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5) 제 1 부

너희는 최근에 교제한 주제를 예배 시간에 교제해 보았느냐? (하나님, 그 주제들을 예배 시간에 교제해 보았습니다.) 교제하고 나니 어떠냐? 새로 알게 되었거나 인식하게 된 것이 있었느냐? 우리가 교제한 이런 주제가 사람의 일상생활에 존재하더냐? (모두 있었습니다. 최근 하나님의 교제를 몇 차례 듣고 나서 부모의 교육과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정의 교육이 우리를 심각하게 패괴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는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와 같은 사상을 조금씩 주입했고, 이런 사상이 주입된 저는 사람은 출세해서 큰 사람이 되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야만 남에게 멸시당하거나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예전에는 부모가 가르치는 이런 사상이 다 저희를 위한 것이고 저희를 보호해 주는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제와 해부를 몇 차례 듣고 나서야 이런 사상이 부정적인 사물이고 사람을 패괴시키는 사탄의 수단이란 걸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사탄에게 갈수록 심하게 패괴되어 구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주제를 교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최근 몇 차례 교제를 통해 가정이 사람에게 주입한 이런 사상 관점을 한층 깊이 있고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렇게 교제를 하고 나면 사람은 가정, 부모와의 관계가 소원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래부터 부모님의 은혜는 알았지만,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서 부모님이 날 낳으시고 키우신 것은 부모의 사명이고,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주입한 사상이 저를 패괴시켰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인식하고 나니 부모에 대한 정에 그리 치우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먼저 사람이 사상적으로 부모의 책임, 키워 준 은혜를 올바로 인식하고 정이나 혈기, 육적인 혈연관계를 떠나 올바른 관점과 입장에 서서 가정과 부모를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되면, 사람은 이런 측면의 문제를 대하는 데 큰 전환을 이룰 수 있다. 이런 전환으로 인해 사람은 생명 진입 측면과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측면에서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주제를 교제하는 것이 사람에게 유익하고 필요하다. 이런 것은 모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자 사람에게 결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교제했던 사람에 대한 가정의 교육이라는 주제는 기본적으로 처신의 목표와 원칙, 처세의 방식과 수단 그리고 인생관과 생존관, 생존의 방식과 법칙 등에 관련되는 것이었다. 이런 주제는 모두 사람의 사상 측면에 대한 교육과 관련되며 사람의 사상 관점과 관련되는 주제이다. 가정과 부모가 사람에게 주입하는 여러 사상 관점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사물이 하나도 없으며, 진정으로 한 사람이 바른길을 가고, 올바른 인생관을 수립하며,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의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부모와 가정이 가르치는 것들은 모두 너를 세상과 사악한 시류로 이끌 뿐이다. 그들이 이런 사상 관점으로 너를 교육하는 목적은 네가 사회와 사악한 시류에 좀 더 잘 녹아들고, 나아가 사악한 시류와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에 좀 더 잘 적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이런 것들이 네게는 너를 지켜 주는 방법과 수단이자 네가 사회나 집단 속에서 좀 더 나은 지위나 명성, 물질적 누림 등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수단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가정이 네게 주입한 이런 사상은 계속해서 너를 사악한 시류 속으로 이끌고, 세상과 사회, 사악한 시류 속에 뿌리박아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 네게 가져다주는 것은 끊임없는 번뇌와 곤경일 것이다. 이로 인해 너는 이 인간 세상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어떻게 진정한 사람, 광명 속에서 사는 사람, 정직하고 선하며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너에 대한 가정의 교육은 네가 이 세상에서 자존감과 인격을 좀 더 갖추고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잡다한 분쟁과 다툼,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 살아가면서 갖은 세상사에 얽매이고 결박되고 심지어 시달리게 한다. 네가 고개를 돌려 부모에게 이 모든 것을 하소연하면 그들은 사람들 속에서 좀 더 원만하고 교활하며 노련하게 속내를 숨기고 살 수 있는 요령을 알려 줄 것이다. 