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 제 3 부

도대체 어떻게 지난날의 증오와 분노를 내려놓을 것인가 하면, 이른바 인간이 아닌 자들을 명확히 아는 것이 한 가지다. 그들의 본성 본질은 마귀요, 사탄이다. 그들은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게 본질이다. 본질이 마귀, 사탄, 큰 붉은 용과 궤를 같이하며, 그 근원이 같다. 그들이 너를 곤경에 빠뜨리고 너에게 어떠한 상처를 주는 것은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키는 것과 같다. 이 점을 알면 네 증오와 분노의 정서를 조금 내려놓게 되지 않겠느냐? (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걸 인식해도 소용없습니다. 가끔 생각나면 여전히 괴롭다고요!” 괴로우면 어찌해야겠느냐? 조금도 괴롭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상처가 생기면 흔적이 새겨지기 마련이고, 흔적이 남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사회의 불공평한 현상은, 너의 증오와 분노를 일으킬 만한 사람과 일, 사물은 너로 하여금 이 사회의 불공평과 인류의 음험함, 흉악함, 사악함, 그리고 인간 세상의 불공정, 처참함을 느끼게 함으로써 네게 광명을 향한 염원을 심어 주고, 구세주가 나타나 너를 이 모든 고난에서 구원해 주길 바라는 염원이 생겨나게 한다. 그럼 그 염원에는 배경이 있지 않으냐? (네.) 그 염원이 쉽게 생겨난 것이냐? (아닙니다.) 네가 인류 가운데서, 이 사회에서 그 어떤 상처도 받은 적이 없다면 너는 역시 좋은 사람이 많다고 느낄 것이다. 네가 밖에 나갔다가 넘어지면 누군가가 부축해 주고, 간혹 물건을 사려는데 돈이 부족하면 옆에 있던 사람이 대신 내주고, 간혹 지갑을 잃어버리면 누군가가 주워서 너에게 돌려주고, 이런다면 너는 역시 좋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 사회에 대한 너의 인식이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의의와 하나님이 하는 구원 사역의 필요성을 네가 얼마나 알 수 있겠느냐? 구세주가 너를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구원해 주길 바라는 네 염원이 얼마나 클 수 있겠느냐? 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저 일종의 바람, 일종의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경험한 굴곡과 고통이 많고 온갖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 본 사람일수록, 바꿔 말하면, 이 사회적 배경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인류와 사회에 대한 깊은 증오와 분노가 생긴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하루빨리 이 사악한 시대를 끝내고, 하루빨리 이 사악한 인류를 멸하고, 하루빨리 자기를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구원해 주고, 악인에게 보응을 받게 하고, 좋은 사람들이 보호받게 해 주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쯤에서 너는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어휴, 그 마귀들한테 고맙다고 해야겠네. 그들이 내게 해 준 불공평한 대우와 나에 대한 경시, 모욕, 억압에 감사해야겠어. 그들의 악행과 그들이 준 아픔이 나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으니까. 덕분에 더는 이 세상에 미련이 없고, 이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데도 미련이 없게 됐어. 덕분에 나는 기꺼이 하나님 집에 왔고, 기꺼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내 일생을 바치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내고, 그들과 어울리며 나쁜 물이 들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하게 됐어. 그들의 악행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 그들처럼 세상의 흐름을, 명예와 이익을, 나은 생활을, 육체적 즐거움을, 아름다운 미래를 좇고 있었을 거야. 이제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런 불필요한 길을 걸을 필요가 없어졌어.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적대시하지 않아. 그들의 진면목을 똑똑히 보았어. 그들은 봉사자고, 하나님 사역의 부각물이야.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이 세상과 인류의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이 세상과 인류가 점점 더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러한 고통을 겪으면서 나는 더 이상 내 소망과 희망을 이 세상 또는 어느 위대한 누군가의 손에 맡기지 않게 됐어. 이제 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공평과 공의가 권세를 잡으시길 바라.’ 이렇게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네 증오와 분노의 정서가 점차 완화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완화된다. 그러면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네 마음속 각도와 관점에 변화가 생기지 않겠느냐? 이는 네가 앞으로 걸을 길, 네 선택, 네 목표가 차츰 변화하고 있으며, 네가 차츰 올바른 목표와 방향을 향해 추구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과거에 자신에게 일어난, 가슴을 찢어 놓고 이 세상을 증오하게 만들었던 일을 떠올리고, 그것의 의의와 본질을 똑똑히 보고 나면, 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가득 찬다. 네 마음이 감사로 가득 차면 거기에 도취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여전히 사탄 마왕에게 미혹당하고, 해를 입고, 집어삼켜지고 있어. 정말 불쌍해!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나도 그들처럼 세상을 추구하고, 명예와 이익, 지위를 위해 계속 바쁘게 뛰어다니고, 아무리 고생해도 돌이킬 줄 모르고, 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야. 얼마나 가엾어! 이제 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깨달았어. 그 일을 제대로 보게 됐어. 사람은 응당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어야 해. 이는 무엇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어.