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8) 제 2 부

지난번 예배에서는 ‘가정에서 비롯되는 짐 내려놓기’ 중 부모의 기대와 관련된 방면의 내용을 교제했다. 그때 언급한 관련 원칙과 주요 주제는 이미 교제를 끝냈으니 이어서 ‘가정에서 비롯되는 짐 내려놓기’의 또 다른 방면의 내용, 즉 ‘후손에 대한 기대 내려놓기’를 교제하겠다. 이번에는 역할을 좀 바꿔 보자. 부모의 기대를 대하는 방면에 관한 내용은 사람이 자식의 관점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품는 여러 가지 기대와 자식을 대하는 갖가지 방법을 자식이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어떤 원칙들을 실행해야 하는지, 이는 부모에게서 비롯되는 각 방면의 문제를 자식의 관점에서 올바르게 다루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교제할 ‘후손에 대한 기대 내려놓기’라는 주제는 부모의 관점에서 자식에 관한 여러 방면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으로, 여기에도 배워야 할 공과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네가 자식으로서 부모의 기대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이런 상황에서 네가 지켜야 할 도와 너의 실행 원칙은 무엇인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사람은 누구라도 부모가 될 기회가 있거나 이미 부모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는 후손에 대한 기대, 그리고 태도와 관련 있다. 부모이든 자식이든 상대의 기대에 대해 각기 다른 원칙이 있어야 한다. 자식으로서 부모의 기대를 대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이 있듯 부모 역시 자식의 기대를 대할 때 지켜야 할 진리 원칙이 있다. 그럼 우선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지금 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 지켜야 할 원칙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원칙이라고 말하면 너희에게는 조금 멀게 느껴지고, 주제가 조금 거창하고 심오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니 먼저, 네가 만약 부모라면 너의 후손에게 어떤 기대들을 가질지 얘기해 보겠느냐? (하나님, 만약 언젠가 제가 부모가 된다면 저는 무엇보다 자식이 건강하길, 건강하게 자라길 바랄 것입니다. 그 밖에도 자식이 나름의 이상을 가지고, 자기 인생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포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해, 자식이 잘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주로 이 두 가지입니다.) 자식이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부자가 되기를 바라진 않느냐? (그 역시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자식이 최소한 출세하여 뛰어난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의 우러름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고, 일에서도 성공하고, 빠르게 출세하고, 평생 뜻대로 풀리는 것, 이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바라는 것이다. 이것 말고 후손에게 갖는 다른 기대는 없느냐? 자식이 있는 사람이 한번 말해 보아라. (자식이 건강하길 바랍니다. 평생 순탄하고 평안하게 살며 가정이 화목하면 좋겠고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했으면 합니다.) 또 있느냐? (만약 제가 언젠가 부모가 된다면 방금 말한 몇 가지 방면 외에, 아이가 말을 잘 듣고 철이 들었으면 좋겠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중에도 부모를 봉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꽤 중요한 문제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사람의 관념과 잠재의식 속에서 자식에게 거는, 비교적 전통적이고 대표적인 기대이다.

‘가정에서 비롯되는 짐 내려놓기’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후손에 대한 기대 내려놓기’이다. 부모라면 모두 자식에게 어느 정도 기대를 건다. 이 기대는 크든 작든, 가깝든 멀든 모두 자식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 살아가는 것, 또는 부모를 대하는 것에 대해 갖는 일종의 태도이자 구체적인 요구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요구들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해내야 하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전통 관념에서 보면, 부모의 명령은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걸 어기면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서도 아주 크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다. 그럼 후손에 대한 부모의 이런 구체적인 기대들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당연한 것인지 아닌지, 어떤 것들이 합리적이고 어떤 것들이 불합리한지, 어떤 것들이 정당하고 어떤 것들이 강제적이고 부당한지, 이러한 것들을 사람이 깨달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사람은 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무엇을 버리고 취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와 관점으로 부모의 기대를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 여기에도 사람이 깨닫고 지켜야 하는 진리 원칙이 있다. 이런 일들이 해결되지 않았을 때, 부모는 자주 이런 부담을 갖는다. 