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0) 제 4 부

‘사업 내려놓기’라는 주제의 두 번째 원칙은 무엇이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노동이나 일에 종사해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 하루 세끼 식사와 생활비를 보장받고, 수입원을 확보한다. 그러므로 저소득층이든, 소득 수준이 조금 높은 계층이든 사람은 누구나 여러 가지 일을 통해 자신의 생계를 유지한다. 생계유지를 위한 것이라면 매우 간단하다. 살 집이 있고, 하루 세끼 밥 먹고, 가끔 고기가 먹고 싶을 때 사 먹고, 매일 정상적으로 일해서 수입을 얻고, 헐벗고 굶주리지만 않으면 된다. 이것이 삶에 대한 사람의 기본적인 요건이다. 기본적인 요건이 충족되고 기본 생활 수준에 이르기는 쉽지 않으냐? 자신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종사하는 사업의 성질이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것, 생계를 위한 것이라면 어떤 사업에 종사하든 합법적이기만 하면 대체로 인성 기준에 부합한다. 어째서 인성 기준에 부합한다고 하겠느냐? 네가 그 직업에 종사하게 되는 출발점과 초심, 목적 중에 무엇 하나 생계와 무관한 일이나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가족들이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요건이다. 기본적 요건이 채워진 다음에 사람이 누리는 것은 기본적인 삶의 질이다. 사람은 기본적인 삶의 질을 충족시킬 수 있으면 정상적인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 정상적인 생존을 유지할 수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인성의 범위 내에서 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자기 생활은 자기가 책임지고, 자기가 감당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상 인성을 지닌 사람이 갖춰야 할 태도다. 네가 여기에 도달하면 그것으로 됐고, 그것으로 적절하다. 하지만 네가 만족을 모른다면, 정상인은 일주일에 한두 번 고기를 먹으면 되는데, 너는 매끼 고기를 고집하고, 또 넉넉하게 먹으려고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하루에 고기 100그램이면 정상적인 신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데도 기어이 반 근, 한 근을 먹는 바람에 결국 영양 과잉으로 병을 얻게 된다. 지방간, 고혈압, 고지혈 같은 병은 어떻게 해서 생기느냐?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입니다.)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건 어찌 된 일이냐? 음식 조절을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 아니냐? 너무 게걸스러운 탓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게걸스러움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식탐이 너무 커서 그런 것 아니냐? 지나친 식탐과 게걸스러움이 정상 인성의 필요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정상 인성의 필요를 뛰어넘는다. 정상 인성의 필요를 뛰어넘고 싶다면 일을 많이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보통 사람보다 몇 배 많은 시간을 들여 더 많이 일해야 한다. 야근을 하든, 일을 여러 개 하든 수입을 더 늘려서 하루 세끼 모두 고기를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먹고 싶을 때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면, 이것은 정상 인성의 범위를 뛰어넘은 것이 아니냐? 정상 인성 범위를 뛰어넘은 것은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왜 좋지 않으냐? (첫째는 병에 걸리기 쉽고, 둘째는 자신의 식욕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더 많은 대가를 치르며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 써야 할 시간과 에너지를 여기에 써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가는 데 지장이 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어서 배고픔과 추위에서 벗어나고 정상 인성의 기본 생활이 충족되면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돈은 신체의 정상적인 필요에 따라 영양분을 충족할 만큼 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게 바로 정상 인성에 필요한 생활이다. 항상 육의 즐거움만 탐하고 식탐을 채우느라 육의 건강이나 바른길을 가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언제나 좋은 것만 먹고 누리려 하고, 좋은 생활 환경과 삶의 질만 바란다면, 온갖 산해진미를 즐기고 명품을 걸치고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호화 주택에 살며 고급 차를 타는 이런 생활을 추구한다면 네가 어떤 직업에 종사해야 하느냐? 