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0) 제 2 부
결혼에 대해 실제와 어긋난 그런 환상을 사람은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겠느냐? 연애나 결혼에 대한 자신의 사상 관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우선, 소위 애정관을 내려놓아야 하고, 오래도록 변치 않고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 사랑하겠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말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평생을 끝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다시 태어나도 오래도록 변치 않겠다니, 오래도록이 몇 년이냐? 사람이 그때까지 살면 요괴가 되지 않겠느냐? 지금 생을 잘 보내고, 잘 이해하고, 명확히 알면 그것으로 훌륭하다. 결혼 생활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한 남자 혹은 한 여자가 해야 할 일을 잘하고,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고, 서로 붙잡아 주고 협조하며 한생을 함께한다면 그것으로 훌륭하다. 그게 바로 완벽하고도 정당한 결혼이다. 나머지 소위 애정이니, 굳은 언약이니, 다음 생이니 하는 것들은 다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운명으로 정한 결혼과 관계가 없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에게 하는 분부, 부탁과도 관계가 없다. 어떤 결혼도, 결혼의 전제가 무엇이고 남녀 각자의 조건이 어떻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어떤 재능이 있든, 어떤 사회적 지위와 배경을 가졌든, 또는 남녀가 잘 어울리는 한 쌍, 선남선녀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결혼이 첫눈에 반해서 성사되든 아니면 부모가 정해서 성사되든, 우연한 만남으로 성사되든 아니면 오랜 연애 끝에 성사되든 관계없이, 어떤 종류의 결혼이든 관계없이, 양쪽이 맺어져서 결혼 생활에 들어가면 그 결혼은 반드시 현실 생활로 돌아오고, 반드시 먹고사는 그런 현실 생활로 돌아오게 되는데, 어느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결혼도, 애정이 있는 결혼이든 아니면 애정이 없는 결혼이든, 결국에는 일상생활로 돌아와야 한다. 예를 들어, 수도 요금, 전기 요금 낼 때가 되면 아내가 불평한다. “아휴, 요금이 또 올랐네. 월급 빼고 다 오른다니까. 물가가 이렇게 올라서야 어떻게 살라는 건지 원.” 원망은 원망이고 그래도 요금은 사용한 만큼 내야 하는 것이니 별수 있느냐? 요금을 내고 나면 덜 먹고 덜 써서 오른 가격만큼 아껴야 한다. 시장에서 할인하는 채소를 보고 남편이 말한다. “오늘은 단콩을 싸게 파니까 2주 치 넉넉히 먹을 수 있게 좀 많이 사 둬야지.” 아내가 말한다. “도대체 얼마나 사려고 그래요. 그렇게 많이 사면 다 먹기도 전에 상한단 말이에요. 게다가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도 않잖아요!” “안 들어가면 많이 먹으면 되잖아. 하루에 두 번 먹어. 맨날 비싼 것만 사려고 하지 말고.” 월급날 남편이 말한다. “이번 달에도 보너스 나왔어. 연말에 보너스 두둑이 받으면 여행이나 한번 다녀오자고. 다들 말리부니 발리니 하면서 여행 다니는데, 나도 당신 데리고 놀러 좀 다녀야지. 당신 기분 좀 내라고.” 과일 농사가 잘되자 부부가 또 의논한다. “작년엔 수확이 별로였는데, 올해는 과실이 커서 돈이 좀 되겠는데. 돈 들어오면 집 리모델링 좀 할까? 알루미늄 새시도 좀 큰 것으로 바꾸고, 현관문도 큰 철문으로 바꾸자고.” 겨울이 돼서 날씨가 추워지자 아내가 말한다. “이 솜저고리도 7, 8년쯤 입다 보니까 점점 얇아졌어요. 당신 월급 받으면 좀 덜 쓰고 내 솜저고리 살 돈 좀 남겨 줘요. 패딩 하나 사려면 못해도 3, 4백 위안, 5, 6백 위안은 한다고요.” “알았어. 돈 좀 남겨 뒀다가 당신 오리털 패딩 따뜻하고 좋은 걸로 하나 사 줄게.” “당신 것도 없으니까 내 거 살 때 같이 하나 사요.” “여유 있으면 사고, 안 그럼 나는 1년 더 버티지 뭐.” 남편이 말한다. “근처에 큰 식당 하나가 새로 들어왔대. 해산물이 없는 게 없다는데, 우리도 한번 가 볼까?” “그래요. 요즘은 좀 여유 있잖아요. 우리 형편이면 충분히 갈 만하죠.” 해산물 요리를 먹고 와서 기분도 좋고 행복해진 아내는 곰곰이 생각한다. ‘지금 사는 걸 보니까 시집은 제대로 왔구나. 해산물 요리도 다 먹고 말이야. 옆집 왕씨 부부는 해산물 요리 먹을 형편이 안 되던데. 요즘 정말 살맛 나네.’ 이런 것이 다 결혼 생활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아끼면서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것이다. 매일 정신없이 바쁜 직장 생활, 8시에 출근하려면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알람이 울린다. ‘정말 일어나기 싫지만 밥벌이해서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구나. 일어나야지.’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다. ‘다행히 지각은 면했으니까 보너스 깎일 일은 없군.’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다. ‘오늘도 겨우 버텼어. 정말 녹록지 않구나! 언제면 직장에서 벗어날까?’ 급여를 받고 밥그릇을 지키려면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한다. 