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와 하나님 역사가 달할 효과

하나님의 도를 준행 :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

한마디 말을 너희는 마땅히 기록해야 한다. 나는 이 말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말은 날마다 내 마음속에서 몇 번이나 되새겨보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가? 그것은 매번 한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매번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매번 한 사람의 하나님을 믿어온 경력이나 간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서 이 말로 이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는 그 사람인지, 하나님이 좋아하는 그 사람인지를 가늠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말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너희는 모두 큰 기대를 걸고 기다리겠지만 이 말을 할 때면 너희는 아마 매우 실망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이미 여러 해 동안 입에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태껏 입에 달고 있지 않았고 이 말을 마음속에 두었다. 이 말은 무엇인가? 이 말은 바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 :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말이지? 이 말은 비록 간단하지만 이 말에 대해 참으로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은 이 말이 아주 무게가 있고 실행할 가치가 크고 진리 실제가 있는 한마디 생명의 언어이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를 추구하는 사람의 일생의 추구 목표이자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일생 동안 따라야 할 도라고 여긴다. 그러면 이 말이 너희에게 있어서 진리인가, 아닌가? 이런 의의가 있는가, 없는가? 아마 일부 사람들은 생각하고 상고하고 있겠지만 일부 사람들은 오히려 이 말을 의심한다. ‘이 말이 매우 중요할까? 매우 중요할까? 이 말을 이렇게 강조할 필요가 클까?’ 또 일부 사람들은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도를 이 한마디 말로 말하면 너무 간단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한마디 말로 귀결시키면 하나님을 너무 미소하게 보는 것이 아닌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다수 사람들은 아마 모두 이 말의 깊은 뜻을 그다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너희가 적기는 했지만 그것을 마음속에 새겨둘 뜻이 없다. 그저 수첩에 적어놓고 한가할 때 펼쳐보고 상고해볼 뿐이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전혀 이 말을 기억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며 더욱이 그것을 사용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내가 무엇 때문에 이 말을 하겠는가? 너희가 어떤 관점이든지 또 어떻게 생각하든지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의 결국을 정하는 것과 커다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이 한마디 말을 해야겠다. 너희가 지금 이 말을 어떻게 터득하고 어떻게 대하든지 나는 그래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만약 사람이 이 말을 잘 실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이 표준에 달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살아남을 사람이고 틀림없이 좋은 결국이 있는 사람이며, 만약 이 말의 표준에 달하지 못한다면 가히 말해서 너의 결국은 바로 미지수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말을 먼저 너희에게 알려주는 목적은 너희 마음속에 먼저 실정이 있게 하고 하나님이 어떤 표준으로 너희를 가늠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나는 방금 이 말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의 결국을 정하는 것과 커다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이 관련이 어디에 있는가? 너희도 아주 알고 싶어하니 오늘 우리 얘기해보자.

하나님은 서로 다른 시련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가의 여부를 테스트한다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할 때 사람에게 얼마간의 말씀을 베풀어주고 얼마간의 진리를 알려주는데, 이런 진리가 바로 사람이 지켜야 할 도이고 사람이 준행해야 할 도이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달할 수 있는 도이고 또한 사람이 생활 속에서, 인생의 역정 가운데서 실행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을 발표해주려는 목적이다. 이런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발표되었으니 사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사람이 지키면 생명을 얻게 되고 사람이 만약 지키지 않고 실행하지 않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없으면 하나님의 칭찬을 얻을 수 없다. 이러면 사람의 결국이 없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의 결국을 정하는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의 결국을 정하는가? 이 일을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마 너희는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과정을 말하면 너희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 일을 경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 중에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각 사람에 대해 가히 말해서 그를 따르는 각 사람에 대해 모두 크고 작은 시련을 주었다. 즉 어떤 사람은 가정의 버림을 받는 시련을 겪었고, 어떤 사람은 열악한 환경의 시련을 겪었으며, 어떤 사람은 체포되거나 고문의 시달림을 받는 시련을 겪었고, 어떤 사람은 선택에 직면하는 시련을 겪었으며, 어떤 사람은 지위와 돈의 시련에 직면했었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여러 가지 시련이 모두 각 사람에게 임한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일을 하겠는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각 사람을 대하겠는가? 그는 어떤 결과를 보려 하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너희에게 알려주려는 중점이다. 즉 하나님이 이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가를 보려는 것이다. 