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2) 제 3 부

3) 이성을 접할 때의 태도와 모습

세 번째 측면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성을 접할 때의 태도와 모습이다. 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무리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직면해야 하는 문제이다. 이는 인성의 어느 측면과 관련 있겠느냐? 존엄, 염치, 품행과 관련 있다. 어떤 사람은 이성을 접하는 것을 가볍게 여겨 ‘일을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생각이 좀 들거나 삿된 욕정과 사욕을 드러내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정상 인성으로 가져야 할 생각이냐? 정상 인성의 표징이냐? 네가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 이성과 만나 연애하고 싶으면 정상적으로 해라.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연애를 하지 않고 눈에 드는 상대를 보면 며칠 시시덕거리고, 마음에 들거나 마음이 맞는 이성을 보면 바로 자기를 과시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과시하느냐? 추파를 던지거나 말할 때 말투를 바꾸거나 어떤 몸짓을 하거나 우스갯소리로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이것이 바로 과시다. 평소에는 이렇지 않은데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면 장담하건대 곁에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품행이 좋지 않고, 남녀 경계가 불분명하다고 하자니,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경박하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중하지 않는 것이다. 경박한 사람은 자애를 모른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만, 본분을 이행하고 사역을 완수하는 데 지장을 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를 문제라고 할 수 있느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 추구에 지장을 주지 않았으면 됐지, 이 일에 대해 뭐 말할 게 있어요?” 이것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인성의 염치, 그리고 존엄과 관련되어 있다. 인성에 이 두 가지가 빠지면 안 된다. 정상 인성에 이를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신용도 꽤 있고, 일도 꽤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열심히 하고,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 이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네가 이성과 시시덕거리는 것이 상대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피해가 되겠느냐? 만일 상대가 너를 사랑하게 되면, 넌 어떻게 해야겠느냐? 너는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라고 말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면서 시시덕거리다니 그건 사람을 농락한 것이 아니냐? 이것은 사람을 해치는 짓이다! 이는 좀 부덕하다! 이런 사람은 인품이 나쁘다. 그 밖에, 연애할 생각도 아니고, 진지하게 결혼을 전제로 교제할 생각도 없으면서 이성에게 추파를 던지고 위트와 유머를 뽐내며 네 풍격과 멋,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이런 것을 과시하는 건 무슨 의미이냐? (사람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유혹하는 뜻이 좀 있다. 유혹이라는 행위는 고상하냐, 악랄하냐? (악랄합니다.) 이러면 존엄이 사라진다. 이 세상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이 남을 유혹할 수 있겠느냐? 창녀, 음탕한 여인, 불량배 같은 사람은 염치를 모른다. 염치를 모른다는 건 어떤 것이겠느냐? 뻔뻔스러운 것이다. 명예와 절조, 수치, 영예, 존엄, 명성 같은 것들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가는 곳마다 과시하고 시시덕거리는데, 그는 한두 명과 시시덕거리는 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여덟이나 열 명과 시시덕거려도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천, 수만 명과 시시덕거릴 수 있어야 기뻐한다. 어떤 여자는 결혼해서 아이가 둘 있는데도 남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왜 남들에게 알리지 않겠느냐? 그녀는 자신이 결혼했고 임자가 있다고 말하는 순간 남과 시시덕거리지 못하고 남을 꾀거나 유혹할 수 없게 될 것이 두려워 공개하지 못하는 것이다. 뻔뻔스럽지 않으냐? 인성 안에 이런 것들이 있다면 정상 인성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정상 인성이 아니다. 