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4) 제 2 부

부모는 “남자는 울지 않는다.”라는 말 외에도 이렇게 아들을 가르친다. “‘좋은 닭은 개와 싸우지 않고, 훌륭한 남자는 여자와 다투지 않는 법’이야. 여자애랑은 놀지도 말고 싸우지도 마라. 계집애처럼 굴지도 말고. 상대가 여자애면 네가 양보해야 해.” 무슨 근거로 양보하라는 말이냐? 그 아이가 잘못했으면 양보하지도 말고, 봐주지도 말아야 한다. 남녀는 평등하다. 그녀나 너나 모두 부모가 낳아 키웠는데 무엇 때문에 그 아이에게 양보하라는 말이냐? 단지 그 아이가 여자이기 때문이냐? 잘못했으면 징벌을 받고 교육받아야 한다. 그리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서 자기 잘못을 알게 해야 한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하는 것이다. 너는 부모가 가르쳐 준 “훌륭한 남자는 여자와 다투지 않는다.”라는 원칙으로 이 문제를 대하지 말고 그녀를 도울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다. 남녀를 떠나 잘못을 했으면 인정하고 뉘우쳐야 한다. 남녀를 떠나 바른길을 가고 존엄하게 살아야지 “좋은 닭은 개와 싸우지 않고, 훌륭한 남자는 여자와 다투지 않는다.”라는 부모의 말처럼 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훌륭한 남자는 여자와 다투지 않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계집애처럼 굴지 않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아라. 부모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여자는 머리만 길지 식견은 짧아서 못 써. 이런 여자를 닮으면 안 돼. 그런 여자랑은 따지지 말고 상대하지도 마라.” 상대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원칙적인 문제는 확실하고 분명하게 얘기해야 한다. 대체 누구의 잘못인지, 누구의 말이 긍정적이고 누구의 말이 긍정적이지 않은지, 누가 말한 길이 옳은지, 원칙과 길, 처신과 관련된 일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지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리면 안 된다. 설사 상대가 여자일지라도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정말 그녀를 위한다면 눈감아 주지 말고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를 그녀에게 알려 주어서 바른길을 가게 해야 한다.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따지지 않거나 확실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여자도 존엄하게 살아야 한다. 여자도 남자가 자기와 타협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방임하면서 억지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생리적인 차이만 있을 뿐, 신분이나 지위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성별의 차이 외에 그 어떤 차이점도 없는 것이다. 똑같이 패괴를 거치고 있고, 처신의 원칙상 남자든 여자든 똑같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 역시 구별 없이 동일하다. 그러니 부모가 가르친 “훌륭한 남자는 여자와 다투지 않는다.”라는 말이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자세는 무엇이겠느냐? 너더러 남들과 다투라는 것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 실행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의 이 말은 무슨 뜻이겠느냐? 남존여비가 아니겠느냐? “여자는 머리만 길지 식견은 짧다. 철도 없고 지능도 떨어지니 그녀와 이치를 논하지 마라.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 ‘여자는 가슴만 크지 머리는 비었고, 머리만 길지 식견은 짧다.’라는 말이 있다. 여자랑 승강이를 벌이거나 따져 봐야 무슨 소용이겠니?”라는 말이다. 여자는 사람이 아니더냐? 하나님이 여자는 구원하지 않느냐? 여자에게는 진리도 전하지 않으며 생명도 공급하지 않느냐?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고 여자를 차별 대우하지 않으면 너는 어찌해야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알려 준 원칙에 따라 여자를 대해야지 부모에게서 비롯된 사상을 받아들이거나 남성 우월주의 성향을 지녀서는 안 된다. 여자보다 네 골격과 근육이 단단하고 네 몸집이 크며 힘도 세고 많이 먹지만 네 패괴 성품과 패역 그리고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정도는 여자와 똑같다. 단지 능숙한 생활 기술이 여자와 다를 수 있을 뿐이다. 너는 전자, 기계 쪽에 능하지만 여자는 자수나 재봉, 바느질에 능한데 네가 할 수 있겠느냐? 또 남자는 건축에 능하지만 여자는 미용에 능하다. 남자는 기계나 기기를 다루는 일에 능하지만 여자도 못지않게 잘하는 것이 있다. 여자가 남자보다 못할 게 무엇이겠느냐? 이렇게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남성 우월주의를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훌륭한 남자는 여자와 다투지 않는다.”