그 뜻인즉 하나님이 너를 시련할 때, 너에게 어떤 환경이 임하게 할 때 하나님이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지, 악에서 떠나고 있는지를 테스트하려 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제물을 보관하는 본분이 주어져 이 본분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제물을 접촉하게 했다면 이 일은 하나님이 안배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 너에게 닥치는 일은 다 하나님이 안배한 것이다. 너에게 이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이 은밀히 관찰하면서 네가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실행하는지, 네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볼 것이다. 이 결과는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결과를 통해 네가 그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표준에 달했는가의 여부를 가늠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은 흔히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임했는지, 하나님의 요구 표준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 몸에서 무엇을 보려 하고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이 일이 닥칠 때 속으로만 생각한다. ‘이 일이 나한테 닥쳤으니 조심해야지, 소홀히 해선 안 돼! 어쨌든, 이건 하나님의 제물이니 내가 손을 대선 안 돼.’ 이렇게 간단한 하나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그는 책임을 다했다고 여긴다. 이 시련의 결과는 하나님을 만족케 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만족케 하지 못한 것인가? 너희가 말해봐라. (사람이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제물을 접촉하는 일이 임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틀림없이 이 방면에 신중할 것입니다.) 네가 말한 것이 사실에 조금 가깝지만 아주 적절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은 겉으로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이 일이 닥쳤을 때 먼저 네가 그것을 하나님이 배치한 하나의 환경, 하나님이 너에게 맡겨준 하나의 책임, 혹은 너에 대한 하나님의 한가지 부탁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 일이 닥쳤을 때 너는 그것을 너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으로 여겨야 한다. 이 일이 너에게 닥쳤을 때 마음속에 하나의 표준이 있어야 하며, 너는 이 일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네가 어떻게 해야 책임을 다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해 충심이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촉노(觸怒)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방금 우리는 제물을 보관하는 것을 말했다. 이것은 제물에 관련되고 너의 본분과 너의 책임에도 관련되는데, 이 책임은 의리상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너에게 임하면 시험이 있는가, 없는가? 시험이 있다! 이 시험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시험은 사탄에게서 오고 사람의 사악한 패괴 성정에서도 온다. 시험이 있으니 사람이 굳게 서야 할 간증에 관련되는데, 이 간증을 굳게 서는 것도 너의 책임과 본분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작은 일을 크게 문제 삼을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말하는데,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려면 우리 신변,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그 어떤 한가지 일도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설령 작은 부차적인 일이라 해도 우리에게 임하기만 하면 우리가 중요시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든 아니면 중요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든 그것을 놓치지 말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검증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런 태도가 어떤가? 너에게 이런 태도가 있다면 하나의 사실, 즉 너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너의 마음이 악에서 떠나고 싶어하는 것임을 실증한다. 너에게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싶은 이 소망이 있으면 네가 실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표준과 멀지 않다.

흔히 일부 사람들은 사람들이 다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 일, 평소에 아예 언급하지 않는 일을 작은 일로 여기고 진리 실행과 상관없는 일로 여기며 이 일이 임하게 되면 간단히 생각해보고는 흘려보낸다. 사실, 이 일이 임할 때가 바로 네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어떻게 악에서 떠나는가 하는 이 공과를 배워야 할 때이다. 또한 너는 이 일이 너에게 닥칠 때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더욱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바로 너의 곁에서 너의 일언일행을 관찰하고 너의 행동과 생각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일부 사람들은 “그럼 저는 왜 느끼지 못합니까?”라고 말하는데, 네가 느끼지 못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가장 중요한 도로 삼아 지키지 않아서이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이 사람의 서로 다른 생각과 서로 다른 표현으로 말미암아 사람 몸에 한 미묘한 사역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너는 덜렁꾼이다! 무엇이 큰일이고 무엇이 작은 일인가? 무릇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데에 관련된 일이라면 크고 작음을 구별하지 않는다. 이 말을 너희는 터득할 수 있는가? (터득할 수 있습니다.) 매일 사람에게 임하는 일에서, 어떤 일은 사람이 보기에 아주 크고 어떤 일은 사람이 보기에 아주 작다. 흔히 사람들은 큰일을 아주 중요한 일로 여기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큰일에서 사람의 분량이 작음으로 인해 또한 사람의 소질이 낮은 것으로 인해 사람은 흔히 하나님의 뜻에 달하지 못하고 아무런 계시도 얻지 못하며 가치있는 어떤 실제적인 인식도 얻지 못한다. 작은 일에서 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모두 홀시하고 조금씩 유실되게 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검증받을 기회, 하나님께 시련받을 기회를 많이 놓치게 된다. 네가 줄곧 이렇게 하나님이 너를 위해 배치한 인사물, 하나님이 너를 위해 배치한 환경을 홀시한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네가 날마다 심지어 매 시각마다 너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케 함과 하나님의 인도를 저버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의 환경을 배치하였을 때 하나님은 은밀히 관찰하는데, 너의 마음을 감찰하고 있고 너의 모든 생각을 감찰하고 있으며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행하려 하는지를 본다. 