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제 1 부

지난 예배에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중요한 주제를 교제했다.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어떤 교제가 있었느냐? (그때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교제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내려놓기’이고, 다른 하나는 ‘몰입하기’입니다. ‘내려놓기’ 방면으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존재하는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언급하셨는데, 주요하게는 열등감, 분노, 증오와 같은 부정적 정서가 저희의 본분 이행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교제하셨습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교제를 통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예전과는 다른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부정적 정서를 매일 드러내면서도 저희가 항상 그것을 등한시하고, 평소에 부정적 정서를 분별하거나 인식하려 하지 않으며, 자기는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독단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정적 정서를 가진 채로 본분을 이행하면 그 정서가 본분 이행의 성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저희가 생활 속에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쳐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서기 어렵게 합니다.) 지난 예배에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를 교제했다. 실행 방면으로는 크게 두 개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내려놓기’, 다른 하나는 ‘몰입하기’였다. 첫 번째 길인 ‘내려놓기’를 보겠다. 지난번에 ‘내려놓기’의 첫 번째 내용과 관련된 주요 문제를 정리했고, 갖가지 정서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정서는 주로 부정적 정서를 가리킨다.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양심과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 정서다. 그중에서도 주로 열등감, 증오, 분노와 같은 부정적 정서,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 정서 속에서 사는 모습에 대해 교제했다. 또, 일부 특수한 환경 및 특수한 성장 배경으로 인해 생겨난 갖가지 부정적 정서, 혹은 비정상적인 성격이 반영된 부정적 정서에 대해 교제했다. 왜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아야 하겠느냐? 이러한 정서가 객관적으로 볼 때 사람에게 부정적인 심리 상태와 관점을 심어 주고, 사람과 일, 사물 앞에서 취하는 입장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려놓기’에서 첫 번째로 실행해야 할 것은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일이다. 지난번에 우리는 갖가지 부정적 정서에 대해 조금 교제했었다. 물론 지난번에 교제한 열등감, 증오, 분노와 같은 부정적 정서 외에도 정상 인성과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 정서가 있다. 이러한 정서는 정상 인성의 양심, 이성, 사유,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사람이 진리를 추구해 얻는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부정적 정서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오늘도 이어서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에 관해 교제하겠다. 우선 부정적 정서가 어떤 모습으로 표출되는지 교제하고, 이를 통해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인식하는 동시에 자신과 대조해 볼 수 있게 하고, 그런 다음 일상생활에서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깨닫고,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사람에게 심어 주는 갖가지 부정적 사상 관점 혹은 일을 바라보는 비정상적인 각도와 비정상적인 입장을 인식하고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게 될 것이다.

지난번에 ‘의기소침’이라는 부정적 정서를 언급했었다. 먼저, 의기소침이라는 정서가 보통 사람에게 존재하는지 보자. 너희는 의기소침하다는 게 어떤 느낌이며 어떤 마음이고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느낄 수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문제다. ‘의기소침’에 대해 폭넓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모습 중 어떤 것들이 의기소침이라는 정서로 인한 것인지만 이야기하겠다. ‘의기소침’의 의미가 무엇이냐? 정서가 다운되고, 기분이 안 좋고, 무슨 일을 해도 흥이 안 나고, 의욕과 동력이 없고, 일을 하는 태도가 비교적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의지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습을 초래한 근원은 무엇이냐?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분석할 주요 문제다. 의기소침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다양한 형태와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사람에게 심어 주는 갖가지 심리, 사상, 그리고 일을 처리하는 태도를 알아본 다음에는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즉 사람에게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생기는 배경에 어떤 근원이 존재하는지 알아봐야 한다. 