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8) 제 3 부

우리는 취미와 관심사를 어떻게 올바르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진정한 내려놓기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우리는 취미와 관심사를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취미와 관심사를 기초와 밑천으로 삼아 정한 추구와 이상, 바람을 분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내려놓아야 할 것은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이다. 조금 전에 네 취미와 관심사가 긍정적인 작용을 하고 긍정적인 효과를 내게 하라고 교제했다. 이는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일종의 적극적 실행 방식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은 취미와 관심사가 생겼다고 해서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더 실질적인 내려놓기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잘 활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정해진 이상과 바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즉, 자기 취미와 관심사로 인해 생긴 인생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정상적으로 발휘하고 있음을 어떻게 분별해야겠느냐? 만약 한 가지 취미와 관심사가 생긴 뒤에 네가 그것을 사역과 본분 이행에 올바르게 활용하고 네 일상생활에 적용한다면, 네가 추구하는 목표가 자기를 과시하거나 치켜세우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인지도를 높여서 더 많은 사람이 우러러보고, 칭찬하고, 호의를 갖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물론 네 취미와 관심사로 사람들의 마음속 지위를 얻음으로써 그들이 너를 높이 세우고 따르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면, 너는 취미와 관심사를 긍정적이고, 알맞고, 적절하고, 이성적으로 적용하고 있으며, 정상 인성에 부합하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진리 원칙에 따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취미와 관심사를 발휘하거나 적용할 때 남에게 탄복하고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한편 특별히 뚜렷한 목적성을 갖고 자기를 과시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뻔뻔스럽게, 강제로 네 말을 듣고 받아들이게 하여 네 취미와 관심사를 과시하려는 허영심을 채운다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무시하고, 종국에는 네 취미와 관심사를 자본으로 삼아 타인을 통제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속 지위를 얻고, 사람들 사이에서 명망을 쌓는다면, 최종적으로 네 취미와 관심사로 말미암아 명예와 이익이라는 수확을 얻는다면, 이는 취미와 관심사를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정상적으로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행동은 정죄받아 마땅하며, 사람에 의해 분별되고 버려져야 한다. 물론 사람이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네가 본분 이행을 기회로 삼아, 혹은 네가 리더나 책임자, 무슨 인재라는 기치를 내세워 다른 사람 앞에서 네게 어떠한 특기와 재주가 있음을 과시하고 네 취미와 관심사가 남보다 낫다고 과시하는 것은 부적절한 행동이다. 이는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발휘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명망을 쌓고 자기 야심과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이 과정 혹은 이러한 행실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이용해, 사람들이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숭배하는 심리를 이용해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내려놓기가 쉬운 일이냐? 네게 특별한 취미와 관심사가 있을 때,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취미와 관심사는 변함없이 네 인성 안에 존재하면서 네가 걷는 길에는 관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자기한테 어떠한 취미와 관심사가 있는지 늘 과시하려 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명망을 얻거나 인지도를 높여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려 하고, 더 많은 사람의 주의를 끌려고 하면, 그 과정과 그러한 행실은 절대 단순한 행동 방식이 아니다. 그 모든 행동 방식과 태도를 종합해 보면 곧 한 사람이 걷는 길이 된다. 이 길은 무엇이냐? 하나님 집에서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고자 열심히 추구하고 사람들이 우러러보기를 추구하여 자기 야심과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이렇게 추구한다면 네가 걷는 길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요, 멸망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당장 돌아서서 이러한 행동 방식을 바로잡고, 이러한 행동 방식과 야심 및 욕망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저는 여전히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하지 마라. 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네 취미와 관심사를 감추고 최대한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본분 이행에 필요하면 어떻게 하나요?” 드러내야 할 때, 반드시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될 때는 드러내라. 그것은 정상적으로 이용할 때다. 그러나 지금 네가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길을 걷고 있다면 드러내지 마라. 과시하고 싶을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지를 다지고 그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감찰과 징계를 받아들이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야심과 욕망을 발원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그것을 없애서 절대로 실현되지 않게 해야 한다. 어떠냐? (좋습니다.) 쉽게 할 수 있겠느냐? 쉽지 않다. 그렇지 않으냐? 능력이 있는데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무슨 특별한 장기까지 갈 것도 없고, 어떤 사람은 요리만 조금 할 줄 알아도 어디서나 과시하고 싶어 한다. 스스로 ‘레전드 두부 요리사’, ‘면 요리 여왕’ 같은 칭호를 붙이기도 한다. 겨우 이러한 특기에도 과시할 가치가 있느냐? 만약 그에게 특별한 은사가 있다면 대체 얼마나 오만하게 굴겠느냐? 