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 제 2 부

우리가 오늘 이야기한, 내려놓아야 할 각종 정서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것들이다. 이러한 정서가 네게 끼치는 영향은 일시적이 아니라 장기적이며, 아주 깊다. 고요한 밤중에 네가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네가 홀로 있을 때면, 네게 부정적인 정서를 심어 주고 네 기억에 단단히 뿌리 내린 사람, 일, 사물이 머릿속에 하나씩 떠오른다. 말 한마디, 어떤 목소리, 심지어는 욕설 한 토막, 한 차례의 폭행, 어떤 장면, 어떤 물건, 어떤 사람들, 어떤 일의 원인과 결과 등 네게 강렬한 기억을 남기고 온갖 부정적인 정서를 심어 준 사람과 일, 사물이 머릿속에서 마치 영화처럼 한번 또 한번 재생된다. 결국 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네 영혼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그 부정적인 정서 속으로 돌아간다. 네 정서에, 네 인성에, 네 성격에, 네 인생과 미래에 영향을 준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나 난관, 선택, 절망에 직면할 때면 너는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모두를 피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너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환경으로, 그 사건 속으로, 그 사람들 속으로 돌아간다. 그러한 사람과 일, 사물은 네게 타격을 줬고, 상처를 줬고, 네게 온갖 부정적인 정서를 심어 줬지만 너는 낙담했을 때, 의기소침해졌을 때, 실패를 직면했을 때, 심지어는 책망 훈계를 받거나 형제자매에게 버림받았을 때도 부지불식간에 네 일생에 영향을 준, 우울일 수도 있고, 증오일 수도 있고, 분노일 수도 있고, 열등감일 수도 있는 그런 부정적 정서 속으로 돌아간다. 그러한 정서는 너를 갖가지 고통에 빠뜨렸다. 불안하게 하거나, 눈물을 흘리게 하거나, 초조하게 했다. 그런데도 너는 수시로 자기도 모르게 당시의 그 부정적인 정서 속으로 돌아간다. 네가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부정적인 정서가 네게 끼치는 영향이 더욱더 커진다.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거듭해서 네게 영향을 주고, 네 주의를 환기시키고, 네게 무언가를 시사하다 보면, 어느새 네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진리 원칙을 깨닫는 걸 교란하게 된다.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또다시 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거나 네 사상 속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 너는 진리에 대한 흥미가 더욱 줄어들고, 심지어 반감이 생기거나 더 나아가서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너는 과거에 받은 어떠한 상처 혹은 불공정한 대우 때문에 인류와 사회를 더욱 적대시하게 되고,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을 증오하게 되며, 당연히 앞으로 있을 모든 일도 증오하게 된다. 이러한 정서는 끊임없이 네 마음속에 나타나 반복적으로 네 기분과 너의 내적 상태 및 컨디션에 영향을 주며,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마음과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 및 관점에도 반복적으로 영향을 준다. 진리를 추구하는 동력과 의지에 반복적으로 영향을 주는 건 물론이다. 때로 너는 진리를 추구하고, 더는 의기소침하게 있지 않고, 더는 자기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면서 물러나지 않겠다고 의지를 다지자마자 마음속에서 또 일시적인 부정적 정서가 올라오는 통에 진리를 추구하려는 동력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다. 동력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려는 동력이 이런 배경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나면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서, 그런 내적 상태가 발생하면 너는 더 이상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될 의지와 바람은 더더욱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갖가지 부정적인 정서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심각한 방해이자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정적인 정서가 사람에게 가하는 것은 교란과 파괴다. 그것은 때때로 네가 막 확립한 약간의 믿음을 수포로 만들고, 막 깨달은 약간의 사람됨의 원칙을 무로 되돌리며, 네가 삽시간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축복, 그리고 하나님의 주재와 너를 위한 하나님의 공급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며, 이와 동시에 네 안에 어떠한 부정적 정서가 삽시간에 가득 차게 만든다. 사람이 그러한 부정적 정서로 가득 차면 패괴 성품이 순식간에 그 사람 안에서 주권을 차지한다. 패괴 성품이 주권을 잡으면 그 사람은 순식간에 딴사람이 되어 완전히 달라진 얼굴로 주변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한다. 