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진리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제 2 부)

어떤 일이 임하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바라보고 진리의 관점으로 대하면 문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일을 바라보면 사물의 본질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지식에만 의존하여 일을 바라보고, 머리로만 연구하고 분석하거나 혹은 육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대하는데, 그러면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해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심지어 수십 년을 살아도, 죽을 때까지도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병이 났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징계로 생각하지 않고, 객관적인 이유가 있는 정상적인 현상으로 보고 별문제가 없다고 여길 때가 있는데, 사실 그 안에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만약 네가 그 일을 세심하게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를 구하고, 또 성령이 가끔 너에게 어떤 느낌을 준다면, 너는 스스로가 어떤 면에 결함이 있는지, 성품 면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병을 주어 너를 단련하는 이유는 너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네가 영 안으로 돌아가 병이 찾아온 까닭이 과연 무엇인지 자세히 성찰하고 묵상하라는 것이다. 마음속 깊이 돌아가 스스로를 성찰한다면,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고, 자신의 패괴를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다. 고통을 받지 않으면, 늘 스스로를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 방면의 패괴를 성찰하지 못하고, 본인에게 필요한 진리를 깨달을 방법이 없다. 너희는 이 부분을 체험하지 않았느냐? 성령은 모든 일을 무척 시의적절하게, 사람의 필요에 맞게, 사람의 현재 분량과 내적 상태에 맞게 행한다. 하나님 사역은 그때그때 알맞은 분량만큼 진행이 되고, 상당히 시의적절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다. 너는 실제 체험을 통해 이 사실을 직접 목격했다. 매번 일이 닥칠 때마다 성령은 적시에 네게 감동을 주어 너를 깨우친다. 하지만 너의 협력이 너무 시원찮고, 네가 너무나 무감각해 어떤 때는 어떻게 된 일인지만 알면 그것으로 끝이고 더 깊이 깨달으려 하지는 않는다. 그저 감성적 인식에 만족하고, 그걸 아는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진실로 인식한 것이 아니다. 감성적 인식을 이성적 인식으로 끌어올려야 실행할 길이 생긴다. 만약 성령이 다시 한번 너를 감동시켰는데도 네가 간과하고 펜을 들어 적어 놓으려 하지 않으면 얼마 안 가 곧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 빛 비춤, 그 실제적인 것들을 얻지 못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펜을 들고 적어 놓았다가 나중에 다시 보면서 매우 만족해한다. 이를 바탕으로 또 빛 비춤을 얻을 수도 있다. 투박한 사람,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빛 비춤을 느끼지 못하고 무엇이 빛 비춤인지도 모른다. 이 빛 비춤은 그의 내면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늘 이런 식이라면 성령은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려면 생각이 민첩하고 세심해야 하고 나태해서도 안 된다. 또한 제때 협력해야 하고, 감성적 인식이 있으면 이를 놓치지 말고 얼른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 네가 얻은 깨우침을 위주로 기도하면 된다. 때로는 그것이 본인 생각인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괜찮다. 즐겁고 밝은 느낌이 들기만 하면, 기도하고 구해서 새로운 빛 비춤을 제대로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기도할 때 말이 술술 나오고, 마음이 편안하고, 깨우침도 있고, 마음이 밝아진다면, 새로운 빛 비춤을 잘 적어 두어야 한다. 내적 상태가 좋을 때는 잘 기억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이 글을 쓸 때는 몇 페이지도 거뜬하지만, 체험 간증이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얘기할 때는 전혀 써 내려가지 못한다. 이러면 여전히 실제가 없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에 주목하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의 깨우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이는 사람이 무엇이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무엇이 핵심인지, 자신이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몰라 성령의 깨우침을 모두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항상 수첩을 몸에 지니고 있다가 성령의 깨우침이 있어 새로운 빛 비춤을 얻었을 때 재빨리 포착하고 적어 두어야 한다. 성령은 언제 어디서나 역사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진리를 구한다면 성령이 깨우쳐 줄 것이다. 성령은 네가 일이 바빠서 피곤할 때라도 구하고 기도하면 너를 깨우쳐 주고,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진리를 교제해도 너를 깨우쳐 준다. 또한 네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스스로를 반성해도 깨우쳐 줄 것이다. 성령의 깨우침을 얻었을 때 바로 기록하고 계속 묵상해 마음이 환해지고 정말로 진리를 깨닫게 되면, 너는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다 보면 점차 커다란 수확을 거두게 된다. 사실 너희는 성령의 많은 깨우침을 망쳤다. 너희는 탕아처럼 성령이 너희에게 행한 역사를 흘려보냄으로써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놓쳐 버렸다! 적지 않은 성령 역사를 모두 놓쳐 버리고도 하나님이 너를 후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 사실 하나님은 너를 많이 후대했지만 네가 얻지 못한 것이다.

