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 제 1 부

지난 예배에서는 어떤 주제를 교제했느냐?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입니다.) 지난번에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를 교제한 후 너희에게 숙제로 내준 질문이 하나 있다. 무엇이었느냐?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입니다.) 어떻게 진리를 추구할 것인가란 주제에 대해 묵상해 보았느냐? (하나님, 조금 묵상해 봤습니다.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 생각은, 매일 임하는 사람과 일, 사물에서 자신이 드러내는 패괴, 패괴 성품을 성찰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우선 한 가지입니다. 또 한 가지는 본분을 이행할 때 관계되는 원칙이 있는데, 각기 다른 본분을 어떻게 원칙에 따라 이행할 것인가 하는 방면에서도 관련 진리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 진리를 추구하는 한 측면의 실행입니다.) 한 가지는 일상생활 중에 진리를 구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 원칙을 구하는 것이다. 다른 측면은 없느냐? 어려운 주제는 아니지 않으냐?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너희는 이 주제에 대해 묵상해 보았느냐? 어떻게 묵상해야 하느냐?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주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생각하며 깨달은 바를 기록하는 것을 묵상이라고 한다. 그저 쓱 보고 잠시 생각했을 뿐, 시간도, 정력도, 공도 들이지 않았다면 묵상이라 할 수 없다. 묵상은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공들여 사색하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게 어느 정도 있고, 깨우침을 얻고, 빛 비춤이 있고, 일정한 수확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묵상으로 얻는 성과다. 그럼 너희는 그 주제에 대해 묵상해 보았느냐? 다들 묵상하지 않았느냐? 지난번에 너희에게 숙제를 하나 내줬다. 주제를 하나 주고 예습하라고 했다. 너희는 모두 묵상하지 않았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떠먹여 주는 해답을 기다린 것이냐? 아니면 ‘이 주제는 너무 간단하다, 깊이가 없다, 진작 깨달은 것이다, 묵상하지 않아도 안다.’라고 생각한 것이냐? 아니면 진리 추구와 관련된 문제나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흥미가 없어서이냐? 어찌 된 것이냐? 일이 너무 바빴기 때문은 아니겠지?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질문을 통해 자신을 다시 돌이켜 보았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은 탓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진리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답을 떠먹여 주시기를 기다렸던 측면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제해 주시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이었습니다.) 대다수가 다 이렇지 않으냐? 너희는 떠먹여 주는 답에 익숙해져 있다. 그럴 것이다. 너희는 진리를 그다지 참답게 대하지 않고 진리에 대해 그다지 공을 들이지도 않는다. 너희는 무언가 하는 걸, 쓸데없이 뛰어다니는 걸 참 좋아한다.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진리를 대하는 데는 건성이고 안일하다. 이것이 너희의 실제 상태다.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는 하나님 집에서 가장 자주 교제하는 주제다. 많은 사람이 도리적으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약간의 실행법과 실행 길도 안다.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된 일부 사람들은 많든 적든 실제적 체험도 있다. 다들 실패하고 쓰러진 경험이 있으며, 소극적이고 연약한 적이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도 험난한 경험을 해 봤다. 다들 진리를 추구하면서 체험한 것이 있고, 어느 정도 수확도 얻었다. 물론 많은 난제와 방해에 부딪혔고, 생활이나 환경상의 각종 실제적 문제도 있었다. 요컨대,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형식상으로든 실제적 문제상으로든 다소간 체득한 게 있고, 도리적으로 깨달은 것도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실제적으로 대가를 치렀든 아니면 방법에만 공을 약간 들였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나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게 된 이후에는 많든 적든 체득한 게 생겼다. 이렇게 체득한 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참되고 귀한 수확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경험도, 체험도, 수확도 없다. 결론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관망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한편, 그 과정에서 진리 추구에 대해 느끼는 바를 체험한다. 많은 사람의 사상, 관점, 또는 의식 속에서 진리 추구는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일이며, 인생에서 응당 추구해야 할 목표고, 더 나아가 사람이 응당 걸어야 할 올바른 인생길이다. 