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2) 제 2 부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이 방금 말씀하신 가정들은 모두 부모가 농민이나 소상인, 청소부, 허드렛일이나 해 주는 사람이에요. 이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으니 내려놓는 게 당연하죠. ‘사람은 높은 곳으로 가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이 있잖아요. 사람은 높은 곳을 보면서 높은 곳으로 가야 해요. 이렇게 낮은 것들을 보면 안 되는 거죠. 예를 들어, 누가 농민이나 장사꾼이 되고 싶겠어요? 사람들은 모두 큰돈을 벌고 높은 관직에 오르고 싶어 해요. 사회적으로 지위를 가지고 출세 가도에 오르고 싶어 하는 거죠. 어려서부터 농민을 꿈꾸며 농사를 잘 지어 먹을 것만 충분하면 된다고, 그걸로 일생에 출세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런 가정이 사람의 신분에 부여하는 것은 수치나 불공평한 대우이기 때문에 사람은 내려놓아야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냐? (아닙니다.)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형편이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가정은 생활 환경이 좋고 사회적 지위도 높다. 그에게 주어진 신분과 사회적 지위는 존귀하여 어디서든 중시받는다. 가정에서 그는 부모와 어른들로부터 금지옥엽으로 자라나고 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특별하고 고귀한 가정 배경 덕에 학교나 선생님, 학급 친구들로부터 중시받고 아무도 그를 깔보지 못한다. 선생님은 상냥한 태도나 세심한 말로 그를 대하고, 학급 친구들 역시 그를 무척 존중한다. 우월한 가정 환경과 존귀한 가정 배경 덕분에 사회에 진출해서도 그의 신분은 고귀하고 존중을 받으니 그는 우월감이 들고 자신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존귀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집단에서든 자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감정은 고려할 필요 없이 자신 있게 말하며 무슨 일이든 거리낌 없이 한다. 남들이 보기에 품위와 기품이 있고, 말이며 생각이며 행동이 과감하다.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가정 배경의 강력한 지지 덕분에 귀인의 도움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린다. 일이 잘 풀릴수록 우월감은 강해지니 어디서든 거드름을 피우고, 잘나야 하며, 남들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먹는 것도 양이 많은 걸로 가져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화를 낸다. 형제자매와 함께 생활할 때는 채광이 좋고 난방기에서 가까우며 공기가 좋은 명당자리를 독차지하려 한다. 이것이 우월감이 든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돈을 잘 버는 부모를 둔 사람도, 공무원 부모를 둔 사람도, 고연봉직 부모를 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가정 경제 조건이 무척 풍족하고 유복하여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으니 그런 사람은 무척 우월감을 갖는다. 입고 싶은 대로 입을 수 있으니, 유행하면 입고 유행이 지나면 버린다. 먹고 싶은 게 있을 때는 말만 하면 대령하니 걱정이 전혀 없다. 우월감이 대단한 것이다. 이런 우월한 가정이 그에게 부여하는 신분은 은연중 사람들의 눈에 여자는 공주, 남자는 귀공자로 비쳐진다. 이 가정이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고귀한 신분과 사회적 지위이다. 이런 가정이 그에게 주는 것은 수치가 아닌 영예이니 어떤 환경에서든 어떤 집단에서든 그는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저희 부모님이 재력가라서 집에 돈이 많아요. 쓰고 싶을 땐 언제든 쓸 수 있죠. 따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어요.”, “저희 부모님은 고위 관직에 계셔서 저는 어디서든 말 한마디면 일을 처리할 수 있어요. 정식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죠. 여러분은 일을 처리하려면 얼마나 피곤해요. 절차도 밟고, 기다려야 되고, 여기저기 부탁해야 되잖아요? 저는 말이죠, 부모님 쪽 사람한테 인사만 하면 일이 처리돼요. 이게 얼마나 대단한 신분이고 사회적 지위겠어요!” 우월감을 갖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우리 부모님은 사회적으로 유명 인사예요. 진짜인지는 인터넷에서 우리 부모님 이름을 검색해 보면 아실 거예요.” 사람들이 검색해서 사실임을 알게 되면 그는 우월감을 느낀다. 어디서든 사람들이 “당신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라고 물어보면 “제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 부모님이 아무개시거든요.”라며 부모의 이름을 먼저 밝혀서 자기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알린다.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한다. ‘당신네 집은 지위가 있고 부모님은 관직에 계시거나 유명 인사거나 재력가시니 당신은 정계나 재계의 2세인데 나는 뭐지?’ 그렇게 고심하다가 말한다. “우리 부모님은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노동자에 평범한 월급쟁이라 내세울 만한 것도 없어요. 하지만 제 조상님은 어떤 왕조 때 재상을 맡은 적이 있죠.” 그럼 누군가 말한다. “당신의 조상님이 재상을 맡은 적이 있다고요? 아, 당신은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네요. 재상의 후대시잖아요. 재상의 후대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죠. 이 역시 명사의 후대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떻게든 유명인과 얽히면 사람의 신분이 특별해지고, 사회적 지위도 단숨에 상승해 사람들에게 존중받는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희 조상님은 한때 거상이셨어요. 그 일대의 제일가는 부자셨죠. 후에 사회와 제도가 변하면서 재산이 국유화되었어요. 