라는 사상을 받아들이지 마라. 부모가 하는 말은 진리가 아니고 그것은 네게 해가 된다. 여성을 모욕하는 말은 영원히 하지 마라. 이는 대역무도한 말이다.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어떤 문제이겠느냐? 이런 사람에게 인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인성이 없다. 네가 여성을 존중하지 않으면 네 어머니나 할머니, 외할머니, 네 누이는 모두 여성인데 달가워하겠느냐? 아들에게 “훌륭한 남자는 여자와 다투지 않는다.”라고 가르치는 어머니는 어리석지 않으냐? 이런 어머니는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다. 자기가 여성이면서 스스로를 깎아내리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바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훌륭한 남자는 여자와 다투지 않는다.”라는 말은 대역무도한 말이다. 하나님은 여성을 그렇게 정의한 적이 없다. 또한 남자에게 “여자는 연약하고 머리만 길지 식견은 짧아 사리에 어두우니 그녀와 다투지 마라. 다투어 봤자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매사에 그녀에게 관용을 베풀고 포용해 주며 승강이를 벌이지 마라. 남자는 너그러운 대인배여야 한다.”라고 가르친 적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한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으니 너는 그렇게 하지 말고, 이런 관점으로 여자를 바라보지도 마라. 이는 여성을 무시하는 것이고 존중하지도 않는 것이다. 여자의 부족한 점은 네가 보완하면 된다. 그런데 네게도 여자의 도움이 필요한 부족한 점이 있다. 서로가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서 장점을 취해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 올바른 관점이다. 어째서 이를 올바른 관점이라 하겠느냐? 남자와 여자의 장점을 하나님이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정한 이 사실을 너는 어떤 생각과 관점으로 대해야 하겠느냐? 바로 서로 장점을 취하여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행 원칙이다. 남자는 여자를 무시하지 말고 여자도 남자의 비위를 맞추면서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 ‘드디어 우리 교회에 형제가 생겼어. 마침내 기둥이 생긴 거야. 우리 교회도 이제 제대로 된 교회가 됐어. 우리 대신 뒷받침해 주고 나서 주고, 주도해 줄 사람이 나타난 거야.’ 네가 천한 사람이냐? 네가 믿는 것이 남자더냐? 교회에 자매밖에 없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냐? 구원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냐? 진리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냐? 남들은 무의식적으로 말한다. “당신네 교회엔 왜 형제가 한 명도 없나요?” 네 마음은 칼에 찔린 듯 괴롭다. “말도 마세요. 그게 저희 교회 단점이에요. 남들 앞에서 이런 얘기가 거론되는 걸 꺼리는데 결점을 알아보셨네요.” 그리고 기도한다. ‘하나님, 언제쯤 우리 교회에 형제 한 명을 예비해 주시렵니까?’ 교회가 형제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더냐? 교회에 형제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한 적 있더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만 교회가 성립되고 여자나 남자만 있으면 교회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씀한 적도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한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이는 모두 가정에서 물든 남성 우월주의로 야기된 결과이다. 매사에 남자를 의지하다 보니 무슨 일만 생기면 “그이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나중에 얘기하는 게 좋겠어요.”, “저희 교회의 형제가 요즘 바빠서 이 일을 처리할 사람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럼 여자는 무얼 하느냐? 이런 일을 네가 할 수는 없느냐? 넌 입이 없느냐 발이 없느냐? 네게 부족한 게 없고, 진리 원칙도 깨달았으니 그것에 맞게 해야 한다. 남자는 네 머리가 아니고 네 주인도 아니다. 남자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고 패괴된 인간 중 한 명일 뿐이다. 너는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여 모든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네가 지켜야 할 원칙이자 도이다. 물론 남성 우월주의를 제창하지 않는 목적이 여성의 권익을 증진하거나 여성을 위해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사람에게 한 측면의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어떤 측면의 진리이겠느냐? 