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와 하나님 역사가 달할 효과

먼저 시가를 부르자. ≪국도 예가 (1) 국도가 인간 세상에 임하여≫

너희는 매번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했는가? (아주 흥분되고 감동됩니다. 국도의 미경이 그토록 아름답고 사람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나님과 함께 지낼 수 있는지를 생각해본 사람이 있는가? 너희의 상상 중에, 사람은 마땅히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님과 함께 이후의 아름다운 국도 생활을 누릴 수 있는가? (성정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성정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변해야 하는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야 하는가? (거룩하게 변해야 합니다.) 거룩함은 하나의 어떤 표준인가?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와 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합하는 이 표현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한 것은 좀 가깝다. 너희들 모두 마음을 터놓고 말하고 싶은 것들을 다 말해봐라. (국도에서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은 마땅히 진리를 추구하는 기초에서, 어떤 인사물의 통제도 받지 않는 상황에서 본분을 할 수 있어야 하며━충심으로 본분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다음 흑암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고 마음이 하나님과 합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과 합할 수 있고 흑암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낮은 표준은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패괴 성정을 벗어버리는 데에 달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데에 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는 이것이 아주 관건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이 흑암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고 사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데에 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케 됨에 있어서 달하는 표준은 사람이 하나님과 합심할 수 있고 더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으며 사람이 자신을 알고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합하는 데에 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됩니다.)

