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5) 제 2 부
사례2. 출국하지 못하게 됐다고 원한을 품다
중국에서 사역할 때의 일이었다. 우리와 함께 출국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한 리더는 무척 기뻐했다. ‘드디어 빛 볼 날이 왔어. 마침내 하나님을 따라 큰 복을 누리게 된 거라고! 여태까지는 하나님과 함께 고생했는데, 오늘 드디어 그 보상을 받게 됐네. 이건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거야. 적어도 나는 리더 일꾼이고, 숱한 환난을 겪었잖아. 그러니 이 좋은 일에 당연히 내 몫이 있어야지. 나는 이 이득을 누려야 한다고.’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한동안 가깝게 지내면서 그는 언행에 원칙이 없고 인성도 좋지 않으며 복받으려는 속셈과 욕망이 무척 크다는 것을 알게 됐고, 가끔은 그를 책망해야 했다. 몇 번 책망받은 그는 ‘이제 끝이야. 상부에서 나를 완전히 간파했다고. 출국 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도 않잖아. 아무래도 해외에 나갈 희망이 사라진 것 같아.’라고 생각하며, 줄곧 마음속으로 이 일에 관해 궁리했다. 사실, 우리는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며 해외에 가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설령 출국할지라도 이렇다 할 사역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했기에 그에게 그 일에 관해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해외에 나갈 희망이 사라졌다고 느낀 그는 다른 계획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밖으로 나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말이다. “저는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어 왔고, 사역도 좀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출국을 앞두고 있지만, 저는 따라갈 자격이 없네요. 앞으로 저는 제 문제를 보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혐오하시니 하나님을 떠나겠어요. 저를 보고 혐오하시지 않게 물러나 있겠습니다.” 그의 말은 언뜻 사람의 말 같고,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어서 그는 또 이렇게 적었다. “저라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랬습니다. 누구와 함께하든 이용당하기만 했죠. 같이 고생하는 건 해도 같이 복을 누리는 건 할 수 없었어요.” 이 말은 무슨 의미냐? (자신이 하나님에게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뜻이다. 특히 이 말, “저는 누구와 함께하든 같이 고생하는 건 해도 같이 복을 누리는 건 할 수 없었습니다.”라는 말의 뜻은 “저는 여러분을 따라다니며 그렇게나 고생하고 그렇게나 많은 위험을 감당했지만, 함께 복을 누릴 때가 되니 여러분은 저를 원치 않으시는군요.”라는 것이다. 그의 이 말은 원망으로, 그 일 때문에 원한이 생긴 것이다. 그는 말로는 “하나님께서 저를 혐오하시니, 저는 하나님을 떠나겠습니다. 하나님이 혐오하시지 않도록 말입니다.”라고 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당신들은 복을 누리러 해외에 나가면서 나는 내팽개치려고 하네!’라고 원망했다. 정말 그런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된 것이겠느냐? 그는 자신을 책망하고 훈계하는 것이 내팽개치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언행에 원칙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그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오히려 ‘저는 당신과 함께 고생했으니 당신과 함께 복을 누려야 합니다. 당신은 반드시 저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셔야 하고, 저를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든, 당신은 저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라고 여겼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느냐? (했을 것입니다.) 이 생각은 어떤 본질을 갖고 있느냐? (바울처럼 하나님과 거래하며 면류관을 받아 내려는 본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본질이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것은 면류관과 복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진실한 믿음이 없었으며,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나님과 거래를 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거래에 실패해서 복을 받지 못하게 되자 손해를 봤다고 생각해 분노하고 자포자기하며 원한을 품었다. 이것이 그의 말에서 표출된 것들이다. 그 후 그는 어떻게 됐겠느냐? 얼마 후, 그는 장사를 하러 갔고, 주변에 어린 아가씨 몇 명을 데리고 다녔다.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본분을 이행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따르지도 않았다. 책망 훈계가 좀 임했다고 하나님을 따를 기회를 포기하고 장사하러 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잔뜩 화가 난 그의 모습은 그전까지 보여 주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 다른 사람 같았다. 이는 그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전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저 환경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가 숨기고 위장하고 자제하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어떤 환경이 닥치든 먼저 자기 본연의 자리를 지키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이 밖에, 정말 얼마간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성 없는 그런 짓을 하고 그런 수작을 부릴 수 있었겠느냐?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이 일을 통해,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가장 패역한 일이며, 또한 그런 자는 가장 위험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시종일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런 자는 불신파이다. 이런 사람은 복받겠다는 욕망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가 추구하는 것은 복을 받고 은혜를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구원받는 것은 그에게 장식품이자 듣기 좋은 말에 불과하다. 