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제 3 부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한다. 평생 모든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실패와 좌절을 조금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때때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나 좌절 또는 실패가 임하더라도 이는 운이 안 좋은 것이 아니라 네가 마땅히 경험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을 골고루 먹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은 소금 없이는 살 수 없기에 짠 것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신장이 나빠질 수 있다. 어떤 계절에는 신 것을 먹어 줘야 하지만, 너무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 치아와 위에 좋지 않으므로 적당히 먹어야 한다. 신 것, 짠 것, 단것을 모두 먹고 쓴 것도 먹어야 한다. 쓴 음식은 인체의 특정 장기에 좋으므로 먹어 줘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일생도 이렇다. 인생의 각 단계에서 경험하는 사람, 일, 사물 대다수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째서 뜻대로 되지 않느냐? 사람이 다른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명리, 지위, 돈을 추구하고 남들 위에 군림하거나 벼락출세 등등을 추구한다면 99%의 일은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운이 나쁘다느니, 재수가 없다느니 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말이다. 그러나 네가 운이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말을 내려놓고 차분한 마음으로 이러한 일들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다면, 많은 일이 그렇게까지 뜻대로 안 되거나 대처하기 힘든 것만은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네 야심과 욕망을 내려놓으면, 어떠한 불행이 닥쳐도 거부하거나 도피하지 않는다면, 운이 좋고 나쁨으로 이러한 일을 평가하지 않으면, 예전에 불행하거나 나쁘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일들을 이제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바뀌고, 네가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네 심리 상태가 바뀌면서 너는 인생에서 다른 체험을 하게 되는 동시에 다른 수확을 얻게 된다. 이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체험으로, 네게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안겨 준다.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항상 높이 평가받고, 발탁되고, 칭찬과 격려를 받고, 형제자매들의 지지도 많이 얻어서 남들로부터 부러운 시선을 받는다. 이것이 좋은 일이냐? 그게 다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봐요. 저 사람은 자질이 있고 타고나길 복 있게 생긴 데다가, 타고난 것 외에도 자기가 능력을 잘 발휘해요. 게다가 좋은 기회를 만나 발탁됐으니 운이 정말 좋네요!”라며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은 교체되어 일반 신자가 되고, 울며불며 자살하겠다고 하다가 며칠 만에 제명된다. 이는 운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이렇게 보면 그는 운이 너무나 나쁘다. 그의 운이 나쁜 것이 맞느냐? (아닙니다.) 사실 그는 운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은 것이다. 남들이 운 좋다고 하는 일들이 올바른 길을 걷지 않은 그에게 임해서는 시험이 되고, 함정이 되고, 촉매제가 되어 그의 멸망을 앞당겼다. 이것이 좋은 일이냐? 언제나 발탁되기를, 남보다 뛰어나기를,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랐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도태되지 않았느냐? 사람이 올바른 길을 걷지 않으면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운이 좋기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올바른 길이 아니다. 운을 추구하는 사람은 좋지 않은 일, 사람이 보기에 뜻대로 되지 않는 일, 사람이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고 육적인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일은 모조리 거부하고 회피하기 마련이다. 그는 이러한 일이 임하는 것을 겁내고, 피하고, 거부한다. 일이 임하면 ‘재수 없다’라고 표현한다. 스스로 재수가 없다고 생각할 때, 그가 진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구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구하지 못하면서 항상 자기가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겠느냐? (걸을 수 없습니다.) 걸을 수 없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항상 운을 추구하고, 운과 씨름하고, 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은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걷지 않아 언제나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진다. 이는 자업자득이고, 당연한 것이다! 그가 올바르지 못한 길을 걸은 것을 어떡하겠느냐? 그가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지는 것도 마땅하다. 그렇다면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쉬운 일이냐? 사실은 쉽다. 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내려놓는 한편, 매사 잘 풀리고 뜻대로 이루어지고 순조롭기를 추구하지 않으면 된다. 또, 순조롭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겁내고, 반발하고,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반발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순종하는 태도로 하나님이 안배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소위 말하는 ‘행운’을 추구하지 말고, 소위 말하는 ‘액운’을 거부하지도 말고, 자기 마음과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이 행하고 지배하게 두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네게 필요한 것을 제때 네게 필요한 만큼 베풀어 줄 것이다. 