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제 3 부

부모가 자녀에게 거는 다른 측면의 기대로는 가업 혹은 선조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이 있다. 대대로 화가를 배출한 집안을 예로 들겠다. 조상이 정한 규칙에 따르면 한 세대에 한 명은 반드시 가업을 잇고 가족의 전통을 계승해야 하는데, 이번 대에서는 네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너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 않고 그림 그리기에 흥미도 없다. 너는 단순한 과목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네게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네게는 집안의 전통을 계승할 의무가 없고 집안의 그 어떤 가업이나 선조의 유업을 계승할 의무가 없다. 무술이나 일종의 수공 기술, 어떤 기능 등이 그 예이다. 네게는 그들이 계승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계승할 의무가 없다. 또 대대로 전통극을 공연하는 집안도 있는데, 네 대에 이르러 부모가 네게도 초등학교 때부터 전통극을 시켰다고 치자. 전통극을 배우기는 했지만 너는 가슴 깊이 그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직업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너는 절대로 전통극과 관련된 그 어떤 직업에도 종사하지 않을 것이다. 네 내면 깊숙한 곳에는 그 직업에 대한 반감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네게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네 운명은 부모의 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무슨 직업을 선택할지, 어느 쪽에 관심이 있을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할지, 어떤 길을 걸으려 할지, 이는 전부 다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배하는 것이지 가족 중의 누군가가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부모가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부모가 모든 자녀를 위해 맡은 역할은 그저 성장기에 자녀를 감독하면서 보호하고, 정성껏 기르고, 함께해 주는 것뿐이다. 더 나은 경우에는 자녀를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교육하고, 지도할 수 있는 것이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이뿐이다. 네가 자라서 독립하고 나면 부모의 역할은 그저 감정적 버팀목이자 의지처로만 남게 된다. 언젠가 네가 독립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고 생활 형식상에서 독립하면 그때 부모의 책임과 의무도 완수된다. 너와 부모는 교육자와 피교육자, 감호자와 피감호자의 관계에서 벗어난다. 사실상 이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부모고 친척이고 친구고 간에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자기만 혼자 믿는다. 어떻게 된 일이냐? 이는 하나님의 예정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너는 택하고 그들은 택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빌려 너를 어른이 될 때까지 정성껏 기른 뒤에 하나님 집으로 데려왔다. 그렇다면 자녀로서 부모의 기대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바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너를 대하는 방식이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지 않고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라는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면 너는 거부해도 되고, 그들을 상대로 이치를 따져 그들이 깨닫게 해도 된다. 네가 아직 미성년자인데 그들이 자신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도록 강제로 네게 압제를 가한다면 조용히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길을 열어 달라고 할 수밖에 없다. 네가 성인이라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아뇨. 저는 부모님이 정해 준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되고 부모님이 정해 준 방식대로 제 인생길과 생존 방식, 추구 목표를 선택하지 않아도 돼요. 부모님은 저를 기르는 의무를 이미 완수했어요. 만약 우리가 화목하게 지낼 수 있고 우리에게 공통된 추구와 목표가 있다면 원래 관계가 유지되겠지만, 우리 사이에 더 이상 공통된 뜻과 목표가 없다면 잠시 안녕을 고해도 될 것 같아요.” 어떠하냐? 이렇게 말할 엄두가 나느냐? 물론 반드시 형식상으로 부모와 이렇게 관계를 끊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마음속으로는 이 점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부모는 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지만 네게 진정으로 생명을 주고, 바른 인생길을 걷게 해 주고, 사람됨의 모든 원칙을 깨닫게 해 준 분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부모는 네게 진리를 줄 수 없고 진리와 관계된 그 어떤 올바른 제의를 할 수도 없다. 그러면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들이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든, 네게 얼마나 많은 돈과 에너지를 들였든 너는 어떤 죄책감도 느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어째서냐? (그것은 부모의 책임이자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그 모든 대가를 치른 것이 자녀가 두각을 나타내 자기들의 바람을 충족시켜 주길 원해서였다면, 그것은 자기들의 속셈과 목적이지 하나님께서 그러라고 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그저 한 측면일 뿐이다. 