원래 가지고 있던 사랑의 마음과 인내심이 사라지며, 기꺼이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르고, 고통과 고생을 참고 견디던 원래의 그 열의가 사라지고,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아껴서라도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던 원래의 그 동력이 사라지게 된다. 그 대신 모든 사람을 적대시하게 된다. 모든 사람을 적대시하게 만든 주도적 원인이 무엇이겠느냐? 하나는 패괴 성품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예전에 경험한, 그 사람에게 갖가지 부정적 정서를 심어 준 환경과 사람, 일, 사물이다. 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포용했지만, 어느 누가 날 포용해 줬지?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했지만, 어느 누가 날 이해해 줬지? 부모님조차 날 이해해 주지 않았고, 형제자매도 날 이해해 주지 않았어! 남들도 다 잘못을 하니까 나도 잘못할 수 있는 거잖아! 남들은 책망 훈계를 받았을 때 소극적인 것을 퍼뜨리는데 왜 나는 못 해? 남들은 권력을 다투고 지위를 다투는데 왜 나는 못 해? 남들이 다투면 나도 다툴 거야! 남들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꾀부리면 나도 꾀부리고, 남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나도 안 하고, 남들이 원칙에 따라 일하지 않으면 나도 원칙을 안 따르고, 남들이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으면 나도 안 하겠어. 대세에 순응하는 것뿐인데 그게 뭐가 나빠!” 이것은 어떠한 모습이냐? 생각으로 보나 드러내는 성품으로 보나 그야말로 180도 돌변이요,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근본적으로는 사람의 내면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 사람은 변한 게 없다. 일상적인 업무 시간과 휴식 시간도 그대로고, 말투도 생김새도 그대로다. 뒤에서 부추기고 꼬드기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정서적으로 갑자기 왜 그렇게 큰 변화가 생긴 것이겠느냐? 어느 정도는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단단히 뿌리 내린 부정적 정서 때문이다. 내면에 늘 증오나 분노와 같은 부정적 정서를 품고 있는 사람의 경우, 내적 상태가 좋을 때는 자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고, 정상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며 본분을 이행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거나 업무 또는 생활 중에 사소한 좌절, 실패, 난처함을 겪는다든지 개인의 이익과 체면이 손상되면 내면의 부정적 정서에서 비롯된 증오와 분노가 그를 격분해 노발대발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람은 과거에 좋지 않은 일을 겪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과거에 누군가에게 학대당했거나, 악인에게 이유도 없이 구타당했거나, 재산을 빼앗겼거나, 업신여김을 당했거나, 심지어 악인에게 치욕을 당했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업무상으로 동료나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학교 성적이 안 좋거나, 가정 환경이 불우하거나, 부모가 농민이라거나 사회 하층민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친구 또는 선생님으로부터 멸시와 차별 대우를 받기도 한다. 사회에서 각종 불공정 대우를 받고 인권이 박탈당하거나 자신의 이익 또는 재산이 박탈당하게 되면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연히 증오의 씨앗이 자리 잡는다. 그러면 사람은 당연히 이러한 증오를 품은 채 이 사회와 인류를 대하고, 심지어 가족과 친척, 친구들 역시 그렇게 대한다. 가슴에 증오가 자리한 사람은 일을 바라보는 관점마저 증오의 영향을 받으며, 그의 정서는 증오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증오가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면 자연스럽게 일종의 정서가 된다. 이런 증오의 정서 속에 사는 사람은 정당한 입장에서 인류와 사물을 대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사람과 일을 대하는 관점이 뒤틀리고 예전과 완전히 달라진다. 그는 모든 정상적이고 정당한 사람과 일, 사물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으며, 멋대로 판단하고 정죄한다. 그는 자기 원한과 증오를 쏟아낼 기회를 찾는다. 언젠가는 힘 있는 인물이 되어 전부 응징하고 싶어 한다. 과거 자기를 업신여기고 자기한테 상처를 줬던 자들이 보응받길 바란다. 하지만 당장은 적당한 방법이 없기에 결국 일부는 하나님을 믿게 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 하나님을 믿으니까 나도 이제 기를 펼 수 있겠지. 나중에 하나님한테 내 억울함을 풀어 주고 그 악인들이 보응받게 해 달라고 해야겠다. 잘됐어!’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믿은 후부터 증오와 분노를 마음속에 깊이 묻어 둔 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 집에서 헌신하고, 대가를 치르고, 고생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사역한다. 