편안하게 지내려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또 본인도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려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다가 나이를 먹고 노년에 접어든 어느 날 아내가 말한다. “아이고, 영감, 내 흰머리 좀 봐요. 이젠 눈가에 잔주름도 있고 팔자 주름도 생겼어요. 나 늙어 보여요? 늙어서 보기 싫다고 다른 여자 찾아갈 거예요?” 남편이 대답한다. “그럴 리가 있나? 바보 같긴. 나랑 평생을 살았는데도 그렇게 모르겠어? 내가 그런 사람이야?” 아내는 자기가 늙었다고 남편이 싫어할까 봐 늘 걱정한다. 갈수록 수다 떠는 아내와 갈수록 말수가 없어지는 남편, 둘 사이의 대화는 갈수록 적어지고, 이제는 각자 TV만 보면서 서로 관심도 주지 않는다. 어느 날 아내가 말한다. “영감, 우리 그동안 싸우기도 많이 싸웠죠. 당신이랑 사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다음 생에는 당신 같은 남편이랑은 안 살래요. 밥 먹고 나서 식탁 한 번 안 치워 주고, 다 먹으면 앉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당신 그 버릇은 평생 못 고쳤죠. 갈아입은 옷 자기 손으로 빨아 본 적도 없고, 맨날 내가 빨아서 챙겨 주잖아요. 나 죽으면 누가 그런 거 해 주나 보라고요.” 남편이 말한다. “흥, 당신 없으면 내가 못 살까 봐? 나랑 살겠다는 아가씨들이 줄을 섰어. 떨어지지도 않아.” 아내가 말한다. “이 양반이 허풍은. 그 지저분한 꼴 좀 봐요. 나 아니면 누가 당신이랑 살겠어요?” 남편이 말한다. “쳇, 발끈하기는. 밖에 가면 나 좋다는 사람 많아. 당신이나 날 무시하고 하찮게 생각하지.” 두 사람이 사는 게 어떠냐? 아내가 말한다. “어이구, 당신이랑 평생 살면서 기분 좋을 일도 없고, 무슨 좋은 추억이 없긴 해도 늙어서 생각해 보니까 지금 당신 곁을 떠나면 뭔가 허전할 거 같아요.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간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네요. 수다 떨 사람도 없고, 나 혼자 외롭게 지내긴 싫어요. 내가 당신보다 먼저 가야지. 당신 혼자 외롭게 살아 보라고요. 빨래해 주고 밥해 주는 사람도 없고, 챙겨 주는 사람도 없으면 내 생각이 간절할걸요. 쫓아다니는 아가씨들이 줄 섰다면서요? 나 죽으면 빨리 다른 사람 찾아요.” 남편이 말한다. “걱정 말라고. 내가 당신보다 오래 살 테니. 당신 가면 꼭 당신보다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사실, 남편이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겠느냐? ‘당신 먼저 가. 당신 먼저 가면 나야 혼자 외로움을 견디면 되지. 차라리 내가 괴롭고 고생하면 했지 당신 고생하게 두진 않을 거야.’ 아내는 남편이 이것도 저것도 별로고, 이런저런 버릇이 문제라고 늘 불평해 대지만, 남편 버릇이 안 고쳐져도 그렇게 살면서 서서히 익숙해진다. 결국, 여자는 인정하고 남자는 참으면서 그렇게 평생을 살아간다. 결혼 생활이란 이런 것이다.
결혼해서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고, 다툴 때도 많고, 아플 때도 있고, 궁핍해서 생활이 곤란할 때도 있다. 심지어 경사나 비극 등 온갖 일을 만날 때도 있다. 하지만 비바람을 함께 헤쳐 나간 두 사람에게 상대는 자기가 떠날 수 없는 짝이자 마지막에 눈을 감기 전에는 내려놓을 수 없는 짝이다. 짝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바로 반려자를 가리킨다. 남자는 여자를 평생 책임지고, 여자도 남자에게 평생 책임을 다한다. 여자는 남자의 일생을 동반하고, 남자도 여자의 일생을 동반한다. 누가 누구를 더 많이 동반하는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누가 더 크게 이바지하고 누구의 과오가 더 큰지, 나쁜 버릇은 누가 더 많은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누가 생활에서 주로 버팀목이 되고 주된 수입원이 되는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누가 한 집안의 주인인지, 누가 ‘주’이고 누가 ‘부’인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과연 누가 누구를 떠날 수 없는지, 남자가 여자를 떠날 수 없는 건지, 아니면 여자가 남자를 떠날 수 없는 건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살면서 말다툼을 벌일 때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생활이다. 이것이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남녀의 정상적인 생활이고, 또 가장 정상적이고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인류의 생활 현상이다. 생활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인성의 여러 가지 결함과 떨어질 수 없고, 인성의 편집적 특성과도 떨어질 수 없고, 인성의 여러 가지 필요와는 더더욱 떨어질 수 없다. 물론 양심과 이성의 지배 아래서 인성으로 행하는 어떤 올바르거나 그릇된 선택,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인 선택과도 떨어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생활이다. 이는 가장 정상적인 생활이다. 그저 상대적으로 정당하고 규칙적인 생활 현상과 실제 상황일 뿐,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의 실제 상황과 생활 현상은 사람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 주느냐? 