성령 역사에는 규칙이 있기에 꼭 정리해 보아야 한다. 공들여 정리해 보면 많은 것을 요약해 낼 수 있다. 분명 얻는 게 있을 것이다. 기도를 예로 들어 보자. 어떤 때는 기도를 통해 많은 깨우침을 얻지만, 네가 유념하지 않으면 이를 알 수 없다. 설령 네 입에서 나온 말일지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이번 기도는 아주 괜찮다는 정도만 알 수 있다. 사실 네가 기도 중에 하는 어떤 말은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에 해당하는 말로, 새로운 빛인데도 너는 그것들을 다 잃어버린다. 성령 역사가 사람에게 가장 크게 도움이 되는 부분은 바로 사람을 깨우치고 빛 비춰 줌으로써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동하면서 바른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여 사람을 깨우치는 목적은 무엇이냐? 때로는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네가 이성을 갖추도록 일깨워 주기도 하고, 때로는 네가 진리를 깨닫고 실행 길을 얻도록 빛 비춤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네가 자기만의 길을 가려 할 때, 너를 붙들고 도와주는 지팡이가 되어 너를 바른길로 인도하기도 한다. 성령이 사람을 깨우쳐 어떤 빛 비춤을 주고 어떤 깨달음을 주든, 아마도 개인의 배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것은 진리에 전혀 위배되지 않고, 모순되지도 않는다. 모두가 이렇게 체험하면, 즉 진정으로 기도하고 구하고, 진실로 순종하면, 성령이 끊임없이 이렇게 역사하여 사람을 깨우쳐 주고 인도하면, 사람에게 섬세하고 기민한 머리가 있다면, 그래서 성령이 깨우쳐 준 것들을 실행하고 진입하면, 사람의 분량은 대단히 빨리 자란다. 이러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성령 역사의 특징은 매우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끊임없이 사람을 다그치고 강요하는 악령 역사와는 다르다. 성령 역사는 때로는 사람이 위험에 처하기 전 어떤 느낌을 주어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당황하게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는 특수한 상황이다. 평상시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나 진리를 구할 때, 혹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은 사람 마음속에 어떤 미미한 생각이나 마음, 혹은 한 마디 말이나 뜻과 같은 느낌을 준다. 마치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마치 사람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그러면 너는 그 뜻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깨달은 그 뜻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해 낸다면 너는 수확을 거두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 사람이 늘 이렇게 체험한다면 차츰 많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사람에게 늘 성령 역사가 함께하고, 길을 밝혀 주는 새로운 빛 비춤이 있다면 절대 참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설사 너에게 교제해 주거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고, 사역지침도 없다고 해도 네가 그저 성령이 인도하는 방향을 따라가면 치우친 길을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한 뒤에 예수를 만났지만 단지 몇 번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듯 자주 만난다든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다든가, 혹은 모르는 게 생겼다고 기도하면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대개는 성령 역사를 통해 베드로에게 깨닫게 했다. 베드로에게는 가능했는데 너희는 왜 안 되느냐? 그건 결국 무엇을 뜻하느냐? 너희가 자질이 떨어지고 이해력이 부족해서 묵상해 낼 줄 모른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임하든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기준으로 대해야 한다.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의 생각에 갇혀서 자기 머리로 짐작하고, 사람의 방식대로 처리한다면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일이 생겼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그는 예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묵상했기 때문에 하나님 뜻을 알 수 있었다. 훗날 예수가 승천한 뒤에도 그가 여전히 하나님 뜻을 알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냐? 바로 성령의 깨우침 덕분에 가능했다. 그가 성령이 깨우침을 줘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예수가 부활 승천한 뒤에 그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하나님 뜻을 깨달을 수 있었겠느냐? 성육신 하나님이 사역할 때, 사람이 상상하듯 매일같이 친히 끊임없이 짚어 주어야만 사람이 온전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영도 역사해서 협력하는 것이다. 영이 역사하여 협력하는 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육신이 주도적인 사역을 하고, 주도적인 사역이 끝나면 나머지 지엽적인 문제는 성령이 사람을 깨우쳐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를 잘 포착하지 못하면 일부만 얻고 그보다 많은 세부적인 것들은 얻지 못하는데, 그러면 아무런 변화도, 성장도 이룰 수 없다.