만약 보통으로 일해서 기본적인 의식 문제가 해결되는 정도라면 너의 그 욕망들이 채워지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불가능하다. 가령 네가 장사를 한다고 해 보자. 작은 장사는 진열대 하나만 놓으면 식구들이 먹고살 걱정은 없다. 아주 잘살지도, 그렇다고 못살지도 않는 수준이다. 3, 4일에 한 번 고기도 먹을 수 있고, 식구들이 옷도 그럴싸하게 입고 다닐 수 있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하나님을 믿으며 예배드리고 본분도 이행하고, 또 에너지가 남아서 진리를 추구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본적으로 생활이 보장되는 상태에서, 네가 그 직업에 종사하는 동시에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만족할 줄 모르고 이런 생각을 한다. ‘장사가 좀 될 것 같군. 진열대 하나면 한 달에 이만큼 벌어서 식구들이 어느 정도 먹고살 수 있는데, 진열대 두 개면 두 배로 벌어서 먹고사는 건 물론이고 돈도 좀 모을 수 있겠어. 그럼 평소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고, 여행도 가고, 사치품도 좀 사고, 또 보통 사람들이 못 먹는 것도 좀 먹을 수 있고, 보통 사람들이 누리기 힘든 것도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러니 진열대를 하나 더 놓자!’ 진열대를 하나 더 늘려서 좀 더 여유가 생기고 단맛을 좀 보자 이런 생각이 든다. ‘보니까 이쪽 시장이 그래도 작지 않단 말이지. 진열대 하나 더 늘려서 장사를 좀 더 크게 해도 되겠어. 다른 물건들도 좀 가져와서 사업을 좀 더 키우면 손에 쥐는 돈 말고도 차도 사고 집도 넓힐 수 있겠군. 식구들도 국내뿐 아니라 해외 여행도 갈 수 있고 말이야!’ 생각할수록 황홀해진다. 생각 끝에 진열대를 하나 더 늘리기로 한다. 사업이 커질수록 돈도 많이 벌고 누리는 것도 더 많아진다. 하지만 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에서 보름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점점 줄어들다가 급기야 반년에 한 번 나가게 된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사업이 더 커져서 돈을 더 벌면 하나님 집 사역도 지원하고 헌금도 많이 해야지.’ 본인은 자가용을 굴리고, 아내와 자식도 금과 다이아몬드로 치장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하고 해외 여행도 다녀오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돈이 좋긴 좋구나! 돈 버는 게 이렇게 쉬운 줄 진작 알았더라면. 왜 진작 못 벌었을까? 돈이 최고야! 돈만 있으면 살기도 너무 편하고 너무 좋아! 맛있는 거 먹는 것도 보통 재미가 아니고 말이야. 이렇게 명품 걸치고 있으면 기분도 끝내주고, 어딜 가든 다들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어딜 가든 존중받고 우러름을 받으니 느낌부터 다르다니까.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가는군.’ 이렇게 육도 만족스럽고 허영심도 채워졌지만 하나님 말씀 책에는 점점 먼지만 쌓인다. 들여다보지 않은 지 한참이고, 하나님께 기도할 말도 점점 줄어든다. 예배 장소가 바뀌어서 지금은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지도 모르고, 어쩌다 교회에 얼굴도장 찍는 일도 이제는 없어졌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것은 구원받는 일과 점점 멀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가까워지는 것이냐?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삶의 질은 점점 좋아지고, 잘 먹어서 몸도 점점 살이 오르고, 때깔도 점점 좋아진다. 원래는 8년이고 10년이고 한 번도 안 하던 건강 검진을 지금은 돈이 많으니까 6개월에 한 번씩 하면서 혈압, 혈당, 혈중 지질도 체크한다. ‘건강은 잘 챙겨야지. ‘다 있어도 병은 없어야 하고, 아무것도 없어도 돈은 있어야 한다.’라는 말도 있잖아.’ 사상 관점이 변하지 않았느냐? 이제는 서민이 아닌 부자가 되었으니 그는 스스로가 가치 있다고, 귀한 신분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육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생활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전에 건강 검진을 못 받을 때는 이런 생각이었다.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이야 아무렴 어때. 건강 검진이 다 뭐야? 큰 병에 걸려도 돈이 없으니 그냥 버텨야지. 정 못 버티면 다 늙은 몸이니 죽어도 그만이지. 죽는 게 대수야?’ 지금은 다르다. ‘사람이 살면서 병이 있으면 안 되지. 내가 아프면 벌어 놓은 돈은 누구한테 쓰나? 그러면 누리지도 못할 텐데, 인생은 정말 짧구나!’ 이렇게 달라졌다. 그렇지 않으냐? 금전과 육적인 생활, 즐거움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만큼 하나님을 믿는 일, 진리를 추구해서 구원받는 일을 대하는 태도도 갈수록 냉담해진다.