하나님은 네게 필요하고 네게 부족한 것에 따라 네게 필요한 환경과 사람, 일, 사물을 배치하여 네가 자신에게 임한 사람, 일, 사물로부터 마땅히 배워야 할 공과를 배우도록 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전제 조건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네 심리 상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완벽을 추구하지 마라. 뜻대로 되지 않는 일, 난처한 일, 순조롭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또, 이렇듯 의기소침한 정서를 가지고서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에 대해 마음속 깊이 반발심을 느끼지도 마라. 예를 들어, 노래하는 사람이 어느 날 목 상태가 좋지 않아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 했다고 치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휴, 운도 없지! 하나님께서는 왜 내 목을 지켜 주시지 않는 거야? 평소에 혼자 부를 때는 잘했는데, 오늘 남들 앞에서는 체면을 구겼어. 음 이탈이 나고 박자도 못 맞췄으니 이게 무슨 망신이람!’ 망신당한 것은 좋은 일이다. 네 부족함과 허영심을 알게 하고, 너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하며, 너 자신이 완벽한 사람이 아님을 똑똑히 알게 한다. 완벽한 사람은 없고 망신을 당하는 것은 정상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망신당할 때가 있고, 난처할 때가 있다. 사람이라면 모두 실패할 수 있고, 좌절을 겪을 수 있으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망신당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네가 망신을 당하고도 창피함을 느끼지 않고 마음이 의기소침해지지 않게 된다면, 이는 네 낯이 두꺼워졌다는 것이 아니라 망신당한 일이 네 평판에 끼칠 영향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고 네 허영심이 더는 네 마음을 점령하지 않는 것이며, 네 인성이 성숙해졌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좋으냐! 이는 좋은 일이 아니냐? 이는 좋은 일이다. 실력 발휘를 못 했다고,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마라. 객관적인 이유를 찾지 마라. 전부 정상이다. 너도 망신을 당할 수 있고, 그도 망신을 당할 수 있고, 모두 망신을 당할 수 있다. 결국에는 누구나 똑같음을, 다들 보통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임을, 남보다 대단한 사람도 없고 남보다 나은 사람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들 망신당할 때가 있으니 누구도 다른 사람을 조롱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인성은 점점 성숙해지고 노련해진다. 비슷한 일이 다시 임했을 때 너는 거기에 구애받지 않으며,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너의 인성이 정상이 되고, 인성이 정상이 되면 이성도 정상이 된다.

운을 추구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현생의 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극단으로 달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잘못된 것을 추구하고 있으니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조금 전에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러한 일을 어떻게 올바르게 대할지를 교제했는데, 이해했느냐? 뭐라고 교제했느냐? (하나님의 지배 일체에 순종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지 말고, 난처한 일이나 순조롭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을 겁내지 말고, 그러한 일이 생길 때 의기소침한 정서로 반발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그 모든 것을 올바른 심리 상태로 대해야 한다.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올바른 방식으로 대하고 해결해야 한다. 잘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실패했다면 다시 하면 된다. 실패는 기껏해야 한 차례 교훈에 불과하다. 반발심을 갖고, 대적하고, 거부하고, 회피하는 것보다는 실패가 낫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임하든, 네가 미래에 직면해야 할 것이 무엇이든, 거부하거나 도피해서는 안 되며, 운의 좋고 나쁨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판단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지배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운이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관점과 심리 상태로 모든 일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을 거부해서는 더더욱 안 되며, 좋지 않은 일을 의기소침한 정서로 대하는 것도 당연히 안 된다. 응당 적극적인 태도와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러한 일들을 맞이하고 대해야 하며, 거기에서 어떠한 공과를 배우고 어떠한 인식을 얻어야 할지 살펴봐야 한다. 이것이 네가 할 일들이다. 이러면 네 사상 관점이 올발라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게 좋지 않은 일이나 불행한 일이 또다시 생겼을 때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네게 올바른 사상 관점이 생기고, 그러면 네 인성과 이성도 정상이 된다. 이를 통해 볼 때 사람이 올바른 관점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따라 운명을 밝히 아는 것이 관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로써 운이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말에 대해서는 충분히 교제했다. 다들 이해했느냐? (네.) 이런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운명에 대해 올바른 관점이 생길 것이다.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지는 데는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성인이 되기 전 또는 성인이 된 이후에 특수한 일을 겪었다. 