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8) 제 2 부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에서 비롯된 이상과 바람은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느냐? 우리가 폭로하는 것은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폭로하고 분석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가진 모종의 취미와 관심사에서 비롯된 추구와 이상, 바람이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으로 인한 사람의 갖가지 행위와 사람이 걷는 길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위해 걷는 길은 과연 어떠한 길이냐? 누군가의 추구와 이상, 바람은 어떠한 길로 통하느냐? 어떠한 목표에 도달하느냐? 사람은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하면서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하고, 더 많은 고통과 여러 가지 육적인 분주함, 피로, 압박감 등등을 견디어 낸다. 그런데 그것 말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떠한 길을 걷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면서 어떠한 길을 걸어야만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할 수 있느냐? 우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하려면 첫 단계로 무엇을 배워야 하느냐? (각종 지식입니다.) 그렇다. 각종 지식을 배우고 갖추어야 한다. 지식이 풍부하고, 광범위하고, 수준과 깊이가 있을수록 사람은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에 더 가까워진다. 지식이 광범위하고, 풍부하고, 수준과 깊이가 있을수록 사람이 베테랑 소리를 듣거나 사회에서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가 쉽다. 한편으로 사람의 지식이 풍부하고, 수준과 깊이가 있고, 광범위할수록 그것은 그 사람이 투자해야 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그만큼 더 많다는 뜻이다. 이는 육체적 에너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밖에, 사람이 지식이라는 기반을 갖추게 되면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의 실현에 한발 더 가까워진다. 충분한 지식을 갖추는 것은 첫걸음에 불과하다. 그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 이후에는 사회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사람의 이상 및 바람과 관련된 업계라는 타락의 온상 혹은 사람이 갈려 나가는 분쇄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 다양한 세력과 각축전을 벌이고, 투쟁하고, 힘겨루기를 하고, 온갖 시합이며 대회, 연구 토론에 참가해야 한다.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쏟는 한편 다양한 상황과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사람은 타락의 온상 속에서 자기 지식에 기대어, 더 나아가 사람들 속에서 배우거나 기존에 알고 있던 생존 노하우, 생존 철학, 생존 법칙에 기대어 그 집단에 적응하고 그 사회의 메커니즘과 룰에 적응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점점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이라는 목표에 가까워진다. 갖은 고생을 하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오는 결과는 무엇이냐? 성공한 자는 왕이 되고 실패한 자는 역적이 된다. 종국에는 그 결과로 자기 인생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실현하고, 자기 인생의 목표를 실현하고, 동종 업계에서 자리를 잡는다. 그때가 되면 사람은 보통 중년이나 노년에 접어든 뒤이며 심지어 누군가는 이미 만년에 이르러 눈이 침침해지고, 머리가 벗겨지고, 귀가 어두워지고, 이가 흔들린다. 그 나이까지 살면서 자기 이상과 바람은 실현했을지 모르나 나쁜 짓도 많이 저질렀고 자기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었다.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는 내내 본심과 다른 말을 밥 먹듯이 하고 도의와 양심에 위배되는 일과 선을 넘는 일도 많이 했다. 더 나아가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인 일도 수없이 저질렀다. 남에 의해 곤경에 빠진 적도 많고 남을 곤경에 빠뜨린 적도 많으며, 남에게 패배한 적도 있고 남을 패배시킨 적도 있다. 살아남아서 자리를 잡았으니 운이 좋았던 셈이고, 인생이 완벽한 것 같고, 자아를 실현한 것 같고, 인생을 보람차게 산 것 같고, 이상과 바람을 위해 일생 동안 분투했으니 삶에 가치와 의의가 넘쳤던 것 같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응당 걸어야 할 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마땅히 있어야 할 좌우명조차 하나 없다. 그저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하여 평생 분투했고, 또한 사람들과, 사회와,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평생 싸우느라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마지노선, 원칙을 잃어버렸다. 이상과 바람이 실현되고, 몇 차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단계마다 세운 인생 목표가 소원대로 이루어졌지만, 마음은 편안하지 않고 뿌듯하지도 않다. 사람이 자기 취미와 관심사 때문에 정한 추구와 이상, 바람의 길은 솔직히 말해 결국 명리를 추구하는 길로 통한다. 최종 목표에 도달했을 때 사람은 자아를 실현했고, 존재감이 생겼고, 명예와 이익을 모두 얻었고, 다 가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미래와 종착지, 사람이 진정으로 알아야 할 생존의 가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만년에 가까워질수록 자기가 추구하던 모든 것이 그토록 막연하고 허망하게만 느껴진다. 