다른 측면으로는, 네가 지금 걷는 길이 올바른 길이고,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네가 창조주 앞에 와서 하나의 피조물로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그들에게 죄책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소위 그들이 너를 위해 다한 책임이라는 것은 그저 하나님이 안배해 준 것이다. 만약 네가 그들 손에서 자라는 동안 행복했다면 그것은 덤으로 얻은 것이다. 만약 네가 행복하지 못했다면 당연히 그 또한 하나님의 안배이다. 너는 하나님이 오늘날 너를 나오게 해서 그들의 본질을 똑똑히 알게 하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게 하였음에 감사해야 한다. 가슴 깊이 그 모든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정확한 해결 방식과 처리 방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속이 한결 평온해지지 않겠느냐? (네.) 만약 한결 평온해졌다면 참으로 잘된 일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일에 있어서는 부모가 이전에 네게 무엇을 요구했든, 혹은 현재 무엇을 요구하고 있든, 네가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라고 요구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며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네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게 된 이상, 너는 이 일에 있어서 더는 그 어떤 짐도 짊어지지 말아야 한다. 부모에게 미안해하고,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을 이행하느라 부모를 호강시켜 드리지 못하고, 부모 곁에서 자녀가 다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아 그들이 감정적인 결핍을 겪는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런 것들은 모두 부모가 지운 짐이며, 사람이 반드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네가 정말로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면 부모가 한평생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복을 누릴지도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한다. 네 효도 여부에 따라 무엇이 바뀌지는 않는다. 네가 효도한다고 그들이 고생을 덜 하거나 네가 효도하지 않는다고 그들이 고생을 더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운명은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이 예정해 두었다. 그 모든 것이 그들에 대한 너의 태도에 따라, 너와 그들 사이의 정이 얼마나 깊은지에 따라 바뀌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운명이 있다. 그들이 이번 생에 빈곤할지 부유할지, 잘 풀릴지 안 풀릴지, 생활의 질이 어떻고, 물질적인 혜택이 어떻고, 사회적 지위가 어떻고, 생활 현황이 어떨지, 그 모두는 너와 별 관계가 없다. 네가 그들에게 죄책감이 드는 것 같고, 그들에게 빚을 진 것 같고, 그들 곁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치자. 설령 네가 그들 곁을 지킨다고 한들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느냐?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양심에 참소를 받지 않게 되고 죄책감은 없어지더라도 매일 그들 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을 추구하며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과 시시비비에 대해 떠드는 그들을 보고 있자면 네 심정이 어떻겠느냐? 마음이 편하겠느냐? (편치 않습니다.) 네가 그들을 바꿀 수 있겠느냐? 네가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 (못 합니다.) 그들이 아플 때 네가 병상 곁에서 시중들 여건이 되어서 그들의 고생을 덜어 주고 자녀로부터 약간의 위안을 얻게 해 줬다고 치자. 그들은 병이 낫고 육적으로는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 믿는 일에 관해 한마디라도 꺼낼라치면 그들은 아홉 마디, 열 마디로 반박한다. 황당한 이론을 떠드는데 얼마나 추악하기 짝이 없는지 너를 다음 생까지 구역질 나게 할 정도이다. 겉으로 보기에 너는 양심의 평안을 얻었다. 부모가 너를 헛되이 키우지는 않은 것 같고, 네가 배은망덕한 인간은 아닌 것 같고, 이웃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양심이 평안하다고 해서 네가 정말로 마음 깊이 그들의 온갖 사상 관점과 생존관, 생존 방식을 받아들인 것이냐? 네가 정말로 그들과 잘 맞는 것이냐? (아닙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다른 사상 관점을 가지고 있는 두 부류의 인간은 육체적, 감정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떻게 얽혀 있든지 간에 다른 한쪽의 사상 관점을 바꿀 수 없다. 쌍방이 함께 있으면서 담론을 나누지 않는다면 몰라도 담론을 나누게 되면 바로 의견 충돌과 갈등이 생겨서 서로 미워하고 싫어하게 된다. 겉으로는 혈연관계이지만 안은 원수인데, 물과 기름 같은 두 부류의 인간이다. 그렇다면 네가 아직 그들 곁에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냐? 수모를 당하고 싶어서냐,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냐? 만날 때마다 후회하게 되는데, 이는 기분 상할 일을 사서 하는 꼴이다. 곰곰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부모님을 안 뵌 지 몇 년이나 됐네. 예전에 부모님이 가증스럽게 행동하기는 했지. 하나님을 모독하고, 내가 하나님 믿는 걸 반대도 하고. 그래도 그간 연세도 드셨으니 변했겠지? 그럼 나도 부모님이 나쁜 짓을 저질렀던 걸 따지지 말아야겠어. 