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7

제2부분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1)

오늘 새로운 내용을 교제하려 한다. 무슨 내용일까? 이 내용의 주제는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이다. 좀 큰 주제같이 들리지 않느냐? 너희 입장에서 조금 닿기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느냐? 이 주제가 조금 먼 이야기같이 들리지만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래서 이 주제를 꺼낸 것이다. 전에는 사람이 이런 주제에 대해 단순한 인식, 혹은 개념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인식이 어떤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단순하거나 얕은 깨달음일 것이고,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는 특별한 경험으로 인한 깊이 있는 체득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인식이 얕든 깊든 다 단편적이고 구체성이 떨어진다. 내가 이 주제를 꺼낸 것도 너희로 하여금 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주제를 나눔에 있어서 나는 특별한 방식을 쓰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전에 사용한 적이 없는 방식으로, 너희에게는 조금 특이하게 들리거나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너희가 듣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느냐? (네) 너희 모두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야기 방식을 선택한 것은 옳은 선택인 것 같다. 그럼 우리 시작해 보자. 이것은 노트에 기록할 필요가 없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있어라.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주위 환경이나 사람의 영향을 받을 것 같으면 눈을 감아도 좋다. 너희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이 이야기는 씨앗, 대지, 나무, 햇빛, 새, 그리고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했느냐? (씨앗, 대지, 나무, 햇빛, 새, 사람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매우 상쾌하고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럼 조용히 들어 보아라.

이야기 1. 씨앗, 대지, 나무, 햇빛, 새, 그리고 사람

한 톨의 씨앗이 땅에 떨어졌다. 큰비가 지나간 후 씨앗은 새싹을 틔웠고, 천천히 땅에 뿌리를 내렸다. 새싹은 비바람을 견디고 맑고 흐린 날씨를 견디며 점점 자라났다. 여름에는 대지가 수분을 공급해 주며 뜨거운 날씨를 견디게 해 주었다. 대지 덕에 새싹은 뜨거움을 느끼지 않고 무더위를 넘겼다. 겨울이 되자 대지는 따뜻한 품으로 새싹을 꼭 껴안으며 따뜻한 기운을 전해 주었다. 그렇게 새싹은 혹한을 견디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을 넘겼다. 새싹은 대지의 보호로 즐거워졌고, 용감해졌다. 또한 대지의 아낌없는 공급으로 튼튼해졌다. 새싹은 빗속에서 기뻐 노래하고 바람 속에서 한들거리고 춤을 추었으며, 즐겁게 성장했다. 새싹과 대지는 서로 기대고 의지했다….

몇 년 후 새싹은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잎은 무성하고 기둥은 굵고 단단했다. 나무는 여전히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 뿌리는 땅속 깊이 자리를 잡았다. 다만 원래 새싹을 보호하던 땅이 이제는 나무의 기반이 되었다.

한 줄기 햇빛이 나무를 비췄다. 나무는 몸을 흔들고 팔을 뻗으며 햇빛의 기운을 깊숙이 빨아들였다. 나무 발아래에 있던 땅은 나무의 리듬에 따라 호흡했고, 대지는 상쾌함을 느꼈다. 순식간에 나무에서 신선한 기류가 퍼져 나오면서 나무는 기운 넘치고 생기 있게 변했다. 나무와 햇빛은 서로 기대고 의지했다….

나무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는 사람들이 이따금 맑은 향기를 느꼈다. 이 향기는 사람의 심장과 폐를 깨끗하게 하고 피를 깨끗하게 했다. 사람의 몸은 이제 축 처지거나 답답해지지 않았다. 사람과 나무는 서로 기대고 의지했다….

새들이 지지배배 노래하며 날아와 나무에 앉았다. 어쩌면 천적을 피하기 위해서, 어쩌면 다음 세대를 낳아 기르기 위해서, 어쩌면 잠깐의 휴식을 위해서일 수도 있다. 새와 나무는 서로 기대고 의지했다….

나무는 땅속 깊이 얼기설기 뒤얽히며 뿌리를 내렸다. 나무는 자신의 몸으로 대지를 위해 바람과 비를 막았고, 팔을 펼쳐 발아래의 대지를 보호했다. 대지는 나무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나무와 대지는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살고 영원히 함께했다….

