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

지난번 집회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화제를 교통했다. 그 화제는 무엇인가? 너희들이 기억했는가? 내가 다시 한번 반복하겠다. 지난번에 교통한 화제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이다. 이 화제는 너희에게 있어서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은가? 어느 부분이 너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인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인가? 너희는 어느 부분의 화제에 대해 가장 흥미를 느끼는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에서 어느 부분이 너희가 가장 듣고 싶은 화제인가? 나는 너희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 중에서 어디서나 모두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은 언제 어디서나 모두 그의 역사 중에서 유로(역주: 흘러나옴)되며 하나님의 성품은 사실상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고 하나님의 전체 경영 계획 중에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이 3자는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교통한 하나님의 역사 내용은 성경에 기록된 아주 오래전에 발생한 일이다. 이런 일은 모두 사람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고 사람 몸에서 발생한 동시에 하나님의 참여도 있고 하나님의 발표도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하나님을 알아감에 있어서 매우 가치 있고 매우 의의 있다. 하나님이 인류를 갓 창조한 후, 인류와 접촉하기 시작했고, 인류에게 말씀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의 성품을 인류를 향해 발표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류와의 접촉이 있은 이후로 하나님이 인류에게 부단히 그의 소유소시와 그의 실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이 볼 수 있든 없든, 요해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어쨌든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고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면서 그의 성품을 유로하고 그의 실질을 발표한 것은 사실이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실질,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하나님의 인류와의 접촉과 역사에 따라 부단히 발표되고 있고 부단히 유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태껏 사람에게 무엇을 감춘 적이 없고 무엇을 숨긴 적도 없으며, 조금도 남김없이 그 자신의 성품을 공개하고 나타내고 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그를 알고 그의 성품과 실질을 요해할 수 있기를 바라지 인류가 그의 성품과 실질을 영원한 비밀로 여기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인류가 하나님을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여기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인류는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인솔을 받을 수 있는데, 이런 인류만이 진정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살 수 있고, 빛 속에서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다.

하나님이 발표하고 유로한 말씀과 성품은 그의 뜻을 대표하고 그의 실질도 대표한다. 하나님이 사람과 접촉할 때, 어떤 말씀을 하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떠한 성품을 유로했든지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소시가 무엇이고 실질이 무엇인지를 보았든지 이는 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대표한다. 인류가 얼마를 느낄 수 있든지, 얼마를 이해할 수 있든지, 얼마를 깨달을 수 있든지 모두 하나님의 뜻을━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대표하는데,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요구하고, 사람에게 어떻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요구하고,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데에 달할 수 있는지를 요구한 것이다. 이런 것은 다 하나님의 실질과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성품인지, 하나님께 어떠한 소유소시가 있는지는 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동시에 발표한 것인데, 거짓이 없고 위장이 없고 감춤이 없고 꾸밈이 없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지 못하고 언제나 분명히 보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유로한 것, 발표한 것은 다 하나님 자신의 소유소시이고 다 하나님 자신의 참된 성품의 세부적인 것이고 각 방면의 것인데, 무엇 때문에 사람은 보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사람은 투철히 인식하지 못하는가? 여기에는 하나의 아주 중요한 원인이 있다. 이 원인이 무엇인가? 바로 창세 이래로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은 것이다. 시초에 하나님이 사람에게━갓 창조된 사람에게 무엇을 하였든지 사람은 그저 하나님을 하나의 동반자로 여기고 하나의 의지할 대상으로 여겼을 뿐 결코 하나님에 대해 어떤 인식이나 요해가 없었다. 즉, 사람으로 하여금 의지하게 할 수 있는 이런 한 분의 대상, 사람 안중의 이런 한 분의 ‘동반자’가 발표해 낸 것이 하나님의 실질임을 몰랐고 그가 만물을 주재하는 그 한 분임도 몰랐던 것이다. 한마디 간단한 말로 하면, 그때의 사람은 하나님을 조금도 알아보지 못하고, 천지 만물이 하나님이 만든 것인 줄도 몰랐으며, 하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몰랐고, 더욱이 하나님이 어찌된 일인지도 몰랐다. 물론 하나님도 그때에 사람에게 그를 알고 그를 요해해야 하며 그가 한 것을 깨닫고 그의 뜻을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는 인류가 창조된 가장 최초의 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율법시대의 사역을 하려고 준비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 몸에 얼마간의 일을 한 동시에 사람에게 얼마간의 요구도 제기하기 시작했으며 사람에게 어떻게 제사를 드리는지, 어떻게 하나님께 경배하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때서야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간단한 개념이 있게 되었는데, 하나님과 사람과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그 한 분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과 일정한 거리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얼마만한 높은 인식이 있어야 하고 얼마만한 깊은 요해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역사하는 절차에 따라, 그가 역사하는 상황에 따라 사람에게 서로 다른 요구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는가? 하나님의 어느 방면의 성품을 보았는가? 하나님은 아주 진실하지 않은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아주 합리적이지 않은가? 그는 인류가 창조된 가장 이른 시대에서 사람에 대해 정복 사역을 하지 않았고 온전케 하는 사역도 하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그리 많은 말씀을 하지 않은 정황에서는 사람에 대한 그의 요구가 아주 낮았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사람에게 어떤 행위가 있든지 심지어 사람이 그를 거스르는 일을 좀 하였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다 용서할 만한 것이었고 따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를 알고 있고 사람 몸에 무엇이 구비되었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떤 요구 표준을 줘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설령 그때의 요구 표준이 아주 낮다고 해도 하나님의 성품이 위대하지 않음을 뜻하지 않고 그의 지혜와 전능이 한마디 빈말임을 뜻하지도 않는다. 인류가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 자신을 알려면 오직 하나의 경로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발걸음을 따르는 것과 인류에게 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 달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알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 그의 본체를 인류에게 나타내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사람은 요구할 수 없고 감히 요구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요해하고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요해하면 이미 진실한 하나님 자신을 본 것이고 이미 하나님의 본체를 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달하게 되는 결과이다.