네게 올바른 길을 가리키면서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곳에서 벗어나 창조주 앞에 나오고 창조주의 안배에 순종하라고, 사람의 운명과 모든 것이 창조주의 손에 달려 있음을 똑바로 알라고, 사람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에 순종해야 한다고 알려 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가정이 교육하는 여러 사상이 사람에게 초래하는 삶의 실태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정이 네게 교육한 사상이 명예나 이익을 중시하는 것이든, 아니면 사람과의 다툼이나 친분을 중시하는 것이든, 주안점을 어디에 두든 상관없이 결국 그것은 네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수단, 법칙이 갈수록 노련하고 악랄해지며 간사하고 음흉해지게 할 뿐이다. 갈수록 정직하고 선하며 올곧고 창조주의 안배에 순종하는 법을 알아 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가정의 교육은 네가 하나님과 진리, 긍정적인 사물에서 멀어지게 할 뿐 사람이 지녀야 할 올바른 모습으로 사는 법, 존엄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하게 한다. 게다가 가정이 네게 교육한 사상으로 인해 너는 점점 무감각하고 우둔해질 것이다. 속된 말로 낯짝이 두꺼워지는 것이다. 처음엔 동료, 동창, 친구에게 거짓말하면 얼굴이 상기되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느낌도 사라져 얼굴이 상기되거나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것이고, 더욱이 양심은 아무런 가책도 받지 않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모 형제, 절친한 친구 등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 속일 것이다. 그들에게서 이익을 도모해 좀 더 나은 삶, 좀 더 체면이 서는 삶을 살면서 더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감각이다. 처음에는 죄책감이 아주 조금은 있었고 양심에 떨림도 약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감각은 사라지게 된다. 너는 더 그럴싸한 이유로 자신을 위로하며 말할 것이다. ‘사람이 다 그렇지 뭐. 세상을 살면서 마음이 여려선 안 돼. 남한테 마음이 약하다는 건 자기에게 모질다는 거야. 이 세상은 약육강식,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세계야. 성공만 하면 어떻게 성공했는지 추궁하는 사람이 없어. 반면 실패하면 아무것도 없는 거지.’ 결국, 사람은 이런 사상 관점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이를 자신이 모든 것을 추구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물론 하나의 수단으로 삼는다. 너희는 지금 어느 수준에 있느냐? 무감각의 수준이냐, 아니면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이냐? 만약 너더러 장사하라고 한다면 그 장사는 네 미래와 삶의 질, 사회에서의 위신에까지 연관될 것이다. 만약 네 수완이 충분히 뛰어나서 누구든 속일 수 있다면 너는 상류층의 삶을 살면서 큰돈을 만지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생활할 것이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아무런 지각도 없을 정도로 무감각하게 살면서 누구든 속이며 누구의 돈이든 취하지 않겠느냐? (그럴 것입니다.) 그럴 것이다. 이런 사람은 변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인성 깊은 곳의 패괴 성품이다. 인성이 사라지면 사람은 패괴 성품과 사탄이 주입한 여러 사상 관점에 기대어 살게 된다. 양심과 이성, 염치를 잃어버리면 사람은 그저 껍데기, 몸뚱어리로만 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의 삶은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지금 네가 만약 염치가 있다면, 네가 만약 거짓말로 남을 속이거나 음해할 때 아무나 음해하지 않고 대상을 가린다면 그나마 너는 양심이나 인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다. 만약 네가 아무나 속이고 음해한다면 너는 틀림없이 살아 있는 사탄이다. 네가 만약 “부모나 지인, 친구, 성실한 사람을 음해하면 안 됩니다. 특히 하나님 집의 형제자매를 음해하거나 하나님의 제물을 사취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너는 도덕적 최저선은 있으니 조금은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양심이나 최저선마저 없다면 너는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너희는 어느 수준에 있느냐? 너희에게 최저선이 있느냐? 기회가 된다면 혹은 실제로 그럴 필요가 있다면 너희는 부모 형제, 절친한 친구도 속이겠느냐? 형제자매를 속이고 음해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제물까지 사취하겠느냐? 만약 그럴 기회가 생겼고 네가 속여도 아무도 모른다면 너는 그렇게 하겠느냐?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이 두렵고, 하나님께 조금이나마 경외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하면 양심에 찔릴 것입니다.) 마음속에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고, 이에 더해 양심에 찔린다는 것이 네 태도이다. 다른 사람도 말해 보아라. 너희는 아무 태도도 가지고 있지 않느냐? 만일 아무런 태도도 없고 이런 일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아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도 무덤덤하다면 너는 위험한 상태이다. 