성령의 역사와 깨우침을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를 알기가 쉽지 않다. 사실 성령의 역사와 깨우침에는 규칙이 있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깨우침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오해를 하곤 한다. 반드시 많은 고통과 대가를 치러야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관념이 아니겠느냐? 사람은 나태하고 세심하지 못한 탓에 평소에는 영적인 느낌에 주목하지 못한다. 간혹 빛 비춤이나 깨우침을 받아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네가 하루 종일 사무에만 매달리고, 글귀와 도리나 규례만 붙잡고, 육적인 생활, 이성 관계에만 몰두한다면, 성령이 깨우치고 인도할 방법이 없다. 역사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많은 기도를 통해 성령 역사를 구하고, 또한 어떻게 해야 성령 역사를 받아들이고 이를 지킬 수 있을지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제게 역사하셔서 저를 온전케 하고 변화시켜 주십시오. 제가 범사에 당신 뜻을 깨닫고 당신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저에 대한 당신의 구원에는 당신의 크신 사랑, 당신 뜻이 있습니다. 비록 사람은 거역하고, 대적하기도 하고, 배반의 본성을 지녔지만, 저는 지금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당신 뜻을 깨달았습니다. 당신께 협력하고 싶습니다. 제게 더 많은 환경과 시련, 고통을 주시어 제가 고통 속에서 당신의 손, 당신의 행사를 보게 해 주십시오. 제가 당신 뜻을 깨닫고 당신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방탕한 사람이 아닌 착실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너는 이렇게 기도해라. 늘 이렇게 기도하며 성령이 너에게 항상 역사하여 이끌어 줄 수 있도록 구해야 한다. 네가 바른길을 가고 본연의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성령은 먼저 일부 환경을 마련해 너를 검증하고, 중대한 시련을 주어 네가 이겨 내는지를 볼 것이다. 아마 누군가는 견디지 못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 지금 이 환경이 너무 벅차서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러면 그 일에서 실패한 것이다. 정말 그 환경이 너무 버겁다고 느낀다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당신이 주신 환경이 너무 벅차서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제 분량에 맞춰 제게 공급해 주십시오. 무거운 고통, 가벼운 고통을 막론하고 당신 뜻을 깨달아 당신을 배반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완전히 순종하여 당신을 만족게 해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무거운 고통이든 가벼운 고통이든 당신 뜻이라면 무조건 순종하고 절대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당신 뜻을 저버리지 않겠으니, 고통이 제아무리 무거워도 제가 감당할 수만 있다면 내려 주십시오.’ 대범하게 기도하고 도피하지도 말고, 위축되지도 마라. 네가 바른길을 가고 본연의 일에 충실하면, 또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원하며 진리를 추구한다면, 성령이 이를 보고 너에게 벅찬 환경을 내리고, 네가 그것을 이겨 내도록 큰 힘을 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이길 것이다. 중요하고 큰 일을 이겨 내는 것이 단순히 글귀와 도리를 이해하는 것보다도 훨씬 낫다. 