사람은 왜 의기소침해지느냐? 왜 일을 처리할 동력이 없느냐? 왜 항상 일 처리가 대단히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의지가 없는 것이냐?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네가 본 어떤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언제나 유독 의기소침하고, 수동적이고, 기운이 없다고 치자. 그는 정서와 태도가 그다지 적극적이거나 낙관적이지 않다. 항상 소극적이고, 남 탓만 하며, 자포자기하는 태도를 보인다. 네가 설득해 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도 네가 말한 길이 맞고 네가 말한 도리가 훌륭하다고 인정하지만, 막상 일을 처리할 때는 힘을 못 내고 여전히 소극적이며 수동적이다. 심각할 때는 그의 팔다리가 움직이는 모양과 자세, 걸음걸이, 말하는 톤, 어휘 선택만 봐도 정서가 몹시 의기소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기운이 없는 게 꼭 소금 먹은 푸성귀 같아서 누구든 그와 오래 같이 있으면 영향을 받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사람이 의기소침한 정서 속에서 살면서 보이는 갖가지 행동, 표정, 말투, 더 나아가 그 사람이 드러내는 일부 사상 관점에서도 소극적인 성질이 묻어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정적 현상을 일으킨 그 이면의 원인은 무엇이냐? 그 근원은 어디에 있느냐? 물론, 의기소침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생겨난 근원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중 어떤 부류의 사람은 항상 자기 팔자를 탓해서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기기도 한다. 이것이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농촌 혹은 빈곤 지역에서 살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그의 집에는 간단한 가구만 몇 개 있을 뿐, 귀중한 물건은 없다. 옷도 한두 벌이 전부이고, 낡아 빠졌더라도 입어야 한다. 평소에 맛있는 것도 잘 챙겨 먹지 못하고, 고기를 먹으려면 명절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예 헐벗고 굶주릴 때도 있다. 큰 그릇에 고기를 잔뜩 담아 놓고 먹는 것이 꿈이지만, 이루기가 어렵다. 과일 한 번 먹기도 힘들다. 그는 이러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대도시에 살면서 능력 있는 부모를 뒀고,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을 수 있고, 입고 싶은 옷도 마음껏 입을 수 있고, 누리고 싶은 모든 것을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고, 식견도 있는 사람들과 자기는 다르다고 느낀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남들은 팔자가 얼마나 좋아. 그런데 내 팔자는 왜 이 모양이지?’ 그는 항상 두각을 나타내려 하고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운명을 바꾸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는데 바꾼다고 무엇이 얼마나 바뀌겠으며, 좋아진다고 한들 얼마나 좋아질 수가 있겠느냐?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해서는 뭘 하든 벽에 부딪히고 어디를 가든 꼭 괴롭히는 사람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재수 없다고 여긴다.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지? 왜 항상 저열한 인간을 만나는 거야? 어려서 팔자가 사나웠던 건 그렇다 쳐도, 커서까지 팔자가 이렇게 안 좋다니. 나를 드러내고 싶어도 기회가 없어. 기회가 없는 건 그렇다 쳐. 그냥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어서 잘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도 못 이룬단 말이야? 잘 사는 게 나한테는 왜 이렇게 아득한 일인 거지? 상류층의 삶을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 최소한 도시 사람처럼 살기라도 하고 싶어. 남들한테 무시당하지 않고 2등, 3등 시민 취급을 당하지 않으면서. 적어도 누가 나를 부를 때 ‘어이, 이 자식아, 거기 너, 이리 와!’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내 이름을 부르고 존칭을 붙여 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그런 존칭 하나도 못 듣지. 무슨 팔자가 이 모양이람?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생해야 해?’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고생스러웠지만,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는 참도임을 알아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예전에 했던 고생은 다 가치 있는 것이었어. 모든 게 하나님의 지배이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야. 하나님의 행사는 너무나 좋았어. 그런 고생이 없었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 거야.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운명도 바뀌겠지. 그리고 교회에서는 형제자매들과 평등하게 생활할 수 있어. 나를 ‘형제’ 혹은 ‘자매’라고 불러 주니 나한테도 존칭이 생긴 거야. 사람들한테 존중받는 기분이 들어.’ 운명이 바뀐 것 같고, 예전처럼 고통스럽지 않은 것 같고, 더는 팔자 사나운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 것이다. 하나님을 믿게 된 그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열심히 이행하기로 다짐한다. 괴롭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매사에 다른 사람들보다 고생하고, 많은 사람의 지지와 높은 평가를 얻고자 노력한다. 