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

아브라함 그 시기에 하나님이 또 하나의 성을 멸하였는데, 이 성의 이름은 소돔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 이 성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이 성을 멸한 배후의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틀림없이 다 생소할 것이다!

오늘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다음 몇 단락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그 당시의 마음을 요해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을 요해하도록 하자. 계속해서 다음 경문을 읽어보자.

(2) 하나님이 소돔을 훼멸하려 함

(창 18: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창 18:29)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0) 아브라함이 이르되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1)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 몇 단락 말씀은 내가 성경에서 발췌한 것인데, 완전한 본래 말은 아니다. 너희가 만약 본래 말을 읽고 싶으면 성경에서 본래 말을 읽어보면 된다. 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본래 말의 부분적인 내용을 빼고 여기에서 일부 관건적인 단락과 구절만 골랐다. 몇 구절 빼도 오늘의 교통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교통할 이 모든 장절과 내용 중점은 당시에 이야기가 발생한 자세한 내용과 사람 몸에서의 표현을 제쳐놓고 당시의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만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보고 하나님이 한 매사에서 진실한 하나님 자신을 보게 되면 목적에 달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분부대로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만 염려한다

이 몇 단락 말씀에 몇 개의 중요한 글자가 있는데, 바로 그 몇 개의 숫자이다. 우선, 여호와가 만일 성읍 가운데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그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즉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했는데, 사실상 의인 오십 명이 있었는가? 없었다. 이어서 아브라함이 또 하나님과 어떤 대화가 있었는가? 그가 만약 사십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냐고 하자 하나님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였다. 계속하여 아브라함이 만일 삼십 명이면 어떻게 하겠냐고 하자 하나님은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였다. 그럼 이십 명이면? 역시 멸하지 않는다. 열 명이면? 역시 멸하지 않는다. 사실상 성읍에 의인이 열 명 되는가? 열 명은 없어도 한 명은 있다. 이 의인 한 명은 누구인가? 이 사람이 바로 롯이다. 그 당시 성읍에 의인 한 명만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있어서 이 숫자에 대해 아주 가혹하거나 아주 엄격한 표현이 있었는가?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 “사십 명이면 어찌 하시겠나이까”, “삼십 명이면 어찌 하시겠나이까”라고 캐물으면서 “열 명이면 어찌 하시겠나이까”라고까지 묻자 하나님은 “열 명밖에 없다 해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고 열 명 이외의 그 나머지 사람들을 남기고 용서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였다. 이 열 명은 이미 아주 가련한 숫자였지만 사실상 소돔 성읍에 뜻밖에 열 명의 의인도 없었다. 보다시피, 이 성읍 사람의 하나님 안중에서의 죄악과 사악한 정도가 이미 하나님이 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도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였는데, 하나님이 한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런 숫자는 하나님께 있어서 결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는 의인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성읍에 의인 한 명만 있어도 하나님은 이 의인을 하나님이 이 성읍을 멸함으로 인해 말려들게 할 리가 없다. 그 뜻은 하나님이 이 성읍을 멸하든 멸하지 않든 또한 이 성읍에 의인이 얼마나 있든 이 죄악된 성읍은 하나님 안중에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반드시 훼멸되어 하나님의 안중에서 소실되어야 하지만 의인은 마땅히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시대이든, 인류가 어떤 시기에까지 발전했든 하나님의 이 태도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즉 그는 사악을 혐오하고 그의 안중의 의인을 염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명확한 태도는 바로 하나님 실질의 진실한 유로이기도 하다. 성읍에 오직 의인 한 명만 있었기에 하나님은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최종의 결과는 이 성읍이 반드시 훼멸되어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 시대에서 하나님은 한 성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성을 멸하지 않을 것이고 의인 열 명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도 그 성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경배할 수 있는 일부 사람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인류에 대해 용서하고 관용하는 일부 결정을 하거나 인도하는 일부 사역을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로운 행실을 아주 중요시하고, 그를 경배할 수 있는 사람을 아주 중요시하며, 그의 앞에서 선행이 있을 수 있는 사람도 아주 중요시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성경에서 너희는 하나님이 그 어떤 사람에게 진리를 교통하거나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것을 보았는가? 