이 말은 네가 그런 인성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네 정상 인성 안에는 무언가가 부족하고 염치와 존엄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이성 곁에만 가면 머리를 매만지고 옷을 정돈하거나 화장을 하는 등 치장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유혹하는 것이다. 이는 정상 인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유혹하면서도 아무 느낌 없고 그것이 정상적이고 흔하며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염치없는 것이자 무슨 일을 해야 하고 무슨 일을 해서는 안 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여자는 만 위안을 주고 나체로 길거리에서 한 바퀴 돌라고 하면 기꺼이 그렇게 한다. 이건 어떤 인간이겠느냐? 염치가 없는 인간이다.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염치를 모르는 인간으로, 그녀가 보기에 명예와 절조, 인품, 염치, 존엄은 별것도 아니고 가치도 없다. 그녀는 과시하고 유혹하는 것이야말로 능력이고, 더 많은 사람이 그녀를 주목하고 쫓아다녀야 즐거우며, 이는 여자의 최고 영예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기지 존엄이나 염치, 인품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이게 좋은 인성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에게는 이런 모습이 있지 않으냐?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럼 절제할 수 있느냐? 절제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냐, 아니면 드무냐? 자신을 단속할 능력은 있느냐? 자기 단속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염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시적으로 충동을 느끼거나 제멋대로 행동할 때가 있다. 하지만 제멋대로 행동하면서도 그렇게 하는 게 옳지 않고 창피하며 서둘러 뉘우쳐야 한다고, 다시는 그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다시 그런 일을 마주했을 때 자신을 단속할 수 있다. 네 인성 안에 이 정도 자기 구속력조차 없다면 네게 진리를 실행하라고 했을 때 네가 무엇을 배반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외모가 조금 괜찮아서 이성이 쫓아다닌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신에게 과시할 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위험한 것이 아니냐? 그럼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겠느냐? (화를 보면 피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화이니 피해야 한다. 피하지 않으면 누가 네게 달라붙을지도 모른다. 네게 달라붙기 전에 피해야 하며, 이를 자기 단속이라 한다. 자기 단속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염치와 존엄이 있다. 자기 단속을 못 하는 사람은 누가 유혹하면 유혹에 넘어가고, 누가 쫓아다니면 걸려드는데 그럼 골치 아파지는 것이다. 한편, 어떤 사람은 일부러 과시하고 치장하고, 입었을 때 훨씬 멋있고, 잘생기고, 예쁘게 보이는 옷을 골라 일부러 매일 그것만 입고 다니는데, 이는 위험하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행위다. 그 옷을 입었을 때 너무 눈에 띄고 너무 유혹적이면, 너는 육을 저버리고 그런 옷을 포기해야 한다. 네게 의지가 있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만약 네게 그럴 의지가 없고 배우자를 찾을 생각이라면, 둘이서 정상적으로 사귀되 다른 사람은 유혹하지 마라. 네가 배우자를 찾을 생각이 없으면서 계속 다른 사람을 유혹하면, 그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너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희는 원칙을 지킬 수 있느냐? (그럴 의지가 있습니다.) 그럴 의지가 있다면 그럴 힘과 동력이 있으니 쉽게 지킬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단정한 사람인 데다 하나님을 믿은 후 진리를 추구하며 올바른 길을 걷느라 그럴 마음이 없어서 누가 유혹해도 상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그런 일에 민감하고, 어떤 사람은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어떤 사람은 그런 의지도 있는 것 같지만 정확히 있는지 없는지 자기 자신도 모른다. 너는 이성 교제라는 일을 올바르게 대하고, 다시 살펴보며, 이 일을 정상 인성의 존엄과 염치에 포함시켜야 한다. 염치가 없는 것과 인성이 없는 것은 어떤 관련이 있겠느냐? 염치가 없는 것은 인성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인성이 없는 사람은 모두 진리를 사랑하지 않겠느냐? 왜 사람이 인성을 갖추면 진리 추구에 이를 수 있다고 하겠느냐? 염치가 없는 사람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알겠느냐? (알지 못합니다.) 