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2) 제 4 부

네가 받은 가정 교육에는 또 무엇이 있느냐? 부모는 항상 네게 일러둔다. “가벼운 입으로 무턱대고 떠들고 다니면 언젠가는 그 주둥이 때문에 고생할 날이 올 거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을 명심해라! 이게 무슨 뜻이겠니? 말이 많아지면 반드시 빈틈이 생긴다는 뜻이야. 어딜 가든 입을 조심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먼저 들어 본 다음에 말해라. 대세를 따르면 무탈하겠지만, 늘 나서면서 혼자 떠들면 장관, 상사, 다른 사람들의 의사를 알 수 없어. 네가 먼저 의견을 말했는데 장관, 상사가 그런 의사가 아니라면 그로 인해 네가 곤욕을 치를 텐데 좋은 결과가 따르겠니? 이 녀석아, 앞으로는 조심해야 한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니, 말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입은 먹고 숨 쉴 때나 쓰고, 상사나 남들에게 아부할 때 써야지 속 얘기할 때 쓰는 것이 아니란다. 말도 골라서 하고 말에 기교와 방식이 있어야 한다. 머리를 써야 하는 거야.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마음속으로 곱씹어 봐야 한다. 곱씹고 난 다음에도 조금 기다렸다가 말해야 해. 그리고 말을 할 때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만약 의사를 약간 밝혔는데 다들 반기지 않고 반응이 썩 좋지 않으면 즉시 멈추고 어떻게 말해야 모두가 좋아할지 고민해 본 다음에 말을 이어 가거라. 그래야 똑똑한 거야. 그렇게 하면 너는 화를 면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너를 좋아할 거다. 사람들이 모두 너를 좋아한다면 네게 좋은 일 아니겠니? 앞으로 기회도 많아지지 않겠어?” 너에 대한 가정 교육은 네가 어떻게 해야 좋은 평판을 얻고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사람들 가운데서 입지를 굳힐 수 있을지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겉모습으로 어떻게 남을 속일 수 있는지를 알려 주고 진심을 이야기하지 말고 마음속 얘기를 전부 쏟아내지 말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진심을 얘기했다가 손해를 좀 보고는 가정에서 들었던 이 말을 떠올리며 교훈으로 삼는다. 갈수록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을 실행하려고 하고 그 말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어떤 사람은 손해를 보기도 전에 그가 받은 이런 측면의 가정 교육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어떤 장소에서든 계속해서 이 말을 실행한다. 그가 이 말을 실행하면 할수록 ‘아버지 어머니가 정말 내게 잘해 주셨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내게 잘해 주셨어. 그들은 내게 항상 진심이셨던 거야. 내가 잘 되기를 바라시면서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을 내게 알려 주셔서 다행이야. 알려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이 가벼운 입 때문에 엄청 손해를 보고 곤욕을 치르고, 또 많은 사람의 백안시와 비아냥, 조롱을 받았을지 몰라. 정말 유용하고 실용적인 말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말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실제적인 이득을 많이 보았다. 물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때에도 이 말이 가장 유용하고 실용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형제자매가 개인의 내적 상태나 패괴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체험적 인식을 교제할 때 그도 교제하고 싶어 한다. 털어놓고 자기 마음속 생각이나 인식을 솔직하게 말해서 수년간 스스로 억눌렀던 마음을 잠시 이완시키거나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매번 아버지, 어머니가 늘 신신당부했던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나팔이 되지 말고 수신기가 되어라. 남의 말을 듣는 법을 배워라.”라는 이런 말들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속 가득한 하고 싶었던 말을 삼킨다. 모두가 말을 다 하고 나서도 그는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한다. ‘좋았어. 이번에 말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말하고 나면 다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잖아. 어쩌면 손해일지도 모르니 말하지 않는 게 훨씬 낫지. 그러면 모두들 줄곧 내가 정직하고 간사하지 않다고, 선천적으로 과묵한 사람이라 별로 잔꾀 부리지 않고 그렇게 패괴되지도 않았다고 생각할지 몰라. 특히 하나님에 대해 별다른 관념이 없어서 순수하게 털어놓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을지도 모르지. 나한테 이런 인상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어?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은 여전히 내게 유효한 것 같으니 계속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이 말을 지키는 것이 스스로 멋지고 얻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 번, 두 번 얘기하지 않다가 어느 날 정말 답답해서 형제자매에게 털어놓고 싶은데 입에 자물쇠를 채운 듯, 붕대를 감은 듯하여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다. 형제자매에게 말할 수 없다면 하나님에게 말해 보고자 ‘쿵’ 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한다. “하나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아무개….” 속으로는 다 생각해 놓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표현도 못 한다. 영락없이 벙어리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문장을 어떻게 맞춰야 할지조차 모른다. 이렇게 오랫동안 답답하게 살았으니 스스로 억압을 느끼고 자신의 삶이 어둡고 옹졸하게 느껴진다. 하나님께 마음속 얘기를 시시콜콜 얘기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말문이 막힌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어째서 하나님께 할 말이 없겠느냐? 