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0) 제 3 부

한 사람이 결혼에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방금 두 가지 기준을 교제해 보았다. 기억하고 있느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는 모두 사람의 인품에 관계된다. 하나는 그가 본분을 진지하고 책임 있게 이행하는지,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 이익을 지킬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겉으로 봐서는 간파하기 힘들 수도 있다. 아마 지위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혹은 지위가 있을 때라면 그도 본분을 이행해서 교회 사역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위가 없어지면 그는 어떻게 되겠느냐? 네가 아직 잘 모르니, 이때는 그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하지만 그가 지위를 잃은 다음 행패를 부리고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며 하나님을 욕하고 모독할 때면 너는 그에게 분별이 생길 것이다. ‘어머나, 저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구나. 다행히 때마침 정체를 드러냈네. 안 그랬으면 결혼 상대로 선택할 뻔했지 뭐야.’ 보아라. 배우자를 선택하는 또 하나의 기준,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도 무척 중요하다. 이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한다면 결혼의 악몽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이 두 가지 기준이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이제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떤 여자는 돈에 욕심이 많았는데, 남자랑 연애할 때 무척 상냥하고 세상 물정을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귀여운 여자야. 새처럼 맨날 내 주위를 맴돌면서 떨어지질 않아. 남자가 여자에게서 바라는 꿈과 목표에 완벽하게 들어맞는군. 남자에게는 상냥한 말투에다 남자를 의지하면서 존재감을 높여 주는 이런 여자가 필요해. 이런 여자가 날 그리워하고 함께해 준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 그 여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잘 추구하지 않고, 본분 이행 얘기만 나오면 시간 없다는 핑계만 대고, 피곤해서 고생하는 게 싫다고만 한다. 집에서는 밥도 안 하고, 청소도 안 하고 TV만 본다. 누가 명품 가방을 사고, 호화 주택에 살고, 좋은 차 사는 것을 보면 그 집 남자는 능력도 좋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평소에 돈을 물 쓰듯 해서 금은방, 액세서리 가게, 사치품 가게만 가면 돈을 못 써서 안달이고, 좋은 것만 사려 한다. 너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원래는 정말 귀여운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어쩌다 이런 여자가 된 거지?’ 봐라, 변하지 않았느냐? 처음에 너랑 연애할 때는 본분도 이행할 수 있었고, 고생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불과했고, 막상 결혼하고 나니 그게 아니다. 네가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자 그녀는 너를 원망한다. “왜 돈 벌러 나가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본분 이행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하나님 믿으면 밥이 나와요? 하나님 믿으면 돈 많이 벌 수 있나요?” 이렇게 불신의 말이 튀어나오는데, 그렇다면 이 여자는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녀는 지금껏 본분을 이행하려 한 적도 없고,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는 그런 일들도 마음에 없었다. 결국, 대역무도한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속으로 무슨 생각만 하고 있느냐? (먹고 입고 즐기는 것입니다.) 오로지 금전이나 육적인 즐거움밖에는 없다. 그것은 돈 욕심이 많은 것이고 세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녀와 결혼하면 그녀는 네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가로막고, 본분을 포기하고 세상을 추구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고 싶어 하면서도 그녀를 따른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 네가 만약 그녀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녀는 너와 다툼을 벌이고 이혼할 것이다. 이혼한 다음 배우자 없이 혼자 산다면 견딜 수 있겠느냐? 처음부터 혼자였다면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지금 몇 년째 배우자와 함께 살아서 둘이 사는 생활에 익숙해졌는데, 졸지에 이혼해서 상대가 없어지면 견딜 수 있겠느냐? 이겨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어느 방면이든, 생활하는 것도 그렇고 감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배우자가 필요해서 이겨 내기가 힘들다. 네 생활이 원래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달라지면, 원래의 네 생활 규칙, 생활 리듬, 생활 방식은 철저하게 교란된다. 이 결혼은 어떠냐? 너에게 가져다준 것이 무엇이냐? 행복이냐, 재난이냐? (재난입니다.) 재난이다. 그러니까 네가 만약 사람을 볼 줄 모르고 사람을 판단할 때 정확한 원칙이 없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면, 될 수 있는 한 아무렇게나 연애하는 것을 삼가고, 가급적 연애하고 결혼하고 결혼 생활에 들어가려는 이런 생각과 계획을 갖지 마라. 