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1) 제 3 부

방금까지 ‘사람은 결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를 교제하면서 결혼에 대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즉, 일부 사람들이 결혼 생활은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면서 결혼의 해체와 종결을 최대한 막으려고 하며 이 목적을 위해 저자세를 취하고, 차라리 자신의 수많은 긍정적 추구를 희생해서라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 하고 기꺼이 결혼의 노예가 되려 하는데, 이 관점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의 존재와 결혼의 정의를 잘못 해석하고, 결혼에 대해 그릇된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 이 측면의 잘못된 사상 관점을 내려놓고 그 기형적인 결혼 생활 상황에서 빠져나와 결혼 생활을 올바르게 대하고, 결혼 생활에서 생긴 문제들을 바르게 처리해야 한다. 이것이 결혼에서 사람이 내려놓아야 할 세 번째 측면의 문제다. 이제 결혼에 관한 네 번째 측면의 문제를 교제하겠는데, 그건 바로 ‘결혼은 너의 종착지가 아니다’는 문제다. 우리가 교제하는 주제인 이상, 그 주제는 결혼의 현주소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문제이자 여러 가지 결혼 상황에 존재하는 문제이고, 또한 사람이 결혼을 대할 때 갖는 일종의 태도 혹은 생활의 현주소이다. 따라서 이 주제 역시 자세히 교제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하면, 여자의 경우 이렇게 생각한다. ‘마음에 드는 낭군을 찾았어. 이 사람은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고, 내 인생에서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 거야. 누군가 의지해야 할 때 이 사람이 든든하고 기댈 만한 어깨를 내어 줄 거야.’ 남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았군. ‘아름답고 대범하고’, ‘상냥하고 다정하고’,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하고’, 이해심도 많아. 이 사람 덕분에 나도 안정적인 생활이 생기고 마음 편하고 따뜻한 가정도 생겼어.’ 사람이 결혼하면 자신이 행운을 만났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결혼하면 상대는 본인이 선택한 미래 생활의 상징이고, 당연히 자신의 결혼도 이번 생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종착지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이게 무슨 뜻이냐? 사람들은 누구나 결혼하면서부터 결혼을 본인의 종착지라고 여기며, 자신이 맞이한 이 결혼이 바로 자신의 종착지라고 믿는다는 말이다. 종착지가 무슨 뜻이냐? 바로 자신의 도착점이란 뜻이다. 자신의 앞날, 자신의 미래, 자신의 행복을 모두 이 결혼에 기탁하고, 자신과 결혼한 배우자에게 기탁하기 때문에 그들은 결혼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이미 종착지가 생겼고, 종착지는 바로 그 사람이자 그 사람과 함께 이룬 가정이며, 종착지가 생긴 이상 더 이상 어떤 추구와 바람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 결혼에 대해 가지는 태도와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은 결혼 구조의 안정에 유익하다. 적어도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결혼 생활의 반려자로 삼을 고정적인 이성이 생겼으므로 그는 더 이상 바람을 피우거나 다른 이성과 애매한 관계에 놓이는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대부분의 결혼 당사자에게 유익해 최소한 남녀 문제에 있어서 마음이 안정되고, 고정적인 이성에 끌리고 고정적인 이성 반려자에 의해 기본 생활 환경이 고정된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 결혼한 다음부터 결혼을 자신의 종착지로 생각하는 대신 자신의 모든 추구, 자신의 인생관과 인생길, 그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별도의 일, 여가 시간에 하는 일로 치부한다면, 어느 틈에 ‘결혼은 사람의 종착지’라는 이 사실은 좋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올바른 인생 목표를 추구하고 올바른 인생관을 수립하고, 나아가 구원을 추구하는 데 걸림돌, 장애물이 되고, 방해가 되고 말 것이다. 결혼한 사람이 그 배우자를 바로 자신의 종착지이자 일생의 숙명으로 여길 경우, 그는 배우자의 희로애락, 배우자의 행불행이 자신과 관계가 있고, 자신의 행불행, 희로애락 역시 배우자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배우자의 삶과 죽음, 행복과 즐거움이 자신의 삶과 죽음, 행복과 즐거움과 관계되고 하나로 연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 결혼이 내 인생의 종착지라는 이런 생각은, 그들이 인생길을 추구하고, 긍정적 사물을 추구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일에서 더디고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든다. 즉, 결혼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르는데 그 배우자가 하나님을 따르는 쪽이 아닌 세상을 추구하는 쪽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을 따르는 쪽은 배우자로부터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보자. 한쪽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일을 내려놓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헌신하고, 봉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한쪽은 이런 관점이다. ‘하나님 믿는 것은 좋지만 생활도 해야 하는데, 둘 다 본분을 이행하면 돈은 누가 벌지? 식구들은 누가 먹여 살리지? 이 가정생활은 누가 유지하지?’