그는 자식과 후손에게 기대를 품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자 의무일 뿐 아니라 당연히 부모가 더욱 갖춰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의 후손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다면 그것은 후손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고 부모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자신은 책임을 다하는 좋은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후손에 대한 기대를 다루는 일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식에게 이런저런 요구가 생긴다. 다양한 시기, 다양한 상황에서 부모는 자녀 각자에게 서로 다른 요구를 가진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이런 생각과 부담을 가지고 있다 보니 옳든 그르든 이런 성문화되지 않은 규정에 따라 부모가 해야 할 일을 하게 된다. 사람은 이런 행동들을 일종의 의무와 책임으로 여겨 자식에게 요구하는 동시에 자식에게 그것을 달성하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이 일은 우리가 몇 단계로 나누어 교제하면 좀 더 명확해질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부터 이미 그들에게 다양한 것을 요구한다. 물론 그 다양한 요구에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다양한 기대가 담겨 있기도 하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에게 각종 기대를 거는 동시에 자식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 부모 자신도 몸소 실천하며 갖은 대가를 치르고 다양한 행동을 취한다. 그러므로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부터 부모는 자식에게 다양한 것을 가르치고 요구한다. 예를 들어, 자녀가 어릴 때부터 이렇게 얘기한다. “공부는 열심히 하고 많이 해야 해. 공부를 잘해야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고 남들한테 무시당하지 않지.” 또 어떤 부모는 자식에게 나중에 커서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아이가 겨우 두세 살일 때도 늘 이렇게 묻는다. “나중에 크면 네가 아빠 모실 거야?” 그럼 아이는 “네.”라고 대답한다. “엄마는?”이라고 물으면 아이는 “엄마도요.”라고 대답한다. “아빠를 사랑해, 엄마를 사랑해?” “아빠요.” “안 돼. 엄마를 사랑한다고 한 다음 아빠를 사랑한다고 해야지.” 그러면 아이는 부모로부터 이런 것을 배운다. 부모의 언행을 통한 가르침은 자식의 어린 마음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물론 그들에게 어느 정도 깨우침을 주기도 하는데 부모는 이 세상에서 그들을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자 그들이 가장 따르고 효도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물론 어린 자식 마음에 부모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까 부모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 주기도 한다. 동시에 어린 자식 마음에도 이런 생각이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부모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고 부모가 하는 일은 다 자식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식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인도적이든 비인도적이든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이 없는 나이일 때 부모의 언행을 통한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심어 놓는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명분으로 자식에게 이런저런 일을 요구할 수 있다. 비록 어떤 일들은 인성에 부합하지 않고 자식의 천성과 자질, 또는 기호에도 부합하지 않지만, 본인에게 아무런 주도권이나 자주적인 능력도 없는 상황에서 자식은 소위 부모의 기대와 요구에 대해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반항할 능력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부모 말에 무조건 따르고 부모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부모 마음대로 주무르고 부모가 어떤 길로 인도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래서 미성년자 시기에 부모가 하는 모든 것은 선의에서 비롯됐든, 아니면 별 뜻 없이 한 일이든 다 자식이 처신하고 행동하는 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즉, 자식에게 온갖 사상 관점을 심어 주게 된다. 이런 사상 관점들은 심지어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숨겨져 있어 성인이 된 뒤 그 사람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에, 나아가 그가 걸어가는 길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다.

자식은 미성년자 시기에 부모가 자식에게 제공하는 생활 환경, 또는 유전이나 교육에 반항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미성년자이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미성년자는 독립적으로 문제를 사고할 수도, 시비를 판단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그저 부모의 지배에 맡길 수밖에 없다. 사람이 미성년자일 때는 부모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는 이 사악한 시대에 사회의 흐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교육 방식과 사상 관점을 채택해 자식을 부추긴다. 예를 들면 현재 사회는 경쟁이 유독 치열한데, 부모는 사회의 각종 흐름과 여론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경쟁이 치열하다는 이런 정보를 받아들이고 재빨리 자식에게 전달한다. 부모가 받아들인 것은 사회의 경쟁이 치열하다는 일종의 현상이자 흐름이지만 느낀 것은 일종의 중압감이다. 부모는 중압감을 느낄 때 재빨리 자식을 떠올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사회는 경쟁이 너무 치열해요. 저희 때는 지금 같지는 않았는데 말이죠. 만약 자식이 예전의 우리처럼 공부하고 일하고 사회를 대한다면, 우리가 하던 식으로 각종 사람과 일을 대한다면 금세 이 사회에서 도태될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가 어릴 때부터 다잡아야죠. 