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7) 제 2 부

방금 우리는 사람의 이상이 이상주의자의 이상과 현실주의자의 이상, 이렇게 두 종류로 나뉜다고 이야기했다. 일단 이상주의자의 이상에 대해 말하겠다. 현실주의자의 이상은 분별이 쉬울 테지만, 이상주의자의 이상은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고, 현실 생활과 비교적 동떨어져 있으며, 사람의 생존에 직결되는, 먹고사는 실제적인 일과도 거리가 비교적 멀다. 또, 구체적인 구상은 있어도 구체적인 지향점은 없다. 이러한 이상과 바람은 일종의 환상이며, 비교적 공허하고, 인성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은 상당히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어떤 것들은 정신 분열의 결과로 생겨난 이상과 바람이다. 이상주의자의 이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이상주의라는 말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는 공상이자 환상이며, 현실 생활에서 먹고사는 실제적인 일과 무관하다. 예를 들자면, 시인이 되고 시선(詩仙)이 되어 세상을 방랑하거나 검객 혹은 협객이 되어 마찬가지로 세상을 방랑한다든지, 결혼하지도 아이를 낳지도 않고, 생활 속 잡다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먹고사는 문제로 고뇌하지 않고, 평생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세상을 오가면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고 싶어 하고, 현실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주의자의 이상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희도 이런 생각을 하느냐? (안 합니다.) 예전 중국의 어느 유명한 시인은 걸핏하면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시를 썼다. 그런 사람은 이상주의자이냐 현실주의자이냐?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들이 제창하는 사상이 바로 이상주의자의 환상이요, 공상이다. 이상주의자는 항상 유유자적하고, 언제나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 인간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인류가 얼마나 평화로운지,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화목하게 지내는지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다. 그들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과 동떨어져 있으며, 이러한 현실적 문제와 괴리되어 있다. 그 상태로 혼자서 실제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선경(仙境) 또는 공간을 상상해 내고, 자기는 그 공간 안에 존재하는 생물이며 그곳에서 생활한다고 상상한다. 이것이 바로 이상주의자의 이상 아니겠느냐? 옛날 시 중에 “바람 타고 돌아가고 싶으나”라는 구절이 있다. 그 시의 제목이 무엇이냐? (<수조가두>입니다.) 원문에 뭐라고 되어 있는지 읽어 보아라. (“바람 타고 돌아가고 싶으나 옥으로 쌓아 올린 누각 높은 곳은 추위를 견디기 어려울까 두렵네. 일어나 춤추니 맑은 그림자 나를 따르네. 어찌 인간 세상에 있는 것만 하랴.”) “일어나 춤추니 맑은 그림자 나를 따르네. 어찌 인간 세상에 있는 것만 하랴.”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이상을 이루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한 이상주의자의 억압감과 울분의 정서 아니겠느냐? 그러한 억압감 속에서 써낸 시가 아니겠느냐? 이것의 핵심이 무엇이냐? 어느 구절에 그가 당시에 처했던 환경과 배경이 드러나 있느냐? “높은 곳은 추위를 견디기 어렵다.”라는 구절이 아니냐? (맞습니다.) 관료 사회가 어둡고, 사악하고, 더러운 곳임을 폭로하는 구절이다. 그는 마치 신선처럼 그러한 환경을, 그러한 장소를 떠나고 싶어 한다. 그러면 관직을 받지 않으면 그만 아니겠느냐? 그러면서도 환경을 바꾸고 싶어 한다는 말이냐? 그는 환경에 불만이 있다. 이상적인 생활 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억압감을 느낀다. 이것이 이상주의자의 이상이다. 이상주의자의 이상은 대부분 공상에 가까우며 비현실적이고 구체적이지 않다. 현실 생활과 동떨어져 있어 흡사 자기만 물질세계 밖의 또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다. 혼자만 하나의 독립된, 자아의 공간에 살며 몽상에 빠져 현실과 괴리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 살면서 고대 사람과 같이 옷을 입으려 하고, 고대 사람과 같이 머리 모양을 꾸미려 하고, 고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한다. ‘아아, 이렇게 살면 정말 좋겠다! 신선처럼 유유자적하잖아. 육적인 번뇌도 안 느끼고, 현실 생활 속의 갖가지 어려움도 안 느끼고. 압박도, 착취도, 번뇌도 없는 생활 환경이야. 사람과 사람이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 돕고 화목하게 지내지. 이 얼마나 아름답고 동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상적 생활 환경인가!’ 이방인 중 일부는 이러한 것들을 추구한다. 보아라, 어떤 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짓거나 이와 비슷한 공연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상주의자가 몽상하는 또 다른 세계를 더욱더 동경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공연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점점 더 기분이 가라앉고, 이상적 세계를 향한 동경심과 미련이 점점 더 커진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느냐? 그런 노래를 오랫동안 부른 누군가는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인간 세상의 온정을 느낄 수도 없다고, 아무래도 역시 자기 이상 속 상상의 공간이 최고라고 느낀다. 그래서 세상이 싫어지고, 인간 세상에서 생활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자기만의 방법으로 이상적 세계로 돌아가겠다고 결연히 결심한 뒤 누군가는 음독을 하고, 누군가는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누군가는 스타킹으로 목을 매고, 누군가는 출가해 수행한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사실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았어도 그렇게 극단적인 수법과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극단적인 방식으로 어려움을 해결하고, 어려움에서 벗어나 자기 이상 속 목적을 실현하려고 한다. 이것이 이방인 중 일부 이상주의자와 그들이 가진 문제다.

