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9) 제 2 부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일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런 사람이 있다. “지금 와서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고 하는 이유가 지금 때가 가까워졌다고, 종말이 찾아오고 재난이 내렸다고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의 날이 왔으니까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대답은 부정이다. 아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원인을 얘기해 보자. 아니라고 한 이상, 분명 여기에는 알아듣게 교제해야 할 세부적인 문제가 있다. 우리 이렇게 가정해 보자. 2천 년 전 혹은 몇백 년 전에는 모든 사회 환경이 지금과는 달랐고, 모든 인류의 상황도 지금과는 달랐다. 인류의 생활 환경은 하나같이 규칙적이었고, 세상은 지금처럼 이렇게 사악하지도 않았다. 인류 사회도 지금처럼 이렇게 혼란하지 않고 어떤 재난도 없었다. 그 상황에서도 사람이 자신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었겠느냐? (그렇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이유를 얘기해 보아라. 너희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말해 보거라. (인류가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 사람 내면에는 사탄의 패괴 성품이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신의 이상과 바람을 추구할 때는, 사실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하려는 것입니다.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람은 서로 다투고 서로 죽일 듯이 싸웁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입니다. 결국 갈수록 사탄에게 패괴되어 인간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도 멀어집니다. 이걸 보면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길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해서 사람에게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사람은 그런 걸 추구할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올바르게 추구해야 했습니다.) 너희가 보기에는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것이 하나의 실행 원칙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것은 진리가 아니겠느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한 측면의 요구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가 맞고, 하나님의 요구가 맞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이 행해야 할 도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리이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요구이고, 또 사람이 행해야 할 도라고 한다면, 시간의 구분, 배경의 구분이 있느냐? (없습니다.) 왜 시간과 배경을 가리지 않느냐? 진리,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도는 시간과 장소, 환경이 달라졌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느 공간을 막론하고 진리는 영원히 진리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시하는 요구 기준은 바뀌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제시하는 요구 기준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느 배경에서든 행해야 할 하나님의 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에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때가 가까이 오고 종말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다. 또 날이 얼마 남지 않고 재난이 커지고 있으니, 사람이 재난 속에 떨어질까 봐,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을 써서 가급적 빨리 진리 실제에 진입하라고 사람에게 그토록 절박하게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 때문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냐? 어느 때를 막론하고, 설사 몇천 년 전, 혹은 몇백 년 전, 심지어 지금이라 해도 이 방면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몇천 년 전, 심지어 오늘날 이전에도,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인류에게 구체적으로, 공개적으로 선포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지지 않는다. 