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일을 하고 세상을 추구하면서, 딱히 하나님을 안 믿겠다고도, 반대한다고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 쪽에서는 이런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내 배우자가 바로 내 종착지야. 저 사람이 잘돼야 나도 잘되고, 저 사람이 안되면 나도 잘될 수가 없어. 우리 둘은 한배를 탔으니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그가 가는 곳은 나도 따라가야 해. 지금 우리는 길을 선택하는 문제에서 의견이 갈리고 불협화음이 발생했는데, 어떻게 조정해야 하나? 난 하나님을 따르고 싶은데 그이는 하나님 믿는 일엔 관심이 없어. 그이가 안 믿으면 나도 제대로 믿을 수 없고, 하나님 따를 마음도 사라질 거야. 처음부터 난 그이를 내 하늘, 내 운명으로 여겨 와서 헤어질 수가 없어. 안 믿으면 둘 다 안 믿는 거고, 믿으면 둘 다 믿어야지. 그이가 안 믿으면 마치 내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뭔가 허전하단 말이지.’ 그녀는 하루 종일 그 일로 걱정되고 고민돼서 상대도 하나님을 믿기를 바라며 계속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어떡해야 좋을지 몰라 속이 탔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 배우자가 시간이 나서 집에 있을 때, 옆에 앉히고 하나님 말씀을 읽었다. 상대는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 반감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교제하지도 않았다. 그저 부부이기 때문에 아내를 반박하지 않을 뿐이었다. 찬양을 배우라면 따라서 배우긴 하는데, 배운 다음에는 제대로 배웠는지, 마음에 들었는지 피드백도 없다. 예배드리라고 하면 어쩌다 한가할 때 같이 드리긴 하지만 평소에는 일하고 돈 버느라 바빠서 하나님 믿는 일은 언급조차 없고, 먼저 나서서 예배드리고 본분을 이행하자고 한 적도 없다. 어쨌든 뜨뜻미지근하고, 하나님 믿는 일에 반대하지도, 지지하지도 않았는데 태도가 불분명했다. 하나님 믿는 쪽은 속으로 늘 이 일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이와 부부이고 우리 둘이 한 가족이니까 내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면 그 사람도 꼭 들어가야 해. 그이가 같이 믿지 않아서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다면 나도 살고 싶지 않고 죽고 싶을 거야.’ 비록 지금은 죽지 못하지만 속으로 늘 이것 때문에 고민하고, 고통받고, 속을 끓였다. ‘만약 어느 날 재난이 닥쳐서 그이가 재난 속에서 죽는다면 나는 어떡해야 하나? 지금 전염병이 이렇게 심각한데 그이가 만약 전염병에 옮으면 나도 살 생각이 없어. 지금은 반대한다는 말이 없지만, 언젠가 정말 나한테 하나님 믿지 말라고 하면 난 어떡해야 하나?’ 그녀는 자기도 그때가 되면 상대를 따라 하나님을 안 믿고 배반하는 길을 택하게 될까 걱정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배우자는 자신의 영혼이자 생명, 나아가 자신의 하늘, 자신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 마음속에는 배우자가 그녀를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고, 그녀 역시 상대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난관에 봉착했다. ‘남편이 만약 내가 하나님 믿는 걸 반대하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으면 어떡하지?’ 그녀는 항상 이 일이 걱정이었다. 외지로 나가 본분을 이행해야 할 때, 그녀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본분을 이행하려면 멀리 나가야 해서 집을 오래 떠나 있어야 한다는 말에 그녀는 속으로 울고 심지어 피눈물을 흘렸다. 왜 그랬겠느냐? 자기가 집을 떠나면 배우자를 돌봐 줄 사람이 없는 게 걱정이었고, 자기가 배우자를 보고 싶어 하고 내려놓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그를 염려하고 그리워하며 심지어 그가 곁에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삶의 희망, 삶의 방향을 상실하고, 본분 이행에도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 이렇게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픈데, 그 일이 자기에게 정말로 일어나면 어떨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다른 곳에 가서 본분을 이행하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또한 장시간 외출하거나 밖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사역이 있으면 그 사역을 하겠다고 차마 나서지 못하고, 그런 요구에 차마 승낙할 수가 없었다. 그저 힘닿는 대로 형제자매를 도와 편지를 전달하거나 가끔 형제자매들이 자기 집에 와서 예배드리도록 접대할 뿐, 자기 배우자와 하루 종일 떨어져 있는 일은 엄두도 못 냈다. 정말 특별한 일이라도 있으면, 이를테면 배우자가 출장을 간다든가 며칠 외출이라도 하려 하면 2, 3일 전부터 집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야 한다. 왜 울겠느냐? ‘남편이 비행기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서 시신도 못 찾으면 어쩌나? 나는 어떻게 살지? 어떻게 먹고살지? 내 하늘이 없어지는 건 마음을 도둑맞은 거나 마찬가지야.’ 생각만 해도 무섭다. 그래서 생각만 했다 하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배우자는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2, 3일째 울기만 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올 때까지도 울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상대는 짜증이 났다. “무슨 사람이 저래?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저렇게 울고 있으면 이건 나보고 죽으라고 저주하는 거 아냐?” 그래도 방법이 없다. 그녀는 계속 울면서 말한다.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내 시야에서 떠나는 게 싫어요.” 그녀는 자신의 운명과 종착지를 자기와 결혼한 배우자에게 걸었다. 이런 행동이 미련하든 유치하든, 어쨌든 이런 사람은 있다. 이런 사람은 남자가 많으냐, 여자가 많으냐? (여자가 많습니다.) 여자가 많은 것 같다. 