그렇다면 하나님 집, 교회에는 이와 비슷한 이상을 가진 사람이 없느냐? 분명히 있다. 너희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니 내가 알려 주겠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있을 때 이방인 중의 이상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평화롭고, 화목하고, 평온하고, 모두가 평등한 이상적 사회를 동경했다. 예를 들면, 일부 시인 혹은 작가의 문장력으로 탄생한 무릉도원 같은 곳 말이다. 물론, 그보다 많은 것은 사람의 이상 세계에 존재하는 공간 혹은 생활 방식 및 생활 환경이다. 그들은 이러한 필요와 이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자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신앙을 찾는다. 찾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꽤 괜찮은 길이고 좋은 신앙적 선택임을 깨닫는다. 이러한 이상을 품고 하나님 집에 와서는 이곳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정, 배려, 보살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큰 사랑과 보호를 체험하는 일이다. 그들은 자기 이상을 가지고 하나님 집에 온다. 본분을 이행하든 이행하지 않든, 아무튼 그들의 이상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종일관 이상을 가지고 있고, 품고 있다. 그들의 이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음 내용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 집에 와서 이곳이 사람에게 온정을 느끼게 해 주는 곳이기를, 온정과 행복, 그리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곳이기를 바란다. 또, 하나님 집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툼, 시기, 차별이 없기를, 사람과 사람이 서로 괴롭히거나 속이거나 모해하거나 배척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상주의자들이 이상으로 삼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하다. 마치 기계가 다른 기계를 대하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생기도 없고 그 어떤 생각도 없기를 바란다. 만나면 기계적으로 미소 짓고, 굽신대며 예의를 차리고, 우호를 표시하고, 그 어떤 적의도 없음을 표하길 바란다.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큰 사랑이 있고, 서로 배려하고, 보살피고, 돕고, 이해하고, 포용하고, 더 나아가 서로 감싸고, 서로 비호하는 등이 바로 이상주의자가 이상으로 삼고 몽상하는 것들이다. 예컨대, 이상주의자 부류가 하나님 집에 왔을 때 품고 있는 이상과 바람은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들의 존중과 보살핌, 그리고 세심한 배려와 우대를 받는 것이다. 존중 외에 존칭도 듣고 싶어 한다. 형제를 만나면 모모 할아버지, 모모 큰아버지, 모모 아저씨로 불리고, 자매를 만나면 모모 할머니, 모모 이모, 모모 자매님으로 불리기를 바라는데, 결론적으로 항상 호칭이 붙기를 희망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겉보기에 대단히 잘 어우러지고, 화목하고, 예의를 차리고, 겉으로든 마음속으로든 사람에게 악의가 없고, 좋지 않은 것 또는 사악한 것이 없고, 누군가가 잘못을 하거나 누군가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모두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기를 희망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깊은 배려와 포용을 베풀어 주기를 바란다. 특히 약자들이, 성실하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비교적 쉽게 괴롭힘 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 집에 와서는 더욱더 세심한 관심과 우대,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 집에 와서는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모두 좋기를 바란다. 다들 하나님을 믿으니 한 가족이자 친형제자매로, 누가 누구를 괴롭히는 현상이 있어서는 안 되고, 사람을 괴롭히거나 모해하는 현상이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다투거나 화낼 것이 아니라 차분하고 온화하게 대처해야 하며, 타인에게 지대한 인내와 도움을 베풀고, 모든 부분에서 타인을 편안하게 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가장 좋고 선량한 면을 남들에게 보여 줘야 하며, 악하고 좋지 않은 면은 자기 혼자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마치 기계가 기계를 대하듯 서로를 대해야 하고, 타인에 대해 좋지 않은 견해 또는 생각을 갖거나 더 나아가 좋지 않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좋은 사람은 일생이 편안하다.”라는 옛말이 있듯이, 타인에게 선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 집이고 진정한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주의자들의 이상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 집에서는 원칙을 이야기하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돕고 붙들어 줄 것을 이야기하고, 진리 원칙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각 부류의 사람을 대하라고 하고, 심지어는 ‘사려 깊지 못한’ 요구들을 제기한다. 바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분별하고 각각 다르게 대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치고 사역지침이나 원칙을 어기는 사람이 보이면 나서서 폭로하고 책망해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켜야 하고, 정에 휘둘려 두둔하거나 감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 집에서는 각급 리더를 두고 한 측면으로는 그들에게 일상적인 교회 사역을 잘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다른 한 측면으로는 각 사역 항목을 엄격하게 감독, 관리, 체크하게 하고, 이와 동시에 여러 부류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교회 생활을 수시로 알아보고, 파악하고,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또, 그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와 동향이 어떤지 관찰하면서 수시로 합리적이고 적절하게 조정을 진행하도록 한다. 