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9) 제 1 부

지난번 예배에서는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주제에서 두 번째, ‘내려놓기’에 관한 내용, 즉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일에 대해 교제했다. 이 제목과 관련하여 우리는 전부 네 가지 예를 살펴보았다. 첫 번째는 취미와 관심사, 두 번째로는 결혼, 세 번째 가정, 네 번째 사업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난번에 취미와 관심사에 대해 교제하면서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중 한 가지는 바로 취미와 관심사 때문에 생겨난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제를 통해서 사람들이 취미와 관심사에 대해 올바른 태도와 견해가 생기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제한 목적은 취미, 관심사로 인해 생겨난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그런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려면 취미와 관심사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취미와 관심사를 어떻게 대하고,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겨난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어떻게 내려놓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긍정적인 면을 교제했든 부정적인 면을 교제했든, 그 목적은 결국 사람이 취미와 관심사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들을 바르게 대하고, 바르게 운용하게 함으로써 취미와 관심사에 정당한 존재 공간과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일과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는, 그릇되고 부당하고 부적절한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것이다.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겨난 추구와 이상, 바람은 사람의 생활과 생존에 영향을 주고, 사람의 생존관에도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네가 가는 길, 네 일생의 본분과 사명에는 더욱 커다란 영향을 준다. 따라서 소극적인 면에서 볼 때,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겨난 추구와 이상, 바람은 사람이 추구해야 할 목표도 아니고, 사람이 추구할 방향도 아니다. 사람이 일생에서 수립해야 할 인생관과 가치관은 더더욱 아니다. 취미와 관심사가 무엇인지에 관한 교제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취미와 관심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대해야 하는지 알려 주고, 그것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이라는 각도에서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이 올바른지 아닌지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시 말해, 부정적 차원과 긍정적 차원에서 어떻게 취미와 관심사를 바르게 대해야 할지 분명히 알게 한다. 한편으로는 사람이 취미와 관심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정확한 태도로 대하게 되면 이 역시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겨난 이상과 바람을 진정으로 내려놓은 것이다. 네가 취미와 관심사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취미와 관심사를 대하는 방식과 방법도 올바를 것이고, 상대적으로 원칙에 부합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너는 적극적인 면에서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겨난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을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취미와 관심사 때문에 생겨난 추구와 이상, 바람이 사람에게 미치는 여러 가지 불리한 영향, 혹은 사람에게 일으키는 좋지 않고 부정적인 영향을 분명히 알고, 그런 부당한 추구와 이상, 바람을 자발적으로 내려놓을 수 있게 해 준다. 이렇게 교제하면 이런 질문을 던질 사람이 있지 않으냐?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취미와 관심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각자의 취미와 관심사는 그만큼 다양한 추구와 이상, 바람을 만들고요.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다들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이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인류의 과학 기술이나 문화, 교육 등과 같은 인류의 생존, 생활에 관계되는 이런 분야가 어떻게 발전하겠습니까? 인류가 여전히 현재의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세상이 지금처럼 발전했을까요? 이 세상은 원시 사회와 똑같지 않았을까요? 지금 현대인들의 생활이 가능했을까요?” 이것은 문제가 아니냐? 아마 우리가 무슨 화제를 가지고 교제를 나누든 너희는 항상 ‘하나님 말씀은 모두 진리니까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다른 의견을 내세워 내가 교제하는 내용을 반박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의문을 가지는 사람 혹은 제3자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안 그러냐? 만약 누군가 정말 이렇게 질문한다면 너희는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관점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는 과학 기술의 발전을 좌우할 수 없고, 시대의 진보도 좌우할 수 없으니까요. 과학 기술의 발전과 시대의 진보는 모두 하나님의 주재 아래 있는 것이지, 사람이 여기에 취미와 관심사를 갖고 있다고 해서 세상 발전을 촉진시키고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거시적인 관점에서 말한 것이다. 또 다르게 인식한 경우는 없느냐? 그건 네가 정말로 진리를 깨달았는지에 달려 있다. 너희가 볼 때 이방인이 이런 교제를 듣는다면 저렇게 묻는 사람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저런 질문을 던졌을 때 네가 어떻게 대답해야 객관적인 사실에 부합하고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네가 대답을 못 한다면 사람들은 네가 미혹되었다고 할 것이다. 대답을 못 한다는 것은 최소한 네가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다. 너희는 대답을 못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만약 인류가 모두 이상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지금처럼 발전했을까요?” 