나중에는 리더나 책임자, 또는 팀장으로 뽑힐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러면 조상과 가문을 빛내는 것 아니냐고, 그러면 운명을 바꾼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그는 실의에 빠진다. ‘나는 하나님을 오래 믿었고 형제자매들과도 잘 어울려 지냈어. 그런데 리더, 책임자, 팀장을 뽑을 때마다 왜 내 차례는 안 오는 거지? 생긴 게 너무 평범한 탓일까? 아니면 사람들 눈에 띌 만큼 비범한 일을 못 해서 그런가? 선거가 있을 때마다 한 줄기 희망을 품은 채 팀장으로 뽑혀도 좋겠다고 생각해. 난 하나님께 보답하고 싶어서 가슴이 뜨거운데, 선거가 있을 때마다 실망하게 돼. 번번이 나와는 인연이 안 닿아. 왜 이렇지? 정말로 나는 한평생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 보통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사람밖에 될 수 없는 건가? 어린 시절, 젊은 시절, 중년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쭉 이렇게 평범했어. 아무것도 이룬 게 없지. 야심이 없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야. 자질이 떨어지느냐, 그것도 아니야. 노력을 덜 한 것도 아니고 고생을 견디지 못한 것도 아니야. 나한테는 의지가 있고 목표가 있어. 더 나아가 야심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좀처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걸까? 결국은 내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고 운이 나쁘기 때문이야. 하나님께서 이렇게 안배하신 거야.’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난 것 같다고 느낀다. 평소에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떠한 건의 사항이나 관점을 내놓는 족족 반박당하고, 아무도 듣지 않고 안중에 두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의기소침해져서 이렇게 생각한다. ‘아, 다 내 팔자가 나쁜 탓이야! 어느 그룹에 가든 꼭 저열한 인간이 내 발목을 잡고, 날 짓누르려 들어. 어느 그룹에 가든 존중받지 못하고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해. 결국, 한마디로 말해 팔자를 잘못 타고난 거지!’ 어떤 일이 임하든 그는 항상 자기 팔자 탓으로 돌리며,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는 점에 집중하고, 더 깊이 인식하고 납득하려 한다. 이러다 보면 그의 정서는 점점 더 의기소침해진다. 본분을 이행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휴! 팔자가 이 모양인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어?’ 예배 시간에 다른 형제자매들은 모두 교제하는데 자기는 아무리 궁리해 봐도 별로 인식이 없으면 또 같은 생각을 한다. ‘어휴! 팔자가 이 모양인데 무슨 인식이 있겠어!’ 남이 자기보다 말을 잘하고, 교제하는 인식도 분명하며 빛 비춤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의 정서는 더 의기소침해진다. 남이 기꺼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면서 본분 이행에 성과를 내 형제자매들의 지지를 받고 발탁되는 것을 보면 그는 내심 씁쓸해진다. 남이 리더 일꾼이 된 것을 보면 그의 정서는 더욱더 의기소침해진다. 심지어는 남이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추는 것만 봐도 자기는 그 사람만 못하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진다.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이 임하든, 어떤 환경이 임하든, 그는 의기소침이라는 정서로 대응한다. 남이 멋진 옷을 입은 것만 봐도, 남의 머리 모양이 보기 좋기만 해도, 그는 속상해하고 질투와 부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에는 언제나처럼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진다. 그가 스스로 도출해 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어휴! 다 팔자를 잘못 타고난 탓 아니겠어? 내 얼굴이 지금보다 조금만 낫고, 남들처럼 번듯하고, 키가 크고, 몸매가 좋고, 옷도 잘 입고, 돈도 많고, 좋은 부모님이 있었다면 지금 같지는 않았을걸? 그랬으면 남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부러워하고, 질투하지 않았겠어? 결국은 내가 팔자를 잘못 타고난 거야. 누구를 원망하겠어. 팔자가 나쁘면 엎어져도 코가 깨지고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법이야. 팔자를 잘못 타고난 걸 어쩌겠어.’ 마찬가지로 그는 책망 훈계가 임하거나 형제자매의 지적, 비판, 건의를 받을 때도 의기소침이라는 정서로 대응한다. 요컨대, 자기한테 벌어진 일이든 아니면 주변의 일이든, 모든 일에 의기소침한 정서로부터 나온 갖가지 부정적 사상 관점과 태도, 입장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항상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이 부류의 사람들은 마음이 커다란 바위에 짓눌려 있는 것과 같다. 자기에게 임한 일들이 모두 나쁜 운명으로 인한 것이라고 여기는 까닭에 무슨 일이 임하든 사람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소극적이 되어 일을 게을리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에이, 그냥 이렇게 대충 살자!’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은 책망 훈계가 임하면 자신을 반성하면서 말한다. ‘왜 내게 책망 훈계가 임했을까? 내가 한 일 중에 어떤 일이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 것일까? 내가 무슨 패괴 성품을 드러냈을까? 나는 충분히 깊게,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인식하고 해결해야 할까?’ 등등의 말을 말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그는 책망 훈계가 임하면 상대가 자기를 얕본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마음대로 책망한다고 생각한다. 