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선대하시고 내가 더는 그런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해 주셨으니 앞으로 나는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야 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해. 예전처럼 엉망진창으로 살면 안 돼.’ 보아라. 좋은 염원이 생기지 않았느냐? 사람의 사상과 의식 속에 올바른 목표와 인생 방향이 차츰차츰 형성되고 있지 않느냐? 이러면 인생의 바른길을 걸을 수 있지 않겠느냐?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긍정적 정서와 긍정적 염원이 생겼을 때 부정적 정서를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겠느냐? 얼마간의 시간 또는 몇 번에 걸쳐서 명확히 알게 되면 그러한 일이 더는 너의 생각을 교란하거나 네가 걷는 길을 좌우하지 못한다. 그때가 되면 부지불식간에 증오와 분노의 정서를 내려놓게 된다. 그것들이 더 이상 너의 마음을 점거하지 못한다. 그다음은 패괴 성품을 차츰 해결하는 것이다. 패괴 성품의 해결에 관련되면 곧 진리 추구와 관련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곧 인생의 바른길에 들어서는 것 아니냐? 바른길로 들어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선은 세상, 인성, 인류에 대한,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각종 견해를 내려놓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견해를 간파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견해는 네 마음속 정서에 숨어 있다. 그러한 정서는 너의 인간적인 판단과 사유 방식을 주도하고 너의 성격과 언행을 주도한다. 당연히 네 양심과 이성 또한 주도한다. 더 중요한 점은, 그것이 네 인생의 목표와 네가 걷는 길을 주도하고 거기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갖가지 부정적인 정서를, 너를 통제하는 각종 정서를 내려놓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실행해야 할 첫걸음이다. 우선 갖가지 부정적인 정서를 해결해야 한다. 발견되는 족족 그것을 해결하고, 후환을 남기지 마라.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면 너는 더 이상 사슬을 찬 채로, 부정적 정서를 지니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 패괴 성품을 드러냈을 때 진리를 구해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쉽겠느냐, 어렵겠느냐? 사실 그렇게 쉽지는 않다.

너희는 내가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교제하고 분석하는 동안 너희 자신에게 비추어 보았느냐? 어떤 사람은 “저는 아직 나이도 많지 않고 인생 경험도 적습니다. 딱히 좌절과 실패를 겪은 적도 없고 상처를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러면 저는 부정적 정서가 없는 게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부정적 정서가 있다. 사람은 모두 많은 난관을 만나며, 쉽게 부정적 정서가 생긴다. 예컨대 이 시대에는 사회의 사악한 풍조라는 배경 탓에 많은 아이가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란다. 어떤 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못 받고, 어떤 아이는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는다. 어머니 또는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는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있어 일종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네가 어느 연령대에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사랑을 잃었든, 정상 인성의 각도에서 보면 그 일은 네게 다소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로 인하여 마음의 문을 닫았을 테고, 열등감에 빠지거나 짜증스럽게 변하거나 안정감을 잃고 불안해지거나, 이성을 멸시하고 피하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특수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정상 인성 안에 어느 정도 비정상적인 부분이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뒤틀린 데가 있는 것이다. 그 예로, 아버지의 사랑 없이 자란 여자아이는 남자를 비교적 낯설어한다. 어려서부터 일상생활 전반을 스스로 돌보는 법을 배워야 했을 테고, 심지어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처럼 가정의 생계유지와 온갖 대소사를 떠맡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너무 일찍 마음 쓰는 법과 책임지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혹은 자신과 어머니, 가정을 보호하려는 자기방어 의식이 매우 강한 동시에 열등감이 몹시 심할 수도 있다. 이렇게 특수한 환경에서 자란 결과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내심 자기한테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이러한 정서가 그녀의 판단과 선택에 심각한 영향을 준 적이 있든 없든, 이와 같은 정서가 존재한다. 요컨대, 성인이 된 이후 사람의 사상을 주도하는 부정적 정서는 전부 그 뿌리가 깊고, 원인이 있기에 생겨난 것이다.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란 일부 사내아이들을 예로 들겠다. 만약 그들에게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뿐이라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가사를 분담하는 법을 배우고, 성격이 다소 모성적인 쪽으로 변한다. 여자를 잘 돌보고, 여자에게 잘 공감하고, 여자를 잘 포용하고, 잘 편들어 준다. 반면 남자에게는 선입견이 있는 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남자를 은근히 싫어하고, 반감을 느끼고 무시한다. 남자는 전부 무책임하고 불성실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사람 중에도 비교적 정상적인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일부는 남성 혹은 여성에 대해 일반적이지 않고 실제에 부합하지 않거나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는 모두 인성의 결함이고 약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네게 이러한 방면의 문제가 있음을 발견해 지적했거나 또는 너 스스로 성찰을 통해 네게 이 방면의 심각한 부정적 정서가 있으며, 이미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의 선택과 실행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발견하고 인식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너는 반드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분별하고 해결해야 한다. 