그 허망하고 막연한 느낌은 사람에게 허탈함과 공황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은 노년이 되어서야 자기가 추구하던 이상과 바람이 그저 자기 허영심을 채워 주었을 뿐이고, 자신에게 한때의 명예와 이익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며, 단지 잠깐의 위안에 불과할 뿐 그 잠깐의 위안은 삽시간에 일종의 불안과 공황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년으로 접어들수록 사람은 자기 미래를, 훗날을, 더 나아가 죽은 뒤에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의 답을 얻지 못하면, 그 모든 것에 대해 올바른 사상 관점이 없으면, 사람은 공황에 빠지고 불안해진다. 이러한 불안과 공황은 사람이 눈을 감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쭉 이어진다. 사람이 얻어 낸 명예와 이익이 사람에게 주는 기쁨은 마음속에서 금방 자취를 감춘다. 심지어는 사람이 그것을 붙잡으려 하고 남겨 두려 할수록 더 쉽게 사라지며, 기쁨은 쉽게 불안과 공포로 탈바꿈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상과 바람이 어떠한 취미와 관심사에서 비롯되었든 그것은 결국 명리를 추구하는 길로 통하며, 최종적으로 이루는 목표와 사람이 얻는 것 또한 그저 명예와 이익뿐이고, 그 명예와 이익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단지 잠깐의 위안과 육적인 허영심의 일시적 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이 아주 실속 있으며, 덕분에 안심이 되고, 덕분에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위치를 더 잘 찾게 됐다는 느낌이 들고, 자기 인생의 방향을 더 잘 통제하고 자기 인생을 손에 쥐고 자기 운명을 주관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러다가 이상과 바람이 실현되면 그제야 문득 깨닫는다. 이 깨달음의 원인은 무엇이냐? 필생의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것이 알고 보니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마음으로 느낄 수도 없는 허망한 것이었다. 그것을 애써 잡으려 하고 붙들어 두려 할수록, 잡을 수도 붙들어 둘 수도 없고, 또 그럴수록 너는 점점 더 낙담하고 허탈해진다. 점점 더 두려워지고 후회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사람에게 취미와 관심사가 생겨 이상과 바람이 생겨난다. 이상과 바람은 사람에게 일종의 착각을 불러일으켜서 자기가 본인의 인생과 인생길, 생존 방식과 생존 목표를 통제할 능력을 가진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착각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며, 물론 더 나아가서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사람은 흔히 본능적으로 자기 육체 혹은 정신세계에 만족감을 주는 것을 추구하며, 그것이 얼마나 아득한 곳에 있든지 간에 자기가 얻을 수 있고 잡을 수 있다는 생각만 들면 사람은 그것을 위해 대가를 치르고, 심지어는 평생의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붓는다.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취미와 관심사를 인생 목표 추구의 초석이자 일종의 자격, 밑천으로 보고 그것을 위하여 어떤 대가든 치른다. 네가 일단 그것을 위하여 대가를 치르려 하면, 그 길에 들어섰다 하면, 반드시 사탄의 조종을 받고 세상의 풍조와 세상의 룰에 의해 통제되는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어째서 알지 못하느냐? 이와 동시에 틀림없이 자기도 모르게 사회라는 타락의 온상, 사람이 갈려 나가는 분쇄기에 뛰어들게 된다. 그곳에서 네가 어떤 색으로 물들든, 어떻게 갈려 나가든, 네 인성이 어느 정도로 뒤틀리든, 너는 이렇게 자기를 위로할 것이다. ‘내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서, 내 앞날을 위해서 참아야 해!’ 또한 계속해서 자신을 이렇게 타이를 것이다. ‘이 사회에 적응해야 해. 어떤 색으로 물들든 무조건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해.’ 너는 그 모든 환경에 적응하는 동시에 다른 색으로 물든 자신에게 적응하고, 다른 모습의 자신과 다른 인격의 자신을 부단히 받아들인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무감각해지고, 염치가 없어지고, 점차 사람의 양심과 이성이 사람의 생각, 욕망, 선택을 주도하고 제어하지 못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동시에 저마다 정도는 달라도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한다. 물론 아무리 열심히 추구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고생을 해도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지 못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최종 결과가 어떻든 사람이 얻는 것은 무엇이냐? 성공한 사람은 명예와 이익을 얻는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비록 명예와 이익을 잃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성공한 사람이 얻은 것과 같은 것으로, 다 사탄과 이 사악한 인류, 그리고 사회 전체의 메커니즘, 사회의 사악한 세력이 사람에게 초래한 여러 손상과 사람에게 주입한 각종 부정적인 사상이다. 왜 사람들이 생강은 여문 것이 맵다느니, 노회하다느니, 노련하다느니, 산전수전 다 겪어 봤다느니 하는 말을 자주 쓰겠느냐? 너는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한편 사회라는 타락의 온상, 분쇄기 속에서 적지 않은 것들을 ‘학습’한다. 육적인 본능 안에 없는 것을 ‘학습’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학습’에는 반드시 따옴표가 붙어야 한다. ‘학습’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사회가, 사탄이, 사악한 인류가 네게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위배되는 갖가지 생각을 잔뜩 주입해서 너를 점점 비양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살게 하고, 점점 몰염치하게 만들고, 정상적인 사람과 바른길을 걷는 사람을 점점 경멸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편, 또 하나 있는 최악의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네가 정상 인성, 양심과 이성을 가진 사람을 점점 경멸하게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양심을 팔고 도의를 저버린 자들의 비열한 행실을 선망하고 감탄하고, 그들의 비열한 행실과 악질적인 행위가 가져다준 물질적 풍요 혹은 경제적 수익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 맞느냐? (맞습니다.) 이것이 더 무서운 결과다.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사이에 사람의 면모가 점점 흉악해지고, 무시무시해지고, 사람의 양심과 이성이 점점 상실되고, 사람의 도덕관과 생존관, 그리고 사람의 행동이 점점 사악해지고, 추해지고, 비열해지고, 야비해지는 것이다.
