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7) 제 5 부
이어서 사례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어느 날 내가 농장에 갔는데, 마침 농장 사람이 배를 따고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내게 배 몇 개를 가져다주었다. 언뜻 보기에도 배가 설익어서 푸르스름했다. 그런데 배를 따던 사람은 샛노란 배를 들고 베어 먹는 것이었다. 그는 먹으면서 “정말 달아요. 배가 참 맛있네요.”라고 했다. 잘 익은 건 자기가 먹으려고 남겨 두고 나한테 준 건 거의 다 설익은 배였다. 배가 익었는지 설익었는지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나에게 배를 따 준 자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는 바보가 아니다. 온종일 배나무를 지키고 있으니, 그는 어떤 배가 익었고 어떤 배가 설익었는지 잘 안다. 마침 내가 갔을 때 그는 나무에서 설익은 배를 따 준 것이다. 사실 나는 설익고 성질이 찬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설익은 과일은 더더욱 못 먹는다. 먹고 나면 위가 불편하다. 그런데 그는 설익은 배를 나한테 주고, 자기는 잘 익은 배를 베어 먹었다. 이 일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가 설익은 배와 잘 익은 배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은 멍청해서 구분하지 못하는 줄 알고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설익은 배라도 준 게 어디야. 게다가 많이 주기까지 했잖아. 어차피 배가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도 모를 텐데. 그런 식견이 있을 리 없지! 진리를 교제할 때야 구구절절 맞는 말을 하지만, 내가 이렇게 설익은 배를 많이 따 줘도 분명 나를 좋게 생각하고 내가 자기한테 잘한다고 생각하겠지.’ 이런 짓을 한 그는 다른 사람은 어리석다고, 특히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런 미련한 짓을 하고 나서 속으로 지각하겠느냐? (지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지각하지 못하고 자기가 남을 속였다고, 자기가 아주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똑똑하냐?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가 정말 똑똑하다면, 어떻게 이렇게 미련하기 그지없는 짓을 하고도 지각하지 못하겠느냐? 이는 그가 똑똑한 게 아니라 옹졸하다는 증거다. 나한테는 설익은 배를 따 주고, 자기는 잘 익은 배를 먹는 그의 행동이 우습지 않으냐? 그에게 따지지는 않지만, 나는 그의 행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자가 나한테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은 성질이 심각하지 않으냐? 이 일을 대하는 그의 관점,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 방식을 보면, 이자의 인성이 어떤 것 같으냐? 그가 이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 이렇게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겠느냐? (모를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아주 똑똑한 줄 안다. ‘내가 얼마나 똑똑한지 보라고. 설익은 배를 줬는데, 눈치도 못 채잖아! 잘 익은 배는 다 내가 두고 먹을 거야. 익은 배는 하나도 못 먹게 할 거라고! 다시 와도 익은 배는 빼고 안 익은 배만 줄 거야!’ 고작 배 따는 일로 사람이 드러난 것이다. 싹수가 노랗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싹수가 노란 데다가 옳고 그름마저 모르니, 이런 사람의 인성이 어떻겠느냐? 내가 보니 이자는 짐승이다. 그는 사람의 탈만 쓰고 있지, 사실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그의 이런 행동과 잘못은 너무 저급해서 동물보다 나을 게 없다. 사람은 늘 인간이 고등 동물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니 동물보다 못한 사람이 많다! 그의 행동은 물론, 그 행동의 원칙과 방식을 보면, 그는 인성이 없을뿐더러 주인에게 충성하는 집 지키는 개보다도 못하다. 우리 집은 개를 한 마리 키우는데, 그것이 한번은 돼지 귀를 먹고 있길래 내가 개를 놀리며 말했다. “그렇게 맛있어? 나도 한입 먹어 보면 안 되겠니?” 그러자 그것이 돼지 귀를 내려놓고는 내 앞으로 밀어 주었다. ‘드세요.’라는 뜻으로 말이다. 고기나 뼈는 개한테 가장 맛있는 먹이라서 자기 새끼가 달라고 해도 안 주는데, 내가 달라고 하니 바로 내려놓았다. 보아라, 개를 키우다 보면 개한테서 사랑스러운 면을 볼 수 있다. 네가 개를 키우고 개에게 잘해 주면, 개한테는 네가 가족이다. 개에게 자기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달라고 하면, 너한테 줄 것이다. 네게 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니, 사람이 무슨 고등 동물이냐? 사람이 고등 동물이라고 하는 마귀의 말은 순전히 황당한 논리이며, 억지 논리이고 그릇된 주장이다. 사람이 인성을 지니지 않았다면, 이 사탄의 세상 속에서 살면서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할 것이다. 얼마든지 나빠지고 저급해지며 추해지고 비열해질 수 있다. 만약 양심이 작동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모른다면, 사람은 온갖 나쁜 짓을 다 할 수 있고, 온갖 잘못된 말, 억지 논리와 그릇된 주장을 다 늘어놓을 수 있다. 사람이 동물보다 무섭다. 사실 동물은 무섭지 않다. 단순하고 순수하며 꾸밈없다. 내가 기르는 강아지는 어렸을 때 돼지 귀를 먹다가도 나를 보면 좋아서 고개와 꼬리를 흔들어 댔다. 개는 사람을 즐겁게 해 줄 줄 안다. 하지만 네가 개한테 장난삼아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개는 주지 않고 재빨리 숨었다가 다 먹고 난 다음에야 나타난다. 