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조건 (제 1 부)

사람의 패괴 성품에는 공통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각 사람의 인성에 있는 공통적인 문제이자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성의 가장 연약한 부분이자 치명적인 부분이다. 또한 사람의 본성 본질에서 가장 파헤치기 어렵고, 가장 변화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무슨 문제일까? 바로 사람이 늘 위대한 사람, 초인,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피조물이다. 피조물이 무소불능에 도달할 수 있느냐? 완벽함에 도달할 수 있느냐? 티 없는 정도에 도달할 수 있느냐? 모든 일에 정통하고 모든 일을 다 알고, 다 꿰뚫어 보고, 다 해내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느냐?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의 내면에는 패괴 성품과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사람이 기술 하나나 업무 하나를 배우면 자신을 능력 있는 사람, 신분이나 몸값이 높은 사람, 전문가 등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능력이야 어떻든 자신을 위인이나 남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포장하여 꽤 유명한 인물이 되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결함도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들 눈에 유명한 사람이나 강한 사람, 위인이 되어 위대해 보이고, 무엇이든 가능하고,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면 자신이 무능하고 약세에 처한 것 같으며 남들보다 못해 보일 거라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할 거라고 생각해서 늘 거짓되게 꾸미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누군가 일을 시키면 사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안다고 말한 뒤, 뒤에서 몰래 자료를 찾고 공부한다. 며칠을 공부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거의 다 됐어요!”라고 하면서 속으로 고민한다. ‘아직 멀었는데. 갈피도 못 잡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들통나면 안 돼. 그래도 계속 아는 척해야지. 사람들한테 내 결점과 무지함을 들키면 안 돼. 남들에게 우습게 보이면 안 돼.’ 이것은 어떤 문제이냐? 이는 체면 때문에 생고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교만함이 극치에 달하여 이성을 잃은 것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 보통 사람, 정상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초인이나 뛰어난 사람, 재능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이러면 문제가 심각하다! 정상 인성의 약점과 결점, 무지함, 어리석음, 혹은 몰이해 등을 전부 포장해서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고 계속해서 위장한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이든 꿰뚫어 보지 못한다. 하지만 자기는 속으로 알고 있다고 하는데, 그에게 말해 보라고 하면 그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자기도 같은 생각인데 미처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자신을 거짓으로 꾸미고 포장하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들은 항상 안개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냐?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어떻게 해야 정상 인성을 살아 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람으로 착실하게 살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안개 속에서 살면서 어리석게 지내며, 착실하게 일하지는 않고 늘 상상에 기대 살아간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네가 선택한 그 인생의 길이 옳지 않은 것이다. 네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믿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너는 진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네 첫걸음의 시작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너는 땅 위를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도 착실하게 한 발씩 내딛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걸을 수 있으면 걷고 뛰어가려 하지 마라. 한 번에 한 걸음씩 걸을 수 있다면 두 걸음씩 걷지 마라. 착실하게 살아야 한다. 초인이나 위인, 위대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라. 사탄 성품의 지배를 받아 사람은 내면에 일종의 야심과 욕망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 사람은 누구나 땅 위에서 착실하게 살아가려 하지 않고 늘 반공중에 올라가 안개 속에서 살아가려고 한다. 이것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냐? 반공중은 사람이 사는 곳이냐? 