그러면서 언젠가 자신이 치른 대가가 행운을 가져오기를, 신세를 고쳐 주기를, 약하던 자기가 언젠가 힘을 얻었을 때 과거 자기를 업신여기고 극심한 굴욕을 줬던 자들을 벌받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가 그 모든 일을 하는 목적은 과거 자신에게 한없는 괴로움과 굴욕을 준 자들이 벌받고 보응받는 모습을 직접 보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정서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며, 대가를 치르고, 헌신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떠한 불평도, 욕망이나 요구도 없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그 어떤 고난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증오와 분노를 시종일관 해결하지도, 내려놓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그에게 의견을 내거나 그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면 그는 무의식중에 곧바로 증오와 분노의 정서로 돌아가 이러한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 나 무시하는 거지? 내가 만만해 보이니까 괴롭히는 거잖아? 날 괴롭히는 인간들은 많아. 나중에 그 인간들의 말로를 똑똑히 보시지!’ 누군가가 그를 겨냥해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하면 설령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즉시 증오와 분노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러면 그는 저도 모르게 모든 것을 증오하는 정서 속으로 돌아간다. 분명히 이러한 관점, 이러한 정서는 이미 그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각도와 태도에 영향을 주고 있고, 그의 처신과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법에도 영향을 준다. 어느 누가 그에게 정당하게 자기 견해와 의견을 밝히든 그는 무조건 이렇게 생각한다. ‘나를 무시하는 거야. 괴롭히고 싶은 거야. 내가 만만해 보이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그는 항상 이러한 관점과 방식으로 대응하며, 마음속으로 증오와 분노의 정서를 계속 심화시킨다. 증오와 분노의 정서가 마음속 깊은 곳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이후 그는 이러한 정서를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계속 이러한 정서로 여러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하는 것이다. 동시에, 모든 사람을 증오해야 한다고, 자기한테 호의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부단히 자기 자신에게 암시를 준다. 일순간 충동적으로 누군가가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다가도 금방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타이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하나님은 정말 좋지만, 사람은 그렇게 좋지 않아. 사람들은 모두 너를 비웃어. 네가 잘되기를 바라지 않아. 사람들은 네가 만만해 보이면 괴롭히고, 네가 성공하면 아부하고 빌붙어. 그러니까 누구도 믿지 마. 누구도 호의적인 눈으로 대하면 안 돼. 모든 사람을 경계와 의심의 눈으로 대해야 해.’ 남이 한마디 할 때마다 그는 꼭 분석하려 든다. ‘나를 겨냥해서 하는 말 아닐까? 왜 저런 말을 하지? 나를 공격하거나 내게 복수하려는 거 아니야? 나를 괴롭히고 싶은 거 아닐까?’ 이러한 의심, 증오, 분노의 정서가 내면에서 반복하여 사람에게 암시를 줘서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정서로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고 처리하게 한다. 그러나 본인은 그것이 일종의 부정적 정서임을 줄곧 알지 못한다.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너의 판단을 엄격히 통제하고, 너의 사상을 단단히 결박하고 있다. 또한, 네가 정확한 각도와 입장에서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사람이 일단 이러한 부정적 정서에서 살게 되면 그것의 통제에서 벗어나기가 몹시 힘들다.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지 않는 한, 부지불식간에 부정적 정서 안에서 살며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게 되고, 부정적 정서가 만들어 낸 잘못된 관점으로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게 된다. 그러면 우선 편향성, 의심, 의혹, 심지어는 혈기가 생길 수밖에 없고, 적대와 공격성도 생길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정서는 마음속에서 사람의 사상 관점을 주도하고, 사람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주도한다. 그래서 이런 부정적 정서에 빠지게 되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심리적, 사상적으로 방해와 영향을 받고, 이로 인해 진리를 실행하는 방면에서 크게 손해를 본다. 이러한 부정적 정서의 개입, 교란, 파괴로 인해 사람이 실행할 수 있는 진리가 아주 한정적이다. 그 사람은 어떠한 환경이 임했을 때 마음의 영향을 받기 쉽다. 물론 가장 주요하게는 각종 부정적 정서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하여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기가 힘들어진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들어 준 자유 의지와 본능으로, 사람이 마땅히 실행하고 준수해야 할 진리 원칙으로 주변 사람과 일을 대하고 판단하지 못한다.