취미와 관심사가 생기는 것에서 시작해 사람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사람이 걷는 길과 종사하는 모든 활동, 다시 말해, 사람의 전체적 생활 현황은 사회와 사악한 풍조에 휩쓸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사람은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탄에게 조종당하고, 유린당하고, 좌지우지되는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당연히 이는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사탄에게 더 깊이, 더 구체적으로 패괴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탄은 네게 일이 임할 때마다 자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인간의 존엄성, 인격, 도덕적 마지노선, 양심, 사람됨의 준칙 등 정상 인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이런 긍정적인 것들을 포기하라고 계속해서 주입한다. 사탄은 네가 이러한 것들을 점차 포기하게 하는 동시에 네 양심과 이성, 도덕적 마지노선, 그리고 얼마 없는 염치에 도전한다. 그런 다음 네가 사악한 풍조의 미혹과 유인 속에서, 사악한 풍조의 조종과 유린 속에서 계속 타협하게 하고, 계속되는 타협 과정에서 사탄이 네게 주입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사상 관점을 선택하게 하고, 사탄이 네게 주입한 사상 관점 및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법을 몸소 체험하고 힘써 실천하게 한다. 너는 몹시 내키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것을 수행하며, 한편으로는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발적으로, 영합하는 태도로 이 모든 것을 수행한다. 요컨대,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은 지극히 수동적이지만, 또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하자면 적극적으로 사탄의 조종과 패괴에 영합한다. 사람은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동시에 줄곧 사회의 사악한 풍조라는 타락의 온상에서 살아가며, 사악한 풍조에 휩쓸린 채 살아간다. 또한, 사람은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모순되고 복잡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모순되고도 복잡한 현실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이 추구하는 이상과 바람, 인생 목표는 점점 사람에게 가까워지지만, 정작 본인은 갈수록 사람다운 모습을 잃고 양심이 무감각해지며 이성이 사라져 간다. 하지만 사람은 마음 깊이 자기는 이상과 바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 이상과 바람이 곧 자기 신앙이고, 마음속에 신앙이 있으면 곧 신념이 있는 것이요, 사람은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는 신념이 있으니 정상적인 사람이고 지금까지의 생존 방식과 생존 법칙에 따라 계속 추구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좋은 효과가 나고 인생의 이상 및 목표에 점점 가까워질 수 있는 한, 이를 위해 어떠한 대가를 치르든 가치가 있으며 무언가를 잃더라도 아깝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은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모순적 심리 상태에서 계속해서 사탄의 조종과 사탄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지속적으로 사탄에게 지배당하고 우롱당한다. 심지어 자기가 이 사회에서, 이 사악한 풍조 속에서 패괴되었음을 뻔히 알면서 그 상황에서도 자기 이상을 실현하고자, 자기 인생 목표에 도달하고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계속 추구한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내내 포기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도 잘 버텼다는 사실을 다행스러워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내는 이런 태도와 사람이 걷는 길, 사람에게 일어나는 여러 변화를 통해 볼 때 사람이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것은 어떠한 길이냐? (멸망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이며 그 길을 갈수록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멸망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정한 이상과 바람과 이어지는 인생 목표, 그 목표 지점에는 사탄이 기다리고 있다. 그 인생 목표로 향하는 길에 내내 사람과 동행하고 함께하는 것은 진리도 아니고 하나님 말씀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사탄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사악한 풍조와 온갖 처세 철학입니다.) 그와 함께하는 것은 사탄이다. 사탄의 조종, 사탄의 패괴, 우롱과 거듭되는 유혹이다. 이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요, 멸망의 길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이상과 바람을 추구할 때 사람은 자기 이상과 바람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과 바람에 대한 추구를 동력과 기초로 삼아 명예와 이익을 손에 넣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질이고 실체이다. 그 길은 사람이 점점 더 명예와 이익, 세상의 사악한 풍조를 동경하게 한다. 