물론 리더 일꾼들에게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이나 원칙을 어겨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엄하게 책망 훈계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사안이 가벼우면 경고를 주고, 심각하면 적절한 처분을 내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하에 어떤 사람들은 정리되고, 출교되고, 제명된다.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 집에 와서 각종 본분을 이행하고 여러 사역에 종사하다 보면 거의 다들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온 형벌과 심판을 듣고, 보고, 체험하게 되며, 각급 리더의 책망 훈계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에게 임하는 각 방면의 환경과 여러 가지 일들은 이상주의자의 이상 속 하나님 집, 교회와 완전히 다르다. 더 나아가 그들의 예상을 아주 크게 벗어나서 그들은 그것 때문에 마음속으로 커다란 압박감을 느낀다. 한편으로 그들은 교회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현상, 혹은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과 원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이상 때문에, 또한 긍정적인 사물, 교회, 하나님 집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이해 때문에 마음 깊숙한 곳에 억압감이라는 정서가 생긴다. 그들은 잘못된 그들의 생각과 관점을 제때 바로잡지도 못하고 그들의 이상에 존재하는 문제를 제때 간파하거나 확실히 인식하지도 못하는 관계로, 억압감이 생기고 나면 뒤이어 수많은 관념이 따라서 생겨난다. 또 그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러한 관념을 진리로 해결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러한 관념이 그들의 사상 혹은 마음 깊은 곳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그들의 억압감을 내면에서 점점 더 크게 키우며 갈수록 심각해지게 만든다. 실제로 하나님, 하나님 집, 교회, 하나님을 믿는 사람, 크리스천은 이상주의자가 자기 이상 속에서 상상하는 선경이라든지, 천당이라든지, 무릉도원 등등과 거리가 멀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주의자의 마음속에는 계속해서 억압감이 쌓인다. 게다가 그것을 떨쳐 버릴 방법도 없다. 교회에 이러한 부류의 사람이 없느냐?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휴, 하나님 집에서 왜 항상 심판과 형벌 받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하나님 믿는 사람한테 왜 책망과 훈계가 임하는 거야? 아니,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사람을 출교시켜? 사랑이라고는 전혀 없네! ‘지상의 천당’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야? 교회에 어떻게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수 있어? 어떻게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억누르고 괴롭히는 현상이 벌어져? 교회에서, 하나님 집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폭로하고 해부할 수가 있어? 어떻게 의견 충돌이 일어나? 어떻게 서로 질투하고 다툴 수가 있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하나님 집에 왔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이 있고 서로 도울 줄 알아야 하는 거잖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 자기 상상에 따라 하나님 집을 바라보는 사람이 참 많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러한 상상과 논조가 객관적이겠느냐?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어느 부분이 객관적이지 않으냐? (인류는 너무 깊이 패괴되었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은 모두 패괴 성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함께 지내다 보면 반드시 패괴를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질투와 분쟁, 사람을 괴롭히거나 억압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상주의자들이 상상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교회 생활과 교회의 사역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서 진리 원칙에 근거해 사람을 책망하고 훈계하거나 조정하고 교체하고, 악인과 불신파를 제명하거나 출교시키는데 이것은 원칙에 부합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패괴 성품에 따라 일을 처리할 경우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할 수 있기에 교회에서 책망, 훈계, 교체, 정리와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비현실적이라서 이들의 생각을 이상주의자의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같이 현실적이지 않고 공허하며 상상한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으냐? 지금까지도 이들은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모른다. “하나님 믿으면 좋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좋은 일 하고 좋은 사람이 된다는 뜻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맞는 말이냐? (틀렸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맞는 말이냐? (틀렸습니다.) 선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선한 마음이 네가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냐? 네게 선한 마음이 있느냐?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이 사람의 처신 원칙이냐? 이는 그저 구호이고 도리이다. 그것은 공허한 것이다. 자기 이익과 관계가 없을 때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며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선한 마음을 가지겠어. 남을 괴롭히지도, 곤경에 빠뜨리지도, 속이지도 않고, 남에게서 이득을 챙기지도 않을 거야.’ 