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제 1 부)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느냐? 본성 안에는 어떤 것이 있겠느냐? 네가 단순히 사람의 결점, 문제점, 마음가짐, 관념, 소극성, 패역을 인식할 뿐, 본성 안에 있는 것들을 발견하지는 못한다면, 표면적인 것들만 알고 근원은 알지 못한다면, 이는 본성을 아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결점과 소극성을 인정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교만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본성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본성 안에 교만함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히 도리상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의 본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어떻게 인식해야겠느냐? 몇 가지 측면에서 인식해야겠느냐? 사람이 드러내는 것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겠느냐? 첫째, 사람의 기호를 보면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명인이나 위인을 매우 숭상하고, 어떤 사람은 가수나 배우를 매우 좋아하며, 또 어떤 사람은 게임을 좋아한다. 이런 기호를 통해 그들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한 가수를 몹시 숭상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되었을까? 그 가수의 일거수일투족, 말 한마디, 미소 하나에 매우 큰 관심을 두고, 모든 신경을 집중하며, 심지어 그 가수가 무엇을 입고 쓰는지까지 전부 사진을 찍고 따라 한다. 그 사람이 이 정도로 사람을 숭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의 마음에는 오직 이방인의 그러한 것들만 있을 뿐 진리도, 긍정적인 사물도 없고 더욱이 하나님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전부 사탄의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그의 마음을 점령하였으며, 그는 자신의 마음을 모두 그런 것들에게 주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의 본성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무언가를 어느 정도까지 좋아하게 되면 그것이 그의 생명이 되어 마음을 점령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임을 충분히 증명한다. 그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하지 않으며, 마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의 본성은 마귀를 사랑하고 숭상하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다. 사람의 본성을 이렇게 보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 더없이 정확하다. 사람의 본성은 이렇게 해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바울을 매우 숭상한다. 밖에서 강연하고 사역하는 것을 좋아하며 모임을 가지기 좋아한다. 연설하기 좋아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따르고 자신을 숭상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을 둘러싸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 마음속에 자신의 자리가 있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이미지에 관심 두는 것을 좋아한다. 이러한 모습에서 그의 본성을 해부해 보자. 그의 본성은 무엇이겠느냐? 그가 정말 이러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 사람은 교만하고 잘난 체하며 하나님을 조금도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그가 추구하는 것은 높은 지위에 서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점유하고 싶어 하며 사람들 마음속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사탄의 형상이다. 그의 본성 가운데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바로 교만하고 잘난 체하며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를 경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통해서 그의 본성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남의 덕 보기를 좋아하고, 어디서나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일을 하든 이익이 있어야 하고, 이익이 없으면 하지 않고, 자기에게 떨어지는 몫이 없으면 하지 않는다. 매사에 개인적인 속셈과 목적이 있고, 자기에게 이득을 안겨다 주는 사람을 좋게 이야기하고,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을 발탁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어도 옳다며 어떻게든 덮어 주고 변호해 준다. 이런 부류 사람의 본성은 무엇이냐? 그러한 모습에서 그 사람의 본성을 완전히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는 하는 일마다 덕만 보려 하고 언제 어디서나 거래를 하려 든다. 여기에서 그의 본성이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항상 자기만 생각하고,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자 욕심이 한도 끝도 없는 사람이다. 이익을 탐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의 본성을 대표한다. 여자에게 반해 어디를 가든 여자를 꾀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 미인은 애완동물이나 다름없다. 여자는 그의 마음속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미인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고,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여자로 가득 차 있다. 그럼 그의 본성은 무엇이냐? 그의 본성은 미인을 좋아하고, 여자를 숭상하고, 사악함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는 호색한으로, 그 본성은 사악하고 탐욕스럽다. 왜 이것을 그의 본성이라고 하겠느냐? 이 방면에서 그의 모습은 탐욕에 인이 박인 것에 속한다. 이는 우연히 저지른 과오도 아니고, 일반 사람보다 약간 나쁜 정도라고도 할 수 없다. 그는 이미 그것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그의 본성, 그의 본질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들은 그의 본성에서 드러난 것이다.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것은 시시각각 드러난다. 무슨 일을 하든 사람은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대접을 하든, 복음을 전하든, 어떤 사역을 하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성의 것을 드러낼 수 있다. 