누군가 이런 짓을 하는데도 네게 증오하는 마음이 들지 않고 아무런 태도도 없이 무감각하다면 너는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짓을 저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네 태도가 확실하고 이런 부류의 사람을 증오하고 질책한다면 네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의 태도는 어떠냐? (하나님께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제물은 거룩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절대 손을 대거나 횡령해서는 안 됩니다.) 제물을 횡령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징벌을 받을까 두려워서이다. 그럼 다른 일은 어떻겠느냐? 네가 만일 다단계 판매를 한다면 네 돈벌이에 절친한 친구를 이용하겠느냐? 감언이설로 그들을 속여 가입시킨 다음 이익을 취하고 돈을 벌겠느냐? 가장 절친한 친구, 친척, 심지어는 부모나 형제자매에게 이렇게 하겠느냐? 선뜻 말하지 못한다면 네가 하나님의 제물을 횡령하지 않겠다고 한 말도 꼭 지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또 누가 말해 보아라. (이 문제에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제물은 절대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하는 것은 비인성적이니 최소한 양심에 찔리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비인성적인 것이며 양심상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너희의 태도이다. 또 없느냐?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세상에서 양심이 있고 도덕적 최저선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가족을 음해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물며 지금 하나님을 믿어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았는데도 형제자매나 친구를 음해하거나 하나님의 제물을 편취한다면 이런 자는 이방인보다도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람이 생각으로 드러나는 때가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 본질을 생각하면, 주변에 보는 사람이 없거나 그런 일을 할 때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감찰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은 감히 그런 일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조금이나마 경외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인성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 설사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양심과 인성이 있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이다. 속이고 음해하며 훔치는 것 자체가 선한 사람이나 정상인이 할 일은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처신할 때 최저선이란 게 있는데, 하물며 네가 하나님을 믿으며 그렇게나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그런 짓을 한다면 이는 구제 불능이다. 이런 자는 인성이 없는 사람이자 마귀이다. 많은 설교를 듣고도 음해하고 속이며 훔치는 등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면 이는 불신파이다. 무엇을 불신파라 하느냐? 하나님의 감찰, 하나님은 공의롭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감찰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감찰하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데요? 왜 제 눈엔 안 보이죠? 왜 저는 못 느끼는 걸까요?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속이고 기만하며 온갖 나쁜 짓은 다 했는데 왜 아무런 징벌도 안 받은 거죠? 전 여전히 남보다 윤택한 삶을 살고 있는데 말이죠.” 이것이 불신파가 보이는 모습의 한 측면이다. 다른 한 측면은 많은 진리를 교제해도 그가 한 마디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 무엇을 받아들이느냐? 그에게 유리한 사상 관점을 받아들인다. 그에게 유리하고 그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일이라면 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감찰과 보응은 믿지 않고 눈앞의 이익만을 믿는다. 이것이 불신파이다. 불신파가 무엇을 더 믿겠느냐? 불신파가 하나님 집에서 보이는 유일한 모습은 오직 악행뿐이다. 이런 부류 사람의 말로가 어떨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다시 우리가 교제하려던 주제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가정이 사람에게 교육하고 주입하는 여러 사상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에게 긍정적인 사상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정적인 사상, 부정적인 처신의 수단과 원칙, 방식을 주입하여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나아가게 한다. 결론적으로 가정이 사람에게 주입하는 여러 사상은 사람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인성과 이성, 양심이라는 기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만약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으로, 아직 사탄에게 패괴되거나 잠식당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외의 나머지 처신의 여러 수단과 방식은 모두 가정 나아가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가정이 교육한 그 모든 사상 관점은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것에 배치된다. 