그러나 네 이익, 지위, 체면이 걸려 있을 때도 ‘선한 마음을 갖는다’는 말이 네게 구속력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 네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빈말일 뿐,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네 패괴 성품의 본질을 폭로할 수 있고, 네가 그러한 일을 하는 본질과 진상을 폭로하고 분석할 수 있으며, 네가 그러한 일을 하는 본질과 네가 드러내는 성품의 본질을 정의 내리고 정죄할 수 있다. 그런 다음 네게 적절한 길과 원칙을 제시하여 자신의 생존 방식을 바꾸고, 자신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바꾸도록 한다. 이러면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생존 방식을 바꾸게 되며, 패괴 성품이 해결된다. 선한 마음을 가지라고 권한다고 해서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진리만이 너의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다. 진리가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함에 있어 사람에게 구호, 도리 혹은 각종 제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처신 원칙과 준칙, 그리고 방향을 제시한다. 사람의 패괴 성품을 원칙, 준칙, 방향으로 대신하고 대체한다. 사람이 처신하는 원칙, 준칙, 방향이 바뀌고 올바르게 되면 마음속에 품고 있던 각종 치우친 생각과 잘못된 사상도 자연스레 바뀐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으면 사상도 따라서 바뀐다. 이는 선한 마음을 갖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의 근원에, 성품에, 본질에 모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면 사람이 드러내고 살아 내는 것이 모두 긍정적인 것이다. 사람이 처신하는 방향, 방식, 출발점이 다 바뀌고, 말하거나 행동할 때 항상 하나님 말씀을 근거와 준칙으로 삼고, 정상 인성으로 살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선한 마음을 갖는다’는 단순한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있겠느냐? 쓸모가 있겠느냐? 그 말은 그저 빈말이고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이상주의자는 하나님 집에, 교회에 온 뒤에도 자기 이상을 실현하지 못해 마음속으로 억압감을 느낀다. 관료 집단이나 사회에 깊이 발 담근 일부 이상주의자들이 자기 이상이 실현되지 않는다고, 원하는 바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종종 낙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관리가 되고 황제가 됐다고 기고만장해서는 안하무인으로 굴기도 한다. “큰 바람이 일어나니 구름이 날렸도다.”라는 시구에서처럼 말이다. 다음 구절은 무엇이냐? (“온 세상에 위엄을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도다.”입니다.) 보아라,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 정상 인성의 이성이 있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다. 이러한 이상주의자들은 언제나 큰소리를 친다. 큰소리를 친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어떤 일을 하든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이 현실인지 모르며, 항상 감정적이다. 이들은 하나님 집에 와서 진리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는 의의가 대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진리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의 가치는 더더욱 깨닫지 못한다. 그들이 줄곧 추구하는 것은 이상주의자의 이상이다. 그들은 언젠가 하나님 집이 자기 이상 속의 기대처럼 되기를 꿈꾼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깍듯이 대하고, 조화롭게 공존하고, 그저 좋게 좋게 지내고, 서로 보살피고, 아끼고, 돕고, 고맙다고 인사하기를 꿈꾸는 것이다. 또한 서로 좋은 말, 축복의 말을 해 주고, 듣기 싫은 말이나 상처를 주는 말 또는 사람의 패괴 본질을 폭로하는 말은 일절 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견 충돌이 없고, 서로 폭로하거나 책망하지 않기를 꿈꾸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진리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하나님을 믿는 의의를 깨닫지 못하며, 하나님의 요구가 도대체 무엇이고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지 깨닫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언젠가 하나님 집에서 그들이 바라던 이상적인 대우를 누릴 수 있기를 더욱 바란다.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 집에서는 자기 이상을 실현할 여지가 없고 기회도 없다고 느낀다. 이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억압감을 느끼는 동시에 수시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한다. “하나님 믿는 거 재미없고 공허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처님 믿는 사람들처럼 서로 돕고, 아끼고, 존중하지 않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진리며 원칙을 늘 얘기하는 데다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함께 지내면서도 항상 분별력을 얘기하고, 늘 폭로하고 질책해. 심지어는 책망과 훈계도 자주 임하지. 이런 생활은 내가 원하던 게 아니야.” 자기가 품은 이상이 있고 천당에 갈 한 가닥 희망이 있기에 버티는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이상주의자들은 언제든지 교회를 떠나 다른 길을 찾을 사람들이다. 말해 보아라. 이러한 부류가 하나님 집의 사람이냐? 그들이 하나님 집에 머무는 것이 적절하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출가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불당에 가도 되고 도관에 가도 될 것이다. 그들은 사회에서는 억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오히려 하나님 집에서는 억압감을 심하게 느낀다. 이상을 실현할 기회가 없고 자기 이상을 실현할 여지가 없다고 느낀다. 그러니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연기가 자욱하고 향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 어울린다. 그곳은 조용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너를 가르치지도 않는다. 