거기는 사탄의 영역이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상의 흙으로 사람을 창조한 것은, 사람이 땅 위에서 지내고, 사람의 모든 삶이 정상적이고 규칙적이며, 사람에게 사람됨의 상식과 처신, 사는 법, 그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법을 배우도록 함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 주지 않았고, 사람이 반공중에서 지내도록 하지 않았다. 반공중에서 떠돌아다니는 것은 사탄이고, 여러 악령이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늘 이런 야심을 품은 채 초인이 되어 남들과 달리 특별해지고 싶어 한다면 곤란하다. 주화입마에 빠지기 쉽다! 우선 그런 사상과 관점은 틀린 것이다. 그것은 사탄에게서 온 것이고 완전히 현실을 초월한 것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전혀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이것은 무슨 사상이냐? 늘 평범함을 넘어서 특별해지고 싶어 하고 비길 데 없이 뛰어나고 탁월함을 꿈꾸며 주류를 형성하고자 하고, 유명인이나 위인, 마음속 우상이 되고 싶어 하는 것들이 사람이 추구해야 할 목표냐? 절대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서 사람에게 초인이나 강한 사람, 유명인이나 위인이 되라는 말씀은 하나도 없다. 사람이 상상하는 이런 것들은 모두 비현실적이고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으로, 추구하면 할수록 빨리 죽게 된다. 이는 파멸의 길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말씀을 했는데, 너희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살라고 요구하는지 아느냐?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착실하게 행동하고 일을 처리하며 묵묵히 근면하게 사는 것입니다.) 말로는 간단할지라도 대부분은 도달하지 못한다. 오직 정직한 사람만이 행할 수 있다. 사실 너희가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에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한다. 정직한 사람만이 성실하게 살고 착실하게 행동하며 묵묵히 근면하게 살 수 있다. 그러기에 정직한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정직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혐오하는 사람은 간사한 사람이다. 누구든지 성실하게 살지 않고 착실하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간사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되지 않느냐? 그럼 너희가 또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한 것 외에 또 어떤 요구를 하느냐?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낮춤’이라는 단어를 사람에게 사용하는 게 타당하느냐? (타당하지 않습니다.) 왜 타당하지 않다고 말하느냐?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들은 원래 지위가 없고 처음부터 구더기만도 못한 사람인데, 더 이상 낮출 데가 어디 있겠느냐? 더 낮추면 그게 무엇이냐? 마귀, 짐승이 되는 거 아니겠느냐? 사람은 본래 하나님이 창조했고,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사람에게는 본능이 있는데, 사람이 갖추어야 할 것은 사람이라면 달성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모두 사람의 정상적인 모습과 유로에 속한다. 먼저 사람이 가진 희로애락이라는 이 몇 가지 감정에 대해 말해 보겠다. 사람이 슬프고 괴로울 때, 그것을 표현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우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 인성에서 자연스럽게 유로하는 것이다. 마음이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 울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가식적으로 굴지 마라. 어떤 사람은 “나는 울지 않아. 난 사내대장부라고. 남자는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아!”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지조 있는 여자야. 남자처럼 강인한 여장부가 될 거야. 속 좁은 여자처럼 굴지 않아.”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이 옳으냐? 이것은 어떤 인성이냐? 이것은 가식이지 진짜가 아니다. 가식으로 꾸며낸 것이라면 정상 인성에서 유로되는 것이 아니고, 모두 거짓된 형상에 불과하며 사람의 정상 인성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어떤 일로 슬퍼하고, 걱정이 되고, 한숨이 나오고, 혹은 정색하는 표정을 짓고, 입맛이 없는 것 등은 다 정상 인성에서 유로되는 것으로, 누구도 감출 수 없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웃는 것도 정상적인 유로이다. 어떤 사람은 기쁠 때조차 크게 웃지 못하고 늘 남들이 비웃을까 봐 입을 가리고 몰래 웃는데, 이것은 정상적이냐? (비정상적입니다.) 이 역시 가식이다. 그 사람은 여자가 공공장소나 사람들 앞에서 크게 웃으면, 특히 치아를 드러내고 웃으면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쉽게 보일 수 있으니 반드시 어느 정도 자제해야 하고 경박스럽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전통문화 교육의 결과이다. 희로애락마저 비정상적인 사람에게서 정상 인성의 표현과 욕구는 절대 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이 정상적이겠느냐? (비정상적입니다.) 