이론상으로든 사람들의 참된 체험과 인식을 통해 보든, 사람들은 진리 추구는 좋은 일,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그 어떤 추구도, 그 어떤 길도, 진리를 추구하는 일 또는 진리 추구의 길과 비교할 수 없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은 인류가 반드시 걸어야 할 단 하나의 올바른 길이다. 인류의 일원으로서, 사람은 누구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인생 목표로 삼고, 이를 사람이 응당 걸어야 할 올바른 길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느냐? 좀 전에 너희가 했던 간단하고 이론적인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공감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다들 그렇게 추구하고 그렇게 실행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진리 추구의 구체적인 내용이라 하면, 자신을 인식하고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 다음 하나님 말씀과 연결지어 실행 가능한 진리 원칙을 찾아내고, 최종적으로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살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많은 사람이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공통된 방식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있어서 너희가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외에, 진리 추구를 위한 더 구체적인 실행 길과 실행 방법을 내가 정리했다. 오늘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교제를 하겠다.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너희가 말한 그 몇 가지 외에 내가 더 구체적인 두 가지를 정리했다. 첫째는 ‘내려놓기’다.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합니다.) 추상적이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으며, 기억하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쉽다. 물론 실행하는 데는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보아라, 이건 너희가 말한 것들보다 훨씬 간단하다. 너희가 한 이야기는 이론 무더기다. 얼핏 보기에는 수준 높고 깊이가 있는 것 같다. 당연히 구체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첫째는 ‘내려놓기’, 둘째는 ‘몰입하기’다. 두 가지를 합쳐 봤자 여덟 글자밖에 안 된다. 누구든 보는 즉시 이해할 수 있고, 교제 없이도 어떻게 실행할지 알 수 있으며, 기억하기도 쉽다. 첫째는 무엇이라고 했느냐? (내려놓기입니다.) 둘째는 무엇이냐? (몰입하기입니다.) 보아라,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합니다.) 너희가 말한 것보다 훨씬 간결하다. 이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예리하다고 한다. 글자 수만 적으면 예리한 것이냐? (아닙니다.) 예리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말하는 내용이 핵심적인가, 다시 말해, 사람이 실행하기에 실용적인가, 또한 실행한 후 얻는 성과는 무엇인가, 사람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가,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가게 할 수 있는가, 패괴 성품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게 할 수 있는가, 실행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진리 추구로 달성해야 할 성과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네.) ‘내려놓기’와 ‘몰입하기’, 너희는 이제 이 두 가지를 들었고 알게 됐다. 그렇다면 보아라. 이 두 가지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너희가 좀 전에 말했던 몇몇 방면의 내용과 관련이 있느냐? 상충되지는 않느냐?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 않으냐? (네.)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실행 방법은 크게 말해 이 두 가지다. 둘 중 첫째인 ‘내려놓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겠느냐? ‘내려놓기’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가장 간단하고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 이를 어떻게 실행해야 하겠느냐? 어떠한 구체적 사항과 내용이 있겠느냐? (자신의 패괴 성품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패괴 성품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느냐? (관념과 상상이 있습니다.) 관념, 상상, 감정, 자기 주관, 개인적 취향이 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느냐? (사탄의 처세 철학, 잘못된 인생관과 가치관이 있습니다.) (자기 속셈과 욕망이 있습니다.) 요컨대, 사람이 떠올릴 수 있는 내려놓을 것들은, 패괴 성품과 관련된 갖가지 태도 아니면 사람의 사상과 관점에 속하는 것들이다. 큰 줄기는 두 개인데, 한쪽은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한쪽은 사람의 사상, 관점과 관련이 있다. 이 두 가지 외에 더 생각나는 것이 있느냐? 너희를 곤혹스럽게 했느냐? 곤혹스러운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가 지금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했던, 다들 자주 이야기하던 주제들이다. 