대답은 ‘그렇다’이다.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합니다.) 이 ‘그렇다’라는 답변을 가장 간단하고 솔직하게 해석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건 바로 이 세상은 인류가 이상을 추구하든 말든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이 지금처럼 발전한 것은 인류가 이상으로 이끌고 추진한 결과가 아니라, 창조주가 인류를 이끌고 지금까지, 오늘날까지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추구와 이상, 바람이 없어도 인류는 그대로 오늘날까지 올 수도 있겠지만, 창조주의 인도와 주재가 없었다면 인류는 오늘날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적절한 해석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적절한 것이냐?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었느냐? 질문의 본질을 해석한 것이냐? 그렇지 않다. 이것은 이론에만 머문 것이다. 이상(異像)적인 말로 질문에 답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더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해석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해석은 무엇이냐? 우선 간단한 것부터 얘기해 보자. 온 인류 가운데서 사람은 누구나 각기 부류대로 나뉘고, 각 부류의 사람은 다 자신의 사명을 갖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사명은 창조주의 주재를 증거하고 창조주의 행사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본분을 다하여 최후에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명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말씀, 하나님 사역을 전파하고, 그다음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함으로써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이 부류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로, 하나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 사역에 협력하는 부류다. 이들의 사명은 본분을 잘 이행해서 하나님 부탁을 완수하는 것이다. 이 부류는 인류 중에서도 특별한 인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특별한 인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 하나님의 6천 년 경륜에서 특별한 사명을 띠고, 특별한 본분과 책임을 맡고 있다. 따라서 내가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긴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이들에게 하는 요구다. 즉, 너희에게 개인적인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너희의 사명, 너희의 본분, 너희의 책임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집과 교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발전과 전진, 이 세상의 어떤 조류도 너희와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발전과 전진에 관해 하나님은 너희에게 어떤 사명도 부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택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인류에게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은 무엇이냐?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잘 이행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진리 추구이고, 사람에게 요구하는 진리 추구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말, 이런 요구는 온 인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 선민들 각자에게 하는 말이고,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 각자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너희가 하나님의 경륜과 사역에서 맡은 역할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대상이라고 할 때, 이 ‘구원’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되느냐?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한 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여 최종에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구원받아 다음 시대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류 가운데서 너희가 맡은 역할이자 하나님이 모든 인류 가운데서 너희에게 부여한 특별한 사명이다. 물론 너희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그건 모든 인류 가운데서 너희가 특별히 지니는 책임과 본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 선민이라는 각도에서 그 문제를 바라본 것이다. 다음으로, 모든 인류 가운데서 이 특별한 무리의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들은 이 세계의 발전과 진전, 혹은 어떤 일에 대해 그 어떤 의무와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이 특별한 사람들 외에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각양각색의 인류도 있는데, 그들의 본성 본질이 무엇이든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각각 다른 사명을 부여했다. 그들의 부동한 사명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부동한 시기, 사회 환경, 인종 가운데서 부동한 역할을 수행하며 각종 분야를 채우고 있다. 하나님이 정한 그들의 부동한 역할로 인해 그들은 부동한 취미와 관심사를 가지게 되었고, 이 부동한 취미와 관심사를 전제로 그들에게는 각양각색의 추구와 이상, 바람이 생겨났다. 그들에게 각양각색의 추구와 이상, 바람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서로 다른 시기와 사회 환경 아래 온갖 다양하고 새로운 사물과 산업이 생긴다. 예를 들어, 과학 기술, 의료, 비즈니스, 경제, 교육, 혹은 경공업 분야의 방직, 수공업, 그리고 항공, 항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각종 추구와 이상, 바람으로 인해 생겨난 여러 분야의 선도자나 출중한 사람, 혹은 특별한 애호가 등은 서로 다른 시기와 사회 환경에서 각자의 사명을 가지는 동시에 어느 특정한 사회 환경에서 끊임없이 각자의 사명을 완수하고 있다. 이렇게 모든 인류가 처하게 되는 서로 다른 시기와 사회 환경에서, 이 특별한 인물들의 추구와 이상, 바람의 실현으로 인해 사회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전진한다. 물론 인류 역시 그 덕분에 끊임없이 서로 다른 수준의 물질생활을 누리고 있다. 