하나님의 역사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이 부단히 앞으로 발전함에 따라 하나님이 사람과 무지개로 언약을 세운 것을 하나님이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삼은 후 하나님의 마음은 더욱더 절박하게 그와 합심할 수 있는 사람을 얻으려 하였고, 또한 더욱더 절박하게 땅에서 그의 뜻이 통행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얻으려 하였으며, 더욱이 땅에서 흑암 세력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속박을 받지 않을 수 있고 그를 간증할 수 있는 한 무리 사람들을 얻으려 하였다. 이런 한 무리 사람들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오랫동안 바란 것이고 하나님이 창세 이래 줄곧 기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든지, 사람과 언약을 세우든지 하나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정도 변하지 않았으며 그의 계획과 소망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하려고 한 것은 창세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바란 것이다. 즉, 인류 가운데서 그가 얻으려는 사람을 얻고, 그의 성품을 요해하고 인식할 수 있고 그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고 그를 경배할 수 있는 한 무리 사람들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이런 한 무리 사람들은 진정 그를 간증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그의 지심인(知心人)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오늘, 우리 계속 하나님의 발자취를 좇아 하나님의 역사의 발걸음을 따름으로써 ‘봉인하여 보관한’ 지 오래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및 하나님과 관련된 세부적인 것을 찾아내고, 이런 것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실질을 요해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각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게 하고 또한 각 사람으로 하여금 점차 하나님에게 다가가게 하고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도록 하자.

지난번에 우리는 하나님이 왜 사람과 언약을 세워야 했는지에 관한 일들을 일부분 말했다. 이번에 우리 계속해서 다음 부분의 성경 장절을 교통해보자. 경문을 읽어 보자.

(1) 아브라함

1.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함

(창 17:15~17)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창 17:21~22)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