바로 어떠한 과오를 범했거나 어리석은 일, 우매한 일, 무지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오, 어리석은 일, 무지한 일 때문에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진다. 그들의 의기소침함은 자신을 정죄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이 어떤 사람임을 규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오는 단순히 욕을 한마디 한다거나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하는 등의 사소한 일이 아니라 염치, 인격, 존엄, 심지어는 법률에 관계된 일이다. 그 일을 끊임없이 회상하는 과정에서 의기소침한 정서가 마음속 깊은 곳에 조금씩 누적되며 지금까지 왔다. 그러한 과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조금 전에 말했듯이 성인이 되기 전 또는 성인이 된 이후에 저지른 무지한 일, 어리석은 일, 우매한 일들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일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아느냐? 어리석고, 우매하고, 무지한 일에는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일, 입에 담기도 거북한 일, 남 보기가 부끄러운 일이 포함된다. 어쩌면 아주 더럽고, 비열하고, 질 낮고, 천박한 일일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을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 의기소침한 정서는 단순한 자책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일종의 정죄다. 내가 말한 범위 내에서 생각나는 일이 있느냐? 예를 들어 보아라. (음란한 측면의 일이 있습니다.) 음란도 그중 한 측면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정신적 혹은 육체적으로 아내나 남편을 배신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간음하고 음란한 행동을 저지른 뒤에 단념하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둔다. 어떤 사람은 남의 돈을 사취한 적이 있고 심지어 그 액수가 거액에 달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남의 물건을 훔친 적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과거에 남을 모함하거나 남에게 보복한 적이 있다. 이러한 일 중 일부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있고, 일부는 위법에 해당하며, 일부는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에 있고, 일부는 정상 인성의 윤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사람 내면의 기억 속에 묻혀 있다가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른다. 혼자 있기만 하면, 고요한 한밤중에 잠이 안 올 때면, 자기도 모르게 떠올리게 된다. 마치 영화가 상영되듯 한 장면 한 장면이 머릿속에 재생되며, 지워 버릴 수도, 떨쳐 낼 수도 없다. 매번 떠오를 때마다 의기소침해지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심장이 떨리고, 곤혹스럽고, 마음도 불안해진다. 하나님을 믿게 되었어도 자기가 저지른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지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숨을 수도 없으며,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 일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도, 혹은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어렴풋한 불안감이 존재한다. 그 불안감 때문에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기고, 의기소침한 정서는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참소를 느끼게 한다. 참소가 양심에서 비롯됐는지, 법률에서 비롯됐는지, 아니면 도덕과 윤리에서 비롯됐는지는 너 자신도 딱 잘라 말하지 못한다. 아무튼 그러한 일들을 저지른 적이 있는 사람들은 흔히 무심결에, 혹은 어떠한 특수 상황이 발생했을 때 특수한 환경 배경 속에서 불안감을 느낀다. 이 불안감으로 인해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극도로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지며, 의기소침한 상태가 그를 결박하고 제약한다. 설교를 듣거나 진리를 교제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마음 깊은 곳에서 의기소침함이 서서히 고개를 든다. 그러면 그는 자신을 이렇게 힐책한다. ‘내가 할 수 있겠어? 내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어? 내가 구원받을 수 있겠어? 내가 어떤 인간인데? 과거에 그런 짓을 했으니, 그런 인간이었으니 나는 구제 불능인 게 아닐까? 하나님께서 과연 나를 구해 주실까?’ 때로 어떤 사람들은 의기소침한 정서를 버리고 거기서 벗어나 본인의 진심과 본인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본분, 의무, 책임을 다하며, 더 나아가 몸과 마음 전부를 바쳐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특수한 환경과 배경이 임했다 하면 그런 의기소침한 정서가 다시 우위를 점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렇게 참소한다. ‘너는 그런 짓을 했었잖아. 과거에 그런 인간이었잖아. 네가 구원받을 수 있겠어? 네가 진리를 실행한들 소용이 있을까? 네가 저지른 그 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네가 한 짓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까? 네가 이렇게 대가를 치른다고 해서 예전에 범한 과오를 만회할 수 있을까?’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늘 자책과 참소가 존재하며, 의문과 힐책이 떠나지 않는다. 그는 시종일관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가 저지른 추악한 일 때문에 언제나 내면이 불안하다. 그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몇 년이나 믿었음에도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구원받는 일이 자기와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자기가 과연 사함과 구속을 받을 수 있을지, 자기한테 과연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고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지, 그는 하나도 알지 못한다.