반면, 분명 사람에게 존재하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들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을 문제로 보고 묵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이게 바로 이유다. 너희와 토론하는 목적은 이제부터 교제할 문제에 대해 너희가 약간 생각을 해 보고 마음을 들이게 함으로써 그 문제에 대해 깊은 인상을 남기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부터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관련된 두 가지 큰 항목을 교제하겠다. 첫째는 내려놓기, 둘째는 몰입하기다. 우선 첫째인 내려놓기를 교제하겠다. 내려놓기는 단순히 감정을, 처세 철학을, 자기 주관을, 복받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으라는 등의 두리뭉실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교제할 ‘내려놓기’의 실행은 더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바가 있어 일상생활 속에서 성찰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려놓기의 첫 번째 내용은 무엇이냐? 첫째로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은 사람의 갖가지 정서다. 갖가지 정서라고 하면 너희는 무엇이 떠오르느냐? 갖가지 정서에는 무엇이 있느냐? (혈기, 자의적 태도, 그리고 소극성이 있습니다.) 혈기가 정서이냐? (저는 정서를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기분에 따라 행하여 기분이 좋을 때와 나쁠 때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말한 갖가지 정서라는 정서에 해당하느냐? 정서라는 것이 그런 뜻이냐? (하나님, 제가 이해한 정서에는 주로 초조, 분노, 그리고 인간의 희로애락 방면이 있습니다.) 적절하게 간추렸다. 그렇다면 좀 전에 말한 기분에 따라 일하는 것을 정서라고 할 수 있느냐? (일종의 표출일 뿐입니다.) 그것은 정서의 표출이다. 기분이 나빠지고, 초조해지고, 의기소침해지는 것은 전부 정서의 표출인 것이지, 정서에 대한 정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면서 내려놓아야 할 첫 번째 대상인 갖가지 정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느냐? 갖가지 정서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무엇을 내려놓는 것이냐? 바로 사람이 각종 환경, 각종 배경,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했을 때 드는 기분, 생각, 정서를 내려놓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 중 어떤 것은 사람의 자기 주관이 되고, 어떤 것은 자기 주관이 되지는 않아도 사람이 일하는 태도에 시시각각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면 이런 정서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예를 들자면 우울, 증오, 분노, 초조, 불안, 그리고 억압감, 열등감, 눈물 날 정도의 기쁨, 이 모든 것이 정서에 포함된다. 이러한 것들이 정서의 구체적인 표출이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정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가 말한 소극성이나 혈기와 관계가 있느냐?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가 없다. 너희가 이야기한 것들은 무엇이냐? (패괴 성품입니다.) 그것은 패괴 성품의 표출이다. 내가 조금 전에 말한 억압감, 우울, 열등감 등의 정서가 패괴 성품과 관계가 있느냐?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정서는 패괴 성품에 미치지 못합니다. 패괴 성품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거나 아직 패괴 성품의 수준까지 올라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정상적인 인성의 희로애락이다. 어떠한 환경이 임했을 때 사람에게 생겨나는 정서이며, 밖으로 드러나는 태도다. 일부는 패괴 성품으로 초래된 것일 수도 있고, 일부는 아직 수준이 낮으며, 패괴 성품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지만, 이는 사람의 생각 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임하고 사람이 어떤 배경에 있든, 그런 정서가 자연히 빈번하게 사람의 판단과 관점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고, 사람이 마땅히 서야 할 입장과 걸어야 할 길에도 영향을 준다. 우리가 금방 이야기한 갖가지 정서는 대부분 비교적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비교적 중성적인 것, 지나치게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것은 없었느냐? 없었다. 비교적 긍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의기소침, 우울, 증오, 분노, 열등감, 초조, 불안, 억압감, 이는 전부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정서다. 너희가 보기에 이러한 정서 중에 사람으로 하여금 생활을, 인생을, 생활 중에 임하는 각종 환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있느냐? 긍정적인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전부 다 비교적 부정적인 정서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조금 나은 정서에는 무엇이 있느냐? 