이것은 증거하는 방면의 일에 속한다.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여러 사람과 일, 사물과 마주친다. 그런데 사람이 진리가 없고, 그런데도 기도하고 구하지 않는다면 시험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남녀 관계에서 그러한 시험을 이겨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일만 닥치면 무너지는데 이것은 분량이 너무 작은 탓이 아니냐? 진리가 없는 사람은 이렇게 가련해 간증이 전혀 없다. 어떤 사람은 돈과 관련된 일에서도 시험에 빠질 수 있는데, 그는 돈 많은 집안을 보며 불평을 쏟아낸다. ‘남들은 저렇게 돈이 많은데,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할까? 정말 불공평해!’ 이런 상황에 부닥치면 불평을 쏟아낸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지 못한다. 늘 지위에 집착한 나머지 이와 관련된 시험이 임하면 이겨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많은 혜택을 제시하면서 한자리 주겠다고 하는 이방인의 제안에 갈까 말까 고민하며 마음이 흔들렸다. 수차례 기도하고 고민한 끝에 도저히 이겨 내지 못하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가 이미 마음을 정하고 나서 구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분명 가서 관직에 앉아 혜택을 받았을 텐데,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복을 잃을까 봐 걱정이 돼서 돌아와서 하나님을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저에게 시련을 주십시오.’ 이제 와서 무슨 시련이냐! 너는 이미 관직을 택했다. 이 일에서 굳게 서지 못하고 넘어져 놓고서 또 시련이 필요하겠느냐? 너는 하나님께 시련을 받을 자격도 없다. 가련할 정도로 분량이 작은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 더 나아가 비열한 소인들은 콩고물만 보면 바로 달려든다. 이럴 때 성령은 옆에서 너를 관찰한다. 너란 사람이 어떤 관점,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보고 너를 검증하기 시작할 것이다. 누군가는 속으로 말한다. ‘난 필요 없어. 하나님이 후대해도 필요 없어. 내가 가진 것으로 이미 충분해. 하나님은 날 너무 많이 후대하셨어. 나는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은 별로 중요시하지 않고, 오로지 진리를 추구해서 하나님을 얻는 것을 중요시할 거야. 하나님에게서 얻은 진리도 그분이 대가도 없이 내게 베풀어 주신 거야. 나는 그런 걸 얻을 자격이 없어.’ 성령은 사람 마음을 감찰하고 그를 더 많이 깨우쳐 준다. 그는 덕분에 더 많이 깨닫고, 더 의욕이 넘치고, 진리를 더욱 밝히 알게 된다. 그러나 소인들은 무슨 이득이라도 보이면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면 내가 먼저 달려들어야지. 다른 사람에게는 주고 나한테는 안 주면 욕을 한바탕 퍼붓고 궁지에 몰아서 내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 줄 거야. 다음에는 나한테 주나 안 주나 두고 보겠어!’ 그가 이런 인간임을 보고 성령이 그를 드러내면 그는 추악한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징벌받아 마땅하다.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어도 소용없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사람은 대개 생각지도 못할 때 성령이 베푼 은혜를 얻게 된다. 만약 너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면 네가 받는 징벌 역시 생각지도 못할 때에 닥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위험하다.