인류의 기록이 있기 시작해서부터 하나님은 인류에게 열심히 이 세상을 추구하며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하는 유일한 요구는 바로 하나님 말씀에 따르고 하나님의 도를 행할 것과 이 세상에 휩쓸려 물들지도 말고 세상을 추구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세상의 일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하고 세상에 속한 사람이 완성하는 것이지, 하나님 믿는 사람, 하나님 따르는 사람과는 관계가 없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도를 행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 믿는 사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거부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 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어떤 배경도 가리지 않는다. 설령 미래에 인류가 구원받아 다음 시대로 진입한다 해도 이 요구는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에 따르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마땅히 지녀야 할 태도이자 구체적인 실행 원칙이다. 인류는 하나님 말씀에 따르고 하나님의 도를 행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시간 혹은 특별한 환경이나 배경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인류가 생긴 이래 명확하게 얘기한 적은 없었지만 하나님은 계속 이렇게 이런 요구 기준과 원칙으로 인류에게 요구해 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도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깨닫느냐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이 요구는 바뀌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특별한 시기에 택한 특별한 그 사람들을 보아라. 이를테면 노아, 아브라함, 이삭, 욥과 같은 이들에게 하나님이 제시한 요구, 그리고 그들이 행한 도, 그들의 인생 목표와 방향, 생활과 생존에 대한 그들의 추구 목표와 구체적인 방법에는 모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반영되어 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냐? 그중에는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마음속으로든 형식적으로든 시끄럽고 복잡하고 사악한 인류를 멀리하고, 시끄럽고 번잡하고 사악한 조류를 멀리해야 한다. 썩 적합하지는 않지만 ‘거룩히 구별되다’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말의 뜻은 사람에게 자신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너에게 이방인이 되지 말고, 이방인이 하는 일은 하지 말고, 이방인이 추구하는 것은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 믿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을 추구하라고 요구한다. 바로 이런 뜻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지금 때가 가까워졌다고, 종말이 찾아오고 재난이 내렸다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시는 건가요?”라고 묻는다면, 이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는 어떤 요구든 다 진리이고 사람이 행해야 하는 도이다. 그것은 시간, 장소, 환경, 지리적 위치, 또 사회적 배경이 달라졌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다. 예로부터 변하지 않는 진리, 영원불변의 진리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각각의 요구, 사람에게 제시하는 각각의 구체적인 실행 원칙은 모두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이후, 시간 기록도 없었던 때부터 이미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했다. 즉, 인류가 생겼을 때부터 인류는 이미 하나님이 인류에게 하는 요구를 이해했다. 이 요구는 어느 방면에 관한 것이든 모두 영원히 존재하며 변하지 않을 것이다. 종합해 보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이 세상의 발전, 인류의 사회적 배경, 또 시간과 장소, 혹은 인류가 생존하는 지리적 환경, 생존 공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인류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서 이를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른 요구는 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고 이해했으면 실행하고 지키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볼 때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의 기준에 도달한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러니 어느 시기, 어떤 사회적 환경과 배경, 어떤 지리적 위치에서든 네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했는지, 너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은 바로 말씀에 따르고 순종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지금 바깥세상의 재난은 얼마나 심각할까? 세상은 얼마나 혼란할까? 우리가 바깥세상에 나가면 위험하지 않을까? 전염병이 옮지는 않을까? 죽지는 않을까? 재난 속에 떨어지지 않을까? 바깥세상에 나가면 무슨 시험이 있지는 않을까?’ 등등 이런 것들은 상관하지 마라. 신경을 써 봐야 소용없고, 너와 아무 관련이 없다. 너는 오직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일에만 신경 쓰고 바깥세상의 상황이 어떤지는 신경 쓰지 마라. 바깥세상 상황이 어떻든 너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사실,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는 달라지지 않는다. 