그것은 바로 결혼에 대해 실제와 어긋나는 각종 환상을 내려놓고, 결혼의 올바른 정의 및 하나님의 정함, 안배와 무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모두 사람이 내려놓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정상 인성의 생활과도 관계가 없고, 정상적인 사람이 생활에서 다해야 할 의무, 책임과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회와 사악한 인류에게서 비롯된 결혼에 대한 각종 정의와 말들을 내려놓아야 하고, 특히 현실의 결혼 생활과 눈곱만큼도 관계가 없는 소위 애정을 내려놓아야 한다. 결혼은 평생의 맹약도 아니고, 평생의 굳은 언약도 아니며, 평생 서로에게 맹세한 약속을 실행하는 것도 아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 안에서 마주하는 현실 생활이고, 남자와 여자가 현실 생활 속에서 필요로 하는 것, 현실 생활 속에서 나타내는 모습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결혼이라는 주제를 교제할 때 애정이나 굳은 언약, 오래도록 변치 말자는 약속, 상대에게 하는 맹세와 같은 내용을 빼고 무슨 얘기를 하려 하십니까?” 인성을 논하고 책임을 논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탁, 하나님의 분부에 따라 한 여자 혹은 한 남자가 해야 할 일을 잘하고, 한 여자 혹은 한 남자가 다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한 여자 혹은 한 남자가 짊어져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그래야 네 의무, 네 책임, 혹은 네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교제하려는,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는 일은 정확히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사악한 인류, 사악한 시류에서 온 여러 가지 사상을 근거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 하나님이 결혼에 대해 한 말씀을 근거로 해서, 즉 하나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 원칙이 정확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결혼에 대한 온갖 환상을 내려놓는 것, 이 주제는 이제 거의 다 교제한 것 아니냐? 대부분 이해되지 않았느냐? (이해했습니다.)
방금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는 일을 교제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만약 제가 독신을 원하지 않아서 연애를 하고 결혼 상대를 찾으려면,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실행해야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는 겁니까? 이 원칙을 어떻게 실행해야 합니까?” 이것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원칙,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원칙에 관계된 것이 아니냐? 세상이 너에게 주입한 배우자 선택 원칙은 무엇이냐? 백마 탄 왕자, 백설공주, 돈 많고 잘생긴 남자, 돈 많고 예쁜 여자, 제일 좋은 건 재벌 2세다. 이런 사람과 결혼하면 20년 치 고생이 단축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반드시 다이아 반지와 웨딩드레스를 사 줄 능력이 되고, 화려한 결혼식을 치를 능력이 되는 사람이어야 하고, 사업 마인드가 있어서 돈을 잘 버는 사람이거나 이미 경제적 기반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세상이 주입한 사상 관점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꼭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거야.” 그러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아니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꼭 널 사랑한다는 보장은 없어. 사랑은 서로 주고받는 거야.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도 널 사랑해야지. 그가 널 사랑한다면 절대 먼저 너를 버리거나 포기하는 일은 없어. 하지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널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갑자기 버림받게 될 거야.” 이 관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말해 보아라. 어떤 원칙에 따라 배우자를 선택해야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냐? 지금 너희가 갖춘 올바른 사상 관점에 따라 이 화제에 관해 얘기해 보아라. (배우자를 찾으려면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 사람은 진리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추구하는 바가 저와 같고, 서로 뜻이 맞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서로 뜻이 맞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니, 구체적인 선택 기준이구나. 누가 또 얘기해 보아라. (그 사람이 인성을 갖춘 사람인지, 결혼 생활과 가정에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는지도 봐야 합니다.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결혼은 꼭 지금 상대를 찾고 싶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안배가 있으니 순종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구체적인 실행도 있고, 구체적인 사상 이론의 근거도 있구나. 