전혀 보지 못했다. 우리가 본, 하나님이 사람에게 한 말씀은 다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알려준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고 어떤 사람은 하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았는데, 이러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때의 의인은━하나님 안중의 의인은 단지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분부대로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을 집행하는 하나님의 종이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칭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 온전케 된 사람이라고 칭할 수 있는가? 칭할 수 없다. 그럼 의인이 얼마나 있든지 하나님 안중에 이 ‘의인’을 하나님의 지심인(知心人)이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간증인이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틀림없이 아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지심인과 간증인이라고 칭할 수 없다. 그럼 하나님이 그들을 어떤 사람이라고 칭하였는가? 성경에서 우리가 본 이 단락의 경문에까지 하나님은 여러 번 사람을 ‘나의 종’이라고 칭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때 이 의인들이 하나님 안중에는 곧 하나님의 종들이었고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다. 이 호칭을 하나님 마음속에서는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왜 이렇게 칭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하나의 호칭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에 표준이 있는가, 없는가? 틀림없이 있다. 사람을 ‘의인’, ‘온전한 사람’, ‘정직한 사람’이라고 칭하든 아니면 ‘종’이라고 칭하든 하나님께는 하나의 표준이 있는 것이다. 그가 사람을 ‘종’이라고 칭할 때 그는 이 사람이 바로 그의 사자를 접대할 수 있고 그의 분부에 순종할 수 있고 사자가 분부한 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였다. 어떤 일을 행하는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분부하여 땅에서 하라고 한 것과 행하라고 한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여금 땅에서 하게 한 것과 행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도라고 칭할 수 있는가? 칭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은 단지 일부 간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즉 일부 간단한 분부였는데, 사람에게 한 종목씩 이 일을 하거나 저 일을 하라고 한 것이 전부였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에 따라 그의 사역을 한다. 그때 많은 조건이 아직 구비되지 않았고 시기가 채 무르익지 않았고 인류가 하나님의 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는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보게 된, 하나님이 말씀한 ‘의인’이 30명이든지, 20명이든지 하나님이 보기에는 모두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 종에게 임할 때 그 종은 그를 접대할 수 있고 그의 분부에 순종할 수 있고 그의 말대로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안중의 종이 해야 할 바이고 달해야 할 바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호칭함에 있어서 아주 합당하다. 그들을 ‘종’이라고 칭한 까닭은 결코 너희처럼 지금 하나님의 도를 얼마큼 듣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는지를 알고 하나님의 뜻을 얼마큼 깨닫고 하나님의 경영 계획에 대해 요해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성이 성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께 그들에 대해 분부가 있을 때 그들이 하던 일을 중지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분부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있어서 이 ‘종’의 다른 한 방면의 뜻은 하나님의 땅에서의 사역에 협력하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지만 땅에서의 하나님 말씀의 집행자와 시행자인데, 하나님 마음속에서의 이런 종이나 의인들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을 전개함에 있어서 그와 협력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종이 맡은 역은 하나님의 사자가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종들이 맡은, 하나님이 분부한 매번의 ‘임무’는 하나님께 있어서 모두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잃을 수 없다. 이런 종들의 하나님과의 협력이 없으면 인류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사역이 정지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이로부터 하나님의 경영 계획, 하나님의 소원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염려하는 사람에게는 널리 긍휼을 베풀고 그가 내버리는 사람에게는 심히 노한다