그저 자기소개만 할 뿐이다. 하나님께 털어놓고 싶었던 속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결국 한 마디밖에 하지 못한다. “하나님, 제가 해야 할 말을 베풀어 주세요!” 하나님이 말한다. “네가 해야 할 말은 무척 많았다. 네가 말하려 하지 않았고, 기회를 줘도 말하지 않았으니 하나님은 네게 주었던 모든 것을 다시 거두어 갔다. 너는 받을 자격이 없으니 네게 주지 않을 것이다.” 그때서야 너는 지난 몇 년간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기 자신을 빈틈없이 완벽하게 포장하여 존엄하게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형제자매가 한동안 결실을 얻는 것을 볼 때, 형제자매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패괴를 털어놓을 때 자기는 한마디도 못 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으니 자신을 인식한 것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험과 체험을 이야기하고 싶고, 하나님으로부터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고 얼마간 수확도 얻고 싶지만 아쉽게도 자기가 늘 지키던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 때문에, 또 그런 생각에 얽매이고 통제되어 오랫동안 이 말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깨우침이나 빛 비춤도 얻지 못했다. 생명 진입에 있어서도 가진 것 없이 빈털터리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과 생각을 제대로 실행하고 철저히 준수했지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진리에 있어서는 아무런 수확도 없이 빈궁하고 눈이 먼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입을 주었는데 그에게는 진리를 교제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이 없고 자신의 감상과 인식을 이야기할 능력도 없으며, 더욱이 형제자매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더욱 가련한 것은 하나님과 대화할 능력마저 잃어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가련하고도 슬픈 일이다. 너는 말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느냐? 말이 많으면 실수할까 봐 걱정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너는 영원히 말을 하지 마라. 너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네게 준 것을 포장하고 억누르고 봉인하여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게 했다. 그저 네 체면이 깎일까, 위협을 받을까, 남들에게 간파당할까 염려하고, 더 이상 남들의 눈에 완벽하고, 정직하며,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여 스스로를 포장하고 진실된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결국 어찌 되었느냐? 너는 철저하게 벙어리가 된 것이다. 누가 너를 해친 것이냐? 근본적으로는 가정 교육으로 인한 것이다. 하지만 너 자신에게서 보면 네가 사탄의 철학에 따라 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너는 가정 교육이 옳다고 믿으면서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긍정적인 것임은 믿지 않았다. 너는 너에 대한 가정 교육을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 너에 대한 하나님의 공급과 도움, 가르침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자 부정적인 사물로 간주했다. 그러니 하나님이 처음에 네게 얼마를 베풀어 주었든 여태껏 네가 경계하고 거부한 결과는 하나님이 네게 주지 않고 모든 것을 거두어 간 것이다. 넌 가질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아직 이런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을 때 너는 이런 측면으로 가정이 주입한 것을 내려놓고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너를 더욱 폐쇄적이고 음흉하며 위선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사람에게 솔직한 사람이 되고 마음을 터놓으라고 한 하나님 말씀에 정확하게 위배되고 배치된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마땅히 진리를 추구할 때 너에 대한 이른바 올바른 가정 교육을 마땅히 내려놓고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가정이 네게 어떤 교육을 했든, 그것이 네게 얼마나 좋고 유리하든, 또 너를 얼마나 든든하게 보호해 주든 그것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내려놓아야 한다. 반면 하나님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설령 그것이 네가 받은 가정 교육과 상충하고, 나아가 네 이익을 침해하고 네 권리를 박탈하며, 심지어 네가 생각하기에 너를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네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네가 창피를 당하게 하는 것일지라도 너는 그것을 긍정적인 사물로 여겨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네가 가정 교육으로 받은 것이 사람의 생각, 처신에 해당되거나 사람의 생존관과 걸어가는 길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너는 그것을 고수하지 말고 내려놓아야 한다. 그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상응한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대체하고 아울러 그 속의 문제와 본질을 끊임없이 분별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더욱 정확하고 실제적이며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실행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생각을 받아들이고,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실행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은 피조물의 마땅한 책임이자 피조물로서 지니고 행해야 할 생각과 관점이다.