책망하지 않으면 그나마 의기소침함이 덜하지만, 일단 책망했다 하면 그는 훨씬 심각하게 의기소침해진다. 다른 사람은 책망이 임해서 며칠 소극적인 상태에 빠졌다가도 하나님 말씀을 읽고 형제자매들이 도와주고 붙들어 주면, 진리를 받아들이고 점차 돌아서서 소극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고 여기는 부류는 소극적인 정서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팔자가 나쁘다고 더 강하게 확신한다. 어째서냐? 그는 하나님 집에 와서도 자기가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번번이 책망이나 받으며 희생양이 된다고 생각한다. ‘봐, 남들은 똑같은 일을 해도 책망받지 않는데 왜 나만 책망받는 거냐고! 이게 다 팔자를 잘못 타고난 탓 아니겠어?’ 그는 이렇게 의기소침해지고 자포자기한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듣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책망을 받아도 그때뿐이지만, 저는 아니에요. 저는 뭘 어떻게 해도 잘 안된다고요. 애초에 타고나길 책망받을 팔자니 누굴 탓하겠어요. 팔자를 잘못 타고난 걸 탓할 수밖에요.” 그는 항상 자기 팔자가 나쁘다고 여기며 한평생 그냥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어떻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본분 이행에 합격할지 알려 줘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는 시종일관 자기 팔자가 나쁘다고 믿으므로 진리를 추구해 구원받는 것처럼 좋은 일은 틀림없이 자기와 관계가 없으리라 여긴다. 그래서 본분도 그다지 열심히 이행하지 않는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굳게 믿는다. ‘팔자가 나쁜 사람은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없어. 본분을 잘 이행하는 건 다 팔자가 좋은 사람들이야. 팔자가 좋은 사람은 어딜 가나 환영받고 만사형통이지. 나처럼 팔자가 나쁜 사람은 번번이 저열한 인간과 부딪치고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기분이 안 좋아. 하는 일마다 재수가 없다고!’ 스스로 팔자가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정서가 저조하고 의기소침하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건 입에 발린 소리일 뿐이고 자기처럼 팔자가 나쁜 사람은 어차피 결실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는 진리를 추구해 봤자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 여기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팔자 나쁜 사람이 무슨 수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겠어? 팔자 나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데?’ 스스로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를 이렇게 규정한다. ‘나는 팔자를 잘못 타고나서 처음부터 운명이 기구했어. 그러니까 마지막에 남아서 봉사자만 될 수 있어도 다행이야. 그것만 해도 조상님이 덕을 쌓아서 얻은 경사지. 나는 팔자가 나쁘니까 눈에 안 띄는 본분이 어울려. 밥을 한다든지, 청소한다든지, 형제자매들의 아이를 돌본다든지, 자질구레한 잡무를 한다든지, 그런 것 말이야. 하나님 집에서 얼굴을 내미는 일은 아마 한평생 나와 인연이 없을 거야. 봐, 뜨거운 가슴으로 하나님 집에 왔지만 결국은 어떻게 됐지? 밥하고 힘쓰는 사람이 됐어. 아무리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그걸 아는 사람도 없고, 봐 주는 사람도 없고,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어. 이게 팔자가 사나운 게 아니면 뭐겠어? 남들은 주연도 맡고, 단역도 하고, 영화며 영상물을 연달아 찍어 얼마나 체면이 서겠어! 하지만 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 이 얼마나 기구한 팔자인지! 난 팔자가 너무 안 좋아! 팔자 잘못 타고났다고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어? 나밖에 더 있어? 그래, 이번 생은 그냥 되는대로 살자.’ 그는 이러한 부정적 정서 속으로 점점 더 깊게 빠져든다. 그는 자신의 부정적 정서가 무엇이고, 왜 생겨났으며, 그것이 팔자의 좋고 나쁨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반성하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진리를 구해 이러한 문제를 명확히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팔자가 나쁜 게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덮어놓고 고집한다. 그 결과, 그런 소극적인 정서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결국에는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는 생각에 자포자기하고 그럭저럭 되는대로 밥만 축내고 살아가면서 죽을 날을 기다린다. 그럼으로써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고, 구원받는 등 하나님의 요구에 흥미가 점점 떨어지고, 심지어는 갈수록 배척하고 거부하게 된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 팔자가 안 좋은 것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이자 근거로 삼는다. 그는 자기에게 임한 환경 속에서 자기의 패괴 성품과 부정적 정서를 분석하여 그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늘 팔자가 안 좋다는 점을 내세워 자기에게 임하고 자기가 체험한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 대응한다. 그 결과 의기소침한 정서에 더 깊이 빠져든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의기소침한 정서가 옳은 것이냐? (옳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옳지 않으냐? (제 생각에 그러한 정서는 비교적 편향적입니다. 