너의 갖가지 잘못된 생각과 관점을 폭로하지도 않고 네 패괴 성품을 폭로하거나 책망하지도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고 서로 존중한다. 하루에 말을 몇 마디 하지도 않으며 그 어떤 의견 충돌도 발생하지 않는다. 너를 감독하는 사람도 없고 단속하는 사람도 없다. 거기서 자급자족하며 살면 낯선 사람은 일 년에 몇 명 보지도 못할 테고 생활상의 문제로 근심할 필요도 없다. 육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작은 그릇이나 바리때를 하나 들고 거리로 나가서 시주를 받고 먹을 것을 구하면 그만이요,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 그곳에는 인간 세상의 번뇌가 없다. 사람과 사람이 그저 좋게 좋게 지내고, 누구도 타인과 언쟁을 벌이지 않고, 불만이 있어도 마음속에만 담아 둔다. 생활이 아주 편안하니, 그야말로 극락세계라고 하겠다. 그곳은 이상주의자에게 이상적인 곳이고, 그곳이야말로 이상주의자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곳이다. 이상주의자는 자기가 상상하는 곳에서 살아야지 교회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 그의 입장에서 교회는 일이 너무 많은 곳이다.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예배를 드려야 하고, 각종 원칙을 배워야 하고, 항상 진리를 교제하며, 자신의 패괴 성품에 대한 인식을 교제해야 한다. 패괴 성품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서 원칙을 어긴 사람에게는 책망과 훈계가 임한다. 심지어 항상 책망과 훈계가 임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큰 억압감을 느끼며, 즐겁지 못하다. 교회는 그에게 이상적인 환경이 아니다. 그는 여기서 세월을 흘려보내거나 청춘을 낭비하느니 하루빨리 자기 마음에 드는 곳에 가서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시간을 허비하고 항상 억압감을 느끼며 불편하고 불행하고 기분 나쁘게 지낼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이상주의자의 이상이 대표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이러한 부류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아무리 많은 진리를 교제해도 귀 기울이지 않고 종일 터무니없는 생각만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들은 전부 비현실적이고 막연해 정상 인성과 거리가 한참 멀다. 종일 그런 생각만 하니 정상인과 소통이 안 된다. 정상인은 그들의 세계에 있는 것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어떠한 생각과 관점이 있든 결론적으로 그들의 이상은 매우 공허하다. 이상이 매우 공허함으로 그들의 생각과 관점도 당연히 매우 공허하다. 그런 것은 분석할 가치도, 깊이 파헤칠 가치도 없다. 기왕 공허하니 앞으로도 계속 공허하게 내버려 두도록 하자. 그들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가도 되고, 하나님 집에서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 집에 머무르길 원할 경우 본분을 이행하든 봉사하든 그저 교란하거나 악을 행하지만 않으면 우리는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줄 것이다. 요컨대 형제자매에게, 하나님 집에, 교회에 우호적이기만 하다면 그러한 부류를 굳이 처리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먼저 떠나겠다고 하는 경우는 예외다. 그러면 우리는 쌍수를 들고 반길 것이다. 어떠하냐? (좋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기로 하겠다.

이상주의자의 이상은 비교적 공허하나, 현실주의자의 이상은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더 현실적이고 사람의 생활과 밀접하며 사람의 현실적 환경과 밀착해 있다. 당연히 사람의 생활 혹은 생존 속 문제와 더 구체적으로 연관되며, 사람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는 문제와 연관된다. 사람이 자리를 잡는 일은 그 사람이 배운 손재주, 기술, 수완, 그 사람이 받은 각종 교육, 그리고 그 사람의 은사, 재간, 특기와 연관이 있다. 현실주의자의 이상은 이러한 것들에 관계된다. 현실주의자의 이상이 더 나은 생활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자신의 정신적 만족을 위한 것이든,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상은 사람의 현실 생활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지도자로서의 재능이 약간 있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좋아한다. 연설과 언어 표현에 능하거나 사람을 평가하고 쓰는 데에 능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을 다루는 데에 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 부류의 사람들은 한자리하거나 지도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인사 업무를 맡고 싶어 한다. 자기가 그 방면에 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들은 집단 내에서 지도자나 조직자가 되어 업무와 인사를 주관하고 싶어 하며, 더 나아가 한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싶어 한다. 이 부류의 이상은 주로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그들이 사회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하나님 집에 와서는 자기가 종교 단체에 왔다고, 색다른 종교 단체에 왔다고 여긴다. 교회에 온 이후에도 그들의 이상은 변함이 없다. 그들은 생존 환경 혹은 생존 배경이 변했다고 해서 이상을 바꾸지 않는다. 그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상을 갖고 하나님 집에 온다. 그들이 되고 싶은 것은 하나님 집의 각급 리더 일꾼이다. 예를 들면, 교회 리더나 어떠한 급의 책임자, 또는 팀장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의 이상은 이러하다. 그러나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는 리더 일꾼을 뽑는 원칙과 규정이 있고, 그들과 같은 부류는 리더 일꾼의 조건을 갖추지 못해 어쩌다가 어떤 급의 리더 선출에 참가하더라도 결국은 자기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다. 소원대로 리더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리더가 되지 못할수록, 자기가 하고 싶은 이상 속의 일을 할 수가 없을수록,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상이 점점 더 격렬하게 꿈틀거린다. 점점 더 리더가 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극력 온갖 시도를 한다.