사람 마음속에서의 결국의 무게

보아하니, 너희는 자신이 준수해야 할 도에 대해 마음속에 모두 어느 정도 실속이 있고, 자신에게 어느 정도 인식이나 터득도 있다. 그러나 너희가 말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서 매우 공허한지 아니면 매우 실제적인지, 이는 너희가 평소에 실행할 때 중요시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달렸다. 이 몇 년 동안 너희가 각 방면의 진리에 대해 도리적으로 말하든지 아니면 진리의 내용상에서 말하든지 다 어느 정도 성과가 있는데, 지금의 사람들이 모두 진리에 닿기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진리의 이런 각 방면, 조목조목들이 틀림없이 일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뿌리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이런 진리의 제목과 이런 이론은 너희의 마음속에 뿌리내렸지만 실제 내용은 오히려 너희의 마음속에서 분량을 얼마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너희에게 일이 닥쳐 시련에 직면하고 선택에 직면했을 때, 이런 진리의 실제가 너희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가? 너희를 도와 난관을 극복하고 시련 속에서 나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여 시련 속에서 굳게 서서 하나님을 위해 드높은 간증을 하는 데에 달하게 할 수 있는가? 너희는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는가? 너희에게 이렇게 묻겠다. 너희의 마음속에서, 너희가 매일 생각하는 이런 일에서, 어떤 것이 너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인지 총결해본 적이 있는가? 어떤 일이 너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인가? 일부 사람들은 당연히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일부 사람들은 당연히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며, 일부 사람들은 당연히 날마다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 일부 사람들은 당연히 매일의 본분을 잘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매사에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고 매사마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기만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러한가? 이런 내용들만 있는 것인가? 예컨대,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께 순복하려고만 하는데 결국 일이 닥치니 순복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을 만족케 하려고만 하고 한번이라도 만족케 하면 좋겠는데, 언제나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께 순복하려고만 하고 시련이 닥칠 때 하나님의 지배대로 하고 불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해도 순복할 수 없었고 번번이 거의 다 실패했습니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제가 선택에 직면했을 때 언제나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었고 늘 육체를 만족시키고 자기 개인의 사욕을 만족시키려고 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무슨 원인인가? 하나님의 검증이 임하기 전에 너희는 이미 여러 번 자신에게 도전하고 또 여러 번 자신을 시험하고 검증한 것이 아닌가? 자신이 정말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는지, 정말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는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을 보증할 수 있는지, 자신을 만족시키지 않고 자기의 사욕을 만족시키지 않고 하나님만 만족케 하고 자기의 선택이 없을 수 있는지를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한 사람이 있는가? 사실, 너희 앞에 놓인 사실도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각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가장 알고 싶어하는 것인데, 바로 각 사람의 결국과 귀숙이다. 아마 너희는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일부 사람들이 사람의 결국에 관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하나님이 사람을 어떤 귀숙으로 이끌어갈 것인가에 관한 이 몇 방면의 진리와 이 몇 방면의 하나님 말씀을 이미 여러 번 읽어보면서 연구한 적이 있고 또 일부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찾으면서 사색해봐도 나중에는 여전히 결과가 없고 또는 아마 모호한 결론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최종에는 여전히 자신에게 도대체 어떤 결국이 있을 것인지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부분 사람은 진리 교통을 받아들이고 교회 생활을 받아들이고 본분을 하는 과정에서 줄곧 실정과 내막을 알고 싶어한다. ‘자신의 결국이 도대체 무엇인지? 자신이 도대체 길 끝까지 갈 수 있는지?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도대체 어떤 태도인지?’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근심하기까지 한다. ‘나는 이전에 어떤 일들을 한 적이 있고 어떤 말들을 한 적이 있어. 나는 이전에 하나님을 거역한 적이 있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을 좀 한 적이 있어. 내가 이전에 어떤 일들에서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에 대해 실망하시게 했고 나를 혐오하고 증오하시게 했으니 나의 이 결국은 미지수일 거야!’ 가히 말해서, 대부분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자기의 결국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이다. “저는 제가 살아남을 사람이라고 100% 확신합니다. 저는 100%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자신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 뜻에 맞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를 준수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여기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을 구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자신에게 어떤 좋은 결국이 있겠냐고 감히 지나친 욕망을 품지 못하며 혹은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데에 달할 수 없고 살아남을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에게 결국이 없고 좋은 귀숙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총체적으로 말해서, 각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자기의 결국을 8번 10번만 따져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앞날을 위해, 자신이 하나님의 역사가 끝날 때에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위해 따져보고 있고 계획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갑절로 대가를 치르고, 일부 사람들은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일부 사람들은 혼인을 포기하기를 선택하고, 일부 사람들은 사직하여 하나님을 위해 화비(花費)하기를 선택하고, 일부 사람들은 집을 떠나 본분을 하기를 선택하고, 일부 사람들은 고통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을 택하여 가장 힘들고 고달픈 일을 감당하고, 일부 사람들은 헌금하거나 모든 것을 봉헌하기를 선택하고, 더욱이 일부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하는 것을 선택한다. 너희가 어떻게 너희의 실행 방식을 선택하든지 이 방식이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방식이 중요하지 않으면 무엇이 중요한가? (겉면의 행위가 좋다 하여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관건은 우리가 진리를 실행하는가 실행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들이 넘어지고 또 일부 거짓 인솔자들이 넘어진 데서 우리는 겉면의 행위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많이 포기하고 기꺼이 대가도 치렀지만 그들을 해부할 때 우리가 보게 된 것은 그들에게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곳곳에서 하나님과 맞서고 결정적인 순간에 언제나 사탄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요한 것은 일이 닥쳤을 때 우리가 어느 편에 서는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 어떠한가에 달렸습니다.) 너희가 말한 것은 다 아주 좋다. 보아하니 너희의 마음속에 진리를 실행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기초적인 인식이 있고 표준도 있다. 나는 너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어 매우 감동된다. 비록 너희가 말한 어떤 말은 그리 타당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진리에 있어야 할 해석에 가깝다. 이는 너희가 주변의 인사물과 하나님이 안배한 환경과 너희들이 눈으로 본 것에 대해 이미 자신의 진정한 인식, 진리에 가까운 인식이 조금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설사 너희가 말한 것이 그리 전면적이지 못하고 어떤 말은 그리 타당하지 않지만 너희 마음속의 인식은 이미 진리의 실제에 아주 가깝다. 나는 너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기분이 아주 좋다.