몇백 년 전을 예로 들면, 그때는 전기가 없어서 다들 기름불을 켜고 살았는데, 그런 특수한 배경에서 특별한 인물이 태어나 전기를 발명하게 되면서부터 인류는 전깃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어느 특수한 사회 환경에서 특별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사람들이 죽간에 힘들게 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언젠가 얇고 평평한 물건에 글씨를 쓸 수 있게 되면 편리하고 잘 보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지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 후로도 끊임없는 연구와 탐색, 시도 끝에 마침내 종이를 발명했다. 증기 기관의 발명도 있다. 어느 특수한 시기에 한 특별한 인물이 태어났다. 그가 보기에 사람이 하는 수공업은 너무 힘이 들고 체력 소모가 큰 데다 효율도 너무 낮았다. 만약 인력을 대체할 만한 기계나 다른 방식이 있다면 시간이 절약돼서 다른 일을 할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그의 연구와 탐색 덕분에 증기 기관이 발명되었고, 그 후 증기 기관의 원리를 이용한 각종 기계들이 잇따라 발명되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시기에 특별한 사람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추구와 이상, 바람이 끊임없이 실현되고 증명된 덕분에 경공업이든, 중공업이든 서서히, 계속해서 전진하고 발전했고, 인류 전체 삶의 질과 생활 조건은 부단히 개선되었다. 경공업 분야에서는 방직, 수공업 등이 현재 점차 나아지고, 정교해지고, 정밀해지고 있으며 이로부터 인간이 누리는 혜택도 점점 커지고 있다. 중공업 분야에서는 교통수단, 자동차, 기차, 선박, 비행기 등이 인간의 삶에 커다란 편리를 제공해서 인간의 이동이 쉽고 편해졌다. 이것이 인류 발전의 실제 과정이자 구체적인 모습이다. 어쨌든 경공업이든 중공업이든 분야를 막론하고 그건 모두 특별한 한 사람 혹은 특별한 여러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일어나고 탄생한 것이다. 그들의 특별한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그들은 추구와 이상,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그들의 특별한 추구와 이상, 바람 때문에 인류의 부동한 시기, 인류가 살아가는 사회 환경을 배경으로 각종 분야에서는 인간 세상에서 더 앞서고, 더 편리하고,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더 유리한 온갖 것들이 생겨났다. 이것은 인류의 편리와 삶의 질 향상을 가져왔다. 이 얘긴 잠깐 접어 두고 이 특별한 인물들의 유래를 다시 살펴보자. 부동한 시기의 그 특별한 인물들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한 게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한 것이라면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정함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정함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바로 하나님이 이 특별한 인물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부여해서 그들이 특정한 시기에 나타나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게 했다는 뜻이다. 그런 다음 이 특별한 인물들이 수행한 특별한 일은 부동한 시기의 인류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이 특별한 인물들로 인해 끊임없이 약간씩 변화하고 새로워지고 있다. 인류는 이렇게 발전하는 것이다.

특별한 취미와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 선민들과의 차이는 무엇이냐? 그건 바로 그들도 하나님이 특별한 사명을 정해 준 사람이긴 하지만, 구원의 대상으로 정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는 요구는 그저 특수한 시기, 특수한 시간에 특수한 일을 해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특수한 시간에 떠나는 것이다. 그들이 인간 세상에서 살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어떤 구원 사역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이 사회와 인류의 발전을 위해 사명을 맡은 것이다. 또한 이 사회와 인류의 전진을 위해, 혹은 다양한 시기 인류의 생존 상황을 바꾸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경륜 중 하나인 인류 구원 사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사명을 완수하든, 혹은 인류를 위해 얼마나 큰 공헌을 하든, 인류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든 그건 모두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과는 무관하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고, 세상의 흐름에 속하고, 세상의 발전에 속하고, 세상의 여러 업계에 속하는 한 구성원으로,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과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 인류에게 공급하는 모든 말씀, 하나님이 선포하는 진리와 생명, 혹은 인류에게 하는 갖가지 요구는 이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그것은 온 인류와 온 우주를 향해 발한 하나님의 음성, 나아가 하나님의 구체적인 요구와 원칙 하나하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물론 인류 사회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특별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말씀, 즉 진리, 길, 생명은 단지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선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쉽게 풀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구원하려 하고,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받게 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들은 그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지 않고 구원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이런 생명의 말씀은 그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들 특별한 인물들은 특별한 취미와 관심사를 가지고 있기에 일반인들과 다르거나 일반인들보다 높은 추구와 이상, 바람을 가진다. 그들에게 그런 특별한 추구와 이상, 바람이 있고, 또 남다른 취미와 관심사, 혹은 특별한 취미와 관심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인류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부동한 시기에 자신들의 중요한 사명을 완수한다. 