거의 다 잊기도 했고. 게다가 정 때문에도 그렇고 양심상으로도 부모님이 염려돼.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겠네. 집에 한번 가 봐야겠다.’ 집에 간 지 하루도 안 되어서 예전에 그들에게 느꼈던 혐오감이 다시 올라오면 후회스러워진다. ‘이게 집이야? 저런 사람들이 부모야? 저들은 원수 아니야? 원래도 그랬고 지금도 이 꼬락서니야. 하나도 변한 게 없어!’ 그들이 변할 리가 있겠느냐? 원래 어떤 존재이면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들이 나이를 먹었다고 바뀌어서 너와 맞을 줄 알았느냐? 안 맞는다. 네가 집에 들어서면 그들은 곧장 네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귀한 식재료나 명품 가방, 명품 옷인지 아니면 귀금속인지부터 살핀다. 손에 들린 비닐봉지 두 개에 각각 만두와 바나나 몇 개가 담긴 것이 보이면, 네가 여전히 그토록 가난해 보이면 또 잔소리를 해 댄다. “어느 집 딸은 외국 나가서 외국 남자랑 결혼하더니 팔찌를 사도 순금으로만 사더라. 걸핏하면 꺼내서 자랑한다니까. 어느 집 아들은 차 샀다고 틈만 나면 부모님 모시고 여행 다니고 해외도 나가더라. 부모가 아들딸 덕을 보는 거지! 어느 집 딸은 집에 빈손으로 와 본 적이 없대. 엄마 아빠한테 족욕기도 사 주고 안마 침대도 사 주고. 옷은 꼭 실크나 울 소재로만 산다더라. 남의 자식들은 참 효성스러워. 애지중지해 준 보람이 있다니까! 그런데 우리는 배은망덕한 인간을 키웠어!” 이는 너 들으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네가 산 만두와 바나나가 부모의 눈에는 차지 않았지만 너는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효도하려고 생각했다. 부모가 만두와 바나나를 좋아했기에 여러 해 만에 보는 그들에게 그것을 사다 주면서 감화시키고 양심상의 죄책감을 덜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집에 가서 죄책감을 덜기는커녕 한바탕 꾸짖음만 듣고 낙담해서 뛰쳐나왔다. 네가 그들을 보러 집에 간 것이 의미가 있느냐? (없습니다.) 네가 아무리 오랫동안 집에 가지 않았어도 그들은 너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네가 왔으면 됐지. 아무것도 사 올 필요 없어. 바른길을 걸으면서 건강하고 평안한 걸 보니 좋네. 얼굴 보고 속 이야기 나누는 걸로 충분해.”라고 말하지 않았다. 네가 그간 잘 지냈는지,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가슴 아픈 일이 임하지는 않았는지,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았는지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따뜻한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다면 네가 떠나지 못했을 것이 아니냐? 너는 욕을 한바탕 먹고 점잖아졌다. 마음이 편해지고 모든 죄책감에서 벗어나 이렇게 생각했다. ‘빨리 가자. 여기는 그야말로 연옥이야! 내 껍질을 벗기고 살점을 뜯어 먹고 피까지 빨아 먹으려고 할 거야!’ 부모와의 관계는 사람이 감정적으로 가장 처리하기 어려워하는 관계이지만 사실 처리 못 할 일은 아니다. 사람은 오로지 진리를 깨달은 기초에서만 이 문제를 올바르고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다. 감정의 각도나 세인의 시선과 각도를 출발점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올바르게 부모를 대해야 한다. 부모의 역할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자녀는 부모에게 어떤 존재인지, 자녀가 부모를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인지, 사람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고 해결해야 하는지, 이런 문제에 있어서 감정을 근거로 해서는 안 되며 그 어떤 잘못된 사상 혹은 사회 여론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올바르게 대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정한 환경 속에서 네가 부모에게 어떤 책임도 다하지 못한다거나 그들의 생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치자. 그러면 불효하는 것이냐? 네가 양심에 참소를 받겠느냐, 받지 않겠느냐? 네 주변 이웃, 동창, 그리고 친척들이 모두 뒤에서 너를 욕하고, 헐뜯고, 너를 불효자라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네 곁에서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고, 얼마나 정성을 들이고,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이 불효자 같으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는 잘 지내는지 연락 한 번을 안 하고. 새해에도 집에 안 오면서 전화 한 통조차 없고 부모님 안부도 안 묻고.”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네 양심이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리고, 가책을 느낀다. ‘아아, 저 말이 맞아.’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가슴이 꼭 바늘에 찔린 것처럼 흠칫흠칫 떨린다. 이런 느낌이 들지 않느냐? (예전에 그랬습니다.) 네가 불효한다고 하는 이웃과 친척들의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불효한 것이 아닙니다.) 이유를 말해 보아라. (그간 부모님 곁에 있거나 세인들처럼 부모님의 바람을 충족시켜 드리지는 못했지만 저희가 하나님 믿는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해 두신 일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인생길이고 정의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불효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너희의 말은 여전히 과거에 모두가 알고 있는 도리에 머물러 있다. 현실적인 말이 아니고 현실적인 인식이 아니다. 