순종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 일을 하나님에게 맡겨서 안배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동시에 속으로는 이 일에 대해 원칙이 있어야 한다. 또 누가 얘기해 보아라. (하나님, 제 관점도 저분들과 같습니다. 사탄이 주입한 결혼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내려놓고, 서로 뜻이 맞고 인성과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본분에 마음을 쓰고 하나님 주재에 순종하고 하나님 안배를 기다려야 합니다.) 다이아 반지를 사 줄 형편이 안 된다면, 너는 그 사람을 선택하겠느냐?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이아 반지를 못 사 준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수중에 돈이 좀 있어서 1캐럿짜리 다이아 반지를 사 줄 수 있는데도 0.3캐럿짜리 반지를 사 준다면 그래도 좋으냐? (이 부분에서는 그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요구하지 않는 것도 좋다. 돈을 남겨 두었다가 나중에 쓰겠다는 것은 길게 내다보는 것이다. 배우자를 만나기도 전에 살림 생각부터 하니 이 얼마나 소박하냐! 누가 또 말해 보아라. (하나님, 제가 생각하는 것은 우선 자신의 그런 세상적인 배우자 선택 기준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백마 탄 왕자나 돈 많고 잘생긴 사람, 혹은 낭만적인 사람을 만나려는 환상은 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을 내려놓고 올바른 관점으로 결혼을 대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순종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저와 뜻이 맞아야지, 세속적인 관점으로 자기를 챙겨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인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가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본분을 이행하러 나가고 늘 집에 없다면 어떻겠느냐? 가정생활을 너 혼자 꾸려야 하는데, 어느 날 가스가 다 떨어져서 너 혼자 가스통을 메고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면 어떡하겠느냐? (그러면 저 혼자 옮기겠습니다.) 혼자서 옮기지 못하겠으면 시급 알바를 부르면 된다. (형제자매들에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그것도 방법이다. 그런데 1, 2년이 지나도, 3, 5년이 지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화가 나지 않겠느냐? ‘이건 완전 생과부 아냐? 그 사람이랑 결혼한 게 다 무슨 소용이야? 결혼 안 한 거나 똑같아. 지금도 나 혼자 살고 있잖아. 뭐든 다 나 혼자 해결해야 하고. 이런 사람과 결혼하다니 정말 재수가 없구나!’ 이렇게 생각해서야 되겠느냐? (안 됩니다. 남편은 본분을 이행하고 있고, 그건 정의로운 사업입니다. 그러니 불쾌한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잘 생각했다. 현실 생활에서 이 모든 걸 이겨 낼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만난 사람이 특히나 올곧고, 평소에 웃거나 말하지도 않고, 낭만도 없어서 예쁜 옷 하나 사 준 적 없고, 꽃다발 한 번 안겨 준 적 없고, “사랑해.” 같은 말은 더더욱 해 본 적이 없다면, 너는 속으로 그가 널 사랑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정말 좋아서 살면서 너를 잘 챙기고 보살펴 주는데, 단지 그런 말을 할 줄 모르고, 그런 낭만적인 행동도 할 줄 모르고, 심지어 네가 울적할 때 달래 주거나 위로할 줄 모르는 것이라면, 속으로 그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들겠느냐? (하나님을 믿기 전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원망하겠지만,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니 그가 그런 말이나 그런 낭만적인 행동을 하고 말고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모두 세상 사람들의 사물 보는 관점에 해당하지, 정상 인성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지금은 네가 그 상황에 처해 있지 않으니 본인이 그런 환경에 놓였을 때의 심정이 어떤 건지, 기분이 어떻게 요동치고 어떻게 변화하는지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본인이 하나님을 믿는 이상 상대방에게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 되고,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상대방에게 원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건 자신이 바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 그렇게 행동하기가 쉬우냐? (자신의 기호를 버리고 자신의 세속적인 관점을 버려야 그나마 내려놓기가 수월할 것입니다.) 이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려 주마. 남자, 여자는 결혼 생활에서 이런 문제를 마주할 것이고, 그런 생각, 그런 기분을 가질 것이고, 또한 그런 것이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있다. 