임한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를 때 사람이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겠느냐? 먼저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가 우선이다.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너라는 사람이 경건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구할 줄 알고 네가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 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고, 네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고 네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면, 너는 경건한 크리스천이다. 많은 연로한 신자들이 매일 시간 맞춰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일단 꿇으면 한두 시간인데, 이렇게 오랜 세월 꿇었어도 죄짓는 문제는 얼마 해결하지 못했다. 이런 종교식 기도가 소용 있는지는 일단 제쳐 놓고, 적어도 이 연로한 형제자매들은 어느 정도 경건하며, 이 점은 젊은이보다 훨씬 낫다. 하나님 앞에 살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려면 일이 임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다. 기도는 아무 생각 없이 평소 외던 문구를 뇌까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며, 이렇게 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너는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어쩌면 그렇게 여덟 번, 열 번을 기도해도 별 수확이 없을 수 있지만, 그래도 낙담하지 말고 계속 연습해야 한다. 일이 임했을 때 우선 먼저 기도하여 먼저 하나님께 알리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게 하고, 하나님이 너를 돕게 하고, 하나님이 너를 주도하게 하고 방향을 가리켜 주게 한다면, 이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고, 네가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 놓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일이 임하거나 어려움이 임했을 때 소극적이 되고 화를 낸다면, 이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모습이다. 현실 생활에서 어떤 어려움이 임하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기도한다는 것은 네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다는 의미이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앙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여 구한다는 것은 네게 어느 정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 기도해도 깨우쳐 주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먼저 기도할 때 네 마음가짐이 올바른지를 보아야 한다. 네가 진심으로 진리를 구하고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일을 통해 너를 깨우쳐 주어 알게 할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네가 알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깨우쳐 주지 않으면 너 스스로는 알 수 없다. 어떤 일들은 너에게 깨닫는 능력이 있든 없든, 네 자질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사람의 사유로는 다다를 수 없는 것이다. 네가 깨달았다면 그것은 네 사유로 생각해 낸 것이겠느냐? 영이 역사하는 뜻, 하나님의 뜻에 있어, 만약 성령이 너를 깨우쳐 주지 않는다면, 너는 누구에게 물어봐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 자신이 그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주어야 그때 비로소 네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일이 임하면 가장 먼저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할 때는 순종하는 마음 자세로 하나님께 자신의 생각과 관점, 태도를 밝히고 하나님께 진리를 구해야 한다. 이것이 사람이 응당 해야 할 실행이다. 네가 형식적으로만 해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성령이 너를 깨우쳐 주지 않았다고 원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종교 의식만 지키며 종교 활동을 할 뿐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조금도 없고, 심지어 성령 역사까지 부인하고, 기도도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도 읽지 않고, 예배만 하면 끝인 사람들을 봤다. 이것도 하나님을 믿는 거라 할 수 있느냐? 그렇게 하나님을 계속 믿다 보면 하나님은 없는 존재가 되고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어져 하나님께 기도하기 싫어지고 하나님 말씀도 읽고 싶지 않아진다. 그러면 이방인이 된 것 아니냐? 특히 어떤 리더 일꾼은 늘 사무적인 사역으로 바빠 생명 진입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사무적인 사역을 자기 본연의 사역으로 삼아 정말 사무장이 된 것 같다. 리더 일꾼의 실제적인 사역을 아예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믿은 지 20년, 30년이 됐는데도 어떤 생명 체험도 말할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로 아는 것도 없고, 글귀와 도리만 말할 줄밖에 모른다. 이는 거짓 리더가 된 게 아니냐? 이것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결과다. 사람은 그깟 글귀와 도리만 알아서는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시련이 임하여 재난을 당하거나 병에 걸렸을 때 바로 불평을 터트리며 하나님을 원망할 뿐 자신에 대한 진실한 인식은 조금도 없고, 아무 체험 간증도 없다면, 이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외적인 일에만 몰두해 결국 자신을 망쳤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몇 년 믿었든 최소한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아야 자신이 넘어지지 않고 죄를 저지르지 않고 내쳐지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다. 이는 최소한 갖춰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들을 때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지도 않는다. 또 어떤 일이 임하든 진리를 구하지 않고, 글귀와 도리를 아는 데만 만족하면서 진리를 얻었다고 여긴다. 그러다 결국 시련이 임하면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을 가득 채운 채 말하고 싶어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데, 이런 사람은 너무 가련하지 않으냐? 계속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하고, 책망 훈계가 임해도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지 않고, 늘 자신의 이치만 늘어놓는다. 결국 온갖 추태를 부리다 드러나고 내쳐져도 마지막까지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이 도리를 안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아무 소용없다.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얼마나 됐든 도리만 알고 말할 줄 알아서는 소용없다. 그것은 진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므로 일이 임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해 하나님 뜻을 구하려면 관건은 진리를 깨달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길이며, 계속 이렇게 실행해야 한다.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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