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한 정론이 없기 때문에, 그의 깊은 내면은 항상 의기소침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기가 과거에 저지른 짓을 한번 또 한번 떠올리고, 반복적으로 머릿속에서 재생한다. 그 일의 경과를 회상하고, 그 일의 전후를 회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항상 죄악감이 든다. 그 일 때문에 수년간 시종일관 의기소침한 상태다. 본분을 이행하고 어떤 일의 책임자가 돼도 자기는 구원받을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진리 추구를 무엇보다 올바르고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직시한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과거에 범한 잘못, 혹은 자기가 저지른 일이 대부분의 사람이 보기에 몹시 안 좋거나 남들에게 정죄와 버림을 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도 자기를 정죄하리라 여긴다. 하나님의 사역이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든,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했든, 그는 줄곧 진리를 추구하는 일을 올바르게 마주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냐?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그런 일을 체험한 뒤에 최종적으로 얻는 결론이다. 그는 올바른 결론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크고 작은 과오를 범한 사람들이 많을 테지만, 심각한 과오 또는 도덕적 마지노선을 넘어서는 과오를 범한 사람은 얼마 안 될 것이다. 크고 작은 과오를 범한 사람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심각한 과오, 도덕적 마지노선과 윤리에서 벗어난 과오를 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만 이야기하겠다. 심각한 과오를 범한 사람들에 관해 내가 말하는 것은 도덕적 마지노선을 넘어선 과오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정 법령을 거스른 것과 관련이 없다. 알겠느냐? 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거슬렀다고 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모독했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도덕적 마지노선이라는 범위를 벗어난 경우만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과오를 범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로, 아주 간단한 문제다. 우선, 네가 과거에 저지른 일을 마음속에서 내려놓을 수 있다면, 혹은 상대에게 사과할 기회가 있다면, 상대에게 보상할 기회가 있다면, 가서 상대에게 보상하고 사과함으로써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어라. 그럴 기회도 없고 그럴 여건도 되지 않는데 자기에게 문제가 있음을 정말 마음 깊이 깨달았고, 자기가 저지른 일의 성질이 얼마나 심각한지 인식했고, 진정으로 통회한다면, 하나님 앞으로 나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매번 그 일이 떠올라 마음에 참소가 있을 때가 바로 네가 하나님 앞으로 나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때다. 너는 반드시 진심과 진정을 다해 하나님으로부터 사함받고 용서받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함과 용서를 받을 수 있느냐? 이는 네 마음에 달렸다. 네가 진심으로 죄를 인정하고, 자기 잘못과 문제점을 진실로 깨닫는다면, 네가 범한 과오가 됐든 죄업이 됐든, 그 죄를 진실로 인정하는 태도가 네게 있고 네가 정말 그 일을 증오하고 돌아설 의사가 있고, 앞으로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면, 언젠가는 하나님에게 관용과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즉, 하나님이 네가 과거에 범한 무지하고, 어리석고, 더러운 일을 바탕으로 네 결말을 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하나님은 네가 저지른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 너도 다른 정상인과 다를 게 없어진다. 단, 전제는 네게 반드시 진심이 있어야 하며 진정한 태도로 회개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치 다윗처럼 말이다. 다윗은 자기가 범한 과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느냐? 그 양을 헤아릴 수 없다. 몇 번이나 울었느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흘린 눈물을 한마디로 형용하자면 ‘침대가 눈물에 뜰 정도였다’. 네 과오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몰라도 만약 지나치게 심각하다면 너 역시 침대가 눈물에 뜰 만큼 울어야 할 수도 있다. 그 정도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서 하나님에게 용서받아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네 과오는 하나님이 보기에 죄업이 될 테고, 사함받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너는 심각한 상황에 봉착한다. 나머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함과 용서를 얻는 첫 단계는 바로 네가 진심을 갖추고, 진실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실제적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할 필요는 없을까요?” 그럴 필요는 없다. 너 스스로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된다. 불안감이 느껴지고 마음에 참소가 있을 때마다 즉시 하나님 앞으로 나와 기도하고 하나님에게 용서받아라.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기도를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는지 알 수 있나요?” 그 일이 더는 너를 참소하지 않고 네 내면이 더는 그 일로 인해 의기소침해지지 않는다면 결실을 본 것으로, 하나님이 너의 죄를 사하였음이 증명된 것이다. 그 누구도, 그 어떤 힘도, 그 어느 외부 세력도 너를 방해하지 못하고, 네가 그 어떤 사람, 일, 사물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면 결실을 본 것이다. 이것이 네가 첫 단계로 해야 할 일이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에게 사함받기를 부단히 간구하는 동시에, 본분을 이행하면서 반드시 준수해야 할 원칙을 적극적으로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네 과오를 만회하고, 네가 회개하고 돌아섰음을 증명하는 일종의 실제적 행동이자 실제적 모습이고 태도이기도 하다. 