자, 이야기가 끝났다. 내가 들려준 씨앗, 대지, 나무, 햇빛, 새,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는 몇 단락에 불과하다. 너희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느냐? 이런 방식으로 들려주어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겠느냐? (네.) 너희 느낌을 말해 보아라.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어떤 느낌이 들었느냐? 우선, 너희에게 알려 줄 것이 있다. 내가 언급한 몇 가지 사물은 너희가 볼 수 있고 직접 만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비유를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했다.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너희가 생각해 보길 바란다. 여기에는 심오한 것도 없고, 이 이야기의 핵심은 몇 마디 속에 담겨 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름다운 장면이 연상되었습니다. 한 톨의 씨앗에게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씨앗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1년 사계절을 ― 봄, 여름, 가을, 겨울을 ― 거쳤습니다. 대지는 어머니처럼 씨앗을 키워 주었으며, 겨울에는 따뜻함을 제공해 혹한을 넘기게 해 주었습니다. 나무가 자랐을 때 한 줄기 햇빛이 나무를 비추어 나무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중에서 대지 역시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대지도 나무와 서로 의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햇빛은 나무에게 따뜻함을 주었고 새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인류, 나무와 함께 조화를 이루는 장면이 그려졌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원래 이것들도 다 생명이 있는 존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잘 말했다! 더 보충할 사람이 있느냐? (한 톨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커다란 나무로 자라는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이 참 놀랍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하나로 연결해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살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기묘하심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방금 언급한 모든 사물은 너희가 본 적이 있는 것들이다. 씨앗은 알고 있을 것이다. 씨앗이 나무로 변하는 과정은 자세히 못 봤겠지만 너도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안다. 그렇지? 대지, 햇빛도 알고 있다. 그럼 새가 나무에 앉아 있는 장면은 다들 본 적이 있지 않으냐? 나무 아래서 바람을 쐬는 사람은 본 적이 있느냐? (네.) 그럼 이 몇 가지 사물을 한 장면에 두니 어떤 느낌이 드느냐? (조화롭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장면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됐으니 하나님은 이 사물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의의와 가치를 알고 있다.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할 때, 각각의 사물을 예비하고 만들 때 다 그만의 의도가 있었으며, 하나님이 각각의 사물을 창조했을 때 그들은 모두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이런 생존 환경, 다시 말해 방금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대지와 씨앗은 서로 기대고 의지하고, 대지는 씨앗을 키워 주고, 씨앗도 대지를 떠날 수 없는 둘 사이의 이런 관계는 하나님이 창조할 때에 정해 놓은 것이다. 나무, 햇빛, 새와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도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생존 환경이다. 우선, 나무는 대지를 떠날 수 없고, 햇빛도 떠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무를 창조한 목적은 무엇이냐? 단순히 대지를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느냐? 단순히 새를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느냐? 단순히 사람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느냐? (아니요.) 그럼 그들의 관계는 어떠하냐? 그들은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사는 관계이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다시 말해, 대지, 나무, 햇빛, 새와 사람 사이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공급하는 관계다. 나무는 대지를 보호하고, 대지 또한 나무를 키워 준다. 햇빛은 나무를 비추고, 나무 또한 햇빛에서 신선한 기운을 얻어 대지를 뜨겁게 달구는 햇빛의 열기를 약화시킨다. 최종의 수혜자는 누구냐? 최종의 수혜자는 인류다. 그렇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류의 생존 환경을 만든 원칙이자 초심이다. 평범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정성이 담겨 있다. 사람은 대지를 떠날 수 없고, 나무도 떠날 수 없고, 햇빛과 새도 떠날 수 없다. 그렇지? 이 장면은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생존 환경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생존 환경을 만들었다. 먼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말한 핵심은 만물이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원칙하에서 인류의 생존 환경이 보존되고 지속되며, 이런 생존 환경이 있기에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본 것은 나무, 대지, 햇빛, 새, 그리고 사람이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하나님이 있느냐? 보지 못했다. 그렇지? 하지만 이 장면 속에서 만물이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사는 법칙을 보았고, 이 법칙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주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원칙과 법칙으로 만물의 생존과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방식으로 만물과 인류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그럼 이 이야기는 우리가 말하려는 주제와 관계가 있느냐? 겉보기에는 무관한 것 같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만물의 법칙을 창조한 것, 더 나아가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과 불가분의 중대한 관계가 있다. 이제는 조금 느낄 수 있겠지?

