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6) 제 2 부

지난번에 우리는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생기는 한 측면의 원인이 제멋대로 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교제하였다. 이어서 오늘은 억압의 부정적 정서가 생기는 다른 측면의 원인에 대해 교제하겠다. 즉, 사람이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지 못해 자주 억압의 부정적 정서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 측면의 원인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지난번에 사람이 교회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제멋대로 하면서 빈둥거리며 본연의 일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아 억압을 느낀다고 하였다. 이번에 교제할 내용은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은사와 특기, 전문 기술 능력을 갖추었거나 특수 기술 업무 등에 능통하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은사나 특기, 업무적 기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늘 답답해하고, 이런 환경에서 사는 것이 편하거나 기쁘지 않고 즐겁지도 않다고 느낀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을 사회에서 무엇이라 일컫느냐? 전문가, 기술자, 특수 인재로 불리는데, 한 마디로 인재로 불리는 것이다. 인재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 이마가 넓고 눈빛에 생기가 있으며, 안경을 끼고 고개가 뻣뻣하다. 걸음걸이가 빠르고 결단력 있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한다. 가장 큰 특징은 어디든 노트북과 가방을 가지고 다닌다는 점이다. 한눈에 전문가나 기술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일정한 업무 능력을 갖추었거나 특정 기술에 대해 능통하며, 전문 교육과 지도를 받은 적이 있고 전문적인 학습과 훈련을 거친 사람이다. 혹은 어떤 사람은 전문적인 지도나 훈련을 거치지 않고도 천부적 능력이나 자질을 타고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을 전문가, 기술자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늘 노트북을 끼고 교회에 온다. 어디에서 사역하든 그들은 전문가, 기술자로 비치고 또 아무개 인재, 심지어는 자기 성 뒤에 ‘선생님’ 등이 붙은 호칭으로 불리고 싶어 한다. 그들은 이런 대우와 호칭을 즐긴다. 하지만 교회는 특수한 곳이며 특수한 일을 하는 장소이다. 사회의 여느 단체나 조직, 기구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이곳은 무엇을 얘기하느냐? 진리, 원칙, 규정, 사역지침을 얘기하며 하나님 집의 이익과 하나님의 증거를 얘기한다. 물론 더 구체적으로는 사람에게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에 순종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와 이곳에서 알려 준 원칙 등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명문 규정을 제창하고 사람이 실행하고 준수해야 할 때면 교회에 온 그런 인재들은 어느 정도 서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배운 기술이든, 능통한 특정 측면의 지식이든 교회에서는 쓸모가 없어 중용되지 못하거나 중시받지 못하고 홀대받을 때가 많다. 물론 그들 역시 하는 일 없는 것 같고 자신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한다고 늘 생각한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아, 이것이야말로 산 밖에 난 범 꼴이구나! 왕년에 모 공기업, 모 외국 기업에 있을 때는 어마어마했는데! 가방 한번 내 손으로 들어 본 적 없고, 매일 스케줄 짜 주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걱정할 일이 하나 없었지. 난 고급 인재이고 기술의 달인이라서 회사에서는 거물이었다고. 거물이 뭐겠어?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지. 수주가 안 되면 전 직원이 길바닥에 나앉고 회사도 도산 위기에 빠질 수 있어서 회사에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거야. 그때는 정말 어마어마해서 존재감 넘치게 살았는데!’ 지금은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그리면서 생각한다. ‘내 능력이라면 하나님 집에서는 더더욱 귀하게 쓰일 곳이 있을 텐데 어떻게 무용지물이 될 수 있지? 교회 리더, 형제자매가 어째서 나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걸까? 내가 남들한테 처지는 데가 어딨다고? 외모라면 풍채 좋지, 기질이라면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지, 명성이나 위신은 말할 것도 없고, 기술 수준은 일류인데 왜 다들 날 거들떠도 안 보는 거야? 왜 아무도 내 말이나 제안에 동조해 주지 않는 거지? 어째서 난 하나님 집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걸까? 설마 나 같은 인재가 하나님 집에 필요하지 않은 건가? 어떻게 하나님 집에서 내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지? 하나님 집의 어떤 사역에서 내가 배운 기술도 필요할 텐데. 내 특기는 하나님 집에서 중시되어야 해! 난 전문가이니, 팀장이나 책임자를 맡아서 다른 사람을 이끄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어떻게 맨날 들러리만 서는 거야?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설마 내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고 이렇게 대우하는 건가?’ 그는 속으로 거듭 자문해 보지만 항상 원인을 찾아내지 못해 억압에 빠져 버린다.