그럼 그는 나쁜 일을 저질러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거나 진리를 위배했을 때 마음속으로 가책을 느끼겠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그가 올바른 길에 오를 수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사람은 무감각해서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과 혐오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거짓말 좀 하는 게 뭐 어때서요? 거짓말하는 게 창피한 것도 아니잖아요!” 염치없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염치 있는 사람은 만약 정직하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을 남들에게 들키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마음이 불안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반면 염치없는 사람은 어떻겠느냐? 그는 ‘무슨 정직한 사람이 되느니,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니, 남들 마음속에 내 가치와 분량이 어떠니, 그런 건 다 상관없어!’라며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런 그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거짓말을 하고 난 그에게 마음이 평안한지, 참소가 있지는 않은지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평안한 게 뭐예요? 참소가 뭐죠? 뭔 일이 그렇게 많은지!” 그는 그런 지각이 없다. 이렇게 이성이 건전하지 않은데 하나님을 따를 수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그는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 진리와 진리에 위배되는 것 사이에 경계가 없고, 그것들 모두 똑같으며 어차피 모두가 힘을 들이고 본분을 이행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으니 그거면 됐고 그런 일들 간에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더라도,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 일을 하더라도, 남의 이익을 해치는 일을 하더라도, 교회 사역을 교란하는 일을 하더라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면 이는 염치없는 것 아니겠느냐? 염치없는 사람은 이런 일들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고 진리로 평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염치없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거나 실행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염치가 없는 것과 인성이 없는 것의 관계이다. 그럼 너희는 어째서 말하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너희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들은 진리와 큰 관련도 없고 너무 동떨어져 있어요. 우리가 평소에도 분명히 알고 있던 그런 일들을 당신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나요?’ 너희는 그런 것들이 진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너희는 진리 실제에 얼마나 진입했느냐? 너희는 정상 인성을 살아 냈느냐? 너희가 정말로 진리와 인성을 갖춘 사람이 되었느냐? 분량이 너무도 작아서 그런 일들을 명확히 분별하지도 못하는 너희에게 무슨 진리 실제가 있겠느냐?

하나님 집의 10가지 행정 법령 중 하나는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은 물론, 감정까지 있다. 그러므로 서로 협력하며 섬길 때 남녀가 단둘이 함께하는 것은 일률적으로 금지한다. 이를 위반한 사실이 발견되면 누구도 예외 없이 출교한다.’이다. 사람은 이 행정 법령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한 남자가 여자 30여 명과 부당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은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듣자마자 놀라고 경악하며 “세상에, 그렇게나 많다니! 역겹지도 않나?”라고 할 것이다. 그 남자는 그런 말을 할 때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흔히 있는 일처럼 대한다. 그에게 오늘 무엇을 먹었냐고 물으면 그는 “쌀밥이요.”라고 답하고, 여자 몇 명과 놀아났냐고 물으면 “30여 명이요.”라고 답하는데 답하는 말투나 마음가짐이 완전히 똑같다. 이런 인성이 구제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더라도 구제될 수 없다.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다니 어쩜 그리 부끄러운 줄 모른단 말이냐?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그럼 그는 그런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런 그에게 아직 염치가 있겠느냐? 없어졌다. 인성 안의 양심과 지각이 모두 무감각해졌다. 지각이 없어졌다. 이는 단지 타락의 문제가 아니다. 염치도, 존엄도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 같지만 막상 일을 처리하면 엉망이다. 못하는 짓이 없고 염치를 모른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이 일은 여기까지 얘기하겠다.

