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제 4 부

부모의 기대를 대하는 측면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과 내려놓아야 할 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네.) 여기서 사람의 짐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부모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하고, 부모를 호강시켜 줘야 하고, 부모가 하는 일은 모두 너를 위한 것이고, 부모 말을 따라야 효도하는 것이다. 또한, 어른이 되면 부모를 위해 일해야 하는데,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고,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며, 그들 곁을 지켜야 하고, 그들을 상심하게 하거나 실망하게 해서도 안 되고, 그들을 저버려서는 안 되고, 힘닿는 데까지 그들의 고생을 줄여 주고, 더 나아가 아예 고생을 안 하게 해 줘야 한다. 만약 이걸 해내지 못하면 배은망덕한 것이고 불효자이며, 천벌을 받고 버림을 받아 마땅하며,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네 짐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짐이라면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여 이를 올바르게 마주해야 한다.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이러한 짐과 잘못된 사상 관점을 내려놓을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네게 다른 선택지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과 육체의 어떤 짐이든 그것을 내려놓는 일의 시작은 올바른 사상 관점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네 안의 잘못된 사상 관점이 점차 무너지고, 분별되고, 간파당한 뒤에 차츰차츰 버려진다. 그러한 잘못된 사상 관점이 무너지고, 분별되고, 그런 다음 네가 그것을 내려놓고 버리는 과정에서 그러한 일들에 대한 네 태도와 행동 방식이 서서히 바뀐다. 사람의 양심 혹은 감정에서 비롯된 생각들이 점차 흐릿해지며, 더는 네 생각 깊은 곳에서 너를 괴롭히거나 결박하지 못하고, 네 생활을 좌우하지도, 네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도, 네 본분 이행을 교란하지도 못한다. 예컨대, 네가 올바른 사상 관점과 이 측면의 진리를 받아들이면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그저 눈물만 조금 흘린다. 키워 준 은혜에 그간 보답하지 못했고, 부모를 너무 고생시켰고, 그들에게 조금도 갚은 것이 없고, 그들을 호강시켜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책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정상적인 인성의 감정적 필요에 따른 정상적인 표출이 있을 뿐이다. 잠깐 울고 나서 그들을 조금 그리워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곧 자연스러워지고 정상이 된다. 너는 금방 정상적인 생활과 본분 이행에 몰입하고, 그 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는다. 네가 이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끝도 없이 울게 된다. 너는 부모가 가엾다고, 평생 힘들게 살면서 너 같은 불효자를 키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아플 때 병상 곁에서 시중들어 주지 못했고, 그들이 사망했을 때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고 곡해 주지 못했다고, 그들을 저버렸고, 그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줬고, 그들을 호강시켜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너는 오래도록 이런 죄책감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고 마음이 찌릿찌릿 아프게 된다. 관련된 환경이나 사람과 일, 사물을 만날 때마다 감정이 표출된다. 이런 죄책감은 너의 여생 내내 계속될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진리와 올바른 사상 관점을 받아들여 네 생명으로 삼은 적이 없고, 낡은 사상 관점이 줄곧 네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며 네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네 여생은 부모의 사망으로 인해 쭉 고통스러울 것이다. 계속되는 고통은 네게 약간의 육적인 괴로움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네 생활,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 네가 교회 사역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네 심금을 건드리는 사람 혹은 일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너는 더 많은 일에 대해 낙심하고, 의기소침해지고, 수동적으로 되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지고, 모든 일에 대한 열정과 동력을 잃는 등의 문제를 겪을 수도 있다. 이러다 보면 간단한 일상생활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와 네가 걷는 인생길에도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러면 아주 위험하다. 