보고 싶은 마음, 그리움은 해당하느냐? (조금 더 중성적인 편입니다.) 중성적인 것도 괜찮다. 또 무엇이 있느냐? 미련, 동경, 감회가 있다. 우리가 이야기한 이러한 정서는 무엇을 가리키느냐? 늘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영혼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흔히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점유한 채로 사람의 기분과 일을 처리하는 관점,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서는 현실 생활에서든, 아니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방면에서든, 사람이 매일 영위하는 일상생활에 어느 정도 방해가 되거나 영향을 미치며,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에 영향을 준다. 물론,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때의 판단과 서야 할 입장에도 영향을 끼친다. 특히 비교적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정서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사람에게 기억이 생기고 자신의 갖가지 정서를 느끼기 시작할 때, 혹은 사람에게 사물, 환경, 타인을 인지하는 의식이 생길 때부터, 사람의 갖가지 정서가 차츰차츰 발생하고, 점차 형태를 갖춘다. 형태가 갖춰지고 나면 사람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경험하는 세상일이 늘어남에 따라, 이러한 정서가 사람의 내면에서, 마음 깊은 곳에서 점점 더 뚜렷해지고, 차츰 한 인간의 인성 특징을 결정짓는 주요 요소로 자리 잡는다. 한 사람의 성격, 희로애락, 취향, 그리고 그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와 인생의 방향 등을 정서가 점차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서는 모든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사람에게 주변 환경에 대한 주관적 의식이 생긴 후 그런 정서가 점진적으로 그 사람의 희로애락에 영향을 주고,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한 판단과 인지에 영향을 주며, 성격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정서는 사람이 주변의 타인과 일, 사물을 마주하고 처리하는 태도와 관점에도 영향을 미친다. 더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정서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식과 원칙, 그리고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 심지어는 사람됨의 최저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너희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고 조금 추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하나 들어 보면 너희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가령, 어렸을 때부터 외모도 뛰어나지 않고, 별로 똑똑하지도 않고, 말주변도 없는 탓에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애는 머리가 나쁘고, 빠릿빠릿하지도 못하고, 말재주도 없어. 다른 집 애는 사람 살살 녹게 말도 참 예쁘게 하던데, 이 애는 어떻게 된 게 종일 입이 댓 발 나와서는 사람을 봐도 한마디도 할 줄 몰라. 잘못을 해도 설명하거나 변명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 기분을 풀어 줄 줄도 몰라. 이 애는 멍청이야.” 부모가 이렇게 말하고, 친척과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고, 선생님도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러한 환경으로부터 일정한 압박을 받을 것이다. 그러한 주변 환경을 경험하면서, 그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종의 심리가 생긴다. 어떠한 심리겠느냐? 자기가 못생겼고,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자기를 싫어하고, 공부도 못하고, 둔하고, 숫기가 없어서 사람들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누가 뭘 줘도 부끄러워서 고맙다는 인사조차 못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왜 말주변이 없을까? 남들은 왜 그렇게 말을 잘하는 거지? 나는 멍청이야!’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자기를 아주 한심하게 여긴다. 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한심하고 멍청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늘 속으로 자기한테 묻는다. ‘내가 정말 그렇게 멍청해? 난 정말 환영받지 못하는 거야?’ 부모가 싫어하고, 형제자매도 싫어하고, 선생님과 학교 친구들도 그를 싫어한다. 가족, 친척, 친구들이 틈만 나면 그를 두고 이런 말을 한다. “덩치 작고 눈이랑 코도 작은 걸 보면 나중에 커서도 별 볼 일 없을 거야.” 그가 거울을 보니 눈이 크지는 않다. 확실히 그렇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의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반발심, 불만, 거부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 점차 자신의 부족함, 결점, 문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쪽으로 바뀐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떨쳐낼 수 없는 정서가 생겨난다. 그러한 정서를 무엇이라 하겠느냐? 열등감이다. 