아이가 출발선에서부터 뒤처지게 둘 순 없어요.” 지금처럼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누구나 자식에게 큰 희망을 걸기 때문에 부모는 사회에서 받은 이런 중압감을 재빨리 후손에게 전달한다. 그럼 후손은 이런 일들을 의식할 수 있겠느냐?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조금도 의식하지 못한다. 부모에게서 오는 이런 압박감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 이를 거절해야 하는지 아니면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부모는 아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바로 꾸짖는다. “넌 왜 이렇게 맹하니? 지금이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 세상인데, 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오늘부터 당장 유치원 다니자!” 아이는 몇 살부터 유치원에 가느냐? 어떤 아이는 서너 살부터 부모가 유치원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무엇 때문에 그러겠느냐? 지금 사회에는 아이가 출발선에서부터 뒤처지지 않게 아기 때부터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유행이다. 보아라. 어린아이들이 불행해지는데, 아이가 서너 살 때부터 부모는 유치원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어떤 유치원을 알아보겠느냐? 평범한 유치원에서는 선생님 한 명이 아이들을 데리고 늘 꼬리잡기 놀이를 하는데 이런 유치원은 안 되고 이중 언어 교육을 하는 귀족 유치원을 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언어를 배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이는 모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데 제2외국어까지 배워야 한다. 이는 아이를 괴롭히는 것 아니겠느냐? 하지만 부모는 뭐라고 하느냐? “아이를 출발선에서부터 뒤처지게 둘 수는 없어요. 지금은 아이가 한 살 때부터 집에 보모를 두고 아이를 공부시키는 부모도 있어요. 부모는 모국어로 얘기하고 보모는 제2외국어로 얘기하면서 아이에게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를 가르치죠. 우리 애는 벌써 네 살이에요. 벌써 나이가 조금 있어서 이제라도 가르치지 않으면 늦어요. 아이 교육은 일찌감치 시작해야죠. 유치원은 이중 언어를 가르치고, 선생님은 다 학사, 아니면 석사 출신인 곳으로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유치원은 너무 비싸잖아요.” 그럼 부모는 또 이렇게 말한다. “비싸도 괜찮아요. 지금 우리는 큰 집에 사는데 작은 집으로 이사 가면 돼요. 거실 하나에 방 세 칸짜리 집을 팔고 거실 하나에 방 두 칸짜리로 이사 가면 되죠. 그 돈으로 아이를 귀족 유치원에 보낼 거예요.” 좋은 유치원을 선택한 것으로도 모자라 여유 시간에는 또 과외 선생님을 초빙해 아이에게 올림피아드 수학을 가르친다. 아이가 선천적으로 싫어하더라도 공부해야 한다. 올림피아드 수학이 안 되면 춤을, 춤이 안 되면 노래를 배우게 한다. 노래도 안 되면 부모는 ‘얘는 체격이 좋고 팔다리가 기니까 모델은 할 수 있지 않을까?’라면서 아이를 바로 예술 학교에 보내 모델 준비를 시킨다. 이렇게 아이는 네다섯 살부터 기숙 학교에 살기 시작하고, 집은 방 세 칸에서 두 칸으로, 다시 방 두 칸에서 한 칸으로, 결국은 방 한 칸에서 셋방으로 바뀐다. 아이의 과외 수업은 갈수록 많아지고 집 크기는 갈수록 작아진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온 가족이 남쪽으로 갔다 북쪽으로 갔다 하며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다가 결국에는 어디로 이사 가야 할지도 모르고, 아이는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도 몰라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 빠진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아이가 출발선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또 아이가 앞으로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이 사회에 적응하여 나중에 좋은 직업과 안정적인 수입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모는 아이가 미성년자일 때부터 갖은 대가를 치른다. 어떤 부모는 능력이 좋아서 큰 사업을 벌이거나 높은 관직에 올라 자식에게 많은 것을 쏟아붓고 거액을 투자한다. 어떤 부모는 능력은 별로 뛰어나지 않아도 다른 사람처럼 아이를 귀족 학교에 보내고 각종 과외를 시키며 춤, 그림, 다양한 외국어와 음악을 배우게 해서 아이에게 많은 압박감과 고통을 준다. 아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언제쯤 좀 놀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 커서 어른처럼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나는 언제면 어른들처럼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될까? 언제면 잠깐 텔레비전 보면서 멍도 때리고 혼자서 어디라도 좀 돌아다닐 수 있을까? 언제면 부모님께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부모는 늘 이렇게 말한다. “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빌어먹고 살아야 해. 네 꼴을 좀 봐! 아직 놀기에는 너무 일러. 노는 건 나중에 해! 지금 놀면 나중에 변변치 못하게 살지만 나중에 놀면 실컷 재밌게 놀 수 있어.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말이야. 너 세계적인 부자들이 어렸을 때 노는 거 봤어? 다들 공부만 했지.” 부모는 거짓말만 한다. 부모가 봤느냐? 그들이 잘 알고 있느냐? 세계적으로 어떤 부자들, 갑부들은 대학도 나오지 않았다. 이게 사실이다. 부모는 가끔 자식에게 거짓말을 한다. 부모는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자식의 미래를 더 잘 통제하고 자식이 말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해 어떤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어떤 고생도 대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자녀를 걱정하는 세상 부모 마음”인 것이다.