만약 네가 덜렁이이고 하나님의 도,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서 전혀 진실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너는 하나님이 너를 위해 배설한 환경에서 무엇을 이루려 하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유의하지 않고 주의하지 않을 것이며, 너에게 임한 이런 인사물이 진리, 하나님의 뜻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렇게 여러 차례의 환경과 여러 차례의 시련이 너에게 임한 후 하나님이 너의 몸에서 아무런 성과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너에게 여러 차례의 시련이 임한 후 너의 마음이 하나님을 존경하여 높이지 않고 또한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을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시련이나 검증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너에게 베풀어준 기회를 한번 또 한번 밀어내고 그것을 한번 또 한번 흘려보냈다면 이것이 사람의 극대한 패역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 때문에 상심하겠는가? (상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심할 리가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너희는 또 크게 놀랐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늘 상심하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상심하실 리가 없다고? 그럼 언제 하나님께서 상심하실까?’ 어쨌든 이 일에서는 하나님이 상심할 리가 없다. 그러면 사람의 이상의 표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무엇이겠는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검증을 사람이 밀어낼 때, 사람이 이런 것에서 도피할 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이 태도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이런 사람을 염기(厭棄)하는 것이다. 이 ‘염기’는 2가지 뜻이 있는데, 나는 어떻게 그것을 해석하는가? ‘염기’의 ‘염(厭)’은 매우 증오하고 혐오한다는 뜻이다. ‘기(棄)’는 어떤 뜻인가? 내게 있어서 ‘포기’한다는 뜻이다. 너희는 ‘포기’가 어떤 뜻인지 다 알고 있겠지? 총체적으로 말해서, ‘염기’의 뜻은 바로 사람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대하는 하나님의 최종 반응과 태도이고 사람에 대해 극도로 증오하고 반감을 가져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고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결단이다. 현재 너희는 내가 방금 이 말을 한 중요성을 보았는가?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의 결국을 정하는지 요해했는가? (매일 다른 환경을 배치하십니다.) “다른 환경을 배치한다”, 이것은 사람이 느끼고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이 일을 하는 출발점은 무엇인가? 이 출발점이 바로 하나님이 서로 다른 방식,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지점으로 각 사람을 시련하는 것이다. 사람의 어떤 것을 시련하는가? 사람이 닥치는 매사에서 혹은 네가 들은 것이나 네가 본 것이나 네가 직접 체험한 매사에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가를 시련한다. 각 사람에게 모두 이런 시련이 임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 대해 모두 공평하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저도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 저한테는 왜 임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한다. 네가 임하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은 네가 하나님이 너에게 배치한 환경을 전혀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하나님의 시련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한테도 시련이 여러 번 임했지만 저는 정확한 실행의 길을 몰랐고 설사 실행했다 해도 시련 속에서 굳게 섰는가의 여부를 몰랐습니다.” 이와 비슷한 정형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을 가늠하는 표준이 무엇인가? 바로 내가 아까 한 그 말인데, 네가 한 것, 네가 생각한 것, 네가 표현해낸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네가 도대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정한다. 이 일이 간단한가, 간단하지 않은가? 이 일은 말하자면 간단하지만 실행하자면 간단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 간단하지 않은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닥치는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함으로 문제를 해결할 줄 모릅니다. 사람은 서로 다른 시련 연단과 형벌 심판을 경력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제가 있게 됩니다.) 비록 너희가 이렇게 말하지만 지금 너희의 느낌 속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것을 너희에게 있어서 쉽게 해낼 것 같을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왜냐하면 현재 너희는 많은 도를 듣고 진리 실제의 양육을 많이 받아 이론상에서, 사상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달하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것을 실행함에 아주 도움이 되고 아주 쉽게 달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사실상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다 달하지 못하는가? 바로 사람의 본성 실질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실한 원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대립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이 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보자. (≪욥기≫입니다.) 욥을 언급했으니 우리가 욥에 대해 말해보자. 욥의 그 연대에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정복하는 사역을 하였는가?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 그 당시의 욥을 놓고 말하면 그는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인식이 있었는가? (그리 많은 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지금의 인식에 비하면 어떠한가? 너희는 왜 이 말에 감히 대답하지 못하는가? 