그는 어떤 일이 임하든 무조건 팔자가 안 좋아서 그런 것으로 해석하고 규정합니다. 일이 임했을 때 자기한테 왜 그런 문제가 생겼는지 반성하거나 정리하지 않으며, 구하거나 묵상하지도 않습니다. 완전히 규정하는 것이자 편향적인 대처법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편향적이고 터무니없는 대처법이 나온 것이겠느냐? 그에게 그런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긴 근원이 무엇이겠느냐? (제 생각에는 그에게 그러한 정서가 생겨난 근원은 그가 걷는 길과 추구의 근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내면에는 야심과 욕망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남과 경쟁하고, 남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야심과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그의 내면에 그런 부정적인 정서가 생깁니다.) 너희는 이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팔자’에 대한 그의 견해가 잘못됐다는 점이다. 그는 항상 팔자가 좋거나 운이 형통하고 순조롭기를 추구하며, 늘 사람의 팔자를 본다. 그런 것을 추구하다 보면 무엇이 뒤따라오느냐? 갖가지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남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즐기는지 보고 자기 상황과 대조한다. 각 방면에서 자기가 뒤지고 남보다 못한 것 같으면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사실, 반드시 그의 조건이 가장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대조하고 비교한다. 언제나 ‘팔자’에 대해 열심히 궁리하고, 관찰하고, 깊이 연구한다. 무슨 일이든 팔자의 좋고 나쁨이라는 각도로, 그러한 관점으로 가늠한다. 그렇게 가늠하다가 자기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게 되고, 길이 없으면 결국 소극적인 상태에 빠진다. 그는 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의 관점으로 모든 일의 겉모습만 따져 보며, 일의 본질은 보지 않는다. 이는 어떤 잘못을 범한 것이겠느냐? 그의 사상 관점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운명에 대한 견해 역시 올바르지 않다. 사람의 운명은 무엇보다도 심오한 것이다. 명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간단한 사주나 생시만으로 한 사람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 설명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비밀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한 운명이 대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사람의 육적 안목이나 무속인의 안목으로 보고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한 사람이 일생 동안 부귀영화를 얼마나 누렸고, 고생을 얼마나 했으며, 명리와 장래를 추구하는 과정이 순조로웠는지 아니었는지에 근거해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이 심각한 오류를 범한다. 물론, 이는 많은 사람이 자기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가늠하더냐? 세인들이 무엇으로 한 사람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하더냐? 주요한 근거는 그 사람의 일생이 순조로웠는지, 부귀영화를 누렸는지, 상류층의 삶을 살았는지, 평생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얼마나 즐겼는지, 그리고 수명이 얼마나 길었는지, 어떤 직업에 종사했는지, 힘들게 살았는지 아니면 편안하게 살았는지 등등이다. 이러한 것들로 한 사람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한다. 너희도 이렇게 가늠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너희 다수는 잘 풀리지 않는 일이 임하거나, 고난의 날들이 임하거나, 혹은 상류층의 삶을 누리지 못하면 자기 팔자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진다.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는 사람의 팔자가 정말로 나쁘리라는 법은 없고, 자기가 팔자를 잘 타고났다는 사람의 팔자가 정말로 좋으리라는 법도 없다. 여기서 좋고 나쁨을 도대체 어떻게 가늠하겠느냐? 하나님을 믿으면 팔자가 좋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팔자가 나쁘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겠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너희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 정말 팔자가 안 좋은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팔자가 좋은 사람이 있고 팔자가 안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냐? (아닙니다.) 너희의 이유를 말해 보아라. 어째서 틀린 말이냐? (제 생각에 팔자가 좋고 나쁘고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팔자가 좋고 나쁘고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과 관계가 있겠느냐? 사람이 걷는 길과 관계가 있겠느냐, 아니면 사람이 추구하는 것과 관계가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면 팔자가 좋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팔자가 사나운 것이냐? 과부의 팔자는 좋은지 나쁜지 말해 보아라. 세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과부의 팔자는 좋지 않다. 만약 삼사십 대에 과부가 됐다면 팔자가 좋지 않고 심히 사나운 것이다! 하지만 과부가 혼자 살며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하나님을 믿게 됐다면, 그래도 팔자가 사나운 것이냐? (사납지 않습니다.) 