그러다 두세 살이 되면 달라진다. 개가 철이 들어서 좋아하는 것을 달라고 하면 준다. 개가 네게 주는 행동은 진실한 것이다. 네게 요구하거나 노리는 것이 없다. 그리고 개가 네게 주지 않는 행동 또한 진실한 것이다. 네게 무슨 악의가 있는 게 아니다. 개가 네게 주든 안 주든 그 행동은 모두 진실한 것이며, 천성이자 본능이다. 동물에게는 패괴 성품이 없고, 사탄의 가공을 거친 것도 없다. 동물은 항상 천성에 따라 표출한다. 무척 솔직하고 단순해서 추측할 필요도 없고, 경계할 필요도 없다. 너에게 준다면 주는 것이고, 주지 않는다면 안 주는 것이며, 기분이 좋으면 좋은 것이고, 나쁘면 나쁜 것이다. 동물은 기분에 휘둘리거나 네게 나쁜 생각을 품는 법이 없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대단히 무섭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어도 양심과 이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사람은 동물보다 나을 게 없고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다. 어느 정도로 나빠지겠느냐? 마치 귀신을 보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로 나빠진다. 그래서 너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것이고, 양심에 자극을 받아서 내면 깊숙이 충격을 받고 괴로울 것이다. 이런 느낌을 받을 때 나는 속으로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사람이 어쩜 이렇게까지 나쁠 수가 있는가?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가?’라고 탄식한다. 사람이 일단 양심과 이성이 없으면,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다. 지금처럼 이렇게 나빠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보다도 더 나빠지고 계속해서 타락할 수도 있다. 옳고 그름을 모르는 것은 인간의 타락과 추락의 발단이 된다.
옳고 그름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자는 인성을 지니지 못했으며 마귀의 본성을 가졌을 것이다. 그가 앞으로 무엇을 표출하든, 평생 어떤 삶을 살아 내든 결국 그는 구속되지 못한다. 영원히 구속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지니지 않았다면, 정확히 말해 인성을 지니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구제 불능이며 구속받지 못할 것이다. 실상이 그렇다. 사람이 옳고 그름조차 모른다면, 양심적이고 이성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겠느냐? 황당한 말이다. 질투하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람과 다투는 것은 그다지 심각한 성질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중엔 나와 다투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대체 누구를 믿는 것이냐? 그가 나와 다툰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어떤 사람은 내가 그의 어떤 문제를 지적하면,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어떤 방법으로 트집을 잡아 반격할지 고민한다. 만약 그에게 “밥을 할 때마다 이렇게 많이 하네요. 왜 딱 맞게 못 하죠?”라고 하면,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나한테 밥양을 못 맞춘다고 하는 건 내가 머리가 나쁘고 못났다는 소리 아냐? 그럼 자기가 직접 하든가!’ 내가 밥을 했는데 조금 남기라도 하면, 그는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자기도 양을 딱 못 맞추잖아? 반격할 기회를 잡았어. 내 문제를 폭로했으니, 나도 당신을 폭로하겠어!’라고 생각한다. 그는 늘 나를 겨냥할 방법만 궁리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당신을 겨냥하기만 하면 그에게 앙심을 품는 것 아닌가요? 다른 사람을 겨냥하는 건 되고, 당신을 겨냥하는 건 안 된다는 말입니까?” 이게 맞는 말이겠느냐? (아닙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테이블을 정리하라고 하니, 그는 “제가 어지른 게 아니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네가 어지르지 않았더라도 정리는 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하니, 그는 “정리는 하더라도 제가 어지른 게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히 말씀드려야죠.”라고 대답했다. 내가 그에게 수납장 안에 있는 물건도 정리하라고 했더니, 그는 “그 안에 있는 건 제가 산 게 아닌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난 “네가 산 게 아니면 정리하면 안 되느냐? 말 한마디 했는데, 왜 이리 듣지를 않느냐? 누가 산 건지 꼭 확실히 알아야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했다. 그가 옳고 그름을 알고 그런 말을 했겠느냐? 그는 억지 논리를 늘어놓고 있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내가 그에게 억지 논리를 늘어놓고 있다고 해도 그는 속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내 신분이 특별하니 내가 뭐라고 하든 다른 사람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내가 권력으로 사람을 억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이런 생각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가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아무리 이야기해 줘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길래 더는 그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뒀고, 나는 그를 이해해 주고 참아 주었다. 