본성은 사람의 생명이고,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본성이 드러나는 것은 가끔 있는 일시적인 모습이 아니며,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뼈와 피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모두 본성을 대표하는 것들이고, 사람의 생명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미인을 밝히는 자, 돈을 밝히는 자, 지위를 매우 밝히는 자, 명예와 자신의 이미지에 무척 신경 쓰는 자, 우상을 무척 좋아하거나 숭배하는 자, 너무 교만해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기를 쓰고 지위를 추구하고, 남들 위에 군림하여 남들을 다스리는 걸 좋아하는 자 등 온갖 부류의 본성이 다 있다. 사람과 사람의 본성에는 이런 차이가 있지만 공통되는 부분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지에 관해 몇 가지 예를 더 들어 보도록 하겠다. 이기심을 예로 들어 보자. 이기심은 사람 본성에 내재된 것으로,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이런 요소를 가지고 있다. 매우 지독하고 심하게 이기적인 어떤 사람이 매사에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느라 다른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면, 이기심이 바로 그의 본성을 대표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심을 가지고 있으나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과 지낼 때 다른 사람을 보살피고, 배려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등 매사에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이와는 달리 무척 이기적이어서 형제자매들을 접대할 때 늘 옹졸한 마음을 품는다. 좋은 음식은 가족들에게 주고, 안 좋은 음식은 형제자매들에게 주는가 하면, 식구들은 큰 그릇에 밥을 담아 주고, 형제자매들은 작은 그릇에 밥을 담아 준다. 친척이 왔을 때는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면서 형제자매가 오면 바닥에 재운다. 머물게 해 준 것도 어디냐고 생각하면서 병이 나거나 무슨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전혀 못 본 체하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전혀 보살피지 않고, 남에게 무관심하다. 오직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가족들만 챙긴다. 이기적인 본성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을 챙기지 않으려 한다. 다른 사람을 챙기는 건 손해이고 신경 쓰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챙기는 방법을 몰라서 그래요.” 이 말은 틀린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을 챙길 줄 모른다면 어째서 자기 가족들에게는 그렇게 잘하고, 그렇게 세심한 것이냐? 어째서 자기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언제 무슨 옷을 입고 무엇을 먹는 것이 좋은지는 그리 잘 아느냐? 다른 사람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느냐? 사실 그는 도리적으로는 다 알고 있다. 단지 이기적이고 비열할 뿐이다. 이것은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 대개 아주 이기적인 사람은 사람을 공평하게 대할 줄 모른다. 사악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자. 하나님 집에서는 일관되게 음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반드시 제명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일관되게 음행을 저지른 것으로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느냐? 이것은 원칙의 문제에 관계된다. 어쩌다 음행을 저지른 것을 본성이 사악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일관되게 어디를 가든 음행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도덕과 인륜을 저버린다면 이런 사람은 사악한 사람이고, 이는 사악한 본성에 속한다. 이런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사역을 하든 본인의 본성을 드러낸다. 그의 본성은 통제할 수 없고, 마음속에는 더러운 것만 가득해서 어디를 가든 음행을 저지른다. 설령 일시적으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환경이 허락하지 않거나, 적당한 대상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 무엇으로도 막지 못한다. 옷 입고 치장하는 것을 특히 좋아하는, 허영심이 강하고 무척이나 허황된 사람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좋은 옷을 입거나 멋지게 치장한 사람을 보고 자기도 그런 옷을 손에 넣지 못하면 잠을 못 이룬다. 돈을 빌려서라도, 혹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런 옷을 꼭 손에 넣으려 하고, 심지어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 믿을 마음도 사라지고, 예배도 드리기 싫어지고, 하나님 말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뿐이고, 그런 것에 마음을 온통 빼앗긴다. 이런 사람은 무척이나 허황되고, 보통 사람들보다 그 정도가 무척 심하다. 이것이 바로 본성에 내재된 것이고, 뼛속 깊이 박힌 것이다. 그의 본성은 바로 허황함이다.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것이 한순간의 연약함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든 본성의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설령 때로는 겉으로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내면에는 그런 불순물들이 있다. 간사한 사람이 어쩌다 한 번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도 그 말 속에 또 다른 말, 간사함이 섞여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간사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간사한 수작을 부리는데,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어린아이에게까지 간사한 짓을 한다. 네가 그를 아무리 진실하게 대해도 그는 너에게 간사한 수작을 부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진면목이다. 그가 지닌 그런 본성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다. 정직한 사람도 가끔은 교활하고 간사한 말을 약간 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평소에는 비교적 정직한 편이다. 그런 사람은 일 처리할 때 상대적으로 착실하게 하고, 사람들과 사귈 때도 이익을 보려고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일부러 상대를 시험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또한, 마음을 열고 상대와 교제할 수 있기에 다들 그를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도 가끔은 간사한 말을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패괴 성품이 드러나는 것으로, 그의 본성을 대표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는 간사한 사람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람의 본성을 알아서 무엇이 본성의 것이고, 무엇이 패괴 성품인지 명확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사람들에게 자신의 본성을 해부해 보라고 하면 자기는 가끔 말을 곱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든가, 자신은 교양이 없고 버릇이 없다고 한다든가, 자신은 가끔씩 본분 이행할 때 불순물이 있다고만 할 뿐, 자신의 본성이 어떻다든가 인성이 어떻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늘 이 부분에 관한 얘기를 회피한다면 자신을 진실로 인식할 리가 없다. 