오늘 다룬 정상 인성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이 세 가지 측면이 중요하냐, 중요하지 않으냐? 정상 인성 안의 그런 것들이 진리 추구와 관련 있느냐, 없느냐? (관련 있습니다.) 그럼 그런 것들이 진리 추구와 무슨 관련이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인성 안에 세심하게 행동하고 책임감 있고 심혈을 기울이는 면모를 갖추지 않았다면, 이런 인성을 갖추지 않았다면 그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요 몇 년간 다양한 측면의 진리를 적지 않게 교제했는데, 만약 사람이 심혈을 기울이지도,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대하지도 않고 모든 일을 대충 처리하고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과연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진리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이런 도리나 용어만 기억하면 되지 않나요?” 그러면 최종적으로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네가 그런 정상 인성을 갖추지 않고 네 인성 안에 그런 것들을 갖추지 않았다면, 사물을 대할 때 진지하고 세밀하며 착실하고 책임지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진리는 너에게 도리와 구호, 규례가 될 뿐이며 너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너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생활 환경, 규칙, 방식 같은 것들도 잘 관리하지 못하는 네가 진리에 관한 여러 측면의 원칙과 가르침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진입할 수 없다. 그 밖에, 사람은 살아가면서 긍정적인 사물을 대할 때는 사랑해야 하고 부정적이거나 사악한 사물을 대할 때는 마음속으로 혐오하거나 반감을 갖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일부 진리에 진입할 수 있다. 즉, 너는 진리를 추구할 때 올바른 태도와 단정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너는 올바르고 진지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만이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만약 사람이 염치가 없어서 사악한 일을 얼마나 많이 하든, 하나님을 거역하고 진리에 위배되는 일을 얼마나 많이 하든 마음속으로 무감각하고 지각이 없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진리가 네게 소용이 있겠느냐? 아무 소용도 없다. 진리가 네게서 아무 기능도 발휘하지 못하여 너를 구속하지도, 책망하지도, 주도하지도 못하며 네게 방향이나 길을 제시하지도 못한다면 너는 곤란해진다. 염치조차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달으려면 마음속으로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민감해야 한다. 부정적이거나 사악한 사물을 듣거나 접촉하면 마음속에 반감을 가져야 하고, 스스로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부끄럽고 불안해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진리로 자신을 단속하고 자신의 옳지 않은 내적 상태를 바로잡을 수도 있어야 한다. 이는 정상 인성이 갖춰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을 갖추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기가 쉬워지지 않겠느냐? 이런 것들을 갖추지 않고도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빈말이다. 마음속에 긍정적인 것이 부족한데 어떻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정상 인성 안에 이런 것들을 갖춰야만 진리가 네 안에서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비로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네가 진리를 깨달으면 네 사상을 바꾸고 행동을 단속할 수 있으며 패괴된 생각도 점점 줄어든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변화이다.

너희는 오늘 다룬 정상 인성의 모습들을 얼마나 갖추었느냐? 얼마나 부족하냐? 너희는 무엇을 갖추고 있느냐? (염치를 갖추고 있습니다.) 염치를 갖추고 있다니 좋은 일이다. 염치는 최소한 갖춰야 하는 것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너희는 진지하고 세밀하게 대하는 심리와 태도를 갖추고 있느냐? 너희는 무슨 일을 하든 빈둥거리고 게으르고 꾸물거려서 너희가 처리한 일을 보면 나는 마음속으로 화가 치민다. 너희는 스스로 이런 문제를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 이런 문제를 알아차렸을 때 마음속으로 걱정되지 않겠느냐? (걱정됩니다.) 어떤 식으로 걱정되었느냐? 말해 보아라. (방금 하나님의 교제를 다 듣고 나니 자신이 인성이 없고, 본분이나 생활 속의 일을 대할 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조금 두렵습니다.) 인성이 너무도 부족하지 않으냐?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인성의 가장 기초적인 것조차 갖추고 있지 않으니 마음속으로 걱정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기술은 좀 알지만 무엇을 만들든 촌스럽고 질이 낮으며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는 선진적이거나 기준에 맞는 방법은 살펴보지 않으니 생각이 너무 뒤떨어지는 것 아니겠느냐? 예를 들어, 문을 설치하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지역에서는 대부분 문을 한 짝만 달아요.” 