지금 주변 수십 리에 사는 많은 사람의 집이 원래는 모두 저희 조상님의 집이었답니다. 옛날 저희 집은 방이 사오백 개는 안 되어도 이삼백 개는 되었고 부리는 사람만 어림잡아 수백 명이었어요. 저희 할아버지가 주인이라 일 한 번 하지 않으시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부리셨어요. 할머니도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으셨지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옷 입고 씻을 때도 하인들이 시중을 들었어요. 시간이 흘러 사회 환경이 변하면서 집안이 몰락해 더 이상 귀족이 아닌 평민이 되었어요. 예전에 저희 집안은 워낙 크고 명망도 높아서 마을 전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저는 이런 집 출신입니다. 어때요? 평범하지 않죠? 절 우러러봐야 되지 않겠어요?” 또 어떤 사람이 말한다. “당신 조상이 근방 제일가는 부자라는 건 대단한 게 아녜요. 저희 조상은 황제였다고요. 그것도 건국 황제말입니다. 듣기로는 저희 성씨가 그로부터 전해졌다고 해요. 그것도 방계가 아닌 직계로 말이죠. 어때요? 저희 조상님의 배경을 듣고 나니 제가 달리 보이지 않나요? 저를 상당히 존중해야 하지 않겠어요?”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희 집 조상님은 황제를 한 적은 없지만 장군이었던 조상님은 계십니다. 적군을 수없이 물리쳐 전공을 셀 수도 없이 세우신 조정의 중신이었어요. 우리가 바로 그의 직계 후손입니다. 저희 가족은 지금까지도 조상님이 남기신 무공 동작을 배우고 있어요. 외부에는 비밀로 하면서 말이에요. 어때요? 특별한 신분 아닌가요? 존귀한 지위죠?” 이렇게 소위 아득한 조상의 가정과 현대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특별한 신분은 사람에게 영예이자 영광이고 사람은 그것을 수시로 끄집어내어 들먹이고 자랑한다. 자신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서 말이다. 이는 자기 신분과 지위의 특별함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더 높은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여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가치를 비범하고 특별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비범하고 특별하게 만드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존중과 동경, 앙모와 우러름을 받아 더 쾌적하고 자유로우며 존엄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일부 특수한 상황에서,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아무런 존재감을 찾지 못하고 남들에게 존중과 우러름을 받지 못한다. 그러니 기회를 보고 수시로 자신의 특별한 신분이나 가정 배경을 이용해 존재감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 그가 평범하지 않음을 알리고, 남들에게 중시받고 존중받음으로써 사람들 가운데서 위신을 세우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제 신분, 지위, 자질만 보고 평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저희 조상님이 명나라 왕작 가문에서 책사를 하셨습니다. 혹시 아무개라고 아시나요? 그분이 바로 제 증조부의 조부가 되시는 저희 조상이십니다. 왕작 가문의 핵심 책사로 계실 적에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에 해박하고 고금과 대내외 사정에 능통하며 점술에 능해 사람들에게 ‘지다성(智多星)’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분이 사용하던 나침반이 아직까지도 저희 집에 보관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지금은 자주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자기 조상의 눈부신 역사를 수시로 끄집어내어 일장 연설을 하는데 그 말의 진위는 알 수 없다. 과장된 부분도 있을 것이고 사실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신분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사람 가운데서 사람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사람 가운데서 받는 대우, 사람 가운데 놓이는 처지와 계급을 결정한다. 이렇게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신분에서 비롯된 것들을 사람 가운데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영예롭고’ ‘찬란한’ 가족사는 수시로 끄집어내어 과시하지만, 떳떳하지 못하거나 무시당하고 괄시받는 가정 배경이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은 자꾸 회피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신분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사람은 특별한 일을 경험할 때 늘 자신의 특별한 가정 신분을 자격, 혹은 자신을 과시할 이유로 삼고는 사람들에게서 높이 평가받고 사람들 가운데서의 지위를 얻으려 한다. 한 가정이 네게 부여한 것이 영광이든 수치이든 네게 부여한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고귀하든 비천하든, 네게 가정이란 그 정도가 고작이다. 그것은 결코 네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지, 진리를 추구할 수 있을지 결정하지 못하고, 네가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지도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니 사람은 그것을 중요한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이 한 사람의 운명이나 미래는 물론 더욱이 한 사람이 걷는 길을 결정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가정이 네게 부여하는 신분은 사람들 가운데서의 네 감정이나 느낌만을 결정할 뿐이다. 