고, 사람이 온전히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 수 있게 하고, 각종 사탄의 시험에 대응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람만이 분량이 있는 사람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교제할 줄 모르고, 체험 간증을 얘기할 줄 모른다. 이것은 진리가 아직 사람의 생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삶은 힘들고, 가련하고, 또 추하기 그지없고, 서글프다. 패괴 성품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고통, 증오, 원한, 소극적인 마음, 교만, 독선, 거짓말, 속임수, 간사함, 오만함이다. 또 때로는 자포자기하고 억지 논리를 말하며 반항하게 한다. 또 때로는 자신이 불쌍하고 의지할 곳 없다는 생각에 가련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을 믿은 지 여러 해가 되도록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은 말만 하며 자신은 의지할 곳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진리이자 사람의 의지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사탄을 따르고 사탄의 철학에 따라 산다. 이런 사람은 너무 멍청한 것이 아니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다 그렇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점점 가까워진다. 네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조금도 얻지 못하면 너는 하나님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고, 심지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도 맺지 못한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할 수도 있고 진리가 네 안에서 생명이 되면, 하나님이 네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반대로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얻지도 행하지도 못하면, 하나님은 네 하나님이 아니고 네 마음속에 거하지도 않는 것이다. 진리가 네 주인이 될 수 없고 네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네 모든 것을 다스리지 않는 것과 같다. 네가 자신을 하나님에게 맡기지 않고 네가 결정권을 잡은 것이다. 자기가 결정권을 잡은 것은 누가 결정권을 잡은 것이냐? 진리가 권세를 잡은 것이 아니라 패괴 성품이 결정권을 잡은 것이다. 네 언행, 처세, 본분 이행과 사람에 대한 태도, 심지어 매일의 생활과 입고 먹는 것 등 이 모든 일을 네가 머리를 짜내 궁리할 필요 없이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따라 처리할 수 있게 된다면, 너는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며 진리를 얻은 것이다.

지금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큰일이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무지몽매한 사람이다. 진리를 실행할 줄 모르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하고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계에 이런 사람들이 특히 많다. 하나님 집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는지 알고 있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알기 때문에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금 너희는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할 수 있어야만 성품이 변화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도리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진리를 어떻게 실행하고, 진리 실제에 어떻게 진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길이 다소 불분명하다. 이러면 생명 진입이 더디게 된다. 진리 실행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이다. 진리를 실행할 줄 모르는 것은 큰 문제다. 너희는 지금 글귀와 도리를 말하느냐? (말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글귀와 도리를 다 말하고 나서 실행할 수 있느냐? 실행할 수 없다면 그것은 너희가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했으며, 도리만 깨달았을 뿐 진리 실제가 없다는 증거다. 어떤 이들은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거짓말과 속임수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에게 순종하길 원한다고 말하지만 책망과 훈계가 닥치면 순종하지 못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가 말하는 도리를 들으면 모두 옳고 실제가 있는 것 같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다. 어떤 이들은 영적인 이론을 말할 줄 안다고 해서 자신이 매우 영적이라고 여기지만,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본분을 이행하든 일을 처리하든 진실한 순종이 없다. 이런 문제들의 근원이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사람이 글귀와 도리를 얼마나 얘기할 줄 알든, 관건은 실행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실행할 수 있는 진리가 바로 실제이고, 진리를 실행할 수 없으면 실제가 없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글귀와 도리는 아주 분명하게 말하지만, 사실 마음속으로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진리가 많고, 어떤 일들은 아직 분별할 줄 모르고 꿰뚫어 보지도 못한다. 실행해 낼 수 있는 진리가 아주 제한적이기 때문에 체험 간증을 쓰려고 하면 아주 어렵다고 느끼고, 글귀와 도리만 조금 쓸 수 있을 뿐 생활 언어도 실제적인 체험도 없다.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지금 너희는 길이 있느냐?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진리를 실행해야 한다. 네가 진리를 실행할수록, 진리에 공을 들일수록, 실행에 공을 들일수록 너는 실행하고 체험한 말이 생긴다. 네게 실행하고 체험한 말이 많아지면 너의 글귀와 도리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실제는 어떻게 생겨나느냐?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체험과 경험이 생기고 패괴 성품도 드러내며 갖가지 내적 상태가 생겨난다. 그런 후에 진리를 구하고 갖가지 패괴된 내적 상태를 분석하고 실행의 원칙과 길을 찾아내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실행할 수도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생명 체험이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기 싫어하면 이런 과정이 없고, 이런 과정이 없으면 생명 진입이 없다. 이 과정에서 체험이 많아지면 사람이 진리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고, 패괴 성품도 확실히 분별할 수 있으며, 진리 실행의 길도 점점 밝아진다. 이렇게 실행하고 체험한 과정이 없이 단지 하나님 말씀을 글자대로, 도리적으로 깨닫고 이해했을 뿐이라면 말하는 모든 것은 전부 도리일 것이다. 왜냐하면 표면적으로 이해한 것과 네가 몸소 체험한 것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도리는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고 생명 체험이 없이 그저 하나님 말씀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고 분석하고 해석한 후 전하면 도리가 생기는 것이다. 도리는 실제가 될 수 있느냐? 만약 진리를 실행하지도 체험하지도 않는다면 너는 진리를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이다. 글귀로만 해석하면 영원히 도리인 것이다. 네가 진리를 실행한다면 너는 자신이 패괴를 어느 정도 벗어 버리고, 구원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하나님의 요구에 더 가까워졌음을 느끼고 체득하게 될 것이다. 그런 뒤에 생기는 인식과 마음, 생각, 느낌 등이야말로 실제적이다. 실제는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진리를 실행하는 체험을 통해 생긴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실제는 영원히 없을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아도 저는 실제적인 설교를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네가 얘기한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그 당시에 들었을 때는 맞다고, 아주 실제적이라고 느끼겠지만 이후에 여전히 실행의 길이 없다. 이는 네가 깨달은 것이 여전히 도리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고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과 인식이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네가 예상치 못한 내적 상태가 생겼을 때 너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적게 실행하면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오로지 진리를 많이 실행해야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그래야 진리를 실행하는 원칙을 파악할 수 있다. 네가 진리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당연히 도리를 얘기할 줄밖에 모른다. 네가 어떻게 규례를 지키면 너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규례를 지키라고 알려 줄 것이다. 진정한 생명 체험이 없다면 진리 실제에 대해 영원히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진리 실행은 공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공부할 때는 글귀에 공을 들이고, 기억하고, 암기하고, 분석하고, 연구하면 된다. 진리 실행은 이와는 정반대로,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진리를 깨닫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진리를 깨달으면 기꺼이 실행하는 모든 사람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다. 진리를 많이 실행할수록 패괴 성품도 많이 벗어 버릴 수 있다.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패괴 성품을 영원히 벗어 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구하고, 깨닫고, 실행하는 것이 바로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길이다.

2017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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