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5) 제 2 부

또 설만 되면 온종일 달력을 뒤적거리며 섣달그믐부터 전통 명절에 돌입하는 사람도 있다. 매일 무엇을 먹고 입을지, 금기는 무엇인지 전통 풍습에서 전해지는 생활 방식과 금기를 엄격하게 지킨다. 금기되는 말이나 금기되는 일이 있으면 하지 않고, 길하고 좋다는 음식이나 말이 있으면 그대로 먹거나 말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설을 쇨 때 꼭 녠가오를 먹어야 해마다 성공 운이 오른다고 생각한다. 해마다 성공 운을 올리려면 반드시 녠가오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큰일이 있든, 얼마나 바쁘고 피곤하든, 본분 이행에 어떤 특수한 상황이 생겨 시간을 낼 수 있든 없든, 집에서 녠가오를 빚을 시간이 없으면 나가서라도 사 먹어야 한다. 오로지 좋은 운수를 위해서 말이다. 그 밖에 설을 쇨 때마다 꼭 생선을 먹는 사람도 있다. 그 속뜻은 해마다 넉넉하게 보낸다는 의미이다. 생선을 안 먹으면 일 년 내내 가난에 시달릴 것이기에 생선을 사지 못하면 나무 물고기라도 구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녠가오도 먹고 생선도 먹어서 해마다 성공 운이 오르고 넉넉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좀 더 풍족하고 더 나은 생활을 하면서 한 해를 순탄하게 보내기 위함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업이 성공하고 장사로 떼돈을 벌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한, 설을 쇨 때는 덕담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四)’에는 죽음의 의미가 있고, ‘오(五)’에는 없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나 ‘오’를 말하지 말고, 대신 ‘육(六)’이나 ‘팔(八)’을 말해야 한다. ‘육’은 만사가 순조롭다는 의미가 있고, ‘팔’은 돈을 번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덕담을 해야 함은 물론 직원이나 가족, 친척, 친구에게 세뱃돈을 줘야 한다. 세뱃돈의 속뜻은 돈을 번다는 의미이다. 세뱃돈을 많이 줄수록 돈을 많이 번다는 속뜻이 있다. 세뱃돈은 사람뿐 아니라 집의 고양이나 개에게도 줘야 한다. 누구든 돈을 벌고 한 해 사업이 흥하여 대박을 터뜨린다는 의미가 있다. 먹고 일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까지 모두 전통적으로 전해져 오는 습관과 말을 계승하고 있다. 한 점 오차도 없이 실행하는 것이다. 비록 생활 환경이 변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바뀌지만, 이런 전통 풍습이나 생활 방식은 바뀌지 않는다. 이런 전통 속에는 저마다 속뜻이 있고, 조상 대대로 전해져 오는 좋은 말과 금기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계승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만약 금기를 어기거나 깨면 한 해가 순탄하지 않을 수 있다. 곳곳에서 난관에 봉착해 장사가 잘되지 않거나 파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전통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명절을 쇨 때 지켜야 할 전통이 있는가 하면, 명절이 아닌 평소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전통도 있다. 이발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달력에 오늘은 이발이나 외출을 삼가야 한다고 나오면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만약 달력도 보지 않고 이발해서 외출과 이발에 대한 금기를 모두 깨 버리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이자 미신이다. 오늘 외출하려는데 달력에 만사가 여의치 않다고 적혀 있는 경우가 있다. 만사가 여의치 않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면서 소일거리를 하거나 놀라는 뜻이다. 오늘 복음을 전하러 나가야 하는데 괜히 금기를 어기고 외출했다가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한다.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강도를 만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외출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내일 가자! 조상님께서 하신 말씀을 어길 순 없지. 조상님이 외출할 땐 꼭 달력을 보고 혹 만사가 여의치 않다고 하면 나가지 말라고 하셨어. 나갔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그 대가는 자기 몫이야. 달력을 보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은 탓이지.”라고 말한다. 이것이 전통이면서 미신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제 스물네 살인데 올해가 제 띠의 해예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제가 서른여섯 살인데 올해가 제 띠의 해입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띠의 해에는 무엇을 하느냐? (붉은 내복을 입고 붉은 허리띠를 맵니다.) 입어 본 사람이나 매 본 사람이 있느냐? 붉은 허리띠를 매고 붉은 내복을 입은 소감이 어떠냐? 한 해 잘 살았다는 느낌이 들더냐? 액을 면했느냐? (저의 해에 붉은 양말을 신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해 시험을 망쳤습니다. 