성경의 기록에 소돔 성에 하나님의 종이 열 명 있었는가? 없었다! 이 성읍은 하나님이 남겨둘 가치가 있었는가? 성읍에 오직 롯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자를 접대했다. 그 뜻은 성읍에 하나님의 종이 한 사람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롯을 구출하고 소돔 성을 멸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이런 대화는 보기에는 간단한 것 같지만 한가지 아주 깊이있는 문제를 설명한다. 즉 하나님이 일을 함에 있어서는 아주 원칙적인데, 하나의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는 장기간 감찰하고 고려할 것이며 시기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어떤 결정이나 결론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려고 한 이 결정에 조금의 오차도 없음을 보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읍에 의인 사십 명도 없고, 의인 삼십 명도 없고, 의인 이십 명도 없고 심지어 열 명도 없으며 성읍의 유일한 의인은 롯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읍에서 발생된 일과 성읍의 상황은 하나님 안중에서 감찰하고 하나님이 손금 보듯 환하기에 그의 결정은 틀릴 리가 없다. 상대적으로 하나님 전능의 안받침 하에서의 사람은 오히려 이처럼 마비되고 이처럼 무지몽매하며 이처럼 시야가 좁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우리가 본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시초부터 지금까지 줄곧 발표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여기에 또 우리가 보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 숫자는 아주 간단하여 무슨 문제를 설명하지 않지만 여기에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성품이 발표되어 있다. 하나님이 의인 오십 명이 있음으로 인해 그 성을 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관용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너희는 하나님의 이 방면의 성품을 보았는가? 나아가 의인 열 명만 있어도 하나님이 이 의인 열 명으로 인해 그 성을 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용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가? 하나님이 이 의인들을 긍휼히 여기고 관용하고 걱정함으로 인해 그 성을 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관용이다. 우리가 마지막에 보게 된 결과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만일 거기에 열 명이 있으면”이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이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후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 성에 그가 말하는 의인 열 명이 없었기에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이 왜 소돔 성을 멸하려고 뜻을 정했는지를 깨달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았는가? 하나님께 하나의 어떤 정한 뜻이 있는가? 즉 그 성에 만약 의인 열 명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 성읍이 존재하는 것을 허용치 않고 반드시 그 성을 멸할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노기가 아닌가? 이 ‘노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지 않는가? 이 성품은 하나님의 거룩한 실질의 유로가 아닌가? 사람의 범함을 허용치 않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실질의 유로가 아닌가? 하나님께 있어서 의인 열 명이 없는 것으로 확정되었으니 하나님은 반드시 그 성을 멸할 것이고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인해, 그들이 너무 더럽고 패괴됨으로 인해 그 성 안의 사람들을 호되게 징벌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 몇 단락의 대화를 이렇게 분석하는가? 그것은 간단한 이 몇 마디 말 속에 널리 긍휼을 베풀고 심히 노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완전히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의인을 보애하는 동시에, 의인을 긍휼히 여기고 관용하고 걱정하고 있는 동시에 마음속으로 그 성 안의 패괴된 모든 사람을 심히 혐오하고 있다. 이것이 널리 긍휼을 베풀고 심히 노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그 성을 멸하였는가? 불로 태웠다. 하나님이 왜 불로 태우는 이런 방식으로 그 성을 멸하였는가? 네가 어떤 물건이 불에 타는 것을 볼 때 혹은 네가 어떤 물건을 불에 태우려고 할 때 그 물건에 대해 어떤 심정인가? 네가 왜 그것을 태우려 하는가? 그 물건이 더는 필요하지 않고 더는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띠고 있지 않는가? 포기의 뜻을 띠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불로 태운 방식에는 포기의 뜻을 띠고 있고 혐오의 뜻을 띠고 있으며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띠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왜 불로 소돔을 멸했는지의 심정이다. 불로 태우는 방식은 곧 하나님 노기의 정도를 뜻한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관용은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공의로움은 하나님이 노할 때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면을 보게 한다.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의 분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널리 긍휼을 베푼다. 사람이 패괴로 가득차고 하나님에 대해 미움으로 가득차고 하나님에 대해 적대함으로 가득찼을 때 하나님은 심히 노할 것인데, 이 노기를 어느 정도까지 발하는가? 그의 대적과 그의 악행이 더 이상 하나님께 보이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의 눈앞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이다. 이때에야 하나님의 노기가 사라질 것이다. 말하자면, 그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만약 그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을 멀리하였고 이미 하나님을 등져서 돌이킬 수 없다면 그의 몸이나 그의 생각이 겉으로 보기에 주관적인 뜻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경배하려 하고 하나님을 따르려 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려 하든지 그의 마음이 일단 하나님을 등지면 하나님의 노기는 끊임없이 발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심히 노할 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을 때 하나님의 노기를 발하기만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고 또한 영원토록 더 이상 이런 사람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의 거스를 수 없는 일면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한 성을 멸하려 했을 때 이 일은 사람이 보기에 아주 정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죄악으로 가득찬 성은 하나님 안중에 생존할 수 없는 것이고 계속 존류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것을 멸하는 것은 사리에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기 전과 후에 발생한 일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의 전부를 보게 한다. 그는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관용하고 긍휼히 여기지만 악하고 죄에 속한 것과 사악한 것에 대해서는 심히 노하는데, 심지어 노기가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가장 주요하고 또한 가장 두드러지고 더욱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유로한 하나님 성품의 주요한 2가지 방면에 관한 것인데, 널리 긍휼을 베풀고 심히 노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너희들 중, 다수의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조금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노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애는 각 사람의 몸에서 모두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각 사람에 대해 모두 널리 긍휼을 베푼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직 이 자리에 있는 너희들 중 어떤 한 사람이나 어떤 일부분 사람들에 대해 심히 노한 것이 아주 적고 심지어 없다고 할 수 있다. 조급해하지 말라! 하나님의 노기는 언젠가는 각 사람마다 보게 하고 느끼게 할 것인데,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한 사람에 대해 노기가 그치지 않을 때 즉 하나님이 한 사람에 대해 심히 노할 때면 하나님이 이미 이 사람을 내버린 지 아주 오래되었고 하나님이 그의 존재를 혐오하고 더는 그의 존재를 인내하지 않음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노기가 일단 임하면 이 사람이 소실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의 사역은 아직 그 정도까지 하지 않았다. 일단 하나님이 심히 노할 때면 너희는 아무도 감당할 수 없다. 보다시피, 하나님은 이 시대에 너희들 모두에게 널리 긍휼만 베풀 뿐 아직 심히 노하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이 만약 불복한다면 하나님의 노기가 임하기를 요구하여 하나님의 노기와 사람의 범함을 허용치 않는 하나님의 성품이 도대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체험해봐도 된다. 너희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말세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하나님의 노기를 보았을 뿐 진정 하나님의 노기를 체험하지 못했다