비록 내게는 그런 신분과 지위가 있지만,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대적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나는 내게 무례하게 구는 형제자매를 내 두 눈으로 많이 보았다. 나에게 불복하고 분개하는 사람, 속으로 나를 질투하고 증오하는 사람, 나를 무시하고 폄훼하는 사람, 뒤에서 나를 판단하는 사람, 공공연히 나를 비꼬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많다. 내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더냐? 사역한 지 삼십여 년이 되었는데, 나는 그 누구에게도 보복한 적이 없다. 내 신분이 공개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다고 해서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지위가 생기고 나서 그를 괴롭힌 적이 없다.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게다가 그들이 내게 무례하거나 해가 되는 짓을 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들을 문책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진리와 결부하여 교제해서 모두가 분별하게 해야 한다. 이는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한 일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이것을 별것 아닌 일로 여긴다. 마치 거론할 가치가 없다는 듯 말이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러니 이 일을 교제해서 모두 분별력이 생기게 하는 것이 너무나도 필요한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나는 너를 믿는 사람으로 대하고, 네가 이행하는 본분에 따라 네게 요구했다. 그렇다면 너는 마땅히 해야 하지 않겠느냐? 순종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게 이런 신분이 있고 내가 이 신분과 지위로 네게 요구했으니, 너는 내가 한 말을 피조물의 자세로 대해야 한다. 너는 지금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을 해서는 안 되고, 억지 논리를 늘어놓거나 대들어서도 안 된다. 이것이 피조물로서 네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이성이자 인성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자는 이런 자세를 지니기는커녕 억지 논리를 늘어놓았다. 그렇다면 그가 옳고 그름을 알겠느냐? 모른다. 옳고 그름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성이 없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분명히 말해 인성이 없다. 만약 보통 사람이 네게 테이블 정리나 수납장 정리를 시켰는데, 네가 하기 싫거나 상대방이 자기에게 요구할 자격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면, 안 해도 된다. 그런데 너는 “제가 어지른 게 아니에요!”, “수납장 속의 물건은 제가 산 게 아닙니다!”라고 했다. 이게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 할 말이겠느냐? 이는 막돼먹은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보통 사람이 네게 이런 말을 하면 너는 불복하겠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내가 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너는 감히 나한테 억지 논리를 말하며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았다. 네가 이렇게 억지 논리를 늘어놓는 것은 어떤 인품이겠느냐? “제가 어지른 게 아니에요!”라는 네 말은 ‘어지른 사람이 치워야죠. 어쨌든 저는 치우지 않겠어요.’라는 뜻이다. 너는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억지 논리를 늘어놓았다. 이것이 정상 인성이 지녀야 할 일 처리 방식이겠느냐? 그 일이 네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그 말을 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모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너는 그 일을 거부하고 하지 않으려고 분풀이하면서 자기가 어지른 게 아니고, 자기가 산 게 아니니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핑곗거리를 찾고 억지 논리를 늘어놓으며 하지 않으니, 이는 너무도 억지스러운 논리 아니냐? 이렇게 억지스러운 논리를 늘어놓으면서도 당당하고 방자하다니, 너는 옳고 그름을 모르는 게 아니겠느냐? 인성이 없는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이런 신분과 지위를 가진 나를 겨냥했다고 해서 너를 그렇게 규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이 네게 같은 요구를 했는데, 네가 하지는 않고 따지는 것을 옆에서 봤더라도 나는 똑같이 평가했을 것이다. 네 말은 인성에 맞지 않는 틀린 말이자 억지 논리이며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것을 틀렸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올바른 논리로 여긴다. 이는 네 인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 준다. 너는 순간적으로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이는 자연스러운 표출로서 인성과 본질을 나타낸다. 왜 본질을 나타낸다고 하겠느냐? 