가정에서 어떤 부모는 사람이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 사람의 생존과 앞날, 미래에 유익한 것 외에도, 상대적으로 극단적이고 왜곡된 생각과 관점도 주입한다. 예를 들면, 어떤 가정의 부모는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말라.”라고 말한다. 이는 네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말이다.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말라.”라는 말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다. 뒤에서 남몰래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차라리 진짜 소인배가 되어 대놓고 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설령 네가 한 일을 남들이 썩 좋게 보지는 않더라도 네게 탄복하고 너를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 어떤 나쁜 짓이든 앞에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가정은 자녀를 이렇게 가르치고 교육한다. 그들은 사회에서 생각과 행동이 비열하고 야비한 사람들을 경멸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자녀를 이렇게 교육한다. “이런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거라. 사실 이들이 꼭 나쁜 사람은 아니다. 어쩌면 거짓 군자보다 나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네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알려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고, 어떤 사람을 부정적으로 봐야 하는지 알려 주고,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하는 법, 처신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너를 교육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르침은 은연중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느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럼 우선 인간이 이른바 소인배와 거짓 군자를 어떻게 보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인간은 진짜 소인배가 꼭 나쁜 사람은 아니며 진정한 거짓 군자야말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뒤에선 나쁜 짓을 하면서 겉으로는 착한 척하는 사람을 거짓 군자라고 하는데, 그는 앞에서는 인의(仁義)와 도덕을 외치면서 뒤에서는 나쁜 짓을 일삼는다. 온갖 나쁜 짓은 다하고 다니면서 온갖 미사여구를 입에 달고 다니니 이런 사람이 혐오의 대상인 것이다. 반면 진짜 소인배는 앞에서나 뒤에서나 한결같이 나쁜데도 혐오의 대상이 아닌 오히려 사람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자 장려의 대상이 된다. 이런 견해와 관점은 한 가지 개념을 헷갈리게 만든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인지 개념이 모호하여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가정 교육을 받으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생각한다. ‘내가 진짜 소인배로 사는 건 정직하다는 말이야. 무슨 일이든 숨김없이 떳떳하게 하고, 할 말 있으면 앞에서 하잖아. 내가 누굴 속이든, 싫어하든, 누구에게서 이득을 보려 하든 그 사람이 알게끔 앞에서 한다고.’ 이것이 무슨 논리이냐? 어떤 본성 본질이겠느냐? 악인이 나쁜 짓을 하고 악행을 하는 것에 이론적 근거를 찾으려 하는 논리인 것이다. “생각해 보세요. 제가 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짓 군자보다는 낫잖아요. 앞에서 대놓고 해서 모두가 알고 있어요. 이런 걸 정직하다고 하는 거예요!”라면서 소인배가 오히려 정직한 사람이 된다. 이런 생각이 사람의 마음속에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진정한 정직과 진정한 사악이라는 두 개념이 모호해져 무엇이 정직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럼 사람은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이든 아니든, 맞는 말이든 아니든, 사리에 맞든 그렇지 않든, 원칙에 맞는 말이든 아니든, 진리에 부합하든 그렇지 않든 거리낌 없이 말하고, 뒷일은 생각지도 않으며, 솔직한 성품, 직설적이고 호방한 사람이기만 하면, 그리고 음흉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않으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시비가 전도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면 부정적인 사물이 모두 긍정적인 것으로 변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이런 말에 따라 보란 듯이 처신하며 ‘어쨌든 내가 당신에게서 이득을 보거나 남몰래 계략을 꾸민 게 아니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한 일이니, 당신 맘대로 생각해. 