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와 하나님 역사가 달할 효과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하나님이다. 일에 부딪치면 사람에게 각기 다른 표현이 있는데, 사람의 각기 다른 표현에서 하나님께도 서로 다른 태도가 있다. 이는 그가 나무 인형이 아니고 공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태도는 사람이 인식할 가치가 있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태도를 인식함을 통해 조금씩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네가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아주 해내기 어려운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하나님을 이해할 때 하나님을 쉽게 규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더는 하나님을 규정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쉽게 거스르지 않을 것이며, 부지중에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여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게 할 것이다. 이로써 너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해 경외가 있게 되고 더는 네가 장악한 글귀 도리나 이론을 하나님께 씌우지 않고 시각마다, 매사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게 되는데, 이러면 부지중에 너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될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하는 사역을 사람이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지만 하나님은 각 사람이 한 것, 하나님을 대하는 각 사람의 태도를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볼 수도 있다. 이것은 각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인지(認知)해야 할 바이다. 만일 네가 마음속으로 늘 ‘내가 여기서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실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실까? 아마 아실 수도 있고 모르실 수도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관점을 갖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한편으로는 또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면 결국 언젠가는 하나님을 촉노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네가 이미 위험한 변두리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어도 진리의 실제를 얻지 못하고 더욱이 하나님의 뜻도 모르며 생명 분량에 아무런 진보도 없고 지키는 것은 그저 너무 얕아서 더 이상 얕을 수 없는 그런 도리뿐임을 보았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그들이 여태껏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태껏 하나님의 존재를 정확히 보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말해봐라,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보면 누림이 있겠는가? 마음속에 위로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의 믿음법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추구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대하는지, 사람의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을 뒷전에 두어 공기로 삼지 말고, 시시각각 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살아있고 확실히 존재하는 하나님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는 셋째 하늘에만 있으면서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시로 각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고 각 사람의 행동과 일언일행을 감찰하며 너의 표현과 하나님을 대하는 너의 태도를 감찰하고 있다. 네가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너의 모든 행위와 너의 마음과 생각이 다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고 있다. 너의 행위로 말미암아, 너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또 너의 태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부단히 너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바꾸고 있고, 부단히 너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꾸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일부 사람들에게 마치 하나님이 너를 총애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네가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너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고정불변인 것처럼 늘 자신을 하나님 손의 귀염둥이로 여기지 말 것을 권한다. 꿈꾸지 말라! 하나님이 각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다 공의롭다. 그가 사람에 대해 아주 정중하게 정복과 구원의 사역을 하는데, 이것이 그의 경영이다. 각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엄격하고 진지한 것이지 사람을 애완동물로 삼아 달래며 놀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총애도 아니고 지나친 사랑도 아니며, 사람에 대한 긍휼과 관용은 방종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아끼고 가엾게 여기는 것이고 생명에 대한 존중이며, 사람에 대한 긍휼과 관용에는 사람에 대한 그의 기대를 두고 있으며, 그의 긍휼과 관용은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자본이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분이고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는 분이다.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는 원칙이 있는 것이지 절대로 규례가 아니며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인류에 대한 그의 뜻은 시간에 따라, 환경에 따라, 각 사람의 태도에 따라 점차적으로 바뀌고 점차적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니, 너는 하나님의 실질은 변함이 없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상황에서 발표할 수 있음을 마음속으로 아주 뚜렷하게 아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아마 너는 이 일이 그리 심각하지 않다고 여기고 너의 관념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할 것이라고 상상할지도 모르지만 어떤 일은 전혀 반대이다. 네가 자기의 관념으로 하나님을 가늠할 때는 이미 하나님을 촉노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네가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할 리가 없고 절대로 네가 말한 것처럼 이 일을 대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너에게 조심스럽게 너의 주변의 매사를 대하고 매사마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것을 배우라고 일깨워준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태도에 관한 일을 대함에 있어서 꼭 확실히 해야 하고 꼭 분별있는 사람과 교통하며 참답게 찾고 구해야지 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장난감으로 삼아 함부로 논단하거나 함부로 결론을 내리거나 거만한 태도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고 너의 결국을 정하는 과정에서 너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든지, 너를 심판 형벌하든지 어쨌든 그가 너를 대하는 태도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와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에 달린 것이다. 너는 하나님에 대해 어느 한 방면의 인식이나 요해가 있다 해서 한번으로 영원히 하나님을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 죽은 하나님을 믿지 말고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기억했겠지! 비록 내가 한 어떤 말은 실정이고 또한 너희의 필요이지만 너희의 지금의 정형과 지금의 분량으로 인해 나는 더 높은 요구를 제기하여 너희의 적극성에 타격을 주고 싶지 않고 너희로 하여금 속으로 매우 많은 쓸쓸함을 느끼거나 하나님에 대해 매우 많은 실망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으며,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존중하는 태도로 앞으로의 길을 걸을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 일을 흐리멍덩하게 대하지 말고 이 일을 가장 큰 일로 대하고 마음속에 두고 실제와 연결시키고 현실 생활과 연결시켜야지 입에만 달고 있지 말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 일은 치명적인 일이고 너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우스개로 여기지 말고 아이들 장난으로 여기지 말라! 오늘 너희에게 이런 말을 했는데, 너희 마음속에 무언가 깨닫고 얻은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너희는 내가 한 이런 말에 대해 또 의문이 있는가?