바로 부모가 주입한 “훌륭한 남자는 여자와 다투지 않는다.”라는 말이 틀렸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사상을 주입하고 지도하는 것이니 너는 이런 사상 관점을 중심으로 사는 남자가 되거나 그런 사상 관점으로 여성을 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네가 깨달아야 할 한 측면의 진리이다. 늘 ‘난 남자이니 남자의 관점으로 문제를 고려하고 남자의 입장에서 너희를 염두에 두면서 자매들을 보호해야 해. 자매에 대해 관용하고 용서하며 그녀에게 따지지 말아야 하겠지. 자매가 교회 리더 선거에 나서겠다고 하면 그녀를 예우해서 양보하겠어.’라고 생각하지 마라. 무슨 근거로 그러는 것이냐? 네가 남자이고 대인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냐? 네가 포용할 수 있겠느냐? 너는 너 자신조차 포용할 수 없다. 교회 리더는 되어야 할 사람이 되는 것이다. 형제자매가 너를 뽑으면 네가 그 짐을 짊어져야 한다. 그것이 너의 책임이자 본분이다. 어디서 함부로 양보하느냐? 그렇게 대단해 보이고 싶은 것이냐? 그것이 실행 원칙이더냐? 진리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네가 양보하는 것은 옳지 않고, 그렇다고 다투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해야 옳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 옳다. 부모는 너희에게 “훌륭한 남자는 여자와 다투지 않는다.”라고 가르친다. 너희가 이런 남성 우월주의적 사상 관점을 가지고 몇 년을 살았느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씻고 헹구고, 꿰매고 깁는 일은 모두 여자의 일이라 여자가 하면 좋을 텐데.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면 짜증이 나고 내가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네.’ 네가 그런 일을 한다고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 너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닌 것이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예전에 제 옷은 엄마나 누나, 할머니가 빨아 주셨어요. 여자의 일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넌 본분을 이행하니 혼자 자립해야 한다. 이는 네가 해야 할 일이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네가 하겠느냐? (하겠습니다.) 네 마음에 거부감이 들어서 하기 싫어지고 이 일로 엄마가 생각난다면 너는 못난 인간이다. 남자는 이렇게 남성 우월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남성 우월주의가 심각한 일부 사람은 아이 돌보기, 방 정리, 빨래나 설거지, 청소 같은 일을 무시해서 하려 하지 않는다. 한다 해도 마지못해 하는 식이다. 남들에게 무시당할까 걱정하면서 ‘맨날 이런 일이나 하고 있으니 이러다 아줌마 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사상 관점에 지배된 것이겠느냐? 이는 사상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상엔 문제가 있다. 생각해 보아라. 어떤 지역에는 하루 종일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하는 남자가 있다. 여자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그는 밥을 차리고 말한다. “먹어 봐. 다 당신이 좋아하는 거라 맛있을 거야.” 여자는 태연하게 차려진 음식을 먹고, 남자는 태연하게 밥을 차리면서도 자기가 가정주부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앞치마를 풀고 밖으로 나가면 여전히 남자가 아니냐? 어떤 지역의 사람은 남성 우월주의가 굉장히 심각하다. 이는 가정에서 비롯되는 교육과 영향 때문에 네가 잘못 길들여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는 너를 해롭게 한 것이냐 아니면 너를 구한 것이냐? (해롭게 한 것입니다.) 너에게 해를 끼친 것이다. 어떤 남자는 나이가 삼사십 세가 되도록, 심지어는 거의 오십 세가 되도록 혼자 양말도 빨지 못한다. 보름 동안 입어 더러워진 러닝셔츠도 빨 생각을 하지 않고 빠는 법도 모른다. 빨려 해도 물을 얼마나 붓고, 세제는 얼마나 넣는지, 어떻게 빨아야 깨끗해지는지 모르니 그냥 그렇게 입는 것이다. 그러고는 속으로 생각한다. ‘나중에 엄마나 마누라한테 러닝셔츠랑 양말 좀 더 사 달라고 하고 두 달에 한 번 빨지 뭐. 언제 한번 엄마나 마누라가 와서 빨아 주면 오죽 좋으련만!’ 그가 이런 일에 거부감을 느끼는 근본적인 원인은 남자에 대한 가정과 부모의 교육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부모가 주입한 이런 사상 관점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생활의 규칙과 연관되고 사람에 대한 잘못된 견해와도 관련된다. 한마디로 말해, 이는 모두 사람의 사상 측면에 대한 가정의 영향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이나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사람에게 얼마나 큰 곤란과 불편을 초래하든, 근본적으로 보면 부모의 사상 교육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네가 만약 이미 성인이 되었고, 이런 사상 관점을 가지고 산 지 어느 정도 되었다면 이는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천천히 바꿔 나가야 한다. 