그것은 네가 진리를 깨닫게 하지도 않을 것이고, 너를 구원받는 길로 이끌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사람을 멸망의 길로 이끌 뿐이다. 그러니 사람이 하나님 집에 오고 나면 나이가 얼마든, 어떤 교육을 받았든, 가정 형편이 어떻든, 자기 신분이 얼마나 존귀하다고 생각하든 모두가 처신하는 법, 남과 함께 지내는 법, 여러 일을 처리하는 법, 여러 사물이나 여러 부류의 사람을 대하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 배움의 과정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긍정적이고 진리에 부합하는 사상 관점 그리고 여러 사물의 실행 원칙과 처리 원칙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이는 오직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말한 것이니 만약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네가 원래 가지고 있던 사상 관점은 예전 그대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긍정적이고 올바른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네 처세의 원칙과 수단, 방식은 여전히 낡고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람, 정상적인 사람, 이성과 양심을 갖춘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배움은 긍정적인 사상 관점, 진리,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는 하나님을 믿은 지 이제 10년, 혹은 20년, 30년이 되었지만,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그 어떤 사상 관점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이는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진심이 아니며 무엇이 진리인지 모르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말해 준다. 네가 만약 “저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바로 그날부터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이 가르쳐 준 사람에 대한 여러 가지 요구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사상 관점, 여러 원칙과 가르침을 정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너는 하나님을 믿은 그날부터 진정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고, 진정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구원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때가 곧 구원의 길로 나아간 때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너희는 시작했느냐? 이미 시작했느냐, 아니면 시작하지 않았느냐? 아니면 진작에 시작한 것이냐? (하나님께서 최근 몇 년간 교제해 주신 가정의 교육 등 사람 내면에 존재하는 잘못된 사상 관점에 대한 해부를 통해 비로소 저는 반성하기 시작했고, 제가 가지고 있던 사탄 철학을 조금씩 부인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에 닿도록 노력할 수 있을지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이 정도로 깊이 반성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매우 현실적이구나. 최근 몇 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시작했고, 확실히 어느 해, 어느 날에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최근 몇 년 사이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비교적 객관적이다. 다른 사람은 어떠냐? (예전에는 가정이 교육하는 이런 사상 관점을 바꾸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고민해 보지 않았습니다. 최근 이런 측면으로 하나님께서 교제해 주신 것을 듣고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측면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는 못했습니다.) 의식적으로는 알게 되었구나. 만약 일상생활에서 좀 더 깊이 있게 구하며 진입하고 구체적인 일에서 진지하고 꼼꼼하게 구하면서 더욱 정확하게 진입한다면 너는 변화할 희망이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낡은 사상 관점을 벗어 버리고 올바른 입장과 관점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희망이 있다면, 너는 결국 구원에 이를 것이다. 멀리 보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고, 당장 좀 더 현실적으로 보면 네 본분 이행이 쓸모 있다는 것이다. 특히 리더 일꾼이 쓸모 있는지는 스스로가 각 진리에 공을 들이는지, 긍정적인 사물과 원칙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에 공을 들이고 대가를 치르려고 하는지에 달려 있다. 네가 만약 의식적으로만 바꾸려 하고 평소에 진리에 공을 들이지도 않고 진리를 진지하게 대하지도 않으며 긍정적인 사물에 갈급한 마음이 없으면, 이런 의식은 금방 사라져 없어질 것이다. 