그들이 결국 자신들의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는가의 여부에 관계없이 어쨌든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긴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하고만 관계가 있다. 특별한 사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특정 시기, 특정 사회 환경에서 자신들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해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한 사명이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더해 준 사명이다. 이것은 그들의 책임이고 그들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들의 육이나 마음, 혹은 정신세계가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아무리 커다란 압박감을 견디고, 아무리 커다란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완수해야 할 사명을 완수할 것이고, 완수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 운명적인 정함에서 벗어날 수 없고, 누구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일은 그들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 조금도 관계가 없다는 건 무슨 뜻이냐?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는 이 말은 그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시기, 어떤 사회 환경에 놓이든, 인류가 언제까지 발전하든, 하나님의 이런 말씀은 그들과는 무관하다. 그들에게 하는 말씀이 아닌 이유로 이런 말씀은 그들을 향해 한 요구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운명적인 정함,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아래 자신들의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이 사악한 인류, 패괴된 인류의 다양한 시기, 다양한 사회 환경 속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자신들이 다해야 할 의무를 다해서 자신들이 완수해야 할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는 역할은 봉사자이냐, 아니면 부각물이냐? 어떻게 말해도 된다. 어쨌든 그들은 하나님이 택한 대상도 아니고,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대상도 아니다. 그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추구와 이상, 바람을 아무리 내려놓아도 이 세상과 인류의 발전에 지장이 가지 않는다. 물론 부동한 시기, 부동한 사회 환경에 놓인, 이 세상의 여러 업계의 발전에도 지장이 가지 않는다.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냐? 바로 이 인류, 이 사회의 여러 업계의 발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관계가 없고,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과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는 “우리가 만약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면 이 사회와 인류가 과연 발전하겠습니까?”라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뭐가 걱정이냐? 걱정할 필요 없다. 하나님은 계획이 있고, 안배가 있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네 걱정은 공연한 것이다. 그건 네가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지녀야 할 추구와 이상, 바람은 무엇이냐? 바로 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서 본분 이행에 합격하고, 이로써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하는 것이다. 또한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해서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가 마땅히 지녀야 할 추구와 이상, 바람이다. 반면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겨난 세상에 대한 추구와 이상, 바람은 네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왜 내려놓아야 하느냐? 너는 교회 밖 사람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를 선택한 이상, 네가 진리를 추구하기로 선택하고 진리 추구의 길을 가기로 결정한 이상, 너의 인생 목표와 방향은 바뀌어야 하고,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겨난 네 추구와 이상, 바람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왜 내려놓아야 하느냐? 그 길은 네가 갈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방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네가 그 길을 추구한다면 너는 하나님이 택한 대상이 아니다. 네가 이방인이 추구하는 이상과 바람을 추구한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할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네가 너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지 못하고 또한 그것을 실현하려고까지 한다면, 너는 하나님 사역에 순종할 수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경지에 이를 수 없다. 그러면 너는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만약 네가 너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진리 추구를 포기하고 구원받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역시 그 말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싶다면 우선은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겨난 네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 세상의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사람과 관계가 없는데, 그것은 네가 가야 할 길도 아니고 네가 인생에서 세우고 가져야 할 목표와 방향도 아니기 때문에, 너는 그것들을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만약 아직도 속으로 항상 그것을 위해 계획하고 계산한다면, 그것을 위해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고 생각한다면, 최대한 빨리 내려놓고 양다리를 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해서 구원받고 싶기도 하고, 세상을 추구하며 자신의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고 싶기도 하다면, 너는 어느 것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네가 