만약 이런 사상 관점이 본분 이행, 처신과 처세의 원칙에 연관되어 있을 경우, 네가 진리를 추구하려면 하루빨리 이 측면의 문제를 변화시켜야 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약 단지 개인의 생활 측면에만 연관되어 있고 네가 변화하길 원한다면 이는 좀 더 나은 경우다. 네가 만약 이르지 못하거나 힘들고 어렵다고 느낀다고 해도, 나아가 이런 측면의 삶이 이미 몸에 베어서 바뀌기 어렵다고 해도 아무도 너를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이 자리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네게 알려 줄 뿐이다. 네 개인적 삶에 연관되는 이런 문제는 네가 알아서 처리하면 된다. 우리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며칠에 한 번 양말을 빨지, 해진 양말을 기울지 버릴지는 네 개인의 일이다. 너 자신의 여건에 따라 하면 된다. 우리가 정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특별한 배경으로 인해 부모가 자녀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가정도 있다. “밖에 있을 때는 네가 누구의 후손인지, 네 조상이 누군지 알아야 돼. 사람들 속에서 우리 성씨 가문을 빛내고 명예를 드높여야 한다. 절대로 조상님 얼굴에 먹칠하면 안 돼. 꼭 가훈을 명심하고 가문의 수치가 되어서는 안 돼. 언젠가 네가 잘못을 저질러서 ‘명문가의 후손이 이런 짓을 해도 되나요?’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사람들이 너를 조롱할 거야. 그들은 너 하나만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문을 조롱할 테니 그럼 너는 우리 가문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고 조상님께 누가 되는 거지. 그래선 안 되는 거야.” 또 어떤 부모는 이렇게 자녀를 가르친다. “우리나라는 위대한 나라야. 유서 깊은 문명국이지. 지금 우리의 삶은 쉽게 얻어진 게 아냐. 그러니 지금의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해. 특히 해외에 가면 우리 중국인의 명예를 빛내고 위상을 드높여야 해. 나라에 누가 되는 일을 하거나 동포가 수치스러워할 짓을 하면 안 된다.” 부모는 한편으로는 조상과 가문의 명예를 빛내고 드높이라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조국과 민족의 명예를 빛내며 위상을 드높이고 조국에 누가 되지 말라고 가르친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이렇게 가르치고, 학교에 가면 교사 또한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 반과 학교, 우리 시와 조국의 명예를 빛내야 해요. 외국인이 우릴 보고 자질이 떨어지고 인품이 좋지 않다고 조롱하게 만들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중국인은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믿었어요. 우리가 외국의 형제자매와 교류할 때 중국인의 명예를 빛내야지 중국인의 얼굴에 먹칠하면 안 되죠.” 이런 말들은 사람에 대한 가정의 주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런 주입이 올바른 것이겠느냐? (올바르지 않습니다.) 어째서 올바르지 않겠느냐? 명예를 빛내서 어쩌겠다는 말이냐? 명예를 빛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소용없습니다.) 예전에 동북 지역에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어느 지역의 여러 교회를 돌면서 헌금 만 위안을 훔치고선 집으로 돌아가 생계를 이어나갔다. 동북 지역의 형제자매가 그 사실을 알고는 “이 자식 정말 나쁜 놈이네요. 감히 교회 헌금까지 훔치다니. 우리 동북인의 얼굴에 제대로 먹칠을 했어요! 이 녀석 앞으로 눈에 띄면 혼쭐을 내 줘야 해요!”라고 말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동북 사람은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른 지역의 형제자매 앞에서는 이 일을 언급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은 부끄러웠고 또한 다른 사람이 “당신네 동북 사람 ◯◯◯가 헌금을 들고 달아났다면서요.”라고 얘기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남들 입에 오르내릴까 두려워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런 행태가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으냐? (누가 헌금을 훔쳤는지는 다른 사람과 관련이 없습니다. 개인은 개인을 대변할 뿐입니다.) 그렇다. 그가 헌금을 훔친 것은 그의 일이다. 만약 네가 발견한 후 그를 저지해서 하나님 집의 피해를 막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켰다면 넌 직책을 이행한 것이다. 