그렇게 신으면 운이 좋을 거라는 말처럼 되지는 않았습니다.) 붉은 양말을 신어서 망친 것이 아니냐? 신지 않았다면 혹시 시험을 잘 보았을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 (입고 안 입고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옳다. 입고 안 입고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것은 전통이면서 미신이다. 지금 네가 자기 띠의 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혹은 이런 전통을 계승해 나가려는 마음이 있든 없든 결국 이 전통의 사상과 말은 사람의 마음에 어느 정도 각인되어 있다. 예를 들면, 네 띠의 해에 사고를 당하거나 특수한 일을 당해 정말 순탄치 않고 되는 게 없는 한 해를 보낸다면 너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올해는 정말 안 풀리네. 생각해 보니 그러네. 올해는 나의 해인데 다들 자기 띠의 해엔 조심하라고 하잖아. 금기를 깨기 쉽다고. 전통에 따라 빨간 옷을 입어야 하지만 난 하나님을 믿어서 안 입었지. 그런 말을 믿지도 않았고.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올해 일이 그다지 안 풀렸거든. 그럼 이런 일은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내년에는 좋아질지 몰라.’ 너는 무의식적으로 올해 겪은 특수하고 좋지 않은 일을 조상이나 가정에서 교육받은 자기 띠의 해라는 전통적인 말로 귀결시킬 것이다. 그런 말로 올해 네가 겪은 이런 특수한 일을 검증하는 것이다. 그 특수한 일의 배경에 있어야 할 진상과 본질은 제쳐 두고, 또한 이 일을 대할 때 네가 가져야 할 태도나 배워야 할 공과는 제쳐 두고, 무의식적으로 올해가 특수한 해라고 생각하고는 일어난 모든 일을 자기 띠의 해와 연관시킬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올해 내게 액운이 올 거야. 올해는 내게 복이 올 거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가정의 교육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이런 생각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기 띠의 해와 관련이 있느냐? (무관합니다.)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럼 이 일을 바라보는 네 시선과 관점은 올바르냐? (올바르지 않습니다.) 올바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 가정이 네게 주입한 전통 사상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전통 사상이 네 마음을 선점하고 나면 일이 생겼을 때 네가 우선적으로 보이는 반응은 그런 전통 사상 관점으로 그 일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일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요구하는 관점이나 마땅히 가져야 할 사상 관점은 제쳐 둔다. 그럼 결국 네가 그 일을 바라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느냐? 올해는 순탄하지 않다, 재수 없다, 되는 일이 없다고 느낄 것이고, 의기소침하고 소극적인 방식으로 그 일에 대항하고 반발하며, 그 일을 회피하고 거부할 것이다. 그렇다면 네게 이런 정서와 사상 관점이 생기는 원인은 가정이 주입한 그런 전통 사상과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일에서 사람이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이런 일을 판단하는 관점과 입장이다. 올해는 재수 없다, 순탄하지 않다, 되는 일이 없다, 혹은 어떤 금기를 어겼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겼다 등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말고 이런 일을 하나하나 살펴봐야 한다. 먼저 최소한 피조물의 관점으로 이런 일을 바라봐야 한다. 이런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뜻대로 되든 되지 않든, 사람에게 순탄해 보이든 재수 없어 보이든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님이 안배한 것이고 하나님의 주재라고 말해야 한다. 이런 관점과 입장으로 이런 일을 바라보게 되면 유익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첫 번째 유익은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면 어느 정도 순종하는 마음 자세를 갖게 된다. 두 번째 유익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서 공과를 배우고 그에 대한 수확이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유익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서 너는 자신의 부족함과 결핍, 패괴 성품을 인식하게 된다. 네 번째 유익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서 너는 회개하고 돌아서서 과거의 사상 관점, 삶의 방식, 하나님에 대한 숱한 오해를 내려놓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순종하며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일지라도, 그것이 너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질과 징계, 징벌일지라도 너는 순종하고자 할 것이다. 