네 신분도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본질도 변하지 않는다. 너는 영원히 하나님의 도를 행해야 할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대상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너를 주재하고, 네 운명을 안배하고, 네 생존을 이끄는 그분이다.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분과 너의 신분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느 때든 네 책임과 의무, 최고의 직책은 바로 하나님 말씀에 따르고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틀림없는 사실이고, 최고의 준칙이다. 이 문제는 이제 해결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해결되었다. 이렇게 얘기하니 분명하지 않으냐? 너희가 하는 말보다 정확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부분이 정확하냐? (저희는 대략적으로만 얘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철저히 해부하셨습니다. 또 하나님 말씀이 진리이자 사람이 행해야 할 도이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따르고 하나님 도를 행해야 한다고 교제해 주셨습니다. 이 부분을 확실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말한 것은 한 방면의 진리다. “한 방면의 진리다.”라고 하는 이 말은 이론이다. 그렇다면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얘기한 구체적인 사실과 내용이다. 이 사실들은 모두 증거가 있는 것으로, 지어내거나 상상한 것은 전혀 없다. 모두가 사실이거나 혹은 사실의 표면적인 현상 아래 숨은 본질과 실체다. 네가 이것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네가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너희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희가 아직 이 방면의 진리를 모르고, 또 이런 현상의 이면에 숨겨진 본질과 실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는 자신의 느낌이나 인식만 얘기하는데, 이것은 진리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 그런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여기까지 얘기하기로 하자.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겨난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다는 이 주제에 대해 이 방면의 문제를 좀 보충했는데, 그럴 필요가 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럴 필요가 있었다. 어느 한 방면의 문제든 모두 어느 정도 진리와 관계가 있고, 어느 정도 사실의 실체 및 본질과 관계가 있다. 실체와 본질의 이면에는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안배,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염원이 있다. 또 무엇이 있느냐? 구체적인 하나님의 방법들이 있고, 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는 근거와 목표, 배경이 있다. 이것이 바로 실체다.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겨난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다는 이 주제를 교제했으니, 이제 다음 주제를 교제할 차례다. 다음 주제는 무엇이냐? 사람은 결혼으로 인해 생겨난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주제는 결혼에 관계된 여러 가지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 문제는 상대적으로 취미, 관심사보다 조금 더 큰 문제가 아니냐? 조금 더 크다고 해도 겁낼 것 없다. 우리 조금씩 돌파해 나간다면 차츰 교제를 통해 이 문제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담긴 문제의 본질,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결혼에 대해 사람이 가지는 여러 가지 올바른 이해와 잘못된 이해, 결혼이라는 문제에서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들, 또 이 문제에서 생겨나는 사람의 여러 가지 잘못된 사상 관점 등등 이런 각도 혹은 이런 측면에서 결혼이라는 영역의 문제를 해부하겠다. 그럼으로써 사람이 결혼으로 인해 생겨난 추구와 이상, 바람을 궁극적으로 내려놓을 수 있게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이 방면의 주제에 대한 교제의 윤곽이다. ‘내려놓기’에 이르는 가장 손쉽고도 좋은 실행은 이것이다. 먼저,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모두 꿰뚫어 보고, 그런 다음 올바르고 이성적으로 이 방면의 문제를 대해야 한다. 이것은 적극적인 측면이다. 소극적인 측면으로는, 이 방면의 문제가 너에게 가져다주는 그릇된 사상 관점, 그릇된 태도, 혹은 인성에 미치는 여러 가지 불량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꿰뚫어 보고 간파해서 이런 방면부터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즉, 그것을 꿰뚫어 보고, 간파해서 그것으로 생겨난 그릇된 생각에 구속되거나 얽매이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것이 네 인생을 좌우해서 인생에서 비뚤어진 길로 나아간다든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긍정적인 면을 교제하든, 부정적인 면을 교제하든 최종적으로는 사람이 이성적으로 이 방면의 문제를 대하는 것, 그릇된 사상 관점으로 그것을 이해하거나 바라보지 않는 것, 혹은 그것에 대해 그릇된 태도를 갖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내려놓기’의 실행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다. 