너희의 지금의 인식에 비하면 많은가, 적은가? (적습니다.) 이 문제는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적다! 이것은 틀림없다! 너희는 지금 하나님과 마주하고 하나님 말씀과 마주하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인식은 욥보다 훨씬 더 많다. 내가 왜 이 일을 언급하겠는가? 왜 이렇게 말하겠는가? 여기서 나는 하나의 사실을 설명하려 하는데, 이 사실을 설명하기 전에 너희에게 한가지 묻겠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아주 적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은 달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깊이 패괴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깊이 패괴되었다”는 것은 문제의 표면 현상이다. 나는 영원히 이렇게 여기지 않는다. 너희는 흔히 평소에 늘 말하는 이런 도리와 글귀, “깊이 패괴되었다”, “하나님을 거역한다”, “하나님에 대해 충심이 없다”, “불순복한다”,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와 같은 이런 실속없는 말을 입에 달고 매 하나의 문제의 실질을 해석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실행법이다. 서로 다른 성질의 문제를 같은 답으로 해석하면 진리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모독하는 혐의를 피하지 못한다. 나는 이런 대답을 듣기 싫어한다. 너희들이 잘 생각해봐라! 이 일을 너희는 아무도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나는 날마다 볼 수 있고 날마다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고 있고 나는 보고 있다고 한다. 너희가 할 때는 이 일의 실질을 느끼지 못하지만 내가 볼 때는 오히려 이 일의 실질을 볼 수 있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실질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현재의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악에서 떠날 수 없는가? 너희의 답으로는 영원히 이 문제의 실질을 해석할 수 없고 이 문제의 실질을 해결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 너희가 모르는 하나의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 근원은 무엇인가? 나는 너희가 매우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이 문제의 근원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하나님이 사역을 시작해서부터 사람을 무엇으로 여겼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해와서 그의 가족으로 여겼고 그의 역사 대상으로 여겼으며 그가 정복하고 구원하고 온전케 할 대상으로 여겼다. 이것은 시초에 하나님이 사역할 때의 사람에 대한 태도이다. 그러나 당시에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무엇이었는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낯설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낯선 사람으로 여겼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정확한 결과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아무튼 자기의 생각대로 대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했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관점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시초에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 관점도 없었다. 사람의 관점이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이다.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면 받아들이고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으면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지만 마음속으로 극력 저촉하고 반대한다. 이것이 시초에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였다. 즉 하나님은 사람을 가족으로 여겼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낯선 사람으로 여겨 대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동안 사역을 한 후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요해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으며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때 사람은 하나님을 무엇으로 여겼는가? 목숨을 구할 만한 지푸라기로 여기면서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얻고 축복을 얻고 약속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때 하나님은 사람을 무엇으로 여겼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정복할 대상으로 여겼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검증하고 시련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때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데의 하나의 이용 대상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발표한 진리가 사람을 정복하고 구원할 수 있고 하나님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과 원하는 귀숙을 얻을 기회가 있음을 보았기 때문에 비로소 조그마한 진심이 있게 되었고 이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하게 된 것이다. 그 뒤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겉면의 도리상의 인식이 조금 있음으로 인해 가히 말해서 하나님에 대해 점점 ‘익숙’해지고 하나님이 한 말씀, 가르친 도, 그가 발표한 진리, 그가 한 사역에 대해 점점 ‘익숙’해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더는 낯설지 않고 이미 하나님과 합하는 길을 걷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비록 사람들이 진리의 도를 많이 듣고 하나님의 역사를 많이 경력했지만 많은 요소와 많은 상황의 방해와 가로막음 하에 다수 사람들이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 달할 수 없었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데에 달할 수 없었다. 사람은 점점 태만해지고 점점 믿음이 없어지고 점점 자신의 결국이 미지수라고 느껴져 감히 사치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향상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저 억지로 따르면서 한걸음씩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 사람의 지금의 이런 정형에 대해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저 이런 진리와 그의 도를 사람에게 넣어준 후 또 여러 가지 환경을 배치하여 사람을 시련하고 각종 방식으로 사람을 시련하려고 하는데, 목적은 이런 말씀과 이런 진리와 그가 하는 사역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 이런 결과를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내 눈에 보인 다수 사람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도리로, 글귀로, 규례로 여겨 지킬 뿐 일을 처리하거나 말을 하거나 시련이 임했을 때 결코 하나님의 도를 자기가 지켜야 할 도로 여겨 지키지 않았다. 