그의 생각은 무언가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은 사탄에게 너무 깊이 패괴되어 사람 같지도, 귀신 같지도 않은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 바로 귀신의 본성에 지배받아 사는 모습이다. 거짓이 너무 많고 가식 또한 너무 많다. 하나님을 몇 년간 믿어도 왜 이렇다 할 변화가 없겠느냐? 한편으로는 정상인으로 사는 길, 원칙, 방향, 목표에 올바른 인식과 명확한 깨달음이 없고, 진리 추구의 길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사람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40~50살이 되어도 어떻게 정직한 사람이 되는지, 정상 인성으로 살기 위해 어떤 요구에 도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는 사람의 마음에 전통문화가 너무 깊게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다. 늘 자신을 상상 속 성인이나 위인으로 위장해 진리에 대한 이해가 편집적이고 그릇되며 기괴한 것이다. 너희 중에 이런 사람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절대로 타인과 마음을 나누지 않고, 사람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법도 모른다. 마치 어려움이 하나도 없고, 소극성과 연약이 전혀 없는 것처럼 굴고, 생명 진입 하는 일에 조금의 어려움도 없으며, 구할 필요도 없고, 사람과 교제할 필요도, 누군가의 교제와 공급, 도움과 지도도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일이든 스스로 다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소극적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물으면, 그는 “가끔 소극적일 때도 있었는데,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의지를 다지고 맹세하니 바로 좋아졌어요.”라고 말한다. 이는 어떠한 사람이냐? 겉으로 봐서는 이런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도 사실 이런 내적 상태를 갖고 있는 사람이 꽤 있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언젠가 ‘신선이 되어 도를 깨달아’ 천국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불교 신자가 말하는 육근이 깨끗하여 어떠한 욕심도 없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그 방향으로 노력하고 힘쓰는데, 이것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모르고, 진리의 도를 아무리 들어도 추구하는 목표도, 하나님을 믿는 관점도 그대로다. 이러면 곤란하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누가 너의 하나님인지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이상(異象)에 대해 전혀 인식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이상을 모르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진리를 사랑하는지’와 같은 말은 그런 사람에게 말해도 소용없다. 그들은 무엇이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무엇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3년이나 5년, 8년이나 10년을 믿는다 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좋은 사람이 되고 선행을 베푸는 걸로 여겨 기꺼이 선행을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관점은 너무 피상적이고 뒤떨어지지 않느냐? 하나님을 믿는 진리와는 도무지 맞지 않고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이방인과 불교, 도교의 관점과 생각, 그리고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일을 대한다면, 또한 전통적 관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믿는 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진리에 대한 이해가 순수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자기기만 아니냐?

중국인은 도교와 불교 같은 전통문화 배경이 있다. 이런 전통적인 사회 배경 아래에서 중국인의 사상은 이 영향에서 벗어나기 몹시 어렵다. 그리하여 중국인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가장 먼저 재계하며 염불하고, 살생하지 않으며, 자선과 선행을 베풀어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람을 때리거나 욕하지 않으며, 살인 방화를 저지르지 않고, 호인이 되는 등 불교와 도교의 사상 관점을 떠올린다. 그럼 이런 것들을 없애고 하나님을 믿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느냐? 어떤 진리를 추구하고 깨달아야 사람의 이러한 잘못된 생각과 관념을 완전히 뒤집고 제거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요구를 진정으로 깨닫고 진리의 원칙으로 하나님을 믿어야만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설 수 있고, 이로써 하나님을 믿는 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여전히 봉건적이고 미신적인 것이 남아 있고, 전통 종교의 관념과 상상, 그리고 각종 규례가 있다면 사람 마음속의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으로, 반드시 진리를 구해 이런 것들을 분별하여 완전히 버려야 한다. 