(창 22:2~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 22:9~10)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하나님이 하려고 작정한 사역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를 방금 너희는 다 들었겠지! 그는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 후 선정한 인물인데,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그가 100세, 그의 아내 사라가 90세일 때 하나님의 약속이 그에게 임했다.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약속을 주려 하였는가? 그것은 바로 경문에 언급된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의 당시의 배경이 어떠했는가? 경문에 이렇게 기록되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즉, 이 노부부는 그 나이에 자녀를 출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아브라함은 무엇을 했는가? 그는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이것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 뜻은 그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그저 우스개에 불과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이것은 사람이 달할 수 없는 일이고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달할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아주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도 사람이 이렇게 나이 들어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하나님이 놀랍게도 모르시다니. 또 나보고 낳아 키우라고 아들을 하나 주겠다고 하시는데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땅에 엎드린 동시에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불가능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건 사람과 농담하시는 거야, 이건 진짜일 수 없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담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럼 아브라함은 하나님 안중에 어떤 사람인가? (의인입니다.) 어디에서 그를 의인이라고 했는가? 너희는 무릇 하나님이 부른 사람이라면 다 의인이고 다 온전한 사람이고 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규례만 지킨다! 이 일을 너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한 사람에게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각 사람에 대해 모두 하나의 가늠 표준이 있다. 비록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지만 이 일에서의 아브라함의 표현을 놓고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인가? 막연한 것이 좀 있는가, 없는가? 그의 믿음이 큰가? 크지 않다! 그의 웃음과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은 이미 그 사람을 대표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를 의인으로 여기는 것은 순전히 상상이고 함부로 규례에 맞추는 것이며 무책임한 평가이다. 아브라함의 웃음과 그의 작은 행동을 하나님이 보지 못했겠는가, 알지 못했겠는가? 하나님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작정한 일을 하나님이 바꿀 리가 있겠는가? 없다! 하나님이 이미 다 계획해 놓고 이 사람을 택하려고 뜻을 정했을 때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사람에게 어떤 표현이 있든지 하나님께 있어서는 조금도 영향과 방해를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그의 계획을 바꿀 리가 없고 사람의 표현 더구나 무지한 표현 때문에 아무렇게나 그의 계획을 바꿀 리도 없고 그의 계획을 파괴할 리도 없다. 그러므로 <창세기> 17장 21~22절에 뭐라고 말씀했는가?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아브라함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아랑곳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때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고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높은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한 일과 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려고 뜻을 정했는지, 어떤 사람을 택하려고 뜻을 정했는지, 그가 일을 함에 어떤 원칙이 있는지, 그는 사람에게 완전히 터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의 분량이 전혀 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아브라함이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표현하든지 하나님이 보기에 다 아주 정상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정죄하지 않고 질책하지도 않고 단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이삭을 낳을 것이니라”고 말씀했을 뿐이다. 하나님께 있어서 이 일은 하나님 말씀의 발함에 따라 점차적으로 응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안중에 그가 이루려고 계획한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안배한 후 떠났다.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어떻게 생각하든지,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든지, 사람이 어떻게 계획하든지 하나님과는 상관없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시간과 절차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계속 앞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 원칙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어떻게 인식하든지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믿지 않고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그의 계획을 포기할 리가 없고 그의 역사를 포기할 리도 없다. 사실은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에서 본, 하나님이 그가 정한 시간에 이삭을 태어나게 한 것이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사람의 행위와 사람의 표현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았는가? 가로막지 못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작은 믿음,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하나님의 역사에 영향을 주었는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나님의 경영 계획은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일도, 그 어떤 환경도 영향을 주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그가 하려고 작정한 모든 일은 다 그의 계획에 따라 제때에 완성되고 이루어지며, 그의 사역은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일부 우매와 무지에 대해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일부 저촉과 관념에 대해 하나님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우려할 것 없이 그가 하려는 사역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자 그의 무소불능(無所不能)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사역은‘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줌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이 응했는데,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계획이 여기에서 멈추었음을 뜻하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웅대한 계획이 비로소 막 시작된 것이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준 것은 단지 하나님의 전체 경영 계획의 서막을 열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 시각 또 누가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이 일에서부터 조용히 상연될 줄을 알았겠는가?