나는 이렇게 정직하거든! 옛말에 ‘몸이 반듯하면 그림자가 기울어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어. 좋을 대로 생각해!’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탄의 논리가 아니냐? 강도의 논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네가 나쁜 짓을 하고, 억지를 부리며, 제멋대로 굴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악행은 악행이다. 본질이 악행이면 악인 것이다. 무엇으로 판단하겠느냐? 네게 의도가 있는지, 네가 떳떳한지, 네가 진솔한 성품인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진리는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 준칙이니 여기에 적용하는 것이 아주 적합하다. 진리가 악으로 판단하면 그것은 악이고, 긍정적인 사물로 판단하면 그것은 긍정적인 사물이며,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긍정적인 사물이 아닌 것이다. 반면 사람이 생각하는 진솔한 성품이나 직설적인 성격, 정직 따위는 무엇이냐? 그것을 터무니없는 억지, 개념 혼동, 망언이라고 하고, 그것을 바로 사람을 오도한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 사람을 오도한다면 그것은 악행이다. 뒤에서든 앞에서든 악은 악이다. 뒤에서 하는 악은 사악한 것이고, 앞에서 하는 악은 진짜로 악독하고 흉악한 것인데, 모두 악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럼 너희가 대답해 보거라.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말라.”라는 말을 사람이 받아들여야 하겠느냐?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 군자의 행동 원칙과 진짜 소인배의 그것 중 어떤 것이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둘 다 아닙니다.) 그렇다. 모두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니 거짓 군자가 되지도, 진짜 소인배가 되지도 말고 부모의 망언을 듣지도 말아야 한다. 어째서 부모가 늘 망언을 늘어놓겠느냐? 왜냐하면 네 부모가 그렇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항상 ‘난 진솔한 성품의 진짜 사나이야.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의협심이 강하지. 내 몸이 반듯하니 그림자가 기울어도 걱정하지 않아. 품행이 바르고 반듯한데 무서울 게 뭐야? 양심에 찔릴 일은 하지 않으니 귀신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아!’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귀신이 널 찾아오지 않았지만 네 악행이 적지 않으니 언젠가는 징벌을 받을 것이다. 네 몸이 반듯하여 그림자가 기울어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반듯하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진리이냐? 몸이 반듯한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냐? 너는 진리를 깨닫긴 했느냐? 자기가 저지른 악행을 위해 어떤 핑계나 이유를 찾지 마라. 소용없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한 그것은 악이다! 그런데도 자기가 성품이 진솔하다고 생각하는데, 성품이 진솔하면 남에게서 이익을 챙겨도 된다는 것이냐? 성품이 진솔하면 남을 곤경에 빠뜨려도 된다는 것이냐? 이게 무슨 논리이겠느냐? (사탄의 논리입니다.) 이것을 강도의 논리이자 마귀의 논리라고 하는 것이다! 악을 행하고도 당당하게 좋은 결과를 바라고, 좋은 말을 들으려 하는데, 이것이 뻔뻔스러운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한 말씀에 진짜 소인배가 되라거나, 거짓 군자가 되지 말라는 말은 언급된 적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 진짜 소인배나 거짓 군자가 되라는 말 따위의 요구는 없는 것이다. 이런 말은 모두 사람을 기만하고 미혹하는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이 말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을 미혹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너는 진리를 깨달았으니 더 이상 이런 말을 고수하지도 말고 이런 말에 영향받지도 말아야 한다. 거짓 군자든 진짜 소인배이든 모두 마귀이고 짐승이며 머저리로, 좋은 작자가 아닌 사악한 무리이다. 그들은 악과 불가분의 관계로, 사악하지 않으면 흉악한데, 단지 그들의 연기 방식이 다를 뿐이다. 하나는 공개적으로 연기하고, 다른 하나는 은밀하게 연기하는 것이다. 또 그들의 행동 방식이 다르다. 하나는 공개적으로 악을 행하고, 다른 하나는 뒤에서 수작을 부린다. 하나는 비교적 음흉하고 괴상하며, 다른 하나는 비교적 난폭하고 포악하며 횡포하다. 