그 길은 사람을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며, 더 타락시키고, 이성과 양심을 더 잃게 하고, 긍정적인 사물에서 멀어지게 할 따름이다. 동시에 사람을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훨씬 실질적인 생활 방식과 생존 목표에서 더 멀어지게 한다. 그 길은 사람의 패괴 성품이 점점 더 깊게 뿌리내리게 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할 뿐이다. 당연히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하기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의 본질을 깨달은 뒤에 우리가 교제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어떻게 내려놓을지를 교제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앞서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것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고 멸망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교제했다. 그렇다면 사람은 마땅히 이러한 삶의 방식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생존 방식을 내려놓고 바꿔야 한다. 이는 올바른 생존 방식이 아니며, 올바른 인생길도 아니다. 올바른 것이 아닌 이상 이러한 생존 방식은 내려놓고 바꿔야 하며, 맞는 방식으로 생존하고 생활해야 한다. 맞는 방식으로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 그리고 추구와 이상, 바람을 대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재간과 은사, 취미와 관심사는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확립시키는 동시에 사람이 추구 목표를 갖게 한다. 이 추구 목표는 맞지 않고, 사람을 돌아오지 못할 길로 이끌며,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지게 해서 결국에는 멸망에 빠뜨린다. 그것이 맞는 추구 목표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맞겠느냐? 우선 사람에게 취미와 관심사가 있는 것이 맞는 일인지 살펴보겠다. 즉,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를 부정적인 사물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기에 당연히 부정적인 사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죄해서도 안 되고 비판해서도 안 된다. 사람에게 어떤 방면의 취미와 관심사가 있고 특기가 있는 것은 정상 인성의 일부분이며,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춤추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래하기, 그림 그리기, 연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기계, 경제, 공학, 의학, 식물 재배, 항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특정 운동을 좋아하고 또 누군가는 지리 연구나 지질 연구를 좋아하며, 항공 연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보다 더 사람들에게 생소한 분야의 연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어느 방면의 취미와 관심사든, 그것은 모두 인성의 일부분이자 정상 인성 생활의 일부분이다. 부정적인 사물로 추하게 묘사되어서도 안 되고, 비판받아서도 안 되며, 금지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즉, 네게 어떠한 관심사와 취미가 있든 모두 정당하다. 모든 취미와 관심사가 정당하므로 그것을 존재하게 두어야 한다면, 그것과 관련된 이상과 바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예를 들어, 음악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치자. “저는 음악가, 지휘자가 되고 싶어요.” 그러고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서 음악만 공부하고 깊이 파고든다. 자기 인생 목표와 인생 방향을 음악가라는 위치로 확정한다. 이것이 맞는 일이냐? (틀렸습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면 자기 취미와 관심사로 말미암아 정해진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는 데에 일생을 바치더라도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네게 그 방면의 취미와 관심사가 생긴 뒤에 그것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하고, 일생을 대가로 네 취미와 관심사로 말미암아 정해진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려 한다면 그것이 바람직한 길이냐? 장려할 만하겠느냐? (장려할 만한 길이 못 됩니다.) 장려할 만한지 아닌지는 일단 지금 이야기하지 않겠다. 무슨 일이든 진지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는데, 어떻게 따져 봐야 이 문제가 맞는지 틀렸는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정한 추구, 이상, 바람이 하나님의 가르침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관계가 있는지 살펴봐야 하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있는지, 너의 사명 및 본분과 관계가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또, 그것이 네가 자기 사명을 더 잘 완수하고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지, 혹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자신감을 더 주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 갖는 너의 권리다. 하지만 그것이 네가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면서, 그 길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구원받는 길에 들어서게 해 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들어서게 해 줄 수 있겠느냐? 최종적으로 네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경배하게 되는 그런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단언하건대 그럴 수 없다. 