여자들은 좀 겁이 많다. 남자가 여자를 떠나든, 여자가 남자를 떠나든, 생활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누가 누굴 떠나든, 그것은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냐? 네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냐? (통제할 수 없습니다.) 통제할 수 없다. 그러면 네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울고, 속상해하고, 마음 졸이고, 괴로워하는 것이 소용이 있느냐? (소용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를 바라보며, 또 상대의 손을 잡은 채 상대와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어 평생 의지할 존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안정제를 먹은 것처럼 말이다. 평생 먹고살 걱정도 없고, 고민도 없으며, 그가 바로 본인의 종착지라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를 두고 “이번 생에 당신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 내면 깊은 곳에 지닌 결혼과 배우자에 대한 생각이다. 상대가 기쁘면 자기도 기쁘고, 상대가 슬프면 자기도 슬프고, 상대가 괴로우면 자기도 괴롭다. 상대가 죽으면 자기도 살고 싶지 않다. 상대가 변심하면 어떻게 하느냐? (죽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살고 싶지 않다며 자살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정신이 이상해지기도 한다. 이게 무슨 꼴이냐? 정신이 이상해진다면 그건 어떤 사람이냐? 정신이 이상하다는 것은 귀신 들렸다는 뜻이다. 어떤 여자가 배우자는 곧 자기 일생의 종착지라고 생각하며 본인에게 이렇게 남자가 있으니 앞으로 다른 남자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바로 “이번 생에 당신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배우자가 그녀를 저버리고 변심해서 더 이상 그녀를 원하지 않는다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그녀는 세상의 모든 이성을 증오하고 이성만 보면 침을 뱉고 욕을 해 대고,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고 폭력 성향이 생기는 등 이성이 비정상적으로 변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말 정신이 이상해지기도 한다. 이런 것은 모두 결혼에 대한 사람의 그릇된 이해로 초래된 결과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을 자신의 성공적인 행복 추구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또한 자신이 자나 깨나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져 얻은 인생의 종착지이자 인생의 목표로 간주한다. 결혼은 바로 그들 인생 목표의 마지막 역인 셈이다. 배우자와 이번 생을 함께하며 서로의 곁에 끝까지 있어 주고 생사를 함께하는 것, 이것이 결혼에 대한 그들의 추구다. 그들은 결혼이 자신의 종착지라는 이 사상 관점을 검증하기 위해, 결혼 생활에서 이성을 넘어서고 사람의 책임 범위를 넘어서는 일을 많이 저지른다. 사람의 책임 범위를 넘어선 이런 일에는 인격과 존엄성, 자아의 추구 목표를 상실한 극단적인 행동들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배우자가 매일 누구와 함께 있고, 나가서 뭘 하는지, 다른 이성과 접촉하지는 않는지, 다른 이성과 우정의 범위를 넘어선 교제나 친분을 쌓지는 않는지 항상 관심을 두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에 대한 배우자의 태도가 어떤지, 배우자의 마음속에 과연 자신이 있는지,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는지 관찰하고 시험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배우자가 집에 들어올 때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기도 하고, 그의 몸에 이성의 머리카락은 없는지, 셔츠에 다른 여자의 립스틱 자국은 없는지 살핀다. 또 휴대 전화를 검사해서 자기가 모르는 이성의 전화번호는 없는지, 심지어 배우자가 전화는 과연 몇 통이나 했는지, 누구와 통화했는지, 매일 자기한테 전화해서 얘기한 게 진짜였는지 확인한다. 예를 들면, 전화할 때 상대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당신 지금 어디예요? 뭐 해요?” “일하는 중이지. 서류 검토하고 있어.” “그럼 당신 검토하는 서류 좀 찍어서 보내 줘 봐요.” 상대가 사진을 보내면 그녀는 또 캐묻는다. “지금 사무실에 또 누가 있어요?” “나 혼자야.” “그럼 카메라 켜서 사무실에 또 누가 있는지 좀 보여 줄 수 있어요?” 카메라가 켜지고 딱 보니까 한 여자의 형체가 얼핏 스쳐 지나간 것 같다. “아닌 것 같은데요. 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 “청소하는 아주머니야.” “아, 알았어요.”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배우자의 휴대 전화를 확인하고, 그의 행적을 확인하고, 그가 매시간 뭘 하는지 확인한다. 그들은 결혼에 대해 큰 기대를 품고, 동시에 더 많은 불안감을 가진다. 당연히 결혼한 상대에 대해서도 커다란 소유욕과 통제 욕구가 있다. 그들은 상대를 자신의 종착지라고 믿고, 평생을 반드시 또 마땅히 서로 의지해야 할 사람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결혼에 어떠한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되고, 결혼에 어떠한 파열음도 발생해서는 안 되고, 심지어 어떤 흠이나 사소한 문제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건 모두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를 감시하고, 시험하는 일, 상대의 행적과 행방을 염탐하는 일, 그리고 상대를 단속하는 일에 더욱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특히 상대가 바람을 피우는 경우, 이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들은 데굴데굴 구르며 난리를 치고, 울고불고 야단을 피운다. 