또한 하나는 비교적 옹졸하고 은밀하게 행동하고, 다른 하나는 비열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다. 이는 사탄의 두 가지 행동 방식으로, 하나는 공개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밀한 것이다. 공개적인 경우는 진짜 소인배가 되는 것이고, 은밀한 경우는 거짓 군자가 되는 것인데 자랑할 것이 있겠느냐? 그런데도 너는 그것을 좌우명으로 삼으니 어리석지 않으냐? 그러므로 네가 만약 가정에서 받은 이런 측면의 교육과 주입의 악영향을 깊이 받고 있거나 그것을 고수하고 있다면 너는 그것을 내려놓고 하루속히 분별하고 꿰뚫어 보길 바란다. 더 이상 그 말을 고수하지도 말고, 그 말이 너를 지켜 주고 네가 진정한 사람, 인격과 인성을 갖춘 시원시원한 사람이 되게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것은 처신의 기준이 아니다. 나는 그 말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 말이 나는 아주 역겹다. 거짓 군자뿐만 아니라 진짜 소인배도 역겹다. 이 두 부류의 사람 모두 역겨움의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만약 거짓 군자가 된다면 나는 너를 좋은 작자가 아닌 구제 불능의 대상으로 볼 것이다. 네가 만약 진짜 소인배가 된다면 더 절망적이다. 너는 분명히 참도를 알고 있음에도 일부러 죄를 범했고, 진리를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버젓이 진리를 위배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공개적으로 진리에 맞서니 더 빨리 죽을 것이다. ‘나는 직설적인 성격이라 거짓 군자는 못 하겠어. 소인배이긴 하지만 난 그래도 진짜 소인배야.’라고 생각하지 마라. 진짜는 무슨 진짜란 말이냐? 너의 ‘진짜’는 진리도 아니거니와 긍정적인 사물도 아니다. 너의 ‘진짜’는 교만한 성품과 흉악한 성품의 본질을 드러낸 것이다. 네 ‘진짜’는 진짜 사탄, 진짜 마귀, 진짜 흉악하다는 진짜이지 진리나 진실을 뜻하는 진짜가 아니다. 그러니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말라.”라는 가정에서 받은 교육도 네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처신의 원칙과 접점조차 없을 정도로 아무런 관련도 없기 때문에 너는 하루빨리 그것을 내려놓고 더 이상 고수하지 말아야 한다.

가정에서는 또 한 가지를 교육한다. 예를 들어, 가족은 항상 네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람들 가운데서 너무 출중해선 안 되고,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다. 언행이나 개인의 재능, 역량, 지능 따위를 자제하면서 나서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뾰족한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는 속담이 잘 말해 주잖니. 자기를 지키면서 사람들 속에서 오랫동안 평온하게 지내고 싶으면 네가 모난 돌이 되지 말고 자제해야지 설치면 안 되는 거야. 피뢰침의 경우를 생각해 보거라. 번개가 치면 피뢰침이 먼저 맞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침이 제일 먼저 맞기 마련이다. 태풍이 불면 높은 나무가 먼저 바람을 맞아 피해를 입고, 날씨가 추우면 높은 산이 먼저 얼어붙어. 사람도 마찬가지야. 사람들 가운데 네가 늘 나서서 당의 눈에 띈다면 당이 너를 혼내 줄 생각을 할 거다. 그러니 모난 돌이 되어 혼자 튀려고 하지 말고 돌 더미 속에 머물러 있거라. 그러지 않으면 어떤 사회적 운동이 있을 경우 너 같은 모난 돌을 혼내 주려 할 테니 말이다. 교회에서도 리더나 팀장이 되려 하지 마라. 혹 하나님 집의 어떤 사역에 손실이나 문제가 생기면 우선적으로 리더이자 책임자인 너부터 처분할 것이다. 그러니 모난 돌이 되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기 마련이니까. 너는 거북이처럼 안으로 움츠리는 법을 배워서 머리 숨긴 거북이가 되어야 한다.” 너는 부모의 말을 명심하고 리더를 뽑을 때 리더직을 사양하며 말한다. “아, 전 안 돼요! 제겐 가정이 있고 아이가 있거든요. 저는 가정에 많이 얽매여 있어 리더직을 맡을 수 없어요. 절 찍지 마시고 여러분이 하세요.” 리더로 뽑혀도 맡으려 하지 않는다. “아, 저는 사직해야 할 것 같아요. 리더는 여러분이 하세요. 여러분께 기회를 양보하고 저는 기권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흥,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야. 높은 곳일수록 처참하게 추락하고 추위도 심하다고. 선출되면 큰코다칠 날이 있을 테니 리더는 당신이나 해. 난 리더는 전혀 하고 싶지 않고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높은 곳에서 떨어질 일도 없지. 아무개가 리더가 되었다가 교체된 거 못 봤어? 교체된 다음 제명됐잖아. 평신도가 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졌다고. ‘모난 돌이 정 맞고, 뾰족한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는 말에 딱 들어맞는 경우잖아. 어때? 혼쭐났지? 사람은 스스로 보호하는 법을 배워야 해. 머리는 뒀다 뭐 해? 