사람이 일단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어도 만족을 모르는 길로 들어서면 더 높은 삶의 질, 더 큰 즐거움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시험에 빠져들었다는 위험 신호이고, 골치 아픈 일이고, 좋지 않은 징조다. 한번 돈맛을 보고 돈 쓰는 재미를 경험한 사람은 언젠간 돈이 없어서 가난에 시달릴 것이 걱정되어 지금처럼 돈 있는 생활, 부자의 지위와 신분을 특히 애지중지하게 된다. 이방인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지 않더냐? ‘쓴맛 뒤에 오는 단맛은 쉽지만, 단맛 뒤에 오는 쓴맛은 쉽지 않다.’라고 말이다. 즉, 네가 아무것도 없다면 네게 내려놓으라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기에 바로 내려놓을 수 있다. 미련을 가질 만한 게 없어서 금전과 물질적인 것이 너에게는 걸림돌이 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것들을 소유하고 나면 내려놓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네가 빈털터리라면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해야 할 때 미련없이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부자라면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집이 200만 위안에다 차는 50만 위안이고, 고정 자산에다 은행 예금도 있고, 주식이며, 펀드며, 어디 투자한 것도 있고, 이것저것 합하면 천만 위안쯤 되는데, 집을 떠나게 되면 이걸 어떻게 가져가야 한담?’ 너는 이런 물질적인 것들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이걸 다 내려놓고, 지금 이 집과 가정을 떠나면 앞으로 이만한 집에서 살 수 있을까? 토담집이나 초가에서 살게 되면 견딜 수 있을까? 외양간에서 살게 되면 그 악취를 견딜 수 있을까? 지금처럼 매일 온수로 씻다가 일 년 내내 온수 목욕도 한 번 못 하는 곳으로 가면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괴로워질 것이다. 돈이 있으면 물건 살 때도 돈 펑펑 쓰면서 사고 싶은 대로 맘껏 살 수 있고, 돈에 얽매이지 않고 아주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그걸 다 내려놓으면 앞으로 물건 살 때 주머니 사정 생각하느라 선뜻 돈을 못 쓸 텐데 어떡하겠느냐? 뜨끈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싶어도 어느 집이 더 싸니까 남은 돈으로 몇 번은 더 먹을 수 있겠다고 계산해 가며 알뜰하게 살고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데 견딜 수 있겠느냐? 원래는 두어 번 세탁해서 변형된 옷은 입으면 별로 맵시가 나지 않아서 곧잘 버리고 새로 샀는데, 이제는 티셔츠 한 벌도 몇 번씩 빨아 가며 입고 또 입고, 옷깃이 해어져도 버리기 아까워서 기워 입어야 한다. 네가 이런 걸 견딜 수 있겠느냐? 어디 가든 척 보면 가난뱅이티가 나서 남들이 상대해 주지 않고, 물건 살 때 가격을 물어봐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텐데 이걸 견딜 수 있겠느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지만 네가 금전과 물질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런 것을 내려놓을 필요도 없고, 이 관문을 통과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모든 걸 내려놓고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 훨씬 쉬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찍부터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라고 했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것을 사업으로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벼락출세하거나 부자가 되어 잘살기 위한 발판이나 매개로 생각하지 마라. 어떤 일,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단지 그것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만약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면 그 정도에서 그치고, 돈을 더 벌려고 하지 마라. 한 달에 2천 위안으로 세끼 식사와 의식주가 보장된다면 그 정도에서 멈춰야지 일의 범위를 더 확대해서는 안 된다. 특별히 필요하다면 임시로 추가 근무를 한다든가, 단기 알바를 하는 것은 괜찮다. 생계유지를 위해서라면 그래도 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바는 이것이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합리적이고 합법적이기만 하면, 또 네 능력만 허락한다면, 지식과 관계된 직업이든, 업무 기술에 관계된 직업이든,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든 관계없이 그 직업으로 네 생계만 유지할 수 있으면 된다. 자신의 육적인 생활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이 종사하는 직업을 이상과 바람을 실현하는 발판으로 삼아서 스스로를 시험에 빠뜨리고 늪에 빠뜨린다거나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서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만약 네가 한 달에 2천 위안을 벌어서 개인 생활이나 가정생활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일을 유지하면서 그 나머지 시간에는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고,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너의 사명이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와 의의다. 