이런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령의 역사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근거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영원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오르고 이 문턱을 넘어서면 그의 내면 상태에 변화가 생긴다. 우선 사상 관점이 허황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모든 내적 상태와 마음, 생각이 공허하지 않고 진리에 부합하며 하나님 말씀에도 완전히 부합하게 된다. 또한 그의 추구 목표나 방향도 이론적이고 파악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 긍정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며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전체 내적 상태, 그의 마음과 생각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너는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만약 여전히 공중에 떠다니고 정확한 방향을 정하지 못했으며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생각들로 가득하고, 공허하고 이론적인 생각과 사람의 각종 사상, 관념, 상상에 사로잡혀 있다면 너는 여전히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상상의 공중에서 사는 것이다.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네가 생각하고 행하는 것, 마음속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하나님을 믿는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와는 전혀 무관하고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 네가 행하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냐? 사람이 종합한 체험, 사람의 처세 철학, 그리고 사회나 가정, 그리고 여러 환경에서 배운 것과 사람의 머리로 상상하고 종합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너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고 그러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한다고, 자기 생각에 옳다거나 긍정적인 것은 모두 진리라 여긴다. 그러다 어느 날, 벽에 부딪히고 책망받고서야 자신이 한 일과 자신의 사상 관점이 모두 사람의 상상과 관념으로, 진리 원칙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기 전에 하는 많은 일은 진리 원칙이 없다. 모두 사람의 머리, 상상, 혹은 사람의 취향, 열정, 끈기, 혹은 아름다운 희망, 바람, 심지어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들이 사람이 일할 때의 출발점이자 기원이다.

사람이 어떤 내적 상태를 갖춰야만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여기에 기준이 있다. 바로 하나님 말씀을 체험할 때의 정상적인 내적 상태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미 이러한 내적 상태로 살고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내적 상태에 진입하지 못하고 혹은 이따금 그런 내적 상태라 할지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또 예전의 내적 상태로 돌아가기도 한다. 이것은 어떤 내적 상태이냐? 사람이 자신의 열정, 취향, 관념과 상상으로 얼마간 체험한 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믿어서는 안 될 것 같고 진리를 얻을 수 없으며, 그렇게 믿는 것이 공허하고 실제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자신은 본래 하나의 피조물이니 진정한 피조물이 되어 온 마음과 정성으로 성실하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고 나서 착실하게 일하고 본분에 충성을 다하기 시작한다. 일할 때엔 관념, 상상, 취향대로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 묵상하고 구하기 시작한다. 이때 비로소 마음속에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은 소망이 생기며 이때부터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하려 한다. 너에게 이런 소망이 생기고 마음에 정상적인 내적 상태가 자리 잡았을 때, 한편으로는 진정한 피조물이라는 올바른 위치에 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역시 중요한 측면인데, 바로 네 마음속 깊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너의 주인이자 너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이며, 하나님 말씀이 모두 진리임을 알게 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여 하나님 말씀이 네 생명 실제가 되게 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너는 진리와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너에게 이런 의지와 소망, 그리고 이런 욕구가 생기고, 하나님 말씀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너의 생명 상태가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때부터 너는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설 것이다.