지금 이 세계의 사악한 시류는 사람에게 너무나 커다란 유혹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수많은 시험에 직면하고 있다. 누구나 생활에서 온갖 시험을 만나는데 이겨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네가 설령 진리를 추구한다고 해도 이겨 내기가 쉽지 않다. 만약 진리 추구를 통해 진리를 깨닫고 얻는다면 이겨 낼 수 있겠지만, 진리를 깨닫고 얻기 전이라면 시험은 네게 언제까지나 시험이고 언제까지나 위험한 것이다. 더군다나 너희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또 하나 있으니 바로 사람을 볼 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의 본질을 간파할 줄 모르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문제다. 너희는 단지 무엇을 볼 줄 아느냐? 남자는 단지 이 여자가 예쁘게 생겼는지, 대학을 나왔는지, 집에 돈이 있는지, 잘 꾸밀 줄 아는지, 낭만을 아는지, 분위기가 있는지를 보고, 더 세부적으로는 그녀가 현모양처인지, 미래에 자녀를 잘 교육할 수 있을지, 가정을 잘 꾸려 나갈 수 있을지를 알아볼 뿐이다. 기껏해야 그런 것을 볼 정도다. 여자는 남자의 무엇을 보느냐? 이 남자가 낭만을 아는지, 능력이 있는지, 부를 이루어 집안을 일으킬 수 있을지, 가난한 팔자인지 부유한 팔자인지, 세상을 잘 살아갈 수완이 있는지를 본다. 좀 더 본다면 이 남자가 고생을 잘 견디는지, 살면서 집안을 잘 이끌지, 이 남자와 살면 잘 먹고 잘 입을 수 있을지, 어떤 집안인지, 부유한 집안인지, 집 있고 차 있는 집인지, 기업을 소유한 집인지, 장사하는지 아니면 농사짓거나 직장을 다니는지, 현재 집안의 경제 상황은 어떤지, 부모가 결혼 자금을 마련해 뒀는지, 고작해야 이 정도만 파악할 수 있다. 당사자의 인성 본질이 어떤지, 하나님을 믿는 길에 대한 선택이 어떨지를 간파할 수 있느냐? (간파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지는 않을지, 악인인지 아닌지, 그의 인품이 드러내고 나타내는 모습을 종합해 볼 때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인지, 그가 진리 추구의 길을 갈 수 있을지, 구원받을 수 있을지, 네가 그와 결혼하면 부부가 나란히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너는 꿰뚫어 볼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왜 꼭 꿰뚫어 봐야 합니까? 세상에 결혼한 그 많은 사람이 꿰뚫어 보지 못해도 다들 잘 살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이 결혼이라는 일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좋은 사람, 착실하게 사는 사람을 만나 평생을 같이 보내면서 큰 굴곡 없이 평탄하게 살고 크게 고생하지만 않으면 그래도 괜찮은 삶이고 괜찮은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을 꿰뚫어 보지 못한 일부는 그저 외모나 지위만 중시하다가, 상대에게 낚여서 결혼한 뒤에야 그 사람이 악인이고 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사람과 같이 사는 삶은 하루가 일 년 같다. 여자는 눈에 눈물 마를 날이 없고, 남자도 속아서 피해가 막심하다. 그러다 결국 몇 년 후 이혼하게 된다. 어떤 부부는 서너 살 혹은 열 살쯤 된 아이가 있어도 이혼하고, 심지어 어떤 부부는 손자 손녀까지 있는데도 같이 지내지 못해 이혼한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 뭐라고 하겠느냐? ‘결혼은 무덤’이라느니, ‘결혼은 화장장’이라는 소리를 한다. 그렇다면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것은 남자 쪽 잘못이냐, 아니면 여자 쪽 잘못이냐? 모두가 잘못이다. 양쪽 다 잘한 게 없다. 그들은 결혼의 본질이 무엇이고 결혼 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른다. 결혼의 본질은 바로 서로가 책임을 다하고, 현실 생활로 들어가 서로 붙들어 주는 것이다. 이때는 부부 양쪽의 인성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결과적으로 행복하고 평온하게 마지막까지 갈 수 있다. 그렇다면 결혼 생활의 본질은 무엇이냐? 역시 부부 양쪽의 인성에 기반을 두어야 걱정 없고, 안정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또 양쪽 모두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부부가 나란히 손잡고 마지막까지 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부부가 나란히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해도, 부부가 결국 마지막까지 함께하려면 둘 다 최소한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하고, 인성이 어느 수준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교제하니, 너희는 결혼에 대해 신심이 더 생겼느냐, 아니면 신심이 더 없어졌느냐, 아니면 올바른 태도와 관점이 생겼느냐? (올바른 태도와 관점이 생겼습니다.) 신심이 더 생겼다거나 더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결혼을 포기하거나 거부하라는 말이 아니다. 올바르고 이성적인 태도로 이 일을 대하라는 것이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일을 생각하고 대하고 해결하라는 뜻이지, 결혼이라는 일은 생각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는다고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올바르고 정확한 사상 관점을 갖추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내려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교제를 통해 너희는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일부 내려놓게 되었느냐? (네.) 너희는 결혼이 더 두려워졌느냐, 아니면 결혼을 더 갈망하게 되었느냐? 사실 둘 다 아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갈망할 필요도 없다. 