늘 감추기만 하고, 체면 상하고 부끄러울까 봐 겁내면 안 된다. 본성에 담긴 것은 파헤쳐야 한다. 파헤치지 못하면 인식할 수 없고, 인식하지 못하면 변화할 수 없다. 자신을 인식하는 일은 무척 엄격해야 한다. 자신을 속여서도 안 되고, 얼렁뚱땅 넘어가서도 안 된다.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것은 곧 자신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곧 어떤 본성이라는 것이다. 가령 아무개는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그의 본성을 가장 잘 설명한다. 그의 본성이 어떠하다면, 그는 곧 그런 사람이다. 사람의 본성이야말로 그 사람의 생명이다. 한 사람의 본성이 어떤지를 어떻게 보느냐? 그와 많이 접촉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에게 어떤 점이 가장 두드러져서 그의 본질과 특징을 대표할 수 있는지 많이 관찰해야 한다. 그의 본성 본질이 무엇인지, 본질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하는 것이 바로 그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는 이렇게 보면 비교적 정확하다. 한 사람의 본질이 무엇이라면 그 본질이 바로 그의 본성이다. 그가 그런 본성이라면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무척 돈을 밝힌다면, 그의 본성은 곧 ‘돈을 밝힘’이란 네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가장 두드러진 점이 여자를 밝히고 항상 여자를 희롱한다는 것이라면 이 사람은 사악함을 좋아하고, 사악함이 바로 그의 본성이다. 어떤 사람은 먹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그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했을 때 어떤 일이든 쉽게 해결된다면 이 사람의 본성은 탐식이다. 마치 돼지처럼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패괴 성품이 있고, 치명적인 부분이 있다. 누구나 실생활에서 패괴 성품에 지배되어 그 패괴 성품으로 살아간다. 패괴 성품은 사람의 본성을 대표한다. 사람의 본성은 사람의 가장 치명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치명적인 부분이 바로 사람의 본성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성이 괜찮아 보여서 겉으로 볼 때는 별로 큰 결함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최대의 약점은 바로 연약함이다. 인생의 목표도, 추구하는 방향도 없고, 늘 되는대로 살면서 사소한 좌절에도 넘어지고 조금만 어려운 일을 만나도 바로 소극적이 된다. 관념이 약간만 생겨도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 한다면 이 사람의 최대의 약점은 바로 연약함이다. 그의 본성은 연약함이고 그는 못난이라서 누구도 붙들어 주지 못한다. 어떤 이의 본성은 정이 너무 많은 것이다. 매일 말하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 항상 정에 이끌려 살아간다. 이 사람에게도 정을 주고 저 사람에게도 정을 주며 매일같이 정을 베풀고, 매사 정에 파묻혀 살아간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이 세상을 떠나면 그는 사흘간 곡을 하고 땅에 묻지도 못하게 하면서 죽은 사람에게도 정을 준다. 지나치게 정에 이끌리기에 이 사람에게는 정이 바로 치명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일에서 정에 휘둘려 진리를 실행할 수 없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도 없으며 또한 항상 하나님을 거역할 수도 있다. 정이 바로 그의 최대의 약점이자 치명적인 부분이다. 정은 이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고 망칠 수 있다. 정이 너무 많은 사람은 진리를 실행할 수 없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없다. 정이 많으면 육만 돌볼 수밖에 없는데, 어리석은 바보다. 이런 사람의 본성은 바로 정이 너무 많은 것으로, 그는 정에 이끌려 살아간다. 성품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본성을 알아야 한다. 강산은 쉽게 변하지만,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본성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본성이 너무 나쁜 사람은 영원히 바뀌지 않기에 하나님은 구원하지 않는다. 성품 변화란 무슨 의미이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각종 고난과 연단을 겪음으로써 사람 내면에 있는 사탄의 독소가 정결케 되고, 패괴된 성품을 철저히 벗어 버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모든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며 더 이상 거역하거나 대적하지 않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성품 변화이다. 만약 사람이 본성이 아주 못되고 악인이라면 하나님은 구원하지 않는다. 성령도 이런 사람에게는 역사하지 않는다. 이는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환자가 염증을 앓고 있다면 치료가 가능하지만, 암이라면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성품 변화란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여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너무 깊이 패괴되었음을, 사람이 그릇되고 간사하고, 빈곤하고 가련함을 깨닫게 됨으로써 최종적으로 사람의 본성 본질을 깨닫고 완전히 스스로를 부인하고 저버리는 단계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며 매사에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고, 성품이 변화된 사람이다.