이러한 위험으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결과는, 네가 피조물로서의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네가 본분 이행을 도중에 중단하거나 자신이 이행하는 본분에 반항하는 정서나 태도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일은 분명히 점점 더 악화될 것이고 그에 따라 네 기분, 정서, 심리 상태가 나쁜 방향으로 변해 갈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오늘 교제한 주제가 네게 알려 주는 것 중 하나는 올바른 사상 관점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사상 관점의 근원은 일 자체의 본질을 근거로 한다. 그것의 근원과 본질이 이러하기에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하며, 표상에 속거나 감정과 혈기에서 비롯된 사상 관점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한 가지이다. 다른 한 가지는 이렇게 해야만 사람이 굽은 길이나 비뚤어진 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이 주재하고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순리에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은 올바른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고 올바른 사상 관점의 인도를 받아야만 항상 혈기와 감정 혹은 양심의 작용에 따라 사는 대신 부모가 지운 짐에서 벗어나고 그 짐을 내려놓은 다음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면서 더 자유롭고 해방된 삶을 살고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면 여기까지 이야기했는데 부모의 기대로 인해 만들어진 짐에 대해 조금은 인식이 생기지 않았느냐? (네.) 정확한 인식이 조금 생겼으니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해방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네게 진정한 인식이 생기고 네가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면 네 마음이 해방될 것이다. 만약 네가 사실에 근거하여 이러한 일을 대하지 않고 여전히 맞서고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저 일종의 이론이라 생각하며 듣는다면 너는 내려놓기가 몹시 힘들 것이고, 육적 생각과 육적 감정이 지배하는 대로 이러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결국 감정의 굴레 속에서 살며 오직 고통과 괴로움만을 맛보게 될 것이요, 그 누구도 너를 구해 주지 못할 것이다. 감정의 굴레에 얽히는 일에 직면하면 사람에게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너를 얽매고 결박하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학업과 직업 선택 측면에서만 부모가 갖가지 기대를 품고 어떤 행동 방식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결혼에 대해서도 부모는 온갖 기대를 하지 않더냐? 어떤 기대들이 있는지 너희가 한번 말해 보아라. (보통 부모는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중에 남편 될 사람은 다른 건 몰라도 돈은 있어야 한다. 집과 차가 있어야 하고, 너를 돌봐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물질적으로 너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고, 책임감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배우자 선택의 기준이 있습니다.) 부모가 하는 말 중 일부는 먼저 겪어 본 사람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너를 생각해 하는 말은 맞지만 그래도 문제가 있다. 네 결혼에 대한 기대 면에서 부모들은 저마다 안목과 취향을 가지고 있다. 자녀에게 최소한 돈, 지위, 능력이 있고 밖에서 얕보이지 않을 만큼 대단하며 네가 남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나서서 너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고 한다. “상관없어요. 저는 그렇게 물질적인 사람이 아닌걸요. 저를 좋아해 주고 저도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걸로 돼요.” 자녀가 이렇게 말하면 부모는 이렇게 대꾸한다. “너는 어쩜 그렇게 미련하니? 어쩜 그렇게 단순해? 딱 보니까 너는 너무 어리고 미숙해서 생활의 고단함을 몰라. ‘가난한 부부는 근심 걱정이 가득하다.’라는 말도 못 들어 봤니? 생활을 꾸려 나가려면 여기에도 돈이 필요하고 저기에도 돈이 필요해. 돈 없이 잘살 수 있을 것 같아? 돈 있고 능력 있는 상대를 찾아야 한다니까.” 네가 “돈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은 못 미덥다고요.”라고 하면 부모는 이렇게 말한다. “못 미덥더라도 우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지. 네가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입고 싶은 것 다 입으면서 만족스럽게 살면 다들 부러워할걸.” 네가 “마음이 즐겁지 않잖아요.”라고 하면 부모는 이렇게 대꾸한다. “마음 따위가 뭐가 중요해? 마음이 어디에 붙어 있는데? 마음이 즐겁지 않으면 뭐 어떻게 되는데? 몸이 편하면 그만이지!” 또 어떤 사람은 현재의 생활 환경에 따라 독신으로 지내고 싶어 해서 나이를 많이 먹도록 연애를 하지 않고 결혼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러면 부모가 속이 타서 계속 결혼을 독촉하며 선 자리를 마련하고 사람을 찾아 소개한다. 어떻게든 집안끼리 수준이 맞고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상대를 빨리 찾아서 자녀를 결혼시키려고 한다. 집안 수준이 안 맞는다고 해도 최소한 조건이라도 좋아야 한다. 