이 몇 절의 경문에서 보게 된 하나님의 이 2가지 방면의 성품은 교통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더 새로운 요해가 있게 되었는가? 어떤 요해인가? 가히 말해서,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마지막 이 한 무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누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애를 가장 많이 누린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비록 마지막 단계에서 심판 형벌의 사역을 하고 위엄과 진노를 띠고 그의 사역을 하지만 대부분 시간은 단지 말씀으로 그의 사역을 이루고 말씀으로 가르치고 말씀으로 부어주고 공급하고 양육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노기는 줄곧 숨겨져있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성품을 느낄 수 있는 것 외에 직접 하나님의 진노를 체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 거의 드물다. 다시 말해서, 심판 형벌의 사역에서 하나님이 말씀 속에서 유로한 노기는 비록 사람으로 하여금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을 체험하게 했지만 하나님의 노기는 여전히 하나님 말씀의 범위 안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을 책망하고 사람을 드러내고 사람을 심판하고 사람을 형벌하고 심지어 사람을 정죄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아직 사람에게 심히 노하지 않았고 말씀 이외에 아직 사람에게 거의 노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사람이 체험한 긍휼과 자애는 하나님의 참된 성품의 유로이지만 사람이 체험한 하나님의 진노는 단지 하나님 말씀의 어조와 분위기가 가져온 효과에 불과한데, 많은 사람들이 이 효과를 하나님의 노기에 대한 진실한 체험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실한 인식으로 잘못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다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애를 보았고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음도 보았다고 여기며, 심지어 다수 사람들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체득까지 하였다. 하지만 사람의 행위가 얼마나 형편없든지 또는 사람의 성정이 얼마나 패괴되었든지 하나님은 줄곧 인내하고 있다. 그가 인내하는 목적은 바로 그가 한 이런 말씀과 그가 치른 심혈 대가가 그가 얻으려는 사람 몸에서 달하는 효과, 이런 하나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하나의 결과를 기다림에 있어서 시간이 필요하고 사람에게 서로 다른 환경을 배설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마치 한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성인으로 될 수 없고 18~19년의 시간이 필요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20~30년의 시간이 걸려야 진정한 성인으로 성숙될 수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런 하나의 과정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고 이런 하나의 기한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또 이런 하나의 결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이 기간에 하나님은 줄곧 널리 긍휼을 베푼다. 하지만 하나님이 역사하는 기간에 그래도 아주 개별적인 사람은 격살되었고 또 일부 사람들은 심하게 하나님을 대적하여 징벌받았는데, 이런 사례는 사람의 범함을 허용치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더욱 실증하고 또한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관용과 인내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도 충분히 실증한다. 물론 이런 전형적인 사례에서 이 사람들 몸에 나타낸 하나님의 일부분 성품은 결코 하나님의 전체 경영 계획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사실상 마지막 이 한 단계 역사에서 하나님이 기다리는 기간에 하나님은 줄곧 인내한다. 그는 그의 인내와 그의 생명을 대가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이런 하나의 결과를 바꾸는데, 이것을 너희는 보았겠지?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 리가 없다. 그가 노를 발할 수 있고 긍휼도 베풀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주요한 두 부분 성품의 유로이다. 이는 아주 뚜렷하지 않은가? 즉 하나님은 옳고 그름, 정의와 비정의, 긍정적 사물과 부정적 사물을 모두 사람에게 아주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혐오하는지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모두 직접 체현해낼 수 있고 하나님의 역사 중에서도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뚜렷하게, 아주 분명하게 보게 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아주 모호한 것이 아니고 매우 두리뭉실한 것도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아주 진실하게, 아주 실제에 부합되게 각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보게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진실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에게 숨긴 적이 없 지만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등졌다