하지만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것은 단지 정상 인성의 육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네가 종사하는 직업을 통해 벼락출세해서 승승장구하거나 무슨 성과를 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종사하는 직업이 연구 분야와 관련이 있다면 거기에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겠지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실행 원칙은 그대로다. 만일 네 능력에 따라 네가 종사하는 직업에 승진 기회가 생긴다면 많은 수입이 뒤따르게 될 텐데, 이 상당한 수입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범위를 벗어난다면 너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느냐? (거절해야 합니다.) 네가 지켜야 할 원칙은 바로 하나님이 너에게 충고했듯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해결되는 범위를 넘어선다면, 분명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해결되는 범위를 넘어서는 에너지와 시간, 대가를 치러서 그만큼의 경제적 수입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말단 직원인 네가 버는 돈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할 수 있지만, 업무 실적이 좋아서 사장이 너를 업무 관리자나 다른 관리직으로 승진시키고 싶어 한다고 하자. 그러면 수입도 몇 배로 늘어나게 되는데 이 수입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냐? 수입이 높아지면 네가 바쳐야 할 노동력도 그만큼 늘어난다. 노동력을 바치는 데는 에너지와 시간이 요구되지 않느냐? 이렇게 되면 상당한 에너지와 시간을 네가 벌어들이는 돈과 맞바꾸는 셈이다. 너는 돈을 더 벌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돈을 더 많이 버는 동안 너는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게 되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리고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이것은 뻔한 사실이다. 네 에너지와 시간을 돈 버는 데 사용하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데서 오는 수확은 없어진다. 네가 승진한 다음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빼앗기는 바람에 시간이 없어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믿으며 예배드릴 시간이 줄어든다고 해도 하나님이 너에게 은총을 베풀거나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만 따로 예배를 드리게 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 일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만 따로 예배를 드리게 해 주거나 특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도 그 일 때문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을 믿으면서 수확을 얻고 진리를 얻고 싶다면 너 스스로가 시간과 에너지를 확보해야 한다. 이건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은 너에게 정상 생활을 유지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네 수입으로 충분히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고, 육의 생존과 생명 활동을 유지해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데도 네가 만족을 모르고 더 벌려고만 한다면, 그 돈이 네 에너지와 시간을 빼앗아 갈 것이다. 빼앗긴 시간과 에너지는 무엇을 위한 것이냐? 육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육적인 삶의 질이 향상되면 하나님을 믿어서 얻는 바가 줄어든다. 본분을 이행할 시간이 사라지고, 그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 무엇에 빼앗기겠느냐? 육적인 좋은 생활, 육적인 즐거움에 빼앗기는 것이다. 가치가 있느냐? (가치가 없습니다.) 네가 셈을 할 줄 안다면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잘 먹어서 식욕도 채워지고, 잘 입어서 번지르르하고 여유가 넘치고, 명품과 사치품도 늘어나는 등 육이 호강하는 대신, 일은 더 힘들고 어려워져서 그만큼 시간과 에너지를 일에 빼앗긴다. 하나님을 믿는 일 역시 예배에 나가 설교를 들을 시간도 없고,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시간은 더욱 없다. 아직 깨닫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 진리가 있어도 이를 구하고 묵상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 육의 생활은 나아지는 반면 영적 생명은 자라지 않고 시들시들해진다. 이것이 득이냐, 아니면 실이냐? (실입니다.) 실이 너무나 크다! 이 부분을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슬기로운 사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무엇을 얻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의미가 있는지, 득실을 따져 봐야 한다. 승진해서 돈을 더 벌 기회를 만나 육이 더 나은 생활, 더 나은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된다면 너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느냐? 네가 진리를 추구하기 원하고, 진리를 추구할 의지가 있다면 그런 기회는 포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 “너 지금 일한 지 10년이 다 됐잖아. 보통 입사해서 3~5년이면 급여도 오르고 승진하는데, 넌 대우가 그대로야. 왜 좀 더 잘하지 않는 거야? 