이는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이 네게 맡긴 일과 네 손에 맡겨진 본분을 어떻게 이행하고 있느냐? 의기소침한 태도로 대하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는 원칙대로 대하고 있느냐? 너는 충성심을 바쳤느냐? 하나님이 무엇을 근거로 네 죄를 사해야겠느냐? 네게 회개하는 태도가 있었느냐? 네가 무엇을 보여 줬느냐? 하나님에게 사함받고 싶다면 우선 네 진심을 꺼내 보여야 한다. 한편으로는 성실하게 죄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심을 보이며 네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경우는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해낸다면, 정말 네 진심과 성의로 하나님을 감동시켜 네 죄를 사해 주도록 한다면, 너도 남들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을 보는 관점으로 너를 볼 것이요,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너를 대할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는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네게도 행하고, 너를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네게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와 염원이 생길 뿐만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똑같은 방식으로 너를 깨우치고, 인도하고, 너에게 공급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네게 이러한 진심과 간절한 태도가 생겼으니 하나님이 너를 불공평하게 대할 리가 없다.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구원받을 기회를 얻을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심각한 과오를 범한 것은 특수한 경우다. 무서운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이는 아주 엄중한 문제다. 일반적인 패괴 성품이나 일부 올바르지 않은 사상 관점과 달리 이는 확실히 일어난 일이고, 이미 사실이며,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특수하게 대해야 한다. 단, 특수하게 대하든 정상적으로 대하든 양쪽 다 실행 가능한 길과 해결할 방법이 있다. 관건은 네가 과연 내가 가르쳐 주고 알려 준 방식과 방법대로 실행할 수 있는지 여부다. 만약 네가 정말 그 방법대로 실행한다면 네가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진다. 물론 이 모두를 해결하는 목적이 단지 사람을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최종 목적은 의기소침한 정서를 해결함으로써 사람에게 어떠한 사람, 일, 사물이 임했을 때 그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범위 내에서 그 모든 것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도록 하고, 극단적이거나 고집스럽게 굴 게 아니라 한층 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진리를 구하며, 피조물이 응당 다해야 할 책임과 본분을 다하게 하고, 최종적으로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제에 진입하면 사람이 차츰 구원받는 길을 가게 되고, 그러면 구원받을 희망이 생긴다. 이제 심각한 과오로 인해 생겨난 의기소침한 정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그 방법이 분명해지지 않았느냐? (네.)

의기소침한 정서를 해결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냐 아니냐? 나는 꽤 어렵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중대사와 연결되고, 하나님을 믿으며 걷는 길과 연결되고 훗날 구원받을 수 있을지, 헛되이 믿게 되지 않을지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는 중대한 일이다. 표면적으로 사람이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정서일 뿐이지만, 사실상 그 정서가 생겨난 데는 근원이 있다. 갖가지 근원에 대해서 오늘 명확히 교제했고, 근원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생겼다. 그러면 의기소침한 정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론적으로는 해결됐다. 도리를 깨닫고, 도리를 자기가 했던 일과 대조해 보고, 그 도리를 근거 삼아 점진적으로 생활 속의 어려움과 사상 방면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그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다면 점차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면 어떠하냐? (좋습니다.) 바로 이렇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해결하지 않으면 사람 안에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 즉 사상, 마음, 정신상의 문제에 패괴 성품이 더해져 그런 것들이 사람을 단단히 결박한다. 그렇게 결박당하고 얽매인 사람은 언제나 고되고 피곤하게 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끝까지 출구를 못 찾는다. 오늘 교제한 내용을 다 듣고 나서 다시 자세히 되새기고, 도리를 깨달은 후에는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하여 소극적인 정서와 패괴 성품의 각종 내적 상태에서 점차 벗어나야 한다. 거기서 벗어나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고 진리 실제에 진입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네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고 진리 실제를 살아 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너는 대단히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 네 삶에 가치가 생긴다. 너희도 이렇게 살고 싶으냐? (그러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를 원한다. 육적인 부정적 정서와 육적인 정욕, 세상의 풍조, 패괴 성품 안에서 살기는 대부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삶은 너무 고되고 피곤하다. 패괴된 성품 안에서, 부정적인 정서 안에서 살며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부정적 정서 안에서 사는 것은 곧 사탄의 권세 아래서 사는 것이다. 