구원받는 일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너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비켜 가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가장 좋은 기회를 놓치고,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재난 속에 떨어져 가슴을 치며 후회할 것인데,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바로 이런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네가 슬기로운 사람이고, 또 진리를 추구하기로 이미 결심했다면, 너는 자신이 한때 품었던, 혹은 여전히 추구하고 있는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 미련한 사람, 바보, 어리석은 자, 멍청한 자들은 진리를 추구해서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세상에 대한 자신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지 못하고, 둘 다 손에 넣으려 한다. 그들은 그것이 이득이고 똑똑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가장 바보 같은 행동, 가장 바보 같은 짓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세상에 대한 추구와 이상, 바람을 철저하게 내려놓고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쪽을 택한다. 즉, 이 세상이 어느 정도로 발전하든, 여러 업계가 어떤 상황이고 어떻게 발전하든 너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당들이 자신들의 할 일을 하게 두어라.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완성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일한 과실을 누리는 것이다. 이 얼마나 좋으냐! 예를 들면, 그들이 발명한 컴퓨터나 어떤 소프트웨어가 꽤 쓰기 편해서 우리가 본분을 이행하고 사역하는 데 아주 도움이 된다면 우리가 가져다 쓰면 된다. 그것들이 봉사하게 하는데, 네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도록 거들고, 네가 하는 일을 더욱 잘 완수할 수 있게 하면 된다. 그리하여 네가 이행하는 본분의 효율이 더욱 높아지고, 효과도 더욱 좋아지고, 시간도 더욱 절약된다면 얼마나 좋으냐! 너는 머리 아프게 연구할 필요가 없다. ‘이 소프트웨어는 어떻게 발명한 거지? 누가 발명한 거지? 이런 소프트웨어나 관련 기술을 어떻게 익혀야 할까?’ 이런 건 쓸데없는 고민이다. 네 마음과 에너지는 그걸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 일에 네 에너지를 바치고 골치를 썩일 필요가 없다. 공헌할 사람, 세상에 속한 사람이 공헌하게 두면 된다. 그들이 공헌한 다음, 우리는 그대로 가져다 쓰기만 하면 되니까 얼마나 좋으냐! 무엇이든 다 갖춰져 있다. 하나님은 진작에 이것을 다 안배해 놓았다. 너희는 추구할 필요도 없고, 그것 때문에 근심하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 일 때문에 무엇을 분담한다든가 무얼 걱정하고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단지 본분을 잘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해서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가장 올바른 인생길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제,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이 문제를 잘 알았느냐? 이런 사람이 있다. “사람이 이상을 추구하지 않으면 이 세상이 그래도 앞으로 발전할까요?”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너희는 이 대답을 이해하겠느냐?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얘기한 이 문제의 본질도 잘 알겠느냐? 사실상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마지막 한 마디는 바로 이 세상의 발전, 이 세상의 진보, 이 세상의 일은 세상에 속하는 마귀나 세상에 속하는 이른바 ‘인류’가 하게 두라는 것이다. 그 일들은 하나님 믿는 사람과는 관계가 없다. 하나님 믿는 사람의 사명과 책임은 무엇이냐?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간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은 오로지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도를 행하여 마지막에는 구원받는 것, 이것이 너의 사명이요, 하나님이 너희에게 품는 최고의 기대이자 최대의 염원이기도 하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안배해 놓았으니, 너는 근심할 필요도, 염려할 필요도 없다. 때가 되면 네가 누려야 할 것이 다 있을 것이다. 먹을 것도 다 먹을 수 있고, 쓸 것도 다 쓸 수 있다. 무엇이든 네 상상을 뛰어넘고 네 예상을 뛰어넘을 것이다. 뭐든 넘쳐나서 네가 부족하지 않고 빈곤하지 않게 할 것이다. 성경에 주의 짐은 가벼움이라는 말이 있다. 원문은 뭐라고 하였느냐?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30)입니다.) 이런 뜻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자신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에게 평범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추구 없이 나태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산송장이나 영혼 없는 사람이 되라는 것도 아니다. 그 말은 네가 자신의 그릇된 추구 방향과 추구 목표를 바꾸고 부적절한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은 뒤 올바른 추구와 이상, 바람을 세우라는 것이다. 그래야 올바른 인생길에 들어설 수 있다. 그럼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느냐? 사람이 이상을 추구하지 않으면 세상이 그래도 발전하겠느냐? 대답은 ‘그렇다’이다. 무엇 때문이냐? (세상에 속한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명을 부여하심으로 그들이 그 일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정해 놓고 안배해 놓았으니 너는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이 세상이 발전해야 한다 해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그 사명을 짊어질 필요도 없고,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이 안배해 놓았다. 하나님이 안배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너는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도를 행해서 구원받기만 하면 된다. 