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실행 (제 2 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간사한 사람을 혐오하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간사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간사한 사람의 행동과 성품, 나아가 그의 속셈과 속임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것은 모두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다. 간사한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간사한 성품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래도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고, 진리도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먼저 사람됨의 원칙을 바꿔야 한다. 더 이상 사탄의 철학으로 살아가거나 거짓말과 기만으로 하루하루 보낼 것이 아니라 모든 거짓말에서 벗어나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도 달라질 것이다. 과거에 사람은 늘 거짓말과 기만, 가식적인 태도로 군중 속에서 생활하면서 사탄 철학을 생존의 토대이자 생명, 바탕으로 삼고 처신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혐오하는 짓이다.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사실과 진실을 말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면 비방을 받고 판단을 당하고 버림받는다. 그래서 너는 세상의 조류를 좇고 사탄 철학으로 살아가면서 갈수록 거짓말을 많이 하고, 갈수록 간사해지고, 또 음험한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로써 자신을 보호하며 사탄의 세상에서는 갈수록 형통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죄 속에 점점 더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 집에서는 이것과 정반대이다. 네가 거짓말을 하고 간사한 짓을 할수록 하나님 선민들은 너를 더 싫어하고 버릴 것이다. 네가 회개할 생각도 없고 계속 사탄의 철학과 논리를 고수하며 음모와 간계로, 고단수로 자신을 꾸미고 포장할수록 더 쉽게 드러나 도태된다. 하나님은 간사한 사람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정직한 사람만이 형통하고, 간사한 사람은 마지막에 버림받고 도태된다. 이는 하나님이 일찍이 정해 놓은 것이다. 오직 정직한 사람만이 천국에 분깃이 있다. 만약 네가 정직한 사람이 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체험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네 추함을 폭로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지 않는다면, 영원히 성령 역사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무슨 일을 하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정직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정직한 태도가 없으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가 없다. 늘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어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면 마땅히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해야 하고, 자신을 솔직히 털어놓고 해부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 원칙을 구해서 다음번에는 어떻게든 제대로 처리하고,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네가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대신, 늘 자신의 육을 충족시키고 혹은 자신의 허영과 체면을 충족시킬 생각만 한다면,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간사한 사람은 언제나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하고, 어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기 힘들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간사한 사람은 진리를 실행할 때 수작을 부리지 않느냐? 진리를 실행할 때는 대가를 치러야 하고, 자기 이익을 버려야 하고, 남들에게 솔직하게 자신을 털어놓아야 한다. 그런데 그는 다 보여 주지 않는다. 말을 할 때도 절반만 얘기해서 남들은 그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추측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그는 이렇게 언제나 여지를 남겨 두고 자신을 위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둔다. 그가 간사한 사람인 것을 알면 다른 사람들은 그와 교류하지 않으려 하고, 일할 때 늘 그를 경계한다. 그는 거짓말하고 기만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믿지 못한다. 그가 한 말 중에 어느 게 진짜이고 어느 게 거짓인지, 불순물이 얼마나 섞였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는 항상 남들 앞에서 신뢰를 잃기에 사람들 마음속에 비중이 전혀 없다. 그러면 하나님 마음속에는 어떻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은 더 혐오한다.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표면적인 현상만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보다 더 정확하고, 철저하고, 실제적으로 본다.