만약 네가 그를 저지할 기회가 없었고 피해를 막지 못했다면 이자가 어떤 인간인지 분명히 인식하고 경각심을 가져서 하나님에게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이 이런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너는 이 일을 올바로 대해야 한다. 비록 그가 너와 동향이지만 그가 한 짓은 그 개인만을 대변할 뿐이다. 그 지역 사람들이 그가 그런 짓을 하도록 가르치고 부추긴 것은 아니니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기껏해야 감독하고 관리하며 지도하는 데 소홀했던 책임만 있을 뿐이며, 그렇다 한들 그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를 감당해야 할 의무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행정 법령을 거스르는 일을 저질렀다고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그 모든 뒷감당을 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의 망신은 그의 몫이다. 더구나 그 일은 창피하고 자랑스럽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한 사람의 본성 본질에 관련된 일이고 그가 가는 길에 관련된 일이다. 애초에 사람들이 그자가 어떤 놈인지 꿰뚫어 보지 못했고, 그 일이 터지고 나서야 그를 꿰뚫어 보게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는 근본적으로 해당 지역의 다른 형제자매의 명성과 체면에 관련되는 일이 전혀 아니다. 네가 만약 그가 너와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가 네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견해와 이해하는 방식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연좌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으로 본다. 네가 어디 출신이든, 설령 같은 가정에서 같은 부모를 두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각 사람을 모두 개인으로 본다.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와 관계된 사람을 절대 연관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원칙이고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만약 너와 같은 지역 출신의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서 네 체면이 구겨졌고 너도 말려들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너의 잘못된 인식이고 진리와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가 네게 “조국과 가족, 성씨 가문을 빛내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것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겠느냐? 이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말이 있지 않았더냐? 우리가 예전에 언급했던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는 사상과 같은 성질이 아니겠느냐? 사람이 살면서 긍정적인 일을 하고, 바른길을 가며,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체면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의 책임이자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이며 사람의 본분이기도 하다. 사람이 올바른 길을 가고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사람의 의무이자 본분이며 구원에 이르기 위함이지 자신의 체면을 위한 것도, 하나님의 체면을 위한 것도 아니다. 물론 네 동포의 체면을 위한 것도 아니며 특정 성씨, 종족, 민족의 체면을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네가 구원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네 동포의 명예를 빛낸 것이 아니고 네가 속해 있는 가족의 명예를 빛낸 것도 아니다. 명예를 빛낸다는 것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할 뿐이다. 네가 구원받는 것은 그들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들이 너에게서 무슨 덕을 볼 수 있겠느냐? 네가 구원받으면 그들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들이 바른길을 가지 않으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성품으로, 그리고 응당 대해야 할 방식으로 그들을 대할 것이다. 그럼 소위 명예를 빛낸다는 것이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이냐?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너는 네가 가는 길에 따라 그에 맞는 결과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그들 또한 그들이 가는 길에 따라 그에 맞는 결과를 감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성품으로 모든 사람을 대한다. 