대졸이나 박사, 석사여야 하고 아니면 해외 유학파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의 잔소리를 견뎌 내지 못한다. 처음에는 독신이면 자기 한 몸만 건사하면 되니 참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믿은 후 매일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쁘고 배우자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연애도 안 하고 나중에 결혼도 안 하려고 하지만, 부모라는 벽에 부딪친다. 부모는 네 뜻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계속 너를 재촉하고 압박한다. 얼굴만 봤다 하면 잔소리를 한다. “연애는 안 하니? 마음에 드는 사람 없어? 얼른 집에 데려와. 내가 어떤지 봐 줄 테니까. 적당하면 빨리 결혼해서 혼인 신고 하고. 네 나이가 몇인데! 여자가 서른이 돼서도 시집을 안 가고, 남자가 서른다섯이 돼서도 신붓감을 안 찾고, 뭐 하자는 거야? 세상을 뒤엎기라도 하게? 결혼 안 하면 늙어서 누가 너 돌봐 주니?” 부모는 항상 결혼 문제를 걱정하고 신경 쓴다. 너한테 이런 사람을 찾아라, 저런 사람을 찾아라 하면서 짝을 구해 결혼하라고 너를 압박한다. 결혼을 해도 부모는 계속 떠들어 댄다. “얼른 아이 낳아. 내가 아직 젊을 때 낳아야 대신 봐 주지.” 너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 안 봐 주셔도 돼요. 안 급해요.” “안 급하기는, 빨리 낳으라니까! 낳으면 내가 대신 봐 줄게. 어느 정도 크면 그때부터는 네가 키우고.” 부모의 태도가 어떻든,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올바르든 올바르지 않든 그 모든 기대는 자녀에게 부담이 된다. 부모 말을 들으면 본인이 불편하고 즐겁지 않고, 부모 말을 듣지 않으면 양심에 찔린다. ‘부모님이 틀린 건 아니야. 연세도 많으신데 아들딸이 결혼해서 아이 낳는 걸 못 보고 있으니 속상하시겠지. 자식한테 결혼해서 아이 낳으라고 재촉하는 것도 부모님의 책임인걸.’ 그래서 부모의 이 측면에 관한 기대를 대할 때 사람은 언제나 속으로 은근히 부담을 느낀다. 부모 말을 듣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고, 안 듣는 것도 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부모의 요구나 염원을 거역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고 부도덕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인 것 같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이렇게 자녀를 간섭한다. “얼른 결혼해서 아이 낳아. 일단 떡두꺼비 같은 손자 하나 낳아 다오.” 남자아이를 낳을지 여자아이를 낳을지까지 간섭하는 것이다. 어떤 부모는 이런 말도 한다. “여자아이 하나 낳았으니까 빨리 손자도 낳아 다오. 나는 손자 손녀 다 원한다. 부부 둘이 하나님 믿고 본분 이행하느라 종일 바쁘다고 진짜 할 일은 안 하고 말이야. 아이 낳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 자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크다.’라는 말 모르니? 계집아이 하나 낳고 끝이야? 빨리 손자 낳아 줘야지! 우리 집에 아들은 너 하나인데 네가 손자 안 낳아 주면 우리 집 대가 끊기는 거 아니니?” 너는 곰곰이 생각한다. ‘그렇기도 하지. 내가 대를 끊으면 조상님께 너무 죄송한 일이잖아?’ 결혼 안 하면 안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안 낳아도 안 되고, 여자아이만 낳아도 안 된다. 아들까지 낳아야 한다. 아들을 먼저 하나 낳으면 부모가 이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로는 안 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니? 하나 더 낳으렴. 아이가 둘이면 서로 친구도 되잖니.” 부모가 자식 앞에서 자기 멋대로 결정하고 생트집을 잡는데, 얼토당토않은 논리조차 떠들어 댈 수 있다. 그런데도 자녀는 그런 부모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부모가 자녀의 생활, 직업, 결혼, 그리고 각종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함부로 간섭하고 지적해도 자녀는 그저 꾹 참을 수밖에 없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고 떨쳐 내려 해도 떨쳐 낼 수 없다. 자기 부모한테 욕을 할 수도 없고 부모를 교육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느냐? 그렇게 참으면서 최대한 안 만나고, 반드시 만나야만 할 때는 그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 이야기가 나오면 바로 대화를 끊거나 피한다. 그러나 사람들 중 일부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부모의 요구에 동의한다. 마지못해 서둘러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자손을 낳는다. 하나로는 안 되기에 한 무리를 더 낳아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부모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부모가 희망하는 바를 이루어 줄 수 있든 없든 부모가 제시하는 이러한 요구는 자녀 된 입장이라면 누구에게나 골칫거리이다. 부모가 어떻게 하든 그것은 위법 행위가 아니고, 너는 지적할 수도, 남한테 이야기할 수도 없으며 부모를 상대로 이치를 따질 수도 없다.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그 일은 네 짐이 된다. 