네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고 어떤 본분, 어떤 사역을 이행하든 관계없이, 또 네 자질의 높고 낮음, 인품의 좋고 나쁨과 관계없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다면 너는 반드시 수확을 거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지는 않고, 본분만 잘 이행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이르노니 너는 영원히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사소한 일이고, 하나님 뜻에 맞는 섬김을 추구하는 것은 큰일이며, 그렇게 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네가 한번 시도해 보아라. 정직한 사람이 되지 않고도 하나님 뜻에 맞게 섬길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아라. 또 어떤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지는 않고, 매일 기도드리고, 제때 예배에 나가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이방인들처럼 살지 않는 것에 만족하면서 위법한 일이나 악행만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느냐?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면 곧 옳은 사람이 아니다. 정직한 사람이 아니면 너는 교활하고 간사하며, 건성으로 임하고, 많은 패괴를 드러내고, 진리를 실행하고 싶어도 실행해 내지 못한다. 정직한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잘할 수 없다.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없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할 때 정직한 태도 없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느냐?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서 정직한 태도 없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느냐? 잘할 수 있겠느냐? 너는 언제나 자신의 육만 생각하고, 자신의 앞날만 생각하고, 육이 덜 고생스럽고, 덜 헌신하고, 덜 봉헌하고, 대가를 덜 치르고 싶어 한다. 너는 늘 여지를 남긴다. 이것이 바로 간사한 태도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에도 여지를 둔다. ‘앞으로 그래도 잘 살아야 하는데 만일 하나님의 사역이 안 끝나면? 백 퍼센트 다 바칠 수야 없지. 하나님의 날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여지는 남겨 둬야지. 집안 살림과 내 앞날부터 먼저 안배한 다음에 헌신하도록 하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으냐? 이렇게 자신을 위해 여지를 남기고 대비책을 마련해 두는 것은 어떤 성품이냐?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이 있느냐? 그가 정직한 사람이냐? 여지를 두고 대비책을 마련한다면 하나님과 한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간사한 성품인데, 그는 간사한 자세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는 정직한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지 않는다. 형제자매와 왕래하거나 함께 지낼 때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꿰뚫어 볼까 봐, 그들이 자신을 분량이 작다고 할까 봐, 또 자신을 무시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말할 때 늘 다른 사람에게 그가 아주 열성적이고, 하나님을 몹시 갈망하며, 정말로 진리를 실행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주려고 하지만, 사실 마음속은 더없이 연약하고 소극적이다. 그래서 그는 강한 척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꿰뚫어 보지 못하게 하는데, 이 또한 간사함이다. 요컨대,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일상생활을 할 때든, 본분을 이행할 때든 거짓을 행하고 위장하며 거짓된 모습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기만하여 너를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하거나 무시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다 간사함이다. 남편을 무척 사모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그 남편은 마귀이자 불신파다. 형제자매들이 정에 얽매인다고 할까 봐 그녀는 제 입으로 먼저 자기 남편은 마귀라고 한다. 사실 속으로는 남편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입으로는 그렇게 말한다. 그 말은 사실 형제자매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인데, 형제자매가 자신을 남편에 대해 분별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녀의 뜻은 이런 것이다. ‘당신들은 일단 밝히지 마. 내가 먼저 내 견해를 말하겠어. 내가 얘기를 하면 당신들은 얘기할 필요가 없지. 나부터가 남편을 마귀라고 폭로해서 정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이면 당신들은 할 말이 없을 거야.’ 이것이 간사함이 아니냐? 이건 거짓 이미지가 아니냐? 이것이 바로 거짓 이미지로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하는 것이다. 언제나 술수를 쓰고 잔꾀를 부려서 남들은 네 거짓 이미지만 보고, 진짜 모습은 보지 못한다. 이것이 음험함이고, 사람의 간사함이다. 남편이 마귀임을 인정하면서 너는 왜 남편과 이혼하지 않느냐? 왜 마귀 사탄을 버리지 않느냐? 남편이 마귀라고 인정하면서도 계속 남편과 같이 산다는 건 네가 마귀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네가 입으로는 남편이 마귀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마귀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고 속이는 것임과 동시에 네가 마귀와 한통속이고 마귀를 감싸고 있다는 뜻이다. 네가 만약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네 남편이 마귀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마땅히 그와 이혼했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간증이 있는 것이고, 그것은 네가 마귀와 선을 그었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는 선을 긋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마귀와 함께 생활하면서 거짓말과 기만이라는 수단으로 형제자매들을 미혹했다. 이것은 네가 마귀와 같은 부류이며, 너 역시 거짓말하는 마귀라는 증거다.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르고,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른다.”라는 말이 있는데, 마귀에게 시집을 가고 마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너 역시 마귀라는 뜻이다. 마귀에게 속하면서도 남편을 마귀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에게 속한다고 증명하려는 것은 거짓말과 기만의 수단이 아니냐? 너는 사실의 진상을 잘 알면서도 거짓말과 기만이라는 수단으로 다른 사람을 속였다. 이것이 바로 음험함이고 간사함이다. 무릇 음험하고 간사한 사람에 속하는 자들은 모두 영락없는 마귀이다.