실적을 더 올리지 그래? 누구누구는 입사 3년 만에 차도 굴리고, 집도 방 하나 거실 하나짜리에서 방 세 개 거실 두 개로 바꿨다고. 갓 입사했을 때는 땡전 한 푼 없는 학생이었는데, 지금은 골드 미스 다 됐지 뭐야. 온몸을 명품으로 도배하고, 고급 호텔 들락거리고, 호화 주택에 차도 좋은 거 끌고 다니잖아.” 남들이 잘사는 걸 보면 너도 안달이 나지 않겠느냐? 기분이 좀 그렇지 않겠느냐? 이런 시험을 이겨 낼 수 있겠느냐? 그래도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겠느냐? 원칙을 견지할 수 있겠느냐? 네가 정말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기 원한다면, 진리 방면에서 수확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 일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한다면, 네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한다면 너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승진에도 마음이 끌리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런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해야지. 내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건 그저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육이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 육의 즐거움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벼락출세를 바라는 건 더더욱 아니야. 나는 승진도 바라지 않고, 높은 연봉도 바라지 않아. 삶의 유한한 시간을 진리를 추구하는 데 쓸 거야.’ 이런 의지가 있으면 흔들리지 않고, 안달이 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누가 승진해서 급여가 올라도, 누가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명품을 걸치고 다녀도, 삶의 질이 너보다 높고 너보다 근사해 보여도 너는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나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추구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억제하지 못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런 장소, 그런 환경에서 만약 진리가 생명이 되지 못하고, 약간의 의지와 참된 깨달음이 없다면 사람은 항상 동요되고 연약해져서 오래가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날이 언제면 끝이 날까? 하나님의 날은 오지도 않네. 회사에서 언제까지 시다바리 역할만 해야 하는 거지? 남들은 다 나보다 잘 버는데 나는 왜 겨우 먹고사는 정도냐고. 하나님은 나보고 돈 많이 벌라는 말씀도 안 해 주시네.’ 누가 너한테 돈 많이 벌지 말라고 하더냐? 능력이 있으면 많이 벌어도 된다. 네가 돈 많이 버는 길을 선택하고, 부자들의 생활, 사치스러운 생활을 선택하겠다면, 그래도 좋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마지막에 진리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이 네 안에서 생명이 되지 못한다면 후회는 네 몫이다. 너는 자신의 행위와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너 대신 대가를 지불해 줄 사람도 없고, 너 대신 책임져 줄 사람도 없다.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구원받는 길,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가기로 선택한 이상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 이왕 선택했으면 그것을 일종의 규례나 계명으로 여겨 지킬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견지하는 바와 선택이 의미 있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에 네가 얻는 것은 진리와 생명이지 규례가 아니다. 자신이 견지하는 바와 선택 때문에 무척 난처하고, 괴롭고, 주변 사람들을 대하기가 힘들다면 견지하지 마라. 굳이 자신을 힘들게 할 필요가 있느냐? 네가 속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바라는 게 있으면 그것을 추구하면 된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교제하는 것은 단지 너에게 하나의 원칙을 알려 줄 뿐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건 모두 명예와 이익, 또 육의 즐거움과 관계가 있다. 돈을 많이 벌려는 목적은 특정 액수에 도달해서 만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벌어서 자기 육을 더 호강시키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명단에 오른 부자가 되기 위함이다. 이렇게 명예와 이익, 지위를 모두 손에 넣는다면 그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그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사람이 치르는 대가는 죄다 육의 즐거움을 위한 것으로, 무의미하고 공허하다. 한낱 꿈처럼 마지막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네가 오늘 만두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만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매일 먹으면 아무래도 좀 물려서 먹지 않게 되지만, 음식을 좀 바꿔서 찐빵도 먹고, 밥도 먹고, 부침개도 먹는 식으로 조절하면 육은 더 건강해진다. 하지만 매일 진수성찬을 먹으면 육은 오히려 망가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 이 길이 옳으냐? (옳습니다.) 어째서 옳으냐? 사람이 평생을 사는 가치가 먹고 입는 것에 있느냐? (아닙니다.) 