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0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4) 제4부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1.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라는 주제는 일단락됐다. 동시에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다’라는 주제도 잠시 일단락한다. 일단락을 지은 후 정리해 봐야 한다. 무엇에 관한 것이냐? 역시 하나님 자신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 자신에 관한 것인 만큼 하나님의 면면,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방식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그러니 우선 너희에게 묻겠다. 이런 내용을 듣고 난 후 너희 마음속의 하나님은 누구냐? (창조주이십니다.) 너희 마음속의 하나님은 창조주이다. 또 다른 의견이 있느냐? 만물의 주재자라는 말은 적절하냐? (적절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주재하는 분이자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다.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했고 또 다스리고 있으며, 동시에 만유를 주재하고 만유에게 공급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위이고, 하나님의 신분이다. 만유에게 있어, 또 만물에게 있어 하나님의 진짜 신분은 창조주이자 만물의 주재자이다. 하나님은 이런 신분을 지녔고 하나님은 만물 중에서 유일무이한 분이다. 인류, 그리고 영계의 어떤 피조물도 어떤 방식이나 명목으로든 하나님의 신분과 하나님의 지위를 사칭하거나 대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신분을 지닌 분, 이런 능력과 권병을 지닌 분, 만물을 주재할 수 있는 분은 만물 가운데에 단 한 분밖에 없으며, 그분이 바로 우리의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만물 가운데서 살고 만물 가운데서 다닌다. 그는 지극히 높이 올라 만물 위에 있을 수도 있고, 자신을 낮춰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의 일원이 되어 사람과 대면하거나 동고동락할 수도 있다. 동시에 그는 만유를 주관하며 만유의 운명과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고, 더욱이 전 인류의 운명과 나아갈 방향을 인도하고 있다. 이런 하나님은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이 경배하고 순종해야 할 분이자 마땅히 알아야 할 분이다. 그러므로 네가 인류 중의 어느 부류에 속하든, 네가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경외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너에게 정해 놓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모든 사람,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의 유일한 선택이자 필수 선택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유일무이함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권병과 공의로운 성품,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이 만물에게 공급하는 방식이 모두 유일무이함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유일무이함으로 하나님 자신의 참된 신분과 하나님 자신의 지위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피조물 중에서, 영계에 있거나 인류 가운데 있는 어떤 생명체라도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을 사칭하려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 자신의 신분, 하나님 자신의 능력, 하나님 자신의 지위를 지닌 창조주이자 주재자가 인류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명확히 알고 명심해야 할 것으로, 하나님에게든 사람에게든 다 매우 중요하다!
2. 하나님을 대하는 인류의 다양한 태도
한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처리 방법도 결정된다. 여기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일부 방식을 열거해 보겠다. 하나님을 대하는 이런 방식과 태도가 옳은지, 틀린지 들어 보거라. 다음 일곱 부류 사람의 태도를 보자.
1)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황당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의 전설에서 들은 보살이나 성자(聖者)처럼 만나면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식사 후 향 하나를 피우길 원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때, 하나님께 감사할 때 종종 이런 충동을 느낀다. 지금 믿고 있는 하나님이 자신들이 마음속으로 동경하는 그 성자처럼 ‘만나면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식사 후 향 하나를 피우는’ 대우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2)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구제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부처’, 자신을 고해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살아 있는 부처’로 여긴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부처로 여기며 섬긴다. 향을 피우거나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거나 제물을 바치지는 않지만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들의 하나님은 단지 선행하고, 베풀고, 살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욕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성실하게 살고,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하는 ‘부처’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 마음속의 하나님이다.
3)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이 숭상하는 위인이나 명사로 여긴다. 예를 들어, 위인이 즐기는 말하기 방식, 말할 때의 어조,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 단어 선택법, 말투, 제스처, 행동거지 등은 모두 그들이 따라 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완전히 닮고 싶어 하는 것이다.
4)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통치자로 여기며 그는 지고지상한 분이고, 누구도 감히 거스를 수 없으며, 거스르는 사람은 그의 제재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런 통치자를 숭상하는 이유는 이런 통치자들이 그들 마음속에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치자의 사상, 행동 양식, 권세와 본성은 물론 통치자들의 취미와 사생활까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되고, 그들이 관심을 두는 문제이자 일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도 한 명의 통치자로 여기며 숭상한다. 이는 아주 황당한 믿음법이다.