분명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물론, 취미와 관심사 때문에 잘못된 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자기 취미와 관심사 때문에 종종 생각이 갈팡질팡한다.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가 과거에 정한 이상과 바람을 잊지 않고 되뇐다거나, 아직 실현하지 못한 이상과 바람을 계속해서 자신에게 상기시키고, 자기한테 그러한 이상과 바람이 있는데 여태 실현하지 못했다고 속으로 거듭해서 자신에게 말한다. 그것을 위해 구체적인 대가를 치르거나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실행에 옮긴 적이 없지만, 마음에 단단히 뿌리내린 그 이상과 바람을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앞서 교제하고 분석했듯이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세상의 길을 걷는다면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고 멸망으로 통하는 길이다. 두 개의 평행선이 그러하듯 진리 추구와 그 길 사이에는 절대 접점이 없다. 당연히 얽힐 일도 절대로 없다. 네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며 구원받고 싶다면, 마음속에 품었던 이상과 바람을 철저히 내려놓아야 한다. 남겨 두지 말고, 보물처럼 아끼지도 말고, 버려야 한다. 이상 및 바람을 추구하는 것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두 갈래 길이다. 네게 이상과 바람이 있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할 수 없다.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고 긴 세월 체험한 것을 통해 각오를 다지고 착실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졌다면 과거에 품었던 이상과 바람을 포기하고, 그것을 너의 속내와 의식에서, 혹은 마음 깊은 곳에서 철저하게 제거해야 한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면 네 이상과 바람은 영원히 실현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동시에 네 발목을 붙잡아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기가 힘겹고 어렵게 만들 것이다. 네 이상과 바람을 실현할 수 없음을 안 바에는 차라리 단호하게 그것을 끊어 내고, 철저히 내려놓고, 다시는 생각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더는 어떠한 환상도 품지 않는 편이 낫다. 네가 이렇게 말한다고 치자. “저는 아직 진리를 추구해 구원받는 길에 큰 흥미를 못 느껴요. 제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을지, 진리를 추구할 사람이 맞는지도 모르겠고요. 구원받는 길도 제게는 아직 명확하게 보이지 않아요. 오히려 세상에서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구체적인 로드맵, 방안과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만약 그렇다면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길을 포기하고 네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러 가도 된다. 물론 지금 네가 도대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해야 할지, 아니면 진리를 추구해야 할지 확신이 없다면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혀 보기를 권하겠다. 하나님 집에서 한두 해 더 지내다 보면 먹고 마시는 하나님 말씀이 늘어나고 체험하는 환경이 많아지면서 일을 바라보는 각도와 방식이 더욱 성숙해지고 기분과 내적 상태가 점점 나아질 것이다. 이는 틀림없이 네게 대단히 좋은 일이다. 어쩌면 2년 뒤에는 네가 약간의 진리를 깨닫고 이 세상과 인류를 철저히 간파하여 네 이상과 바람을 완전히 내려놓고, 기꺼이 일평생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집에서 아무리 고생스럽더라도 끝까지 본분을 잘 이행하고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네가 과거의 이상과 바람을 포기하기로 각오를 다지고 결심한 뒤에 더는 망설이지 않고 착실하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 네게 확신이 없다면 1~2년 뒤에 다시 자기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을지 보고 싶다고 해도 하나님 집에서는 강요하거나 “너는 우유부단하고 착실하지 못하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1~2년 뒤에 네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이 많아지고, 네가 들은 설교가 많아지고, 진리를 조금 깨닫고, 인성이 성숙해지고, 사물을 보는 각도와 인생관, 세계관이 변화하면, 그때는 지금보다 정확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는 이방인들이 말하듯이 자기한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기가 걷고자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만약 네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데에 아무런 흥미가 없는데 그저 부모나 동료가 복음을 전했기에 체면 또는 예의를 생각해서 받아들였고, 하나님 집에서 마지못해 예배에 참석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고 치자. 이와 동시에 교회 형제자매들은 최소한 남을 괴롭히지는 않으니 꽤 괜찮은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하나님 집에는 적어도 이치를 따질 데가 있다고 생각하며, 진리가 권세를 잡은 하나님 집에서는 수모를 받거나 괴롭힘을 당할 일이 없으므로 이방 세계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네 이상과 바람을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고 바꾼 적도 없으며, 오히려 과거에 품고 있던 이상과 바람이 네 마음 깊은 곳에서, 사상과 영혼 안에서 점점 강렬해지고 뚜렷해지는 데다가 그러한 이상과 바람이 점점 뚜렷해질 때 너는 하나님을 믿으며 교제하는 진리와 매일 하는 말과 일, 그리고 생활 방식 등등을 점점 더 무미건조하고 따분하게 느끼며 기분이 못마땅해지니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고사하고 진리 추구에 전혀 흥미를 못 느끼며, 올바른 인생길을 걷는 것과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인가 하는 문제에 조금도 호감을 못 느낀다고 치자. 그러면 이들에게 말하겠다. 당장 네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러 가라! 세상에 네 자리가 있으며, 번잡하고 어수선하며 사악한 시류 속에 네 자리가 남겨져 있다. 너는 분명 소원대로 네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고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집은 네가 머무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고 네게 이상적인 곳이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도 당연히 네가 원하는 길이 아니고, 네게 필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네 이상과 바람이 점차 형태를 갖추는 중이고, 네가 아직 젊고, 세상에 나가 악착같이 분투할 에너지나 자본이 있을 때 어서 하나님 집을 떠나 네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러 가라. 