심지어 그 일을 예배 자리까지 가져와서 형제자매들과 대책을 의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이는 제 첫사랑이에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라고요. 저는 평생 다른 남자랑은 손도 잡아 본 적 없고, 스킨십도 해 본 적 없어요. 제게는 그 사람이 유일한 남자고, 하늘이에요. 저는 평생 그이만 인정했는데, 그이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다니, 정말 분이 가라앉질 않아요.” 사람들이 말한다. “분을 못 가라앉히면 어쩔 건데요? 자매님이 이 사실을 바꿀 수 있나요? 자매님 남편이 그런 일을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눈치챘다고요.” 그녀는 말한다. “그 사람이 그걸 좋아하든 말든 저는 이 사실을 못 받아들이겠어요. 누가 그 여자 혼내 줄 방법을 좀 생각해 봐요. 그 여자한테 안방을 내어 줄 수는 없죠.” 보아라,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이 일을 예배 자리에까지 가져와서 교제한다. 이런 것도 교제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걸 두고 부당한 여론을 방출하고 부정적인 소식을 방출하고 부정적인 정보를 퍼뜨린다고 한다. 너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집에 들어가 문을 닫고 싸워도 좋고 소란을 피워도 좋다. 그건 너 자신의 일이다. 그렇지만 그 일을 예배 자리에 가져와서 얘기하는 것은 안 된다. 만약 네가 예배 시간에 진리를 구하고 싶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 보자. “이번 일을 만났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고, 그에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이 일이 하나님 믿고 본분 이행하는 데 지장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진리를 구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네가 예배 자리에 와서 시비를 논하는 것은 안 된다. 왜 그런 것이냐? 네가 이 일을 만나고 지금의 이런 생활 상황에 놓인 것은 모두 결혼에 대한 너의 그릇된 이해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런 시비와 결과를 형제자매들 가운데에 가지고 와서 교제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너 자신에게도 좋을 게 없다. 네가 이런 시비의 문제를 얘기하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분량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지 방법을 생각해 주고, 옳고 그름을 가려 주는 것밖에는 해 줄 수가 없다. 이는 네가 긍정적으로 진입하는 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설상가상으로 문제를 더 심각하고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바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한 그들이 너에게 무슨 유익하고 가치 있는 도움을 제공해 줄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언제까지라도 자매님이 본처예요. 가짜가 진짜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죠.” 이것이 진리이냐? (아닙니다.) 또 이런 사람도 있다. “그 여자한테 자리 내 주지 마세요. 그 여자가 어디 이길 수 있나 보세요!” 이것이 진리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는 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겠느냐, 아니면 화가 나겠느냐? 혈기가 폭발하겠느냐, 아니면 진리를 깨닫고 실행 길을 얻겠느냐? 또 이런 사람도 있다. “이제 알겠네요. 요즘 남자들은 괜찮은 인간이 하나도 없어요. 돈만 있으면 다들 변한다니까요.” 이것이 진리냐? (아닙니다.) 이런 사람도 있다. “이번 일은 참으면 안 돼요. 그 여자한테 자매님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 해요. 본때를 보여 주세요. 회사로 찾아가서 그 여자가 정부(情婦)라고 다 소문내고 엎어 버리세요. 틀림없이 본처인 자매님 편을 들지, 그 여자 편을 들지는 않을 거예요. 그쪽이 양보하고 물러나게 해야죠.” 이것이 진리냐? (아닙니다.) 이런 의견은 대부분 사람들의 억지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 밖에 조금 보수적인 의견도 있다. “남편이랑 평생을 살았는데 아직도 안 질려요? 그냥 자기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으라고 해요. 집에 돈만 잘 갖다 주고, 자매님 먹고사는 데 지장만 없으면 되잖아요.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남편이 귀찮게도 안 하잖아요. 그래도 집에 들어오고 자기 집이라고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화낼 게 뭐 있어요? 자매님이 이득이잖아요.” 듣고 있으면 위안은 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진리냐? (아닙니다.) 여기에 착실한 사람이 하는 말이 하나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전부 이간질하거나 화를 돋우는 말 아니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적당히 구워삶는 말이다. 이 일을 대할 때 지녀야 할 올바르고 진리에 부합하는 관점이 한 마디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이렇게 말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사람들이 대개는 바보 같고, 생각해 낸 방법들은 당사자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바보다.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고, 진리를 깨닫지도 못했다. 결국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다. 더 구체적으로 결혼이라는 일만 놓고 볼 때,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의견과 정의에서, 결혼 생활에서 나타나는 이런 문제를 사람이 어떻게 대하는 것이 혈기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사람이 전혀 모른다는 뜻이다.