부모는 후손에 대한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 자식에게 많은 기대를 건다. 그래서 그들은 말로 자식을 교육하고 지도하며 자식에게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동시에 실제 행동으로도 자식을 단속함으로써 자식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이 지정한 궤적과 정해 놓은 방향에 따라 행동하며 생활하도록 한다. 자식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부모는 결국 이 말 한마디뿐이다. “너 내 말 안 들으면 후회할 거야! 지금 말 안 듣고 공부 열심히 안 해 놓고 나중에 후회하면 나 찾아오지 마. 왜 안 알려 줬냐고 나한테 따지지도 말고!” 한번은 우리가 일을 처리하러 어떤 빌딩에 갔는데 가구를 옮기는 짐꾼 두세 명이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는 모습을 봤다. 맞은편에서는 한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내려오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장면을 보고 “짐 옮기고 있으니까 잠깐 비켜 주자.”라고 말할 것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상대방과 부딪치지 않고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서둘러 비켜서야 한다. 그런데 그 엄마는 이 상황을 보고는 기회를 틈타 상황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몇 마디 말을 나는 아직까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 엄마는 뭐라고 말했겠느냐?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들 짐 옮기는 거 봐. 얼마나 무겁고 힘들겠어? 저게 다 어렸을 때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지금 좋은 일자리를 못 구하니까 짐 옮기고 힘쓰는 일 하는 거야. 봤지?” 아이는 알 듯 말 듯 하면서도 엄마의 말이 옳다고 믿는 것처럼 보였고, 당황스러움과 두려움, 믿음이 섞인 순수한 눈빛을 내비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그 짐꾼 몇 명을 쳐다봤다. 그 엄마는 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둘러 아이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봤지? 너도 어렸을 때 열심히 공부 안 하면 커서 저렇게 짐 옮기고 힘쓰는 일 해야 먹고살 수 있어.” 이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옳지 않겠느냐? 어떤 기회든 놓치지 않고 설교조로 이야기한 것인데 네 생각에 이 말을 듣고 난 어린아이는 어떤 기분이겠느냐? 어린아이가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할 수 있겠느냐?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럼 아이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 저렇게 힘쓰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힘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공부를 열심히 안 했구나. 나는 꼭 엄마 말대로 열심히 공부할 거야. 엄마 말이 맞아. 공부 안 하는 사람은 다 힘쓰는 일을 하게 돼 있어.’ 아이가 부모에게서 받아들인 이런 사상들은 그의 마음속 평생의 진리로 변한다. 네가 보기에 이 부모는 어리석지 않으냐? (어리석습니다.) 어떤 면에서 어리석으냐? 네가 이런 사실을 가지고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아이가 반드시 인재가 되겠느냐? 나중에 힘쓰는 일도 안 하고 고생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느냐? 네가 이런 일과 상황을 이용해 아이에게 겁주는 것이 바람직하겠느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는 아이 평생의 그늘이 될 것이다. 이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아이가 커서 부모의 이 말을 조금 분별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부모가 말한 그 이치가 아이의 마음속, 그리고 잠재의식 속에서 제거되기는 어렵다. 이는 사람의 사상을 어느 정도 현혹하고 얽매어 일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을 규정해 버린다. 미성년자인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대부분 자식이 미성년자 시기에 많은 것을 배우고 열심히 노력하여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그들을 위해 뭐든지 해 주고, 자신의 청춘, 시간, 세월, 그리고 건강과 정상적인 생활을 희생한다. 심지어 자식을 기르기 위해 자식이 학교에 다니는 기간 동안 함께 공부하며 자신의 직업과 과거의 소원, 게다가 신앙까지 포기하는 부모도 있다. 교회에도 미성년자인 자식이 장성하는 동안 함께하기 위해, 자식이 나중에 일에서 성공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순조롭게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늘 곁에 함께하며 자식을 기르는 부모가 적지 않다. 이들은 예배에 참석하지도, 본분을 이행하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들도 비록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요구가 있고 조금이나마 의지와 바람도 있긴 하지만, 자식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지 못해서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자식과 함께하기로 하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본분도, 신앙에서 자신의 추구도 포기한다. 이는 가장 비참한 일이다. 어떤 부모는 자식을 배우, 화가, 작가, 과학자로 기르기 위해, 자식이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도 많은 대가를 치른다. 직장도 버리고 자신의 사업도 포기할 뿐 아니라 개인의 이상과 향락마저 포기해 가며 자식과 함께한다. 