하나님은 사람의 우매함을 보지 않고 사람의 진심만 원한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 몸에 무엇을 하였는지 보자. <창세기> 22장 2절,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분부하였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즉,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를━그가 사랑하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알려 준 것이다. 지금에 가져와서 봐도 하나님이 한 이 일은 여전히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겠지? 그렇다! 하나님이 그때 한 것은 사람의 관념에 너무나 부합되지 않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사람의 관념 속에서는 ‘사람이 불신하고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아들을 주셨다가 사람이 아들을 얻은 후 또 바치라고 하신 이 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하나님이 도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걸까? 하나님의 뜻은 도대체 뭘까?’라고 여긴다. 하나님이 아무런 조건도 없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었지만 또 무조건적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는데, 이 일은 지나친가, 지나치지 않은가?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일은 지나칠 뿐만 아니라 또 좀 ‘생트집’을 부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 본인은 지나치지 않다고 여겼다. 비록 그에게 생각이 좀 있고 하나님에 대해 의심과 질투가 좀 있었지만 그는 그래도 이삭을 바치려고 준비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너는 어떤 일이 아브라함이 기꺼이 자기 아들을 바치려 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보는가? 이 말은 어떻게 했는가? 원문은 이렇게 기술되었다. (창세기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세기 22: 9~10)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했을 때 이 모든 행동을 하나님이 보았는가, 보지 못했는가? 하나님은 보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해서부터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정말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한 이 전 과정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았다. 전에는 그가 우매했든지, 무지했든지,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있었든지 하지만 이때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마음이 진실한 것이었고 성실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준 이삭을━자기 아들을 성심껏 하나님께 돌려드리려고 했다. 하나님은 그에게서 그의 순복을 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이 한 많은 일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심지어 불가사의하게 한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지배하려고 할 때 이 ‘지배’는 사람에게 있어서 많은 경우에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자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사람에 대한 검증이다. 그러나 아브라함 몸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복을 표현해낼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케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에━이삭을 바치는 것에 순복할 때 하나님이 인류에 대해 즉 그가 택한 아브라함, 그 사람에 대해 참으로 안심하였고 참으로 인가하였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택한 이 인물이 그의 약속을 담당할 수 있고 그의 다음 경영 계획을 담당할 수 있는 하나의 없어서는 안 될 선도자임을 확정하였다. 비록 이 일은 단지 시련과 검증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기쁨과 위로를 느꼈고 그에게 드린 사람의 사랑을 느꼈으며 사람에게서 온 전에 없던 위로도 느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행위를 제지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전혀 이삭의 목숨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시 아브라함의 행위를 제지시켰다. 하나님이 보기에 아브라함의 순복은 이미 검증을 견뎌냈으며 그가 한 것은 이미 충분했다. 하나님은 그가 하려는 일에서 이미 결과를 본 것이다. 이 결과는 하나님이 만족해하는 것인가, 아닌가? 가히 말해서, 이 결과는 하나님이 만족해하는 것이고 원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보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는 진실하지 않은가? 비록 하나님이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 사람을 시험한다고 하지만 아브라함 몸에서 하나님은 그가 원한 것을 보았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진실한 것이고 그의 순복이 무조건적인 것임을 보았다. 이 ‘무조건’이 바로 하나님이 원했던 것이다. 많은 경우에 어떤 사람은 “저는 이미 이것을 바쳤고 이미 저것을 포기했는데 왜 하나님은 저에 대해 아직도 만족해하시지 않습니까? 왜 아직도 계속 저를 시련하십니까? 왜 아직도 계속 저를 검증하십니까?”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 하나님이 너의 마음을 보지 못하였고 너의 마음을 얻지 못하였음을 설명한다. 즉, 하나님이 네가 아브라함처럼 칼을 들고 직접 자기 아들을 죽여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이런 진심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한 너의 무조건적인 순복을 보지 못하였고 너의 몸에서 위로도 얻지 못하였으니 당연히 너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것이 아닌가? 이 화제는 여기까지 얘기하자. 계속해서 다음 단락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읽어보자.

3.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창 22:16~18)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준 사실 그대로의 기술이다. 말씀은 비록 간결하지만 내용은 아주 풍부한데, 여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준 원인과 배경 및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준 내용이 포함되고 동시에 또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할 때의 기쁨과 격동된 심정이 가득하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얻기를 기대하는’ 절박한 마음이 가득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분부에 순복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소중히 여김과 불쌍히 여김을 보았고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얻기 위해 치른 대가와 하나님의 고심도 보았으며 더욱이 이번 경영 계획 사역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홀로 감당한 슬픔과 아픔이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는 이 경문 중의 말씀에 나타남을 보았다. 이는 의미심장한 말씀이자 역시 후세 사람들에 대해 각별한 의의와 심원한 영향이 있는 말씀이다.