사람의 여김은 진리를 대체하지 못한다

일부 사람들은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대가를 치를 수 있고 겉면의 행실이 아주 좋고 다른 사람의 존중을 많이 받으며 또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탄복하게 한다. 너희들이 말해봐라, 이런 겉면의 행위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고 있다고 정할 수 있는가? 무엇 때문에 흔히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있다고 여기고 그들이 진리를 실행하는 길을 걷고 있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있다고 여기는가? 무엇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여길 수 있는가? 여기에 하나의 해석밖에 없다. 이 해석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진정 진리의 실제가 있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등등 이런 문제에 대해 아직 분명히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부분 사람들은 겉으로 마치 아주 영적인 듯하고 아주 고상한 듯하고 형상이 매우 숭고하고 위대한 듯한 일부 사람들에게 늘 미혹되는 것이다. 겉으로 글귀 도리를 잘 말하고 겉으로 말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케 하는 이 사람들에 대해 그들은 이 사람들이 일을 하는 실질이 무엇인지,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일을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전혀 보지 않고, 또한 이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를 전혀 보지 않는다. 이 사람들의 인성 실질에 대해 그들은 전혀 분별하지 않고 처음에 익숙하지 않던 데에서 익숙한 데로 그다음 조금씩 탄복하고 흠모하는 데까지 이르러 최종에는 이 사람들을 그들의 우상으로 여긴다. 게다가 일부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 그들이 여기는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겉으로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사람이고 참으로 좋은 결국과 좋은 귀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에게 이런 ‘여김’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어떤 원인으로 초래된 것인가? 이 일의 실질은 무엇인가? 이 일이 초래한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 먼저 이 일의 실질이 무엇인지 말해보자.