그럼, 이제 결혼으로 인해 생겨난 추구와 이상, 바람에 대해 계속 교제해 보자. 우선 결혼의 정의와 개념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너희 중 대다수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냐? 내가 볼 때 너희 대부분은 성인인데, 성인이란 무슨 뜻이냐? 결혼 얘기를 할 만한 나이가 되었거나 이미 지났다는 뜻이다. 그 나이가 되었든 이미 지났든 관계없이 누구나 결혼에 대해서는 옳든 그르든 몇 가지 관점과 정의, 개념 등에서 나름대로 조금은 사치스러운 면이 있다. 그렇다면 우선 결혼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부터 토론해 보자. 먼저 너희의 말로 얘기해 보아라. 결혼이 대체 무엇이냐? 결혼이 무엇인지 얘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논하려면, 먼저 결혼 경험이 있는 사람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결혼해 본 사람들 얘기가 끝나면, 아직 결혼 경험이 없는 성인들이 얘기하도록 하자. 결혼에 대한 생각들을 얘기해 보아라. 너희가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정의하는지 좀 들어 보자. 아무 얘기든 좋다. 듣기 좋은 내용도, 거북한 내용도 관계없다. 또 결혼에 대한 불평도 좋고, 결혼에 대한 기대도 좋으니 다 얘기해도 된다. (결혼하기 전에는 누구나 결혼에 대해 기대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결혼이 부유한 생활을 위한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결혼을 추구해서 백마 탄 왕자를 꿈꾸며 행복한 생활을 그려 보기도 합니다. 결혼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가 볼 때 도대체 결혼이 무엇이냐? 거래냐? 놀이냐? 아니면 무엇이냐? 네가 말한 몇 가지 상황 중 일부는 잘살기 위한 것인데, 그것은 일종의 거래이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저는 결혼에 대해 일종의 지향과 동경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또 누가 얘기해 보겠느냐? 결혼 경험이 있는 사람은 결혼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느냐? 특히 결혼한 지 10, 20년 된 사람들은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평소에 결혼에 대해 생각이 많지 않으냐? 직접 체험하는 결혼 생활도 있고, 다른 사람의 결혼 생활을 곁에서 지켜보거나 책이나 문학 작품,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타인의 결혼 생활을 감상하기도 할 것이다. 이 몇 가지 측면에서 볼 때 네가 생각하는 결혼은 무엇이냐? 네가 결혼에 대해 내린 정의는 무엇이냐?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너는 결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결혼한 사람, 결혼한 지 몇 년 된 사람, 특히 자녀를 길러 본 사람들은 결혼에 대한 느낌이 어떠냐? 얘기해 보거라. (제가 좀 더 보충하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드라마를 많이 보다 보면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동경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결혼하면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혼하면, 가장 먼저 집안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그건 무척 고된 일입니다. 또한 부부가 성격이 맞지 않고, 두 사람이 지향하고 추구하는 게 다르면, 특히 추구하는 길이 다르면 살면서 많은 갈등이 빚어지고, 심지어 부부 싸움까지 하느라 사는 게 괴로워집니다. 그제서야 어릴 때부터 꿈꾸던 그런 결혼 생활은 사실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건 아름다운 소망에 불과하고, 현실 생활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것이 결혼에 대해 제가 느낀 점입니다.) 결혼에 대해 네가 이해한 것은 결혼이 무척 고되다는 것인데, 맞느냐? (그렇습니다.) 생각나는 것,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은 죄다 힘들고, 지치고, 고통스럽고, 차마 돌이킬 엄두가 안 나는 일들뿐이고, 씁쓸하기만 하다. 그러니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 더 이상의 기대도 없고, 결혼은 그렇게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낭만적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결혼에 대한 너의 이해는 바로 결혼이 한 편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거의 이런 뜻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결혼 생활에서는 자기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든, 도달하고 싶지 않은 것이든, 그 어떤 면에서도 아주 힘들고 괴롭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결혼은 고된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느낌이고, 사람이 깨닫거나 느끼게 되는 일종의 감각이다. 