남을 원망하지 않고, 전통 사상이 주입한 관점과 입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피조물의 관점으로 모든 일을 바라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네게 너무나도 많은 유익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유익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반대로 네가 만약 가정이 주입한 전통 사상을 바탕으로 이런 일들을 바라본다면 너는 갖은 수를 써서 회피하려 할 것이다. 회피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느냐?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그런 액운을 피하고, 뜻대로 되지 않거나 순탄하지 않거나 재수 없는 그런 일을 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게 다 귀신이 농락하고 있는 겁니다. 빨간 옷을 입으면 피할 수 있어요. 빨간 옷을 입는 것은 불교에서 부적을 붙이는 것과 같죠. 부적이란 게 노란 종이에 붉은색으로 몇 글자 적은 건데 이마에 붙이거나, 옷 안쪽에 꿰매거나, 베개 밑에 놓거나 하면 이런 일들을 피할 수 있어요.” 만약 사람에게 긍정적인 실행의 길이 없다면 정당하지 못한 수단에 도움을 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재수 없는 일이나 액운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두가 순탄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는 패괴된 인류가 세상사를 대하는 일종의 본능적 반응이다. 네가 회피하고 사람의 여러 가지 수단으로 이런 일을 해결하려는 것은 네게 그런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이나 그런 일을 마주할 올바른 사상 관점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세상 사람의 시선으로 그런 일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네가 우선적으로 보이는 반응은 회피하는 것이고 그런 일이 닥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난 어쩜 이리도 순탄하지 않을까? 왜 이렇게 재수 없을까? 왜 매일 책망과 훈계를 받는 걸까? 어째서 하는 일마다 벽에 부딪히고 말썽이 일어나는 걸까? 왜 일할 때마다 드러나는 걸까? 내 주변 사람들은 왜 항상 내 뜻대로 안 움직여 줄까? 주변 사람들은 왜 항상 나만 노리면서 얕잡아 보고 내 뜻을 따라 주지 않는 걸까?’ 흡사 “사람이 재수가 없으면 찬물을 들이켜도 이에 끼인다.”라는 누군가의 말과도 같다. 찬물이 이에 끼일 수 있느냐? 찬물을 씹어 먹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순 엉터리가 아니냐? 이는 남 탓만 하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재수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 재수 없다는 그런 일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없다. 네가 만약 만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다는 것을 참으로 인식한다면 너는 ‘재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고, 회피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닥쳤을 때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은 회피하는 것이고 그다음이 거부하는 것이다. 거부하지 못하고 회피하지도 못하며 피할 수도 없으면 사람은 대항할 것이다. 대항이라는 것은 머리로만 생각하거나 마음속으로만 되뇌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몰래 수작을 부리고 선동적인 말, 변명하는 말, 자기 잇속을 차리는 말, 자화자찬, 자기를 포장하는 말로 자기를 치켜세워서 재수 없는 일에 영향받지 않고 말려들지 않도록 하는 등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대항하는 지경에 이르면 위험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네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대항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내면에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 조금이라도 작동하겠느냐? 사상 관점에서 실행으로 옮기는 상태로 바뀌고, 이성과 양심은 그를 단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사람의 행동,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사실로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속으로만 거부하고 원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이나 실제 행동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실제 행동으로 대항하게 되면 이 사람은 끝장난 게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면 이는 그가 걷고 있는 길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이는 이미 결과가 생긴 것이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사소하고 별것 아닌 전통문화, 전통 사상 혹은 미신의 말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생활 습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어떤 태도로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을 마주해야 하는지에까지 격상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측면의 문제 역시 사람이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큰 명절 때는 물론이고, 중요하지 않은 명절 때도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사상 관점을 지킨다. 