사람은 누구나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다. 자신을 반성하면 누구나 자신에게도 남에게 거짓 이미지를 심어 주거나 간사하게 굴려는 내적 상태와 행동이 있음을 알 수 있고, 거짓으로 꾸미고 외식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왜 느끼지 못할까요? 저는 솔직한 사람이라서 세상에서 온갖 괴롭힘과 사기를 다 당했습니다. 지금껏 간사한 짓은 해 본 적이 없고, 그저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만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정직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아마 네가 멍청할 수도 있고, 못 배웠을 수도 있다. 어쩌면 너는 사람들 사이에서 구박받는 아주 못난 인간이고, 일을 할 때도 지혜롭지 못하고, 능력도 별로 없고, 사회에서 하층민에 속하는 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네가 정직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정직한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지 불쌍한 사람도 머저리, 바보도 솔직한 사람도 아니다. 너희는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나는 종종 사람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는다. “저는 거짓말을 전혀 할 줄 모르고, 항상 남들에게 속고, 밖에서 괴롭힘만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운다고 하셨는데, 제가 바로 궁핍한 자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 솔직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운다.”라고 한 이 말은 실제적인 면이 있다. 네가 비록 인식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네가 정직한 사람이라는 뜻일 수는 없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바보 천치, 머저리이다. 아무런 능력도 없고, 자질도 너무 형편없고, 전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하는 정직한 사람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하나님이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운다는 말은 맞지만, 그것이 천치, 머저리를 들어 세운다는 말은 아니다. 너는 천성적으로 자질이 형편없는데, 그야말로 머저리에 못난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회 하층민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구원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네가 사회에서 고생하고 멸시받고, 보는 사람마다 널 괴롭히고 속인다고 해서 스스로를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커다란 착각이다.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란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속으로 오해하고 치우치게 이해하고 있지 않느냐? 지금 교제하는 이 말들을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얘기한다고 해서 그런 사람이 정직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말을 솔직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 사람에게 간사함과 기만의 요소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패괴된 인간은 누구나 간사하고 기만하는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고 사탄의 권세 아래서 살면서 사탄 세력에 의해 얽매이고 통제받으면,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없고 갈수록 간사해질 수밖에 없다. 패괴된 인류 가운데서 생활하면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정말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또한 이방인, 마왕, 살아 있는 마귀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비방당하고, 판단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고 축출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직한 사람이 되고도 과연 이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겠느냐? 이 세상에 우리가 생존할 공간이 있느냐? 있다. 틀림없이 생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고 택하였으니 반드시 우리에게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인솔 아래 있는 것이고, 완전히 하나님이 준 숨결, 하나님이 준 생명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받아들였기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존 법칙, 새로운 인생 목표가 생겼다. 우리 생명의 근간이 달라졌다. 우리는 완전히 진리를 얻기 위해, 구원받기 위해 생활 방식, 사람됨의 방식, 즉 사는 법을 바꾸었다. 바로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육적인 의식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우리 마음의 필요이다.