다른 일을 네가 걱정할 필요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러니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것이 네가 실행해야 할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네가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인류가 어떻게 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며, 너와는 관계가 없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안배가 있다. 이렇게 간단하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렇게 교제하니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앞으로 누가 또 이렇게 물어본다면 너희는 그 질문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느냐? 하나님을 안 믿는 누군가가 이렇게 물어본다고 해 보자. “당신네는 이상을 추구하지 말고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으라고만 하는데, 그럼 사람들이 다 당신들 말처럼 그렇게 실행하면 이 세상이 그래도 존재할까요? 인류가 그래도 발전할 수 있을까요?” 너는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 “사람에게는 각자 뜻이 있으니 강요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유행하는 말이다. 너는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시는데, 이것은 진리입니다. 당신이 받아들이고자 하면 내려놓아도 되고, 받아들이기 싫으면 내려놓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본인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것은 스스로가 원하는 일이고, 당신의 권리입니다. 내려놓지 않는 것도 스스로가 원하는 일이고, 역시 당신의 권리입니다. 사람은 각자 사명이 있습니다. 온 인류 중 누구든 다 자신의 사명이 있고,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사람의 선택이 같지 않으면, 사람이 가는 길도 같지 않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추구하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상과 바람을 실현해서 자신의 가치를 나타내는 길을 택했습니다. 저는 제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따르는 길, 하나님 말씀에 따르고 하나님의 도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만족게 해 결국에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택했습니다. 당신이 이 길 가기를 추구하지 않는 것도 당신 자유입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건 어떠냐? (좋습니다.)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아라.”라는 말을 네가 만약 받아들인다면, 이 말은 너에게 하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말은 꼭 네가 들어야 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듣지 않는 쪽을 택해도 되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경영 사역에서 기권해 구원받을 기회를 포기해도 된다. 그건 너의 권리다. 너는 네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지 않은 채 이 세상에서 마음 푹 놓고 네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해도 된다. 아무도 너에게 강요하지 않고,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건 너의 권리다. 너의 선택은 너의 사명이기도 하고, 너의 사명은 네가 인류 가운데서 수행하도록 하나님이 정한 역할이기도 하다. 단지 그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실의 실체다. 네가 뭔가를 선택한다면 그것이 바로 네가 가는 길이고, 네가 그 길을 간다면 그것이 바로 인류 가운데서 네가 수행하는 역할이다. 이렇게 간단하고, 이것이 바로 사실의 실체다. 따라서 역시 그 말로 돌아간다. “사람에게는 각자 뜻이 있으니 강요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이 ‘뜻’은 어떻게 생기느냐? 근원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정한 것이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본분을 이행하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너를 택하지 않아서 너는 구원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너에게는 그런 복이 없고,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네가 하나님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관심이 없고, 이쪽으로는 추구하지 않았다면 너한테는 그런 복이 없다. 하나님 집에 오기로 정해진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길 원하고, 하나님 말에 무조건 따른다.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고 하면 내려놓고, 내려놓지 못할 경우 어떡하면 내려놓을지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한다. 이런 사람들은 기꺼이 구원받고자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영혼 깊은 곳에서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건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그런 복이 있고, 그게 바로 그의 행운이다. 하나님이 정한 것이 바로 네가 해야 할 역할이고, 이것이 근원이다. 복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추구하고 복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냐?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또 그런 질문을 던질 경우 너희는 대답할 수 있겠느냐?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대답은 무엇이냐? (“사람에게는 각자 뜻이 있으니 강요할 수 없다.”입니다.) 사람에게는 각자 뜻이 있으니 강요할 수 없다. 자신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라는 요구는 너에게 실행의 길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너는 내려놓는 쪽을 택할 수도 있고, 내려놓지 않는 쪽을 택할 수도 있다. 사람에게는 각자 뜻이 있으니 강요할 수 없다. 네가 받아들인다면 그 말은 너에게 하는 말이다. 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말은 너에게 하는 말이 아니며,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일은 너와는 무관하다. 그건 네 자유다. 이 문제는 이제 해결되지 않았느냐? (해결됐습니다.) 해결되었으니 이 일로 트집을 잡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책에 사용된 한글성경 번역본은 ‘개역한글’을 인용하였습니다. 그 외의 경우는 따로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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