너는 줄곧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일에 관해 부모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 주지 못하면 부모와 조상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네가 부모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았다면,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고 그들의 요구대로 후손을 낳아 혈통을 잇고 대를 잇지 않았다면 너는 압박감을 느낀다. 부모가 그런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며 네게 자유를 주고 너를 순리대로 살게 해야만 너는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것이다. 그러나 네 여러 친척들과 친구, 동문, 동료 등등의 사회 여론이 하나같이 이 방면에서 너를 비난하고 뒤에서 너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면 그것은 또한 네게 있어 하나의 짐이 된다. 네가 스물다섯일 때는 결혼을 안 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서른이 되면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친척과 가족을 피하고 그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서른다섯까지 결혼을 안 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결혼 왜 안 해?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너 어디가 좀 정상이 아닌 거야?” 네가 결혼한 뒤에도 아이를 낳으려는 의향이 없으면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결혼했으면서 왜 아이를 안 낳아? 남들은 결혼해서 딸 하나 낳으면 아들도 하나 낳고, 아들 하나 낳으면 딸도 하나 낳는데. 너는 왜 안 낳으려고 해?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인간미가 없어? 너 정상인 맞아?” 부모에게서 비롯된 것이든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든 이러한 일은 다양한 환경과 배경 속에서 네게 짐이 된다. 너 자신도 정당한 이유를 대기가 어렵다고 느끼는데, 특정 연령대에 속한다면 특히 더 그렇다. 예를 들어, 서른에서 쉰 사이의 나이에 결혼을 안 한 상태라면 너는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 엄두를 못 낼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여자는 평생 혼자 사네. 노처녀를 누가 좋다고 할 것이며 누가 데려가겠어.” “그 녀석은 평생 부인을 안 얻었어.” “무슨 이유가 있길래 시집 장가를 안 간 거야?” “누가 알겠어. 무슨 결함이 있나 보지.” 너는 곰곰이 생각한다. ‘나 아무 결함도 없는데. 그러면 결함도 없으면서 왜 시집 장가를 안 간 거지? 부모님 말씀을 안 들은 게 죄송해.’ 누군가가 말한다. “그 녀석은 장가를 안 갔고 그 아가씨는 시집을 안 갔지. 지금 그들 부모 신세가 얼마나 불쌍하게 됐는지 봐. 다른 부모들은 손자며 증손자를 품에 안았는데 그는 아직도 혼자야. 조상이 부덕했나? 이제 뒤를 이을 사람이 없는 거 아니야? 나중에는 대가 끊기겠어. 그 집 식구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지금 네 태도가 얼마나 강경하든 네가 평범한 사람이자 보통 사람이고 이 측면의 진리를 충분히 깨달아서 이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너는 언젠가 결국 이 문제로 시달리고 방해받게 된다. 지금 사회에는 서른넷, 서른다섯에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많기에 별일이 아니다. 그러나 서른다섯, 서른여섯 이상의 나이인데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다. 현재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연령대에 따라 볼 때, 네가 서른다섯 이하라면 ‘결혼 안 한 건 정상이야.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부모님이야 뭐라고 할 테면 하시라지. 난 겁 안 나니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서른다섯이 넘으면 사람들이 너를 이상하게 보며 독신, 노총각, 노처녀라고 한다. 그러면 너는 견뎌 내지 못하고, 이 문제가 네 짐이 된다. 네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인식 또는 적절한 실행 원칙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언젠가는 결국 이 문제가 네 골칫거리가 되거나 특정한 시기에 네 생활을 방해할 수 있다. 이는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에 관계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진리를 깨달아야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문제로 네가 지게 되는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우선, 어떤 결혼 상대를 만나는지가 사람의 의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냐? (아닙니다.) 네가 어떤 유형의 사람을 찾고 싶다고 해서 그런 사람을 꼭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예비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진작에 너의 결혼 상대를 예정해 두었다. 어차피 정해진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므로 너는 부모의 필요나 부모가 제시한 조건에 방해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 또한 부모가 네게 돈 있는 결혼 상대를 찾으라고 요구하든 지위가 있는 결혼 상대를 찾으라고 요구하든 네 훗날의 빈부귀천이 그에 따라 결정되겠느냐? (아닙니다.) 아니다. 대단한 집안에 시집갔다가 결국 빈털터리로 내쫓겨 고물이나 줍는 신세가 된 여자들이 적지 않다. 