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볼품없든 자랑스럽든 그것이 네가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지를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서 가정이 네게 어떤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설령 그것이 네게 부여한 신분으로 인해 네가 우월감을 갖거나 영예롭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 혹여 그것으로 인해 네가 느끼는 감정이 수치나 비천함, 열등감일지라도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피조물의 신분에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하나님이 보기에 모든 사람에게는 동일한 구원의 기회와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할 동등한 지위와 신분이 주어진다. 한 가정이 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신분이 영예롭든, 수치스럽든 그것이 네 인성을 결정하지 않으며, 네가 걷는 길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네가 만약 그것을 중요시하고 네 인생과 생명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긴다면 너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손에 꼭 쥐고는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다. 만약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고귀하다면 너는 그것을 하나의 밑천으로 생각할 것이고,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비천하다면 너는 그것을 수치로 여길 것이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고귀하여 영예롭든, 아니면 수치스럽든, 이는 모두 네 개인적인 이해로, 네가 패괴 인성의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본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 이해일 뿐으로,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네 진리 추구를 위한 밑천이 아니며 네 진리 추구의 장애물도 물론 아니다. 네 사회적 지위의 존귀함과 높은 계급은 네 구원의 밑천이 아니며, 네 사회적 지위의 비천함과 미천함 역시 네 진리 추구의 장애물, 더 나아가 네가 구원을 추구하는 데 장애물은 더더욱 아니다. 가정의 환경과 배경이 어떻든, 삶의 질이나 여건이 어떻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진정한 신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출신 가정이 어떻든, 가정 배경이 눈부시든 보잘것없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는 피조물이다. 설령 네 가정 배경이 눈부셔서 네 신분과 지위가 존귀할지라도 너는 피조물이고, 네 가정 지위가 비천하여 무시당할지라도 하나님 눈에는 여전히 평범한 피조물이다. 특별할 게 없는 것이다. 가정의 배경은 사람에게 저마다 다른 성장 환경을 제공하고, 서로 다른 가정생활 환경은 사람이 물질과 세계, 삶을 바라보는 저마다 다른 관점을 갖게 한다. 생활이 넉넉하거나 곤궁한 것, 가정 여건이 우월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은 각 사람에게 있어 그저 서로 다른 체험에 불과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빈곤하거나 가정의 생활 여건이 평범한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삶에 대한 더욱 깊은 체험이지만 생활이 넉넉하고 가정 여건이 무척 우월한 사람은 이런 점을 체험하기가 어렵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어떤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든, 그 가정 환경이 네게 어떠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든 네가 하나님 앞으로 나올 때, 네가 하나님께 하나의 피조물로 인정받고 받아들여질 때 하나님 눈에 너는 다른 사람과 똑같고 다른 사람과 평등하다. 그 어떤 특별함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똑같은 방식과 요구 기준으로 네게 요구한다. 네가 “제 사회적 지위는 특별합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특별합니다’는 부분을 빼 버려야 하고, 네가 “제 사회적 지위는 보잘것없습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없습니다’는 부분을 빼 버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가정이 네게 부여하는 신분이라는 일에서 벗어나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네게 준 피조물의 신분을 받아들여서 피조물의 신분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한다. 네 가정이 좋고, 네 신분이 고귀하다고 해서 네가 자랑할 것이 아니고 남보다 고귀하지도 않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하나님 눈에 피조물인 이상, 너는 패괴 성품으로 가득하고 하나님이 구원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비천하거나 미천해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네게 부여한 피조물의 신분을 받아들여야 하며 피조물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저희 가정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 보니 제 신분도 낮아서 사람들이 무시합니다.”라고 말해도 하나님은 상관없다고 할 것이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너는 더 이상 가정이 네게 준 신분으로 나아온 사람이 아닌 것이다. 