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는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가 어렵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살아가고, 특히 그들 가운데서 일하면서 정직한 사람이 되어 사실을 말하면 남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비방당하고, 판단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고 축출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생존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손해를 보고, 거짓말 없이는 일을 성사시킬 수 없어요.” 이것은 어떤 관점이냐? 간사한 사람의 관점이자 논조이다.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기만적인 말을 하는 목적은 완전히 자기 지위와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그들이 정직한 사람이 되어 사실을 말하기를 꺼리는 이유는 지위와 이익을 잃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패괴된 인간은 모두 이렇다. 지식의 많고 적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직자와 일반인, 유명인과 평범한 사람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종종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인다.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 만약 이런 패괴 성품들이 해결되지 않고 계속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는 등 간사한 성품으로 가득하다면, 하나님에게 진심으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너희가 느끼기에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려우냐? 너희는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실행해 본 적이 있느냐?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몇 가지 방면에서 실행하고 체험하였느냐? 너희의 실행은 어떤 원칙에 근거했느냐? 너희는 지금 어느 정도까지 체험했느냐?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었느냐? 만약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면 너무나 잘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역은 단지 미리 맛보게 하거나 예시만 하면 그만인 것이 아님을 하나님 말씀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인 행위만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의 성품과 본질을 변화시키고 모든 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이상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우리는 마땅히 자신이 추구하는 바, 자신의 성품 변화, 자신이 이행해야 할 본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늘 자신의 모든 행위를 참답게 대해야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고, 모든 일을 가져와서 해부할 수 있어야 한다. 매번 어떤 일을 한 다음, 네 생각에 그 일이 옳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진리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니 꺼내어 해부해야 한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대조하고, 확인하고, 분별해야 옳고 그름이 정확해진다. 네가 잘못이라고 여기는 일은 더더욱 꺼내어 해부해야 한다. 이것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많이 교제하고 구하며 서로 도와야 한다. 교제할수록 마음이 밝아지고, 진리 원칙을 깨달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다. 만약 아무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고 꽁꽁 감추면서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 하고, 남들에게 멸시당하지 않고 우러름을 받으려 한다면 진정한 성장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언제나 스스로를 감추고 전혀 솔직하게 교제하지 않는다면 너는 성령의 깨우침을 얻을 수 없고,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러면 결과가 어떻겠느냐? 너는 영원히 흑암 속에서 살면서 구원받지 못한다. 진리를 얻고 싶고 성품 변화를 이루고 싶다면, 진리를 얻고 실행하기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하고,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사람들과 교제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에 모두 유익이 된다. 예배드릴 때 항상 자신의 체험 인식을 얘기하는 것은 본인과 다른 사람에게 모두 유익이 된다. 만약 아무도 자신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체험 인식을 얘기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해부하지 않고, 자신을 솔직히 털어놓지 않는다면, 누구든 글귀와 도리를 얘기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면서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얘기할 때는 입을 열지 못하고, 자신에 대해 조금 인식하더라도 그것을 꺼내어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없다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다 같이 모여서 인사치레나 빈말만 하고 서로 칭찬하고 추켜세우면서 마음에 없는 말만 할 것이다. “요즘 잘하고 계세요. 달라지셨어요!” “요즘 믿음이 정말 대단하세요!” “아이고, 정말 열심이시군요!” “저보다 많이 헌신하셨군요!” “저보다 봉헌을 많이 하셨어요!” 일종의 이런 국면이 형성되어 늘 서로 추켜세우고 칭찬만 한다. 모두가 분별하고 인식하도록 자신의 진짜 모습을 꺼내어 해부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국면이 형성되면 진정한 교회 생활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저는 몇 년째 교회 생활을 해 오고 있는데, 매번 아주 만족스럽고 즐거워요. 예배 때 형제자매들이 다들 기꺼이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을 찬미하죠. 기도하고 찬양을 부르면 감동으로 눈물범벅이 되고, 때로는 흥분으로 몸이 더워져서 계속 땀이 나요. 