방금 교제한 이런 말들은 정리해 보면 사실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다. 사람이 스스로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하면 진정한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을 흡족게 하길 바라며 동시에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 자신의 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모든 요구와 주재에 순종하고자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생각대로 일하거나 자기가 계획한 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할 때 늘 하나님의 뜻과 진리 원칙을 구할 수 있다. 그는 개인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늘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의 주관적인 염원은 항상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진리에 부합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싶어 한다. 한 사람이 이런 내적 상태를 갖고 있다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천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너에게 이런 내적 상태와 의지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크게 높이고, 경외하며, 만족게 할 수 있을지 등을 자연스럽게 배우기 시작할 것이다. 너의 사욕을 채우거나 타인을 만족시키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이 이런 내적 상태에 진입하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더 이상 패괴 성품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다. 이런 내적 상태에 진입하면, 너의 주관적 의사로 생각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다. 가끔 패괴 성품을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의식할 수 있게 되어 자신을 반성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네게 여전히 패괴 성품이 있다고 할지라도, 패괴 성품은 더 이상 너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없고, 너를 통제할 수도 없게 된다. 이때는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가 네 안에서 주권을 잡은 것 아니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사는 것 아니겠느냐? 너희는 지금 진리가 마음속에서 권세를 잡게 할 수 있느냐? 이는 사람에게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있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진리를 많이 깨닫고 잘 이해했다면 자연히 진리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권세를 잡을 것이다. 반면,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고 사탄의 독소는 너무 많다면 진리가 권세를 잡게 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자 하지만, 일이 임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며, 어떠한 단속이나 통제도 받지 않고 패괴 성품을 제멋대로 드러내는데, 이는 어떤 내적 상태겠느냐? 이것은 바로 사람이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고 분량이 작을 뿐만 아니라 육과 사탄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가 마음속에서 권세를 잡기 어렵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며 몇 년간의 체험이 없으면 패괴 성품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매우 간사하여 절대 속내를 말하지 않는다. 솔직한 말을 한마디 해보라고 해도 하지 못하며, 어떤 일을 얼마나 얘기하든 분명하게 얘기하지 못하고, 항상 에둘러 말하는데,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다. 패괴 성품 앞에서, 사탄의 추악한 본성 본질 앞에서 사람은 그렇게 보잘것없고 연약하고 무기력하며 속수무책이기 때문에 항상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지르며 소극적이 되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된 일이냐?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지 못했다는 것의 숨은 뜻은 무엇이냐?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하나님을 만족게 하길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초래된 결과이다. 너희가 그런 내적 상태에 처해 있다면 아직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이 진리를 얻은 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 진리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람에게 진리가 없다면 항상 패괴 성품에 기대어 일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럼,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긍정적인 일을 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겠느냐? 진리를 깨달아야 하지 않겠느냐? 만약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임한다면, 이것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이것이 힘쓰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방인을 고용해 하나님을 위해 힘쓰게 하는 것과 같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않았다면 너는 힘만 쓰고 있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사람이 오직 하나님을 위해 힘만 쓸 뿐,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아 구원받지 못하는 그런 상황을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얻기 위해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옳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것은 하나님을 나타내고, 나아가 사람을 얻기 위함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힘만 쓰는 데 대해 하나님은 왜 흡족해하지 않겠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의 진심입니다.) 설마 하나님을 위해 힘쓰는 것이 사람의 진심이 아니겠느냐? 네가 진심으로 힘을 쓰든 그렇지 않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한평생 힘써도 진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진리를 얻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며, 하나님 또한 너라는 사람을 얻지 못한 것이니, 네가 힘쓰는 것은 그 어떤 가치와 의미도 없다. 얼마나 오래 힘을 썼든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이 너라는 사람을 얻지 못했다면, 이는 너라는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누가 초래한 것이냐? 바로 사람 스스로가 협력하고자 노력하지 않아 초래된 것이고, 사람 스스로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초래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근본 원인이다. 하나님이 너라는 사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실제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늘 자신만의 속셈을 품고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다. 또 그는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지도, 더욱이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을 흡족게 하려 한 것도 아니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진심이 아니니 완전히 가망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지 감찰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진심이다. 