하나님은 만유의 운행 법칙과 만물의 생존 법칙을 주관하며, 만유와 만물을 주관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서로 의지하고 더불어 살며 멸망이나 소멸에 이르지 않게 한다. 그래야 인류는 지속될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이런 생존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운행 법칙은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으며, 그 누구도 개입하거나 바꿀 수 없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러한 운행 법칙을 알고 있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 법칙을 관리하고 있다. 나무는 언제 싹을 틔울지, 비는 언제 올지, 대지는 식물에 수분과 영양을 얼마나 공급할지, 낙엽은 어느 계절에 질지, 나무는 어느 계절에 열매를 맺을지, 햇빛이 나무에 양분을 얼마나 줄지, 나무가 햇빛에서 양분을 얻은 후 내쉬는 것은 무엇일지,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할 때 정한 것이다. 이 법칙은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유, 즉 생명을 지닌 것이든 사람이 봤을 때 생명이 없어 보이는 것이든 모두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고 주재하고 있으며, 그 누구도 이 법칙을 바꿀 수도 깨뜨릴 수도 없다. 즉,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할 때 이런 법칙을 다 정해 놓았다는 뜻이다. 나무는 대지를 떠나 뿌리를 내릴 수도, 싹을 틔울 수도, 자랄 수도 없다. 대지에 나무가 없다면 대지는 말라 버릴 것이다. 나무는 새의 집이 되고 새가 바람을 피하는 장소가 되었다. 나무에게 햇빛이 없으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나무에게 대지만 있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류와 인류의 생존을 위한 것이다. 인류는 나무로부터 신선한 공기를 얻으며, 나무가 보호하고 있는 이 땅에서 살고 있다. 또한 인류는 햇빛과 여러 가지 생물들을 떠나서 살 수도 없다. 이런 관계가 복잡하지만 네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이 만유의 법칙을 창조한 것은 만물이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창조한 각각의 사물은 각자의 존재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만든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에게 공급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공급’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나님이 매일 나무에 물을 주는 것이냐? 나무가 호흡하는 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냐?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공급’이란 창조 후에 하나님이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법칙을 하나 만들어 그것을 관리하면 되는 것이다. 나무의 씨앗을 대지에 심으면 스스로 자라난다. 씨앗이 자랄 여건은 하나님이 미리 만들어 두었다. 햇빛, 수분, 토양, 공기와 주변의 환경, 바람, 서리, 눈, 비, 1년 사계절, 이것은 나무가 필요로 하는 생존 조건으로,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생존 환경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매일 가서 나무에 잎이 몇 장 달렸는지 셀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겠지? 하나님이 나무의 호흡을 도울 필요도 없다. 햇빛도 하나님이 매일 가서 깨울 필요도 없고, “나와서 나무를 비춰라”라고 할 필요도 없다. 햇빛은 법칙에 따라 때가 되면 나와서 나무를 비춘다. 나무는 필요할 때 햇빛을 흡수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 역시 법칙 속에서 살아간다. 너희가 이 현상을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사실은 누구나 볼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너는 만물의 생존 법칙이 하나님에게서 왔고, 만물의 생장과 존속이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이 이야기 속에 인류가 말하는 비유가 있었느냐? 그럼 말하는 것이 일종의 의인화 기법이었느냐? (아닙니다.) 내가 말한 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후 각 사물은 생명이 있게 되었고, 그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각 사물은 자기 생명의 궤적과 법칙을 스스로 준수하고 있으니 사람이 바꿀 필요도, 도울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에게 공급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알겠느냐? 사람이 이런 것들을 알 필요가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여기서 말한 이야기가 생물학과 관계있느냐? 지식이나 과학과 관계가 있느냐? 우리는 여기서 생물을 논하는 것도 아니고 생물학을 연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말하려는 요점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만물 속에서 너희는 무엇을 봤느냐? 나무를 봤느냐? 땅을 봤느냐? (네.) 햇빛도 보았다. 그렇지? 새가 나무에 앉아 있는 것을 봤느냐? (네.) 그럼 사람이 이런 환경에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겠느냐?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 통해 인류가 살아가는 터전을 유지하고 보호하고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인류와 만물에게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고 이런 방식으로 교제하는 것이 너희가 보기에 어떠냐? (이해하기 쉽고 현실 속에서 볼 수 있어 좋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막연하지 않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사람이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임을 아는 데에 필요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필요하다면 이어서 다음 이야기를 해 보자. 다음 이야기는 내용이 좀 다르다. 주안점도 다르다. 이야기에 나오는 사물은 하나님이 창조한 만유 중에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번에도 이야기 방식으로 너희에게 설명하겠다. 조용히 듣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이야기를 마치면 너희가 얼마나 이해했는지 물어보겠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큰 산과 시냇물, 광풍, 거대한 파도이다.

이야기 2. 큰 산과 시냇물, 광풍, 거대한 파도

시냇물이 구불구불 천천히 흘러 산자락에 다다랐다. 큰 산이 시냇물의 길을 막자 시냇물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 줘. 내 앞길을 막았어. 내가 갈 방향을 막았단 말이야.” 산이 물었다. “넌 어디를 가느냐?” 시냇물이 답했다. “내 고향을 찾아갈 거야.” 산이 말했다. “좋다. 내 몸을 넘어가거라!” 하지만 시냇물은 너무 약하고 여려서 아무리 애를 써도 큰 산을 넘어가지 못했고, 결국 산자락을 따라 계속 흐를 수밖에 없었다….

광풍이 모래와 자갈, 잡다한 것들을 휩쓸며 큰 산 앞에 다다라 으르렁댔다. “비켜!” 산이 물었다. “넌 어디를 가느냐?” 광풍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난 저 너머로 갈 테다!” 산이 말했다. “좋다! 네가 내 허리를 꺾을 수 있다면 지나가거라!” 광풍은 울부짖으며 한 번 또 한 번 도전했다. 하지만 아무리 울부짖고 애를 써도 큰 산의 허리를 꺾을 수 없었다. 광풍은 지쳐 발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산 저편에서는 미풍이 조금씩 불어왔고 사람들은 쾌적함을 느꼈다. 그것은 큰 산이 사람들에게 건네는 안부 인사였다….