위에서 말한 여러 방면에서 볼 때, 좌우간 각종 부정적 정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많든 적든 사람의 생각을 점거한다. 그런 정서가 생각을 점거한 탓에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각종 부정적인 정서를 일으키는 사람과 일, 사물을 부단히 내려놓아야 한다. 좀 전에 말한 열등감이라는 부정적 정서를 예로 들어 보겠다. 네 열등감이 생겨난 배경이 무엇이든,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든, 어떤 일로부터 비롯되었든, 어쨌든 너는 너의 자질, 특기, 재능, 그리고 인성, 품성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열등감은 잘못된 것이고, 자만도 잘못된 것이다. 둘 다 부정적인 정서에 속한다. 열등감은 너의 손발을 결박하고 너의 사상을 결박하며, 네 관점에 영향을 주고 입장에 영향을 준다. 자만 역시 이러한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열등감이 됐든 다른 부정적 정서가 됐든, 너는 그러한 정서를 일으킨 말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 우선 그러한 말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말이 너에 대해 내리는 평가와 결론은 그게 네 자질과 재능에 대한 것이든, 인성과 품성에 대한 것이든, 전부 정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신을 정확히 평가하고, 인식하고, 열등감과 같은 정서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너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 자기 인성이 어떠한지, 자기 자질과 재능이 도대체 어떠한지, 자기한테 어떤 특기가 있는지 등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네가 원래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하는데 누군가가 음치라며, 음 이탈을 한다며 항상 트집을 잡고 너를 깎아내린다고 하자. 그러면 너는 네가 노래를 못한다고 생각해서 사람 앞에서 노래 부를 엄두를 못 낸다. 그 세인들 때문에, 그 바보나 어리석은 자들이 너에 대해 내린 부정확한 평가와 단정 때문에 네 인성에 마땅히 있어야 할 권리가 제한당하고 네 재간이 억압당한다. 결국 너는 노래 한 곡도 감히 못 부르게 되고, 아무도 없을 때, 너 혼자 있을 때만 큰 소리로 노래하며 억눌렸던 것을 해소할 엄두를 낸다. 평소에 너무 심하게 억압당했기 때문에 다른 때는 노래할 엄두를 못 내고, 혼자 있을 때만 겨우 노래를 부르며 자기 노랫소리가 맑게 울리는 시간을 즐긴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자유로운 시간이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남이 네게 준 상처 때문에 너는 자기가 도대체 뭘 할 줄 아는지, 무엇에 능하고 무엇에 서툰지 알지 못하고 똑똑히 보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가늠해야 한다. 자기가 배운 것, 자기 장점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 자기 결점과 부족함은 반성하고 인식해야 한다. 자기 자질이 과연 뛰어난지 떨어지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한 평가와 인식이 필요하다. 만약 자기 문제를 명확하게 보고 제대로 인식하기가 힘들다면 분별력 있는 주변 사람에게 평가를 부탁한다. 그의 말이 정확하든 아니든, 최소한 네가 자기에 대해 기본적인 판단을 내리고 자기를 규정하는 데에 참고 사항은 되어 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열등감이라는 부정적 정서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고, 열등감이라는 부정적 정서 속에서 차츰차츰 걸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열등감이라는 정서는 사람이 분별하고 각성하고, 진리를 구할 수 있다면 쉽게 해결이 가능하다.