내가 교제한 각 주제에서 관련된 사상 관점은 사람의 현실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것은 논조나 구호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일을 대하는 네 사상 관점이 무엇인지에 관련되는 것이다. 너는 네 사상 관점에 주안점을 두고 일할 것이다. 네가 가지고 있는 사상 관점이 긍정적이면 네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원칙은 긍정적인 것에 무게를 둘 것이고, 일을 처리한 결과도 상대적으로 선하여 하나님 뜻에 부합할 것이다. 만약 네 사상 관점이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과 적대되거나 어긋난다면 네가 일을 처리하는 근원이 부정적인 것이고, 일을 처리하고 난 최종 결과도 분명 선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이런 일을 처리할 때 대가를 얼마나 치르고, 마음을 얼마나 썼든, 어떤 마음을 품고 그 일을 했든 결과를 놓고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이 그 일의 성질을 어떻게 규정하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그 일의 성질을 방해, 교란, 파괴로 규정하여 하나님 집에 손실을 초래했다고 한다면 네가 한 짓은 악행이다. 악행은 가벼우면 형벌 심판이나 질책, 책망, 훈계를 받고, 심각하면 징벌을 받게 된다. 만약 그 일을 진리 원칙에 따라 처리하지 않고 이방의 잘못된 사상 관점에 치우쳐 이런 그릇된 사상 관점을 근거로 일한다면 너는 헛수고를 한 것이다. 비록 네가 많은 대가를 치르고 엄청 마음을 쏟았는데도 최종 결과가 헛수고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 일의 성질을 어떻게 규정하겠느냐? 또 그 일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적어도 네가 한 그 일이 선행이나 하나님을 증거하고 영화롭게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치른 대가와 쏟은 마음은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즉, 헛고생인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기 전에 잘 생각해 보고, 많은 사람과 교제하여 원칙을 구하고 이해하고 나서 임해야 한다. 홧김에, 충동적으로 혹은 사리사욕과 욕망을 품고 임하면 안 된다. 최종 결과가 어떻든 네가 책임져야 하며, 어떤 결과이든 하나님이 결론을 내릴 것이다. 네가 만약 자기가 한 일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에게 기억되길 바라고, 더 좋게는 선행이 되어 하나님에게 열납되길 바란다면 더더욱 원칙을 구하여라. 만약 네가 이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면, 선행이든 아니든, 하나님이 열납하든 안 하든 상관없다고 한다면, 심지어 징벌받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고 ‘상관없어. 어차피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느껴지지도 않잖아.’라는 사상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너는 일할 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이 대담하고 방종하며 제멋대로 굴면서 아무런 염려나 거리낌이 없게 된다. 네가 하나님에게 경외심을 갖지 않으면 일할 때의 방향이 편중될 것이다. 사람의 본성을 따르고 사람의 본능을 따르게 되면 최종 결과는 네가 한 그 일이 하나님에게 열납되지 않고 기억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방해와 교란을 야기할 것이니 악행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 결국 네 결말이 어떨지,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고 처리할 것인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일을 하고, 매사를 처리할 때마다 너는 우선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 일의 최종 결과가 어떨지 충분히 생각해 본 후에 임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에 관련되는 문제겠느냐? 네가 모든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하는지, 어떤 원칙으로 일하는지에 관련되는 것이다. 가장 좋은 태도는 원칙을 자주 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느낌이나 취향, 속셈, 욕망 혹은 눈앞의 이익으로 판단하지 말고 원칙을 구해야 한다. 그 일을 자주 하나님 앞에 가져와 구하며 기도하고, 형제자매에게도 가져가서 함께 협력하며 본분을 이행하는 형제자매와 교제하고 구하여 원칙을 정확히 한 다음 임해야 한다. 충동적으로 하거나 얼떨결에 하지 마라. 너는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믿느냐? 밥벌이를 위해서도,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도, 유행을 좇기 위해서도, 정신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도 아니다. 너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믿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 모든 일을 할 때 구원받는 것, 하나님의 요구, 진리와 연관시켜 봐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에 대한 가정의 교육 내려놓기’라는 주제로 예전에 우리가 교제한 것은 처신의 규칙, 처신의 여러 사상 관점과 관련된 내용으로, 사상적인 측면에서 가정이 사람에게 교육하는 것이었다. 가정은 사람의 사상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지도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 외에 더 많은 측면에서도 교육한다. 