해안가에 포말이 넘실거리며 해변의 암석을 가볍게 때리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몰아친 거대한 파도가 포효하며 큰 산 앞에 다다라 외쳤다. “비켜!” 산이 물었다. “넌 어디를 가느냐?” 걸음을 멈출 수 없었던 거대한 파도는 계속해서 포효하며 답했다. “난 내 영토를 넓히고 내 팔을 펼칠 거야!” 산이 말했다. “좋다! 네가 내 머리를 넘어갈 수 있다면 길을 내주겠다.” 거대한 파도는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산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큰 산을 넘을 수 없었고, 결국 천천히 물러났다….

수천 년 동안 시냇물은 산자락을 따라 계속 그렇게 조용히 흘렀다. 시냇물은 큰 산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 고향에 도착해 강이 되고 바다가 되었다. 큰 산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시냇물은 방향을 잃지 않았다. 시냇물과 큰 산은 서로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의지했다.

수천 년 동안 광풍은 으르렁대는 습성을 바꾸지 않았다. 광풍은 모래와 자갈을 휩쓸며 늘 큰 산을 ‘방문’했고 큰 산을 위협했지만 산허리를 꺾지는 못했다. 큰 산과 광풍은 서로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의지했다.

수천 년 동안 거대한 파도 또한 쉰 적이 없었다. 거대한 파도는 땅을 넓히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큰 산을 향해 거듭 포효했다. 하지만 큰 산은 거대한 파도의 포효에 눌려 몸을 비키지는 않았다. 산은 계속 바다를 지켜봤고, 바닷속 만물은 그렇게 번식하고 성장했다. 큰 산과 거대한 파도는 서로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의지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우선 내가 한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일단 큰 산이 있었다. 또 시냇물, 광풍, 거대한 파도가 있었다. 그럼 첫 부분에서 시냇물과 큰 산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왜 시냇물과 큰 산을 이야기하는 것이냐? (큰 산이 시냇물을 지켜 주었기 때문에 시냇물은 한 번도 방향을 잃지 않았습니다. 산과 시냇물은 서로 의지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냇물 입장에서 큰 산은 보호자냐, 방해꾼이냐? (보호자입니다.) 그럼 방해꾼이 아니란 말이냐? 큰 산과 시냇물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 줬다. 큰 산은 시냇물의 보호자이자 방해꾼이기도 하다. 큰 산은 시냇물이 강으로 흘러들어 갈 수 있게 보호해 줬고, 동시에 곳곳으로 흘러넘치지 않게 막아 주었다. 그래서 그것이 인류에게 재해를 입히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 아니냐? 큰 산의 보호 덕에, 시냇물의 장벽 역할을 한 큰 산 덕분에 인류의 보금자리도 보호받게 되었다. 시냇물은 산자락을 따라 강으로, 바다로 흘러들어 갔다. 이것은 시냇물의 생존 법칙이 아니냐? 시냇물이 강으로, 바다로 흘러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덕분이냐? 큰 산 덕분이 아니냐? 산의 보호와 방해 덕분이다. 이것이 핵심이 아니냐? 여기서 시냇물에게 큰 산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저 높고 낮은 산을 창조한 데에 목적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는 시냇물과 산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이 창조한 두 사물의 존재 가치와 의미, 그리고 이 두 사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두 번째 부분에서 언급한 것은 무엇이냐? (광풍과 큰 산입니다.) 바람이 있으면 좋으냐? (네.) 꼭 그렇지는 않다. 어떤 때 바람이 너무 세면 재해가 된다. 네가 광풍 속에 있으면 어떤 느낌이겠느냐? 물론 풍속 등급을 봐야겠지? 만약 3, 4급 정도라면 견딜 만하다. 기껏해야 눈을 못 뜨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어 토네이도가 된다면 견딜 수 있겠느냐? 못 견딘다. 그러니 사람의 입장에서 바람이 완전히 좋다고 말하는 것도 틀리고, 완전히 나쁘다고 말하는 것도 틀리다. 일단 얼마나 센 바람인지 봐야 한다. 그럼 큰 산은 여기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 바람을 거르는 역할을 하지 않느냐? 큰 산은 불어오는 광풍을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미풍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는 곳에서 대다수 사람이 맞고 느끼는 것은 광풍이냐, 미풍이냐? (미풍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큰 산을 창조한 목적이자 의도가 아니냐? 광풍이 늘 모래와 자갈을 몰고 와 아무런 방해나 여과 없이 사람에게 불어닥친다면 사람이 사는 곳이 어떻게 되겠느냐?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굴러다닌다면 사람이 이 땅에서 살 수 있겠느냐? 아마도 돌에 맞거나 모래에 눈이 흐려져 앞을 못 볼 것이다. 사람이 바람에 휩쓸려 제대로 서지 못하거나 공중으로 날아갈 수도 있고, 집이 파손될 수도 있다. 각종 재난이 닥칠 것이다. 그렇다면 광풍은 존재 가치가 없느냐? 바람이 나쁘다고 말하니 사람들은 바람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미풍으로 변하면 광풍도 가치가 있지 않으냐? 무덥다고 느낄 때, 숨 막히는 공기를 느낄 때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가장 필요한 것은 미풍이다. 그 미풍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사람의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지고 상쾌해진다. 예를 들어, 너희가 지금 방 안에 앉아 있는데 사람이 많아서 공기가 답답하다면,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미풍입니다.) 공기가 혼탁한 곳에 가면 공기에 들어 있는 더러운 것이 사람의 사고를 느리게 하고 혈액 순환을 늦추고 머리도 흐리게 만든다. 공기가 통하게 환기를 시키면 공기가 신선해질 것이고 사람의 느낌이 달라질 것이다. 시냇물이나 광풍은 재난이 될 수 있지만, 큰 산의 존재로 인해 이런 재난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지 않으냐?