예전에 합창단이 무대에 올라 합창하려 할 때 헤어스타일을 어떻게 할지 물은 적이 있었다. “자매는 머리를 뒤로 묶어도 되고 귀나 어깨 정도의 단발도 괜찮다. 물론 올림머리나 당고 머리도 상관없다. 형제는 상고머리나 가르마 머리 모두 괜찮다. 단, 장식이나 스타일링을 하지 말고, 깨끗하고 단정하며 자연스러워 보이면 된다. 한 마디로 남들이 보기에 단정하고 점잖은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갖추면 된다. 중요한 것은 노래를 잘 불러 프로그램을 제대로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이 정도면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남녀의 헤어스타일에 대해 분명히 알려 주었다. 사람이 헤어스타일을 선택하는 원칙은 무엇이더냐? 형제는 가르마를 타거나 상고머리를, 자매는 단발, 장발 모두 상관없지만 장발이면 뒤로 묶고, 단발이면 너무 짧지 않도록 하는 게 하나의 원칙이다. 다른 원칙은 깔끔하라는 것이다. 단정하고 점잖으며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게 한눈에 보여야 한다. 우리가 사회의 명사나 유명인이 되고자 무슨 화려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니 그저 단정하고 점잖아 보이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깔끔하고, 단정하고 점잖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설명하지 않았느냐? 이 두 원칙을 이해하거나 실행하기가 쉽지 않으냐? (쉽습니다.) 한 번만 들어도 명확히 알 수 있으니 두 번 말할 필요도 없다. 실행하기가 아주 수월하다. 십여 일이 지나 그들이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영상 속에는 자매들이 서너 줄로 서 있었는데, 첫째 줄은 모두 스타일링한 헤어스타일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과 스타일로 저마다 다른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각각 다른 스타일의 머리 모양은 괴상하기 짝이 없었는데, 어떤 20대 자매는 30, 40대처럼 보이기도 했고, 할머니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헤어스타일이 저마다 달랐다. 영상을 보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가 헤어스타일을 여러 가지로 만들어 봤습니다. 마음껏 골라 주세요. 어떤 스타일을 고르시든 저희는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아느냐? 역겨웠다.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화도 조금 났다. 그들과 나누었던 몇 가지 원칙을 돌이켜 보니 마지막에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말문이 막혔다. ‘아, 이들은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했던 말을 아무리 곱씹어 봐도 그들에게 알려 준 원칙은 사람이라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토록 간단한 일은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서 사람이 능히 해낼 수 있을 텐데, 왜 그런 영상을 보내온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내가 불명확하게 이야기한 것도 아니었고, 가지각색의 헤어스타일을 하라고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뭘 좀 할 수 있고, 알고, 손재주나 기술을 좀 습득하게 되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안하무인이 되어 한번 뽐내 보겠다며 교만함이 끝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네 말을 알아들었다 할지라도 수긍하지도, 실행하지도 않고 네 말을 마음에 두지 않고 무시해 버린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네가 무엇을 하라고 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원칙을 물어볼 때 사실은 진작에 무엇을 어떻게 할지 스스로 마음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질문은 그저 형식만 갖추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질문은 사람을 놀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다 놀리고 나면 네가 뭐라고 하든 결국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고, 조금도 네 말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뜻이 정말 강하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당신이 우리를 무시하시지만 우리는 기술 전문가라고요. 사회에서 우리가 만난 사람은 모두 유명 인사였고, 우리에게 이런 손재주와 기술이 있으니 어딜 가든 잘살 수 있고 사람들에게 존중받을 수 있었어요. 유독 하나님 집에 와서는 봉사자가 되고 항상 무시당하지요. 우린 서민이 아니라 기술을 가진 인재예요. 하나님 집에서 존중받아 마땅하다고요. 이런 식으로 우릴 썩히시면 안 되죠. 우리가 하나님 집에서 특기를 발휘하게끔 지지해 주시고 뒷받침해 주셔야 해요.’ 이는 막무가내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정상 인성이 있느냐? (없습니다.) 내가 보니 ‘아, 이들은 이치로 깨우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원칙을 알려 줄 때 거듭 물었다. “알아들었느냐? 기억했느냐?” 그 자리에서는 잘 대답하더니 뒤돌아서니 마음이 바뀐 것이다. 말은 그럴듯하다. “저는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고 본분을 이행하러 왔습니다.” 