누가 또 말해 보겠느냐? (막 출국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제가 밖에서 뭘 하는지 모르는 가족들이 저를 손가락질하면서 불효한다고 하고, 부모님 곁에서 그들을 돌보지 않는 불효녀라고 할 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면이 그것에 의해 결박당하고 속박당했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부모님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니 예전에 부모님이 저를 돌봐 줬던 것은 부모로서 책임을 다한 것이고, 부모님이 저에게 잘해 준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해 두신 일이기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가 하나님을 믿으며 올바른 인생길을 걷고 있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니 부모님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자녀가 곁에서 보살펴 주는 복을 부모가 누릴 수 있을지 역시 하나님께서 예정해 두신 일입니다. 이를 깨닫자 마음속의 죄책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훌륭하다. 우선, 많은 사람이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한 측면으로는 객관적인 전체적 환경 때문이다. 반드시 부모를 떠나야 하고, 부모 곁을 지키면서 그들을 돌보고 그들과 함께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원해서 부모를 떠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한 측면의 객관적 원인이다. 다른 측면을 보면, 주관적으로 말해서 네가 밖에 나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부모를 떠나 네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여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서 부모를 떠나야만 했고, 그들 곁에 남아 함께하면서 그들을 돌볼 수 없었던 것이다. 너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책임을 회피하려고 나온 것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인 네가 그들을 떠나 밖에 나와서 본분을 이행해야만 했던 것은 서로 다른 성질의 문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네 마음속에는 그들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있다. 아무 감정도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객관적인 환경이 허락했다면, 그들 곁을 지키는 동시에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다면 너는 그들 곁에서 항상 그들의 생활을 돌보고 네 책임을 다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환경 때문에 너는 반드시 그들을 떠나야만 했고 그들 곁을 지킬 수 없었다. 네가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성질이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가 집을 떠난 것이 그들에게 효도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면 이는 불효이고 인성이 없는 것이다. 부모가 너를 키워 줬는데 너는 머리가 커지자마자 나가서 혼자 살지 못해 안달이고, 부모를 보기 싫어하고, 부모한테 어려운 점이 있다는 말을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으려 하고, 상관할 여건이 돼도 상관하지 않으면서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효이다. 하지만 지금이 이런 상황이냐?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자 자기가 살던 현(縣)을 떠나고, 시(市)를 떠나고, 성(省)을 떠나고, 심지어 나라를 떠났다. 이미 고향을 멀리 떠난 데다가 갖가지 이유로 집에 연락하기가 어려워서 가끔 고향에서 온 사람을 통해 부모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 전해 들으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안심한다. 사실 너는 불효하는 것이 아니다. 인성을 상실한 수준에 이르러 부모마저 신경 쓰지 않으려 들고 책임을 안 지려는 것이 아니다. 갖가지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이렇게 하기를 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불효가 아니다. 여기까지가 두 가지 원인이고, 이 외에 한 가지 원인이 더 있다. 만약 부모가 하나님 믿는 것을 유난히 박해하고 가로막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네가 하나님 믿는 것을 부모가 지지했다면, 혹은 너처럼 하나님을 믿는 형제자매였고 모두가 하나님 집의 사람이었다면 마음속에 부모가 떠오를 때 묵묵히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부모를 하나님 손에 맡기고 그들의 건강과 안전, 그들 생활에 필요한 것 일체를 하나님 손에 맡기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네가 부모를 하나님 손에 맡긴다면 그들에게 최고로 효도하는 것이다. 너는 그들의 생활에 온갖 난관이 임하기를 바라지 않고 그들이 잘살지 못하고, 잘 먹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너는 마음속으로 분명 그들이 평안하도록 하나님이 지켜 주기를 바랄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본분을 이행하고 굳게 서서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면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한 것이다. 사람은 인성으로 그 정도에만 이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그토록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으며 그토록 많은 진리를 들었으면 최소한의 인식과 이해는 있다는 것이다. 