세 번째 부분에서 언급한 것은 무엇이냐? (큰 산과 거대한 파도입니다.) 큰 산과 거대한 파도이다. 이는 산 아래의 해안가에서 벌어진 장면으로, 우리는 큰 산과 포말, 거대한 파도를 보았다. 거대한 파도의 입장에서 큰 산은 무엇이냐? (보호자이자 장벽입니다.)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 큰 산은 보호자이자 장벽이다. 보호의 목적은 바다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바다가 사라지지 않으면 바닷속 만물이 번식하고 생존할 수 있다. 또한 거대한 파도의 장벽으로서 해수가 범람하여 재해가 되지 못하게 하고, 인류의 보금자리를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거대한 파도에게 있어 큰 산은 보호자이자 장벽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큰 산과 시냇물, 큰 산과 광풍, 큰 산과 거대한 파도가 서로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사물들은 각자의 생존 법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어떤 행사를 보았느냐?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한 후 그냥 내버려 뒀느냐? 어차피 사물 각각에 법칙과 기능을 정해 줬으니 그만이라는 식으로 그냥 내버려 두었느냐?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은 계속 관리했다. 물, 바람, 파도를 관리하며 그들이 제멋대로 날뛰어 인류의 터전을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사람이 이 땅에서 계속 번성하며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할 때 만유의 생존 법칙을 정하고, 이들을 인류에게 이롭게 함과 동시에 인류에게 부담을 주거나 재앙을 가져오지 못하게 관리해야 했다. 하나님이 관리하지 않는다면 물이 멋대로 흐르지 않겠느냐? 바람이 멋대로 불지 않겠느냐? 이들에게 법칙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관리하지 않는다면 법칙이 없어 바람은 멋대로 불고, 물은 아무렇게나 흘러 사방으로 범람할 것이다. 거대한 파도가 산을 넘는다면 그 바다가 존재할 수 있겠느냐? 그 바다는 존재할 수 없다. 큰 산이 거대한 파도보다 높지 않다면 바다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산도 그 존재 가치와 의미를 잃을 것이다.