네가 독신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난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싶어. 당분간 결혼은 생각하지 않을 거야. 결혼에 대해 아무 계획이 없어. 그러니 결혼이라는 일은 마음속에 공백으로 두고 싶고, 그냥 백지로 놔두고 싶어.” 이런 관점은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교제해 주시는 이쪽 방면의 진리는 저희가 갖춰야 할 필요가 있고, 저희가 깨닫고 실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도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원칙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결혼 생각이 있든 없든 이쪽 방면의 진리를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느냐? (맞습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으냐? “저희는 독신인데 이방 세상에서는 독신을 귀족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집에서는 저희 같은 독신은 모두 성결하고, 결혼한 사람들은 불결하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으냐? 결혼에 대한 일부 기혼자들의 인식에는 늘 잘못된 부분이 있다. 그들은 결혼하면 생각이 결혼 전만큼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하고 깨끗하지 않고, 일단 결혼하면 생각이 복잡해진다고 생각한다. 특히 결혼한 사람은 이성과 관계한 이상 더는 성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인 후 배우자에게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난 하나님 사역을 받아들였으니 오늘부터 성결을 추구해야 해. 당신과 같이 잘 수 없으니 당신 혼자 자. 난 다른 방에 가서 잘게.” 그때부터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간다. 두 사람이 잠은 따로 자면서 생활은 함께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일종 육체의 성결이다. 이것은 결혼에 대한 일종의 오해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오해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느냐? 일부 결혼한 사람들은 이성과 관계하면 성결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곧 이성과 관계하지 않고 결혼 생활에서 물러나 결혼 생활을 청산한다면 성결해진다는 뜻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성결해진다면, 결혼하지 않으면 더 성결하지 않겠느냐? 이런 치우친 이해로 인해 생긴 사람의 일부 선택, 혹은 행동은 배우자의 몰이해와 분노를 자아낸다. 불신자 남편이나 아내는 오해한 나머지 신앙에 반감을 품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너희가 볼 때, ‘성결’을 추구하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우선은 생각에 문제가 있다. 그의 생각에 어떤 문제가 생겼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우선, 결혼에 대해 그는 치우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성결함과 불결함에 대한 그의 정의와 이해가 치우쳤다. 그는 이성과 관계하지 않는 것을 성결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불결함은 무엇이냐? 성결함은 무엇이냐? 성결함은 패괴 성품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진리를 얻고 성품이 변화하면 패괴 성품이 사라진다. 그럼 이성과 관계하지 않으면 패괴 성품이 사라지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은 이성과 관계를 맺어서 생겨난 것이냐? (아닙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네가 결혼해서 이성과 관계를 가졌어도 네 패괴 성품은 더 심해지지 않았고, 원래와 마찬가지다. 네가 결혼하지 않고 이성과 관계하지 않았다고 해서 패괴 성품이 없느냐? 패괴 성품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니 남자건 여자건 패괴 성품이 있는지 없는지는 결혼 상황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결혼하고 이성과 관계했는지를 근거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과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결혼에 대해 왜 이런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되었느냐? 왜 이런 행동이 생겼느냐? 이 문제는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해결할 수 있느냐? 한 사람이 이성과 접촉하고 이성과 관계하면 불결해지고 패괴가 심해지느냐?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하나님이 정한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잘못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이 문제가 생겨난 근원이 무엇이냐? 그 근원을 해부하고 인식하면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너희도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 모두 결혼에 대해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생겨난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 (무엇이 성결함이고 무엇이 불결함인지를 사람은 잘 모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결함이고 불결함인지 잘 모르는 근원은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방면에서 하나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결혼은 사람이 인생에서 정상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일이자, 하나님이 사람에게 운명으로 정하신 일입니다. 