어떤 일을 만나든, 그게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혼 생활에서 생기는 이 문제들을 대할 때 근거가 되는 하나님 말씀은 무엇이냐? 여기에서의 진리 준칙은 무엇이냐? 네 배우자는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않았고, 그것은 그의 문제다. 하지만 그의 문제로 인해 결혼 생활에 대한 너의 올바른 태도와 책임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지만,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결혼 생활을 대할 때 네가 지녀야 하는 태도가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너는 그가 너의 종착지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네 생각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렇게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운명적으로 정하지도 않았다. 단지 네가 감정과 사람의 뜻, 물론 더 확실히 말하자면, 사람의 혈기 때문에 억지로 그가 네 종착지이고, 네 운명의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에 불과하다. 네가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네가 전에는 어떻게 생각했든 관계없이, 어쨌든 지금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생각과 태도를 지녀야 올바른 것이라고 했는지 돌이켜 봐야 한다. 배우자가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않을 때 너는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싸워서도, 소란을 피워서도 안 되고, 데굴데굴 구르며 난리를 피워서도 안 된다. 네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네 종착지의 꿈이 깨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네 결혼이 끝나거나 산산조각이 난다는 뜻도 아니고, 네 결혼이 실패했거나 막다른 길로 접어들었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사람은 누구에게나 패괴 성품이 있고, 이 세상의 사악한 조류, 사악한 풍조의 영향을 받지만 그것을 막아 낼 면역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결혼 생활이라는 일에서 과오를 범하고, 충실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 불륜을 저질러 상대를 실망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만약 이런 각도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이건 별로 큰 일이 아니다. 모든 결혼 가정이 세상이라는 큰 환경, 사회의 사악한 조류와 풍조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개인의 경우, 육적인 정욕을 가지고 있는 데다, 멜로 영화나 드라마, 사회의 에로틱한 조류와 같은 이런 현상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런 큰 환경에서 사람이 견지해야 할 원칙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즉, 사람의 도덕적 마지노선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사람의 정욕이라는 관문은 돌파하기가 매우 쉬운데, 정욕 자체는 패괴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패괴 성품이 있는 데다 이런 큰 환경 아래 생활하기 때문에, 남녀 관계 영역에서 잘못을 저지르기가 쉽다. 사람은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패괴 성품을 지닌 그 누구도 이런 큰 환경에서는 시험과 유혹을 이겨 낼 수 없다. 사람의 정욕은 언제 어디서나 흘러넘치고,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일탈을 저지를 수 있다. 이는 정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게 문제가 있어서다. 사람은 정욕을 이용해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탈, 불륜, 외도 등의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이런 일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다면 이성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너는 패괴된 사람이고, 그 역시 패괴된 사람이다. 따라서 너는 본인이 결혼 생활에 대한 충절을 지킬 수 있다고 해서 그에게도 반드시 너처럼 이 부분을 잘 지키고, 결혼 생활에 충실할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는 올바르게 문제를 대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그런 상황, 그런 시험은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어서 네가 막거나 감시해도 소용이 없다. 네가 감시하면 할수록 그런 일은 더 빠르게, 더 일찍 발생한다. 사람은 누구나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어 이런 사악한 사회 환경에서 생활하면서 음행을 범하지 않는 자는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지 배경이나 조건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사람은 짐승보다 나은 점이 별로 없다. 짐승은 최소한 육적인 본능에 따라 반응하지만, 사람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음행을 범하고, 불륜을 저지른다. 음행을 좋아하는 존재는 사람뿐이다. 따라서 이런 사악한 사회 환경에서는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 이 문제는 회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데, 너는 어째서 그에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느냐? 사실 그건 정상적인 일이다. 네가 그에 대해 감정적 갈등이 있는 까닭에 그가 너를 버리고 뿌리치면 감당하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일이 생기면 너는 빙긋 웃으면서 곰곰이 생각할 것이다. ‘이상할 것도 없지. 