이 두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보았느냐?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했다. 또한 만유를 주재하고 관리하며 만유에게 공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만유 속에서 만유의 일거수일투족, 언행 하나하나를 살피고, 인류가 사는 구석구석을 살핀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만유, 모든 사물의 기능과 성질, 생존 법칙, 생존의 의미, 존재 가치에 대해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만물을 상대로 그 법칙을 연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인류의 지식과 과학을 배워 그것을 연구하고 알 필요가 있겠느냐? (아니요.) 그럼 인류 중에 박학다식하여 하나님처럼 만물에 대해 잘 아는 자가 있느냐? 없겠지? 진정으로 만물의 생장 법칙을 파악한 천문학자나 생물학자가 있느냐? 그들이 정말로 모든 만물의 존재 가치를 파악할 수 있겠느냐? (아니요.)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아무리 높이 쌓고 아무리 오래 배운다 한들 영원히 만물 창조의 비밀과 목적을 측량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이쯤에서 너희는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라는 말의 진정한 함의를 조금 이해했느냐? (네.) 내가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라는 주제를 말하니 많은 사람들은 즉시 ‘하나님은 진리이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사람에게 공급한다’는 차원의 의미만 떠올린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삶, 그리고 일용할 양식과 매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하는 것은 딱히 공급이라고 할 것도 없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인류가 정상적으로 살아가며 생활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창조했다. 하나님의 의도는 아주 분명하지 않으냐? 하나님은 인류가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인류의 생존 환경을 보호하고, 인류의 생존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을 공급하며,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을 관리하고 주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유에게, 인류에게 공급하는 방식이다. 이런 것은 사람이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참된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우린 알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만 기대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맞느냐? (틀립니다.) 어디가 틀렸느냐? 하나님을 앎에 있어, 하나님이 했던 말씀만 알아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만 받아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 성품의 일부와 하나님 권병의 일부만 알면 충분하며, 그러면 하나님을 안 것과 다름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냐?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만유를 창조하면서부터 존재했으며, 게다가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없었던 적이 없다. 하나님이 일부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에게 사역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으며, 이것 외의 일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권병과 신분, 하나님의 행사와 무관하다고 생각할 뿐이라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소위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들이 단편적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특정 무리에 국한시키고 있다. 이런 인식이 참된 인식이겠느냐? 이런 식의 인식은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하고 주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은 이 일에 관심조차 두지 않고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는 걸 난 보지도 못했고, 그건 나하고 동떨어진 이야기야. 알고 싶지 않아. 하나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 거지 나하고는 관계없어. 난 하나님의 인도와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께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것에만 신경 쓰고 다른 건 상관하지 않을 거야. 하나님이 만유의 법칙을 만들고, 하나님이 어떻게 만유와 인류에게 공급하는지 따위는 나와 관계없어!’ 이것이 무슨 소리냐? 이것은 대역무도한 것이 아니냐? 너희 중에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 자가 있느냐? 너희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안다. 너희 중 다수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 ‘교조주의자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영적인 관점으로 모든 것을 대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에 국한시키고 표면적인 글귀에 국한시킨 채 하나님을 더 많이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다른 일에 더 많이 신경 쓰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의 생각은 아주 유치하고 종교적이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느냐? 매우 알기 어렵다. 오늘 두 이야기를 들려줬다. 막 들었을 때, 막 접했을 때 너희는 조금 심오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고, 이해하기도 알아듣기도 어렵고, 하나님의 행사나 하나님 자신과 연결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만물과 인류 가운데서 나타낸 모든 행사와 행했던 모든 일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런 앎을 통해 너는 하나님의 참된 존재를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하나님이 만유에게 공급하는 방식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허상이나 전설, 막연한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고, 일종의 학설이나 정신적인 지주가 아니라 실재적인 존재임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계속 자신의 방식과 템포로 만유와 인류에게 공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하고 만유에 법칙을 부여했기에 만물은 하나님이 정한 대로 제 몫을 다하고, 제 책임을 다하고, 제 역할을 하면서 인류를 위해, 인류의 생존 공간과 생존 환경을 위해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 않고, 인류에게 이런 생존 환경이 없었으면 인류가 하나님을 믿거나 따르는 것도 빈말에 그치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방금 했던 큰 산과 시냇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큰 산의 역할은 무엇이냐? 큰 산에도 만물이 생장한다. 큰 산은 그 자체로 존재 가치가 있으며, 동시에 시냇물이 제멋대로 흘러 인류에게 재난을 일으키지 못하게 막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냐? 