열등감에 빠진 사람은 자기 장점이 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는 남들의 호감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항상 자기가 멍청하고 사교성이 없다고 느낀다. 요컨대, 자기는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고, 얼굴도 못생겼고, 머리도 나쁘고, 둔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도 않고, 학교 성적도 안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 열등감이 마음속에서 점차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후 일종의 벗어날 수 없는 정서가 되어 네 마음을 옭아매고 네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어른이 된 이후든, 사회에 나간 이후든, 결혼해서 독립한 이후든, 네 사회적 신분과 지위가 어떠하든, 어렸을 때부터 성장 환경에서 심어진 열등감은 네게 있어 해소할 수 없는 정서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게 되어 교회에 온 이후에도 너는 여전히 네 외모가 그저 그렇고, 타고난 머리가 나쁘고, 말재주가 없고, 아무것도 못 한다고 여기며, 이렇게 생각한다.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걸 하자. 리더를 목표로 할 필요도, 심오한 진리를 추구할 필요도 없어. 나는 기꺼이 가장 작은 자가 될 거야. 남들이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어.’ 너는 적그리스도나 거짓 리더가 나타나도 네가 그들을 분별하고 폭로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자기는 그럴 재목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가 아니면 그걸로 됐고, 자기가 방해하고 교란하는 게 아니면 그걸로 됐고, 자기는 자기 위치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한다. 너는 마음속 깊이 자신이 무능하고 남들보다 못하다고 여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구원의 대상일지 몰라도 너는 기껏해야 봉사자일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도 너는 자격 미달이라 생각한다. 네가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얼마나 되든, 어차피 하나님이 네게 예정해 준 자질과 외모가 그러하다면 너를 그저 봉사자로 예정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도, 리더가 되는 것과도, 그 어떤 책임자가 되는 것과도, 구원받는 것과도 아무 관계가 없다고 여기며, 기꺼이 가장 작은 존재가 되려 한다. 이런 열등감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하면, 네 가정환경, 또 성장 환경이 네게 적당히 타격을 주거나 너를 부적절하게 규정한 탓에 네게 열등감이 생긴 것이다. 이런 정서는 네 올바른 추구 방향과 정당한 추구 의사에 영향을 주며, 무언가를 정당하게 추구하지 못하도록 너를 억압한다. 너의 정당한 추구가 억압당하고 정당한 인성에 응당 존재해야 할 의지가 억압당하면, 긍정적인 것을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할 동력도 억압당한다. 이러한 억압은 주변 환경에 의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네게 가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이 네게 정해 준 것도 당연히 아니다. 이는 네 마음 깊숙한 곳의 심각하게 부정적인 정서로 초래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열등감은 표면적으로 보면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일종의 정서지만, 사실 근원적으로는 이 사회, 이 인류 및 사람의 주변 환경, 그리고 자신에게 존재하는 객관적 원인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사회와 인류 방면은 말할 것도 없이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 전체가 악한 자의 권세 아래 있어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었고, 그 누구도 다음 세대를 진리에 따라,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교육하지 못하며, 사탄에게서 온 것으로 교육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것으로 다음 세대를 가르치고 인류를 가르친 결과, 사람의 성품과 본질이 패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정서가 생겨나게 되었다. 생겨난 부정적 정서가 일시적인 것이라면 사람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마음속 깊은 곳에 단단히 뿌리 내려 떨쳐낼 수도, 잊으려야 잊을 수도,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도 없게 된다면 반드시 여러 방면에서 사람의 선택에 영향을 주고, 사람이 타인과 각종 일이며 사물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며, 사람이 근본적인 옳고 그름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영향을 주고, 사람이 일생에 걸쳐 걷는 길에 영향을 준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인류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다. 또 다른 방면은 사람 자신에게 존재하는 객관적 원인이다. 사람이 자라면서 받은 교육과 가르침, 받아들인 각종 사상 관점, 여러 처신 방식, 그리고 사람의 각종 말은 모두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은 임한 문제를 정확한 각도와 입장에서 처리하고 풀 능력이 없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그러한 나쁜 환경의 영향 아래서, 그러한 나쁜 환경이 사람에게 가하는 압박과 통제 아래서, 인류에게는 자연히 각종 부정적인 정서가 생겨난다. 