일례로 정월 대보름에 위안샤오(元宵, 중국에서 정월 대보름날 먹는 새알심 모양의 명절 음식)를 먹는 것을 들 수 있다. 위안샤오를 왜 먹겠느냐? (거기에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뜻이다. 그럼 너희는 최근에 위안샤오를 먹어 본 적이 있느냐? (집에 있을 때 먹어 봤는데 교회에서는 먹지 못했습니다.) 가족과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좋은 일이냐? (좋은 일이 아닙니다.) 가족 중에 좋은 사람이 있더냐? 돈 달라는 사람 아니면 빚을 독촉하는 사람뿐이다. 네가 유명하고 득이 될 것 같으면 아부를 떨며 너를 이용해 먹지만, 네가 유명하지 않고 이용 가치도 없어 보이면 너를 업신여긴다. 정월 대보름엔 위안샤오를 먹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2월 2일, 3월 3일, 4월 4일, 5월 5일 등 아주 난리도 아니다. 뭐든 안 먹는 날이 없을 정도다. 이방 마귀 세계의 이 모든 일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명절을 지내면서 축하하는 마음으로 좋은 음식을 먹고 싶다면 먹으면 그만이다. 경제적 여건만 된다면 무엇을 먹든 상관없다. 다만 시답잖은 수작은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녠가오를 먹는 것은 해마다 성공 운이 오르기를 바라서이고, 생선을 먹는 것은 해마다 넉넉하게 보내기 위함이며, 위안샤오를 먹는 것은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기 위해서라는 등의 수작 말이다. 중국인은 또 쭝쯔(粽子, 중국 단오절의 전통 음식)를 만들기도 하는데, 쭝쯔는 왜 먹겠느냐? 해마다 각종 명절을 지낼 때면 교회의 일부 사려 깊은 사람들이 때에 맞춰 명절 음식을 사오는데, 그중 하나가 쭝쯔다. 쭝쯔를 왜 먹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음력 5월 5일이 되었으니 단오절을 쇠려고요.” 쭝쯔가 맛있긴 하지만 왜 굳이 이 명절을 지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 명절이 사람의 삶이나 운세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관해서는 연구나 조사를 해 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만, 듣기론 어떤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기념하는데 그걸 왜 모두가 먹는단 말이냐? 그에게 주어야 할 것이다. 그를 기념하고 싶다면 쭝쯔를 산 사람한테 줄 게 아니라 그의 무덤이나 영정 앞에 놓아두어야 할 것이다. 이는 산 사람과는 무관한 일이다. 그런데 산 사람이 대신 먹는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나는 이런 명절과 명절 음식에 대해서는 이방인을 통해 전해 듣다 보니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른다. 몇몇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교회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단오절엔 쭝쯔를 먹고 설을 쇨 땐 녠가오를 먹는다는 것 말이다. 서양인은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구워 먹는다. 왜 칠면조를 먹겠느냐? 뉴스를 보니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먹는 것은 감사의 의미가 있고, 이는 하나의 전통이라고 한다. 서양에는 명절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성탄절이다. 성탄절이 되면 트리를 꾸미고 다들 새 옷을 입는다. 이것 역시 하나의 전통이다. 또 서양인들은 이 명절에 듣기 좋은 말, 부드러운 말, 축복하는 말을 해야지 저속한 말, 험악한 말을 해선 안 된다. 이런 것은 동양인의 덕담과 같은 것으로, 금기를 깨면 한 해가 순탄하지 않으니 어기지 말라고 한다. 서양인의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은 특별히 좋은 것을 먹는 날이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음식을 먹을 때는 이야기를 하나 지어낸다. 결국, 정리하자면 사람은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명분이라고 내세울 만한 구실을 찾은 다음 당당하게 집에서 며칠 쉬면서 실컷 먹고 마시며 살을 찌우는 것이다. 그러다 헌혈을 하면 “피에 기름기가 너무 많아서 헌혈하기에 적합하지 않네요.”라는 말을 듣는다. 피에 기름기가 많은 것은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것이다. 좋은 것을 먹고 마시기 위해 전통 명절을 지내는 것은 노인에서 젊은이까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전통이 되었다. 이런 전통의 이면에 주입된 사상 관점 그리고 미신과 관련된 말들은 노인에게서 다음 세대로 전해 내려간다.