형제자매들끼리 찬양도 부르고, 율동도 하고, 교회 생활이 다채로워서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정말 성령 역사가 있다니까요! 그런 다음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 하나님 말씀이 우리 가슴에 그대로 와닿는 느낌이에요. 교제할 때마다 다들 열성적이죠.” 몇 년씩 이렇게 교회 생활을 하면서 다들 무척 즐긴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정말로 진리 실제에 진입한 사람도 얼마 없고, 자신의 체험으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도 얼마 없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찬양을 부르고, 율동을 할 때는 다들 신나게 참여하다가도, 진리를 교제할 때는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도 정직한 사람이 되는 체험을 얘기하고 자신을 해부하거나 자신의 패괴 성품을 솔직히 털어놓음으로써 남들이 인식하고 분별해서 유익과 도움을 얻도록 하지 않고, 누구도 진실된 체험 간증을 교제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 몇 년간 이렇게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고 신나는 기분 속에서 실컷 즐기다 보면 교회 생활은 헛되이 지나가 버린다. 너희가 보기에 사람의 그 즐거움과 쾌락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내가 감히 말하건대 그런 건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만족해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생명 성품의 변화이고 사람이 살아 내는 진리 실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실제를 보려는 것이지 네가 예배드릴 때, 혹은 열정을 발산할 때 찬양 책을 들고 찬양을 부르거나 율동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려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런 걸 보면 하나님은 크게 상심하고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한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씀을 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진정으로 실행하거나 살아 내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려하는 바이다. 너희는 종종 교회 생활이 조금만 편안하고 즐거우면 스스로 만족을 느낀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이 조금이라도 즐겁고 위안이 되거나 조금이라도 마음이 뿌듯하면 자기가 이미 제대로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거짓 이미지들을 계속 유지하고, 그것을 밑천으로 삼고,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최대 수확으로 삼아 생명 성품의 변화를 대신하고, 구원의 길로의 진입을 대신한다. 그러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도 되고, 정직한 사람이 되길 추구하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를 반성하거나 자신의 문제를 해부하지도 않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면 이미 위험한 경계에 이른 것이다. 만약 계속 이런 식으로 간다면, 하나님 사역이 끝났을 때도 여전히 정직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르지 못한다면,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여전히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통제받는다면, 사탄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이런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구원받는 자가 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염려하는 것이다.
사람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무척 열성적이다. 특히 하나님이 진리를 교제하는 것을 들으면 이렇게 생각한다. ‘이젠 진리를 깨달았어. 참도를 찾게 되었어. 정말 기쁘구나!’ 매일 매일이 새해를 맞이하고 경사를 치르는 것처럼 즐겁고 기쁘기만 하고, 매일같이 누가 예배를 열고 교제해 주기를 바란다. 몇 년 후에는 교회 생활에 냉담해지고, 하나님 믿는 일에도 냉담해지는 사람이 생겨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사람이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표면적으로나 이론적으로만 인식할 뿐,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에 진입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한 것처럼 풍성한 잔칫상을 본 사람들은 많지만 대부분은 와서 보기만 할 뿐, 하나님이 베풀어 준 음식을 먹거나 맛보고, 그것으로 자기 몸을 보양하는 이가 전혀 없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혐오하는 바이자 걱정하는 바이다. 지금 너희의 내적 상태가 이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에게 늘 이렇게 교제하고 돕고 있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건 바로 너희가 설교를 듣고 자기의 정신적 필요를 충족시킨 다음 전혀 실행에 옮기지 않고, 그 말씀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내 교제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자질이 어떤가에 관계없이 믿은 지 2, 3년만 되면 그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그가 만약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진리를 추구할 것이고, 만약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드러나 도태될 것이다. 너희는 과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냐?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느냐? 앞으로 변화될 수 있느냐? 이런 말씀들을 교제한 후 너희는 얼마나 실행에 옮길 수 있느냐? 과연 얼마나 많은 말씀이 너희에게서 결실을 맺을 수 있느냐? 모든 게 미지수이며 마지막에는 다 드러날 것이다. 