하나님 집은 네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훗날 네가 복을 얻을 가망이 안 보이고, 그 어떠한 체험 간증도 말하지 못하고,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때에야, 50, 60살, 70, 80살이 될 때에야 비로소 각성해 진리를 추구하려 하지 마라. 그래 봤자 이미 너무 늦은 뒤다. 너는 하나님 집에 남기를 원하지 않아서 자신을 망친 것이다. 이러한 부류는 자기 속마음과 다르게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을 필요가 없다.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내 말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네가 지금은 아직 진리 추구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로 각오를 다졌고, 구원받을 수 있든 없든, 죽든 살든 하나님 집을 떠나지 않기로 다짐했다면 바로 이러한 사람이 내가 말한 대상이다. 당연히 여기에 내가 성명을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이다. 오늘 교제한 화제인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 내려놓기’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전제하에 한 말이다. 또한, 진리를 추구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기도 하다. 그 외에, 진리를 추구해 구원에 이르는 이 추구의 길, 추구 방향, 추구 의지, 추구 결심과 무관한 사람은 오늘 화제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이는 보충적인 성명이다. 이 성명이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 어떤 진리 원칙, 가르침, 공급, 붙들어 줌, 도움이든 모두 이성을 바탕으로, 사람이 원하는 상황에서만 사람에게 이야기해 준다. 만약 네가 듣기 싫다면 들리지 않도록 귀를 막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고, 자리를 떠나도 된다. 전부 다 괜찮다.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를 교제하면서 사람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그 누구도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이것이 좋지 않으냐? (좋습니다.) 강제적인 수단을 쓰느냐? (쓰지 않습니다.) 강제적인 수단을 쓰지 않는다. 진리가 사람에게 주는 것은 생명, 영원한 생명이다. 네가 얻기를 원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얻을 수 있다. 네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반항하면 얻을 수 없다. 얻든 얻지 못하든 결과는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추구할 때 반드시 몇 가지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교제하는 까닭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 마치 마라톤 참가와 같기 때문이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선수에게는 아주 대단한 체력이나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인내력과 끈기가 필요하고 신념이 있어야 하며, 끝까지 완주하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 물론, 마라톤에 참가하는 과정에는 이런 정신세계의 요소들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더 가볍고 원활하게 혹은 바라는 대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짐을 내려놓을 필요도 있다. 마라톤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몇 번째로 도착하느냐가 아니라 참가 과정에서 사람이 드러내는 태도, 사람의 끈기와 인내력, 그리고 참가 과정에서 사람이 이겨 내는 모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를 추구하여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흡사 마라톤 운동과도 같다. 아주 긴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 과정에서 진리 추구와 무관한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들은 그저 단순하게 진리와 무관한 것뿐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것들을 내려놓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고, 반드시 무언가를 버려야 하며,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려면 버려야 할 것이 많다. 그것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길과 다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끌어 준 올바른 인생 목표 및 방향과는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위배되는 것,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면서 올바른 인생길을 걷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부정적인 사물이며, 전부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거나 더 풍부한 물질과 금전이라는 수확을 얻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길을 걸으며 의지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지식,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 그리고 온갖 처세 철학, 방식, 수단, 계략이다.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할수록 사람은 점점 진리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끌어 준 올바른 인생길로부터 멀어진다. 사람 마음속의 이상과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공허하다. 그것은 네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인식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늘의 뜻에 순종하고, 주재자에게 순종하는 등의 긍정적인 사물을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이상과 바람을 추구할 때, 너는 진리에 맞는 이런 긍정적인 사물과 가치 있는 것들을 얻지 못한다.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으로 통하는 모든 인생길의 궁극적인 목표와 본질, 성질은 하나같이 똑같다. 전부 다 진리와는 반대된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길은 다르다. 그것은 네게 올바른 인생길을 이끌어 준다. 크게 말해서 이렇다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갖가지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너의 올바르지 못하고 치우친 사상 관점을 폭로하는 동시에 네게 올바르고 정확한 사상 관점을 알려 주고, 지도해 주고, 공급해 주고, 가르쳐 준다. 