그가 마음속으로 추구하는 것은 상, 면류관, 이득이며, 이번 생에 100배를 얻고 다음 생에는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얻지 못한다면 본모습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믿지 않고 떠날 것이다. 그가 마음속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도 아니다. 또 그가 추구하는 것은 바울과 똑같이 큰 복을 받고 큰 권력을 쥐며 큰 면류관을 쓰고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지 구원받는 것도, 나아가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그의 야심이자 욕망이다. 그래서 하나님 집에 혜택이나 뭔가 좋은 것이 있을 때마다 손에 넣으려고 하며, 자격과 서열을 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나한테는 그런 자격이 있어. 내 몫이 있어야 한다고. 반드시 그걸 쟁취해 내야 해.’라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를 하나님 집의 앞쪽 서열에 둔 후 자기는 당연히 하나님 집의 그런 혜택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출국 일만 해도 그는 먼저 자기 몫이 있어야 한다고,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다들 자기만큼 많이 고생하고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다고, 또 자기만큼 하나님을 오래 믿고 리더 일꾼 자리에 오래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갖가지 구실을 갖다 대고 갖가지 판단 방식으로 자신의 서열을 매겼는데, 어떻게 하든 자신을 앞쪽에 두고, 자격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 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당연히 그 대우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불가능해지는 순간, 복과 이득을 얻으려는 환상이 깨지는 순간 그는 순종하여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취하며, 잔뜩 화를 내고,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의 마음은 그가 추구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그가 추구하는 것들은 진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십분 알 수 있다. 그가 아무리 많은 사역을 했을지라도 그의 목적과 속셈은 다름 아닌 바울처럼 면류관을 얻으려는 데 있었다. 그는 그것을 단단히 붙들고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아무리 책망하고 훈계하고 폭로하고 해부해도 그는 복받으려는 속셈을 한사코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복받으려는 욕망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소극적으로 변해 물러나며 본분을 포기하고 멀리 도망갔다. 하나님나라 복음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그는 진실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봉사하지도 않았다. 이는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순종이 없으며, 진실한 체험 간증도 전혀 없었음을, 그저 양의 가죽을 쓴 늑대 한 마리가 양 떼 속에 섞여 있었던 것임을 오롯이 보여 준다. 결국, 철두철미한 불신파는 이렇게 철저히 드러나고 도태되었으며, 하나님을 믿는 그의 생애도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이는 그런 사례 중 하나이다.
이런 자가 한 명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해외에 나가는 문제에서 쓰러지고 드러난 사람은 이 한 사람뿐이 아니다. 방금 우리가 살펴본 사례는 남성의 일화였지만, 여성 사례도 있다. 처음에는 그 사람도 함께 해외에 데려갈 계획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무척 기뻐하며 출국을 계획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후 여러 이유로 그녀는 출국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에는 상황이 너무 위험해서 그녀에게 알리지 못했고, 그녀는 사역자 모임에서 그 결과를 알게 되었다. 너희가 한번 분석해 보아라, 그녀가 그 소식을 듣고 어떻게 했겠느냐? (정상인의 사유 방식대로라면, 그 소식을 듣고 큰 반응은 없었을 것입니다. 상황이 위험해서 출국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고 바르게 대했겠지요. 하지만 그 여성이라면 그 소식을 듣고 잔뜩 화를 내며 하나님께 이치를 따졌을 것입니다.) 그렇다. 너희는 이 부류 사람의 인품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구나. 이 부류는 그런 사람들이다. 어떤 일에서든 손해를 봐서는 안 되고 잇속을 차려야 한다. 어떤 일이든 남보다 뛰어나야 하고 잘해야 하며, 남들 앞에 나서야 하고, 어떤 이득이든 다 얻어야지, 자기 몫이 없어선 안 된다. 이 소식을 들은 그녀는 그 자리에서 화를 내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떼를 쓰고 뒹구는 등 귀신의 몰골을 드러냈고, 사역자들을 훈계하며 그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녀의 분노는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겉으로는 형제자매들에게 화를 낸 것 같지만, 사실 누구에게 화를 낸 것이겠느냐? (하나님께 화를 낸 것입니다.) 그렇다. 그럼 그녀가 분노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그 근원은 어디에 있겠느냐?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데 있습니다.) 그녀는 이득을 얻지 못했고,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며, 그 잇속을 차리지 못했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빼앗겼다. 그녀의 몫은 없었다. 그래서 잔뜩 화가 난 그녀는 더 이상 위장하지 못하고 마음속 불만과 원망을 전부 발설한 것이다. 그전까지 상부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녀는 먼저 알아야 했다. 