과부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형편이 좋고, 뭐든 뜻대로 되고, 기댈 곳이 있고, 생활 조건이 풍족하고, 자손이 많고, 삶이 여유롭고, 고난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정신적으로 필요한 것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네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그들은 안 믿는다. 어느 쪽의 팔자가 좋은 것이겠느냐? (과부 쪽이 팔자가 좋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됐기 때문입니다.) 보아라. 과부는 세인들이 보기에 팔자가 좋지 않고 고생이 심했기에 돌아서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즉, 하나님을 믿고 따른 것이다. 이는 팔자가 좋아지고 복을 누리게 된 것이냐? (그렇습니다.) 원래 좋지 않았던 팔자가 좋아졌다. 팔자가 좋지 않다고 하면 평생 운명이 순탄치 않을 것이며, 이는 바꿀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변화가 일어난 것이냐? 하나님을 믿게 됐기 때문에 팔자가 바뀐 것이냐? (아닙니다.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 것입니다.) 일을 대하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팔자’라는 객관적인 사실은 바뀌었느냐? (바뀌지 않았습니다.) 과부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남편이 있는 여자들을 내심 부러워했다. ‘저 여자는 팔자가 정말 좋네. 남편이 있고, 가정이 있고, 생활이 단란하고, 삶이 행복하고, 과부로 사는 고통을 안 당하잖아.’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는 ‘난 하나님을 믿게 됐어. 하나님께서 택하셨기에 난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얻을 수 있어. 나중에는 구원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 내 팔자가 얼마나 좋은지 봐! 저 여자는 과부가 아니지만, 저게 무슨 팔자야? 늘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명리와 지위를 추구해. 사회에서 잘나가고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나중에 죽으면 지옥에 갈 거야. 저 여자는 팔자가 안 좋아. 내 팔자가 저 여자보다 나아!’라고 깨닫는다. 시각이 변했지 객관적인 사실이 변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여자는 여전히 이렇게 생각한다. ‘흥, 내 팔자가 당신보다 좋거든! 당신은 과부지만, 난 아니야. 내 삶이 당신 삶보다 나아. 난 팔자가 좋아!’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보기에 그녀의 팔자는 좋지 않다. 그렇다면 이 변화는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이냐? 객관적인 환경이 변했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각이 변한 것이냐? (사물의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기준이 변한 것입니다.) 그렇다. 사물을 가늠하고 일을 대하는 관점이 변했다. 과부가 아닌 사람의 팔자를 좋게 보다가 안 좋게 보는 것으로 바뀌었고,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하다가 팔자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두 가지 견해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객관적인 사실과 환경은 그대로인데 어째서 일을 바라보는 최종 결과는 변한 것이냐? (진리를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인 후 일의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관점에 정확한 기준이 생긴 것입니다.) 일을 바라보는 관점은 변했다. 하지만 사실은 변했느냐? (아닙니다.) 과부는 여전히 과부고, 행복하게 사는 여자는 여전히 행복하게 산다. 객관적인 사실은 전혀 변한 게 없다. 그렇다면 결국 누구의 팔자가 좋고 누구의 팔자가 안 좋은 것이냐?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겠느냐? 예전에 과부가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한 것은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생활 환경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환경이 그녀에게 심어 준 일종의 사상 관점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에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음에 따라 그녀의 사상에도 변화가 생겼고 일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는 자기를 더는 팔자가 안 좋은 사람이 아닌 팔자가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일 기회를 얻고 진리를 깨달아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이 예정한 일이고, 이는 누구보다도 복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 오로지 진리 추구에만 집중한다. 추구하는 목표가 예전과는 달라졌다. 생활 조건, 생활 환경, 생활의 질은 여전히 예전과 같고 바뀐 게 없지만,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생겼다. 사실상 그녀의 팔자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으로 인해 좋아진 것이냐? 그건 아직 장담할 수 없다. 다만 그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희망이 생겼고, 심리적인 만족감을 얻었을 뿐이다. 추구하는 목표도 달라졌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었다. 그래서 현재의 생활 환경으로부터 행복, 만족, 기쁨, 평안을 느끼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팔자가 꽤 좋다고, 과부가 아닌 여자보다 훨씬 낫다고 여긴다. 이제야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했던 예전의 관점이 틀렸다고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팔자가 좋고 나쁘다는 것이 과연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