돈과 지위에 빌붙으려다가 종국에는 완전히 실패해서 신세를 망치고 보통 사람만도 못하게 된 것이다. 종일 나일론 포대를 둘러메고 다니며 페트병과 깡통을 주워서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바꾼 뒤에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 마시면서 여전히 부귀한 사람으로 사는 것 같은 기분에 젖는다. 얼마나 처량하고 비참하냐! 결혼은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다. 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가 운명으로 정해져 있듯이 결혼 역시 부모의 필요나 네 가족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네 개인의 안목과 취향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는 것이다. 정확한 타이밍에 알맞은 사람을 만나고, 적당한 때에 네게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그 모든 안배는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관하고 주재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 문제에 있어서 타인의 안배를 따르거나 타인의 사주 혹은 지배,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 부모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든, 네게 어떤 타산이 있든, 너는 부모의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고 네 타산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그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한다. 상대를 찾든 안 찾든, 찾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야지 부모의 요구나 부모의 필요를 근거로 해서는 안 되며, 부모의 기대를 근거로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러므로 결혼이라는 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부모의 기대가 네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혼 상대를 찾는 일은 네 여생을 책임지고 네 배우자를 책임지는 일인 동시에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일이지 부모의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이 아니다. 네가 상대를 찾든 찾지 않든, 혹은 어떤 상대를 찾든 부모의 기대를 근거로 해서는 안 된다. 그 문제에 있어서 부모에게는 너를 통제할 권리가 없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네 결혼을 도맡아 처리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네가 결혼 상대를 찾겠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찾아야 한다. 만약 찾지 않겠다고 하면 그 또한 네 자유이다. 너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본분을 이행하든 안 하든 평생 독신이고 싶어요. 혼자 살면 얼마나 자유로워요. 새처럼 날개를 펼치면 언제든지 날아갈 수 있잖아요. 부양할 가족 없이 어디를 가든 혼자이니 좋죠! 저는 혼자라도 외롭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시며 저와 동행하시니까요. 저는 외로울 때가 거의 없어요. 가끔 멍하니 있을 때도 있지만 그건 육체가 필요로 하는 일이죠. 때로는 멍하니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어쩌다가 한 번씩 공허하거나 외로운 기분이 들 때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거예요. 하나님 말씀을 읽고, 찬양을 배우고, 생명 체험 간증 영상을 보거나 하나님 집의 영화를 보기도 할 것입니다.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외롭지 않아요. 나중에, 미래에 외로울지 아닐지는 신경 쓰지 않아요. 어쨌든 지금은 외롭지 않고,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형제자매들도 곁에 꽤 있어요. 결혼 상대를 찾으려면 퍽 골치가 아플 거예요. 착실하게, 제대로 살 정상인이 많지는 않으니까 저는 결혼 상대를 찾고 싶지 않아요. 찾았다가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어서 이혼이라도 하게 되면 그게 무슨 생고생이에요? 이미 그 점을 명확히 아니까 상대를 안 찾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상대를 찾아서 결혼하는 목적이 잠깐의 쾌락과 행복일 뿐이고 결국에는 이혼하게 된다면 그건 그냥 생고생이죠. 저는 그런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아요. 아이를 낳는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한 인간으로서 저는 종족 번식을 위한 도구가 아니에요. 어느 집 대를 잇는 게 제 책임과 의무도 아니고요. 대는 잇고 싶은 사람이 이으라죠. 어느 성씨든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잖아요.” 대가 끊기면 또 어떠하냐? 그것은 그저 육적인 성씨의 문제일 뿐이 아니냐? 영혼끼리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기에 계승을 하고 안 하고 존속되고 말고가 없다. 인류의 조상은 하나뿐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류의 조상이 남긴 후손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대가 어디서 끊긴다고 말할 수가 없다. 대를 잇는 것은 네 책임이 아니다. 