물론 어떠한 사상 관점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지도 알려 준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은 네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어떻게 정상 인성 안에서 살며 진리 원칙에 따라 처신해야 할지를 알려 주고, 최소한 양심과 이성의 기준 내에서 인간답게, 사람으로 살라고 알려 준다. 그 밖에 모든 일을 대할 때, 모든 일을 처리할 때 응당 가져야 할 사상 관점과 각도, 입장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이런 올바른 사상 관점과 각도 및 입장은 사람이 반드시 가져야 할, 올바르게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준칙과 원칙이기도 하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실제에 도달하거나 진입하면, 사람은 구원받게 된다.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얻으면,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어 하나님 말씀에 완벽히 부합하게 되고 하나님과 합하게 된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사람이 다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도 다시는 사람을 형벌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는다. 사람이 더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비로소 진정으로, 명분이 바르고 말이 사리에 맞게 피조물의 창조주가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로 돌아오고,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경배, 순종, 경외를 누린다. 이러면 모든 것이 순리에 맞게 된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하여 만물을 창조했고, 인류는 하나님의 주재하에 만물을 관리하며, 만물은 인류의 관리하에 하나님이 만든 법칙과 규율을 따라 질서 정연하게 앞을 향해 발전하고 이어진다.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누리고, 만물은 인류의 관리하에 질서 정연하게 생존해 간다. 만물은 인류를 위하고, 인류는 만물을 위한다. 이 모든 것이 그토록 조화롭고 질서 정연하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주재에서 비롯되었으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서 비롯되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이것이 바로 사람이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것의 궁극적 의의 중 하나다. 보아라. 지금 네가 내려놓는 것은 한때의 이상과 바람이지만, 네가 마지막에 얻는 것은 진리요, 생명이며,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다. 네가 내려놓은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이상과 바람보다 몇천 배, 몇만 배나 귀한지 모르며, 말 그대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또 하나 확실하게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이상과 바람을 추구해 봤자 네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게 될 일은 영영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태어나서부터 네 부모는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거짓말하는 법과 자기를 보호하는 법을 배워야 해. 남들한테 괴롭힘을 당하지 마. 누가 괴롭힐 때는 강하게 나가야 하는 거야. 나약하게 굴지 말고 남한테 만만하게 보이지 마. 그리고 지식을 배우고 강해져야 해. 그래야만 이 사회에 발붙일 수 있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해야 해. 여자는 독립적이어야 하고 남자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야.” 너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서 이러한 교육을 받았다. 얼핏 보면 네게 처신하는 법을 가르친 것 같지만, 사실 네 부모는 내내 열심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목숨이라도 건 사람들처럼 너를 이 세상으로, 이 사악한 시류 속으로 떠밀면서 네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모르게 하고, 정의로움과 사악함,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하는 법을 모르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네 부모는 너를 이렇게 가르쳤다. “처신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해. 남한테 너무 신사적으로 굴 것 없어. 남한테 너그러운 것은 자기한테는 잔인한 짓이야.” 네가 철이 든 이후부터 부모는 너를 이렇게 교육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서도, 사회에 나가서도 너는 항상 이렇게 배웠다. 그들이 네게 가르친 것은 사람이 되는 법이 아니라 귀신이 되는 법이며, 거짓말하는 법, 악을 행하는 법, 멸망하는 법이다. 너는 하나님을 믿게 된 다음에야 사람으로 살려면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말은 솔직하고 진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는 용기를 내서 겨우 한 번 진실한 말을 한다. 자기 양심과 도덕의 마지노선을 지켜서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너를 경멸하고, 가족들은 너를 원망하고, 심지어 친구마저 너를 비웃는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너는 타격을 받고 견뎌 내지 못한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너는 알 수가 없게 된다. 사람이 되느니 귀신이 되는 편이 차라리 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귀신이 되기로 한다. 이 사회의 사악한 시류를 따르면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인류 전체를 통틀어 네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 사람이 한 명도 없지만,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이 네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진정한 사람인지 가르쳐 준다. 진정한 인생이란 무엇인지, 거기에 대한 올바른 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 이러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사람됨의 근거로 삼을 줄 알고, 진리 원칙을 깨닫고 거기에 진입하면 처신할 줄 아는 것이고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됨의 근본이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살아갈 자격이 있으며, 죽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귀신이 된 자들, 사람의 탈을 쓴 산송장들에게는 살아갈 자격이 없다. 어째서냐?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인류를 위해 예비한 것이고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예비한 것이지 귀신들에게 예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느냐?