이것은 맨 처음 하나님을 믿었을 때 얼마나 열성적이고 얼마나 고통받을 수 있는지와는 관계없다. 가장 핵심은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설교를 듣고 난 후 진리를 묵상할 것이고,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실행하고 체험할지, 현실 생활에서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응용할지, 하나님 말씀의 진리 실제를 어떻게 살아 내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될지를 고민할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에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설령 참도를 받아들이고 매일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듣고, 일부 도리를 이해한다고 해도 어려움과 시련이 닥치면 소극적이고 연약해지고, 심지어 믿음을 잃고 물러나게 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어떤 태도로 진리를 대하는지, 네가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즉 과연 진리를 얻어 생명으로 삼기 위한 것인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갖추는 목적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잘 이끌기 위한 것이다.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그것은 그가 조금은 부담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의 생명 진입과 진리를 실행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줄 모른다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그건 불가능하다. 진리 실제를 갖추지 않으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와주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겠느냐? 교회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네가 설교를 얼마나 듣고 어떤 길을 선택했든 너희에게 올바른 관점을 하나 알려 주겠다.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네가 리더 일꾼이든 평범한 따르는 자이든, 먼저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여야 한다. 열심히 읽고 묵상해야 한다. 네가 깨닫고 실행할 필요가 있는 진리부터 먼저 확실히 해야 하고, 자신에게 맞춰 보고, 자기가 먼저 실행해야 한다. 자기가 먼저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해야 진리를 얻은 것이다. 만약 자기가 깨달은 도리를 남에게 늘 얘기하고 본인은 실행하고 체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치우친 부분이다. 어리석고 무지한 것이다. 너는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이를 실행하고 체험해야 한다. 차츰 많은 진리를 깨닫고, 본분을 이행하는 효과도 갈수록 좋아지고, 많은 체험 간증을 얘기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 말씀은 네 생명이 될 것이고, 네 본분도 틀림없이 잘 이행하고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도 잘 완수할 수 있다. 만약 네가 늘 이 말씀들을 다른 사람에게만 맞춰 보려 하거나 적용하려 하고, 혹은 네가 사역하는 밑천으로 삼으려 한다면 곤란하다. 네가 가는 길은 바로 바울의 길이며, 전혀 다를 바 없다. 네가 이런 관점을 지니고 있으면 분명 이 말씀들을 도리로 여기고 이론으로 여기는 한편, 그 이론들을 가지고 연설하고 사역하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척 위험한 일이다.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가 모두 이렇게 한다. 만약 네가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내적 상태와 대조해 보고 본인이 먼저 반성하고 인식하고, 그런 다음 진리를 실행해 낸다면 수확을 거둘 것이고, 진리 실제에 진입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자격과 분량을 갖추게 된다. 너 자신이 하나님 말씀과 사역을 실제로 체험하지 않는다면, 생명 진입도 전혀 없고 그저 글귀와 도리만 말할 줄 안다면 사역을 해도 마구잡이로 할 것이고 실제적인 효과가 없을 것이다. 결국에는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가 되어 도태될 것이다. 만약 네가 어떤 방면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마땅히 자신에게 먼저 대조해 보고, 깨달은 그 진리를 자신의 삶 속에서 실행해 자신의 실제가 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분명 수확을 거두고 변화가 있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 말씀이 좋다고, 그 말씀이 진리이고 실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속으로는 진리를 묵상하거나 깨달으려 하지 않고, 또 실제 생활에서 실행도 체험도 하지 않고, 노트에만 적어 놓고 끝이라면, 너는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도 얻지도 못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설교 교제를 들을 때는 그것을 묵상하고 자신에게 대조하고 자신의 내적 상태에 결부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실행해야 정말로 수확이 있게 된다. 너희는 설교를 듣고 나서 이렇게 실행하느냐? 그렇게 실행하지 않는다면 너희 생활에는 하나님도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너희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실제도 없는 것이다.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현실 생활에 적용해서 실행하지도 체험하지도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는 불신파이다. 진리를 실행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말씀을 현실 생활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사역을 체험할 수가 없다. 