큰 산은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자신에게 딸린 만물을 ― 나무와 풀, 산속의 각종 동식물을 ― 생장시키고 있다. 또한 시냇물에게 방향을 안내하고, 시냇물을 한데 모아 산자락을 따라 흐르게 해 자연스럽게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게 한다. 이런 법칙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할 때 특별히 정해 놓은 것이다. 큰 산과 광풍은 어떠냐? 산 자체도 바람이 필요하고 산에 있는 생물도 바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큰 산은 광풍을 풍해로 번지지 않도록 억제하기도 한다. 이 법칙에는 큰 산의 역할이 들어 있다. 큰 산의 역할에 대한 법칙은 자연스럽게 생겼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든 것이다. 큰 산은 큰 산의 역할이 있고, 광풍은 광풍의 역할이 있다. 그렇다면 큰 산과 거대한 파도는 어떠냐? 산이 없다면 물이 방향을 가지고 흐를 수 있겠느냐? (아니요.) 물도 범람할 것이다. 큰 산은 큰 산대로 존재 가치가 있고, 바다도 바다대로 존재 가치가 있다. 그들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서로 억제한다. 큰 산은 바다가 범람하지 않게 억제하여 인류의 보금자리를 보호하고, 또한 바다가 바닷속 만물을 양육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경관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역시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큰 산은 어디에 둘지, 시냇물은 어디서 흐를지, 광풍은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불지, 거대한 파도의 높이는 얼마나 될지,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할 때 이미 정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사이다. 그럼 이제는 만물의 면면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볼 수 있지 않겠느냐?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만든 만유의 법칙을 연구해 보라는 것이냐? 천문 지리에 관심을 가져 보라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하나님의 행사를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사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이 만물 생명의 근원임을 확인하고 인정할 수 있다. 네가 이를 알게 되면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참으로 확정할 수 있고,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한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만물의 법칙과 하나님의 행사를 아는 것이 네가 하나님을 아는 데 도움이 되느냐? (네.)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느냐? 우선, 네가 하나님의 이런 행사를 알게 됐을 때 천문 지리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느냐? 의혹을 품고 하나님의 만유 창조를 의심할 수 있겠느냐? 연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만유 창조를 의심할 수 있겠느냐? (아니요.)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했음을 확신하고 하나님이 창조한 만유의 일부 법칙을 알게 되면, 너는 하나님이 만유에게 공급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지 않겠느냐? (믿을 것입니다.) 이 ‘공급’은 어떤 특정한 의미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특정한 환경을 전제로 하는 말이냐? 하나님이 만유에게 공급한다는 것은 넓은 의미와 범위에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일용할 양식만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것, 보이는 만유와 보이지 않는 만유를 공급하며, 인류에게 필요한 이 생존 환경을 떠받치고, 관리하고, 주재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어떤 계절에 인류에게 어떤 환경이 필요할지 예비해 두었고, 어떤 공기와 온도가 인류의 생존에 적합할지에 대한 것도 관리하고 있다. 이 모든 법칙은 자연이나 우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재와 행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모든 법칙과 만물의 생존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다. 네가 믿든 못 믿든, 네가 볼 수 있든 없든, 네가 이해하든 못 하든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만 믿고 있으며, 하나님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그의 행사를 나타내어 그의 존재 가치를 알게 하고, 그의 신분에 대해서도 조금 이해하게 했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게 하였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하고 관리하고 만유에게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모호하며, 심지어 의심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런 태도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연계의 법칙이 자생적으로 생겼고, 자연계의 변화와 전환, 자연계의 일부 현상과 모든 법칙이 자연에서 비롯됐다고 확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이 어떻게 만유를 창조하고 주재하는지 상상할 수 없고, 하나님이 어떻게 만유를 관리하고 만유에게 공급하는지 모르고 있다. 이러한 제한적인 전제 조건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하고 주재하고 만유에게 공급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반대로 이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단지 율법시대, 은혜시대,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만 국한되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행사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공급을 하나님의 선민에게만 국한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것이고, 가장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다. 인류가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누리는 동시에 하나님이 한 모든 것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천지 만물이 자연의 법칙과 자연의 생존 법칙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뿐, 그것을 관리하는 주재자도, 그것에게 공급하고 유지하는 주재자도 없다고 믿는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너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행사임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의 최대 사각지대인 것이다. 그러기에 일단 내가 성경이나 소위 영적인 용어와 관련되지 않는 일들을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듣기 싫어하고 지겨워하며, 영적인 사람이나 영적인 일과 무관한 것 같다며 듣기 불편해한다. 이는 아주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하나님의 행사를 앎에 있어, 우리가 천문을 말하거나 지리나 생물을 연구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고 만유에게 공급하며,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것은 알아야 한다. 이는 반드시 배워야 할 필수 공과이다. 이제는 알겠지!