심지어 자식을 위해 자신의 혼인 생활도 포기한 채 이혼 후 홀로 자식을 부양하고 기르는 중임을 맡는데, 오직 자식에 대한 기대가 실현될 수 있도록 자신의 일생을 다 자식에게 걸고 자식의 미래에 바치는 부모도 있다. 또 어떤 부모는 자식이 나중에 출세하여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많이 하고 무의미한 대가를 많이 치르면서 자신의 세월과 육체적 건강,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희생한다. 이는 한편으로 부모를 놓고 말하면 다소 무의미한 희생이고, 다른 한편으로 자식을 놓고 말하면 부모의 이런 행동 방식들은 미성년자인 자식에게 큰 중압감과 부담을 안겨 준다. 왜냐하면 부모가 치른 대가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금전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아니면 에너지 측면에서든 부모는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렀다. 미성년자인 자녀는 옳고 그름을 가릴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그저 부모가 이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록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나름의 생각이 좀 있지만 여전히 부모가 하는 대로 따른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새 자식은 부모가 자신을 기르기 위해 이토록 큰 대가를 치렀으니 자신은 평생을 들여도 갚을 수도, 보답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가 자신을 기르고 자신과 함께하는 기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부모에게 보답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부모를 즐겁게 하고 좋은 성적을 받아 부모를 만족게 하고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는 자녀가 미성년자일 때 이런 대가들을 치른 이후 자식에 대한 기대가 갈수록 커지면서 점차 자식에 대해 요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즉, 소위 부모가 치른 이런 대가와 헌신들을 받아들이고 나면 자식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좋은 성적으로 부모에게 보답해야 한다고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입장에서든, 아니면 자식의 입장에서든 이렇게 헌신을 하고 헌신을 받아들이는 관계하에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치는 점점 더 높아진다. 기대치가 점점 높아진다는 것은 듣기 좋게 말한 것이고, 실제로는 헌신과 희생을 많이 할수록 부모는 마음속 깊이 자식이 성공으로 그들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 동시에 자식이 그들에게 빚졌다는 생각을 점점 많이 하게 된다. 네가 많이 헌신하고 많이 바랄수록 너의 기대는 점점 높아지고 자식이 너에게 보답할 수 있을지에 대한 너의 기대도 점점 커진다. 미성년자인 후손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출발선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아이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해’에서 ‘커서 출세하고 사회에서 자리 잡아야 해’로, 자식에 대한 요구로 점차 변해간다. ‘너는 어른이 되어 사회에서 자리 잡고 나서도 근본을, 부모님을 잊어선 안 돼. 너는 가장 먼저 부모님께 보답해야 해. 넌 부모님께 효도해야 하고, 부모님께서 행복한 생활을 하시도록 해야 해. 왜냐하면 부모님은 이 세상에서 너의 은인이고 너를 기른 사람이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 있는 것, 네가 누리는 이 모든 것, 네가 가진 이 모든 것은 다 부모님의 피땀으로 바꾸어 온 거야. 그러니 너는 여생을 바쳐 부모님께 보답하고 부모님께 진 빚을 갚고 부모님께 잘해 드려야 해.’라는 것이다. 이는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자식이 사회에서 자리 잡고 출세하길 바라는 부모의 기대가 변화한 것으로, 자식에 대한 정상적인 기대가 점차 자식에 대한 요구와 토색으로 변한 것이다. 아이가 미성년자일 때 만약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반항하며 공부하기 싫어하거나 부모의 말을 듣기 싫어하고 부모를 거역한다면 부모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안 힘든 줄 알아?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러는데? 다 너를 위해서 아니야? 내가 하는 모든 건 다 너를 위해서인데 넌 감사할 줄도 모르는구나. 넌 왜 이렇게 맹하니?” 이런 말들로 너를 협박하고 구속한다. 이런 방식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옳지 않다. 이는 부모의 ‘고상’한 부분이자 비열한 부분이다. 이런 말은 어떤 점에서 옳지 않겠느냐?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이런 기대와 양육은 모두 일방적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앞으로 출세하여 자신의 체면을 세우거나 나중에 자신에게 효도하도록 하기 위해 이것저것 배우라고 자식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모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부모의 이기적인 방면은 제쳐 두고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부모가 자식에게 주입하는 이런 사상들, 그리고 자식에게 가하는 압박, 자식에게 무언가를 배우도록 요구하는 것, 커서 어떤 직업에 종사해야 하고 어떤 성취를 이루어야 하는지 요구하는 것들에 대해 얘기하자면, 부모의 이런 행동 방식들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우선 부모가 무엇을 위해서 이러는 것인지, 이런 행동 방식들이 적절한지는 일단 평가하지 않겠다. 먼저 부모의 행동 방식이 어떤 성질인지 교제하고 해부하고, 본질에 대한 해부를 통해 더욱 정확한 실행의 길을 찾을 것이다. 이 관점에서 이 방면의 진리를 교제하고 깨닫는다면 이는 정확할 것이다.