요즘 세상이 다 그렇잖아?’ 그 무슨 마누라니 애인이니 하는 말이 있지 않으냐? (“집에서는 마누라와 잘 지내고, 밖에서는 애인과 잘 지낸다.”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사악한 조류 안에서 유행하는 말, 유행하는 일이며, 남자로서 자랑할 만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아내와도 애인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면 그건 남자가 수완이 없는 것이고, 사람들은 비웃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가 이런 일이 생겼다고 데굴데굴 구르며 혈기를 발산하고, 밥까지 굶어 가며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고, 목매달아 죽는다고 자살 소동을 일으키고, 심지어 화를 못 이겨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것은, 알게 모르게 본인이 결혼 생활을 대하는 태도와 관계가 있다. 물론 ‘배우자가 자신의 종착지’라고 믿는 그녀의 관점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그녀는 상대가 결혼 생활을 깨뜨린 것을 곧 일생의 종착지에 대한 기탁, 자신의 아름다운 바람을 파괴한 것으로 생각한다. 상대가 먼저 이 평형 상태와 선례를 깨고, 너를 뿌리치며 결혼의 맹세를 어기는 바람에 너의 미몽은 악몽으로 바뀌었고, 그 때문에 너에게서 이런 모습과 과격한 행위가 나오게 된 것이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에게서 온, 결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받아들인다면 조금은 이성적인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을 만나면 정상적인 사람은 가슴이 저미고, 눈물이 나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냉정을 찾은 뒤 하나님 말씀을 생각해 보고, 이 사회 환경을 생각해 보고, 또 모든 사람이 패괴 성품을 가진 이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죽자 살자 물고 늘어지는 대신, 그 일을 올바르고 이성적으로 처리하고, 손을 놓게 될 것이다. 손을 놓는다는 건 어떤 뜻이냐? 이왕 그가 그렇게 행동하고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않은 이상,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다음 그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어야 한다.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지낼 건가요? 둘 사이의 결혼을 계속 유지할까요, 아니면 여기서 끝내고 각자의 삶을 선택할까요?” 앉아서 얘기하면 싸우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만약 상대가 결혼을 끝내기를 고집한다 해도 뭐 그리 놀랄 것도 없다. 이방인들이 늘 하는 말이 있지 않으냐? “세상 천지에 널린 게 남자다.”, “다리 셋 달린 두꺼비는 찾기 힘들어도, 다리 둘 달린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또 어떤 말이 있느냐? “나무 한 그루 때문에 숲 전체를 포기하지 말라.”라는 말도 있는데, 게다가 이 나무는 볼품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고목이다. 이 말들이 옳으냐, 그르냐? 이방인들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이런 말들이 진리와 관계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사상 관점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 이런 일이 닥쳤을 경우, 우선은 혈기를 부려서는 안 되고 화가 나도 참아야 한다. “우리 차분하게 얘기 좀 해요.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난 그래도 당신하고 잘해 볼 생각이야.” “그렇다면 우리 잘해 봐요. 앞으로 바람 같은 건 피우지 말고, 남편의 책임을 다했으면 해요. 이 일은 여기서 끝내자고요. 만약 그렇게 못 하면 헤어져서 각자 갈 길 가는 거고, 하나님이 정하신 우리 결혼은 거기서 끝인 거죠. 그렇게 될 경우에 난 하나님의 안배를 따를 거예요. 당신은 당신 갈 길 가면 되고 난 하나님 믿는 길을 갈 테니 서로 지장은 없을 거예요. 나도 당신 간섭하지 않을 테니 당신도 날 제약하지 마세요. 당신이 내 운명을 결정할 수도 없고, 내 종착지도 아니니까요. 내 운명과 종착지는 하나님이 정하세요. 내 인생 마지막 역이 어딘지, 어디까지 가야 내 종착지가 나오는지 하나님께 물어봐야 해요.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주재하시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따르고 싶어요. 어쨌든 당신이 나랑 이 결혼을 계속 이어 가고 싶지 않다면 우리 좋게 헤어져요. 내가 비록 재주도 없고, 이 집안 생계를 당신한테 의지했지만, 당신이 없어도 난 여전히 살 수 있고, 또 잘 지낼 거예요.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도 굶어 죽게 놔두시지 않는데 나처럼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손도 있고 발도 있고, 혼자 충분히 먹고살 수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요. 하나님께서 내 남은 생을 당신 없이 쓸쓸하게 지내도록 정하셨다고 해도 거기에 순종하고, 원망 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일래요.” 일을 이렇게 처리하면 좋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아주 좋다. 그렇지 않으냐? 