만약 평생을 사는 가치가 먹고 입는 것이나 육의 즐거움에 있지 않다면 사람이 종사하는 직업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해야지 그 범위를 넘어서면 안 되는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게 하기 위한 목적은 무엇이냐? 육의 정상적인 생존을 위해서다. 생존의 목적은 무엇이냐? 육을 누리기 위한 것도 아니고, 인생의 과정을 누리기 위한 것도 아니며, 사람이 평생 겪는 그런 일을 누리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어떤 일을 해야 가장 가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 추구의 길을 가야 하고, 또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합니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너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피조물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가치 있겠느냐? 모든 피조물에게는 창조주가 맡긴 사명, 자신이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평생의 운명을 정해 주었고, 사람은 그 평생의 운명대로 행해야 한다. 네가 잘 완수했다면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보고할 때 하나님은 흡족해하며 답할 것이다. 네 일생은 수확이 있는 값진 삶이고,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네 생명이 되게 한,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네가 한평생 먹고 입는 것과 향락만을 위해 치열하게 대가를 치르며 살았다면, 끝에 가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너에게 부여한 평생의 임무와 네 사명을 얼마나 완수했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이것저것 헤아려 보니 평생 먹고 입는 것과 즐거움을 위해 에너지와 시간을 쓰기 바빴고 하나님을 믿는 데에는 별로 한 일이 없었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고 끝까지 해내지 못했으며 충성을 다하지도 못했다.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은 조금이나마 있었지만 대가도 별로 치르지 않았고 별다른 수확도 거두지 못했다. 최종 검증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네 생명이 되지 않았고, 네가 여전히 사탄이며, 일을 바라보고 처리할 때도 네가 사람의 관념과 상상, 사탄의 패괴 성품을 따르고 하나님에게는 완전히 적대적이어서 하나님과 합하는 부분이 없다면 너는 버려질 것이고, 하나님도 너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너는 더 이상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닐 것이니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니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것이 합법적이라면 그건 모두 하나님이 안배하고 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네가 종사하는 사업에서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것을 하나님이 지지하고 격려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고, 너에게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또한, 네가 종사하는 직업을 통해 너를 세상으로 내보내고 사탄에게 넘겨서 멋대로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도록 하는 일은 결코 없다. 단지 네가 종사하는 직업을 통해 입고 먹는 최소한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일 뿐이다. 그 밖에도 하나님 말씀에는 네 본분이 무엇인지, 네 사명이 무엇인지, 네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살아 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등 내용이 있는데, 하나님은 이런 것을 다 너에게 알려 주었다. 이것은 네가 평생 살아 내야 할 가치이자 걸어야 할 길이다. 하나님이 말씀한 후 네가 깨달았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네가 일주일에 3일을 일하면 먹고 살 수 있는데도 남은 며칠을 더 일하려고 한다면 본분을 이행하기는 어렵다. 네 협력이 필요한 본분이 있으면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일하고 있어서요. 지금 직장에 있어요.” 너를 찾을 때마다 너는 항상 시간이 없다. 언제 시간이 나겠느냐? 저녁 여덟 시가 지나면 너는 졸리고 지치고 피곤할 것이며 할 생각은 있어도 기력이 달릴 것이다. 일주일에 6일을 일만 하니 전화 연락을 할 때마다 너는 시간이 없다고 한다. 유일하게 시간이 나는 일요일에는 가족과 자식도 챙겨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또 너도 나름대로 충전과 휴식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휴가를 가거나 여가도 즐겨야 하고, 돈도 써야 하고 쇼핑도 해야 한다. 동료들과 친목을 도모하거나 사장 또는 상사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어떤 식의 믿음이냐? 이런 사람은 완벽하게 불신파이다. 교회에 이름만 올리는 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 마라.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관계가 없고, 교회 소속도 아니다. 고작해야 교우에 불과하다. 하나님 집에서 바깥일을 할 사람이 필요할 때 도와주겠다고 대답은 하겠지만 단지 거절하지 않을 뿐이지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언제 와서 할지는 알 수 없다. 