미신에 해당하는 말에는 또 무엇이 있느냐? 방금 얘기한 눈꺼풀 떨림은 자주 나타나는 증상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네가 “저는 자주 눈꺼풀이 떨려요.”라고 하면 사람들은 묻는다. “어느 쪽이 떨리는데요?” 왼쪽이라고 하면 “괜찮아요. 왼쪽 눈이 떨리면 재물이 들어오고 오른쪽 눈이 떨리면 재난이 닥친다잖아요.”라고 말한다. 이 일이 이루어졌느냐? 왼눈이 떨리면 정말 재물이 들어오더냐? 돈이 생기더냐? (아닙니다.) 그럼 오른눈이 떨릴 때는 화를 당했느냐? (그 역시 아닙니다.) 이런 경우는 없었느냐? 왼눈이 떨렸는데 화를 당해 나쁜 일이 생긴다거나 오른눈이 떨렸는데 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 말이다. 너희는 이런 일을 믿느냐? (믿지 않습니다.) 어째서 믿지 않느냐? 눈꺼풀이 왜 떨리느냐? 눈꺼풀 떨림 증상을 해결하는 민간요법은 없느냐? 방법이 없느냐? (흰 종이를 찢어서 눈꺼풀에 붙이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흰 종이를 붙인다. 어느 쪽이든 눈꺼풀이 떨릴 때 달력이나 책에서 흰 종이를 한 장 찢어 눈꺼풀에 가져다 붙이는 것이다. 단, 다른 색은 안 된다. 여기에서 흰 종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떨려 봤자 소용없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게 말이다. 이 방법이 어떠냐? 정말 기가 막힌 방법이 아니냐? 이렇게 하면 괜찮아지겠느냐? (종이를 붙이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왼쪽 눈이 떨리면 재물이 들어오고 오른쪽 눈이 떨리면 재난이 닥친다.”라고 하지만, 길하든 흉하든 눈꺼풀이 떨리는 증상에 대해서는 속설이 있지 않더냐? 다음과 같은 경우가 있지 않겠느냐? 너는 오른눈이 떨리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떨림이 멈추고는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사나흘 후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이다. 일을 수습하고 나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다. ‘거봐, 눈 떨림에 관한 말이 맞아. 왜냐고? 며칠 전에 오른눈이 정말 떨렸거든. 그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지. 이 일이 지나가고 나니 이젠 안 떨리잖아.’ 이런 경우가 있지 않겠느냐? 너는 밝히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한다. 그 일을 부정하지도 못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 화제를 피할 수 없으니 말해 보라고 해도 똑바로 말하지 못한다. 속으로는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그건 미신이니 믿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죠.”라고 말한다. 너는 믿지 않지만 그 일이 들어맞았고, 이렇게나 신통하다.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여기에 관한 진리와 본질을 깨닫지 못하면 똑바로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또 입으로는 미신이라며 부정하겠지만, 마음속으로는 두려워할 것이다. 그것이 정말로 들어맞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사고가 나기 전에 그 사람 아내의 오른눈이 무척 심하게 떨렸다. 밤낮으로 계속 떨렸는데 남들이 그녀의 떨리는 눈꺼풀을 알아볼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남편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상을 치르고 나서 그녀는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 그때 손으로 눌러도 소용없을 정도로 눈이 떨렸었지. 이렇게 들어맞을 줄이야.’ 그리고 그녀는 믿게 된다. ‘아, 눈꺼풀이 떨리면 정말 일이 생기긴 생기는구나. 좋은 일일 수도, 나쁜 일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일은 일어난다는 거지. 이건 예측이자 예감이야.’ 이런 일이 있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전 안 믿어요. 그건 미신이거든요.” 하지만 그것은 이토록 공교롭고 정말 신통하게 일어난다. 항간에 들리는 이런 일들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미신이라는 것은 전통과는 달리 사람의 삶 속에 어느 정도 존재하며, 사람의 생활 환경과 삶 속에서 생기는 일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통제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럼 그건 미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예지가 아닐까요? 미신이 아니라면 올바르게 대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탄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 하나님께서 일깨워 주신 것일 테니 정죄해선 안 되겠네요.” 이것을 어떻게 보는 것이 올바르겠느냐? 여기에서 네 통찰력과 진리에 대한 이해도가 검증될 것이다. 네가 만약 천편일률적으로 대하면서 ‘이건 다 미신이야.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지. 난 안 믿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관점이 옳겠느냐? 예를 들어, 이방인이 이사를 하려는데 달력에 ‘손 있는 날’이라고 적혀 있으면 그 금기를 지켜 이사를 가지 않는다. ‘손 없는 날’이나 ‘만사가 좋은 날’이라고 적혀 있어야 이사를 가는 것이다. 그래야 이사하고도 무탈하고, 앞으로의 운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런 경우가 있지 않으냐? 어떤 사람이 ‘손 있는 날’을 보고 믿지 않은 채 원래 계획대로 이사를 했는데 그 결과 일이 생기고 집안일도 잘 풀리지 않으며 운도 안 좋아졌다고 해 보자. 가족이 죽거나 병에 걸리고, 농사나 직장 일, 장사, 자녀 교육마저 되는 일이 없었다고 말이다. 영문을 몰라 역술가를 찾아간 그는 이런 말을 듣는다. “최근에 아주 큰 금기를 어겼군요. 이사하신 날이 손 있는 날이었어요. 그게 태세(太歲) 신을 거스른 겁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겠느냐? 밝히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손 있는 날에 이사했는데 그 후로 집에 문제가 끊이질 않더라고요. 날이 갈수록 재수가 없었어요. 바람 잘 날이 없었죠.”라는 이방인의 말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하면서 겁을 먹고 말 것이다. ‘이런, 금기를 안 지키면 나도 저렇게 되는 거 아냐?’ 그리고 생각한다. ‘난 하나님을 믿으니까 두렵지 않아!’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들어 그 금기를 어길 엄두가 나질 않는다.