네가 살던 그 작은 지역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대도시의 상업건축이나 주택의 문은 어떤 형태인지 살펴보고 실제 상황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지역에서는 문을 두 짝 달지 않아요. 여기는 사람도 별로 많지 않잖아요. 사람이 많아도 상관없어요. 비집고 들어가면 되니까요.” 누가 “비집고 들어가면 나중에는 문틀이 다 망가질 거예요. 우리 상의 좀 해 봐요. 이번에는 특별히 문을 두 짝 달면 안 될까요?”라고 하면 그는 “안 돼요! 문은 한 짝만 달아야 해요. 두 짝은 안 돼요. 기술을 제가 알지 당신이 알아요? 기술을 아는 건 저인데 왜 제 말을 듣지 않죠? 제 말을 따라야죠!”라고 한다. 상황에 맞게 만들라고 해도 그는 따르지 않고 기어코 문을 작게 달겠다고 하니 이는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에게 안에 있는 방과 밖에 있는 방 사이에 빛이 통하면서도 공간이 작아지지 않게 유리 칸막이를 설치하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리를 설치하다니요? 유리를 설치하면 보안상 위험하지 않겠어요? 유리는 설치하지 말고 이 여닫이문 하나만 달면 돼요. 우리 지역에서는 전부 이런 문을 달아요.” 그는 늘 “우리 지역”, “제 고향”, “저는 기술을 배웠어요”라는 말들로 남을 압박하는데, 그게 진리냐? (아닙니다.) 외부의 일을 이런 태도로 대하는 건 인성 안에 무엇이 부족한 것이냐? 이성이 부족한 것이다. 이성 안에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부족하겠느냐? 견문이 부족하다. 그는 늘 자신이 살던 지역의 것이라면 뭐든 옳고 뭐든 가장 뛰어나며 뭐든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는 이성이 모자라는 것 아니겠느냐? 정상적인 이성이라면 어때야겠느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가 몇 년간 이 일을 하면서 본 게 많진 않지만 우리 지역에서는 이런 문을 만들어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문을 얼마나 크게 만드는지 살펴보고 거기에 맞게 만들게요. 지역이 달라졌으니 일하는 방식도 바뀌어야죠.” 이성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가 이렇게 이성적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비이성적이다.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다시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만들면 손실을 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손실을 본다. 이런 일이 많지 않으냐? 많다. 이 사람은 심하게 고집을 부리는데, 어느 정도로 고집을 부리겠느냐?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고 내 말조차 따르지 않으며 내게 대들기까지 한다. 내가 “너는 반드시 바꿔야 해. 바꾸지 않으면 너를 쓰지 않을 거야.”라고 하면 그는 감히 “저를 쓰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이 크기로 만들 거예요!”라고 한다. 이는 무슨 성품이란 말이냐? 이게 정상 인성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정상 인성이 아니다. 그럼 무슨 인성이겠느냐? 내가 보기에는 짐승과 조금 비슷하다. 이는 마치 목마른 소가 수레에 물건이나 사람을 얼마나 싣고 있든 물웅덩이나 강을 보기만 하면 수레를 끌고 그대로 돌진해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잡아당겨도 막지 못하는 것과 같다. 동물은 이러한데, 사람에게도 이런 성품이 있지 않겠느냐? 사람에게 이런 성품이 있으면 그것은 정상 인성이 아니고 아주 위험하다. 그는 이유를 찾아 너의 것을 부정하고 네 말을 따르지 않는데, 특히 우완하다. 일상생활 속의 이런 사소한 일에서조차 겸허하게 받아들이거나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태도가 없는데 어떻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어떻게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다들 문을 두 짝 설치하는 게 적절하다고 말하는데 그것조차도 하지 못한다. 이는 진리 실행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올바른 제안일 뿐인데도 따르지 않는다. 그런데 진리에 관한 것을 따를 수 있겠느냐? 마찬가지로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성품을 갖추고 있으면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면 아주 곤란하다. 인성 안에 이 정도 이성조차 갖추고 있지 않은데 무슨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매일 누구를 위해 그런 사소한 일을 바쁘게 처리하는 것이겠느냐? 모두 자신의 기호나 사욕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사람이 매일 일상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할 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 믿는 대로 한다’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뭐라고 하겠느냐? 하루 종일 악만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속이 그토록 악한데, 하는 일은 어떻겠느냐? 생각이 전부 악한데 하는 일이 모두 진리에 부합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건 모순이다. 생각이 전부 악하고 출발점이 모두 악하다면 하는 일은 최소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다. 기억되지 못하는 일 중에는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도 있고 파괴적인 것도 있고 그런대로 괜찮은 것도 있다. 진지하게 따진다면 정죄받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에 잘못된 관점을 갖고 있는데, 이는 역겨운 느낌이 들게 한다. 