부정적 정서의 결박, 통제,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적인 희로애락, 사유, 판단, 양심과 이성이 왜곡되거나 편향되거나 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왜곡, 편향성, 극단성을 피한 다음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정상 인성의 본능과 자유 의지 안에서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자기 사상, 본능, 자유 의지, 판단 능력, 양심과 이성이 모두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상 인성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너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종의 부정적 정서가 너를 통제하면 그 방면의 네 정상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려면 기본적으로 정상 인성의 양심, 이성, 본능, 자유 의지가 모두 정상이어야 하고, 정상적인 희로애락이 있어야 한다. 보아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정상 인성 범위 내에는 극단, 편향, 왜곡이 없고 인격 분열이나 변태도 없다. 편향적인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항상 자기는 아무것도 못 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편향적이지 않겠느냐?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생각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무조건 남자만 우러러보면서 남자가 좋다, 남자가 여자보다 유능하다, 여자는 무능하다, 여자는 쓸모가 없다, 여자의 능력은 남자보다 열등하다, 여자는 전체적으로 남자만 못하다고 한다면 이는 편향적인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극단적인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항상 자기 본능을 넘어서야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을 원하고 한계에 도전하려는 모습이 있다. 어떤 사람은 남이 밤에 다섯 시간만 자고도 정상적으로 종일 일하는 걸 보면 자기는 굳이 네 시간만 자면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 보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남이 하루에 두 끼만 먹고도 넘치는 기운으로 종일 일할 수 있는 걸 보면 자기는 굳이 하루에 한 끼만 먹으려고 한다. 이는 육체를 해치는 짓이 아니냐? 뭐 하러 그렇게 남을 이기려 하느냐? 왜 육체와 힘겨루기를 하려고 드느냐? 어떤 사람들은 50대가 되어 이가 흔들려서 뼈를 바르거나 사탕수수를 씹지 못하게 됐을 때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이 한두 개쯤 빠지면 뭐 어때. 먹을래! 난관을 극복해야지, 이런 것도 극복하지 못하면 기개가 없는 거야. 머저리라고!” 극단적이지 않으냐? (극단적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걸 기어코 해내려고 한다. 자신의 인간적 본능으로는 안 되는 걸, 자기 재능, 지혜, 분량, 그리고 자기가 배운 지식, 거기에 더하여 자기 나이와 성별로는 안 되는 걸 기어코 되게 하려 한다. 어떤 여자는 지기 싫어하며 이렇게 말한다. “남자가 할 수 있으면 우리 여자들도 똑같이 할 수 있어요. 남자가 건축을 하면 우리도 할 수 있고, 남자가 비행기를 몰면 우리도 몰 수 있고, 남자가 권투를 하면 우리도 할 수 있고, 남자가 100kg짜리 마대를 짊어지면 우리도 짊어질 수 있다고요.” 그러다가 무게에 짓눌려 피를 토한다. 이래도 잘난 체할 수 있겠느냐? 태도가 극단적이지 않으냐? 편향적이지 않으냐? 이러한 태도는 전부 극단적이고 편향적이다. 황당무계한 사람들은 흔히 문제에 대해 이렇게 사고하고 사람과 일, 사물을 이렇게 대한다. 문제를 이렇게 다루고 해결한다. 그러니 사람의 이러한 편향적 태도를 해결하려면 우선 극단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방금 말한 극단적인 것들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각종 극단적 정서다. 극단적 정서는 종종 특정한 환경에서 극단적인 생각과 행동을 유발하여 사람을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한다. 이러한 극단적 정서는 사람을 우매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어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길로 이끌고 해를 입게 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지 황당무계하고, 편향적이고, 극단적인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극단적이거나 황당무계한 사람은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할 리가 없고, 진리를 순수하게 이해할 리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이거나 편향적인 사람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를 대하고, 진리를 실행한다. 이는 아주 위험한 일이며 골치 아픈 일이다. 사람에게 있어 지극히 큰 손해인 한편, 하나님을 심각하게 욕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네가 한계에 도전하길 바라지 않고, 네가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진리를 실행하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네 인성의 각 방면이 모두 정상적인 상황에서, 네가 받아들일 수 있고 해낼 수 있는 인성 범위 안에서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실행해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하면 된다. 최종 목적은 네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네 각종 사상과 관점을 점진적으로 바로잡고, 바꾸고, 사람의 패괴 성품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에 대한 네 인식을 점차 심화시키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점점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면 구원받게 된다.