사람의 진심과 순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다

여기에서 보다시피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큰가, 작은가? 어느 정도 큰가? 여기에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는 한마디 관건적인 말이 있는데, 아브라함이 전무후무한 복을 받았음을 설명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대로 자기의 독자를━애지중지하는 독자를 하나님께 돌려드릴 때[주: 여기에서 “바치다”라고 말해선 안 되고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리다”라고 말해야 함],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드리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복을 베풀어주려고 하였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베풀어주려고 한 약속은 무엇인가? 바로 그의 자손이 많아지게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많아지게 하는가? 경문에 이렇게 기술되었다.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하나님이 한 이런 말씀은 어떤 배경에서 한 것인가?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얻은 것인가? 경문에서 하나님이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한 바와 같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분부에 순종하고 조금의 원망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구대로, 분부대로 했기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런 약속을 주었던 것이다. 이 약속에 한마디 관건적인 말이 있는데, 하나님의 그때 당시의 마음과 생각에 관련된다. 이 관건적인 말을 너희는 보았는가? 너희는 아마 주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할 때 자신을 가리켜 맹세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맹세할 때는 모두 어디를 가리키는가? 모두 하늘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을 향해 서약하고 맹세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맹세한 이 ‘현상’에 대해 사람은 아마 그다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너희에게 정확한 해석을 제시할 때면 너희는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마주하여 하나님은 다시 한번 외로움과 ‘어찌할 바를 모름’을 느꼈다. ‘애끓는 마음에’ 가히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은 하나의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을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아브라함에게 이런 약속을 준다고 자신에게 말씀한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은 하나님이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는 이 말씀을 듣게 되었다. 하나님의 이런 동작으로부터 너는 너 자신을 연상할 수 있다. 네가 가슴에 손을 얹고 너 자신에게 말할 때 너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주 분명히 알고 있지 않겠는가? 너의 태도가 아주 진실하지 않겠는가? 너는 네가 말하는 바를 아주 진실하게 마음으로 말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 보게 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할 때의 태도가 진지하고 진실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고 그에게 약속을 준 동시에 자신에게도 말씀하였다. 그는 자신에게도 “내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고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이는 그가 나의 말에 순종하였고 그는 내가 선정한 인선(人選)임이니라”고 알렸다. 하나님이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는 이 말씀을 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 몸에서 이스라엘에서의 그의 선민이 생기게 한 다음 이 선민들을 인솔하여 그의 사역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뜻을 정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예로 하여금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담당하게 하려 하였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이 발표한 것을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하고 또한 아브라함의 후예의 몸에서 계속함으로써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염원을 이루려고 하였던 것이다. 너희들이 말해봐라, 이것이 복있는 일이 아닌가? 인류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다. 가히 말해서 이것은 가장 복이 있는 일이다. 아브라함이 얻은 이 ‘복’은 그의 자손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경영, 그의 부탁, 그의 사역을 아브라함의 후예 몸에서 이루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얻은 축복이 잠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영 계획이 앞으로 추진됨에 따라 지속되고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할 때,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맹세할 때 이미 뜻을 정했는데, 하나님이 뜻을 정한 이 과정은 아주 진실하지 않은가? 아주 실제적이지 않은가? 하나님은 이때부터 시작하여 그의 심혈, 그의 대가, 그의 소유소시, 그의 전부 나아가 그의 생명까지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예에게 베풀어주려고 뜻을 정했고, 또한 이 부분 사람들 몸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행사를 나타내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지혜와 그의 권병(역주: 권세)과 그의 능력을 보게 하려고 뜻을 정했다.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고 하나님을 간증할 수 있는 사람을 얻는 것은 여태껏 바뀐 적 없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비록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한 동시에 아브라함에게도 말씀하였지만 하나님이 한 매 마디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가 하나님이 그에게 준 축복을 들은 것 외에 하나님의 그 시각의 진정한 뜻을 깨달을 수 있었는가? 깨달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때,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맹세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외로웠고 여전히 슬펐던 것이다. 