지금 이 세상은 어떤 형식으로든 결혼과 가정에 대한 여러 가지 말들이 넘쳐난다. 영화나 드라마, 책에도 많고, 사회적으로도 결혼 전문가니 남녀 문제 전문가니 하는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결혼을 분석 해부하고, 또 결혼에서 비롯되는 각양각색의 갈등을 처리하고 해결함으로써 다양한 결혼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갈등을 조정하려 한다. 결국 사회에는 결혼에 대한 말들이 유행한다.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결혼에 대한 말들 중 너희가 인정하고 공감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하나님,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결혼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결혼해서 가정과 아이가 생기면, 책임이 생기니까 쉬지 않고 일해서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게다가 부부가 함께 사는데 사이가 좋지 않을 수도 있고, 온갖 문제나 고충이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구체적인 한 마디가 무엇이냐? “결혼은 무덤이다.” 중국에서 유행하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으냐? “결혼은 무덤이다.” 이 말이 아주 유행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또 어떤 말이 있느냐? “결혼은 성곽이다. 성 밖에 있는 사람은 들어가려 하고, 성 안에 있는 사람은 나오려 한다.” 또 무엇이 있느냐? “애정 없는 결혼은 부도덕하다.” 사람들 생각에 결혼은 애정의 상징이다. 그리고 애정 없는 결혼은 부도덕하다고 하면서, 도덕의 기준을 애정으로 가늠한다. 결혼에 대한 기혼자들의 정의와 개념은 이 정도이냐? (그렇습니다.) 요컨대 결혼한 사람들의 새카맣게 탄 속마음을 대신하는 한 마디가 바로 “결혼은 무덤이다.”라는 말이다. 이렇게 간단하냐? 기혼자들의 얘기를 들어 봤으니, 이제는 미혼자나 싱글들의 얘기를 들어 보자. 자기가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누가 얘기해 보겠느냐? 유치해도 좋고, 실제와 맞지 않는 환상, 기대도 다 괜찮다. (하나님, 저는 결혼을 두 사람이 한솥밥 먹으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생활을 꾸리면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결혼한 적이 있느냐? 경험해 보았느냐? (아닙니다.) 한솥밥을 먹으면서 평범한 일상을 꾸려 나간다. 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렇게 현실적이란 말이냐? (제가 그리는 이상적인 결혼은 그런 게 아니지만, 부모님 결혼 생활이 그랬습니다.) 부모의 결혼 생활은 그랬지만, 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혼은 그게 아니다. 결혼에 대한 네 이상과 추구는 무엇이냐? (어릴 때 결혼에 대한 이상은 마음에 드는 짝을 만나 그와 행복하고 낭만적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살면서 두 손 꼭 잡고 백년해로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결혼에 대한 네 구체적인 이상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본 것이 아니라 너 자신과 관계된 것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본 것은 겉모양일 뿐이다. 네가 스스로 경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네가 본 것이 사실의 실체인지, 아니면 사실의 겉모양인지 너는 모른다. 네가 생각하는 실체는 영원히 네 사상 관점 안에만 머물러 있다. 결혼에 대해 젊은 사람이 가지는 이해의 한 측면은 자신의 이상형과 함께하는 낭만적인 생활이다. 두 손 꼭 잡고 백년해로하며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결혼에 대해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가 또 있느냐? (없습니다.)

누군가는 말한다. “결혼은 날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거죠. 그가 낭만적이든 아니든 관계없고, 내가 그를 아주 사랑할 필요도 없어요. 최소한 그가 나를 사랑하고, 마음속에 내가 있고, 둘이 공통적인 추구와 이상, 공통적인 성격, 공통적인 취미와 관심사만 있으면 의기투합해서 같이 살 수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찾아서 같이 살면 행복하겠죠.” 어떤 사람은 결혼을 이렇게 이해한다. “반드시 경제력 있는 사람을 찾아야 남은 일생 먹고살 걱정을 안 하고,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가난하지 않게 살 수 있죠. 그 사람의 나이도, 외모도 상관없고, 성격도 상관없고, 취향도 상관없고, 돈만 많으면 돼요. 나한테 돈 잘 주고 내 물질적인 필요만 채워 주면 돼요. 이런 사람이랑 같이 살면 행복하고, 육적으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이런 게 바로 결혼이죠.” 이것은 사람이 결혼에 대해 갖는 일종의 요구와 정의이기도 하다. 결혼에 대한 많은 이들의 이해는 바로 자신의 이상형, 사모하는 사람, 백마 탄 왕자를 찾아 함께 살면서 의기투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상상하는 백마 탄 왕자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처럼 돈도 있고, 명예와 이익도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과 같이 살아야 그럴듯하고 아름다운 결혼, 완벽한 결혼이고, 그래야 즐거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지위가 있는 배우자를 꿈꾸고, 누군가는 아름답고 예쁜 배우자를 꿈꾸고, 누군가는 힘 있고 재력 있는, 배경 좋은 가문의 돈 많은 배우자를 꿈꾼다. 