머리가 있으면 스스로를 지키는 데 써야지. 이걸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사회나 집단이나 마찬가지야.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당신이 나서면 체면이 설지는 몰라도 정을 맞는 순간 깨닫게 될 거다. 사람이 설치면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이야.’ 이는 모두 부모와 가정이 네게 단단히 일렀던 당부이며 그들의 경험담이자 그들의 인생에서 얻어낸 정수이다. 이를 하나도 빠짐없이 네게 조곤조곤 알려 주는 것이다. 조곤조곤 알려 준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어느 날 어머니가 네 귀에 대고 말한다. “엄마 말 잘 들어. 엄마가 평생을 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거야. 사람이 너무 나서기 좋아하고 설치면 혼쭐나기 십상이란다. 네 아빠를 보렴. 왜 지금도 숨죽이고 얌전히 지내시겠니? 예전에 사회 운동 때 억압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야. 네 아빠는 글재주가 있어서 글도 잘 쓰고 언변도 뛰어난 데다 리더로서의 역량도 겸비하고 있었어. 너무 출중했던 거지. 결국 사회 운동에 의해 억압받았지 뭐야. 생각해 보렴. 그 이후로 네 아빠가 왜 공무원이 되거나 얼굴을 내미는 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겠니? 바로 이런 이유가 있어서야. 엄마가 너한테 하는 속 얘기나 진심 어린 말은 꼭 귀담아 듣고 잊지 말고 명심해야 된다. 어딜 가서도 기억해야 해. 이건 엄마가 네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란다.” 그때부터 너는 기억하게 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을 생각하면 곧바로 아버지가 떠오르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바로 이 말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당시 정 맞은 모난 돌이었고 지금 아버지의 불운과 낙담한 모습이 네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그래서 나서려는 생각이 들거나 마음속 얘기를 하고 싶을 때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 집에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싶을 때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고 조곤조곤 얘기하던 엄마의 진심 어린 그 한 마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스스로 움츠러든다. ‘어떤 재능과 특기가 있든 드러내선 안 돼. 참고 견뎌야 해.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도 적당히 취사선택해야지, 무턱대고 뛰어들면 안 돼. 그렇게 무턱대고 나서서 교회 사역을 맡았다가 만에 하나 하나님 집 사역에 무슨 문제라도 생겨서 책임을 물으면 어쩌려고? 내가 어떻게 감당하겠어? 제명당하지 않을까? 내가 희생양이나 모난 돌이 되는 거 아냐? 하나님 집이라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러니 무슨 일이든 살길을 마련해 놔야 돼. 일단 나부터 지키는 법을 꼭 배워야 되는 거야. 일단 자구책부터 최대한 확보해 놓은 상태에서 말을 꺼내고 행동하는 거지. 이것이야말로 현명한 행동이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엄마가 말했잖아.’ 이 말은 그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그의 일상생활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본분 이행에 대한 그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 때문에 본분 이행에 진심으로 헌신하고자 할 때마다, 그리고 성심성의껏 자신의 온 힘을 다 쏟고 싶을 때마다 항상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에 발목 잡혀 결국 자기 살길을 마련해 두고 여지를 남기게 된다. 자기 살길을 마련한 다음에야 본분을 적당히 이행하는 것이다. 어떠냐? 이런 측면에서 받은 가정 교육이 네가 드러나지 않고 처리되지 않도록 최대한 지켜 주느냐? 네게 또 하나의 부적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교제했는데, 사람이 가정 교육으로 받은 부적이 몇 개나 있었느냐? (일곱 개입니다.) 이렇게 많은 부적이 있어서 일반적인 요괴와 마귀가 감히 너를 침해하지 못하는 것이냐? 부적 하나하나는 네가 이토록 안전하고 편안하며 행복하게 이 세상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고, 아울러 네게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에 대한 가정의 보호와 가정이 네게 준 부적이 얼마나 적절하고 중요한지 느끼게 해 준다. 이 부적이 네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너를 보호해 줄 때마다 너는 가정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고 나아가 가정은 영원히 의지할 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려움이 생겨 방황하거나 막막해질 때마다 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볼 것이다. ‘엄마가 뭐랬지? 