진심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없다면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좋아할 리 있겠느냐? 하나님과 한마음이 아닌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갖고 있느냐? 매사에 하나님의 편에 설 수 있느냐? 온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느냐? 만약 너희에게 조금의 진심도 없다고 한다면 너희는 억울해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정말로 사탄을 증오해서 저버리고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면,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그래서 너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하며, 더 많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건 사람의 어떤 마음이냐? 먼저, 그 마음은 정직하여야 하고, 성실하고 착실하게 본분을 이행하며 교회 사역을 지킬 수 있어야지, 더 이상 무슨 원대한 포부나 더 높은 목표 같은 걸 가져서는 안 된다. 즉, 땅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하나님을 따르고 경배하며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는 뛰어난 사람이나 위인이 되려고 추구해서도, 더욱이 특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려고 추구해서도, 외계의 다른 피조물을 숭배해서도 안 된다. 그 밖에, 그 마음은 진리를 사랑해야 한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바로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고, 정의감이 있으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증거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런 것들은 진리를 깨달은 후에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다.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은 적어도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양심과 이성을 갖추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느냐? 말할 때와 일할 때 기본적으로 양심과 이성의 기준에 부합한다면,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사람이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거기에 진리를 깨닫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한 것이고 양심과 이성의 기준에 부합하고도 남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도록 공급하고, 자양하고, 이끌어 주시지요. 그러니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과 사탄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살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합니다.”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이것도 물론 맞는 말이지만 큰 틀과 윤곽만을 얘기했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실제적인지는 양심, 이성과 관련이 있다. 그럼, 하나님을 위해 사는 방법은 무엇이냐? (피조물로서 이행해야 할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너희가 현재 하는 것은 사람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맡긴 일이 바로 너희의 본분이다. 이는 하나님이 정하고 예정하고 주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 일을 네가 완성하도록 맡겼다. 그럼 어떻게 해야 양심에 따라 그 일을 완성하고 잘해 낼 수 있겠느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것은 양심에 따른 한 가지 태도이다. 그 밖에도 마음과 책임을 다하되, 대충 건성으로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혈을 기울이며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책임을 다하고 이 본분을 이행하도록 예정한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하나님에게 실망이나 슬픔을 안겨서는 안 되며,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께 완벽하고 만족스러운 답변을 드려야 한다. 또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의지하되 스스로 업무 관련 지식을 많이 배우고, 진리 원칙을 더 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 이상, 우리는 마땅히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한다. 하루를 살아도 하루의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하고, 하나님이 맡긴 일을 최우선 임무로 삼아야 하며, 본분 이행을 인생의 우선순위로 삼아 완성해야 한다. 완벽을 추구하지는 않더라도 진리에 공을 들이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따라 행하면,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고 사탄을 부끄럽게 할 수 있으며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을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본분을 대할 때 가져야 하는 태도이다. 네가 40~50세나 70~80세가 되어 젊고 무지했던 지난날에 했던 일을 되돌아본다고 해 보자. 그 당시에는 비록 어렸지만, 모든 일에 마음과 힘을 다했고, 늘 양심에 따라 행동해 왔으며,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실망하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도 않았으며,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감찰과 검열을 받아들였다면, 그런 일을 마치고 나서 하나님께 답안지를 제출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할 것이다. “비록 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지는 못해 성과는 그만저만하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네 직무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양심에 따라 일한 것 아니겠느냐? 그럼, 사람이 늘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개인적인 선택, 욕망, 기호를 가지며, 심지어 양심의 기준에 완전히 반하고, 정상 인성을 잃었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자신을 저버리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런 것들이 너를 통제하고 너의 양심과 이성을 통제하게 해서는 안 된다. 양심이 너의 행위와 삶, 생명을 주도할 수 있다면, 너는 육적인 사욕을 쉽게 이길 수 있고, 이 부분의 진리를 얻게 된다. 이는 마땅히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어떤 마음을 원하는지에 관해 방금 몇 가지 부분을 이야기했느냐? (정직한 마음,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양심과 이성, 이렇게 세 가지 부분입니다.) 정직한 마음과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이 안에는 모두 세부적인 내용이 있으니, 나중에 다시 한번 묵상하고 정리해 보아라. 사람이라면 적어도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양심과 이성을 지녀야 한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정상 인성을 잃게 된다. 또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고 해내지 못하며, 결국 여지없이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양심과 이성만 갖춘 채로 양심적으로 살며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양심적으로, 이성적으로만 살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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