그럴 수가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자기 취미와 관심사로 말미암아, 더 나아가서는 자기 특기와 은사로 말미암아 정해졌다고 할 수 있는 이상과 바람은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있어야 할 것이냐, 없어야 할 것이냐? (부정적인 것이며, 없어야 할 것입니다.) 없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진 이상과 바람의 성질이 어떻게 된 것이냐? 긍정적인 사물이 되었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사물이 되었느냐? 네게 마땅히 있어야 할 권리가 되었느냐, 아니면 네게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느냐? (부정적인 것,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습니다.) 네게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다. “그 말은 곧 제 권리를 박탈하는 거잖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네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응당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길인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네 권리를 박탈하지 않는다. 선택권은 네게 있다. 너는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의 성질이 어떠하고 이를 어떻게 규정할지에 대하여 우리는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진리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사람의 이상과 바람은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다. 물론 더 확실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네가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고자 한다면,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한다면, 너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이상과 바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네가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기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 번 더 바꿔 말해서,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고자 한다면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여 명예와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을 달성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네.) 모두 확실해졌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고 구원에 이르고 싶다면, 네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길을 포기해야 한다. 즉,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길을 포기해야 하며, 그러한 이상과 바람을 내려놓아야 한다. 네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것을 네 인생 목표로 선택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 추구와 이상, 바람을 전부 실현하지 못하고 다 내려놓았으면 제 취미와 관심사는 어떻게 하나요?” 그것은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네게 자신만의 취미와 관심사가 있더라도 그것이 너의 정상적인 추구를 교란하지 않으며 네가 본분을 이행하고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네 인생 목표와 네가 걷는 길에 관련되지만 않는다면, 그 취미와 관심사는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괜찮다. 물론 이렇게 이해해도 된다. 그 취미와 관심사가 네 인성의 일부분이라면 하나님이 네게 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의 외모, 가정, 배경, 생존 환경 등등 여러 방면의 요소는 전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가진 모종의 취미와 관심사 역시 하나님이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음은 확실하다. 예컨대 언어에 능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림 그리기, 음악, 소리 구분, 색깔 구분 등등에 능한 사람들도 있다. 그것이 특기든 아니면 네 취미와 관심사든 모두 인성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왜 사람에게 취미와 관심사를 주었겠느냐? 네 인간적인 생활을 더 풍부하면서도 다채롭게 하고, 네가 올바른 인생길을 걷는 데에 지장을 받지 않으면서도 즐길 거리와 여가 활동이 함께하는 생활을 영위하게 하고, 네 생활이 너무 무미건조하거나 단조롭거나 따분하지 않게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예배에서 찬양할 때 피아노 반주나 기타 반주를 해 줄 수 있다. 만약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면 다들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반대로 반주자가 있으면 반주 없이 노래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효과가 나온다. 다들 즐거워하는 동시에 견문이 넓어지고, 경험이 풍부해지고, 생활이 조금 더 다채로워진다. 삶이 더 행복해지는 느낌을 받고, 사람의 기분이 더 유쾌해진다. 이는 정상 인성에도 유익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걷는 길에도 유익하다. 또 다른 예로 네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고 치자. 때로 형제자매들의 생활이 단조롭다 싶으면 너는 익살맞은 그림을 그린다. 몇몇 사람이 소극적인 상태에 빠졌을 때의 표정과 얼굴, 그리고 그들이 하는 소극적인 말을 우스꽝스럽고 익살맞은 만화로 그리고 정리해서 소책자를 만든 다음 모두에게 보여 주고 그 소극적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사람이 보고서 “어어, 이거 나 아니야?” 