즉, 사람에 대한 가정의 교육은 사람의 사상적 측면의 교육에 그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앞서 다루었던 것 외에도 전통, 미신, 종교라는 측면과 관련된 교육이 있는데, 이것도 이어서 교제할 내용이다. 이런 것은 생활 방식, 생활 규칙 그리고 생활 습관, 생활의 자잘한 문제와 연관된다. 사람의 생활 측면에 대한 가정의 교육 중에 먼저 전통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전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예를 들면, 생활의 자잘한 부분에서 한 가정이 가지고 있는 관행, 견해, 금기 등은 전통과 관련되는 것들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전통은 미신과 약간 관련이 있으니 이 둘을 함께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전통 중에는 미신인 것이 있고, 미신 중에는 개별 가정이나 개별 집단의 일부 생활 습관, 생활 방식 등 그다지 전통적이지 않은 것이 있다. 우선 전통과 미신에는 어떤 내용들이 있는지 살펴보겠다. 전통과 미신을 얘기하면 너희가 알고 있는 내용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의 생활에서 전통, 미신과 관련된 내용이 무척 많기 때문이다. 말해 보아라. (점, 손금 보기, 운세 뽑기가 있습니다.) 운세 뽑기, 점, 점괘, 손금 보기, 관상 보기 그리고 사주팔자, 쌀 점 등은 미신이라고 하지 않는다. 모두 미신 행위에 속한다. 미신이란 미신 행위 중 구체적인 속설을 뜻한다. 예를 들어 외출할 때 달력을 보는 것, 오늘은 무언가를 하기에 적당하다거나 오늘은 만사가 여의치 않고, 이사, 관혼상제 등 일을 하기에 부적합한 날이라거나 적합한 날이라고 하는 것을 미신이라고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계속 말해 보아라. (왼쪽 눈이 떨리면 재물이 들어오고 오른쪽 눈이 떨리면 재난이 닥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왼쪽 눈이 떨리면 재물이 들어오고 오른쪽 눈이 떨리면 재난이 닥친다.” 이것은 무엇에 속하느냐? (미신입니다.) 이것은 미신이다. 방금 말한 점괘, 운세 뽑기, 손금 보기 등은 전부 미신 행위에 속하지만 “왼쪽 눈이 떨리면 재물이 들어오고 오른쪽 눈이 떨리면 재난이 닥친다.”라는 것은 미신 행위의 구체적인 말로, 미신인 것이다. 그럼 이런 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대부분 기성세대에서 비롯된다. 부모가 알려 주기도 하고, 조부모가 알려 주기도 하며, 증조부모가 알려 주기도 한다. 또 있느냐? (하나님, 명절 풍습은 해당되지 않습니까?) 명절 풍습도 마찬가지로 전통에 속하는 것도 있고, 전통이면서 미신인 것도 있다. 명절 풍습은 동서남북 할 것 없이 전역에 걸쳐 무척 많다. 구체적인 명절 풍습을 하나 들어 보면, 남부 사람은 설을 쇨 때 ‘녠가오(年糕)’를 먹는다. 그 속뜻은 무엇이냐? 녠가오를 먹는 목적은 무엇이냐? (사람들은 녠가오를 먹어야 해마다 성공 운이 오른다고 생각합니다.) 녠가오를 먹는 목적은 해마다 성공 운을 올리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가오(高)’는 떡을 뜻하는 ‘가오(糕)’가 아닌 높고 낮음을 의미하는 ‘가오’로서 동음이의어를 빌려 온 것이다. 녠가오를 먹는 목적이 해마다 성공 운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녠가오를 먹지 않아서 오르지 않은 해가 있었느냐? 매년 먹어서 해마다 성공 운이 올랐느냐? 정말 오를 수 있는 것이냐?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은 사람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오르진 못할지언정 떨어지는 것을 원치는 않기에 꼭 먹으려 하는 것이다. 먹고 나면 안심이 되지만 먹지 않으면 마음 놓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미신이자 전통이다. 결론적으로 가정에서 비롯된 이런 생활 습관, 전통은 네게 영향을 미치는데, 네가 무의식적으로 그 전통과 습관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너는 그 전통이 권장하는 미신이나 사상 관점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네가 독립해서 살아도 이런 전통과 생활 습관을 이어갈 것인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 전통 측면에 관련된 말들을 얘기해 보자. 어떤 사람들은 자주 이런 일을 한다. 즉,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만두를 싸 주고 그 사람이 돌아오면 국수를 삶아 준다. 이것이 전통 중 하나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전통이자 불문율이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둘째 치고 일단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 이런 행동에 해당되는 말이 정확히 무엇이더냐? (“나갈 땐 만두, 들어올 땐 국수”라고 합니다. “떠날 땐 만두를 먹고 돌아와선 국수를 먹는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떠날 땐 만두를 먹고 돌아와선 국수를 먹는다.”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오늘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만두를 싸 줘야 한다는 것이다. 속뜻이 무엇이냐? 만두는 만두피로 싸서 만든다. 여기서 싼다는 의미의 ‘바오(包)’는 목숨을 부지한다는 의미의 ‘바오(保)’와 음이 같아서 외출할 때 불의의 사고로 객사하지 말고 반드시 돌아오라는 말로 평안한 여정을 의미한다. “떠날 땐 만두를 먹고 돌아와선 국수를 먹는다.”라는 말은 오가는 여정이 평안하고 모든 일이 순조롭다는 것으로, 대충 이런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일부 가정에는 가족 중에 떠날 일이 있는 식구가 있으면 만두를 싸 주고 돌아오면 국수를 먹이는 전통이 있다는 말이다. 