자기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자기 능력으로 바꾸거나 풀 수 없는 문제에 각종 부정적인 정서로 대항한다. 열등감이라는 정서를 예로 들겠다. 네 부모가, 스승과 웃어른이, 그리고 네 주변 사람들 모두가 네 자질, 인성, 인격에 대해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평가를 내리고, 궁극적으로 네게 공격, 박해, 억압, 속박, 결박을 가해 결국 너로 하여금 반항할 힘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꾹 참으면서 살게 하고, 원하지 않지만 부득이하게 찍소리도 못 하고 이런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한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 최종적으로 생겨나는 정서는 기쁨도, 만족도, 긍정적인 것도, 발전적인 것도, 삶에 더 큰 동력과 명확한 방향성을 주는 것도 아니며, 확실하고 정확한 인생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때 생기는 것은 깊은 열등감과 같은 정서다. 이러한 정서가 생기면 너는 무력감을 느낀다. 일이 임하여 네 관점을 발표해야 할 때, 하고 싶은 말과 표현하고 싶은 관점을 마음속 깊이 수없이 곱씹지만,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못한다. 다른 사람이 너와 똑같은 관점을 말하면 너는 그저 속으로 네가 남보다 못하지 않다는 게 증명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에 같은 환경이 임했을 때도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자. 무턱대고 나서지 말자.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자. 난 안 돼. 난 멍청해. 난 우둔해. 난 바보야. 나를 감출 줄 알아야 해. 듣기만 하고 말하지는 말자.’ 이런 점으로 볼 때, 사람에게 열등감이라는 정서가 생겨나 마음속 깊은 곳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나면 사람의 자유 의지와 하나님이 부여한 사람의 정당한 권리가 이미 박탈당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박탈당한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박탈한 것이냐? 그건 너 자신도 명확히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아무도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과정에서 네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너는 남들 때문에 해를 당하는 동시에 너 자신 때문에도 해를 당했다. 어째서냐? 좀 전에 말했듯이 네게 생긴 열등감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객관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체 의식이 생겼을 때부터 네가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은 전부 사탄의 패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을 바라보는 그런 관점은 이 사회와 인류가 네게 주입한 것이지 하나님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네 열등감이 언제, 어떤 배경에서 생겨난 것이든, 네 열등감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든, 너는 그러한 정서에 결박당하고 통제당할 수밖에 없으며, 사탄이 네게 주입한 방식에 따라 주변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할 수밖에 없다. 열등감이 네 마음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면 네게 심각한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도 주도한다. 그렇다면 열등감의 주도하에 사람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일을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남들은 다 자기보다 낫다고 보고, 적그리스도도 자기보다 낫다고 본다. 적그리스도는 성품이 악하고 인성이 나쁜데도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로 여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봐. 성품이 나쁘고 인성이 악하다고는 해도 저 사람은 은사가 있어. 사역 능력도 나보다 낫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 능력을 자유롭게 보여 주잖아. 저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는데 얼굴도 안 빨개지고 떨지도 않는 걸 보면 배짱이 좋은 거지. 난 못 해. 난 저런 용기가 없어.” 이는 무엇 때문이냐? 네 열등감이 사람의 본질에 대한 네 판단에 영향을 주고, 사람을 바라보는 각도와 입장에 영향을 준 것이 원인 중 하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열등감은 네 처신에 어떻게 영향을 주느냐? 너는 이렇게 말한다. “난 타고나길 지독한 바보야. 은사도 없고, 특기도 없고, 뭘 빨리 배우지도 못해. 그런데 누구누구를 좀 봐. 방해하고 교란할 때도 있고 제멋대로 행동할 때도 있지만, 적어도 은사가 있고 특기가 있잖아. 어디서든 저런 사람을 먼저 쓰지. 난 안 돼.” 어떠한 일이 임했을 때 너는 일단 자신을 규정하고 가둬 버린다. 그게 무슨 일이든 뒤로 물러나서 적극적,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으며, 일을 맡기를 두려워한다. ‘난 타고나길 멍청해.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해. 