바른길을 걸으며 살고, 자유롭고 해방된 삶을 살고, 진정한 피조물로 사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인류의 번식을 위한 기계가 되는 것은 네가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니다. 어느 집을 위해 자손을 낳고 대를 잇는 것 또한 네가 져야 할 책임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게 그런 책임을 부여하지 않았다. 자손은 낳고 싶은 사람이 낳으면 되고, 대는 잇고 싶은 사람이 이으면 되며, 그 책임은 지고 싶은 사람이 지면 된다. 그것은 너와 상관이 없다. 네가 그 의무를 짊어지고 싶지 않고 다하고 싶지 않다면 그래도 된다. 그것은 너의 권리이다. 맞지 않느냐? (맞습니다.) 부모가 계속 잔소리를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제가 자손을 안 낳고 대를 안 잇는 게 불만이면 어떻게든 자식을 하나 더 낳아서 그 애한테 대를 이으라고 하세요. 아무튼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니까 누구한테 시키든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말하면 부모는 할 말이 없지 않겠느냐? 부모가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간에 나이를 그 정도 먹었으면 자녀의 결혼과 출산 문제에 관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이 일생 부유할지 빈곤할지, 자식을 몇이나 둘지, 결혼 여부가 어떨지는 다 하늘이 정하고, 타고난 운명이 있는 것이다. 누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이렇게 강요한다면 그 부모는 분명 무지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부류일 것이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부모를 대할 때는 그들이 하는 말을 그저 공기 취급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다. 잔소리가 길어지면 이렇게 말해라. “알겠어요. 그렇게 하죠. 내일 바로 결혼하고 모레 아이를 낳고 글피에는 증손자를 안아 보게 해 드릴게요. 마음에 드세요?” 대충 상대해 주고 돌아서서 자리를 뜨면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시원스럽지 않으냐? 아무튼 이것은 명확히 알아야 한다. 결혼은 하나님이 예정한다는 사실은 일단 차치하고,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일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는 것이다. 너는 독신으로 살기를 선택할 수도 있고 결혼하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부부 둘이서 살기를 선택할 수도 있고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선택은 너의 자유이다. 네가 그런 선택을 하는 근거가 무엇이고 이루려는 목적이나 결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권리는 하나님이 네게 부여했고, 너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 “저는 본분을 이행하느라 너무 바쁘고 아직 나이도 어려서 결혼 생각이 없어요. 독신으로 살면서 본분을 잘 이행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투자하고 싶어요. 결혼 문제는 나중에 생각할래요. 쉰 살이 돼서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이야기할 곳이 없을 때, 그때 상대를 찾아볼래요.” 네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도 괜찮다. 하나님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이제 제 청춘도 끝나 가는 것 같아요. 청춘의 끄트머리를 붙잡아야겠어요. 아직 젊어서 얼굴도 봐 줄 만하고 조금이라도 매력이 있을 때 하루빨리 곁에 있으면서 대화 상대가 되어 줄 사람, 아끼고 사랑할 사람을 하나 찾아서 짝을 이루어 살고 결혼도 해야겠어요.”라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너의 권리이다. 물론 여기에 한 가지가 있다. 즉, 만약 결혼하기로 결정했다면 우선 네가 현재 교회에서 어떤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지, 리더 일꾼이나 하나님 집의 양성 대상은 아닌지, 중요한 사역이나 본분을 담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네가 현재 받아들인 사역이 무엇인지, 네가 지금 처한 환경이 어떠한지 잘 고려해 봐야 하는 것이다. 네가 결혼할 경우 본분 이행에 지장은 없을지, 앞으로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영향이 없을지, 네가 리더 일꾼으로서 하는 사역과 네가 구원받는 데에 영향이 없을지, 이 모든 것이 네가 고려해야 할 문제이다. 하나님이 네게 권리를 부여하기는 했지만 그 권리를 행사할 때는 네가 곧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그 선택이 네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생각해야 한다. 어떤 결과가 초래되든 너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말아야 한다. 너는 네 선택이 초래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결혼만 하는 게 아니라 아이도 잔뜩 낳고 싶어요. 아들 낳고 딸도 낳고 식구끼리 평생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서로의 곁을 지키며 화기애애하게요.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 저를 잘 봉양하며 기쁘게 해 주는 자식들이 있고,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릴 거예요. 