바로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하며, 사람은 하나님 손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보살핌과 지킴이 자녀의 걱정과 효도, 자녀가 곁에 있어 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이 부모를 보살펴 주고 지켜 준다면 네 마음이 푹 놓이지 않겠느냐?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만약 네가 걱정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너무 작은 것이다. 만약 네가 정말로 그들이 걱정되고 마음에 걸린다면 자주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그들을 하나님 손에 맡겨 하나님이 지배하고 안배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매일을 주재하며 그들에게 임하는 모든 일을 주재하는데, 네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냐? 너는 너 자신도 주재하지 못하고 네 코가 석 자이다. 네가 무슨 수로 부모를 매일 행복하게 해 주겠느냐? 너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에게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결국에는 구원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해라. 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자기들이 원하는 길을 걸으라고 해라. 조금 낫고 인성이 조금 있는 부모라면 여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된다. 하나님이 어떻게 행할지는 하나님의 안배가 있을 것이니 사람은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종합해 보자면, 사람이 자식으로서 다할 책임에 대해서는 사람의 양심 속에 지각이 있다. 그 지각으로 인해 사람이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든지 간에, 걱정을 하든 아니면 그들 곁에서 함께하길 선택하든 간에 결론적으로 사람은 객관적 환경의 영향으로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고 해서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등등을 느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믿는 삶 속에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그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과 관련된 화제가 나왔을 때 사람은 이렇듯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더는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 한 측면으로는, 너는 마음 깊이 네가 불효하는 것이 아니고 책임을 다하기가 싫어서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다른 측면으로는, 부모가 하나님 손안에 있는데 네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냐? 사람이 무슨 걱정을 하든 전부 쓸데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물 흐르듯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따라 마지막까지 살아가고 길을 끝까지 걸어간다. 조금도 빗나가는 법이 없다. 그러니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더 번뇌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인지,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했는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 게 아닌지, 이것들은 네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네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대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사람의 학업과 직업 측면을 교제했다. 이 측면에서 사람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사실은 무엇이냐? 네가 부모의 말을 듣고 부모가 기대하는 대로 아주 열심히 공부한다면 꼭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는 것이냐? 정말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너를 위해 안배해 둔 것, 즉 네게 있어야 할 운명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위치, 네가 걸어야 할 길, 네게 있어야 할 생활 환경이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일찌감치 너를 위해 안배해 두었다. 그러니 부모의 기대라는 문제에 있어서 너는 어떠한 짐도 짊어지지 말아야 한다. 네가 부모의 요구에 따라 행동해도 네 운명은 이렇고, 네가 부모의 기대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부모의 기대를 저버려도 네 운명은 이렇다. 네 앞에 펼쳐진 길은 정해진 그대로다. 하나님이 이미 예정해 두었다. 마찬가지로, 네가 부모의 기대에 미쳤고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으며 그들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해서 과연 그들을 호강시켜 줄 수 있겠느냐? 고생하고 모욕당할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겠느냐? (바꾸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가 자기를 키워 준 은혜가 너무나 크고, 자기를 키우는 동안 부모가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좋은 일자리를 얻은 다음 고생을 견디고, 괴로움을 참으며, 근면하게, 열심히 일해서 큰돈을 벌고 부자가 되어 나중에 부모를 떵떵거리며 살게 해 주려고 한다. 양옥에 살며 세단을 타고 좋은 것을 먹고 마시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몇 년 바쁘게 일해서 생활 환경과 조건이 좋아졌지만 부모는 하루도 복을 누려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만약 네가 흘러가는 대로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고 그 짐을 짊어지지 않았다면 어느 날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었을 것이다. 