네가 가지고 있는 이런 사상 관점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내가 한 말이 너를 자극한 것도 아니며, 오랜 시간, 오랜 세월 동안 너는 늘 그렇게 생각해 왔고, 여기에 더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겼을 때 네게 관념이 생기고 마음속이 불만과 불복으로 가득하게 되어 순간적으로 제어하지 못해 속에 있는 것이 폭로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폭로된 것이냐? 네가 양심과 이성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 네 인성이 너무나도 악하고 끔찍하다는 것이 폭로된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라고 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패괴 성품을 인식하라고 하면 더더욱 그러지 못한다. 인성을 지니지 못했다면 짐승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우연히 내게 한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거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한마디했다고 해서 그를 그렇게 규정하는 게 아니라 그가 한 일의 성질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규정한 것은 결코 불공평하거나 불공정한 것이 아니다. 그가 다른 사람을 겨냥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봤더라도 나는 그렇게 평가했을 것이다. 이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이다.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과 황당한 논리를 내뱉을 수 있는 데다가 그것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모습이라면, 이는 본성 본질이 폭로된 게 아니겠느냐? 진짜 인성이 폭로된 게 아니겠느냐? 이는 그가 드러난 것이다. 무엇이 드러났겠느냐? 그에게 인성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성이 없는 사람은 옳고 그름을 모르고, 그 어떤 억지 논리와 그릇된 주장도 당당하게 말한다. 말하고 나서는 자기가 한 말이 틀렸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그 말이 왜 틀렸는지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반성하거나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는 법도 없다. 그러다 결국 뭐라고 하느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건 아니었어요.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뱉은 말이잖아요?” 네가 일부러 말할 필요가 있었겠느냐? 네가 자연스럽게 표출했으니 인성이 어떤지는 이미 폭로되었다. 네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말을 내뱉었다는 것이 바로 네가 오래전부터 그 말을 마음속으로 생각했다는 증거다. 환경이 닥치자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일 뿐이다. 이는 네 인품을 여실히 나타낸다. 네가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야 말했다면, 그것이 꼭 진실한 말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꾸며 낸 말일 수도 있다. 그러면 네 인품은 더더욱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인성이 없는 사람은 옳고 그름을 모르고, 시비를 전도시켜 억지 논리를 올바른 논리처럼 말한다. 네가 아무리 그에게 사실을 열거하며 도리를 설명해 주어도 그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제가 뭘 잘못했죠? 잘못한 건 당신들이죠! 당신들이 절 무시했잖아요. 제가 얌전하고 별다른 은사도 없고 사회에서 아무런 힘이나 지위도 없다고 괴롭히는 거잖아요!” 억지 논리와 그릇된 주장을 잔뜩 늘어놓으면서 자기가 잘못한 일이나 늘어놓은 억지 논리의 성질에 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잘못된 일을 얼마나 저지르든 인정하지 않는다.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이겠느냐? 양심과 이성이 건전한 사람은 차치하고, 양심과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은 평생 잘못을 많이 저지른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특히 해서는 안 될 말,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사람들은 평생 통회하고 괴로워하며 양심에 참소를 받고 죄책감이 들 것이다. 철이 들고 성숙한 나이가 될수록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 알게 된다. 그의 양심과 이성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끊임없이 규제할 것이다. 특히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의 경우, 진리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나면, 그의 양심과 이성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서 자기가 했던 잘못된 말, 자기가 밝혔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 자기가 저질렀던 잘못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올라 계속 반성하고 심사숙고한다. 그러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그 말씀에 비춰 보면서 갈수록 자기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자신이 잘못된 말과 행동을 적지 않게 했고,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어리석고 무지하며 우둔한 짓, 남들이 싫어하는 짓을 많이 저질렀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의 차원에서 볼 필요도 없이 사람이 몇 년간 경험하고 체험하여 얻은 인식으로만 봐도 인성 속의 이런 문제, 잘못, 과오를 계속해서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이 정상이다. 