마치 고기 분쇄기 안에서 사는 것과도 같아서, 언젠가는 갈려 죽게 된다. 빠져나오고 싶어도 쉽지 않다. 하지만 네가 만약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곤혹에서,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이 생긴다. 부정적 정서에 얽매이고 그것 때문에 곤혹스러워지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원래는 한 가지 화제를 더 교제하려고 했으나 의기소침이라는 화제를 교제하는 데에 이렇게나 많은 시간을 썼다. 어떤 종류의 일이든 많은 세부 사항이 있기에 몇 마디 말로 다 밝히 설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 방면의 일을 이야기하든 도리만 명확히 알려 줬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많은 방면의 진리와 실정이 관계되어 있고, 사람의 사상 관점이며 처신 방식과 방법, 사람이 걷는 길도 관계되어 있다. 이는 모두 너희가 구원받는 것과 관계가 있다. 어떤 진리나 어떤 화제를 교제하든 대충 할 수는 없기에 갖은 궁리를 하면서 마치 수다쟁이 할머니처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고 있다. 성가시다거나 장황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어떤 화제는 이미 한 번 이야기한 것 같은데 이번에 왜 또 이야기하느냐? 이미 했던 이야기여도 한 번 더 들으며 복습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결론적으로 진리와 관련된 일, 사람이 걷는 길과 관련된 일은 모두 진지하게 대해야지 대충 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할수록 너희는 여러 진리 사이의 관계와 세부적인 차이, 연관 등을 더욱 세부적으로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두리뭉실하게 말한다면, 개괄적인 것만 이야기한다면 너희는 깨닫고 진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너희 스스로 묵상하고 모색하기란 힘들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이야기한 화제들, 즉 운명과 운, 그리고 사람이 예전에 범했던 특수한 과오로 인해 생겨난 부정적 정서 같은 것들은 너희가 생각해 낼 수 없는 것들이다. 생각해 낸다고 해도 출구를 찾지 못한다. 너는 그 안의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특수한 과오라는 문제에 대한 올바른 답안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 네게 있어 이 문제는 영원한 수수께끼고, 줄곧 너를 괴롭히고 옭아매며, 네 마음 깊은 곳에 평화와 기쁨, 자유와 해방감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네가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올바른 방법을 갖추지 못한 점 때문에 네가 구원받는 것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결국 어떤 사람들은 버려지고 도태된다. 어째서냐? 그가 예전에 입에 담기 힘든 일을 저질렀고, 스스로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했으며, 사함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마음이 항상 그 일에 얽매여 있어 진리를 추구할 생각이 없었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건성으로 했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으며, 스스로 자기는 진리를 추구해 봤자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그렇게 소극적인 관점을 가진 채 체험 간증을 이야기하지도 못했고, 진리를 얻지도 못했다. 그때야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니 이러한 일들이 진리에 관계되고 구원받는 데에 관계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일이 네게 없다고 해서, 그에게 없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없다고 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착각하지 마라. 하나 알려 주겠다. 어쩌면 네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지만 아직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너는 과거에 부정적 정서에 빠졌었거나 지금 이미 부정적 정서에 빠져 있지만 네가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말로 일이 터지면 그러한 정서가 네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엄중한 결과를 가져온다. 너는 깊이 성찰해야 비로소 네가 이미 부정적 정서에 빠진 지 수년 또는 더 오래됐음에도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일은 사람이 부단히 묵상하고, 반성하고, 인식하고, 체득하고, 경험해야만 차츰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결국에 이를 발견하는 것은 네게 있어 대단히 좋은 소식이고 구원받을 절호의 기회다. 네가 발견하게 될 때가 네가 벗어날 기회 혹은 벗어날 희망이 있게 될 때이다. 그럼 오늘 한 말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진리든, 그 어떤 내용이든, 그 어떤 말이든 사람이 하루 이틀 만에 완벽히 이해하거나 체험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진리와 관계된 이상 곧 인성과 관계되고,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계되고, 사람이 걷는 길과 관계되고,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진리도 소홀히 하지 말고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당시에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이 진리에 근거해 자기한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성찰하지 못했더라도, 몇 년 후에는 이 진리가 너를 패괴 성품의 통제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해 줌으로써 너를 구원하는 귀한 진리가 될 수도 있다. 그때가 되면 이런 진리가 올바른 인생길을 걷도록 너를 인도할 것이며, 8년, 10년 정도 지나면 이런 말이, 이런 진리가 네 사상 관점을 완전히 바꿔 놓고 네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도 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자. 다음에 보도록 하자!

2022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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