또 누군가는 사업가 마인드가 있고 실력 있는 배우자를 꿈꾸고, 누군가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배우자를 꿈꾼다. 누군가는 어떤 특별한 성격을 가진 배우자를 꿈꾸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결혼에 대한 사람의 요구이다. 물론 사람이 결혼이라는 일에 대해 지니는 상상, 관념, 관점이기도 하다. 요컨대, 결혼한 사람은 결혼이 무덤이라고, 결혼하는 것은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재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는 반면, 결혼 안 한 사람은 결혼을 매우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으로 상상하며 동경과 기대를 한껏 품는다. 하지만 결혼을 경험한 사람이든, 아직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든 결혼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결혼 자체의 진정한 정의와 개념이 과연 무엇인지, 그다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결혼을 경험한 사람은 말한다. “결혼은 무덤이고, 씁쓸한 일이죠.” 결혼 안 한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결혼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결혼을 나쁘게 말하는 건 당신이 너무 이기적이어서 그래요. 결혼 생활을 위해 별로 노력하지 않았잖아요. 본인에게 갖가지 결함이나 문제가 있으니까 결혼 생활을 엉망으로 만든 거죠. 자기 손으로 결혼을 망치고, 자기 손으로 결혼을 파탄 낸 거예요.” 또 어떤 기혼자는 결혼하지 않은 싱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처럼 어린애가 뭘 알겠니? 결혼이 뭔지 알기나 해? 결혼은 혼자만의 일이 아니고, 그렇다고 두 사람만의 일도 아니야. 결혼은 두 집안의 일이고, 심지어 두 가문의 일이라고. 여기에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얼마나 많은데. 설사 그게 둘만의 세상, 두 사람 사이의 일이라고 해도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결혼을 아무리 좋게 이해하고 달콤한 환상을 품더라도, 먹고사는 자질구레한 일에 오랜 시간 시달리다 보면 색이 바래고 맛이 변하기 마련이야. 결혼도 안 해 본 네가 뭘 알겠어? 결혼도 안 해 보고 결혼 생활도 안 해 봤으면 결혼을 평가할 자격도 없고, 결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자격도 없어. 결혼에 대한 네 이해는 상상이고 일방적 생각일 뿐,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고!” 어느 쪽 말이든 다 객관적인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이 얘기 저 얘기를 떠나 결혼이 과연 무엇이냐? 어떤 시선으로 결혼을 바라보아야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이고, 또 진리에 가장 부합하냐?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 결혼을 경험해 본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결혼에 대한 이해는 우선 사람의 상상으로 가득하다. 또 한편으로, 패괴된 인류는 결혼 생활에서 수행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감정적인 요소를 다분히 가지고 있다. 패괴된 인류는 다양한 상황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모르고, 또한 자신이 결혼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 자신이 다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모른다. 그러니 결혼에 대한 얘기에 감정적인 요소가 들어가고, 개인의 사심, 혹은 혈기가 섞이는 등 이런 것들이 모두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기혼자 미혼자를 막론하고, 결혼에 대한 모든 사람의 이해가 진리의 각도에 서거나 하나님에게서 온 올바르고 순수한 이해와 인식이 아닌 이상, 사람이 결혼을 실제로 체험하고 깨달은 부분을 제외하면, 결혼에 대한 사람의 이해는 상당 부분 사회의 영향과 사악한 인류의 영향을 받고, 또 사회적 분위기, 사회적 흐름, 사회 여론의 영향을 받고, 또 사회 각계각층 인사들의 결혼에 대한 그릇되고 편집적인, 더 자세히 말하면 비인도적인 의견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 의견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사상 관점에 영향을 받아 좌우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도 모르게 결혼에 대한 그런 태도와 생각 및 결혼에 대한 처리 방법을 받아들이고,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 태도를 받아들이게 된다. 원래 사람은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이해도 없고, 긍정적이고 정확한 인식, 인지가 없다. 게다가 이 사회와 사악한 인류가 결혼 방면에서 부정적인 사상, 그릇된 사상 관점을 사람 내면에 주입하여 결혼에 대한 사람의 사상 관점이 치우치고 그릇되게 변하고, 심지어 사악해졌다. 이 사회에서 생존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보는 눈, 듣는 귀, 문제를 사고하는 생각이 있는 한, 그런 잘못된 사상 관점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결혼에 대해 그릇되고 편집적인 이해와 인식이 생겨난다. 백 년 전을 예로 들어 보자. 그때 사람들은 애정이 뭔지도 모르고, 결혼에 대한 이해도 간단했다. 결혼할 나이가 되면 중매인이 나타나고, 부모가 결혼식을 준비한다. 