부모에게 보답하려고 필사적으로 돈을 벌어서 잘살게 됐는데 부모가 세상을 떠났다면 네 심정이 어떻겠느냐? 본분을 이행할 시간도 허비하고 진리를 얻을 시간도 허비했는데 남은 생을 잘 보낼 수 있겠느냐? (잘 보낼 수 없습니다.) 네 인생이 영향을 받게 되고, 너는 영원히 ‘부모를 저버렸다’는 짐을 진 채로 남은 생을 살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부모를 저버리지 않고 키워 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분투하며 돈을 벌었다. 나중에 부자가 되어 좋은 것을 먹을 여건을 갖추게 되자 부모에게 식사를 대접하러 가서 고급 요리를 한 상 가득 시키고는 이렇게 말한다. “드세요. 어렸을 때 이런 걸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요. 잡수세요!” 그러나 나이 든 부모는 이가 거의 다 빠지고 입맛도 없어서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는 채소나 국수 같은 것만 몇 입 먹고는 배가 부르다고 한다. 너는 한 상 가득 차려진 요리를 몇 입 먹지도 않은 것을 보고 속이 상한다. 부모는 기분이 꽤 좋다. 그 나이에는 그만큼밖에 먹을 수 없는데 정상적인 일이다. 그들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너는 마음이 괴롭다. 무엇이 괴로우냐? 네가 한 일들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부모가 이번 생에 얼마나 많은 복을 누리고 얼마나 고생할지는 미리 정해져 있다. 네 염원 때문에 바뀔 리가 없고 네 감정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바뀔 리도 없다. 하나님이 오래전에 예정해 두었기에 사람이 무엇을 하든 전부 쓸데없는 짓이다. 이 사실이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너를 정성껏 길러 건강하고 순조롭게 어른이 된 뒤에 바른길을 걸으며 피조물로서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게 하는 것이다. 부모가 하는 그 모든 일은 네 운명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고, 네 운명을 바꿀 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보조하고 인도하는 일일 뿐인데, 너를 성인으로 키우고 바른 인생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네가 하는 일도 너 자신의 손으로 부모를 위해 행복을 만들고, 부모의 운명을 바꾸고, 부모가 너로 인하여 큰 복을 누리며 좋은 음식을 먹고 마시게 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이는 전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 짐은 네가 짊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너는 네 개인의 양심 혹은 감정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부모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 어떤 무의미한 희생을 하거나 무의미한 일을 하여 부모에게 보답하려 하고, 부모가 복은 더 누리고 고생은 덜하도록 그들의 운명을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네 책임이 아니고 네가 생각해야 할 일도 아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한 책임을 다할 때는 자신의 여건과 하나님이 예비한 조건 및 환경을 근거로 해야 한다. 자녀도 부모를 대할 때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조건과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근거로 해야 한다. 단지 그뿐이다. 부모 혹은 자녀가 하는 모든 일은 개인의 힘이나 사욕으로 상대방의 운명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노력으로 상대방을 더 잘 지내게 하고, 더 행복해지게 하고, 더 뜻대로 풀리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부모이든 자녀이든 모두 하나님이 안배한 환경 속에서 순리를 따라야 한다. 자기 노력이나 자신의 그 어떤 의지로 무언가를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부모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가졌다고 해서 부모의 운명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이 오래전에 예정해 두었다. 하나님은 네가 그들의 생활 범위 안에서 살고, 그들에게서 나고, 그들에게 정성껏 길러지도록 예정했고 너와 그들 사이가 그런 관계가 되도록 예정했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너의 책임은 그저 자신의 여건에 따라 그들과 함께하고 약간의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다. 네가 부모의 현황을 바꾸려 하고 부모를 더 잘 살게 해 주려는 것은 전부 쓸데없는 짓이다. 혹은 이웃과 친척들이 우러러보게 하고, 부모의 면목이 서게 하며, 집안에서 부모의 체면을 세워 주려 한다면 이는 더 불필요한 일이다. 또, 홀어머니나 홀아버지가 버림받은 뒤에 혼자 너를 어른으로 키워 낸 경우, 너는 더욱더 그들이 어려웠으리라 생각하기에 평생을 바쳐 은혜를 갚고 보답하려고 한다. 심지어 그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그들이 네게 요구하는 것, 그들이 네게 기대하는 것, 거기다가 네가 하기를 원하는 것까지 모조리 네 이번 생의 짐이 된다. 이는 전부 옳지 않은 일이다. 창조주 앞에서 너는 하나의 피조물이다. 네가 이번 생에 해야 할 일은 그저 부모에 대한 책임만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하고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책임을 다하더라도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근거로 해야지 네 감정 혹은 양심상의 필요에 근거해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된다. 