이런 화제는 비록 좀 새롭고 너희의 관점이나 너희가 평소에 추구하고 중요시하는 것과 좀 거리가 있지만 나는 너희가 한동안 교통한 후이면 내가 한 이런 말에 대해 하나의 같은 인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화제는 매우 새롭고 너희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런 말이 너희에게 그 어떤 부담도 더해주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오늘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너희를 겁주는 것이 아니고 이런 방식으로 너희를 대처하는 것도 아니라 너희로 하여금 사실의 진상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어디까지나 거리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전혀 하나님을 요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태도를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은 그렇게 열성적으로 하나님의 태도에 관심을 갖지도 않고 줄곧 그렇게 믿고 그렇게 걸어오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요해하는 이 일에 대해 흐리멍덩하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일부 일들을 분명히 말하여 너희로 하여금 너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한 분의 하나님인지, 그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각 부류의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는 무엇인지, 너희가 이렇게 하면 그의 요구와 거리가 얼마나 먼지, 그가 요구한 표준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알게 할 필요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을 알게 하는 목적은 너희들 각자의 마음속에 모두 하나의 가늠 표준이 있게 하고 자신이 이 길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너희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얻지 못했는지, 어떤 영역에 전혀 발을 들여놓지 못했는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평소에는 너희가 함께 교통하면서 그저 사람들이 늘 해오던 화제만 말하다 보니 범위가 매우 좁고 내용도 아주 얕아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범위 표준과 거리가 있고 차이가 있었는데, 계속 이대로 나간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도와 배치되어 걸을수록 더욱 멀어질 것이다. 너희는 그저 하나님의 기존의 이런 말씀을 숭배 대상으로 삼고 의식과 규례로 삼을 뿐인데, 그게 전부이다! 사실, 하나님은 너희의 마음속에서 전혀 지위가 없고 하나님은 여태껏 너희의 마음을 얻은 적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주 어렵다고 여기는데 이것도 솔직한 말이다. 확실히 좀 어렵다! 만일 사람에게 본분을 함에 있어서 외적인 일을 하라고 하고 있는 힘을 다하라고 한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주 쉽다고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다 인류의 능력 범위 내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이 영역에 관련되기만 하면 각 사람에게 있어서 확실히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는 일에 관련되기 때문에 당연히 일정한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네가 첫걸음을 떼고 진입하기 시작하면 어려움이 점차적으로 적어질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시작이다