네가 선택한 상대가 네 이상형이라면, 그 일은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준 것이라는 얘기는 접어 두자. 본인이 선택한 사람이니 너는 그의 모든 면이 만족스럽다. 특히 그가 너와 뜻이 맞아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하는 일이 모두 정의롭다면, 너는 이성적으로 그를 대해야 한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고, 그가 너의 감정에 무심한 것도 허용하고, 심지어 그가 네 존재에 대해 무심한 것도 허용해야 한다. 이것이 이론적으로 네가 해야 할 것이다. 그 밖에도 특별한 상황, 혹은 특별한 일로 인해 네게 그런 필요가 생기거나 그런 기분이 들면 너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했다고 해서 그런 것들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느냐? 그렇지 않다. 어디까지나 사람은 정상 인성으로 살아가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생각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그 정서가 옳은지 그른지는 잠시 접어 두기로 하자. 지금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바로 그 정서를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번에 내려놓더라도 어떤 객관적인 상황에서 그게 또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너는 그런 추구, 혹은 그런 필요를 이미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성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다양한 연령대에서, 다양한 정도로, 많든 적든 그런 필요가 있고, 그런 정서가 있다. 이런 실제 상황을 잘 알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번에는 내려놓더라도, 혹은 그런 정서가 그렇게 심하지 않아서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다음번에는 또 분명 그런 정서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너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거기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넘겨도 된다. ‘나도 참, 아직도 이쪽 성품이 안 변했구나.’라고 하는데, 그건 무슨 성품이 아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정서일 뿐 네 성품과는 관계없으니 호들갑 떨 필요 없다. ‘어휴, 아직도 내가 왜 이럴까? 난 진리를 추구하는데, 어쩜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지? 이거 정말 큰일이네!’ 호들갑 떨지 않아도 된다. 그건 정상 인성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의 정서가 표현된 것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것은 정서를 처리하는 일종의 태도다. 또한, 그것이 네 정상적 생활의 질서와 규칙에 지장을 주지 않고, 네 영 생활과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 된다. 예를 들어, 남편(아내)이 본분 이행에 바빠서 오랜 시간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고, 같이 대화할 시간도 없었다고 해 보자.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자매 부부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너는 갑자기 마음이 울적해졌다. ‘다른 부부는 저렇게 같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행복하고, 깨가 쏟아지는데, 우리 집 형제는 어쩜 저렇게 무심할까? 어떻게 된 게 요즘 어떠냐, 잘 지내느냐는 안부 인사 한마디도 없네. 어쩜 나한테 관심도 없냐고. 날 아끼고 사랑할 줄 모르는구나.’ 이런 기분이 들다가도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어휴, 이렇게 기분 상하면 안 되겠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속으로 슬그머니 화가 나서 혼자서 신경전을 벌인다. ‘나도 모른 체할 거야. 먼저 연락 올 때까지 기다리겠어.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화를 낼 거야. 몇 년째 부부로 살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못 만났는데도 보고 싶단 말 한마디 없구나. 대체 내가 보고 싶긴 한 걸까? 날 모른 체하면 나도 모른 체할 거라고!’ 혼자서 신경전을 벌이면서 이런 기분으로 사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이렇게 화가 나고 우울할 때, 정상적으로 먹고 자고,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예배 드리고 본분을 이행하고, 형제자매들과 정상적으로 지낼 수만 있다면, 그런 정서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속으로 그냥 원하는 대로 생각해라. 생각이야 어떻든 네 이성이 정상적이고 본분을 정상적으로 진행하면 된다. 강제로 그런 정서를 억누르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하나님께 징계와 채찍질을 달라고 기도하거나 무슨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더더욱 없다. 