아빠는 뭐라셨지? 어른들이 내게 어떤 능력을 가르쳐 주셨고 어떤 좌우명을 알려 주셨지?’ 너는 곧 너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가정에서 주입받은 여러가지 생각과 환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너에 대한 그것들의 보호를 찾고 얻고자 한다. 이럴 때 가정은 네게 피난처이자 비빌 언덕이며, 네 뒤에서 영원히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을 든든한 의지처이자 원동력이다. 너를 계속 살아가게 하고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하는 정신적 지주인 것이다. 이때 너는 감회에 젖을 것이다. ‘내게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가정은 내게 막대한 정신력이고 정신적 지주의 근원이지.’ 그리고 너는 늘 스스로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엄마 아빠가 해 준 말을 따라서 다행이야. 그러지 않았으면 지금 난 정말 곤란한 지경에 처해서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몰라. 내게 비장의 무기랑 부적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 덕분에 하나님 집이나 교회에서, 또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난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을 거고, 내가 교회에서 제명당하거나 처리당하는 곤경에 놓일 일도 없을 거야. 가정 교육의 보호로 이런 일은 영원히 나한테 일어나지 않겠지.’ 하지만 너는 잊어버렸다. 네가 줄곧 소위 부적이라는 것과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다 보니 네가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너는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을 소홀히 했고, 피조물이란 너의 신분도 소홀히 했다. 또 네가 피조물로서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소홀히 했으며 네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갖춰야 할 태도와 바쳐야 할 모든 것을 소홀히 한 것이다. 네가 갖춰야 할 진정한 인생관과 가치관은 가정에서 교육받은 관점이 차지했고, 네가 구원받을 기회 역시 네가 받은 가정 교육에 의해 영향받고 좌우되고 있다. 그러니 가정 교육으로 받은 많은 것들을 내려놓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는 반드시 실행해야 할 한 측면의 진리이자 시급히 진입해야 할 하나의 실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사회에서 들은 말이라면 네가 이성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거절할 것이고, 외부인이나 너와 무관한 사람에게서 들은 말이라면 네가 이성적으로 혹은 적당히 걸러 듣겠지만, 가정에서 네게 알려 준 말이라면 너는 주저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분별없이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보이지는 않지만 네게 무척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너는 가정이 한 사람에게 영원히 무해하고, 가정이 네게 하는 모든 것은 너를 위해서, 너를 지키고, 너를 생각해서 하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이 원칙을 바탕으로 사람은 가정이라는 유무형의 것으로 인해 쉽게 시달리고 영향을 받는다. 유형의 것은 가정의 구성원이나 가정에서 생기는 모든 일을 말하고, 무형의 것은 너에 대한 가정의 다방면의 사상 교육에서 비롯된 것과 처신이나 일 처리에 관한 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가정 교육이라는 이 측면의 내용은 무척 많다. 오늘 교제를 마친 이것들에 대해서 너희가 묵상하면서 정리해 보고, 오늘 내가 말한 것 외에 또 어떤 생각과 관점들이 너희의 일상생활에서 악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보아라. 우리가 앞서 교제한 것의 대부분은 처세의 원칙과 방식에 해당되는 것이고, 소수의 나머지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것에 해당되는 주제이다. 사람에 대한 가정 교육의 범위에 해당되는 내용은 거의 이런 것들이며, 사람의 인생관이나 처세 방식에 해당되지 않는 일부 문제들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고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자.

2023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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