방금 누가 “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욥보다 아는 것이 많은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까?”라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앞에서 우리가 좀 언급했다. 그렇지? 이 문제의 실질도 사실 우리가 얘기했다. 그때 욥은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고 하나님을 천지만물의 주재로 여겼다. 그는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 않았고 조물주로 여겨 경배했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는가? 첫 번째 원인은 지금의 사람은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고 사탄의 본성이 깊이 뿌리박혀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시인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맞선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비록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만 전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람의 대립면으로 여기고 사람의 원수로 여기면서 하나님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원인은 바로 이렇게 간단하다. 이것도 아까 교통하는 중에서 약간 언급하지 않았는가? 너희가 깊이 생각해봐라, 이 원인이 아닌가? 네가 비록 하나님에 대해 조금 인식이 있을지라도 너의 인식은 무엇인가? 여러 사람들이 다 말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준 것이 아닌가? 너는 단지 이 방면에 관련된 이론과 도리만 알 뿐 하나님의 진실한 면에 대해 터득했는가? 너는 주관적인 인식이 있는가? 너는 실제적인 인식과 체험이 있는가?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네가 알 수 있겠는가? 네가 이론을 알았다 해서 진실한 인식이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네가 어떻게 알았든지, 얼마를 알든지 네가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이 너의 원수이고 네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겨 대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여전히 너의 대립면에 서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바로 사탄의 화신(化身)이기 때문이다.

네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너는 아마 하루 세끼 그를 시중들고 그에게 차를 대접하고 그의 생활을 돌보면서 마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처럼 대할 것이다. 한가지 일이 일어날 때 사람의 관점은 늘 하나님과 어긋나고 하나님의 관점은 늘 사람이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사람이 비록 겉으로는 그와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 해도 그와 합한 것임을 뜻하지 않는다. 일단 일이 있을 때면 사람의 패역 본질이 나오는데, 사람이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임을 실증한다. 이런 적대됨은 하나님이 사람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적대시하려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대립면에 놓고 대하는 것도 아니라 사람의 주관적인 의지 속에,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하나님과 대립되는 이런 실질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대하거나 하나님과 관련되는 것을 대할 때 사람의 첫 반응은 먼저 추측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그다음 사람은 아주 빨리 저촉되는 태도를 취하여 하나님과 대립할 것이다. 잇따라 그는 소극적인 감정을 품고 하나님과 ‘논박’하거나 겨루며 심지어 이런 한 분의 하나님을 따를 가치가 있냐고 의심할 것이다. 설령 그의 이성이 그에게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알려주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할 것이며 심지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끝까지 고수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한 일부 유언비어나 훼방을 들었을 때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첫 번째 반응은 ‘이 유언비어가 정말인지 거짓인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르니 조용히 지켜봐야지.’라는 것이다. 그다음 ‘이 일은 확인할 수도 없어,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까? 이 유언비어가 도대체 진실한 걸까?’라고 생각해본다. 비록 그가 겉으로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미 하나님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태도와 이런 관점은 어떤 실질인가? 배반이 아닌가? 이 일이 임하지 않았을 때는 네가 그의 관점을 보지 못하고 마치 그가 하나님에 대해 저촉이 없고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도 않는 것 같지만 일이 닥치면 그는 즉시 사탄의 편에 서서 하나님과 대립된다. 이 사실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사람이 하나님과 대립된다는 것을 설명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원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실질 자체가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오랫동안 따랐든지, 사람의 지불이 얼마나 되든지,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든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도록 어떻게 자기를 억제하든지 심지어 스스로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든지 사람은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할 수 없다. 이것은 사람의 실질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네가 만약 그를 하나님으로 대하고 정말 그를 하나님으로 여긴다면 그에 대해 또 의혹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음속에 그에 대해 또 그 어떤 물음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없겠지? 이 세상의 조류가 이렇게 사악하고 이 인류가 이렇게 사악한데, 그들에 대해 너는 왜 관념이 없는가? 네 자신도 그렇게 나쁘면서 왜 관념이 없는가? 몇 마디 유언비어나 훼방이 너에게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큰 관념과 그렇게 많은 생각이 생기게 하였는데, 너의 분량이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모기 몇 마리, 역겨운 파리 몇 마리가 윙윙거렸을 뿐인데 너를 미혹했단 말인가? 이는 어떤 사람인가? 너는 하나님이 이런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는가? 이런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태도는 사실 아주 명확하다. 그저 이 사람들을 대할 때 하나님이 냉정하게 처리하는━상대하지 않는 태도를 취할 뿐 이 무지한 사람들에게 결코 진실을 구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이겠는가?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죽더라도 그와 끝까지 적대하려 하고 전혀 그와 합하는 도를 찾고 구하려 하지 않는 이 일부분 사람들을 얻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이런 말을 해서 또 일부분 사람들을 괴롭게 했을 것이다. 그럼 너희는 내가 늘 이렇게 너희를 괴롭게 하는 것을 원하는가? 원해도 좋고 원하지 않아도 좋다. 어쨌든 내가 말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늘 이렇게 너희를 괴롭게 하고 늘 너희의 상처를 들추면 너희 마음속의 높고 큰 하나님의 형상에 영향을 주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나도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너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극력 수호하고 보호하는 높고 큰 하나님은 전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상상해낸 것이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그래도 이 진상을 폭로하는 것이 좋겠다. 이러면 ‘진상이 환히 드러나지’ 않겠는가? 참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해내는 분이 아니니 너희가 다 현실에 직면하기를 바란다. 이래야 너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 유리하다.