얼마나 좋겠어요! 본분 이행이며 진리 추구, 구원받는 일은 그다음이에요. 일단 그런 것들은 고려하지 않을래요. 아이 문제부터 해결하고 다시 생각하죠.” 그 또한 너의 권리이다. 단, 네 선택이 최종적으로 네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그 결과가 쓰든 달든, 쓰라리든 아리든, 너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네 선택을 위해 대신 값을 치르거나 그것을 책임져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알겠느냐? (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면 결혼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네가 내려놓아야 할 짐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네가 독신이기를 선택하는 것은 네 자유이고, 결혼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도 네 자유이며, 자식을 많이 낳기를 택하는 것도 네 자유이다.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다 네 자유이다. 우선, 네가 결혼하는 것을 선택한다고 해서 그것이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나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네가 독신이기를 택한다고 해서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도 아니다. 또 하나, 네가 결혼하는 것을 택하거나 자식을 많이 낳기를 택해도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거스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다고 해서 정죄되지는 않는다. 네가 독신이기를 택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마지막에 너를 구원받게 해 주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네가 독신이든, 결혼을 하든, 아이를 많이 낳든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네가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 결혼 배경이나 결혼 여부를 보지 않는다. 단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지, 본분을 이행하는 네 태도가 어떠한지, 네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했는지, 네가 행동할 때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지를 본다. 최종적으로도 하나님은 네 결혼 여부를 제쳐 두고 너라는 사람이 선택한 인생길, 생존 원칙, 생존 법칙이 과연 무엇인지를 보고 네가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정한다. 물론,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독신 또는 배우자와 헤어진 사람, 다시 말해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 또는 혼인 관계에서 벗어나거나 혼인 관계를 떠난 사람은 유리한 조건에 놓여 있다. 바로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일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그런 책임과 의무를 짊어질 필요가 없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이다. 시간상으로도 자유롭고 에너지도 더 넉넉할 뿐 아니라 인신의 자유도 더 있다. 예를 들어, 한 명의 성인인 네가 밖에 나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제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 부모도 제한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이 안배해 주면 가방만 메고 훌쩍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네가 결혼해서 가정이 있다면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다. 너는 가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우선 생활 조건과 수입원 측면에서 너는 최소한 가족들을 먹이고 입혀야 하며 아이가 어릴 때는 학교에 데려다줘야 한다. 너는 그 모든 것을 반드시 감당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혼자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사회적 의무와 가정에서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가 없는 사람은 간단하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배고플 일도 추울 일도 없고, 먹을 것과 지낼 곳이 있다. 가정생활에 필요한 것들 때문에 바쁘게 뛰어다니거나 나가서 돈을 벌고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다. 바로 이런 차이가 난다. 결국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 할 말은 앞에서 한 것과 같다. 그 어떤 짐도 짊어지지 말아야 한다. 부모의 기대든, 사회의 전통 관념이든, 너 자신의 사치스러운 욕망이든 너는 그 어떤 짐도 짊어지지 말아야 한다. 독신이기를 택하든 아니면 결혼하는 것을 택하든 그것은 너의 권리이다. 언제 독신에서 벗어날지, 언제 결혼할지를 선택하는 것도 너의 권리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단정 짓지 않는다. 결혼해서 자녀를 몇이나 낳을지는 하나님이 예정해 두었지만 네가 선택할 수도 있다. 자기 실제 상황과 자기 추구에 따라 선택해도 된다. 하나님은 규정하지 않는다. 