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혹은 상급 리더 앞에서 극력 자신을 드러낸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출중해 보이게 하고, 자기 특기를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 더 나아가 본심과 다르게 형제자매의 비위를 맞추고,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서 리더 일꾼에게 요구하는 것에 맞춰 어떠한 일을 하거나 어떠한 말을 하며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보여 준다. 그러나 한동안 노력한 뒤에도 리더가 되려는 자기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면, 어떤 이들은 실망하고, 낙담하고, 자아를 잃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에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에, 이전부터 있던 억압의 부정적 정서가 오히려 더 심해진다. 쭉 한자리하고 싶었고 지도자가 되고 싶었던 이상은 하나님을 믿기 전부터 이미 마음속에 싹튼 것인데, 이를 실현하지 못해 가슴 밑바닥에 항상 무형의 억압감이 존재했다. 하나님 집에 와서도 여전히 그런 이상을 실현할 수가 없자 억압감이 가슴 속에서 나날이 커지고 더 심각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는 자신이 지도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해 불평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낙담하고 억압감을 느낀다. 이상이 줄곧 실현되지 않아 그들은 속으로 무척 억울해한다. 재능을 발휘할 곳이 없기에 인생이나 앞으로의 길에 대해 낙심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생활에서 항상 억압감을 느낀 채로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심지어 온갖 노력과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리더가 되지 못하고 자기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정서를 분출하고, 갖가지 방식으로 자기 억압감을 발산하거나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한자리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채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 일부는 소원대로 교회에서 리더가 된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 집의 안배에 따라 리더로서의 본분을 이행할 수 없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집과 형제자매의 요구 및 감독하에 리더 역할을 하게 된다. 자기 이상이 실현됐는데도, 자기가 이상 속에서 하기를 원했던 일을 실행에 옮기면서도, 그들은 계속 억압감을 느낀다. 그것은 그들이 개인적 이상의 실현을 바탕으로 리더를 하고, 형식상 혹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 집에서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것 같아도 그들의 이상은 그 정도로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포부, 이상, 소망, 시야는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 그런 그들의 손발과 생각, 그리고 그들의 계획과 타산이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과 하나님의 요구에 얽매이고 통제를 받는 까닭에 그들은 리더가 된 이후에도 계속 억압감을 느낀다. 그들에게 이러한 문제가 생긴 원인이 무엇이냐? 리더가 되어서도 자기 이상을 실현하려 하고 이상 속에서 다짐한 것을 실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집에서, 교회에서 리더로 활동하면서는 그들의 이상과 바람을 실현할 수 없어 그들은 마음이 복잡하고 갈등이 심하다. 이러한 갈등, 자기 이상,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탓에, 그들은 종종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해방받지 못하고 억압감을 느낀다. 이러한 이들이 한 부류를 이룬다. 하나님 집의 이러한 이상주의자 중에는 자기 이상을 위해 분투하지만 여전히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 이상을 위해 분투하여 이상을 실현했으나 여전히 억압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에 속하든 그들은 하나님 집에서도 여전히 자기 이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자기 이상을 계속 추구하는 동시에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글을 쓰는 데에 재능이 있고 언어 표현력과 문학적 소질이 있다. 그들은 문학적 소질을 이용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동시에 자신의 문학적 소질을 과시해 자기 재간과 가치를, 자기가 하나님 집에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한다. 그들의 이상은 훌륭하며 합격점에 이른 작가나 문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 와서 문서 방면의 본분을 이행하게 되면서 그들은 자기 재능을 보여 줄 곳을 찾았다고 느끼며, 자기 특기와 재능을 한껏 발휘해 작가나 문인이 되겠다는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비록 본분을 이행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자기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행하는 본분 중 80퍼센트에서 90퍼센트는 자기 이상에 기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본분을 이행하는 원동력은 이상을 추구하고 간절히 바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본분 이행에 불순물이 많아 진리 원칙이나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에 따라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르기가 무척 어렵다. 그들은 단순히 본분을 잘 이행하려고 하나님 집에 온 것이 아니라 본분 이행을 기회로 삼아 자기 재주를 펼치기를 원하고, 재주를 펼쳐 자기 이상을 실현하고 자기 가치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합격한 본분 이행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그들의 이상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는 사람의 선호와 각종 사람, 일, 사물에 대한 사람의 생각과 관점이라는 불순물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특정 방면의 업무 기술을 잘 알고, 특정 방면에 재능이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 기술을 잘 아는 사람이 있다. 