그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냐? 너는 육을 만족시키고 자기 체면을 세우려는 것이다. 너는 본분을 이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사업을 하러 온 것이다. 바꿔 말하면, 네가 하나님 집에 온 것은 파괴하러 온 것이다. 하나님 집의 각 측면의 사역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은 네가 정하는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네 말이 진리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너희가 말하는 것은 도리다. 만약 도리가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릇된 논리일 뿐이다. 너희가 내 말을 진리로 인정하면서 어째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냐? 어째서 너희에게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냐? 내 앞에서는 그럴싸하게 말하면서 뒤에서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니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패괴된 인간은 능력이나 특기, 아이디어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교만하게 굴면서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이는 너무 비이성적이지 않으냐? 너희가 만약 자기가 한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어찌하여 내가 심사하게 하느냐? 내가 너희의 결점을 지적하고 너희의 잘못을 폭로하면 너희는 어찌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냐? 너희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진리를 교제해 줄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진리와 원칙, 성도의 품위에 부합하는지, 어떻게 해야 사람에게 유익한지 나는 알고 있다. 너희는 알고 있느냐? 이 몇 가지 중 너희는 한 가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내 말대로 하지 않는 것이냐?

어떤 사람은 작문에 능해 언어를 구사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타고난다. 물론 문학 수준도 상당해 사물을 묘사할 때 일정한 수법과 표현 방식을 활용할 줄 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곧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한 측면의 지식으로서 사람의 은사나 특기의 하나일 뿐이다. 다시 말해, 네가 작문과 언어 표현에 능하고 문장력이 상대적으로 좋은 한 측면의 특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들에 능하다고 ‘나는 하나님 집의 문장가이니 문서 관련 사역을 담당해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문서 사역을 담당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 집에 필요하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네 장기나 업무 능력뿐만은 아니다. 네 업무 능력과 장기는 네가 담당하는 그 사역에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네 업무 능력과 그 수준이 어떻든 너는 하나님 집에서 요구하는 원칙에 따라 하나님 집에서 달성하려는 효과와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이 효과와 목표에는 하나님 집에서 요구하는 기준과 관련 원칙이 있다. 너만의 입맛이나 취향에 따라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대본을 쓸 때 화려한 문장을 추구하고 스토리를 매우 구체적으로 전개하며 문장력도 괜찮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효과에 도달하겠느냐? 하나님을 증거하는 효과에 한참 못 미치기 때문에 이런 대본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은 화려한 글을 쓸 수 있다고 자부하며 흡족해하고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대본은 반드시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효과에 도달하도록 써야 하며 이것이 근본 취지라는 것을 그들은 전혀 모른다. 하나님 집에서 대본을 쓸 때 주인공이 읽는 하나님 말씀과, 그가 하나님의 역사에 인도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한 후의 진정한 인식이 있을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면, 이 대본은 효과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 집의 이런 측면의 요구가 사람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집의 사역이다. 그런데 이들 대본을 쓰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뜻은 이렇다. “제가 쓴 글은 이미 완벽해요. 무척 구체적이죠. 저한테 그런 내용을 추가하라고 하시는데, 제 뜻에는 맞지 않습니다. 불쾌하네요. 그렇게 쓰고 싶지 않아요.” 나중에는 마지못해 그런 내용들을 추가하지만 그들의 정서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너무 억압감을 느껴요. 항상 책망하고 흠잡는 사람이 있어요. 어쩔 수 없죠. 낮은 처마 아래서 머리를 숙일 수밖에요. 제가 결정할 수 있어 쓰고 싶은 대로 맘껏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남의 말을 들어야 하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야 되니 억압감을 많이 느껴요!”