지금 네 신분은 피조물이며 네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하나님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 가정 배경이 어떤지, 네 신분이 어떤지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눈에 너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사탄의 패괴를 거친 패괴된 인류 중 하나이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니 하나님이 구원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네가 정계나 재계의 2세인지, 귀공자나 공주인지, 농민이나 평범한 사람의 자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예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대상은 너라는 사람이며 네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지 네 신분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 패괴 성품은 네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네 가치 역시 네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네 패괴 성품은 네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려는 것 역시 네 지위가 비천해서가 아니며 더욱이 네 지위가 존귀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경영 때문에, 네가 사탄의 패괴를 겪은 패괴된 인류 중 한 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를 택한 것이다. 네 가정이 네게 어떤 신분을 부여했든, 하나님 앞에서 너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탄의 패괴를 겪은, 패괴 성품을 가진 인류 중 한 명이니 특별할 게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만약 사람들 중 또 누군가 “전 현장(縣長)이었어요.”, “전 성장(省長)이었습니다.”, 아니면 “저희 조상이 황제였습니다.”, “전 의원을 했었습니다.”, “전 대통령 후보였습니다.”, “전 대기업 총수였습니다.”, “전 공기업 사장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리 대단할 것이 있겠느냐? 네가 사장이나 장관이었다 한들 그것이 중요하겠느냐? 이 세상, 이 사회는 사람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매우 중요시하여 사람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너를 어떻게 대할지를 결정하지만 여기는 하나님 집이다. 하나님은 네게 그런 눈부신 이력이 있다고 해서, 찬란하고 영예로운 신분을 가졌었다고 해서 다른 시선으로 너를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은 네게 진리를 추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네가 너의 자격과 사회적 지위, 사회적 가치를 내세운다고 소용이 있겠느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남들과 비교할 것이다. 분량이 없고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일부 초신자들은 사회나 가정에서의 일을 가지고 남들과 자주 비교하지만 믿음에 기초가 있고 분량도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런 말이나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족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밑천으로 여기는 것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렇게 많이 교제했는데 가정이 네게 부여하는 신분과 관련한 일이 이해가 되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말해 보거라. (하나님, 제가 한 가지 말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종종 자신이 태어난 가정이나 그 가정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가정에서 태어나면 사람은 속으로 열등감에 젖어 자신의 출신이 비천하다는 생각에 사회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좋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노력합니다. 신분과 지위가 상대적으로 괜찮은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비교적 교만하여 자기를 드러내기를 즐기고 태생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신분과 지위는 모두 피조물로 똑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신분과 지위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할 수 있을지, 구원받을 수 있을지를 결정할 수 없기에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로 자신을 통제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훌륭하구나.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많이 따지기 때문에 일부 특수한 상황에서 그들은 “교회에서 누구누구는 있는 집안 사람들이랍니다!”라고 떠든다. ‘있는 집안’을 언급할 때 그는 눈을 번뜩이면서 극도의 부러움과 질투의 마음을 내비친다. 속으로 얼마나 오래 부러워했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부러웠는지 침을 흘리는 줄도 모를 지경이다. “아, 누구누구 중, 아무개 아버님은 고위 간부고, 어떤 분은 현장, 어떤 분은 시장, 또 어떤 분은 정부 부처의 비서랍니다!” 좋은 옷을 입고 꾸밀 줄 알며 품위나 식견이 있고 쓰는 물건도 명품이면 속으로 부러워한다. ‘있는 집안 사람인가 보네. 고정 자산만 수십 억이겠지.’라고 감탄하면서 대단히 부러워하는 것이다. 아무개가 기업체 사장이라고 하면 당사자보다도 그 일에 신경을 더 쓴다.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매번 그 얘기를 꺼내고, 심지어 교회 리더를 선출할 때에도 그를 뽑는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 그는 특별한 감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에게 접근하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며 자기 신세를 한탄한다.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관직 한 번 못 하셨을까? 난 어째서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거지? 어째서 우리 집 얘기는 입에 담지도 못하는 걸까? 