일생의 운명이 어떨지는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에 정했으므로 바꿀 수 없다. 팔자가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도 다르고, 환경에 따라서, 사람의 자아 감각, 추구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러므로 ‘팔자’는 좋고 나쁨과 관계가 없다. 너는 아주 힘들게 살면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무슨 대단한 걸 바라지 않아.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다면 만족해. 살면서 고생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세인들이 자주 하는 말도 있잖아. 비바람을 겪지 않고 어떻게 무지개를 보겠느냐고, 고생하는 것도 값진 일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이 정도가 무슨 고생이야? 이건 팔자가 나쁜 게 아니야. 하늘이 내게 약간의 고통과 고난을 주고 단련시키는 건 나를 중히 여기기 때문이야. 나는 팔자가 좋은 거라고!’ 그런가 하면 고생은 나쁜 일이고 팔자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고생 없이, 생활이 안락하기만 해야 팔자가 좋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를 두고 개인마다 관점이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팔자’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 팔자가 좋다, 혹은 팔자가 나쁘다는 말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말은 없다. 너는 하나님을 믿으니 곧 팔자가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바른길을 걷지 않아 징벌을 받고, 드러나고, 도태됐을 때는 대체 팔자가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드러나고 도태될 일도 없다. 이방인들과 종교계에서는 사람을 드러내거나 분별하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제명되거나 도태된다는 말도 없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그 사람은 팔자가 좋은 것이겠지만, 마지막에 징벌을 받는다면, 그렇다면 다시 팔자가 안 좋아진 것이냐? 한순간 팔자가 좋았다가, 또 한순간 팔자가 나빴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쪽인 것이냐? 팔자는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논할 수 없는 일이다. 전부 하나님이 행한 것이다. 하나님의 안배는 모두 훌륭하다. 다만, 사람마다 운명의 궤적이라든지 처한 환경이 다르고, 각자에게 임하는 사람과 일이 다르며, 한평생 경험하는 인생의 궤적이 다른 것이다. 저마다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각각 다른 생활 환경과 성장 배경을 안배했다. 한평생 겪는 일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이른 바 좋은 팔자나 나쁜 팔자는 없다. 하나님이 모두 다 안배해 두었으며, 전부 하나님의 행사다. 하나님의 행사라는 관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훌륭하고 옳다. 다만, 개인의 취향, 느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안락한 생활, 명리, 명망, 세상에서의 성공, 개인적 영달을 선택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가져야 좋은 팔자라고 생각한다. 평생 제대로 이룬 것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면서 언제까지나 사회 밑바닥에 머문다면 팔자가 좋지 못한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이방인 혹은 세인들이 세상을 추구하는 각도에서, 세상에서의 생존을 추구하는 각도에서 논한 것이다. 그래서 팔자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말이 생겼다.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은 운명에 대한 인간의 편협한 인식과 깊이 없는 감성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또한 사람이 육적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얼마나 누렸는지, 명예와 이익을 얼마나 얻었는지 등등을 논지의 출발점으로 삼는 탓에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이 나온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안배하고 주재한다는 점에 입각해서 이야기하자면,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은 존재할 수가 없다. 맞지 않느냐? (맞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라는 각도에서 사람의 운명을 논한다면 하나님의 행사는 전부 훌륭하고 개개인에게 필요한 것이다. 전생과 현생의 인과가 있고, 하나님의 정함과 주재,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안배가 있기에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그러면 이러한 방면에서 볼 때, 사람은 자기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멋대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만약 사람이 이를 멋대로 평가한다면 지극히 심각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계획, 안배, 주재를 사람이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는 심각한 잘못이 아니냐? 사람이 한평생 걷는 길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잘못이 사람을 망쳐 버린다.