라고 말한다. 이런 마음가짐이 옳은 것이냐? 이건 어떤 성품이냐? 너무 교만하고 독선적이다. 그리고 합창단에서 메이크업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이방인의 헤어스타일을 좋아하는데, 그들이 만든 헤어스타일은 결국 거부당했다. 어째서겠느냐? 하나님 집에서는 마귀의 헤어스타일이 아닌 단정한 정상인의 헤어스타일을 원하기 때문이다. 네가 할 수 있는 헤어스타일은 이방 세계에 가서 선보이거라. 그들은 그러한 인재를 필요로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필요 없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집을 위해 무상으로 해 주겠다고 하지만 무상이라 해도 필요 없고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보기에 역겹다. 하나님 집에서 필요한 것은 단정하고 올발라 정직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네가 고상할 필요도, 왕궁의 귀족이나 공주, 아가씨, 도련님, 어르신 같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서민이라 신분이나 지위가 없고, 가치도 없다. 그저 지극히 정상적인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좋다. 고귀하지도 않고 우아하지도 않으며 평범한 옷을 입고 평범하게 꾸미며 가식을 떨지도 않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누리고 야심과 욕망이 없이 그저 일반인의 삶을 사는 것에 만족할 줄 아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이것이 정상 인성의 삶이다. 분명 평범한 사람인데 늘 고귀한 척하려 하니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항상 하나님 집에서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고 뽐내 보려 한다.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네가 뽐내려는 그 재주가 가치 있는 것이냐? 만약 정말 가치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가치가 하나도 없고 오히려 교란과 파괴만 된다면 그것은 귀신의 재주, 하찮은 재주를 뽐내는 것일 뿐이다. 이런 재주를 뽐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는 있느냐? 모르면 절대 뽐내지 마라. 네가 할 수 있는 것, 습득한 기술, 선천적 장기나 천부적으로 타고난 특별한 재능은 고귀하다고 볼 수 없으며 넌 그저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전 몇 개 국어에 능통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럼 통역을 하고 통역 사역을 잘하면 된다. 그러면 넌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사전 한 권을 통째로 외울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사전 한 권을 다 외워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복음을 전할 수 있느냐?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은 “전 속독을 할 수 있어요. 하나님 말씀을 하루에 백 쪽씩 읽을 수 있는데 제 실력이 대단하지 않나요?”라고 말한다. 네가 하루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을 백 쪽 읽어서 무엇을 깨달았느냐? 어떤 측면의 진리를 깨달았느냐? 실행할 수 있느냐? “저는 신동이에요. 다섯 살 때부터 노래하고 작사를 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쓸모가 있겠느냐? 이방인은 너를 치켜세울지 몰라도 하나님 집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당장 네게 하나님을 찬미하는 가사를 써 보라고 한다면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다면, 이는 네가 진리를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사만 있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없다. 사람이 어떤 은사나 기술, 특기를 가지고 있든, 사실 그것은 도구에 불과하다. 긍정적인 사물에 쓰여 긍정적인 역할을 발휘한다면 존재 가치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긍정적인 사물에 사용되지 못하고 긍정적인 역할도 발휘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니 그것을 배워 봤자 소용없다. 그저 네게 짐만 될 뿐이다. 네가 만약 네 전문 기술이나 특기를 본분 이행에 활용해서 진리 원칙에 따라 하나님 집의 사역을 잘 이행한다면 네 전문 기술이나 특기는 올바른 곳에 사용되었으니 실로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것의 존재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조금도 본분에 사용할 수 없다면 너의 그 전문 기술이나 특기는 일말의 가치도 없다. 내가 보기에는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어날 때부터 입심이 좋은 달변가들이 있다. 이들은 언어 표현력이 출중하고 두뇌 회전이 빠른데, 이는 특기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강연이나 홍보, 협상을 하거나 판사나 변호사 등을 한다. 이런 분야에서 일하면 그도 능력을 발휘할 데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네게 그런 특기가 있다 해도 네가 아무런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가장 기초적인 이상 측면의 진리조차 깨닫지 못해 복음을 전하지도, 하나님을 증거하지도 못한다면 너의 그 은사와 특기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네가 만약 네 은사에만 기대어 살면서 어디서든 네 특기를 뽐내며 큰소리치고 글귀 도리만 이야기하면 오히려 남에게 반감만 사게 된다. 