특히 사람에게 일부 중대한 시련이 임했을 때 나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런 방향을 향해 실행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는 극도로 반감을 가지고 증오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여러 차례 심지어 수백 차례 시련한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그 어떤 명확한 태도로 자기의 결심━“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겠다!”라고 밝히지 않는다. 사람에게 이런 결심이 없고 이런 표현도 없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지금의 태도는 더는 이전처럼 사람에 대해 긍휼을 베풀거나 관용을 베풀거나 포용과 인내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 극도로 실망하는 것이다. 이 ‘실망’은 누가 초래한 것인가?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어떤 태도인가는 누구에게 달려있는가? 하나님을 따르는 각 사람에게 달려있다. 이 여러 해 동안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적지 않은 요구를 제기하였고 사람에게 많은 환경을 배치해주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실행하든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가 무엇이든지 사람은 명확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목표에 따라 실행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한마디 말을 총결해내어 이 말로 아까 우리가 말한, 무엇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못하는지━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지 못하는지를 해석하겠다. 이 말은 무엇인가? 이 말은 바로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할 대상, 하나님이 사역할 대상으로 여겼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고 대립면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 일을 지금 너는 분명히 보았는가? 사람의 태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엇인지 이것은 아주 명확한 것이다. 너희가 도를 얼마나 들었든지 너희가 스스로 총결해낸 것, 예컨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 하나님과 합하는 도를 찾는 것, 하나님을 위해 일생을 화비(花費)하는 것,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 이런 것은 내가 보기엔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부 경로일 뿐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 너희는 억지로 일부 규례를 지키는데, 바로 이런 규례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이런 도를 더욱 멀리하게 하고 하나님을 또 한번 사람의 대립면에 놓게 한 것이다.

오늘 말하는 이 화제는 좀 무겁지만 어쨌든 나는 그래도 너희가 앞으로의 경력 중에서, 앞으로의 세월에서 내가 방금 말한 것을 해낼 수 있고 하나님을 공기로 여기지 말고━필요할 때는 그가 존재한다고 여기고 불필요할 때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네가 잠재의식 속에서 이렇게 인식할 때는 이미 하나님을 촉노한 것이다. 혹시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저는 하나님을 공기로 여기지도 않았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항상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범위와 원칙 표준에 맞게 한 것이지 결코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네가 실행한 방식은 맞다! 하지만 너에게 일이 닥쳤을 때 너는 어떻게 생각했는가? 일이 닥쳤을 때 너는 어떻게 실행했는가?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구할 때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여기지만 일이 닥쳐 자기 뜻이 나와서 자기 뜻대로 행하려고 할 때는 하나님을 공기로 여기는데, 이때는 하나님이 그에게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필요할 때는 하나님이 존재해야 하고 사람에게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며, 자기 뜻대로 실행하면 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전혀 하나님의 도를 찾고 구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사람이 지금 이런 상황과 정형에 처해있는 것이 위험한 변두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일부 사람들은 “제가 위험한 변두리에 있든 있지 않든, 아무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믿었으니 저는 하나님이 저를 버리지 않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저를 차마 버리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또 일부 사람들은 “저는 모태에서부터 주님을 믿었는데 지금까지 4~50년 되었습니다. 시간에 따라 말하자면 저는 가장 하나님께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가장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4~50년 동안 저는 가정과 직업을 버렸고 모든 것 예컨대 돈, 지위, 누림과 가족의 단란함도 버렸으며 많은 맛있는 음식도 먹지 못했고 많은 재미있는 것들도 즐기지 못했고 많은 좋은 곳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보통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고통까지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만약 이런 것으로 인해서도 저를 구원하실 수 없다면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이 있는 사람이 많은가, 많지 않은가? (많습니다.) 그러면 오늘 너희에게 하나의 실정을 알게 하겠다. 무릇 이런 생각이 있는 사람은 다 돌을 들어 제 발등을 찍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상상으로 자신의 눈을 속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들의 상상과 규정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표준을 대체했고 그들을 가로막아 하나님의 진실한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를 느끼지 못하게 했으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를 잃고 하나님의 약속과 아무런 관계도 없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