그런 다음 한 이성과 혼례를 올리고 결혼 생활 속으로 들어간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함께 생활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평생 서로 동반하면서 끝까지 가는 것이다. 결혼은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다. 즉, 두 사람만의 일이었다. 서로 다른 가정에서 자란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에게 반려자가 되어 주고 서로를 돌봐 주면서 평생을 사는 것으로, 이렇게 간단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인류가 소위 애정이란 걸 들고 나오면서, 결혼에 애정이라는 요소가 더해졌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애정’이라는 두 글자, 혹은 그 뜻과 사상은 이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더 이상 말로 꺼내기 어려운 것, 혹은 입 밖에 내기 부끄러운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레 사람의 사상 속에 존재하고, 자연스레 모든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데, 심지어 미성년자들도 소위 애정을 논한다. 그러면서 이런 사상 관점과 이런 의견이 은연중에 모든 사람, 남녀노소 모두에게 일종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이런 영향은 모든 사람의 결혼에 대한 이해를 억지스러운 것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편집적인 것으로 바꿔 놓았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과 정으로 장난치기 시작했다. ‘사랑’이 무슨 뜻이냐? 사랑은 일종의 감정이다. ‘정’은 무슨 뜻이냐? 바로 정욕이다. 결혼은 더 이상 두 사람이 함께 한솥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니라 일종의 감정과 정욕의 장난감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인류가 결혼을 정욕과 감정의 결합으로 이해하는데도 인류의 결혼이 좋을 수 있겠느냐? 남자도 여자도 제대로 살지 않고,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다들 착실하게 사는 게 아니라, 일이 없으면 사랑, 정, 감정, 정욕에만 관심을 갖는다. 네가 보기에 이런 생활이 평온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누가 그런 시험과 유혹을 견딜 수 있겠느냐? 어느 누구도 그런 시험과 유혹을 견디지 못한다. 사회에는,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정욕이 가득하고 감정이 가득하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애정이자, 지금 사람들의 결혼에 대한 이해이고, 결혼에 대한 최고의 평가와 최고의 취향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 사람들의 결혼 상황은 완전 딴판이 되고, 엉망진창,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결혼은 이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는 간단한 일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가 정욕과 감정을 가지고 노는 불륜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이런 사악한 흐름의 유혹 아래, 혹은 사악한 사상의 주입 아래, 결혼에 대한 사람의 이해와 관점은 기형적이고 변태적이고 사악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의 드라마, 문예 작품도 계속해서 결혼에 대해 더욱 사악하고 부도덕한 갖가지 해석과 의견을 제시한다. 감독, 작가, 연기자 할 것 없이 다들 결혼을 막장으로 연출해 낸다. 거기에는 사악과 정욕이 가득해서 모든 정당한 결혼마저 엉망으로 교란을 받는다. 그러니까 애정이 생긴 이래 인간 사회에는 이혼 현상이 갈수록 빈번해지고, 외도도 점점 늘고 있다. 부모의 이혼이라는 충격을 안고 편모, 혹은 편부와 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내거나 부모의 잘못된 결혼 상황 속에서 성장해야 하는 자녀들도 그만큼 많아지고 있다. 갖가지 비극적 결혼, 갖가지 그릇된, 혹은 기형적인 결혼이 빚어지는 원인은 바로 사회에서 제창하는 결혼관이 편집적이고, 사악하고, 부도덕하고, 심지어 윤리 도덕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긍정적 사물, 혹은 정당한 사물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제창하는 사상 관점이 아무리 기형적이어도 은연중에 모두 받아들인다. 이런 것들이 전염병처럼 네 몸속에 퍼져 네 생각과 마음, 네 인성 안에 있는 올바른 것들을 갉아먹으면, 삽시간에 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은 모호하고 흐려지거나 약해진다. 그리고 사탄에게서 온 그릇되고 사악하고 윤리 도덕을 상실한 사상 관점이 네 생각 깊은 곳, 네 마음 깊은 곳, 네 정신세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주도권을 잡는다. 이런 것들이 우위를 점하고 주도권을 잡으면, 결혼 같은 문제에 대한 네 생각도 금세 왜곡되어 그릇되게 바뀌고, 윤리를 상실하고 도덕을 상실하고 심지어 사악해진다. 하지만 너 자신은 여전히 그걸 모르고, 정당하게 생각한다. ‘다들 이렇게 인식하는데, 나라고 왜 이렇게 인식하면 안 되겠나? 다들 이렇게 인식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내가 이렇게 인식하는 것도 정당하잖아? 그래서 다들 애정 얘기를 해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데 나 역시 그 얘기를 해도 얼굴이 붉어질 필요 없어. 처음엔 좀 쑥스럽고 부끄러워서 입 열기 어렵겠지만, 몇 번 얘기하다 보면 좋아질 거야. 많이 듣고 얘기하다 보면 내 것이 되겠지.’ 그렇다. 