모든 인류는 사탄에게 패괴되었고, 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들 중 어떤 이는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얻어 성품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어떤 이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그저 대세를 따른다. 무엇을 하라고 시키면 순종하면서 버리고 헌신할 수 있고, 어떤 고통이든 감내한다. 이런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조금 있는 사람이라 구원받아 살아남을 수 있는 희망이 있지만, 성품은 변화할 수 없다. 그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도리를 아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거나 행동할 때 양심에 어긋나지도 않고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도 있고, 무슨 문제가 있을 때 그에게 진리를 교제해 주면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리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생각이 흐리멍덩하여 시종일관 진리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다. 이런 사람에게 성품 변화는 없을 것이다. 패괴가 정결케 되고 생명 성품이 변화되려면 반드시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 무엇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냐? 네게 어떤 패괴 성품이 있든, 네 본성에 큰 붉은 용의 어떤 독소, 즉 어떤 사탄 독소가 있든, 하나님 말씀에서 그것을 폭로하면 인정하고 순종해야 한다. 아무런 선택도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해도, 그 말씀이 아무리 엄해도, 어떤 어휘를 사용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사실 진상에 부합한다면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을 얼마나 이해했든 순종해야 한다. 형제자매가 성령의 깨우침으로 인한 빛 비춤을 교제할지라도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추구하면 진리를 얻어 성품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인성이 어느 정도 있고 좋은 일도 얼마간 하거나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할 수 있을지라도 진리를 참답게 대하지 않고 건성이며, 생명 성품에 늘 변화가 없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 보면 인성에서 그리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베드로에게 눈에 띄는 점은, 진리를 추구하는 데 특히 열성적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어떻게 말씀하든 모두 진지하게 생각했다. 예수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자 베드로는 “저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사랑할 뿐, 땅에 계신 주님은 사랑하지 않았나이다!”라고 사실대로 말했지만, 나중에 ‘그게 아니구나. 땅에 계신 하나님이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다. 하늘과 땅에 계신 하나님은 모두 같은 한 분의 하나님 아니겠는가? 내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실제적이지 않다. 땅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내 사랑이 실제적이 될 것이다!’라고 깨달았다. 예수의 질문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참뜻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사랑하려면 반드시 땅에 계시는, 성육신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막연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실제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눈에 보이는 실제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진리이다. 그는 예수의 말 속에서 진리를 얻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베드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만 집중했고, 마지막에는 실제의 하나님, 땅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진리를 추구할 때 지극히 참답게 대했다. 예수가 말씀으로 짚어 줄 때마다 마음으로 깊이 생각했고, 반년, 1년, 심지어는 몇 년을 생각한 후에 성령이 깨우쳐 주면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렇게 진리에 진입했으며, 그의 생명 성품은 진리에 진입하면서 더 새롭게 변화되었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글귀와 도리는 만 번 되뇌어도 글귀와 도리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라는 말만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말을 만 번 되뇌어 봤자 아무 소용없다. 너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어째서 그리스도를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고 하겠느냐? 체험을 통한 인식을 말할 수 있겠느냐? 너는 진리, 길, 생명의 실제에 진입했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가 체험하고 인식하라는 것이다. 글귀만 말해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진입해야 너 자신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자신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진리를 깨달아야 분별할 수 있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분별도 불가능하다. 진리를 깨달아야 일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일을 꿰뚫어 볼 수 없다. 진리를 깨달아야 자신을 알 수 있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자신을 알 수 없다. 진리를 얻어야 성품이 변화될 수 있고, 진리를 얻지 못하면 성품도 변화되지 못한다. 진리를 얻어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섬길 수 있고, 진리를 얻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섬길 수 없다. 또 진리를 얻어야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으며,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설령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해도 종교 의식의 수행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가 없으면 무엇을 해도 실제적이지 않고, 진리를 얻으면 무엇을 하든 다 실제적이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얻는 것에 달려 있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얻는 일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있느냐? 진리는 모두 하나님이 선포한 것이고, 모두 하나님 말씀 안에 있다. 하나님 말씀 외에는 진리가 없다. 글귀와 도리를 말할 줄 알면 진리를 깨달은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것만큼 황당한 일이 없다. 항상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의 표면적인 의미만 교제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담긴 의미, 하나님 말씀의 근원과 달하려는 효과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 안에 진리가 있고,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말씀 안에 빛이 있고, 말씀 안에 원칙이 있고, 말씀 안에 길이 있다. 하나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기에 네가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일례로 하나님은 “너희는 간사한 사람이 아닌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였다. 