미신에 관한 이런 말을 어떻게 바라봐야겠느냐? 우선 눈꺼풀이 떨리는 일에 대해 말해 보자. 눈 떨림이 어떤 것인지는 다들 알고 있지 않느냐?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고로, 좋은 일일 수도 있고 나쁜 일일 수도 있다. 이것이 눈 떨림에 대한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이해이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미신이겠느냐? 이것부터 대답해 보아라. (미신입니다.) 미신이다. 이어서 묻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 말을 믿어야겠느냐? (믿지 말아야 합니다.) 어째서 믿지 말아야 하느냐? (사람의 화복은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지배하십니다. 눈 떨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든 그것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이니 순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네 눈꺼풀이 심하게 떨렸다고 해 보자. 온종일 떨렸는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서도 계속 떨리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문제가 생겨 책망을 받았다. 그런데 책망을 받고 나니 눈꺼풀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러면 너는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눈꺼풀이 떨린 게 책망받은 거랑 맞아떨어졌네.’ 이것이 공교롭게 들어맞은 것이냐? 미신이냐? 이렇듯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이런 일이 일어날 때도 있다. 이는 어떻게 된 것이냐? (하나님, 눈꺼풀이 떨리는 것은 아마도 인체의 정상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니 책망과 훈계를 눈꺼풀이 떨리는 것과 결부시킬 수는 없습니다.) 눈 떨림은 이렇게 인식해야 한다. 사람이 어느 쪽 눈꺼풀이 떨리면 길하고 어느 쪽 눈이 떨리면 흉하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만든 그 육에는 수많은 비밀이 있다. 얼마나 심오한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있는지, 사람의 육적인 본능과 능력, 그리고 잠재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사람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또 육체가 영계를 느낄 수 있는지, 사람의 육에 정말로 흔히들 말하는 육감이라는 것이 있는지 역시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럼 이 알지 못하는 일들을 사람이 이해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치 않다. 사람의 육에 과연 어떤 비밀이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없다. 이해할 필요는 없어도 상식은 있어야 한다. 사람의 육은 단순하지 않고,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것이나 물건과는 완전히 다르다. 테이블과 의자, 컴퓨터를 예로 들자면, 그것들은 사람의 육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갖는다. 생명이 없는 그 죽은 것들은 영계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반면 사람의 육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하나님이 만든 것이다. 주변 환경이나 분위기, 혹은 특수한 사물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지는지, 주변 환경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육은 다 지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것들은 전부 비밀에 속한다. 육은 춥고, 덥고, 향기롭고, 역겹고, 달고, 시고, 매운 것을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이 자기 주관으로는 의식할 수 없는 비밀도 가지고 있다. 이는 사람 자신도 모르는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람의 눈 떨림이 신경에 관계된 것인지, 아니면 육감에 관계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영계의 어떤 일과 관련된 것인지에 대해 연구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이런 일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하는 목적이나 의미에 대해서도 우리는 연구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민간에든 가정에든 모두 눈 떨림에 대한 속설이 있다. 