주제넘게 나서지 말자. 할 줄 아는 게 좀 있다고 해도 자랑하지 말자. 누가 추천해 준다면 내가 그런대로 괜찮다는 뜻이겠지만, 추천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내가 자발적으로 이 일을 맡을 능력이 된다고, 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안 돼. 확실하지도 않은 말을 함부로 뱉을 수는 없는 거야. 만에 하나 제대로 못하면 어쩌려고? 책망을 받으면 어떡해? 그게 무슨 망신이야! 그러면 너무 창피하지 않겠어?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어.’ 보아라. 네 처신에 영향이 있지 않으냐? 너의 그러한 처신 태도는 어느 정도 열등감이라는 정서의 영향과 통제에 의한 것이며, 어느 정도는 열등감이라는 정서로 초래된 부정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인성이 있거나 인성이 보통인 사람이든, 인성이 없거나 인성이 악한 사람이든, 갖가지 사람을 네가 열등감이라는 정서의 영향 아래서 그들을 대한 결과는 어떠하겠느냐? 어느 것 하나 진리에,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동시에 너는 이런 열등감의 영향하에 또 소심하고 위축된 처신을 택한다. 수동적이고 의기소침할 때가 많고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의지와 동력이 없다. 조금이라도 적극적, 자발적으로 일을 맡고 싶은 의사가 생기면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교만한 건 아닐까? 주제넘게 나서는 건 아닐까? 우쭐거리는 건 아닐까? 자기 과시는 아닐까? 지위욕은 아닐까?’ 자기 행동이 어떠한 성질인지 스스로 분간하지 못한다. 정당한 인간적 필요, 의향, 의지, 바람에 의한 것이며, 자기가 할 수 있고, 정당한 것에 속하고 마땅히 해내야 하는 일도 마음속 깊이 몇 번이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잠 못 드는 밤에 끝없이 생각을 되풀이한다. ‘그 일을 내가 맡아야 하나? 어휴, 난 못 해. 엄두가 안 나. 난 멍청해. 다른 사람처럼 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자질이 있는 것도 아니야!’ 밥 먹을 때도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하루에 세끼 먹으면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어. 가치 있는 삶이지. 나는 하루에 세끼 먹으면서 본분도 제대로 못 이행해. 아무런 가치 없는 삶이야. 하나님께 죄스럽고 형제자매에게 미안해! 난 밥 한 그릇 먹을 자격도 없어. 먹으면 안 돼.’ 사람이 너무 나약하면 쓸모가 없다. 아무것도 못 한다. 나약한 사람은 어떤 일이 임하든 어렵겠다 싶으면 바로 물러난다. 왜 물러나겠느냐? 한 가지 원인으로는 열등감이 있다. 열등감 때문에 감히 사람들 앞에 서지 못하고, 자기가 다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조차 다하지 못한다. 자기 능력과 자질이면 충분히 가능하고, 자기 인성과 경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도 부담하지 못한다. 이러한 열등감은 그의 인성에 온갖 방면으로 영향을 끼치며, 그의 인격에도 영향을 끼치고, 당연히 그의 성격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는 사람들 속에서 자기 관점을 발표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가 자기 입장과 견해를 밝히는 걸 듣기란 어려운 일이다. 무슨 일이 임하든 선뜻 입을 열지 못하며, 시종일관 움츠러들고 물러나기만 한다. 사람이 얼마 없을 때는 그나마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을 엄두를 내지만, 사람이 많을 때는 어떻게든 구석진 곳으로, 조명이 어두운 곳으로 숨으려 하며,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한다.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말을 좀 하고 싶고, 자기 관점과 견해를 발표해 자기 생각이 옳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도, 그럴 용기조차 없다.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열등감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너를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입 열지 마. 넌 안 돼. 관점을 발표하지 마. 네 생각은 너만 알면 돼. 정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컴퓨터에 기록하고 혼자 소화해. 남이 알게 하지 마. 말 잘못했다가는 망신당한다고!” 그 목소리가 쉼 없이 네게 말한다. 이렇게 하지 마라, 저렇게 하지 마라, 이 말 하지 마라, 저 말 하지 마라. 결국 너는 뱉으려던 말을 도로 삼킨다. 하고 싶은 말을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생각했으면서, 막상 말할 타이밍이 오면 중도에 포기한다. 말할 엄두를 못 낸다. 민망해서 말을 못 한다.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말하는 게 꼭 규정을 어기는 것 같고, 법을 위반하는 것 같다. 언젠가 자발적으로 자기 관점을 발표하게 되면 내심 극도로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한다. 그 극도의 불안감은 점차 사라진다. 하지만 말하고 싶고, 자기 관점을 발표하고 싶고, 정상인이 되고 싶고, 남들과 똑같고 싶다는 생각을, 그러한 마음가짐을, 그러한 계획을 열등감이 차츰차츰 덮어 버린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네가 말수가 적다고, 조용하다고, 낯을 가린다고, 나서기 싫어한다고, 사람 많은 데서는 말하는 걸 쑥스러워해서 얼굴이 빨개진다고, 비교적 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열등감 때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다. 