사람은 결혼해서 이성과 관계하는 것을 성결함과 연결 짓지만, 사실 성결함은 패괴 성품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지 결혼 여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성당의 수녀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모르기에 평생 결혼하지 않더라도 성결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패괴 성품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성결함과 불결함의 구분이 결혼 여부와 관계가 있느냐? (관계없습니다.) 관계가 없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증거가 있다. 예를 들어, 정신지체자나 백치, 정신병자, 수녀, 비구니, 승려는 다 결혼하지 않았는데, 이들이 성결하냐? (성결하지 않습니다.) 정신지체자나 바보, 정신병자는 모두 정상인의 이성을 갖추지 못했기에 결혼할 수 없다. 장가도 못 가고, 시집도 못 간다. 그들은 성결하지 않다. 수녀, 비구니, 승려, 그 밖에도 결혼하지 않는 특수한 무리가 있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로 성결하지 않다. 성결하지 않다는 건 어떤 뜻이냐? 불결함을 뜻한다. 이 불결함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패괴 성품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패괴 성품이 있다는 뜻이다. 이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패괴 성품이 있고, 모두 성결하지 않다. 그렇다면 결혼한 사람은 어떠냐? 결혼한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그들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차이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그들과 별 차이가 없다. 차이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다들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이고 모두 패괴 성품이 있습니다.) 그렇다. 다들 사탄에게 패괴되어 누구나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지 못한다. 모두가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사람도 아니고, 구원받는 사람도 아니고, 불결한 자들이다. 따라서 사람이 성결한지, 아니면 불결한지는 미혼이냐 혹은 기혼이냐를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사람이 왜 결혼과 관련해서, 결혼한 사람은 성결하지 않고 불결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느냐? 이 오해는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느냐? (결혼이라는 일에 대한 견해가 치우쳤습니다.) 결혼과 결혼 생활에 대한 견해가 치우친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일에 대한 견해가 치우친 것이냐? 정확히 얘기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방금 어떤 결혼도 결국 현실 생활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이 결혼 생활은 사람이 생각하는 불결함의 근원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불결함의 근원이 아니다. 사상 속에서 생각하는 불결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사실 사람은 머릿속으로, 또 마음 깊은 곳에서 다 알고 있다. 바로 사람의 정욕이다.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이 기혼과 미혼으로 사람의 성결함과 불결함을 경계 짓고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고, 잘못된 부분이다. 이 근본 원인은 바로 사람이 육체의 정욕을 그릇되고 터무니없이 이해하고, 부정확하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이해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부분이 어디냐? 사람은 인간에게 정욕이 있어서 결혼하면 이성과 관계하게 되고, 이성과 관계한 뒤 소위 육체 정욕의 생활을 하게 되면서 불결해진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정욕이 과연 무엇인지 얘기해 보자. 정욕을 올바르게 이해해서 그것에 대해 정확하고, 바르고, 객관적인 이해와 인식을 갖춘다면 너는 불결함과 성결함에 관한 난제와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사람은 결혼한 후 정욕을 채움으로써 정욕과 육욕을 해결한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같이 결혼한 사람은 성결하지 않고, 불결해졌어. 역시 독신으로 사는 처녀 총각이 성결한 사람들이야.’ 이것은 명백히 치우친 인식이다. 이 치우친 인식은 정욕이 무엇인지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 그럼 먼저 최초의 인류인 아담은 정욕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생각이 있고, 언어가 있고, 오감이 있는 동시에 자유 의지가 있고, 감정적 욕구도 있다. 감정적 욕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바로 함께하고, 붙잡아 주고, 대화를 나누고, 지켜 주고, 보살피고, 아껴 줄 반려자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것이 감정적 욕구다. 또 한편으로 사람에게는 정욕도 있다. 이 말의 근거는 무엇이냐? 아담을 만든 다음 하나님은 그에게 반려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반려자는 생활에 필요하고 감정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다른 방면의 필요에 관해서도 하나님이 한 말씀이 있는데, 그건 어떤 말씀이냐? 