사람의 관점에 관해, 사람의 실행법에 관해 사람이 스스로 취한 실행 원칙, 그리고 각 사람마다 평소에 중요시한 이런 것은 실질상에서 모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중요시한 것이 깊든 얕든, 글귀 도리이든 실제이든, 총체적으로 말해서, 사람은 사람이 가장 잘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고 가장 잘 알아야 할 것도 모르는데, 그 원인을 따져보면 사람이 전혀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실행 원칙을 찾아 실행하는 데에 공을 들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지름길로 가면서 자기 자신이 여기고 있는, 알고 있는 좋은 행위와 행실을 총결해내어 자신의 목표로 삼아 추구하고 진리로 삼아 실행하는 것이다. 이러면 직접 초래되는 결과는 바로 사람이 인위적인 좋은 행위로써 진리의 실행을 대체하고 동시에 또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는 욕망을 만족시켜 사람에게 진리에 대항하는 자본,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며 겨루는 자본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사람은 또 전혀 거리낌없이 하나님을 한쪽에 두고 자신의 마음속의 우상을 하나님의 위치에 놓게 된다. 사람에게 이런 우매한 행실과 우매한 견해나 편면적인 견해와 실행법이 생기게 된 근원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오늘 내가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그 원인은 바로 사람이 비록 하나님을 따르면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있지만 사실상 전혀 하나님의 뜻을 요해(了解)하지 못한 데에 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근원이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요해하고 하나님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증오하는지, 하나님이 얻으려는 것이 무엇이고 버리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요구 표준으로 사람에게 요구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를 요해한다면 사람에게 또 개인의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함부로 한 사람을 숭배할 수 있겠는가? 또 하나의 보통 사람을 자기의 우상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만약 하나님의 뜻을 요해했다면 사람의 견해가 좀 이성적일 것이고 패괴된 한 사람을 함부로 자기의 우상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진리를 실행하는 길에서 함부로 몇 가지 간단한 규례나 원칙을 지키는 것을 진리를 실행하는 것으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결국을 정하는 표준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면 우리 화제를 되돌려 계속해서 결국에 관한 화제를 교통하자. 각 사람마다 관심을 갖는 것이 모두 자기의 결국이라고 했는데, 너희는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의 결국을 정하는지 알고 있는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한 사람의 결국을 정하는가? 하나님이 또 어떤 표준으로 한 사람의 결국을 정하는가? 사람의 결국이 아직 정해지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사역을 하여 사람의 결국을 드러내는가?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내가 방금 말하다시피 일부분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서 이미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사람의 결국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람의 결국이 모두 어떤 유별로 나뉘는지, 각기 다른 사람마다 어떤 서로 다른 결국이 있는지를 보고 싶어하고 또 하나님 말씀에서 사람의 결국에 대해 모두 어떻게 정한 것인지, 하나님이 어떤 표준과 어떤 방식으로 한 사람의 결국을 정하는지를 보고 싶어하지만 최종에는 여전히 결과를 찾지 못했다. 사실, 하나님 말씀에서 조금만 말했지 그리 많이 말한 것은 아니다. 원인은 무엇인가? 사람의 결국이 아직 드러나기 전에 하나님은 최후의 결과를 그 누구에게 알려주는 것을 원치 않고, 사람의 귀숙이 어떤 것인지 미리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도 원치 않는다. 이렇게 하면 사람에 대해 유익한 점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단지 너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방식을 통해 사람의 결국을 정하는지, 어떤 역사 원칙을 통해 사람의 결국을 정하고 사람의 결국을 드러내는지, 어떤 표준으로 한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의 여부를 정하는지 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너희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사람의 관념 중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의 결국을 정하는 것인가? 방금 너희가 일부분을 말했다. 즉 일부 사람들은 충심으로 본분을 하고 화비(花費)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복하여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데에 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배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 일부 사람들은 자신을 낮추어 처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너희가 이런 진리를 실행할 때, 스스로 여기는 원칙에 따라 실행할 때 너희는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가? 너희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고 있는 것인지, 하나님의 표준에 따르고 있는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에 따르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내 생각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하나님 말씀 중의 일부분 또는 설교 중의 일부분, 또는 자신이 숭배하고 있는 일부 영적인 사람들이 여기는 표준을 답습하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강박할 뿐이다. 최후의 결과가 어떠하든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면 줄곧 그렇게 지키고 있고 줄곧 그렇게 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믿으면서 이대로 실행해왔으니 하나님을 만족케 한 것이 많은 것 같고 얻은 것도 적지 않은 것 같아. 이 기간에 많은 진리를 깨닫고 이전에 몰랐던 많은 것도 깨닫고 특히 사상 관점이 많이 바뀌고 인생의 가치관도 많이 바뀌고 이 세상에 대해서도 많이 인식했으니까.’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것이 바로 성과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역사가 사람 몸에서 이루려는 최종 효과라고 여긴다. 너희가 말해봐라, 너희 각 사람이 실행한 것을 포함한 이런 표준을 종합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고 있는 것인가? 일부 사람들은 자신있게 말한다. “당연하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하고 형제님의 설교 교통에 따라 실행하며 줄곧 본분을 하고 줄곧 하나님을 따르면서 여태껏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당당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이해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깨닫든지 간에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줄곧 하나님과 합하기를 추구하는 길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행한 것이 정확하고 한 것이 올바르다면 결과도 틀림없이 정확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이 어떤가? 정확한가? 아마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이런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고 그저 이렇게 본분을 하고 줄곧 하나님 말씀의 요구대로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있는지를 고려해본 적이 없고 하나님의 요구 표준에 달했는가의 여부도 고려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한테 알려주신 적도 없고 명확히 지시하지도 않으셨기 때문에 저는 제가 줄곧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만족해하실 것이고 더는 다른 요구가 없으실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정확한가? 내가 보기에는 너희의 이런 실행, 이런 생각과 관점은 상상이 섞여있고 좀 맹목적이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일부분 사람들은 낙심할 것이다. “맹목적이라고요? 만약 맹목적이라면 우리가 구원얻을 희망, 살아남을 희망이 아주 작고 아주 막연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면 우리에게 찬물을 끼얹는 게 아닙니까?” 너희가 어떻게 여기든지, 내가 말하려는 것과 내가 하려는 것이 너희 몸에서 이루려는 효과는 너희에게 찬물을 끼얹는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깨닫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증오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혐오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얻으려 하는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대상인지를 더욱 요해하게 하고 너희로 하여금 너희 각 사람의 모든 행위와 모든 생각이 도대체 하나님의 요구 표준에서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알고 뚜렷하게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런 화제는 말할 필요가 크지 않은가? 왜냐하면 나는 너희가 이렇게 오랫동안 믿고 이렇게 많은 도를 들었지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너희는 모든 진리를 다 수첩에 적고 자신이 아주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부분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마음속에 새겨두었다가 실행해야 할 때 꺼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그것으로 너희의 수시로의 필요를 메우거나 너희를 도와 너희의 눈앞에 있는 매 하나의 난관을 극복하게 하고 혹은 이런 것들로 하여금 너희의 생활을 동반하게 하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희가 어떻게 하든지 만약 하고만 있을 뿐이라면 이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 매우 중요한 것인가? 바로 너희가 하고 있을 때 마음속으로 너희가 한 것과 행한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지, 너희가 한 것과 생각한 것과 마음속으로 달하려고 하는 효과와 목표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에 따르는 것인지, 하나님이 인가하는 것인지를 아주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