먹는 사람이든 해 주는 사람이든 길운을 받기 위해, 현재와 나중 그리고 모두가 잘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전통이 긍정적인 사물이며 사람이 살면서 꼭 해야 하고 계승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에 공감하느냐? (공감되지 않습니다.) 먼 길을 나서는 형제자매가 있으면 밥을 해 주는 사람이 만두를 싸 주길래 내가 물었다. “그가 나가는 것과 만두를 먹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나가니까요, 나갈 땐 만두를 싸 줘야죠.” 그래서 떠날 땐 만두를 싸 주면 돌아오면 어쩌는지 물어보니 “돌아오면 국수를 먹어야죠.”라고 대답했다. 이런 말은 금시초문이라 어디 전통이냐고 물어보았다. “저희 동네는 다들 그래요. 떠나는 사람한테 만두를 싸 주고, 돌아오면 국수를 먹이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중에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 하면,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전통이나 조상의 유전을 근거로 하는구나. 사람의 목숨을 만두피 하나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손에 맡긴다. 만두피로 싸면 떠나는 사람이 평안하고, 만두피로 싸지 않으면 평안하지 않아 어쩌면 객사하여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의 사상 관점에서 사람의 목숨은 만두소이고, 만두소 정도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의 목숨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할 수 없으며, 사람이 만두피를 써야만 사람의 운명을 주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불신파입니다.) 불신파이다. 교회에 이런 사람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들은 이것이 미신이 아니라 생활 습관이니 긍정적인 사물로 여기고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서 이치와 근거가 있게, 당당하게 행한다. 네가 못 하게 해도 소용없다. 하지 말라고 하면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런 말을 한다. “밥하는 사람은 저인데 오늘 떠나는 사람에게 만두를 싸 주지 않아서 그 사람이 죽으면 누구 책임이겠어요? 제 탓을 하지 않겠어요?” 그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가장 믿음직하다고 여긴다. ‘전통을 따르지 않고 그 금기를 깨는 날엔 목숨을 보전하기 힘드니 그 일로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것이 불신파의 관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상 관점이 마음속에 뿌리내리면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이 진리임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입으로는 “저는 하나님의 주재를 믿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재빨리 만두를 싸 준다. 고기 살 시간이 없으면 야채 만두라도 싸 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행동, 이런 방식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분명 아니다. 너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말고는 작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네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여전히 사탄이 주입한 전통을 지킨다는 것이다. 삶의 이런 사소한 일까지 네가 조상에게서 주입받은 사상과 생활 습관을 엄수하고 있고 게다가 아무도 이를 고쳐 주지 못하는데, 이것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겠느냐?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배반하는 것이다. 조상이 누구냐?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 전통이 누구를 대변하느냐? 진리를 대변하느냐? 긍정적인 사물을 대변하느냐? 누가 만든 전통이냐? 하나님이더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는 것은 전통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전통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것을 내려놓기는커녕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로 여겨 지키니 이것이 독인지 약인지도 모르고 덤벼드는 짓이 아니냐? 진리와 하나님에게 공개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에게 공개적으로 대들고 대항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형제자매에게는 만두나 국수를 해 주지 않고 저희 가족에게만 해 주는 것은요? 가족이 떠날 일이 있을 때 만두를 싸 주고 돌아오면 국수를 삶아 주는 것은 괜찮을까요?” 괜찮겠느냐? “사람을 음해할 때 형제자매는 음해하지 않고 저희 가족을 음해하는 건 괜찮을까요?”라고 묻는다면 괜찮을지 대답해 보아라. (안 됩니다.) 이런 일을 하는 대상이 누군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살아 내는 모습이 어떻고, 드러내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네가 지니고 있는 관점이 무엇인지가 중요하지 네가 누굴 음해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네 행동, 네 원칙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