각종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것을 교제하는 것이 의의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아주 오래전에 생긴 각종 부정적 정서든, 아니면 현재 눈앞에서 생긴 각종 부정적 정서든, 사람이 그것을 올바르게 대하고 맞는 방식으로 해소하고 해결하게 하는 것이다. 잘못되고 부정적인 정서에서 벗어나 어떤 일이 임하든 이러한 부정적 정서에 더는 빠지지 않는 경지에 점차 이르게 하는 것이다. 또다시 각종 부정적 정서가 생겼을 때 스스로 의식과 분별력을 가지고 그것이 네게 미치는 위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와 동시에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차츰차츰 내려놓아야 한다. 이러한 정서가 생겼을 때 네가 자제력과 지혜를 가지고 내려놓을 수 있어도 좋고, 혹은 진리를 구해 해결하고 처리해도 좋다. 아무튼 네가 올바른 방식과 태도로 올바른 입장에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 영향만 없으면 된다. 이러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네게 지장을 주고 너를 가로막는 것들이 점점 줄어든다. 너는 점차 하나님이 요구한 정상 인성의 범위 내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또는 방해가 나날이 줄어드는 가운데 진리를 추구하고, 각종 환경하에 자신이 드러내는 패괴 성품을 해결하게 된다. 그럼 각종 부정적 정서를 해결할 방법이 생기지 않겠느냐? 우선은 자기가 드러내는 패괴를 바탕으로 자기를 성찰해야 한다. 자기 내면에서 부정적 정서가 자기한테 영향을 주고 있지 않은지 보고, 자기가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가진 채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고 있지 않은지 봐야 한다. 또 하나, 자기 마음속에 깊게 각인된 기억을 성찰해 봐야 한다. 자기한테 일어난 그 일들이 어떠한 상처나 낙인을 남기지 않았는지, 그 일들이 항상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올바른 방법과 방식을 좌우하고 있지는 않은지 봐야 한다. 이렇게 과거에 상처를 받아 생긴 각종 부정적 정서를 파헤치고 나면, 이어서 할 일은 진리에 근거해 하나씩 분석하고, 분별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한 예로, 여러 차례 리더로 발탁됐으나 또 몇 번이나 교체되고 본분이 조정된 사람들이 있다. 그에게는 아주 부정적인 정서가 생겼다. 그는 몇 번이나 발탁됐다가 교체되고 조정되는 과정에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 결점과 부족함, 자기의 패괴, 그리고 자기가 범한 과오의 근원이 도대체 무엇인지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시종일관 해결되지 않았기에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인상이 남았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쓰는 방식도 결국 이렇네. 쓸모가 있을 때는 발탁하더니 쓸모가 없어지니까 바로 차 버리잖아.’ 사람에게 이런 정서가 생겼을 때 사회에서는 풀 곳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풀 곳도, 풀 방식도, 풀 환경도 없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혼자 소화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말하는 소화는 진정으로 내려놓는 게 아니라 그 정서를 가슴속 깊이 묻어 두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언젠가 자기가 본분을 잘 이행하면 형제자매들이 그걸 보고 다시 자기를 리더로 뽑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평온히 본분을 이행하면 됐지, 리더 같은 건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누가 나를 발탁하든 나는 리더를 맡지 않을 거야. 망신당하기도 싫고 그런 고통을 겪기도 싫어. 누가 리더가 되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누가 교체되든 그것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난 다시는 리더 안 해. 그러면 교체되는 타격과 상처를 받을 필요도 없겠지. 난 내 몫의 일만 제대로 하고 책임만 다하면 돼. 나중에 내 종착지가 어디일지, 결말이 어떨지는 하나님 손에 맡길래. 그건 하나님 소관이야.” 이는 어떠한 정서냐? 열등감은 그다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의기소침이라고 한다면 꽤 적절할 것이다. 의기소침, 우울, 자기 안에 갇힌 상태, 답답함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 집은 정의를 펼칠 수 있는 곳이야. 하지만 나는 몇 번이나 발탁되고도 거듭 교체됐어. 마음속이 억울함으로 가득하지만, 따질 곳도 없으니 순종하자! 여기는 하나님 집이야. 어디 가서 따질 수가 있겠어? 이미 이렇게 사는 데에 익숙해. 사회에서도 대접을 못 받더니 하나님 집에서도 이렇네. 앞으로의 일은 생각하지 않을래.’ 종일 기분이 울적하고, 무슨 일에든 흥미가 안 생기며, 뭘 해도 대충이다. 할 수 있으면 조금 하고, 못 하면 마는 식이다. 공부하지도 않고, 공들이지도 않고, 신경을 쓰지도 않고, 대가를 치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김이 샌다. 처음의 뜨겁던 마음은 식어 버렸다. 뭐든 자기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과거의 자신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울함이 아니냐? (맞습니다.) “교체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다른 사람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허, 자질도 부족한 내가 무슨 생각이 있겠어요? 