5)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굳게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너무 얕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그리 많은 체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들의 우상으로 여기며 경배한다. 이 우상이 바로 그들 마음속의 하나님이다. 바로 그들이 무릎 꿇고 절할 대상이자 경외할 대상이다. 또한 그들이 따르고, 본받을 대상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우상으로 삼고, 이 우상을 자신들이 평생 추종할 대상으로 삼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투를 따라 하고, 겉으로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을 본받는다. 늘 유치해 보이는 일을 하고, 순수하고 정직해 보이는 일을 한다. 심지어 이 우상을 자신과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반려나 친구로 여기며 추종한다. 그들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
6)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은 도를 들었음에도 속으로는 하나님을 대하는 유일한 방식(직역: 취지)이 아부와 아첨, 혹은 현실에 맞지 않는 자랑이나 찬미를 벗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렇게 대하지 않으면 언제든 하나님의 노여움과 미움을 살 수 있으며, ‘미움을 산 행동’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처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 마음속의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다.
7) 그리고 대다수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의 정신적 의지처로 삼는다. 세상을 살다 보면 평안하지 않고 즐겁지 않은 데다 위안을 얻을 곳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찾은 후,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게 된 후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며 다행이라 여긴다. 그들은 드디어 정신적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찾았고, 정신적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을 찾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따른 후부터 그들의 정신은 즐거워졌고 생활은 충실해졌다. 그들은 더 이상 이방인처럼 흐리멍덩하게 지내지도, 짐승처럼 살지도 않고, 자신의 인생에 희망이 생겼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하나님이 그들의 정신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고, 그들의 마음과 정신에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이런 하나님을, 자신의 정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즐거움을 안겨 준 하나님을 떠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정신적으로 의탁할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상 하나님을 대하는 여러 부류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들이 너희 가운데 존재하느냐? (네.)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음속에 이런 태도 중 어느 하나라도 있다면 진실로 하나님 앞에 올 수 있겠느냐? 마음속에 이런 태도 중 어느 하나라도 있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겠느냐?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을 믿고 있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네가 믿는 것이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면 네가 믿는 것은 누구겠느냐? 네가 믿는 것이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면 네가 믿는 것은 우상일 수도, 위인일 수도 있고, 보살일 수도 있다. 네가 섬기는 것이 마음속의 부처일 수도 있고, 네가 믿는 것이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일 가능성은 더 크다. 요컨대, 사람들의 여러 가지 믿음법과 태도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자기 마음속에 끌어다 놓고, 자신의 상상을 하나님께 갖다 붙이며,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상상을 유일무이한 하나님과 나란히 둔 다음 이를 모시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부당한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이 참하나님을 버리고 거짓 신을 모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동시에 하나님을 저버리고 대적하며, 참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 이런 믿음법을 고수한다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이런 믿음법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요구에 점점 가까워질 수 있겠느냐?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그 반대다. 사람이 자기 관념과 상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도에서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것은 네가 추구하는 방향이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는 방향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남원북철(南轅北轍)’ 이야기를 들어 봤느냐? 바로 이렇게 수레의 끌채는 남을 향하고 바퀴는 북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황당하게 하나님을 믿는다면 네가 힘을 쓸수록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질 것이다. 그래서 너희에게 경고한다. 너희가 힘을 쓰기 전에 반드시 방향의 옳고 그름을 확인하거라. 함부로 힘을 쓰지 말고 자신에게 꼭 이렇게 묻거라. ‘내가 믿는 이 하나님이 만물의 주재자일까? 내가 믿는 이 하나님은 단지 내 정신적 의지처일까? 그가 내 우상일까? 내가 믿는 이 하나님이 내게 요구한 것은 무엇일까? 내가 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인정할까? 내가 행한 모든 것,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일까? 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맞추고 있는 것일까? 내가 걸어온 길은 하나님이 허락하고 인정하는 길일까? 하나님은 나의 이러한 믿음에 만족할 수 있을까?’ 이렇게 늘 자신에게 물어보아라. 반복적으로 물어보아라. 하나님을 아는 데에 있어 반드시 뚜렷한 의식과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다.