호들갑 떨지 않아도 이런 정서는 조금 지나면 사라진다. 만약 남편이 너무 보고 싶으면 전화해서 안부도 묻고, 둘이 마음을 나누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그런 일시적인 정서와 서먹함은 사라지지 않겠느냐? 사실 그가 네게 뭘 해 주지 않아도 된다. 가끔 드는 일시적인 기분일 수도 있고,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일시적으로 외롭거나, 일시적으로 서글프거나 언짢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럴 때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러면 남편도 잘 보내고 있고 역시 전처럼 너를 아끼고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단지 사역이 바쁘거나 남자들이 비교적 세심하지 못해서, 정신없이 본분을 이행하느라 시간이 가는 것도 몰라서 연락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남편이 바쁘게 보내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냐? 그건 네가 바라 마지않던 일이 아니냐? 그가 악행을 저지르고 방해와 교란을 일삼다가 제명되기라도 한다면 그건 또 걱정거리가 아니겠느냐? 그가 지금 모든 게 정상이고 모든 게 전과 같으면 네가 안심이 되지 않겠느냐? 뭘 더 바라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전화를 걸어 두 사람이 몇 마디라도 주고받으면, 이방인들이 말하듯 내면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어느 정도 풀면, 이 문제는 해결된 것 아니냐? 어려울 게 뭐 있느냐? 전화를 걸어 서로 관심을 표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정죄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둘은 합법적인 부부다. 전화로 말 몇 마디 주고받고, 서로 그리움을 토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고, 인지상정이다. 이것은 인성의 범위 내에서 해야 할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결혼을 운명으로 정해 준 것에는 이런 게 있다. 그건 바로 서로 동반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붙잡아 주는 것이다.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 네가 그를 대신해서 그 책임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니냐? 이건 간단한 일이고,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실행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 마음속에 온갖 정서가 싹틀 필요가 있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 아주 간단하게 실행할 수 있다.
아까 내가 제시했던,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문제에 대해 너희는 각자 자기 생각을 얘기해 보았다.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으려면 우선은 신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안배와 정함에 순종해야 한다. 사람은 결혼에 대해, 자신의 반쪽이 과연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주관적이고도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그 어떤 환상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로 하나님의 안배와 정함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가장 어울리는 사람을 예비해 준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순종하는 태도는 필요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다음으로는, 사회의 사악한 시류로부터 주입된 배우자 선택 기준을 내려놓고 올바른 배우자 선택 기준을 확립해야 한다. 즉, 본인의 반쪽이 최소한 자기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자기와 같은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큰 방향이다. 또한, 결혼 생활에서 남자 혹은 여자의 책임을 다하고 한쪽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방면은 어떻게 봐야 하느냐? 그 사람의 인품이 어떤지, 책임감이 있고 양심이 있는지 봐야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양심이 있는지, 인성이 있는지는 어떻게 아느냐? 같이 지내보지 않으면 그의 인성이 어떤지 알 방법이 없다. 같이 지내더라도 시간이 짧으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가 본분과 하나님의 부탁, 하나님 집 사역을 책임감 가지고 대하는지를 봐야 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지, 본분 이행에 충성심이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는 한 사람의 인품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만약 인품이 아주 올곧아서 하나님 집에서 맡긴 사역을 대할 때 특히 마음과 책임을 다하고, 엄격하고 진지하고, 빈틈이나 소홀한 구석이 조금도 없고, 전혀 태만하지 않다면, 또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이 무슨 말을 하든 진지하고 자세히 들어서 이해하고, 알아듣고는 바로 실행에 옮긴다면, 이런 사람은 꼭 자질이 높지 않더라도 최소한 본분과 교회 사역을 대충 건성으로 대하지 않고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본분을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대한다면, 분명 너와 한마음 한뜻으로 지낼 수 있고, 너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다. 