사람이 현실 생활에서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얻을 수가 없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 너희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너희가 어떻게 이해하고 얼마나 알아듣느냐를 떠나서, 관건은 하나님 말씀과 본인이 깨달은 진리를 현실 생활에서 실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네 분량이 자라고 네 성품이 변화될 수 있다.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하거나 사람에게 요구를 할 때면 항상 사람에게 실행의 원칙과 길을 제시할 것이다. 예를 들어, 방금 우리가 얘기한 정직한 사람이 되는 일만 봐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길을 제시하면서 어떻게 해야 정직한 사람이 되는지, 어떻게 정직한 사람이 되는 원칙을 실행해야 정상 궤도에 들어설 수 있는지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비밀, 즉 자신의 어려운 점을 사람들에게 털어놓고 광명의 길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면, 나는 네가 구원받기 어려운 사람이며, 흑암에서 벗어나기 힘든 사람이라고 한다.”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에 담긴 뜻은, 우리에게 자기가 생각하기에 비밀 혹은 개인적인 일을 꺼내서 솔직히 털어놓고 해부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이 말씀이 본래 너희에게 이렇게 실행하라는 것임을 깨닫지도 알지도 못했다. 때로는 네 방식에 간사하고 기만적인 속셈이 담겨 있는데, 그러면 너의 방식, 너의 속셈을 바꿔야 한다. 아마 다들 너의 말에 간사하고 기만적인 성질이 있음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지만, 너는 좋아할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네가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너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네 속셈과 방식을 해부하고 털어놓아야 한다. 네 이런 속셈이 하나님이 반기지 않는 건 아닌지, 하나님이 혐오하는 건 아닌지, 솔직히 털어놓지 못하는 건 아닌지, 언급하기 힘든 건 아닌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렇게 해부하고 분석해 보면 그 일이 원래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게 원래 꺼내어 솔직하게 털어놓기 힘든 일이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일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이런 방식을 바꿀 수 있다. 내가 이렇게 교제하니 너희는 속으로 어떤 느낌이 드느냐? 아마 어떤 사람들은 근심할 것이다. ‘역시나 하나님 믿는 일은 정말 복잡하구나. 지금까지 오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왜 또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지?’ 사실 지금 하나님은 와서 사람이 진리 실제로 진입하도록 이끌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시작이며, 사람됨의 시작이다. 시작을 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믿는 기반을 잘 다져야 한다. 우선 이상 방면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따르는 의의를 알아야 하고, 그다음에는 진리를 실행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만약 네가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데만 열중하고,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바탕만 다진다면 그건 큰일이다. 그건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아무리 높이 쌓아 올려도 무너질 위험이 있고,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희에게 바람직한 부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내가 너희와 교제하면 너희는 모두 이해할 수 있고, 다들 듣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이건 좋다. 진리를 추구하는 일, 실제에 진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전부 부차적이라는 점만 알면 너희는 하나님 믿는 정상 궤도에 쉽게 진입할 수 있다. 진리 추구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인식해야 하는데, 자신에게 어떤 패괴 성품이 있고 어떤 결함이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이럴 때 진리를 갖추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고, 서둘러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생명 진입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진리 실제를 얻는다면 마음은 훨씬 편안해질 것이다. 아무리 큰 재난이라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동안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면서 진리도 추구하지 않고, 일이 닥쳤을 때 여전히 늘 흐리멍덩하고,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상태에 머물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할 줄도 모르고, 여전히 세상의 처세술과 패괴 성품에 의지해 살아간다면 얼마나 가련한 일이냐! 언젠가 재난이 커질 때, 너에게 진리 실제가 전혀 없다면 왜 예전에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는지, 왜 진리를 하나도 얻지 못했는지 후회할 것이고, 불안해서 하루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성령 역사는 이제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처음 몇 년은 사람에게 어느 정도 은총과 긍휼을 베풀고, 도와주고, 공급해 준다. 하지만 사람이 늘 변화하지 않고, 실제에도 진입하지 않고 그저 글귀와 도리를 이해한 것에만 만족하면 위험해진다. 이미 성령 역사를 놓치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할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이다. 사람은 재난 속에 떨어져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