하나님께 인가되지 않는 한 부류의 사람

하나님 마음속에서 일부 사람들의 믿음은 전혀 인가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 부분 사람들을 하나님을 따르는 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분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른 지 몇 년이 되었든지 그들의 사상 관점은 여태껏 바뀐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의 처세 원칙과 방식을 지키고 있고 이방인과 같은 생존 법칙과 신념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여태껏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은 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려고 한 적이 없고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임을 시인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하나의 여가 취미로 여기고 하나님을 하나의 정신적 기탁으로 여길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을 요해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 가히 말해서, 진정한 하나님의 모든 것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그들은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고 거들떠보기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의 강렬한 음성이 있어 늘 그들에게 ‘하나님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한 분의 하나님을 요해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고 자신을 희롱하는 것이며 입으로만 시인하고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고 그 어떤 실제적인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총명한 것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은 이 부분 사람들을 어떻게 보겠는가?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인으로 여긴다.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이방인이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까? 본분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흔히 보는 것은 다 사람의 겉면의 표현이지 사람의 실질은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겉면의 표현을 보지 않고 사람의 마음 실질만 본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이런 태도가 있고 이런 정의(定義)가 있게 된 것이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저는 이 일을 납득할 수 없고 그 일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 일을 저에게 해석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너한테 해석할 필요나 있는가? 이 일이 너와 상관이 있는가? 네가 누군가? 어디서 왔는가? 네가 하나님에 대해 흠 잡을 자격이나 있는가? 네가 그를 믿기는 하는가? 그가 너의 믿음을 인정은 하는가? 너의 믿음이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그가 하는 것이 너와 또 무슨 상관인가? 너는 하나님 마음속에서의 자기 자신의 위치도 모르면서 하나님과 대화할 자격이나 있는가?”

권면의 말씀

너희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괴롭지 않은가? 비록 너희가 이런 말을 듣기 싫어하거나 받아들이기 싫어할지라도 이것은 다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단계 사역은 하나님이 하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태도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실질과 성품을 요해하지 않는다면 최종에 손해를 보는 것은 네 자신이다. 너희는 내 말이 듣기 거북하다고 탓하지도 말고 내 말이 너희의 마음을 차갑게 하였다고 탓하지도 말라. 내가 말한 것은 다 사실이지 너희에게 타격을 주는 것이 아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든지, 어떻게 하라고 하든지 나는 너희가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라며 너희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있고 올바른 길에서 빗나가지 말기를 바란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그의 도를 지키지 않는다면 의심할 바 없이 너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고 올바른 길에서 빗나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일들을 너희에게 분명히 말해주어 너희로 하여금 흐리멍덩하지 않고 아주 분명하게 아주 또렷하게 믿게 하며,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태도와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게 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의 결국을 정하는지를 명확히 알게 할 필요가 크다고 생각한다. 설령 어느 날에 이르러 네가 따라가지 못했을지라도 나는 나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많은 말을 이미 너에게 분명히 해주었기 때문이다. 네 자신이 어떻게 자기의 결국을 대하는가에 관한 이 일은 전적으로 너에게 달렸다. 서로 다른 사람의 결국을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께는 서로 다른 태도가 있다. 그에게는 그의 가늠 방식이 있고 그의 요구 표준이 있는데, 이 가늠 표준은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든 다 공평한 것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일부 사람들의 걱정은 불필요한 것이다. 너희들이 이제는 안심되겠지?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하자. 짜이찌엔(再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