과거에 사회에서, 각 분야에서, 여러 환경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거나 과거에 학대와 차별 대우를 받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생긴 증오와 분노의 정서를 해결하는 게 쉽겠느냐? (해결하기 쉽습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고, 증오하고 분노하는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고, 과거 자기한테 상처를 줬던 사람과 일, 사물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은 말일 뿐이다. 너는 어떻게 내려놓겠느냐? 예를 들어, 연애 상대에게 속아서 몸도 바치고 돈도 바친 여자가 있다고 치자. 언제든 그 생각만 하면 가슴속에서 분노가 저절로 일고, 그 분노가 끓어오를 때면 주먹을 꽉 쥐게 되고, 마음 깊은 곳이 증오로 가득 찰 것이다. 그자의 얼굴을, 그자가 했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자기한테 상처를 줬던 그자의 행동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노여워지고, 부아가 치밀고, 증오가 커진다. 그 생각을 하고 또 하다 보면 본분을 이행하기가 싫어지고, 기분이 점점 나빠진다. 여자는 자기한테 한가하게 있으면 안 된다고, 쉼 없이 일하고, 쉼 없이 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밤에 잠이 안 오면 수면제에 기대어 잠들어야 한다. 혼자 있을 엄두를 못 내고, 감히 자기 마음을 여유롭게 두지 못한다. 혼자 있게 되면, 여유로워지면, 증오가 저절로 일어 복수하고 싶어진다. 과거 자기한테 상처를 줬던 그 인간이 죽기를, 그것도 최대한 끔찍하게 죽기를 바란다. 만약 어느 날 정말로 그가 참혹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제야 자기 증오와 분노의 정서를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여긴다. 그럼, 네가 생각해 보아라. 만약 그가 정말로 죽으면, 보응을 받고 징벌을 받으면, 과거에 네게 증오와 분노를 심어 주었던 그 일을, 네 마음속 깊숙이 뿌리를 내린 그 기억을 깨끗이 지워 버릴 수 있겠느냐? 그 일에 대한 증오를 정말로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그게 정말 사라지겠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과거에 네게 상처를 줬던 사람을 사라지게 하고, 벌받게 하고, 혹은 끔찍하게 죽게 하거나, 보응을 받거나, 좋지 않은 말로를 맞게 하는 것이 증오와 분노를 해결하는 방법이겠느냐? 그것이 증오와 분노를 내려놓는 방법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자기한테 증오, 분노와 같은 정서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내려놓으면 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실행 길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려놓으면 된다.”라는 말은 무엇이냐? (도리일 뿐입니다.) 그렇다. 그것은 도리이지 실행 길이 아니다. 좀 전에 너희에게 열등감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알려 줬다. 그것은 열등감을 내려놓는 일종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실행 길이 생기지 않았느냐? (네.) 그러면 어떻게 증오와 분노를 내려놓아야 하느냐?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실행 길이냐? (아닙니다.) 누군가는 기억에서 그것을 지워 버린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냐? 그러면 내려놓는 것이냐? (아닙니다. 내려놓지 못합니다.) 고개를 가로젓는 것도, 눈을 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도, 혹은 자기를 바쁘게 만드는 것도, 전부 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며,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정확한 실행 길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실행 길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어떻게 해야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 이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너희에게 좋은 방법이 있느냐? 이러한 정서를 내려놓으려면 이를 직면해야 한다. 물러서거나 회피해서는 안 된다. 너는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더냐? 그 일을 떠올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더냐? 누군가가 네 아픔을 건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더냐? 그렇다면 직면해라. 과거에 너를 아프게 하고 네게 증오와 분노를 심어 주었던 사람과 일, 사물을, 네게 깊은 인상을 남긴, 네가 기억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적은 다음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그들의 인성을 하나하나 분별하고, 그들의 성품을 인식하고, 그들의 본질을 분석하고 폭로하고 인식하여 그들이 대체 어떤 물건인지 살펴보아라. 