조국을, 가족을, 특정 성씨를 빛내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며 그 책임을 너 한 사람에게 지워서도 안 되고, 너 혼자 짊어질 수도 없다. 한 가족이나 민족의 흥망성쇠가 어떻게 흘러갈지, 그 운명이 어떨지는 네가 그들의 명예를 빛내느냐 마느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물론 네가 가는 길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네가 잘 처신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 역시 그들의 명예를 빛내거나 그들의 체면을 살려 주는 것이 아니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얻어 내는 것도, 그들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에 대한 사면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흥망성쇠와 운명은 너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특히 그들이 명예로운지 그렇지 않은지, 그들의 명예를 빛낼지 그러지 않을지는 너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네가 책임질 수 있는 일도 아닐뿐더러 이 일을 해야 할 책임이나 의무가 네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부모가 직접 “조국과 가족, 그리고 우리 성씨의 영예를 떨쳐야지, 조상님의 얼굴에 먹칠하거나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말은 네게 부정적인 사상적 압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네가 할 수도 없거니와 이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할 의무도 없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지 너더러 조국과 가족, 네 성씨를 위해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의무를 이행하라고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국과 가족, 네 성씨 가문을 빛내기 위해 힘쓰거나 이를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네 의무가 아니며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들의 운명이 어떨지는 오직 하나님에게 달려 있으니 네가 부담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그들에게 죄책감을 갖지 말고, 네가 어떤 좋은 일을 했든 아무런 요행도 바라지 마라. 그리고 조국과 가족, 자신의 성씨 가문을 빛냈다고 생각하여 이를 기뻐하지 말고 네가 그러지 못했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하며 자책하지도 마라. 이는 너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고 네가 생각할 필요도 전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국적별로 이야기를 해 보자면 중국인은 하나님의 선민이며,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다. 서양인도 하나님 앞에 오면 피조물이고, 아시아인, 유럽인, 미주인, 호주인, 아프리카인도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면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자신의 국적을 바탕으로 여러 종족 단체를 만들어 단체를 구분하고 민족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매사에 민족의 영광을 달성 목표나 기본 원칙으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사람이 가선 안 될 길이며 교회에서 나타나서는 안 될 현상이다. 언젠가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교류하거나 접촉하는 범위가 점점 넓어질 것이다. 아시아 사람이 유럽 사람과 접촉하고 유럽 사람이 미주 사람과 접촉하며, 미주 사람이 아시아 사람이나 아프리카 사람과 접촉할 수도 있다.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 함께 지낼 때, 각 민족을 기본 단위로 하는 여러 단체가 생겨나 자기 민족을 빛내기 위해 행동한다면 교회는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겠느냐? 분열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고 저주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저주의 대상이고, 사탄의 심부름꾼이며, 징벌의 대상이다. 왜 징벌을 받겠느냐? 이는 행정 법령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네가 이런 측면에서 부모에게 받은 영향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너는 하나님이 네게 준 피조물의 신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은 중국인이라고, 혹은 백인, 흑인, 황인종 등 다른 민족, 다른 성씨, 다른 국적의 사람이라고 여기고 조국과 민족, 가족의 명예를 빛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네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면 그 결과는 생각만 해도 끔찍할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정중하게 성명하고 엄숙하게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겠다. 