하더니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즐거워진 그는 소극적인 상태에서 빠져나온다. 이러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크게 힘을 들이지도 않고서 상대를 아주 간단히 소극적인 상태에서 빠져나오게 한 것이다. 여가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고,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연기에 관해 토론하고, 온갖 소극적인 사람, 교만한 사람, 적그리스도의 갖가지 독선적인 모습 등등을 연기하면서 사람들이 분별력을 키우고 견문을 넓히게 한다면, 이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 이를 왜 활용하지 않느냐? 이러한 취미와 관심사는 사람에게 이롭다. 하지만 네게 취미와 관심사로 말미암아 이상과 바람이 생긴다면, 그것의 역할은 너를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이끄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게 있어 그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네가 취미와 관심사를 생활 속에서 활용하여 네 인성의 견문을 넓히고, 생활을 더욱 풍부하고 다채롭게 하고, 너에게 재미와 명랑함을 더하고, 한층 더 윤택하고, 해방되고, 자유롭게 산다면, 네 취미와 관심사가 긍정적인 작용을 하여 여러 사람을 돕고 너에게도 도움이 되는 동시에 네가 본분을 이행하고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당연히 어느 정도는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보탬이 된다. 네 기분이 안 좋을 때나 의기소침할 때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한다면, 경쾌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곡을 연주함으로써 기분이 풀리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기도할 수 있게 되고, 소극적인 상태에서 빠져나오고, 원망이 사라지고, 본분을 팽개치지 않게 된다. 이와 동시에 자기 약점과 결함을 발견하여 자기가 너무 나약하고 그 어떤 담금질과 타격도 견디어 내지 못함을 알게 된다. 악기 연주 한 번으로 기분이 풀리면, 이는 곧 삶의 요령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취미와 관심사가 긍정적인 작용을 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취미와 관심사는 일종의 도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잘 쓰기만 하면 네 기분을 바꾸어 주고, 네가 더 정상적이고 이성적으로 살게 한다. 어느 정도는 네가 진리 실제에 더 빠르게, 혹은 더 잘 진입할 수 있도록 해 주고, 본분을 이행할 때 네게 보조 도구가 되어 주기도 한다. 물론, 인성이 나쁘고, 악하고, 항상 야심이 있고, 적그리스도 성품이 있거나 그 자체로 적그리스도인 사람이 취미와 관심사를 가지면 문제가 된다. 그는 취미와 관심사를 밑천으로 삼아 자기가 비범하다고 자부한다. 이는 틀림없이 악을 행하는 그의 기고만장한 기세를 더 키운다. 그러므로 취미와 관심사 자체는 나쁘거나 부정적인 사물이 아니다. 좋은 사람, 정상적인 사람은 그것으로 긍정적인 일을 하고, 나쁜 사람, 악한 사람, 부정적인 사람은 그것으로 못되고 악한 짓을 한다. 그러므로 취미와 관심사는 너를 더 좋게 만들 수도 있고 더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을 것인가 하는 주제로 돌아가자. 취미와 관심사의 본질을 알았으면, 개인의 취미와 관심사를 색안경을 끼고 봐서는 안 된다. 더욱이 어떠한 취미와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배척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이다. 취미와 관심사는 정상 인성의 일부분이다. 사람은 그것을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네 취미와 관심사가 다른 사람의 생활에 지장을 주거나, 남에게 반감을 유발하거나, 혹은 네가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지키기 위해 남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교란한다면, 이는 부적절한 일이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너의 취미와 관심사는 정당하다. 사람이 올바르게 그것을 대하고, 합리적으로 사용하고 발휘하기를 바란다. 물론, 취미와 관심사를 가장 적절하고 올바르게 사용하고 발휘하게 해야 한다. 즉, 네 취미와 관심사를 썩히지 말고, 네가 하는 일과 네가 이행하는 본분을 위해 효과를 최대치로, 극치까지 발휘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제 취미와 관심사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아주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저는 그 방면의 지식이 아직 충분하거나 풍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조금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요. 그 방면의 지식을 더 잘, 더 체계적으로 배워서 본분에 적용했으면 하는데, 그래도 될까요?” 그래도 된다. 하나님 집에서는 많이 배우라고 거듭 너희를 격려한다. 지식은 일종의 도구이다. 사람의 사상을 타락시키고 좀먹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은 지식이라면 배우고 깊이 파고들어도 괜찮다. 그것을 훌륭하고 긍정적인 도구로 삼아 본분 이행에 적용하여 힘쓰게 하고 효용을 발휘하게 하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하면 적절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물론 이러한 실행법은 취미와 관심사를 올바르게 대하는 방식인 동시에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올바르게 내려놓는 방식이기도 하다. 네가 취미와 관심사를 이용해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고, 개인의 야심과 욕망을 채우려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취미와 관심사를 올바르게 이용하고 효용을 발휘하게 한다면, 이는 정당하며 정확한 실행법이다. 물론 올바르고 긍정적인 실행법이기도 하며, 또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는 구체적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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