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사람들의 덕을 본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이 단계 구원 사역만 아니었어도, 마귀 사탄의 힘을 이용하여 하나님 선민이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하고 마귀의 본질을 간파하도록 할 필요만 없었어도, 하나님은 진작 그들을 멸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누릴 자격이 없으며,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낭비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는 하나님의 기분이 어떻겠느냐? 기분이 좋겠느냐?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 진정한 사람들을 절박하게 구원하려는 것이다. 이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서 이들이 구원에 이르면, 살아남을 자격을 얻고 파멸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진다. 이들의 생존 법칙과 인생관, 이들이 걷는 길에서 이들의 추구,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설령 정확하고 올바른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진리에 위배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이들은 멸망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업이 이루어졌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생존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의 말로 표현하자면 인류에게 뒤를 이을 사람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의 조상에게 뒤를 이을 사람이 생긴 것이다. 만물을 관리할 인류가 있으면 하나님은 마음 놓고 안식할 수 있다. 하나님이 관리할 필요가 없어진다. 만물에는 저마다의 법칙과 규율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이 일찍이 정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이 또다시 어떤 생각을 하고, 마음을 쓰고, 공사를 벌이지 않아도 만물은 각자의 법칙과 규율 안에서 생존하며, 인류는 그저 유지하고 관리만 하면 된다. 이러한 인류가 있는데 하나님이 마음 쓸 일이 뭐가 있겠느냐? 바쁠 일이 뭐가 있겠느냐? 하나님은 안식할 것이다. 하나님이 안식할 때가 곧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지는 때이다. 물론 인류에게 있어서도 기뻐할 만한 때이다. 인류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는 것을 바탕으로 결국 구원에 이르렀고, 더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게 되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하나님에게 얻어져서 다시는 죽음을 맛볼 필요가 없어졌다. 즉, 사람이 이미 구원받은 것이다. 이는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큰 이점이 있는 데다가 하나님의 뜻이 이러함을 알았다면 사람이 품고 있던 사소한 이상과 바람쯤은 좀 내려놓을 만도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각도에서 가늠해 봐도 그러는 것이 적절하다. 이토록 적절하다면 응당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누구나 이론상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내려놓을 것이냐? 사실 아주 간단하다. 네가 더는 자기 이상과 바람을 위해 그 무엇도 행동에 옮기지 않고, 어떠한 에너지를 쏟거나 대가를 치르지 않고, 더는 이상과 바람에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을 위해 무엇도 희생하지 않으면 된다. 그 대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개인적인 바람과 이상을 내려놓고, 다시는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꿈조차도 그것과 관련된 꿈은 꾸지 말아야 한다. 또한,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길을 향해 마음이 차츰차츰 돌아서거나 기울어지고, 매일 일하고 마음을 쓰고 에너지를 쏟고 대가를 치르는 것이 모두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에 이르기 위함이라면, 점진적으로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는 것이다.

오늘 교제한 화제인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 내려놓기’를 잘 이해했느냐?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 알겠느냐? “어휴,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내려놨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사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세상의 사악한 시류와 이방인들이 걷는 명리 추구의 길을 점차 간파하게 되며, 차츰차츰 내려놓게 된다. 네가 아직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그저 마음속으로 내려놓기를 원할 뿐이라면, 이는 진정으로 내려놓은 것이 아니다. 네가 내려놓으려고 하는 것과 진실로 내려놓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고,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하면 이상과 바람 같은 것들을 내려놓기가 수월해진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저는 정말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고 싶어요. 타락의 온상에서 더럽게 물들기도 싫고 분쇄기에 들어가서 갈려 죽기도 싫어요.”라고 말하며 살아남고자 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해 주겠다. 어림도 없다. 그렇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기는 싫으면서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이상과 바람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약간의 은사와 특기가 있는 사람 중에 조용하게 있으려 하고 일생 평범하게 살려는 자가 어디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두각을 나타내고 삶에서 성과를 내기를 원한다. 모두가 머리에 후광을 두른 채 윤택하게 살고 싶어 한다. 개인의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고, 구원에 이르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반드시 진리를 받아들이고 추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며, 이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화두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화제는 여기까지 교제하고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자!

2022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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