그 속설이 미신이든 아니든, 결국 그것은 생활 환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인체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신호이다. 그렇다면 이 현상은 미신에 속하겠느냐, 전통에 속하겠느냐, 아니면 과학에 속하겠느냐? 그 일은 연구할 방법이 없다. 이는 심오한 일이다. 어쨌든 인간은 상고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수천 년 동안 실생활 속에서 사람의 눈 떨림은 신변에서 곧 일어날 일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 관련성이 과연 재물과 운에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어떤 일에 관련된 것인지는 연구할 방법이 없다. 이 역시 비밀이다. 왜 비밀이라고 하겠느냐? 많은 일이 물질세계 이외의 영계와 연관되어 있으며, 네게 알려 준다고 해도 너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사람이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비밀이지만 몸이 경고하고 예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가장 간단한 방법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네 재물이나 운과 관련된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오른쪽 눈꺼풀이 떨린다고 나쁜 일이 일어날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더욱이 왼쪽 눈꺼풀이 떨리니 돈을 벌게 될 거라고 기뻐할 필요도 없다. 즉, 그것에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네게 미래를 보는 예지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배하고 주재한다. 좋은 일이 일어나든, 아니면 나쁜 일이 일어나든 모두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니 네가 지녀야 할 유일한 태도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측하지 말고 무의미한 희생도, 무의미한 대비도 하지 말며, 무의미한 발악은 더더욱 하지 마라. 일어날 일이라면 반드시 일어난다. 그것이 모두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하나님이 결심한 일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눈에 흰 종이를 붙이든, 눈을 손으로 힘껏 누르든, 어떤 과학적 근거나 미신을 찾아보든 다 부질없는 짓이다. 올 일은 결국 오게 되어 있고,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다. 네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을 피하고자 시도하는 모든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며 무의미한 희생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 네 그런 행동은 그저 네가 패역하고 강퍅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가 없음을 보여 줄 뿐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러니 눈이 떨리는 것이 미신이든, 아니면 과학이든 너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왼눈이 떨린다고 기뻐하지도, 오른눈이 떨린다고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걱정하거나 거부하거나 대항하지도 않는 것이다. 설령 눈이 떨리고 나서 정말 일이 생기더라도 의연하게 마주해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니 무서워할 필요도, 염려할 필요도 없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해라.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시험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이 인도하고 보호해 주길 바라라. 그 후에 주어지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버리거나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라. 네게 아무리 큰 재난이 찾아와도, 아무리 큰 불행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해라. 그러면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일을 대할 때는 다음과 같은 생각과 관점을 가져야 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갖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겠어. 왼눈이 떨리든 오른눈이 떨리든 두 눈이 동시에 떨리든 난 두렵지 않아.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고 믿어. 어쩌면 이건 내게 곧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알려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일지도 몰라. 또 육이 본능적으로 보이는 반응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어쨌든 난 하나님께 순종할 준비가 돼 있어. 이 일로 내가 받을 피해나 손실이 얼마나 되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기꺼이 순종하겠어.’ 이것이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이다. 