막상 온다 하더라도 시간과 마음과 힘을 다 쏟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모든 게 미지수다. 그러다 언제 또 일이 바빠지거나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보름이고 한 달이고 자취를 감춰 연락이 닿지 않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건 진실한 믿음이 아니라 이름만 올리는 것이니 그에게서 하나님 말씀 서적을 회수하고 그를 제명해야 한다. 또 이렇게 말해 줘야 한다. “정 일을 내려놓지 못해서 예배드리고 본분 이행할 시간이 없다면 하나님 집에서도 강요하지 않을 테니 여기서 그만 끝냅시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할 수 있고 높은 수준의 삶의 질에 대한 요구를 포기할 수 있을 때, 시간을 더 내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을 때 정식으로 교회 사람으로 다시 받아들이겠습니다. 만약 그게 안 돼서 남는 시간에만 얼굴을 비추고, 일을 거들고, 형제자매들과 관계를 다지거나 겨우 연락한다면 그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다고 볼 수 없고, 정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뭐라고 부르느냐? (교우입니다.) 교우, 교회의 좋은 벗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교우라고 하는 것이다. 교우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직 관찰 단계에 있고, 정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므로 교회 재적에 포함시키지 않고, 본분 이행 인원으로 치지 않는다. 기껏해야 관찰이 필요한 정도이지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가정 환경이나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서 반드시 일주일에 며칠은 일해야 생계나 자녀 양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경우 우리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일하다 남는 시간에라도 와서 본분을 이행한다면 그럴 때는 정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집 사람으로 치는데, 이는 그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그 기본 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어려움이 있는 사람에게 일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 가족은 부양해 줄 사람이 없어서 굶주릴 수밖에 없다. 그에게 일을 못 하게 하면 누가 그 가족을 먹여 살리겠느냐? 네가 먹여 살릴 것이냐? 따라서 교회 리더와 책임자, 혹은 그들과 관계된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가족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일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자격은 없다. 이런 게 억지로 강요하는 것인데, 그러지 말고 살길은 열어 주어야 한다. 사람은 저 혼자 다른 세상에 사는 것도 아니고, 기계도 아니다. 생존해야 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가 전에도 얘기했지만, 네게 자식과 가정이 있는 이상 너는 가정의 중심 혹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그리고 먹고 입는 최소한의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는 원칙하에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정말 이런 형편에 놓여 있어서 부득이 가정에 대한 책임부터 다한 후 자기 시간을 조정해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 집에서는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이를 허락하고 인정해 준다. 이것이 원칙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제 막 하나님을 믿어서 아직 뿌리내리지 않은 사람에게 반드시 직업을 버려야 한다고, 반드시 가정을 포기해야 한다고, 반드시 이혼해야 한다고, 자녀를 신경 쓰면 안 된다고, 부모를 버려야 한다고 요구할 자격은 없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나님 말씀이 사람에게 지키도록 요구하는 것은 진리 원칙이다. 이 원칙에는 여러 가지 상황, 여러 가지 조건이 담겨 있으므로 다양한 상황과 조건을 근거로 진리 원칙에 따라 요구하고 가늠해야 정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이라는 사안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할 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만약 네가 이것을 간파하지 못하면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구원받을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마지막의 이 시간은 특별한 시기이기도 하다. 한 방면으로는 교회의 사역 사무가 바쁘고 번잡하기도 하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하나님나라 복음이 확산되고 있는 이 시기에 더 많은 사람이 와서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고, 자신의 힘을 보태고, 자신의 본분을 이행함으로써 하나님 집의 여러 사역에서 필요한 부분을 채워 줘야 한다. 따라서 네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자신의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별도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하나님 집에 와 본분을 이행하고 여러 가지 사역에 협력한다면, 이는 하나님 입장에서 바라 마지않는 일이면서 아주 귀한 일이자 하나님께 기억될 만한 일이기도 하다. 물론 사람에게도 이렇게 대가를 치르고 헌신할 만한 일이다. 