이것은 인성을 지녔고 옳고 그름을 아는 사람이 일정한 나이가 되어 진리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나면 가져야 할 깨달음과 수확이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모르는 사람은 육칠십 세가 되어도 우매하고 무지하며 완고한 작자일 뿐 변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부류가 변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이는 밤나무에서 은행이 열기를 바라는 꼴이다. 절대 불가능하다. 이런 부류는 영영 변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모르는 사람에게 진리를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에게는 능력 밖의 일이고, 그는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에게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색맹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색맹이 제대로 된 색깔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느냐? (그리지 못할 것입니다.) 음치에게 노래를 시키면 계속 음 이탈을 하고, 아무리 불러도 음정이 맞지 않지만, 정작 본인은 자기 음정이 맞고 다른 사람이 음 이탈을 하는 줄 안다. 그가 가늠하는 기준이 옳지 않으니, 그는 영영 옳고 그름을 모를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런 내용을 교제하는 것은 사람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 주겠느냐? 인성이 없는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라는 기본 조건이 결여되어 있어 인성을 가늠하고 단속하는 기본적인 기준이 없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이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에게는 몹시 이상해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늘 억지 논리와 그릇된 주장, 허무맹랑한 관점을 늘어놓으니, 너는 대관절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다. 이제 답을 찾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이 부류가 함께 지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함께 지내선 안 된다. 아직 그 지경까지 이르진 않았고 마지못해 함께 지낼 수 있는 수준이라면, 짜증 나지 않게 그와는 되도록 대화하지 마라. 지금 각 분야의 사역이 모두 매우 바쁘고 에너지를 쏟아야 할 사역도 많다 보니, 너무 바빠서 이런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논리는 상대할 틈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관점 또한 옳지 않다. 이러면 분별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논리를 듣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적어 두었다가 나중에 진리를 구해서 분명하게 분별하고, 그 황당한 논리가 도대체 왜 틀렸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훈련하고 실행하면 분별력이 생긴다. 그렇다고 이런 부류에게 진리를 교제해서 그의 관점을 바로잡아 줄 필요는 없다.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달걀을 보고 달걀이 나무에서 열린다고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사실 암탉 한 마리가 나무 위에서 알을 낳은 것인데, 그는 암탉은 보지 못한 채 달걀이 떨어지는 것만 보고 이런 결론을 도출한다. 아무리 얘기해 줘도 알아듣지 못하고, 한사코 달걀은 나무에서 열린다고 우기기만 하니, 우매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과 말이 통하겠느냐? (통하지 않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대화하지 마라. 말해 봤자 입만 아프다. 그동안 나는 터무니없는 사람을 너무 많이 보았다. 이들 중 대다수가 매우 열성적이고 본분도 어느 정도 이행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간악한 자들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과 가볍게 대화해 보니 어땠겠느냐? 진리에 관해 이야기하면 이르지 못하고, 외부 일에 관해 이야기하면 듣고 있지 못하니, 더는 그들과 이야기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과 대화하는 게 너무 지치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할 사역이 너무 많고, 다뤄야 할 주제도 너무 많다. 주제도 다 다루지 못할 지경인데, 그들을 상대할 마음이 생기겠느냐? 이제 진리를 이 정도까지 교제했고, 많은 일들이 분명해졌으며 실상도 훤히 드러났으니, 각 부류의 사람이 정말 각기 부류대로 나뉠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부류는 부류대로 나뉘게 하면 그만이다. 그와 따져 가며 그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바로잡아 줄 시간이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다음에 보자!
2024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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