내가 앞서 말한 하나님에 대한 이런 부당한 태도에 대해 하나님이 관용 때문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자들의 태도를 인정하겠느냐?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바라는지 분명히 알겠느냐? 지금까지 많은 말을 했다. 하나님 자신에 관한 주제로 우리는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이제 알겠느냐? 하나님이 너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이제 너희의 태도를 밝힐 때가 됐다. 체험과 실행 부분에 대한 이해가 아직 적거나 얕다면 그 말씀들에 대한 이해를 말해 봐도 좋다. 이해한 바가 정리되었느냐? 하나님은 대체 사람의 무엇을 원하느냐? (하나님은 몇 번의 말씀에서 특별히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알고, 또한 하나님이 만물 생명의 근원임을 알라고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 것을 요구하여 최종적으로 얻는 효과는 무엇이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사람이 이런 인식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나 사람의 행위, 행위 방식, 혹은 사람의 생명 성품에 어떤 변화가 생기겠느냐?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사람은 하나님을 알게 된 후,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 후 좋은 사람으로 변한다고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합당한 자격이 있는 피조물,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의견이 있느냐? (진실하고 정확하게 하나님을 알고 나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자기 자리에 제대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아주 좋다! 다른 사람도 더 말해 보아라. (하나님을 알면 나중에는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맞다!
3. 하나님이 요구한, 인류가 하나님께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
사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높지 않다. 최소한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높지는 않다. 만약 하나님이 어떤 말씀도 선포하지 않고, 어떤 성품도 나타내지 않고, 어떤 행사도 나타내지 않았다면, 너희에게 있어 하나님을 아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추측해야 하는데, 이는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의 사역에서 하나님은 많은 말씀을 했고, 수많은 사역도 했고, 사람에게 많은 요구도 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행한 많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혐오하는지,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하는지를 알게 했다. 사람은 이런 것을 알고 난 후에 자기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막연하게 하나님을 믿지 않고, 더 이상 막연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막연하거나 공허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거기에 닿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언어로 모든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을 알려 주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하나님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모르고, 사람이 왜 하나님을 믿는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대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방금 너희들이 한 측면을 이야기했다. 구체적이든, 대략적이든 너희가 모두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정확하고, 전면적이고, 구체적인,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알려 주고자 한다. 몇 마디로 간단히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말은 어쩌면 너희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요구는 5가지다. 바로 진심으로 믿고, 충실히 따르고,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진실로 알고, 진심에서 우러나와 경외하는 것이다.
이 5가지는 바로 더 이상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상상과 막연한 관점, 어떤 공상적 관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지 말라는 요구이다. 또한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딴마음을 품거나 양다리를 걸치지 말고 하나님을 충실히 따르라는 요구이다. 하나님이 네게 어떤 요구를 할 때,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을 줄 때, 너를 심판할 때, 너를 책망하고 훈계할 때, 너를 징계하고 칠 때 너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이유도 묻지 말고, 조건을 달지도 말고, 원인은 더더욱 말하지 말고, 반드시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다. 사람은 늘 하나님과 무관한 말들을 하나님께 억지로 갖다 붙인다. 그들은 그런 말이 하나님에 대한 앎의 가장 정확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의 상상과 추론에서 비롯된, 지식을 통해 도출된 견해들이 하나님의 본질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임을 모른단 말이냐?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하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그저 알아보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길 원한다. 설사 너희가 한 마디만 할 수 있다 해도, 너희가 티끌만큼만 알고 있다고 해도 그 티끌만 한 앎이 정확하고, 진실하고, 하나님 자신의 본질에 부합한 것이길 원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실제에 맞지 않게 멋대로 찬미하고 자랑하는 것을 혐오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공기처럼 생각하는 것을 더욱 혐오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주제를 논할 때 되는대로 말하고, 멋대로 논평하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을 혐오하며,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여겨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어서 아무렇게나 떠벌리며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하나님에 관한 주제를 논하는 사람은 더욱 혐오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가지, 즉 진심에서 우러나와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요구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정확하고 참된 인식이 생기게 되면,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게 된다. 이 경외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또한 기꺼이 원한 것이지 하나님이 강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께 어떤 좋은 태도, 좋은 모습, 표면적인 좋은 행동을 보이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을 갖길 원한다. 이 경외는 네 생명 성품의 변화로 인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앎,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앎, 하나님 본질에 대한 앎으로 인해,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온’이라는 말로 경외를 정의했는데, 이는 인류에게 하나님에 대해 사람이 가져야 할 경외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함을 알리기 위함이다.