사람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해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선은 왜 너에게 이러한 운명과 이러한 생활 환경을 안배했는지, 왜 너에게 이러한 일이 임하게 하고 너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겪게 했는지, 네 운명이 왜 이러한지를 창조주에게 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네가 마음속으로 갈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한편,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인식해야 한다. 알아보고 인식한 다음에 사람이 할 일은 반항도, 선택도, 거부도, 반발도 아니며 도피도 아니다.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사람이 할 일은 순종하는 것이다. 왜 순종해야 하느냐? 너는 피조물이고 네 운명을 지배할 수도, 주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네 운명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너는 운명 앞에서 수동적이고 선택권이 없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순종뿐이다. 선택하려 들지 말고 도피하려 들지 마라. 하나님과 흥정하려 들지도 말고 맞서거나 불만을 품지도 마라. “하나님께서 안배해 주신 팔자가 안 좋습니다. 저는 팔자가 사나워요. 제 팔자는 남들만 못해요.”라거나 “저는 타고나길 팔자가 별로라서 복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좋게 안배해 주시지 않았어요.” 등의 말은 당연히 더더욱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모두 판단하는 말이며 주제넘은 말이다. 피조물이 할 말이 아니고, 피조물이 가져야 할 관점과 태도도 아니다. 정반대로, 너는 운명에 대한 갖가지 잘못된 이해와 정의, 잘못된 견해와 깨달음을 내려놓는 동시에, 올바른 태도와 입장을 가지고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준 운명 속에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한다. 반항해서는 안 되며, 의기소침한 정서를 지닌 채로 불공평하다면서 하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의 안배가 안 좋다고, 네게 최고의 운명을 안배해 주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운명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피조물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없다. 하나님은 네게 그럴 의무를 주지 않았으며, 그럴 권리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는 선택하려 들어서도, 하나님께 따져서도, 하나님께 따로 무언가를 요구해서도 안 된다. 너는 하나님이 안배해 준 대로 거기에 적응하고 직면해야 한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안배했으면 너는 그것에 직면하고, 겪어 보고, 몸소 느껴야 한다.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둔, 네가 반드시 경험해야 할 모든 일에 완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둔 운명에 순응해야 한다. 네가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너를 위해 배치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네게 안배한 것이라면, 설령 네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것이 너를 고생스럽게 하고, 너의 존엄과 인격을 위협하고 억압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순종해야만 한다. 네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이 안배해 놓고 주재하는 것인 이상 사람은 하나님과 무엇도 협의할 수 없다. 그러니 현명한 사람이라면, 정상 인성의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항상 본인의 팔자가 좋지 못하다고 탓하거나 자신이 이게 문제네 저게 문제네 불평해서는 안 된다.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한 태도로 자기 본분을 대하고, 자기 인생을 대하고,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걷는 길을 대하고, 하나님이 안배한 모든 환경을, 혹은 하나님의 요구를 대해서는 안 된다. 의기소침은 간단하고 일시적인 패역이 아니요, 일시적으로 드러내는 패괴 성품도 아니며, 일종의 패괴된 내적 상태가 드러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소리 없는 반항이고, 하나님이 안배한 운명에 불만을 품고 행하는 소리 없는 반항이다. 일종의 간단한 부정적 정서라고 해도, 그것이 사람에게 초래하는 결과는 패괴 성품보다 더 심각하다. 그러한 정서 속에서는 네가 응당 이행해야 할 본분과 네 생활, 네 인생을 적극적이고 올바른 태도로 마주할 수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네가 의기소침함으로 인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슬기로운 사람은 이런 잘못된 관점을 서둘러 바로잡아야 하며,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반성하고 인식해야 한다. 네가 무엇 때문에 팔자가 좋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지 살펴봐야 한다. 어떤 일이 네 존엄에 상처를 내거나 심리적으로 자극을 줘 팔자가 안 좋다는 부정적 생각을 하게 했으며 그로써 너를 의기소침이라는 부정적 정서에 빠뜨려 쉽사리 헤어나지 못하고 쭉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는 네가 반드시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문제다. 네 마음속에 새겨진 어떤 일이, 누구의 악담 한마디가 네 자존심에 상처를 내 팔자가 나쁘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나아가 너를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뜨렸는지, 네 생활과 성장 과정에서 사탄과 사회로부터 온 어떠한 사상 관점이 네게 운명에 대한 착각을 유발하고 운명의 좋고 나쁨에 유달리 민감하게 만들었는지, 혹은 어떤 부분에서 자극을 받아 운명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너무 민감해졌으며, 운명을 바꾸는 일에 유달리 열중하고 공을 들이게 되었는지, 이는 네가 응당 성찰해야 할 것들이다. 단, 어떻게 성찰하든 네가 결국 알아야 할 것은 팔자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사상 관점으로 네 운명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사람의 한평생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쥐어져 있다. 하나님이 오래전에 안배해 두었기에 사람은 이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생에 어떠한 길을 걸을지, 값진 삶을 살 수 있을지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너는 값진 삶을 선택할 수 있다. 한평생 값진 일을 위해 살고, 창조주의 계획과 경영을 위해, 인류의 정의로운 사업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 물론, 긍정적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리를 추구하고, 출세를 추구하고, 돈을 추구하고, 사회의 흐름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가는 쪽을 택할 수도 있다. 마치 산송장처럼,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생을 살아가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이는 전부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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