많이 얘기하고 많이 듣다 보면 그건 네 것이 된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가장 원시적이고 진정한 이해가 네 생각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을 수 없으면 너는 정상인으로서 지녀야 할 양심과 이성을 모두 상실할 것이다. 상실하게 되는 연유는 무엇이냐? 네가 이른바 애정이라는 결혼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른바 애정이라는 결혼관이 네 정상 인성의 결혼에 대한 가장 원시적인 이해와 일종의 책임감을 삼켜 버린 것이다. 그러면 너는 곧바로 애정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직접 실천하게 된다. 또한, 자기와 의기투합하는 사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끈질기게, 심지어 뻔뻔하게 자신의 애정을 추구할 것이다. 나아가 애정을 위해 필생의 정력을 바칠 것이다. 그러면 끝장이다. 어떤 사람이 애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자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 사이에는 애정이 있으니까 결혼하자.’ 막상 그와 결혼하고 한동안 같이 살다 보니 그 사람에게서 문제점이 보이게 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도 날 별로 안 좋아하고, 나도 저 사람이 별로야. 우린 서로 안 맞아. 그렇다면 우리 애정이 잘못된 거야. 그래, 이혼하자!’ 이혼한 다음에는 두세 살 난 아이를 데리고 다시 배우자를 찾으려 했다. ‘지난번에는 애정 없는 결혼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애정이 있는 사람을 만날 거야. 이번에는 사람을 정확히 보고 더 오래 알아봐야지.’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또 누군가를 만났다. ‘어쩜, 내 이상형이야. 내가 꿈에도 그리던 사람이야. 이 사람도 날 좋아하고 나도 이 사람이 마음에 들어. 이 사람은 나 없이 살 수 없고 나도 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어. 둘이 무슨 자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 끌어당기고 있잖아. 같이 있고만 싶어. 우리 사이에는 애정이 있으니까 결혼하자.’ 또 결혼을 했다. 결혼하고 또 아이가 생기고 2~3년이 지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도 문제가 많네. 게으르고, 게걸스럽고, 맨날 허풍만 떨고, 쓸데없는 소리나 늘어놓고, 책임감도 없고, 돈 벌어서 집에는 가져오지도 않고, 종일 술 마시고 노름만 하잖아. 이건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러지 않아. 이혼하자!’ 두 아이를 데리고 또 이혼했다. 이혼 후, 애정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지만, 자기도 잘 모른다. 두세 번 결혼에 모두 실패한 사람이 결국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나는 인성을 믿지, 애정은 믿지 않아.’ 보아라. 그만큼 시달려도 무얼 믿어야 할지 모른다. 그는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잘못된 사상 관점을 받아들인 다음 이를 준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런 사상 관점을 직접 실천하면서 끊임없이 결혼을 짓밟고, 자신을 짓밟고, 다른 사람을 짓밟았다. 그리고 다음 세대와 자신에게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서로 다른 정도의 상처를 입혔다. 이런 게 모두 사람이 결혼에 고통과 무력감을 느끼고, 결혼에 어떤 좋은 감정도 갖지 않게 되는 부분적인 원인이다. 방금 결혼에 대한 사람의 여러 가지 생각과 정의, 그리고 결혼에 대한 현대인의 그릇된 관점으로 초래되는 인류의 결혼 상황에 대해 교제했다. 결론적으로 현대 인류의 결혼 상황이 좋으냐, 좋지 않으냐? (좋지 않습니다.) 장래가 없고, 낙관적이지 않으며, 갈수록 난장판이다. 동쪽에서 서쪽, 남쪽에서 북쪽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결혼은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다. 지금 이 세대 사람, 40, 50세 이하 사람은 윗 세대, 또 아랫 세대의 불행한 결혼을 목격했고, 이 몇 세대 사람의 결혼에 대한 생각, 또 그들이 겪은 실패한 결혼을 목격했다. 물론 40세 이하 사람들 중에는 각종 불행한 결혼의 피해자가 많다. 편모에게서 자란 사람도 있고, 편부에게서 자란 사람도 있다. 물론 편부는 상대적으로 적다. 또 생모와 계부 사이에서 자란 사람도 있고, 생부와 계모 사이에서 자란 사람도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르거나 어머니가 다른 남매와 같이 자란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부모가 이혼한 후 재혼하면서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가 되었고, 사회에서 몇 년 지내다 어른이 되었을 때 자기도 계부나 계모가 되고, 혹은 편모나 편부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인류의 결혼 상황이다. 모든 인류가 결혼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킨 결과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인류의 생존, 번성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 인류 스스로에 의해 이렇게 엉망으로, 형편없이 다뤄져 왔다. 인류가 어떤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봐라. 모든 가정이 보내는 나날을 보면 속상하고 지긋지긋하다. 이제 이런 얘기는 관두자. 얘기할수록 짜증이 난다. 그렇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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