최후의 결론은, 유일한 결론은 그들이 전부 악인이요, 마귀이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너를 해쳤든, 어떤 방식으로 너를 곤경에 빠뜨리고 네게 상처를 줬든, 그들의 본질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이 택한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누구도 하나님 집에 오지 못했지만, 너는 하나님이 택했으며, 지금 하나님 집에서 설교를 듣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네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너를 높여 주고 선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눈에 한 번도 사람으로 비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을 믿은 후에는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 만약 계속해서 그들과 어울리려 한다면 너는 분명 그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며, 그들에게 억압받고, 혼쭐나고, 경시당하고, 모욕당하고, 상처 입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대표하는 것은 마귀이며 사탄이다. 만약 네가 그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싸우기를 좋아한다면 너 역시 사람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부류이며, 너도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마귀는 사람만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마귀끼리도 서로 잔인하게 해친다. 마귀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를 택한 것을 보면 너는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에 속한다. 그러니 마귀가 어찌 너를 괴롭히지 않을 수 있겠느냐? 어찌 너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으며 너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마귀는 누구라도 해치고, 마귀끼리도 서로 잔인하게 해친다. 사람을 상대로는 더욱 무자비하며, 봐주는 법이 없다. 이는 곧 이 세상이, 인류가 마귀에게 속해 있고 곳곳에 사탄의 행실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네가 좋은 사람이 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고,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남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는 것조차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며,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다. 이 세상이 바로 이러하다. 철이 들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고, 그 뒤에 사회에 나가 일을 시작한 다음 눈감을 때까지, 한평생 괴롭힘 당하지 않고, 기만당하지 않고, 박해받아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절대 없다. 네 기량이 어느 정도고 능력이 어느 정도이든 간에 반드시 너보다 대단한 사람이 너를 괴롭히기 마련이다. 다만 차이라고 하면, 사람은 각자 다른 생존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내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르다. 수없이 많이 함정에 빠지고 속으면서 너무 괴롭힘 당해 더는 견딜 수 없게 되거나 지나치게 심한 상처를 받으면 증오와 분노라는 정서가 생긴다. 인류를 증오하고 이 사회를 증오하게 된다. 네가 너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들의 본질 본성을 똑똑히 보고 그들의 본질이 마귀임을 명확히 알면 증오와 분노가 사람에게서 마귀에게로 옮겨 가 네 증오의 정도가 경감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증오의 정도가 일부 경감된다. 증오가 일부 경감되면 어떤 점이 좋겠느냐? 네게 비슷한 일이 다시 임했을 때 또다시 감정적으로 되거나 혈기의 방식으로 그 일을 대하지 않고 올바르게 대할 것이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로 분별하고 대할 것이다. 네게 또다시 상처를 주는 사람을 인간적 양심과 이성의 각도에서 대하고, 하나님이 가르치고 알려 준 방식과 원칙으로 상대방을 대할 것이다. 하나님이 알려 준 방식으로 상대방을 대하면 더는 증오와 분노가 생기지 않는다. 대신 너는 인류의 패괴를 더 깊게,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식하고 마귀의 몰골을 인식할 것이며,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확증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이 알려 주고 가르쳐 준 방식으로 그러한 일을 대하면 그 일이 네게 또다시 상처를 주거나 네 증오와 분노를 가중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네 마음속 깊은 곳의 증오와 분노가 점차 경감되며, 그러한 일을 한번 또 한번 겪으면서 네 분량이 점점 커지고 성품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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