네 마음은 열등감으로 가득하며 네 열등감은 오래된 것이다. 일시적인 기분의 일종이 아니라, 네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네 생각을 단단히 통제하고 있으며, 네 입을 단단히 막고 있다. 이 때문에 네 내면에 어떤 순수한 이해가 있든, 사람과 일에 대해 어떤 관점과 견해가 있든, 너는 속으로만 생각하고 고려할 뿐, 과감하게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못한다. 남들이 인정해 주든, 아니면 지적하고 비판하든, 너는 그러한 결과를 받아들일 엄두도, 볼 엄두도 못 낸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네 열등감이 네 안에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지 마. 넌 그럴 능력이 없어. 넌 그럴 자질을, 그럴 실제를 못 갖췄어. 넌 그래서는 안 돼. 그런 일을 하는 건 네가 아니야. 지금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열등감 아래서 사는 너야말로 진정한 너야. 너한테는 진리를 추구할 자격이 없어.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을 활짝 열고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자격도, 남들에게 흉금을 터놓을 자격도 없어. 왜냐하면 넌 안 되니까. 남보다 못하니까.” 이런 열등감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람의 사상을 주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정상인이 응당 다해야 할 의무와 응당 있어야 할 정상 인성의 생활을 억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법, 그리고 방향과 목표를 주도한다. 그러면 설령 스스로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이 되길 기꺼이 원해도, 정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내거나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삶에 진입하지는 못한다. 열등감 때문에 넌 정직한 사람이 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네게는 그럴 용기조차 없는 것이다. 정직한 말을 한마디라도 하면 사람들 눈치를 살피기 바쁘다. ‘나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진 않을까? 네까짓 게 감히 정직한 사람이 되려 하느냐고, 그저 구원받고 싶어서, 복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진 않을까? 어휴, 난 엄두가 안 나. 남들은 다 해도 나는 못 해. 난 그럴 자격이 없어. 난 남들보다 열등한 걸.’ 이런 구체적인 태도와 유로를 통해 볼 때, 부정적인 정서 중 하나인 열등감이 일단 사람에게 작용하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한 사람이 그것을 떨쳐 버리거나 그것의 통제를 타파하기란 몹시 힘들기 때문에, 매사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 이러한 정서를 패괴 성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미 사람에게 심각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사람의 인성에 커다란 해악을 끼쳤다. 정상 인성의 희로애락과 언행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매우 크고, 결과는 매우 심각하다. 작게는 사람의 성격과 취향, 지향에 영향을 주고, 크게는 사람의 인생 목표와 방향에 영향을 준다. 열등감이 생기는 원인과 과정, 그리고 사람에게 초래하는 부정적 결과를 고려할 때, 어느 모로 보나 열등감은 사람이 내려놔야 할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저는 열등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속박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저를 자극하거나 깎아내린 사람도 없었고, 저를 억압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아주 자유롭게 살았어요. 그렇다면 열등감이 없는 거 아닐까요?” 과연 그러하겠느냐? (아닙니다. 때로는 열등감이 있을 것입니다.) 많든 적든 있을 것이다. 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진 않을지 몰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일시적으로 생겨날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특별히 우러러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너보다 유능하거나 특기와 은사가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너보다 기가 세거나 막무가내이거나 악한 사람을 만났을 때, 너보다 덩치가 크거나 근사하게 생긴 사람을 만났을 때, 사회적 지위나 재력이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너보다 학력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났을 때, 너보다 나이가 많거나 하나님을 믿은 세월이 긴 사람을 만났을 때, 너보다 하나님을 믿으며 체험이나 실제가 더 많은 사람을 만났을 때, 너도 모르게 열등감이 생긴다. 이런 정서가 생기면 너는 자유롭지 못하다. 움츠러들게 되고, 말을 고르느라 심사숙고하게 되고, 표정도 부자연스러워지고, 언행이 제약을 받고, 자신을 포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모습 또한 열등감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열등감은 일시적인 것이다. 열등감이 생겼을 때 성찰하고, 분별하고, 그런 후에 열등감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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