그것은 네가 한 모든 말이 남들이 역겨워하고, 네가 밝힌 생각과 관점이 사람들의 혐오감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럴 때 너는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네가 자신을 드러낼수록 네가 자신을 표현하고자 할수록 남들은 더 역겨워할 것이다. 사람들은 “불결한 그 입 좀 닫지 그래요! 당신이 말하는 건 다 도리예요. 그걸 누가 몰라요? 몇 년이나 얘기했죠? 당신은 바리새인이랑 다를 바 없어요. 공리공론이나 떠들면서 교회를 오염시키니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보아라, 모두에게 공분까지 사서 반감만 일으킨다. 그러니 너는 진리에 더 공을 들이고, 진리 깨닫기를 더욱 구하는 것이 좋은데, 이것이 진정한 실력이다. 내가 이렇게 말할수록 이들 ‘실력 있는’ 자, ‘인재’는 억압을 느낄 것이며,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젠 글렀어, 당최 길이 보이질 않네. 여태껏 난 인재였고 어디서든 남보다 잘나서 중용되었는데 말이야. ‘금이라면 언젠가는 빛을 발한다’는 말이 있잖아? 하나님 집에서는 안 통할 줄이야! 억압도 이런 억압이 없다!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을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좋은 일인데 어째서 이런 탁월한 인재, 이런 고급 인재가 하나님 집에 와서 억압감을 느끼는 것이냐?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억압을 느껴 우울해지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 결국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늘 책망받으니 너무 억압을 느낍니다. 이젠 많이 고분고분해져서 교회 리더가 말하든, 팀장이 말하든 저는 항상 ‘네’, ‘괜찮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얼핏 순종하고, 말에 따르는 법을 배운 것처럼 보이지만 원칙을 모르고 어떻게 해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억압을 느끼면서 자기를 위해 분통을 터뜨리고 과소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교육 수준을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학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석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학원생입니다.”, 어떤 사람은 “의대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무 전공입니다.”, 어떤 사람은 “경영 전공입니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프로그래머로, 기술자다. 모두 끝에 ‘자’ 자나 어떤 칭호가 붙어 있다. 이들이 하나님 집에 오니 아무도 그들을 그렇게 불러 주지 않고 중시하지 않으니 속으로 항상 억압을 느끼면서 자아를 찾지 못한다. 교회에는 여러 인재가 다 있다. 음악 인재, 안무 인재, 영상 인재, 기술 인재, 비즈니스 인재, 경제 인재, 심지어는 정치인도 있다. 이들은 형제자매 가운데서 늘 말한다. “제가 어엿한 공기업의 사장이고, 어엿한 외국 기업의 고위 간부이고 CEO인데 두려워할 사람이 누구며, 누구에게 복종한 적 있겠습니까? 저는 경영 능력을 타고 났기에 어디서든 관리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관리할 재목입니다. 남이 저를 관리하기보다는 제가 다른 사람들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집 말단이라도 팀장이나 책임자를 맡아야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이들이 아무런 진리 실제도 없고 어떤 사역도 할 수 없는 데다가 특히 교만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어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결국 그중 어떤 사람은 육체노동을 하도록 보낼 수밖에 없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항상 불복하고 뽐내고 싶은 마음에 제멋대로 굴다가 잘못을 너무 많이 저질러 모두의 공분 속에 정리되기도 한다. 이들이 억압감을 느끼지 않겠느냐? 마지막에 그들은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한다. “하나님 집은 우리 같은 인재가 머물 곳이 못 됩니다. 우리는 천리마인데 하나님 집에는 백락이 없거든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배움이 얕아요. 특히 각급 리더들은 진리를 깨닫긴 했지만 우리가 천리마인 것도 모르더군요. 우리가 백락을 찾아 나서야죠 뭐.” 결국 이런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하나님 집은 너무 작아 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네요. 우리는 모두 거물들인데 하나님을 믿는 저들은 모두 농민, 노점상, 소상공인 등 사회 하층의 서민들이에요. 고급 인재가 없죠. 교회는 작지만 세상은 넓으니 우리의 거처가 없을 리 없어요. 천리마인 우리는 언젠가 각자의 백락을 찾게 될 겁니다!” 이들이 자신의 백락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가 축복해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좋습니다.) 