만약 언젠가 이런 측면에서 행정 법령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그때 가서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잖아요. 정말 몰랐습니다. 전 모르는 일이에요.”라고 원망하지 마라. 너는 자기 신분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애초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런 일을 저지른다면 이는 네가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저지른 짓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네가 분명히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지었으니 너는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 행정 법령을 거스르는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딜 가든, 뿌리를 잊어선 안 된다. 우리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서 자랐는지, 내가 누군지 잊어선 안 돼. 어디서 고향 사람을 만나든 일이 생기면 잘 챙겨 줘야 해. 교회 리더나 책임자를 뽑을 땐 고향 사람을 뽑아 주고, 교회에 혜택 같은 게 있으면 고향 사람을 먼저 챙겨 주거라. 팀원을 뽑을 때도 고향 사람을 먼저 뽑아라. 그들과 같이 일하면 말도 잘 통하고 편할 거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냐? ‘고향 사람을 만나면 두 눈 가득 눈물이 글썽인다’, 또 ‘고종 간의 인척 관계는 매우 가깝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부모나 어른의 당부로 어디서든 같은 성(省), 같은 향(鄕) 출신이란 말을 듣거나 자기 고향 억양을 들으면 그에게 친절해진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예배를 드리며 무슨 일이든 함께하면서 무척 가깝게 지낸다. 어떤 사람은 고향 사람만 만나면 “사람들이 ‘고향 사람을 만나면 두 눈 가득 눈물이 글썽인다’잖아요. 고향 사람을 만나면 가깝게 느껴진다는데, 당신을 보니 가족처럼 친근하게 느껴져요.”라고 한다. 고향 사람을 살뜰히 챙기고 그들이 생활이나 사역에서 어려움을 만나거나 병에 걸리면 극진히 보살펴 준다. 이러면 좋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왜 좋지 않으냐? (이는 원칙 없이 사람을 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칙 없는 것이고 그런 자는 멍청이다. 고향 사람이면 가깝게 느껴진다는데, 고향 사람이 어떤 존재이냐? 좋은 사람이냐? 진정한 형제자매이냐? 네가 그를 발탁하고 추천하는 것이 원칙에 부합하느냐? 그가 이 사역에 적합하냐? 네가 그를 보살피고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 공평하냐? 진리나 원칙에는 부합하느냐? 이런 것들이 모두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를 이렇게 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는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러니 고향 사람을 만나면 잘 챙겨 주라는 부모의 말은 그릇된 말이니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나중에 부모가 “우리 고향 사람이 너네 교회 다니던데 잘 챙겨 주고 있니?”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겠느냐? (하나님 집에서는 모두 차별 없이 대합니다.)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제겐 그럴 의무가 없어요. 고향 사람은 제쳐 놓고 설령 부모님이라도 두 분이 하나님께 대적하시면 봐 드리지 않을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가정의 전통 관념의 영향을 너무 심하게 받아서 자신과 인척 관계가 조금이라도 있거나 자기와 동성동본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그냥 넘어가지를 않는다. 자기와 같은 성씨라고 하면 “아, 저랑 한 집안이네요. 그럼 촌수를 따져 봐야죠. 그분을 고모할머니라고 불러야 되겠어요. 제가 손주뻘이거든요.” 기꺼이 손자를 자처하면서 자매나 다른 호칭으로 부를 생각은 하지 않고 늘 고모할머니라고 부른다. 자신과 같은 성씨 사람을 만나면 유독 친근하게 대한다. 그가 어떤 작자인지는 상관없다. 이것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특히 어떤 가정은 전통이 있는데 자기와 동본인 사람을 특별히 챙긴다. 항상 그들과 정을 나누고 가깝게 지내기 때문에 식구도 많고 가문이 흥하는 것처럼 보이며, 시끌벅적하여 번창한 것처럼 보인다. 무슨 일만 생기면 일가친척들이 모두 관여해서 도와주고 대책을 마련해 준다. 