그는 컴퓨터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한다. 안경을 쓰고, 전문가다운 옷을 입고,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보기 힘든, 혹은 아주 독특한 컴퓨터를 가지고 다니면서 어디서나 자리에 앉으면 전문적으로 컴퓨터를 켜고, 전문적으로 인터넷 사이트의 갖가지 정보를 살펴보며, 전문적으로 컴퓨터상의 각종 문제를 처리한다. 하여간 그들은 전문가의 시각, 전문가의 말과 행동을, 전문가의 풍모를 보일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이를 표방한다. 스스로 전문가가 되고자, 컴퓨터 공학 업계 내의 인사가 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이 하나님 집에 와서 마침내 컴퓨터 기술 방면의 일을 하게 되고 자기 이상을 실현하게 된다. 그들은 쉼 없이 기술을 배우고 업무 수준을 높인다. 그런 다음 열심히 이런저런 문제를 발견하고 열심히 해결한다. 목적은 업계의 현황을 따라잡는 것이고, 현재 해당 업계에서 제창하고 발표하는 각종 새로운 정보를 따라잡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는 특정 방면의 업무 기술에 아주 큰 흥미를 느끼며 잘 이해해 전문적이라고, 숙련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상은 전문가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 집에서 자신을 중용해 주고, 우러러보고, 자신에게 의지하기를 바란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현재 이 시기에, 대부분 자기 특기를 발휘하고 있고 자기 이상을 실현했다. 그러나 자기 이상을 실현하는 동시에, 자기가 하는 일이 도대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이상을 추구하는 것인지 그들이 생각해 보았겠느냐? 잘 모르지 않겠느냐?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종사하는 일은 특수한 일이며, 복잡하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고작 그들이 알고 있는 약간의 업무 기술로는 그 사역에 대한 하나님 집의 요구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이상을 추구하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많든 적든 제약과 통제를 받는다. 그들은 가슴속에 이상을 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과 관련한 각종 진리와 본분 이행에 관계된 각 방면의 원칙 앞에서도 어느 정도 억압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람들이 한 부류를 이룬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 중 일부는 전도하면서 우두머리 양이 되기를, 일인자가 되기를 추구한다. 어느 교회에서든 우두머리 양이 되려 하고, 특출난 사람이 되려 하고,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 한다. 현재의 본분을 이행하고 현재의 일에 종사하면서도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자기 이상 또는 자기가 계획하고 구상한 목표인데, 이는 하나님을 믿는 일이나 진리와는 무관한 목표다. 그 목표나 이상이 폭로되고 그것의 성질이 규정되거나 일정한 방해를 받으면, 자기 이상을 실현할 수 없고 자기 가치를 드러낼 수 없다는 느낌을 받으면, 그들은 심한 억압과 불만을 느낀다. 많은 사람이 자기 이상을 추구하는 동시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와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긍정적인 평가와 인정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대가를 치렀는데 곧바로 보상받지 못하면 그들은 가치 없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해 억압을 느낀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러한 부류 중 일부는 언제나 제대로 된 교과서적 전도인이자 포교자가 되고 싶어 한다. 모모 유명 인사가 이름난 포교인이고 전도인이라는 이야기라도 나오면 대단히 부러워한다. 자기도 언젠가는 그런 인물이 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오래도록 칭송받고, 하나님께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들은 항상 자기 이상 속의 방식으로 전도하려고 하며, 자기 이상을 목표이자 원동력으로 삼고 전도인이 되고자 한다. 그들의 이상은 하나님 집에서 명성을 얻거나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집에는 어떤 일에 대해서든 엄격한 요구가 있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그 일을 하는 원칙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이상 속의 포교인이 될 수 없어서, 항상 감독과 통제를 받아서, 리더 일꾼이 사역에 대해 체크하고 물어봐서 억압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업무에 숙달됐다거나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 집에 와서도 자기 이상을 추구한다. 이러한 부류 가운데 배우들을 예로 들어 보자. 그들 중 일부는 자기가 연기를 조금 잘하고 연기 테크닉을 약간 배웠답시고 이상적인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 자기도 언젠가 이방인 세계의 대배우들처럼 유명인이 되고, 스타가 되고, 은막의 왕이나 여왕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늘 그 방면의 패괴 성품과 드러내는 패괴를 폭로한다. 게다가 하나님 집에는 연기라는 사역에 대한 구체적 요구와 원칙이 존재한다. 배우가 되어도 여전히 숭배받거나 팬을 거느리는 스타가 되지 못해 그들은 심한 억압을 느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집은 정말 사람을 성가시게 해. 매사 제약이 많잖아. 연예인 좀 따라 하면 뭐가 어때서? 조금 특별하게 꾸미고, 약간 개성 있고 나름의 기준이 있는 옷을 입는 게 문제 될 일이야?” 하나님 집에는 배우의 복장에 대한 요구가 있고, 구체적인 연기에 대한 요구도 있다.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 집의 요구는 자기가 추구하는, 유명인이나 스타가 되려는 이상과 사사건건 충돌하고 도무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몹시 불쾌하게 여긴다. ‘이상 좀 실현하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하나님 집에서는 왜 이렇게 뭐든 가로막히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들 때, 혹은 마음속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그들은 억압을 느낀다. 