방금 한 두 이야기는 너희에게 있어 내용도 좀 특이하고, 이야기의 전달법이나 표현 방식도 조금 특이하겠지만, 나는 쉬운 말과 쉬운 방식으로 너희가 더 깊은 것을 얻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싶다. 이것이 내 유일한 목적이다. 너희가 이 소소한 이야기 속에서, 이 장면들 속에서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고 있음을 보거나 믿게 하고 싶은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유한한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행사를 보게 하고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이 목적이 언제 완전히 실현되어 너희에게서 그 효과가 나타날지는 너희 개인의 체험과 추구에 달렸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야기 속에서 점점 더 깊이 있고 분명한 인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실제 행사와 매우 근접하고 거리도 오차도 없는 정도의 인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너희에게 해가 되는 것도 없으니,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냥 이야기로 생각하면 된다.

두 이야기를 통해 너희는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먼저, 두 이야기가 전에 우리가 나누었던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와 무관한 것이냐? 필연적인 연결이 있지 않으냐? 이 두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안배한 모든 것이 매우 섬세하고 완벽하다는 것을 보게 되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한 모든 것, 하나님이 기울인 모든 심혈은 다 인류의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하나님의 고심이 확연히 보이지 않느냐? 인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공기를 준비해 놓았으니 사람은 그저 숨만 쉬면 된다. 사람이 먹는 채소와 과일도 미리 마련된 것이다. 남쪽에서 북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지역마다 특산물이 있고, 다양한 지대의 농작물과 채소, 과일도 하나님은 다 준비해 두었다. 큰 환경으로 보자면, 하나님은 만물이 서로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의지하게 했고, 이런 방식과 법칙으로 만물의 생존과 존재를 유지시키고 보호해 주었다. 그래서 인류는 이런 생존 환경에서 아주 안정적이고 평온하게 성장할 수 있었고, 한 세대 한 세대 생육하고 번성하며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연환경의 균형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비록 이 환경은 하나님이 창조했을지라도 그가 주재하지 않고 주관하지 않는다면 이 환경을 보호하여 균형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곳은 공기가 없다. 그런 곳은 인류가 생존할 수 없고 하나님이 가지 말라는 것이므로 그 경계를 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류에게는 보호가 되며, 거기에는 다 비밀이 있다. 이러한 환경의 모든 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길이, 너비, 높이, 깊이, 그리고 지구상에 갖춰진 모든 생물, 산 것과 죽은 것은 하나님이 미리 생각하고 예비한 것이다. 왜 이런 것이 필요하고 왜 저런 것이 필요하지 않은지, 이것을 이곳에 둔 것은 어떤 목적이고 저것을 저곳에 둔 것은 또 어떤 목적인지,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오래전에 생각해 둔 것이니 사람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일부 우매한 자들은 자꾸 산을 옮기려 한다. 산을 옮기느니 차라리 평원에 가서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산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왜 산 가까이에서 살려고 하느냐? 이는 우매한 짓이 아니냐? 산이 옮겨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허리케인도 오고 대형 파도도 와서 삶의 터전이 사라진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냐? 인류는 파괴에 능하다. 자신의 유일한 생존 환경도 지키지 못하면서 만물의 공급자가 되려고 하다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만물을 관리하고 만물의 주인이 되라고 했는데, 사람이 잘했느냐? 인류는 파괴만 일삼았다.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만물의 원래 모습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만든 만물을 다 파괴했다. 산도 옮기고, 바다도 메우고, 평원도 사막으로 바꿔 놓았다. 사막에는 사람이 거주할 수 없으니 거기에 공업 단지를 세우고 핵 기지를 만들었다. 곳곳을 파괴해 이제는 강이 강 같지 않고, 바다가 바다 같지 않다…. 인류가 이 균형과 법칙을 깨트렸으니 인류의 재앙과 인류 멸망의 날이 머지않았다.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재앙이 닥칠 때 인류는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모든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이 모든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된다. 사람은 낙원에서 사는 것같이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행복인 줄 모르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됐을 때 그 모든 것이 너무나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만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가령 하나님이 다시 창조할 생각이 없다면 사람의 방법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너희는 방법이 있느냐? (없습니다.) 사실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다. 내가 알려 주면 너희는 듣자마자 이 방법의 실행 가능성을 알 것이다. 인류가 지금 이런 생존 환경에서 살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 인류의 탐욕과 파괴 때문이 아니냐? 그렇다면 인류가 이런 파괴를 멈추면 이 생존 환경이 점차 좋아지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인류를 위해 뭔가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상황에서,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인류가 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모든 파괴를 멈추고 자연을 되돌려 놓는 것이다. 모든 파괴를 멈추면, 즉 하나님이 창조한 만유에 대한 약탈과 훼손을 멈춘다면 인류의 생존 환경은 점차 좋아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생존 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점점 심각하게 파괴될 것이다. 내가 말한 방법이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하고 실행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냐? 간단하긴 간단하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가능할지 몰라도 이 지구상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가능하겠느냐?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럼 최소한 너희에게는 가능하겠느냐?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너희의 ‘가능’은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이냐?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알게 된 기초에서 나온 말이 아니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는 기초에서 나온 말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바꿀 방법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주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생존을 책임질 것이며 끝까지 책임질 것이다. 하나님은 너에게 공급할 것이다. 네가 사탄에 의해 파괴된 생존 환경에서 병에 걸리거나 오염되거나 침해당해도 상관없다. 하나님은 네 생명이 이어질 수 있도록 너에게 공급할 것이다. 너희는 이런 믿음이 있느냐? (네.) 하나님은 쉽게 사람을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이 만유의 생명 근원임’을 알아야 할 중요성을 조금 느꼈느냐? (네.) 너희의 느낌은 무엇이냐? 내게 말해 보아라. (전에는 산이며, 바다며, 호수며,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행사와 연결시키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서야 그 속에 하나님의 행사와 지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실 때 다 정해 놓으셨고, 그 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만물은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살고 있고, 최종 수혜자는 인류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행사가 이토록 실제적이라는 것도 느꼈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접하는 만물 속에서 사실이 정말 그러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로 보았다. 그렇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한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며, 말만 한마디 하고 그만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많은 일을 했다. 심지어 네가 보지 못하는 것도 다 너에게 유익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창조한 만유 속에서 살면서 만물과 서로 의지하고 있다. 식물이 기체를 뿜어내면 공기가 정화되고, 사람이 그 공기를 마시면 몸에 이롭다. 하지만 어떤 식물은 사람에게 독이 된다. 그러나 그 유독 식물과 상극을 이루는 다른 식물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놀라운 점이다! 이 부분의 주제는 오늘 얘기하지 않겠다. 오늘은 주로 사람과 만물이 서로 의지하고 있고, 사람은 만물을 떠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대략 이야기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중요성은 무엇이냐? 바로 사람이 만물을 떠날 수 없다는 점이다. 가장 간단한 예로, 사람은 공기가 없으면 안 된다. 너를 진공 속에 둔다면 너는 바로 죽을 것이다. 이건 아주 간단한 이치이다. 이를 통해서 너는 사람이 만물을 떠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어떤 태도로 만물을 대해야 하겠느냐? 아끼고, 보호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파괴하거나 낭비하지 말고 마음대로 바꾸지도 말아야 한다. 만물 속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해 준 것이니 사람은 이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오늘 소소한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돌아가서 천천히 음미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다음에는 구체적인 것을 이야기하겠다. 오늘 예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자. 안녕! (안녕히 계십시오!)

2014년 1월 18일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