우선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이런 요구들, 이런 행동 방식들이 옳은지 살펴보자. 과연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그럼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이런 행동 방식들은 결국 근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부모의 주관적인 의식 속에 자식의 미래에 대한 그들의 여러 가지 예상, 계획, 그리고 규정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런 기대가 생긴 것이다. 이런 기대의 부추김을 받으며 그들은 자식에게 여러 가지 기능이나 연기, 춤, 그림 등을 배우도록 요구한다. 그리하여 자식이 인재로 자라나 하류층이 아닌 상류층이 되고, 졸병이 아닌 고위 관료가 되며, 세계 500대 기업에서 일하는 사장, CEO, 임원이 되는 등등 말이다. 이것들은 모두 부모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그럼 자식은 미성년자일 때 부모가 기대하는 이런 내용들에 대해 개념이 있겠느냐? (개념이 없습니다.) 아무런 개념도 없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느냐? 어린아이는 학교에 가서 글자를 깨치고 열심히 공부하며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어린아이가 아는 것은 그저 매일 착실하게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집에 돌아와 숙제를 완성하는 것뿐이다. 그것 말고 하는 일들이라고는 놀고먹고 상상하고 꿈꾸는 것 등이다. 아이는 미성년자일 때 인생의 길 위에 놓여 있는 미지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없고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다. 성인이 된 이후와 관련되는 예상이든 정의든 그것은 모두 부모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이런 그릇된 기대들은 자식과는 관련이 없다. 자식은 그저 부모의 기대 속에서 이런 기대들의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할 뿐이다. 부모의 이런 기대들은 무엇에 근거하겠느냐? 모두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사회와 세상에서 비롯되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모두 자식이 이 세상과 사회에 적응하고 세상과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자식이 사회에서 자리 잡아 안정적인 직업, 가정, 그리고 미래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부모는 후손에게 여러 가지 주관적인 기대가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컴퓨터 공학자가 꽤 유행하다 보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중에 제 아들도 컴퓨터 공학자 시킬 거예요. 그 일을 하면 돈도 많이 벌고, 하루 종일 컴퓨터를 갖고 다니면서 컴퓨터 공학을 다룰 테니 부모도 체면이 서잖아요!” 아이가 모든 사물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없는 상황에서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잘못된 것입니다.) 부모는 완전히 어른의 시선으로, 그리고 세상사에 대한 견해, 관점, 기호에 따라 자식에게 기대를 거는 것인데, 이는 주관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듣기 좋게 말하면 주관적인 것이지만 사실은 무엇이겠느냐? 이 주관적인 것을 또 다른 방면에서 해석하면 무엇이겠느냐? 이기적인 것 아니겠느냐? 강요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어떤 일, 어떤 직업을 좋아하고, 사회에서 자리 잡는 것, 체면이 서는 것, 관직에 오르는 것, 돈이 많은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식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한다면, 그런 사람이 되고 그런 길을 걷도록 한다면 앞으로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며 그런 일에 종사하는 것을 자식이 좋아하겠느냐? 자식에게 어울리겠느냐? 그의 운명은 무엇이겠느냐?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안배와 주재는 무엇이겠느냐? 너는 알고 있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들은 상관없습니다. 부모인 제가 좋아하면 그만이죠. 제가 좋아하니까 자식에게 이런 기대를 거는 거예요.” 이는 너무나 이기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무도 이기적이다! 듣기 좋게 말하면 주관이 뚜렷하고 자주적이지만 사실은 무엇이겠느냐?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는 자식의 자질과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의 운명과 일생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하는지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기호, 타산, 그리고 계획을 자식에게 강요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강요하지 않으면 아이는 너무 어려서 이해하지 못해요. 