창세기 2장 24절 말씀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이 말씀의 뜻은 분명해서 우리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않느냐? 분명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만들 때 아담은 이쪽 방면의 욕구가 있었다. 물론, 이 말은 객관적인 표현이다. 더 주요하게는, 하나님이 그를 만들었을 때 그는 이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생리적 조건과 생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최초로 만든 인류의 조상인 아담, 최초의 육적인 인류인 아담의 실제 상황이었다. 그는 언어, 청각, 시각, 미각을 가진 동시에 감각 기관, 감정적 욕구가 있었고, 또한 정욕과 생리적 욕구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자유 의지도 있었다. 방금 얘기했듯이 이 몇 가지가 전체적으로 어우러져 하나님이 만든 하나의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 상황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남자의 생리적 구조다. 그렇다면 여자는 어떠냐?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와 다른 생리적 구조로 만들었다. 물론 남자와 같은 정욕도 만들었다. 이 말의 근거는 무엇이냐? 창세기 3장 16절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자식을 낳을 때 고생을 하게 될 것이라.”(중국어성경 직역). ‘자식을 낳는다’라는 표현에 등장한 자식은 어떻게 해서 생기느냐? 여성으로서 이런 생리적 욕구가 없다면, 더 구체적으로 말해 여자에게 여성의 정욕적인 욕구가 없다면 잉태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이것은 매우 분명한 일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두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이 만든 남자와 여자는 각기 다른 생리적 구조를 갖고 있지만, 공통적인 생리적 특징으로 둘 다 정욕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이 행한 이 일들과 인류에게 내린 지시의 행간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만든 인류는 생리 구조를 갖춤과 동시에 생리 구조의 욕구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정욕이라는 것은 사람 몸의 한 기관처럼 육의 일부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아침 6시에 밥을 먹으면 정오 12시가 됐을 때 음식이 거의 다 소화되어 위가 빈다. 그러면 위는 대뇌로 정보를 보내고, 대뇌는 너에게 위가 비었으니 밥 먹을 때가 되었다고 메시지를 보낸다. 그럴 때 위는 어떤 느낌이겠느냐? 속이 비고 불편해서 뭔가를 먹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뭔가 먹고 싶은 느낌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바로 너의 모든 신경계와 기관이 작동하고 대사 작용을 한 결과다. 이렇게 간단하다. 정욕도 신체의 여느 기관과 마찬가지 성질이다. 모든 기관은 신경계와 연결되어 있고, 신경계는 너의 각 기관을 지휘한다. 예를 들어 보자. 코는 냄새를 맡는 기관이다. 네가 악취를 맡았을 때 그 냄새가 너의 신경계로 들어오면 신경계는 대뇌에 이렇게 알린다. ‘이 냄새는 지독하고 안 좋아.’라고 말이다. 너는 이 정보를 받고 얼른 코를 막거나 손 부채질을 한다. 이렇게 일련의 동작이 발생하는 것이다. 보아라. 이 일련의 움직임과 행동, 이런 감각과 의식은 모두 네 신체의 어느 한 기관과 신경계가 지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아주 크고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들었다고 치자. 네 귀가 그 정보를 받아들이면 너는 견디기 힘든 느낌이나 반감이 생겨서 양쪽 귀를 틀어막을 것이다. 사실, 귀가 받아들인 것은 일종의 소리이자 정보일 뿐이다. 하지만 대뇌를 통해 귀는 이 소리가 사람에게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구별한다. 만약 별 영향이 없을 경우, 네가 듣고 분별해서 아무렇지 않으면 그냥 통과시킨다. 만약 네 심장이나 신체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으면, 대뇌가 분별한 다음 너에게 귀를 막거나 입을 크게 벌리라고 알려 주는 등, 일련의 행동 혹은 생각을 발생시킨다. 사람의 정욕도 이와 마찬가지로 상응하는 기관이 있다. 상응하는 기관이 상응하는 신경의 지배를 받아 다양한 판단과 해석을 내린다. 사람의 정욕은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이것은 육체의 여느 기관과 동급이고 동등하다. 다만 나름의 특수성이 있어서 사람은 늘 정욕에 대해 각양각색의 다양한 시선과 관점, 혹은 생각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제를 통해 너희가 올바르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정욕은 신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든 것으로, 인류가 생겼을 때부터 존재해 왔다. 정욕은 하나님이 정한 것이고 하나님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정욕에 대해 다양한 오해와 관념을 지닌다고 해서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 되거나 불결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다른 감각 기관과 똑같이 사람의 신체 안에 존재한다. 만약 하나님이 안배하고 정한 정당한 결혼의 틀 안에서라면 그것은 합리적이다. 하지만 사람이 방종하거나 그릇되게 사용한다면 정욕은 부정적인 것이 된다. 물론, 정욕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나 생각들이 부정적일 뿐이다. 예를 들어, 삼각관계, 음란 행위, 근친상간, 강간, 성범죄 등등 정욕과 관계되는 그런 일들이 부정적인 것이 되었더라도 이는 사람 육체의 원초적인 정욕과는 무관하다. 육체의 정욕은 육체의 기관과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류의 사악함과 패괴로 인해 정욕과 관계된 온갖 사악한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정당하고 정상적인 정욕과는 관계가 없다. 이 두 가지는 성질이 다른 문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삼각관계, 혼외정사, 근친상간, 성범죄, 이런 것은 모두 패괴된 인류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욕과 관계된 사악한 일들이다. 이 일들은 정당한 정욕, 결혼과는 관계가 없다. 이는 불결한 것에 속하고 정당하지 않으며,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제 잘 알겠느냐? (네.)