이 말씀은 도대체 어떤 의미이냐? “말 그대로 간사한 사람이 아닌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 또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물으면 “간사한 사람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계속해서 또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정직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정직한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간사한 사람은 어떤 모습입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직한 사람은 정직하게 말합니다. 말을 지어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지요. 간사한 사람은 에둘러 말하며,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늘 과장이 섞여 있고, 거짓말을 좋아합니다.” 그는 이렇게밖에 말을 못 한다. 사람의 사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정직한 사람을 이렇게 간단하게밖에 설명하지 못하는데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그럼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정직한 사람에 대해 어떻게 얘기했느냐? 첫째, 정직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다. 둘째, 정직한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인다. 이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한 의도가 무엇이냐? 왜 이렇게 말씀했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통해 정직한 사람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지, 정직한 사람의 정확한 정의는 무엇인지, 네가 그 정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또한 말씀을 통해 정직한 사람의 태도는 어떤지, 어떤 사람이 간사한 사람인지, 간사한 사람은 어떤 모습인지, 이들의 태도를 통해 가늠한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정직한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간사한 사람인지, 간사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참으로 깨닫게 되고, 사람이 생각하는 정직한 사람과 간사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알게 된다. “간사한 사람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세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게 될 때 어떤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간사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 실행할 때,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정직한 사람의 태도인지를 확실히 알게 되고, 정직한 사람이 되는 실행의 길과 실행 원칙을 똑똑히 알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이런 말을 정말로 깨닫고 실행에 옮긴다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 이런 말을 깨닫지 못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절대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자적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두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빛 비춤을 얻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하나님이 하는 그 말씀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말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거두고자 하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밝히 알 수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표면적인 의미를 그럴싸하게 해석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표면적으로 아무리 해석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사람의 상상과 생각일 뿐이다. 아무 소용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이 하는 한마디 말씀마다 공허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 또한 분명 말씀에서 밝혔거나 다른 방식으로 언급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는 방식을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은 지극히 심오하여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측량하기 힘들다. 사람은 각 부분의 진리에 공을 들이면 대체로 완전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남은 세부적인 부분은 체험 과정에서 성령의 깨우침을 통해 보완할 수 있다. 한 가지는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여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구체적인 내용을 찾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여 성령의 깨우침을 얻음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함의를 깨닫는 것이다. 이 두 측면에서 끊임없이 깊숙이 들어가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네가 문자적으로 해석하거나 네 생각과 상상으로 해석한다면, 네가 그럴싸하게 해석한다고 해도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사람의 생각과 상상에 속한 것이지 성령의 깨우침에서 얻은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모두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기 쉬우며 잘못하면 하나님 말씀을 제멋대로 그릇되게 해석하여 하나님을 오해하고 판단하기 쉽다. 이러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진리는 주로 하나님 말씀을 인식하고 성령의 깨우침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지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진리를 얻었다고 할 수 없다. 만약 표면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한 것을 진리를 깨달은 것이라 한다면, 약간의 지식만 갖추면 되는데 성령의 깨우침이 필요하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어찌 사람의 머리로 측량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진리를 깨달으려면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 인도를 통해야 진실한 체험과 인식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는 과정이자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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