이해할 때가 되면 너무 늦어 버리죠.” 정말 그렇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늦어 버린다면 그건 그의 운명이지 부모의 책임이 아니다. 네가 이해한 것을 자식에게 강요한다면 네가 이해했다고 해서 자식도 일찍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인생의 길을 선택할지, 어떤 직업을 선택할지, 사람의 일생이 어떨지 등 이런 일들을 자식이 언제 이해할지는 부모의 교육과 관련 없다. 그에게는 자기의 길이 있고 자기의 리듬과 규칙이 있다. 네가 생각해 보아라. 자식은 어릴 때 부모가 어떻게 교육하든 사회에 대한 인지가 전혀 없다. 그 자신의 인성이 성숙해지면 사회의 경쟁, 복잡함과 어두움, 온갖 불공평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부모가 어릴 때부터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부모가 어릴 때부터 “사람을 사귈 때는 만일에 대비해야 해.”라고 가르쳐도 자식은 이것을 그저 하나의 도리로 여길 뿐이다. 그가 진정으로 부모의 이 말에 따라 행동할 때는 그 자신이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이다. 그가 깨닫지 못한 때에는 부모가 아무리 가르쳐도 그건 그저 하나의 도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부모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경쟁이 치열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엄청난 중압감을 느껴. 만약 아기 때부터 다잡지 않으면 아이는 나중에 고생할 거야. 고통스러울 거라고.’ 이게 말이 되겠느냐? (되지 않습니다.) 너는 자식이 나중에 받을 그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그가 미리 이 중압감을 견디게 하고, 세상 물정을 모를 때부터 중압감을 견디게 하는 것인데, 이는 자식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 아니겠느냐? 이게 자식을 위한 것이겠느냐?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게 더 낫다. 이해하지 못하면 적어도 몇 년 동안은 편안하고 즐겁게, 순수하고 단순하게 살 수 있다. 그가 일찍 이해하게 된다면 네 생각에는 그게 복이겠느냐 화이겠느냐? (화입니다.) 이는 화이다.

사람이 어떤 나이대에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는 사람의 나이와 인성의 성숙도에 근거하는 것이지 부모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미성년자일 때 사람은 놀고 간단한 지식을 배우고 학교 교육을 조금 받고, 다양한 일을 배운다. 또 친구를 어떻게 사귀는지, 어른과 어떻게 어울려 지내는지, 주위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등도 배운다. 사람은 미성년자일 때 미성년자가 하는 일을 해야 하지 어른이 견뎌야 할 그 어떤 중압감이나 불문율, 또는 복잡한 일을 견뎌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미성년자에 대한 정신적 해악이지 복이 아니다. 네가 이런 어른의 일들을 일찍 알게 될수록 너의 어린 마음이 받는 충격은 더욱 커진다. 그런 일들은 어른이 된 이후의 네 인생이나 생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런 일들을 너무 일찍 알거나 마주하였기 때문에 그것들은 너의 어린 마음에 일종의 부담이자 무형의 그늘로 변해 버리고 심한 경우 너는 그것들을 평생 떨쳐 낼 수 없다. 생각해 보아라. 사람이 만약 아주 어린 나이에 끔찍한 일에 대해 들었는데 그것이 네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고, 네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일이라면 그 화면, 또는 그 일, 심지어 거기에 관련된 사람, 일, 그리고 말들까지 일생 동안 너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그늘로, 너의 성격뿐만 아니라 네가 처신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예를 들어, 예닐곱 살짜리 아이라면 다 조금씩은 장난기가 있기 마련이다. 수업 시간에 친구와 귓속말을 해서 선생님께 한바탕 꾸지람을 듣는데 선생님이 잘못한 사실을 가지고 혼내는 게 아니라 인신공격을 하며 아이에게 삐죽한 입에 볼은 움푹 꺼져서 도둑놈처럼 생겼다고 욕하고, 심지어 “네 꼴을 좀 봐! 넌 평생 그 모양일 거야! 너 열심히 공부 안 하면 막노동이나 할 놈이야. 나중에 구걸이나 해야 할 거다! 넌 딱 봐도 도둑놈 같아. 넌 싹수부터 도둑놈이야!”라고 말했다고 하자. 비록 아이는 이 몇 마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선생님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선생님의 말이 사실인지도 알지 못하겠지만 이런 인신공격적인 말들은 그의 마음속에서 무형의 마수가 되어 그의 자존심을 깊이 건드리고 그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선생님이 내뱉은 “넌 삐죽 입에 볼은 움푹 꺼져서 꼭 도둑놈처럼 생긴 데다 머리는 주먹만도 못 하구나!”