네가 자기는 백만장자, 천만장자, 억만장자라며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저는 아홉 명을 낳든 열 명을 낳든 문제없어요. 아이를 잔뜩 낳아 키우더라도 본분 이행에 필요한 에너지를 빼앗기지는 않을 거예요.” 번거로움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낳아도 된다.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결혼에 대한 네 태도가 어떻든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너를 구원할지 말지가 바뀌지는 않는다. 바로 이런 것이다. 확실히 알았느냐? (확실히 알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네가 지금 독신이기를 택했더라도 자기가 독신이라는 이유로 모종의 우월감에 빠져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저는 화려한 싱글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저는 우선적으로 구원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이 네게 그런 특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알겠느냐? 네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저는 결혼했으니 상대적으로 열등한 존재인가요?” 열등하지 않다. 너 역시 패괴된 인류 중 하나이다. 결혼했기 때문에 짓밟히고 유린당해 남보다 더 패괴되거나 더 구원하기 어려워지거나 하나님을 더 상심하게 만들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기를 원치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전부 사람의 잘못된 사상 관점이다. 사람의 결혼 여부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람의 결혼 여부와 사람이 마지막에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역시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마지막에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근거합니다.) 맞다. 사람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와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 여부에 근거한다. 이것이 그 사람의 최종 결말을 가늠하는 근거이다. 여기까지 교제했는데, 결혼이라는 문제로 인해 사람이 짊어지게 되는 짐을 대체로 내려놓을 수 있지 않겠느냐? (네.) 내려놓을 수 있다면 너희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더 유익할 것이다. 이 말을 못 믿겠으면 결혼해 본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라. 그들이 구원받을 희망이 얼마나 있는지는 그들 자신도 말 못 할 것이다. “결혼 생활을 오래 하다가 하나님을 믿는 일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는데, 제가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감히 말 못 하겠네요.” 나이 서른이 넘은 노총각 노처녀들에게도 물어보아라.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이방인과 같다. 네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들 역시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고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결혼이라는 문제에 관해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는 이런 것들이다. 우리가 교제한 주제 중에 두세 마디로 확실히 설명이 가능한 것은 없다. 여기에는 분석해야 할 다양한 사실도, 갖가지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의 상황도 많다. 여러 상황에 따라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 역시 두세 마디로 확실히 설명 가능한 것이 아니다. 각각의 문제마다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고, 깨달아야 할 사실의 진상이 있으며, 더 나아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사람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이 있다. 당연하게도 그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은 사람이 응당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그것들을 내려놓으면 어떤 일에 대한 네 사상 관점이 비교적 긍정적이고 정확하게 된다. 그러면 비슷한 일에 다시 직면했을 때는 더는 그것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릇되고 터무니없으며 황당한 사상 관점에 구애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너는 결박당하거나 교란당하지 않고 그 일을 올바르게 마주할 수 있게 되며, 다른 사람이나 자신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정확해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 원칙을 근거로 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긍정적 효과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고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자!

2023년 4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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