억압을 느끼는 배경에는 자기 이상이 정당하며 존재 가치가 충분하다는 그들의 생각이 있다. 게다가 그들은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며, 자기들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억압의 정서가 생기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감독들은 영화를 몇 편 찍고 나면 자기도 경험이 꽤 쌓였고, 감독한 영화가 어디에 내놓기 부끄럽지 않을 정도가 됐고, 화면이나 편집이며 배우의 연기 등 여러 방면이 다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부의 지도를 거쳐서 마침내 합격점에 이른 영화가 예정된 시기에 상영된다. 이는 제대로 된 감독이 되겠다는 그들의 이상이 타당한 것으로, 정당한 추구로, 응당 추구해야 할 것으로 더욱 인정받은 것 같다고 여긴다. 하지만 제대로 된 감독이 되기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원칙에 맞지 않는 그들의 생각, 관점, 행동 방식은 인정받지 못하며, 수시로 부정되고 번복된다. 더 나아가 늘 책망과 훈계를 받는다. 이 또한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억압의 정서가 생겨나게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감독으로 일 좀 하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거야? 이방인 세계 감독들은 얼마나 폼이 나는지 봐. 차 가져다주고 물 따라 주는 사람은 물론이고 발 씻겨 주는 사람까지 있잖아. 하나님 집 감독은 별 지위도 없어, 폼도 안 나 우러러보고 숭배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수시로 책망 훈계까지 받아야 하는 거야? 뭘 해도 틀렸다고 하니 정말 억압적이야! 내 나름의 생각과 관점이 있고 업무 능력도 있는데 왜 항상 책망받는 거야? 이상을 추구하는 게 잘못이야? 이상을 추구하는 게 정당하지 않은 일이야? 자기 이상을 실현하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이야? 정말 억압적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억압감을 떨칠 수 없다. 또, 일부 가수들은 이런 말을 한다. “다른 건 바라지 않아. 난 하나님 집에서 그저 제대로 된 가수가 되고 싶을 뿐이야. 노래를 잘하고, 내 스타일이 생기고, 누구나 좋아할 가수가 될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해.” 그러나 하나님 집에서는 찬양에 대해서도 늘 갖가지 요구와 원칙이 제시된다. 이러한 가수들은 하나님 집의 요구를 자꾸 어기는 탓에 수시로 책망 훈계를 받는다. 책망받지 않을 때면 그들은 자기 이상이 꽤 순조롭게 실현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다가도 책망이 임하고 약간의 좌절을 겪게 되면 그간의 노력과 성과를 부정당한 것 같다는 생각,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생각에 가슴속 깊은 곳에 억압감이 자리 잡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휴, 이상을 실현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야! 이 넓은 세상에 내가 있을 곳 하나가 없다니! 하나님 집에서도 마찬가지야. 개인적인 사업 좀 하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거야? 내가 하고 싶은 일 좀 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워? 나한테 청신호를 켜 주는 사람은 없고 번번이 벽에만 부딪쳐. 게다가 번번이 책망 훈계도 받아. 너무 힘들다. 정말 억압적이야! 이방인 세계에서는 다들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기 바쁘니까 그 사이에서 무슨 사업을 하려면 방해를 많이 받아서 억압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지만, 왜 이상을 품고 하나님 집에 와서도 억압을 느껴야 하는 거야?” 하나님 집에서 갖가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주 벽에 부딪치고, 부정당하고, 책망 훈계를 받고, 인정받지 못한다.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다운된다. 이번 생은 끝장인 것 같은 기분이다. 이상을 실현할 가망이 없는 것 같다. 하나님 집에 오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이상과 포부를 품고 있어. 내게는 바람이 있어. 하나님 집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을 거야. 제대로 된 감독, 배우, 문서 사역자가 될 수 있겠지. 물론 제대로 된 무용수, 가수, 음악인이 될 수도 있을 거고.’ 자기 재능을 펼칠 수 없고 자기 이상을 이룰 수 없었을 때, 하나님 집에는 자기 무대가 있을 테고 자기 이상과 포부, 꿈이 실현될 무한한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는 하나님 집의 무대가 대단히 크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자기 발밑의 무대가 왜 점점 좁아지나 싶고, 자기 세상이 왜 자꾸 작아지나 싶다. 자기 이상을 실현할 가능성이 갈수록 막연해지는 것 같고 갈수록 가망이 없는 것 같고, 그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사람은 자기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자기 이상과 바람이 과연 올바른지 의심하지 않고, 자기 이상과 바람을 그대로 품은 채 본분을 이행한다. 그리하여 이상과 바람, 그리고 현실적 본분 사이에 놓인 사람은 줄곧 억압의 정서와 함께하게 된다. 억압의 정서를 가지고 있거나 억압의 정서를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람은 이상과 바람, 그리고 본분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 억압의 정서를 가진 채로 자기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는 동시에 본분을 이행한다. 어쨌든 계속 자기 자신을 다스리면서 꿈과 이상을 좇는 한편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모순적인 심리 상태로 본분을 이행한다고 할 수 있다. 심한 억압을 느끼고 아주 떨떠름해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기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고자, 자기 가치를 드러내고자, 자기 이상과 바람을 좇고자 어쩔 수 없이 본분을 이행한다. 정확히 무엇을 위해서인지, 무엇을 얻고 싶은지, 무슨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인지, 어떤 목적을 좇고 실현하기 위해서인지 자기도 알지 못한다. 그게 점점 더 불분명해지고 앞길이 갈수록 흐릿해지는 것 같다. 이런 상태에서는 억압의 정서를 내려놓거나 해결할 방도가 없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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