사람들이 태어난 가정을 보면 다들 관료 집안 아니면 자산가 집안이잖아. 근데 우리 집은 정말 아무것도 없어. 형제자매 모두 평범하기 그지없어. 농사짓는 농민이라 사회 하층민이고.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지. 교육 수준이랄 것도 없으니까. 정말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어!’ 부모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말을 돌린다. “그런 것보다는 우리 다른 얘기 해요. 교회의 아무개 씨 있잖아요? 사장님이셨다는 분 말이에요. 역량이 탁월했나 봐요. 임직하고 몇십 년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었대요. 관운을 타고난 거죠. 전 어림도 없어요. 그분이 이제 하나님까지 믿으니 금상첨화 아닌가요? 정말 복 있는 분이에요. 사회에선 없는 게 없었고, 하나님 집에 오고 나서는 하나님나라에까지 들어가서 아름다운 종착지도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는 관직에 있던 사람이 하나님 집에 오면 교회 리더가 되어야 하고 아름다운 종착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누가 결정하는 것이냐? 그가 결정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딱 봐도 불신파의 말이다. 어느 정도 역량 있고 실력 있으며, 잘 입고 잘 살며, 좋은 차를 몰고 큰 집에 사는 사람이 보이면 어김없이 접근해서 아부하며 비위를 맞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집에 와서 특권화를 꾀하려 한다. 형제자매에게 거들먹거리면서 노예처럼 대하는데 공직자의 직업병인 것이다. 형제자매가 네 부하냐? 교회 리더를 선출할 때 그가 선출되지 않으면 그는 화를 내며 말한다. “안 믿을래요. 하나님 집은 불공평해요. 기회도 주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다니요!” 세상에서 공직자였던 것이 습관이 되어 자기가 특출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집에 와서도 늘 자기가 결정권을 잡으려 한다. 무슨 일에든 나서려 하고 특권화를 꾀하려는데, 하나님 집을 세상으로 여기고 사회로 여긴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관료 아내인데 하나님 집에 와서도 사모님처럼 굴고 싶어서 사람들이 자기를 대우해 주고 자기를 중심으로 돌기를 바란다. 예배 시간에 형제자매가 인사를 소홀히 하면 화가 나서 다음 예배에는 불참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경 쓰지 않으니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회에서 네 신분이 얼마나 특별하든 하나님 집에 오면 그 신분은 모두 사라진다. 하나님 앞에서, 진리 앞에서 사람에겐 오직 한 가지 신분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피조물이다. 세상에서 네가 고위 공직자였든 공직자 아내였든, 사회에서 엘리트였든 말단이었든, 장군이었든 사병이었든, 하나님 집에서 너는 피조물이라는 오직 하나의 신분만을 가질 뿐이다. 달리 특별한 것이 없으니 특권화를 꾀하지도, 개인을 우상화하지도 말아야 한다. 또한 특수한 기독교 가정이나 대대로 주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어머니는 신학대학에 다녔고, 아버지는 목사인 터라 종교계에서 평판이 좋고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그는 자신을 예전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이다! 꿈은 무슨 꿈이냐,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네가 목사이든 리더이든 하나님 집에 왔으면 하나님 집의 규칙을 알고 신분을 전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너는 고위 공직자나 말단 사원도 아니고, 자산가나 빈털터리도 아니다. 하나님 집에 오면 너는 단 하나의 신분만을 갖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준 피조물이라는 신분이다. 피조물은 무엇을 해야 하겠느냐? 자기 집안의 내력을 자랑하는 것도, 가족이 네게 부여한 사회적 지위를 자랑하는 것도, 나아가 네 우월한 사회적 지위로 하나님 집에서 날뛰면서 특권화를 꾀하는 것도, 사회에서 쌓은 경험이나 사회적 지위를 통해 얻은 우월감으로 하나님 집에서 왕 노릇하며 결정권을 잡으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 집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착실하게 처신하라는 것이다. 네 가정 배경을 언급하지 말고,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갖지도 말아야 한다.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우월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요컨대 피조물로서 해야 할 일을 착실하게 하고, 피조물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게 바로 용도 웅크려야 하고, 호랑이도 엎드려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다. 너는 웅크릴 필요도, 엎드릴 필요도 없다. 굽실거릴 필요도, 나아가 우쭐거릴 필요도 없고 네가 굳이 나설 필요도 없으며, 가식을 떨거나 참고 양보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고 그 방식도 공정하다. 하나님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많은 말씀을 하고 많은 것을 요구했는데, 궁극적으로 네게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피조물이 해야 할 모든 일을 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가정이 사람에게 신분을 부여하는 일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할 것을 요구한다. 가정의 우월감을 과시하지 말고, 노골적이고 공개적으로 본인의 가정 형편이 얼마나 안 좋은지 모두에게 털어놓을 필요도 물론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럼 하나님 집에서는 ‘영웅은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를 요구하는 건가요?” 이 말이 진리더냐? (아닙니다.) 이 말은 진리가 아니다. 