다툴 필요도, 싸울 필요도 없고, 그 일을 가지고 동네 시끄럽게 해서 남들이 다 알게 할 필요도 없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결혼 자체가 두 사람의 일이므로 둘 사이에 생긴 갈등은 둘이 해결하고 그 결과도 둘이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너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물론 결혼은, 어떤 균열이나 결과가 나타나는지와 무관하게, 존재해도 좋고, 존재하지 않아도 좋고, 또 새로운 결혼 생활을 시작해도 좋고, 여기서 결혼을 끝내도 좋지만, 어쨌든 결혼 자체는 너의 종착지가 아니고, 배우자 역시 너의 종착지가 아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해 네 생명과 생활에 나타나고, 네 인생길에서 너를 동반하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그가 길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너와 함께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으니,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중간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균열이 생겼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든 그로 인해 결국 결혼이 끝났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네 종착지가 사라져서 그때부터 네 인생이 암울해지고, 광명과 미래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어쩌면 이 결혼의 끝이 더 근사한 생활의 시작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렸고, 하나님이 지배하고 안배한다. 어쩌면 이 결혼이 끝남으로써 네가 결혼에 대하여 깊은 이해와 깨달음을 얻고 더 깊은 인식을 얻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이 결혼의 끝이 아마도 너의 입장에서는 인생의 목표 및 방향, 그리고 가야 할 길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결혼의 끝이 너에게 가져다준 것은 암울한 추억도, 고통스러운 기억도, 모든 부정적인 체험과 수확도 아닌, 결혼 생활에서는 얻지 못한 바람직하고도 긍정적인 체험일 것이다. 만약 그 결혼 생활이 계속된다면 너는 아마 끝까지 계속 무미건조하고 평범하게 살 것이다. 하지만 결혼이 끝나고 해체된다면, 그것이 너의 입장에서는 꼭 좋은 일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과거에 너는 결혼의 행복, 결혼 생활의 책임, 배우자에 대한 관심, 돌봄과 보살핌, 근심, 걱정 등과 같은 모든 정서 혹은 생활 방식 따위에 얽매였다. 하지만 결혼이 끝난 날부터 너의 생활 상황, 생존 목표, 인생의 추구에 철저하고도 어마어마한 변화가 나타날 것인데, 그 변화는 결혼이 끝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런 수확, 전환과 변화는 하나님이 네게 정해 준 이 결혼 덕분에 얻게 되는 것임과 동시에 네가 결혼을 끝내도록 하나님이 이끌어 준 덕분에 얻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네가 어느 정도 아픔을 겪고, 굽은 길을 가긴 했지만, 비록 네가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무모하게 희생하거나 타협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네가 얻는 것은 결혼 생활 자체에서는 얻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어찌 되었든 ‘결혼은 바로 너의 종착지이다’는 사상 관점을 내려놓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네 결혼 생활이 계속되거나 위기에 직면하거나 관계없이, 혹은 네 결혼이 해체되거나 이미 끝났거나 관계없이, 어찌 되었든 결혼 자체는 한 사람의 종착지가 아님을 사람은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사람은 ‘결혼은 한 사람의 종착지이다’는 사상 관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런 사상 관점은 상당 부분 너의 자유와 네가 인생길을 선택할 권리를 위협할 것이다. 위협한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 왜 내가 이런 단어를 사용하겠느냐? 그건 바로 네가 어떤 선택을 할 때, 혹은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관점을 받아들일 때, 그것이 네 결혼의 행복이나 결혼의 완벽함에 영향을 미친다면, 나아가 배우자가 너의 종착지이자 궁극적으로 기댈 곳이라는 이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면, 너는 손발이 묶이고, 심지어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조심 또 조심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은연중에 너의 자유 의지, 인생길을 선택할 권리, 긍정적인 사물을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할 권리는 너의 그런 사상 관점에 의해 속박당하고 심지어 박탈당할 것이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 앞에 올 확률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네가 하나님 앞에 올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가 구원받을 희망은 점점 작아지고, 네가 살아가는 상태는 옹졸하고, 가련하고, 음침하고, 구질구질하다는 뜻이다. 왜 그런 것이냐? 네가 모든 희망과 기대,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전부 너와 결혼한 배우자에게 고정시키고, 그를 너의 전부로 삼았기 때문이다. 네가 그를 너의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너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너의 시야를 어지럽히거나 가리고, 네 인격과 존엄성, 정상적인 사유와 이성을 박탈하고, 네가 하나님 믿으면서 인생의 정도를 걷고, 올바른 인생관을 수립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할 권리를 박탈한다. 그와 동시에 너의 이런 권리들은 모두 배우자에 의해 제어되고 통제된다. 그래서 내가 이런 사람들의 삶을 가련하고 구질구질하고 비천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배우자가 심기가 좀 불편하거나 몸이 어디가 불편했다 하면, 심지어 배우자가 심장이 좀 불편하다는 소리만 해도, 그는 가슴이 철렁해서 며칠 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기도한다. 지금껏 어떤 일로도 이처럼 마음을 졸인 적 없었던 사람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이런 일만 생겼다 하면 자기가 당장에라도 어떻게 잘못될 것만 같다. 