와 같은 이런 인신공격적인 말들은 평생 동안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가 직업을 선택할 때, 상사와 동료를 대할 때, 형제자매를 대할 때 선생님이 예전에 그에게 했던 인신공격적인 말들이 수시로 튀어나와 그의 감정과 생활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물론 너에 대한 부모의 부당한 기대들, 너에게 전달되는 감정 또는 정보, 말, 사상 관점 등 역시 너의 어린 마음속에 어느 정도 그늘을 만들 것이다. 비록 부모의 주관적인 의식에서 보면 그들은 전혀 악의가 없지만 부모의 무지 때문에, 부모가 패괴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식을 대할 때 그들은 정당하고 원칙에 부합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세상의 흐름을 좇아 너를 대할 수밖에 없는데, 그로 인한 궁극적인 결과는 너에게 갖가지 부정적인 정보와 부정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 너에게 아무런 분별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부모가 하는 말, 부모가 주입하고 권장하는 각종 그릇된 사상은 선입견으로 작용하여 네가 일생 동안 추구하고 분투하는 목표로 변한다. 비록 네가 미성년자일 때 부모가 너에게 품는 갖가지 기대는 너의 어린 마음에 충격과 상처를 주지만 그래도 너는 부모의 이런 기대와 너를 위한 부모의 다양한 헌신 아래에서 살아가며 그들의 뜻을 깨닫고 그들의 여러 은혜를 받아들이며 그에 감사해한다. 너를 위한 그들의 다양한 헌신과 희생을 받아들이고 나면 너는 마음속 깊이 부모를 볼 면목이 없고 부모에게 빚졌다고 느끼며 어른이 되면 반드시 부모에게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무엇에 보답하려는 것이냐? 너에 대한 그들의 불합리한 기대에 보답하려는 것이냐? 네가 미성년자일 때 그들이 너에게 준 상처에 보답하려는 것이냐? 이는 다소 흑백이 전도된 것 아니겠느냐? 사실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보면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그저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것일 뿐 미성년자가 갖추어야 할 것이 전혀 아니고, 실행하고 살아 내야 할 것도 아니며, 미성년자에게 필요한 것도 아니다. 부모는 세상의 흐름을 좇기 위해,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이 세상의 발전에 발맞추기 위해 너도 그들을 따르고 그들처럼 이런 중압감들을 견디도록, 이런 사악한 흐름을 받아들이고 좇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간절한 기대하에 많은 자식들이 열심히 여러 가지 기예를 배우고 각종 수업을 듣고 지식을 습득한다. 처음에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에서 부모가 이루기를 기대하는 목표를 자발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미성년자일 때는 부모의 기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점차 어른이 된 이후에는 부모의 주관적인 의식 속 기대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며 이런 중압감과 사회에서 비롯되는 현혹, 통제, 결박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요컨대 수동적인 태도에서 능동적인 태도로 점차 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모는 흡족해한다. 자식 스스로도 마음속이 평안하다고 느끼는데, 부모에게 떳떳하고 드디어 부모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으며 자기도 다 컸다고 느끼는 것이다. 단순히 다 커서 어른이 된 것이 아니라 부모가 보기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고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비록 어른이 된 후 부모의 눈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데 성공했고, 겉으로 보기에 부모의 헌신에도 어느 정도 보답했으며,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떻겠느냐? 너는 성공적으로 부모의 꼭두각시가 되었고 부모에게 엄청난 빚을 졌으며, 부모에게 보여 주기 위해, 그들의 체면을 세우고 명예를 빛내기 위해 남은 인생을 바쳐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를 실현하는 데도 성공한 것이다. 또한 너는 부모를 흡족게 하는 데 성공하여 부모의 자랑이 된 것이다. 부모는 어디를 가나 네 얘기를 할 것이다. “제 딸은 어느 어느 회사 매니저예요.”, “제 딸은 어느 어느 유명 브랜드 디자이너예요.”, “제 딸은 외국어 몇 급이고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해요. 어느 어느 언어 통역사예요.”, “제 딸은 컴퓨터 공학자예요.” 너는 부모의 자랑이 되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부모의 그림자가 되는 데도 성공했다. 왜냐하면 너는 같은 방식으로 너의 후손을 교육하고 기를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네 부모가 너를 성공적으로 길러 냈다고 생각하여 네 부모의 교육 방식 그대로 너의 후손을 기를 것이다. 그럼 너의 후손은 너와 같은 비극과 비참한 처지를 견디고 너처럼 부모가 주는 상처를 견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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