그들이 백락을 찾는 그날, 우리와 작별할 때, 우리는 그들을 떠나 보내면서 그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곳을 찾아 다시는 억압의 정서를 품지 않기를, 그들이 우리보다 잘 지낼 수 있기를, 좋은 사람으로 일생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면 억압의 정서를 품은 그들의 마음이 약간 편하지 않겠느냐?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뻐근하며 마음이 무겁고 몸이 불편해 자유롭지 않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겠느냐? 그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다시는 억압을 느끼지 않으면서 행복하고 홀가분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 집에서 일부러 이들 인재들을 힘들게 한 것이냐? (아닙니다.)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 집의 여러 원칙과 사역지침, 그리고 각 사역에 대한 요구가 이들에게 억압적 정서를 야기했느냐? 어째서 이들 인재들이 하나님 집에서 억압적 정서에 빠진 것이냐? 하나님 집의 잘못이더냐? 아니면 하나님 집에서 고의로 이들을 힘들게 한 것이냐? (전부 아닙니다.) 이치상으로 그것이 결코 아니란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이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세상에서 배운 전문적 특기나 개인의 취향을 하나님 집의 원칙과 요구에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집의 원칙과 요구에 그런 것을 강요하면 하나님 집에서 용납하겠느냐?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 집에서 용납하지 않아서 억압을 느낀 사람이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일을 어떻게 해야겠느냐? (각 본분을 이행하기 전에 먼저 그 본분에 대한 하나님 집의 요구와 원칙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정확하게 파악한 후 자신이 습득한 전문적 특기를 합리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 원칙이 옳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 집에 와서 늘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고 뽐내고 싶어 한다면 이 출발점이 옳은 것이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옳지 않으냐? 그 이유를 확실히 말해 보거라. (그의 목적은 자신을 드러내어 체면을 세우려는 것으로, 자기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지, 하나님 집의 사역에 유익할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취향대로 하고자 하면서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거나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매사에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사탄의 성품에 속합니다. 그는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증거할까를 생각하지 않고 항상 자기만 증거하고자 하니 이 자체가 옳지 않은 길입니다.) 그 출발점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디가 옳지 않으냐? 이 질문에 너희는 반박을 하지 못한다. 너희가 무척 억압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다들 자기 특기를 뽐내고 싶어 하는 것이겠구나? 이방인 가운데 본때를 보여 준다는 의미로 할머니가 립스틱을 바른다는 말이 있지 않더냐? 뽐내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뽐낸다는 것은 나서서 자기를 드러내어 사람들 속에서 명망과 지위를 얻음으로써 남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뽐내는 기회를 통해 남들에게 ‘내 실력이 대단하다.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니 날 우습게 보지 마라. 나는 인재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다. 최소한 이런 의미는 갖고 있다. 그럼 늘 뽐내고 싶은 생각만 한다면 이는 어떤 성질이겠느냐? 그는 자기 사업을 하고 자기 지위를 경영하며 사람들 가운데서 발판을 다지고 위신을 세우려는 것이다. 이토록 단순하다. 그는 본분 이행이나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구하여 하나님 집의 요구나 원칙대로 일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자기의 인지도와 가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일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책임자나 리더로 선출하도록 일하는 것이다. 그가 리더로 선출되면 지위가 생기지 않겠느냐? 체면이 서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그가 추구하는 것이다. 이토록 단순한 출발점인데, 그저 지위를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목적을 가지고 지위를 추구하는 것이지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을 지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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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을 것을: (직역) 써낼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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