왜 그런 것이냐? 그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하늘이 무너지고 든든한 버팀목이 쓰러지는 것이고, 이는 곧 본인도 끝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의 생사가 창조주 손에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배우자를 앗아 가면 본인이 반려자를 잃고, 기댈 곳을 잃고, 하늘을 잃고, 영혼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이 얼마나 패역한 짓이냐! 하나님이 준 결혼으로 기댈 곳이 생기고 반려자가 생기자 너는 하나님을 잊고, 더는 하나님을 원치 않게 되었다. 네 배우자가 너의 하나님, 너의 주인이 되고, 너의 기댈 곳이 되었다. 이것은 대역무도한 일이고, 하나님을 가장 크게 거역하는 행위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배우자가 조금만 화를 내도, 혹은 무슨 병만 생겨도 가슴이 철렁해서 며칠을 예배도 안 드리고, 연락도 하나 없고, 자기가 이행하던 본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도 않는다. 마치 증발해 버린 것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가 이번 생에서 가장 관심을 쏟고 걱정하는 일은 배우자의 생사로, 어떤 일도 이보다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도, 하나님이 맡긴 일도, 그의 본분도 이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로서 지녀야 할 신분, 가치, 의의를 잃어버린 자이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자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안정적인 생활과 반려자를 준 건, 네가 더 잘 지내고 누군가 너를 보살피고 동반하라는 뜻이었지, 반려자가 생긴 뒤로 하나님도 잊고, 하나님 말씀도 잊어버리고, 본분을 이행할 의무,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인생 목표도 포기한 채 배우자를 위해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었다. 네가 정말 그렇게 했다면, 정말 그렇게 살고 있다면 하루빨리 돌이키길 바란다. 그 누가 너에게 아무리 중요해도, 네 생명과 생활, 심지어 인생길에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는 너의 종착지가 아니다. 그는 단지 패괴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지금의 반려자를 안배했기에 너는 그와 함께 생활할 수 있지만, 만약 하나님이 마음을 바꿔 너에게 다른 누군가를 안배해도 너는 여전히 잘 지낼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의 네 반려자는 너의 유일한 사람도 아니고, 너의 종착지도 아니다. 하나님만이 네가 종착지를 기탁할 수 있는 분이고, 하나님만이 인류가 종착지를 기탁할 수 있는 분이다. 너는 부모를 떠나서도 생존하고 살아갈 수 있고, 배우자 없이도 당연히 전처럼 잘 살아갈 수 있다. 부모도 너의 종착지가 아니고, 배우자 역시 너의 종착지가 아니다. 배우자가 생겼다고 해서, 네 마음과 영혼, 육을 기탁할 대상이 생겼다고 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탁을 잊어버리고, 피조물이 다해야 할 본분, 네 신분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양심과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는 짓이다. 지금 네 생활 상황을 떠나, 결혼 유무를 떠나 창조주 앞에서의 네 신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네 종착지가 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네 기탁이 될 수 없다. 하나님만이 너에게 적합한 종착지를 줄 수 있고, 하나님만이 인류가 생존을 기탁할 수 있는 분이다. 이 사실은 언제까지나 변함없다. 잘 알겠느냐? (잘 알겠습니다.)

결혼이라는 주제는 여기까지 교제하기로 하자. 본인 생각이나 관점, 혹은 조금이라도 느끼는 바가 있다면 지금 얘기해도 좋다. (전에는 저도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혼은 한 사람의 종착지라고 믿어서, 상대가 일탈을 저지른다면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이번 생을 더는 못 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비슷한 일을 겪은 형제자매들 얘기도 들었는데, 이런 일이 닥치면 다들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 교제를 듣고 나니 이 일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게 됐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 사악한 사회에서 사람은 외부 세계의 사람과 일, 사물의 유혹을 받아 쉽게 이 측면에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니, 그런 일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결혼한 반려자는 저희 인생의 종착지가 아니며, 하나님만이 사람의 종착지이고, 하나님께 의지해야만 진정으로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새로운 인식을 얻었습니다.) 훌륭하구나. 우리가 교제한, 진리에 관계된 이 모든 관점과 태도는 사람이 치우치고, 옳지 않고, 부정적인 온갖 사상 관점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준다. 그런 다음 상응하는 일을 만났을 때 사람이 버팀목이 되는 올바른 사상 관점을 지니고, 올바른 실행 길을 찾게 해 준다. 그릇된 길로 가지 않고, 더 이상 사탄의 미혹과 통제를 받지 않고, 또한 그 어떤 과격한 행동도 하지 않고, 범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 안배에 순종하며 진정한 피조물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이 옳은 것이다. 그럼 오늘 교제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다음에 보자!

2023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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