이런 사람의 인품은 검증을 이겨 낼 수 있다. 설령 네가 늙고 병들고 추해지더라도, 혹은 네게 어떤 버릇이나 결함이 있더라도 그는 이런 것들을 올바르게 대하고 너를 포용할 수 있다. 또한, 최선을 다해 너와 가정을 지키고, 너를 보호해 줄 수 있다. 너에게 안정적인 생활을 선사하고 네가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이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의 결혼 생활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다. 그 사람 덕분에 풍족하고 사치스럽고 낭만적으로 살거나 감정적으로 혹은 다른 면에서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너는 안심할 수 있고, 그가 있어서 생활이 안정적이고, 별다른 위험이나 불안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를 보면 그 사람이 20, 30년 후, 심지어 노년에 이르러 어떻게 생활할지 알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네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조금 높은 기준이라서 지금 사람들 중에서 찾기가 쉽지는 않다. 그렇지 않으냐? 한 사람의 인품이 어떤지, 결혼 생활에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려면 그 사람이 본분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된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또 하나는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보면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적어도 인성과 윤리 도덕을 상실한 짓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너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눈에 뵈는 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혹은 인성이 흉악하고 간사하고 거만해서 마음에 하나님도 없고, 다른 사람도 안중에 없다면, 사역과 본분을 대할 때, 심지어 하나님의 부탁과 하나님 집의 중대한 일을 대할 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멋대로 처리하고, 함부로 행동한다면, 신중함은 눈 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도 없고, 원칙도 구하지 않고, 특히 제물을 대할 때 거리낌 없이 독차지하고 유용하는 등 겁대가리를 상실했다면, 그런 사람은 절대 만나지 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그가 지금은 너에게 달콤한 말로 굳게 맹세하겠지만 어느 날 기분이 나쁘거나 네가 그의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하고, 그의 눈에 더 이상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곧바로 널 사랑하지 않는다느니, 너에게 아무 느낌이 없다느니 하는 말도 할 수 있고, 갑자기 너를 버릴 수도 있다. 아직 이혼도 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밖에서 함부로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닐 수도 있다. 이게 전부 가능한 일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너를 버릴 수 있고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인간이다. 그런 사람은 네가 평생을 맡길 가치가 없다. 네가 그런 사람을 연인이나 남자 친구, 배우자감으로 만났으면 정말 큰일이다. 설령 키 크고 돈 많고 잘생기고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또 널 지켜 주고 보살펴 준다 해도, 겉으로 볼 때 남자 친구로나 남편으로나 충분히 합격이라고 해도,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네 배우자감이 아니다. 만약 그에게 반해서 그와 연애하고 결혼한다면, 그는 네 평생의 악몽이자 재난이 될 것이다. 너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진리를 추구하니까 두렵지 않아.” 하지만 너는 이미 악마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가 하나님을 증오하고 대적하면서 네가 하나님을 못 믿게 갖은 방법으로 교란한다면 견딜 수 있겠느냐? 네가 가진 그만한 분량과 신심으로는 그의 괴롭힘을 이겨 내지 못한다. 단 며칠이면 너는 그의 괴롭힘에 굴복해서 용서를 빌고, 하나님을 믿지 못해 신심을 잃어버린다. 네 머릿속은 온통 은혜와 원한, 애증으로 가득해서 마치 분쇄기에 던져진 고기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사람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안에 철저하게 함몰되어 결국 마귀와 같이 망하고, 네 인생은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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