이번 교제를 통해서 기혼자들의 치우친 이해와 행동을 확실히 인식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느냐? (네.) “저희는 하나님 사역을 받아들였는데, 그럼 저희 부부는 따로 살아야 할까요?” 새 신자가 이렇게 물으면 너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야 합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하면 된다. “왜 따로 살려 하십니까? 두 분이 다투셨나요? 아니면 한쪽이 코를 크게 골아서 다른 한 분이 잠을 못 주무시나요?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그건 개인적인 문제니까 따로 지내셔도 되지만, 다른 이유라면 안 그래도 됩니다.” 이런 사람도 있다. “에고, 저희 둘이 같이 산 지도 40년이 다 돼 갑니다. 이 나이에 아이들도 다 컸는데, 따로 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같이 지내서 아이들한테 웃음거리가 될 게 아니라 만년의 지조를 지켜야죠.” 이게 말이 되느냐? (말이 안 됩니다.) 말이 안 된다. 만년의 지조를 지키다니, 만년의 지조가 어떤 것이냐? 여태 뭘 하다가 왔느냐? 무슨 내숭이냐? 이런 사람들은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얘기해 줘라. “하나님을 믿는 데 그런 얘기는 없습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그런 요구를 하지 않고, 그런 규정도 없습니다. 그건 차차 알게 될 겁니다. 본인이 지내고 싶은 대로 지내시면 됩니다. 그건 개인적인 사정일 뿐,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일과는 관계가 없고, 구원받는 일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일은 구하지 않아도 되고, 그것 때문에 뭘 희생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문제는 이제 해결되었느냐? (네.) 결혼에서 사람의 정욕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가장 어려운 부분이 해결된 셈이다. 이렇게 교제하니 잘 알겠느냐? 아직도 정욕이라는 것이 신비하게 느껴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정욕이 불결한 것, 더러운 것으로 느껴지느냐? (아닙니다.) 이를 놓고 볼 때 정욕은 불결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고, 정당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장난한다면 더는 정당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별도로 다루어야 한다. 어쨌든 이렇게 교제하니 결혼에 대한 여러 가지 현실적, 혹은 비현실적인 그런 환상이 모두 해결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결혼의 정의와 개념을 교제한 뒤 사람의 사상 속에 들어 있는, 결혼에 대한 기형적이고 치우친 추구와 이상, 바람을 기본적으로 일부 내려놓았다면, 나머지는 사람이 현실 생활에서 차근차근 자신과 대조해 보고 경험하고 체험해야 한다. 물론 가장 주된 것은 결혼 자체에 대해 사람이 올바른 이해와 관점을 지니는 것이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미래에 결혼할 계획이 있든 없든, 결혼에 대한 네 태도와 관점은 진리 추구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이쪽과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자세히 읽어 보아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결혼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인식을 가져야 하며, 최소한 그것이 진리에 부합해야 한다. 이 일에 관한 교제가 끝나고 사람의 식견이 넓어지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이제는 식견이 유치하거나 좁지 않다. 그렇지 않으냐? 네가 다른 사람과 이 일에 대해 논할 때, 상대는 나이도 많지 않은 네게 이 일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을 보고 묻는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됐어요?” “아직 미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인만큼 잘 알아요? 어떻게 성인들보다 더 깊이 있어요?” 그러자 네가 대답한다. “저는 진리를 깨달았어요. 또 제가 깨달은 진리는 다 근거가 있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제가 성경에서 찾아 드릴게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을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보세요. 제 말이 맞나 틀리나.” 결국, 그는 네 말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네가 말한 것은 다 순수하고 올바른 인식과 깨달음이고, 거기에 사람의 상상과 관념, 사람의 어떤 치우친 관점도 섞이지 않았고, 모두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사용된 한글성경 번역본은 ‘개역한글’을 인용하였습니다. 그 외의 경우는 따로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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