은사나 특기, 혹은 솜씨나 재주가 좀 있거나 특수한 기술을 부릴 줄 아는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나서 자신이 고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가 옳으냐? 이런 관점은 어떠냐? 이게 정상 인성의 사유 속에 있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럼 이는 어떤 생각이겠느냐? 이는 비이성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런 솜씨가 있으니까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하나님 집에서 나는 보통 사람보다 더 낫다고. 나는 남자고 솜씨와 재주를 갖춘 데다가 말도 잘하고 능력도 있으니까 하나님 집에서 출중하고 인기 있는 사람이야. 아무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거나 어떻게 하라고 나를 지도하거나 지휘할 수 없어. 기술이 있으니까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원칙은 고려할 필요 없어. 내가 어떻게 하든 다 옳고 진리에 부합해.’ 이런 관점은 어떠냐?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이런 사람은 적지 않고, 이들은 하나님 집에 와서 과시한다. 이들이 자신의 특기와 기술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건 괜찮지만 과시하기 위해 그러는 거라면 문제의 성질이 다르다. 왜 과시한다고 하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어리석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유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겠느냐? 이는 이성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실제로 정말 그렇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바라보겠느냐? 왜 그렇게 생각하겠느냐? 그런 생각은 어떻게 생겼겠느냐? 이방인에게서 배우지 않았겠느냐? 그들은 큰 붉은 용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모두 집안일이나 하는 남녀나 농민, 사회 하층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두 능력도 없고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며, 궁지에 빠지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하나님을 믿으러 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능력이 좀 있고 업무를 좀 알고 한 분야의 기술을 다룰 줄 아는 자신이 하나님 집에서 인재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옳지 않겠느냐? 그들은 하나님 집에는 뛰어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업무를 좀 처리할 줄 아니 권력을 잡고 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너희 곁에, 너희가 익숙하거나 알고 있는 사람 중에는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일부 사람은 특정 분야의 기술을 다룰 줄 알아서 그에게 팀장이나 책임자를 맡게 하면 그는 자신이 관직에 올랐고 하나님 집에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만큼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고 지키는 사람, 자신만큼 충성심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든 일에 관여하고 참여하려 하지만 제대로 관여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진리 원칙을 구하지도 않으며 내가 하는 말도 따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 그들은 특정 분야의 기술을 다룰 줄 안다는 명분을 내세워 모두에게 관여하려 하고 관직에 오르려 한다. 예를 들어, 형제자매의 행동이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들 관리 좀 해야겠어. 정말 꼴불견이군!”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으면 진리를 교제해야 한다. 여기는 군사 관제를 실행해야 하는 군대가 아니다. 교회 안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하여 사람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책망 훈계하면 된다. 한사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에만 관제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책임자나 리더 일꾼이 되면 분명 자신도 진리 실제가 없으면서 늘 하나님 집에서 권력을 잡고 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이런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겠느냐? 그는 그저 업무 기술에 대해 좀 알 뿐, 진리는 조금도 깨닫지 못했으면서 자신이 쓸모 있고 능력 있으며 하나님 집에서 보통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 교회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혼자서 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그는 진리 원칙은 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과 기호대로 행동하려 한다.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이 정상 인성의 이성을 갖추고 있겠느냐? 조금도 갖추고 있지 않다. 정상 인성의 측면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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