그가 하려고 한 것과 계획하려고 한 것을 여전히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에 아브라함을 포함해 그와 마음을 나누며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여전히 하나도 없었고 더욱이 그가 하려는 사역을 그와 협력하여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얻고 그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얻은 것 같지만 사실상 하나님에 대한 이 사람의 인식은 거의 제로나 다름없었다. 비록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가 ‘만족하지 못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경영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의미하고 그가 얻으려는 사람, 그가 보려고 기대하는 사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와 거리가 아직도 아주 멀기에 그에게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림이 필요하고 인내도 필요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때는 하나님 자신 외에 아무도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정이 매우 격동된 동시에 매우 무거움도 느꼈지만 하나님은 그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여전히 그가 하려는 다음 단계 사역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이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는가? 아브라함이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에게 이처럼 큰 축복을 주었다. 비록 겉으로 보면 이 일은 아주 정상적이고 역시 순리적인 일인 것 같지만 여기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 즉 하나님이 그에 대한 사람의 순복을 아주 보애하고 그에 대한 사람의 이해와 진심을 귀중히 여긴다는 것을 보게 한다. 하나님이 이런 진심을 어느 정도까지 귀중히 여기는가? 어느 정도까지 귀중히 여기는지 너희는 아마 요해하지 못할 것이고, 아마 아무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고 이 아들이 자라난 후에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요구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분부대로 조금도 틀림없이 해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데, 그의 이 진심이 하나님을 감동케 하였고 또 하나님으로 하여금 보애하게 하였다. 어느 정도까지 보애했는가? 보애한 원인은 무엇인가? 아무도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고 아무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시대에 아브라함은 ‘천지가 진동하는’ 한가지 일을 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전에 없던 만족을 느끼게 하였고 또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말씀에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을 얻은 기쁨을 느끼게 했다. 이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이 친히 만든 피조물에게서 온 것인데, 이것은 또한 인류가 창조된 이래 하나님께 바친, 하나님이 보기에 가장 귀중한 첫 ‘제물’이기도 하다. 이 ‘제물’은 하나님을 아주 고생스럽게 기다리게 했지만 하나님은 이 ‘제물’을 피조된 인류에게서 온 가장 중요한 첫 선물로 여겼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심혈 대가로 바꿔온 첫 성과를 보게 했고 또한 인류 몸에서의 희망도 보게 했다. 그 후에 하나님의 마음은 그의 곁을 동반하고 진심으로 그를 대하고 진심으로 그를 생각하는 이런 한 무리 사람들이 있기를 더욱 간절히 바랐다. 심지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계속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하나의 마음이 있어 그를 동반할 수 있고 그의 경영을 계속하도록 그와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하나의 소원일 뿐이고 하나의 생각일 뿐이었다. 아브라함은 단지 그에게 순복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해 요해와 인식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표준에━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고 하나님을 간증할 수 있고 하나님과 합심하는 데에 전혀 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일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복을 보았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검증을 견뎌낸 것도 보았다. 비록 하나님이 그의 진심과 순복을 열납하였을지라도 그는 아직 하나님의 지심인이 되기에 부족했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요해하고 하나님 성품을 아는 사람이 되기에 부족했으며 하나님과 합심하고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는 데에 전혀 달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외로웠고 여전히 안타까웠던 것이다. 하나님은 외로울수록, 안타까울수록 되도록 빨리 그의 경영을 계속하고 되도록 빨리 한 무리 사람들을 선정하여 얻음으로 그의 경영 계획을 이루고 그의 뜻을 이루어야 했는데, 이것은 시초부터 지금까지 줄곧 변하지 않은 하나님의 절박한 마음이다. 하나님은 시초에 인류를 창조해서부터 이미 한 무리 이기는 자들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고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요해하고 알 수 있는 한 무리 사람들이 그와 동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하나님의 이 마음은 여태껏 바뀐 적이 없다. 아직도 얼마 더 기다려야 하든지, 앞길이 얼마나 간고하든지 또한 하나님이 바라는 목표가 얼마나 아득히 멀든지 하나님은 인류 몸에서의 기대를 여태껏 바꾼 적이 없고 또 여태껏 포기한 적도 없다. 지금 내가 이렇게 말하니 너희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좀 느꼈는가? 아마 깊이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을 텐데, 천천히 느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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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소유소시(所有所是):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

②요해(了解): 알다 등의 뜻.

③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④저촉(抵觸): 대립하고 저항하는 심리 상태.

⑤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