지금 이 5가지 요구를 보아라. 너희 가운데 그중 앞 3가지 요구 사항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바로 진심으로 믿고, 충실히 따르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 말이다. 너희 가운데 있느냐? 5가지를 말하면 분명 너희 가운데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가 3가지로 범위를 좁혔으니 자신이 달성했는지 가늠해 보아라. ‘진심으로 믿는다’, 이 요구는 쉽게 달성할 수 있느냐? (쉽지 않습니다.) 이것도 달성하기 어렵다. 사람은 늘 하나님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충실히 따르는’ 것은 어떠하냐? ‘충실’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딴마음이 없는 일편단심을 말합니다.) 딴마음이 없는 일편단심이라, 정말 잘 말했다! 그럼 너희는 이 요구 사항을 달성할 수 있느냐?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지금 아직 달성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럼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달성했느냐? (못 했습니다.) 역시 달성하지 못했다. 늘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고, 말을 듣지 않는 데다가 순종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말을 듣고 싶어 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이것은 사람이 생명 진입 후 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3가지 요구 사항으로, 너희는 아직 달성할 수 없다. 그럼 지금 너희의 잠재력은 크지 않으냐? 지금 내 말을 다 듣고 나니 조급해지지 않느냐? (조급해집니다.) 조급해지는 것이 맞다. 조급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너희 때문에 조급하다. 나머지 2가지 요구는 말하지 않겠다. 분명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너희가 조급해진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너희는 목표를 확정했느냐? 어떤 목표와 방향으로 추구하고 노력해야겠느냐? 목표가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솔직하게 알려 주겠다. 너희가 이 5가지 요구를 달성할 그때면 하나님은 만족할 것이다. 각 요구마다 하나의 지표이다. 모두 생명 진입이 성숙해졌다는 하나의 지표이자 최종적 목표이다. 그중 어느 한 가지를 따로 꺼내서 자세히 설명하며 너희에게 요구한다 해도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이 많은 고통을 받고, 많은 공을 들여야만 가능하다. 너희 모두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겠느냐? 모두 암 환자가 수술대에 오르는 것과 같은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얻고, 하나님의 만족을 얻으려면, 고통받지 않고 공들이지 않고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이렇게 많은 도를 듣긴 했지만 들었다고 해서 이 도가 바로 네 것이 됐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도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네 개인의 생명, 네 개인의 생활 속으로 가져가 이 말과 도가 네게 생존의 방향을 알려 주고, 네 생명에 생존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불어넣게 해야 한다. 그러면 네가 이 말들을 들은 보람이 있는 것이다. 내가 한 이 말들이 네 삶에 아무런 전환점을 가져다주지도 못하고, 네 생명에 존재의 가치를 불어넣어 주지도 못하면 이 말들은 헛들은 것이 된다. 알았지? 알았다면 남은 일은 모두 너희 자신의 몫이다. 반드시 공을 들여야 한다! 어떤 일이든 반드시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건성건성 대하지 말아라. 세월은 빨리 흐른다. 사실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지 벌써 십여 년이 됐다. 그럼 한번 돌아보아라. 십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느냐? 사람의 일생에 이런 십여 년이 몇 번이나 더 있겠느냐? 시간은 길지 않다. 하나님이 사역할 때 너를 기다려 주진 않을까, 너에게 기회를 남겨 두진 않을까, 하나님이 같은 사역을 다시 하진 않을까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너의 지난 십 년은 되돌릴 수 있겠느냐? 하루가 지날 때마다, 네가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네게 남은 세월은 하루씩 짧아진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일을 일생의 중대사로 삼고 대해야 한다. 먹고 입는 것보다, 네 인생의 어떤 일보다 중요하게 대하면 수확이 있을 것이다! 네가 늘 심심풀이로 믿고, 믿음에 전념하지 못하고, 늘 건성으로 믿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알겠느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안녕! (하나님, 감사합니다!)
2014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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