나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걸요.” “다시 리더로 뽑힌다면 하고 싶은가요?” “에이, 하고 싶기는요. 그건 실제적이지도 않은걸요! 난 자질이 부족해요.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해 드릴 수 없어요.” 그를 자포자기했다고 하기에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일종의 울적한 정서가 있다. 의기소침하고, 자기 안에 갇혀 있고, 우울하다. 누구에게도 진솔한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고, 자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문제와 어려움을, 자기의 패괴된 내적 상태와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 하지 않으면서 이렇듯 억지로 버티고 있다. 이는 어떠한 정서냐? (의기소침입니다.) 게다가 그는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뭘 시키면 하고, 교회에서 무슨 일을 안배해 주면 고분고분히 할 거야. 완수하지 못하더라도 내 탓은 아니야. 자질이 떨어지는 걸 어쩌겠어!’ 사실 이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도 있다. 언제까지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언제까지고 본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언제까지고 하나님을 따를 것이다. 다만, 생명 진입에 집중하지 않고,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이는 어떠한 문제냐?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도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골치 아픈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의 입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리는 절대로 없다. 때려죽인대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일부 특수한 일 때문에, 일부 특수한 환경과 상황을 겪으면서 일부 특수한 사람들에게서 들은 특수한 말이 그를 멍청하게 만들고 맥 빠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의욕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적 정서가 생긴 것이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부정적 정서가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뜻이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야 한다. 그 문제들에는 모두 해결할 방법과 루트가 있다.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네가 그 문제를 직시할 수 있는지, 네게 해결할 생각이 있는지에 달렸다. 네가 해결하고자 한다면 해결 못 할 난제는 없다. 네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한다면 네 모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자포자기, 의기소침, 우울, 답답함은 네가 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네 문제를 갈수록 심각하게 만들고 더 틀어지게 할 수 있다. 믿느냐? (믿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지금 어떤 정서를 품고 있든, 네가 지금 어떤 정서에 빠져 있든, 나는 네가 그런 잘못된 정서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네게 어떤 이유가 있든, 어떤 구실이 있든, 정상적이지 않은 정서에 빠지게 되면 너는 일종의 극단적인 정서에 빠진 것이다. 네가 극단적 정서에 빠지게 되면 그러한 정서가 반드시 네 추구를 좌우하고 네 의지와 바람을 좌우할 것이다. 물론 네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 역시 좌우된다. 그 결과는 아주 심각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너희에게 알려 줄 것은 일종의 사소하기 그지없는 정서, 또는 단순하고 언급할 가치도 없는 정서가 네 일생을 옭아매고, 네가 구원받는 데 영향을 주고, 네가 구원받을 희망을 망치게 두지 말라는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너의 그러한 정서는 긍정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 대항하고 진리에 대항하는 것이다. 네가 보기에는 정상 인성에 속하는 일종의 정서겠지만, 하나님이 보기에는 단순한 정서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방식이다. 사람이 부정적 정서라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 한다는 전제하에 우선 자기가 그러한 부정적 정서를 굳게 지키면서 고집스럽고 미련하게 하나님께 대항하고 하나님과 겨루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기를 바란다. 만약 성찰했다면, 깨달았다면, 이미 똑똑히 알았다면, 부디 그러한 정서를 일단 내려놓길 바란다. 그것을 아끼지 말고, 그것을 굳게 지키지도 마라. 그것이 너를 망치고, 네 종착지를 망치고, 네가 진리를 추구해 구원받을 기회와 희망을 망치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2022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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