만약 내가 이런 것을 교통하지 않으면 너희는 누구도 성경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을 볼 수 없다. 이것은 실정이다. 성경의 이런 이야기 속에 비록 하나님이 한 일부 일은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적고 게다가 하나님이 직접 사람에게 그의 성품을 소개하거나 그의 뜻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았고 후세 사람들이 단지 이런 기록을 이야기로만 여겼기 때문에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아주 은밀히 숨은 것 같은데 하나님의 본체가 사람에게 숨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숨겨진 것이다. 나의 오늘 교통을 통해 너희는 아직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완전히 숨은 분이라고 생각하는가? 너희는 아직도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에게 숨겨진 것이라고 여기는가?

창세 이래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역사는 보조를 맞추며 여태껏 사람에게 숨긴 적이 없고 전부 공개하고 전부 나타냈지만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하나님과 점점 멀어졌고, 사람의 패괴가 점점 깊어짐에 따라 사람과 하나님과의 거리도 점점 멀어졌다. 점차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게’ 되어 하나님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다 잃게 되었다. 더 나아가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모르고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요해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숨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등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믿지만 사람 마음속에는 결코 하나님이 없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사람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고 사람이 늘 하나님을 피하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과 아주 멀리 떨어졌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사실, 사람의 마음이 옮겨지지도 않았다. 즉 스스로 보관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맡기지 않았고 하나님께 보여주지도 않았다. 설사 일부 사람들이 늘 “하나님, 당신께서 제 마음을 감찰하시니 제가 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십니다.”라고 기도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감찰하고 만약 그가 맹세를 어기면 하나님의 징벌이 임하게 해달라고 맹세까지 한다! 사람이 비록 하나님으로 하여금 마음을 감찰하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자신의 운명과 전망과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겨 주관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하나님께 맹세하거나 입장을 밝히든지 하나님이 보기에 너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 여전히 닫혀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하나님이 너의 마음을 살피는 것만 허락할 뿐 하나님이 너의 마음을 주관하는 것은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즉 너는 전혀 마음을 내놓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단지 듣기 좋은 말만 하여 하나님께 들려줄 뿐 여러 가지 궤사한 존심은 다 감추고 자신의 의도, 자신의 타산, 계획도 다 숨기고 전망과 운명을 하나님이 빼앗아갈까 심히 두려워 자기 손에 꽉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나 그에 대한 사람의 진심을 볼 수가 없다. 비록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는 분이어서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볼 수 있고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것을 품고 있는지를 볼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 주관하게 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께는 살펴보는 권리만 있고 주관하는 권리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주관적 의식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의 지배대로 하기 싫어하고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봉한 것 외에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또 갖은 방법을 다해 마음을 감싸고 듣기 좋은 말로 가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신임을 사취하고 자신의 진면목을 감추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한다. 그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 그의 실정을 보이기 싫어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기 싫어하고 혼자 보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뜻은 바로 사람이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떤 일을 생각하든지 혼자 계획하고 혼자 궁리하고 스스로 결정하며 하나님의 ‘참여’가 필요없고 하나님의 개입도 필요없고 더욱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분부에 대해서든지, 부탁에 대해서든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서든지 사람은 자신의 존심과 자신의 이익에 근거하고 자신의 그 당시의 정형에 근거하고 또 자신의 그 당시의 처지에 근거하여 선택을 할 것이다. 사람은 늘 자신이 장악한 지식과 견식, 자신의 머리에 의해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판단하고 선택하며 하나님이 간섭하거나 주관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본 사람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