그러니 너는 어떤 일도 이 말에 따라 평가할 필요가 없으며 이 말을 준칙으로 해서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지킬 필요도 없다. 가정이 사람에게 신분을 부여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네 본분을 이행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네 유일한 신분은 피조물이니 너는 제대로 된 피조물이 되는 것에 영향을 주거나 그렇게 되는 것을 막아서는 것을 마음속에 담아 두거나 너무 중요시하지 말고 내려놓아야 한다. 형식 면에서든 태도 면에서든 너는 가정이 네게 부여하는 신분을 내려놓아야 한다. 어떠냐?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가정이 네게 영예로운 신분을 주었을 수도 있고 가정의 배경이 네 신분에 그늘을 드리웠을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이를 진지하고 엄숙하게 대하길 바란다. 그런 다음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이런 일들이 네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에 영향을 주거나 일을 처리하고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너의 정확한 원칙에 영향을 줄 때, 네가 가정으로부터 부여받은 신분의 영향을 받지 않고 모든 사람을 정확하게 대하며, 모든 일을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본분을 늘 건성으로 이행하고 교란한다면, 너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느냐? ‘그녀를 책망해야겠다. 책망하지 않으면 그녀는 교회 사역에 영향을 줄 거야.’ 너는 고민 끝에 그녀를 책망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수긍하지 않고 구구절절 핑계를 늘어놓는다. 그래도 너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교제하고 책망한다. 그녀가 말한다. “당신 내가 누군지 몰라요?” “당신이 누구든 저와 무슨 상관이죠?” 그녀가 말한다. “당신 남편의 상사가 제 남편이에요. 오늘 절 힘들게 굴면 남편분이 곤란해질 텐데요.” 너는 말한다. “이건 하나님 집의 사역입니다. 당신이 제대로 하지 않고 늘 교란한다면 당신 본분을 교체하겠어요.” 그녀가 말한다. “어쨌든 저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어떻게 할지는 알아서 하세요!” 알아서 하라는 게 무슨 의미냐? 자기를 감히 교체하면 네 남편을 해고하겠다고 통보하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고민할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는가 보네. 어쩐지 평소 말투가 오만방자하다 했어.’ 그런 다음 말투를 바꿔 말한다. “그럼 이번은 그냥 넘어갈게요. 대신 다음에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별다른 뜻은 없었어요. 다 교회 사역 때문에 그러는 거죠.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형제자매고 한 가족이잖아요. 아시다시피 제가 교회 리더인데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되겠어요? 제가 책임지지 않는다면 여러분도 저를 뽑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나요?” 말이 두리뭉실해진다. 여기에 원칙이 있겠느냐? 마음속의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져 원칙을 감히 지키지 못하고 몸을 사리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녀의 사정을 봐주게 된 것이다. 너는 네 신분이 그녀의 신분만큼 고귀하지 않고 그녀의 사회적 지위가 너보다 높은 것이 부끄러운 나머지 그녀에게 통제받고 그녀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협박을 받을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너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너는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지 못할 것이며, 너는 하나님 앞에서 충성심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에게 충성심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너를 열납하고 신뢰하겠느냐? 그리고 중요한 사역을 네게 맡기겠느냐? 너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다. 중요한 순간 너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지켰기 때문이다. 중요한 순간 너는 사회와 사탄에게서 비롯된 사악한 세력이 두려워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 버리고 굳게 서지 못한 것이다. 이는 심각한 과오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한 기호이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너는 그 일을 할 때 피조물의 신분에 반하는 일을 했으며,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원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너는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신분의 영향을 받아 그 일을 처리했다. 모든 일 앞에서 네가 가정으로부터 부여받은 신분이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너는 일이 생겼을 때 너도 생각지 못한 일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은 한편으로는 네가 진리를 어기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를 혼란하게 하여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 것이다. 이는 자신에게 과오와 아쉬움을 초래하기 쉬워 하나님 앞에 오점을 남김으로써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일깨워 준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원칙을 위배하게 된다. 이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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