사람이 이런 태도를 갖게 되면 가정에서 교육받은, 눈 떨림에 대한 속설이 미신인지 과학인지 개의치 않게 된다. ‘그게 미신이든 과학이든 상관없어. 남들이야 생각하고 싶을 대로 생각하라지. 아무리 눈에 종이를 갖다 붙이라고 해도 난 안 붙일 거야. 너무 심하게 떨리면 그때 가서 잠깐 붙여도 돼.’라고 말이다. 누군가 네게 “눈이 그렇게 떨리는데 당분간 조심하셔야겠어요!”라고 말한다고 해 보자.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결국 일어날 일은 피할 수 없습니다.) 복이든 화든 피할 수 없다. 복이어도 받아들이고 화여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욥과 같은 태도이다. 만약 복이라서 받아들인다면 왼눈이 떨릴 때는 기뻐하고, 오른눈이 떨릴 때는 화를 낼 것이다. ‘왜 자꾸 떨리고 난리야? 끝날 기미도 없이 떨리네! 저주 기도를 해야겠어. 오른쪽 눈이 안 떨리고 액운이 멀리 떠나게 해 달라고 말이야.’ 이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허락 없이 액운과 악마가 감히 너를 찾아올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물질세계와 영계 모두 하나님이 주관하며, 모두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다. 귀신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든 하나님의 허락 없이 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너를 건드리거나 해치고 싶다고 한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엄두도 낼 수 없다. 하나님이 “그의 주변에 환경을 만들어 뜻대로 풀리지 않게 하고 문제가 생기게 하여라.”라고 허락하면 귀신은 기뻐하며 네게 수작을 부릴 것이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것을 이겨 낸다면, 또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배반하지 않고 굳게 서서 증거하여 그것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한다면, 귀신은 하나님 앞에서 너를 고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너를 통해 영광을 얻고 그 귀신을 가둘 것이니 다시는 그것이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고, 너는 안전해질 것이다. 이것이 네가 가져야 할 진실한 믿음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재수 없는 일이나 나쁜 일도 네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축복만 내리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여러 환경을 배치해 네게 시련을 주고 너를 단련시켜 공과를 배우게 하고, 또 여러 환경을 배치해 너를 형벌하고 심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이 네 관념은 물론 네 상상에 부합하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라고 했던 욥의 말을 잊지 마라.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네 진실한 믿음의 원천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단순한 눈 떨림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방금 우리는 눈꺼풀 떨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교제했다. 눈꺼풀 떨림은 일상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으로, 사람은 그것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멈추려 하지만 늘 기대했던 효과를 보지는 못한다.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아무도 이를 피해 갈 수 없다. 좋은 일, 나쁜 일을 떠나 사람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이는 사람의 운명이든, 일상 속의 사소한 일이든 모두 하나님이 지배하고 주관하기에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한층 더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니 현명한 사람이라면 인위적인 방식으로 무의미한 희생이나 발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올바르고 긍정적인 태도로 대하고, 진리 원칙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라보고 풀어 나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쪽은 결국 사람 자신이다. 왜냐하면 창조주가 주재하는 이 일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으며, 그것이 네가 선택하고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서 공과를 배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 하나님의 행사를 인식하는 법,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법, 피조물이 택하고 걸어야 할 길, 사람이 걸어야 할 인생길을 제대로 걷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지 미신이나 인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대항하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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