이런 가풍의 영향으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처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으니 일이 생기면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또 일부 사람의 관념은 어떠하더냐?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이 말은 분명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뜻은 누구나 알고 있다. “사람은 살면서 인정이 있어야 해. 인정이 없으면 그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니? 매사에 그렇게 엄숙하고 진지하며, 원칙과 입장만 따지면 결국 친척, 친구들마저 곁을 떠나고 말 거다.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사람은 인정이 있어야 해. 멀리 있는 우리 성씨와 관련 없는 사람은 몰라도 동성동본인 사람 중에 가깝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니? 떼려야 뗄 수 없단다. 네게 병이나 관혼상제 같은 대소사가 생겼을 때 의논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니? 네가 집이나 차, 땅을 살 때에도 다들 도움의 손길을 내밀 테니 이 사람들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들에게 기대면서 살아야 해.” 이런 가풍의 영향을 심하게 받아서 집 밖에서, 특히 교회에서 자기와 동본인 사람을 만나면 무의식적으로 가깝게 지내면서 남다른 호감을 갖는다. 항상 그를 특별하게 챙겨 주고 대우해 준다. 그와 각별하게 지내면서 그가 잘못했을 때는 항상 사정을 봐준다.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든 칼같이 처리하면서 자신과 동본인 사람은 보호하고 편애한다. 흔히 말하는 감싼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항상 이런 생각에 이끌려 일상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원칙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처리하지 않고 가풍에 따라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한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장씨 사람이 자기와 같은 성씨의 사람을 만났는데 자기보다 몇 살 많다고 어디서든 언니라고 부른다. 남들은 둘이 친자매인 줄 알지만 사실 성씨만 같을 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전혀 상관없는 사이다. 왜 이렇게 부르겠느냐? 가풍이 이렇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어디서든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일이 생기면 남들한테는 얘기하지 않고 그녀에게만 얘기한다. 왜 그러겠느냐? “언니가 저랑 같은 장씨잖아요. 한 가족이라고요. 할 말 있으면 언니랑 얘기해야지 제가 누구랑 얘기하겠어요? 가족도 못 믿으면서 다른 사람을 믿으면 바보 아닌가요? 가족만 믿지 남들은 뭐라 하든 못 미더워요.” 교회 리더를 뽑을 때도 그녀를 뽑으니 사람들이 묻는다. “왜 그녀를 뽑으세요?” “저랑 같은 성씨잖아요. 제가 언니를 안 뽑으면 대역무도한 사람이 아닌가요? 언니를 안 뽑으면 그게 사람이에요?” 교회에 혜택이나 좋은 일이 생기면 그녀를 먼저 생각한다. “왜 그녀를 먼저 생각하시나요?” “저랑 같은 성씨잖아요. 우리 가족의 일원이라고요. 제가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겠어요. 이 정도 인정도 없으면 그게 사람인가요?” 그것이 정에서 비롯되었든, 사심에서 비롯되었든 요컨대 가정으로부터 이런 사상 측면의 교육과 영향을 받았다면 너는 즉시 돌아서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처신하거나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대하면 안 된다. 좁은 의미에서든 넓은 의미에서든 이런 방식은 모두 하나님이 네게 가르쳐 준 원칙이나 방식이 아니다. 이는 최소한 네가 내려놓아야 할 생각과 관점이다. 결론적으로 가정에서 받은 교육이 하나님이 네게 가르쳐 준 원칙에 부합되지 않으면 너는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안 되고, 이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서도 안 된다. 그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 말고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렵지 않다. 하나님 말씀에 여러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 있다. 만약 너 스스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도 실행의 길을 찾지 못하겠다면 형제자매 중 이런 측면의 진리를 깨달은 형제자매가 있는지 살펴보고 그에게 물어보아라. 형제자매가 확실하게 알려 줄 테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본관, 성씨 그리고 처세술에 해당되는 문제를 대할 때 사람이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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