물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그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 이 또한 네가 피조물로서 이행해야 할 본분의 일부로,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한 책임이다. 이 책임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다하는 것이지 사람의 필요를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는 홀가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부모를 대하고, 부모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 된다. 이렇듯 간단하다. 하기 쉬운 일이 아니냐? (하기 쉬운 일입니다.) 어째서 하기 쉬운 것이냐? 그 본질과 사람이 지켜야 할 진리 원칙은 아주 명확하다. 본질은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누가 누구의 운명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네가 노력하든 노력하지 않든, 네가 책임을 다하려고 하든 책임을 다하려고 하지 않든, 어차피 상대방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네 마음속에 그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그저 그런 감정적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일 뿐, 어떤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간단한 한 가지는 바로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네게 지운 갖가지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모든 일을 대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부모와의 관계를 대하고 처리해야 한다. 이렇듯 간단하다. 쉽지 않으냐? (쉽습니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일들이 전부 쉬울 것이다. 게다가 체험하는 과정에서 정말로 이렇다는 것을 점점 더 느낄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사람의 운명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 전부 사실인 건 맞지만 그러는 건 너무 몰인정한 느낌이에요. 저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못 견디겠어요.” 못 견디겠다면 네 감정을 충족시키면 된다. 부모 곁에 딱 붙어서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시중을 들고, 효성을 다하고, 부모가 옳은 말을 하든 틀린 말을 하든 무조건 따르며 그들의 껌딱지, 그들의 들러리가 되어도 된다. 그러면 뒤에서 너를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사돈의 팔촌까지 다들 너를 대단한 효자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손해를 보는 사람은 너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 너는 효자라는 평판을 지키고, 자신의 감정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양심에 참소를 받지 않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소홀히 하고 잃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그 모든 일을 대하고 처리하지 않아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잃은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가 부모에게는 효도했으나 하나님을 배반했고, 효도하면서 부모의 육체적, 감정적 필요를 충족시켰으나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차라리 효자가 되기를 선택했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선택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불경이다. 하나님은 네가 대단한 효자이고, 부모를 저버리지 않았고, 양심이 있고,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했다고 해서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며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 양심과 육체적, 감정적 필요만을 충족시킬 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 문제를 대하거나 처리하는 근거 및 원칙으로 삼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심하게 거역하는 것이다. 사람이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모든 일을 바라보고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 합당한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있고, 인성과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이 문제를 대하거나 처리하는 원칙 및 근거로 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여 본분을 이행하러 나가지도 않는다면, 혹은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놓치거나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부모 곁을 지키며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에게 행복을 주고, 노년을 즐겁게 보내게 해 주며 그들의 은혜에 보답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인성도 양심도 없는 인간이라고 할 것이다. 너는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은 너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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