네가 육의 즐거움을 버린 대신,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하나님 말씀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돈이나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이 귀중한 보물을 네가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서, 또 자신의 노력과 추구를 통해 얻는 일은 너에게 특별한 은혜요, 행운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면 이것은 귀중한 보물이고, 이 보물은 사람이 모든 걸 바쳐서 바꿀 가치가 있다. 그러니 네가 종사하는 직업을 통해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고, 이런 여건하에서 네가 노력과 시간, 에너지를 쏟아 진리를 추구하는 이 길을 선택한다면 이는 좋은 일이고 축하할 만한 일이다. 너는 이 일로 낙담하고 막막함을 느낄 게 아니라 네 선택이 옳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너는 승진할 기회, 급여를 늘리고 소득을 높일 기회, 육적으로 더 나은 삶을 누릴 기회, 혹은 부유한 삶을 누릴 기회를 잃어버린 대신, 구원받을 기회를 잡았다. 그런 것을 잃고, 그런 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은 네 선택이 네 구원에 희망과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뜻이므로 너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반대로 네가 먹고 입는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서 추가로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물질을 누린다면, 육은 만족을 얻겠지만 그것은 자신이 구원받을 희망을 자기 손으로 끊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네 입장에서 틀림없이 좋은 일이 아니다. 너는 이것 때문에 속이 끓고 조바심이 나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이나 생활 태도, 육적인 삶의 질에 대한 요구를 조절하고 육의 생활에 대한 자신의 비현실적인 욕심과 계산, 계획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본분을 이행하겠다고, 하나님 집의 여러 사역에 네 몸과 마음을 모두 쏟아붓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그리고 훗날 하나님 사역이 끝나고 하나님이 각 부류 사람의 사역과 분량을 검증할 때 그중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이 대업을 이룰 때, 하나님나라 복음이 전 우주로 확산될 때, 그 기쁨의 광경이 펼쳐질 때 거기에 네 수고와 노력, 대가도 한몫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얻을 때, 하나님 사역이 전 우주로 확산될 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이룬 대업을 축하할 때, 이런 기쁜 일이 펼쳐질 때 너는 이 기쁨의 당사자이고 그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일원인 것이다. 너는 모든 사람이 기뻐 날뛸 때 이를 갈며 슬피 울고 가슴 치며 슬퍼하는 그런 사람, 징벌받고 하나님께 철저히 혐오받고 내쳐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물론, 좀 더 좋은 건 하나님이 대업을 이룰 때 네게도 하나님 말씀이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너는 구원받은 사람이고, 다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원칙을 어기지 않으며 하나님과 합할 수 있는 사람이다. 또한, 너는 발탁될 기회, 급여가 인상되거나 돈을 벌 기회,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기회 등을 포기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게 아니라 높은 급여, 육의 즐거움, 물질적 우대, 우월한 생활 환경, 사장의 인정과 승진, 발탁 등 네가 당시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요컨대, 사람이 직업에 종사하는 것에 대한 요구 기준이자 사람이 지켜야 할 실행 원칙은 바로 이 한 마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라.”라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여 생명을 얻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일이다. 사람은 육의 욕망과 즐거움을 채우기 위해 진리를 포기하고 바른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사업 측면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두 번째 원칙이다.

오늘은 ‘사업 내려놓기’라는 주제에 관해 두 가지 원칙을 얘기했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잘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원칙을 잘 알았으면 이제부터는 이런 원칙에 따라 자신이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국,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고,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어기는 사람이다. 이렇게 간단하다. 원칙을 지킨다면 진리를 얻을 것이고, 원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진리를 잃어버릴 것이다. 진리를 얻으면 구원받을 희망이 생기고, 진리를 얻지 못하면 구원받을 희망을 잃어버릴 것이다. 사실이 바로 이렇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기로 하자. 안녕!

2023년 6월 10일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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