또 그녀는 늘 상부와 접촉하고 싶어 했지, 형제자매들과 소통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늘 자신을 평범한 일원이 아닌 고위 인물로 여겼기에 이번 출국에도 당연히 자기 몫이 있을 거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반드시 가야 하며 첫 번째 인선이어야 한다고, 그 대우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녀의 마음속 진실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게 되고, 몇 년간의 고생이 전부 헛수고가 되었으며, 심혈을 기울여 경영해 온 지위와 자기가 원하는 대우가 전부 사라지고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뜻밖에도 그 큰 이득을 손에 넣지 못하고 자기가 떨어지자, 그녀는 하나님 마음속에서 자기 지위가 높지 않고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마음속 방어선이 철저히 무너져 더는 위장하거나 포장하거나 꾸미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면서 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남들의 말과 시선은 안중에도 없이 분노와 불만을 쏟아 내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후, 그녀는 한 팀에 보내져 본분을 이행하게 됐는데,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결국 그 팀 형제자매들이 연명으로 편지를 보내 그녀의 출교를 요구했다. 출교의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형제자매들이 보고한 그녀의 악행을 보면, 너무 많아서 필설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다! 즉, 그녀가 행한 악은 너무 많고 그 성질이 너무 심각하여 한두 마디 말로 분명히 설명할 수 없으며, 한두 가지 일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행한 악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모두의 공분을 샀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녀를 출교한 것이다. 그녀는 출국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런 악을 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 일 이후에 악을 행하게 되었겠느냐? 출국 일이 그녀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녀가 행한 악과 그녀가 드러낸 추태는 전부 그 이득을 얻지 못한 데 대한 보복이자 발산임을 알 수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진실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인성이 있는 사람이 진리를 많이 깨닫지 못한다고 한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그녀와 같은 모습을 보이겠느냐? 그런 것들을 표출하겠느냐? 얼마간 인성과 양심,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고 자제할 것이다. 마음은 기쁘지 않고 불만스러우며 좀 슬프더라도 ‘나 역시 평범한 사람이니까 쟁취해서는 안 돼. 하나님을 믿을 때는 마땅히 진리를 추구하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해야 한다고. 사람이 선택을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사람은 피조물이고 별로 대단할 게 없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괴로움도 며칠 지나면 사라지니까 열심히 믿어야지 하며, 그 일 때문에 악을 행하고 보복하거나 분노를 발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 인품이 몹시 악질인 사람은 이렇게 작은 일에서 여태까지 보여 준 적 없는 악행을 많이도 드러낸다. 이는 문제를 설명해 준다. 즉, 이 부류 사람의 인성 본질을 설명해 주고, 또 이 부류의 사람이 진짜 추구하는 바를 설명해 준다. 다시 말해, 이 일이 드러남에 따라 그의 민낯도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먼저, 그들은 100%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갖추고 있다. 다음으로, 그들은 진리를 추구한 적이 없으며, 자신을 구원받는 대상으로 여겨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한 적도 없다. 그는 하나님에게 순종하기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지위와 누림, 좋은 대우,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만 추구하며, 하나님이 누리는 것을 따라서 누리고자 한다. 또 그래야 헛되이 따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추구한다. 이는 이 부류 사람의 본성 본질이자 본모습이고, 그들의 내면세계이다. 이 일 때문에 20년 동안 이어온, 하나님을 믿은 그의 생애가 물거품으로 돌아가면서 그렇게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지금 이 두 사람은 교회에 있겠느냐, 아니면 어디에 있겠느냐? (이방인 세계에 있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느냐? 어떻게 판단한 것이냐? 무엇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냐? (그들은 불신파이며,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지막에 굳게 서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굳게 서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마지막’이 오지 않았는데 왜 사라졌겠느냐? 너는 그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봐야 한다. 내면의 움직임이 있었기에 그런 일을 저지르고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일에서 그가 어떻게 분석하고 어떻게 판단했기에 그런 길을 선택했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숱한 고생을 했어. 언젠가 볕 들 날이 오기만을, 상부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기만을 기다려 왔지. 그리고 이제 마침내 해외에 나갈 기회가 생겼어.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하나님을 믿기 전까지는 감히 꿈꾸지도 못했던 일이야. 이건 하나님을 믿어 면류관을 얻는 것과 같다고. 그런데 이렇게 큰 이익에 내 몫이 없고, 내가 그것을 얻지 못할 줄이야. 여태까지 나는 하나님 마음속에 내 자리가 어느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아무래도 나는 하나님을 따르면서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할 것 같아. 해외에 나가는 것 같은 좋은 일에 나를 생각해 주지 않으니, 앞으로 면류관은 더더욱 얻기 힘들겠지? 그건 누구한테 돌아갈지 몰라. 나는 희망이 없는 것 같아.’ 그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따르려고 했겠느냐? 그는 여태까지 무엇을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렀겠느냐? 모두 그 희망을 위해서였고, 마음속에 들어 있는 그 생각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고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희망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 생각도 사라졌으니 계속 믿을 수 있겠느냐? 마음 편히 하나님 집에 머물면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기꺼운 마음으로 그렇게 아무것도 얻지 않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 부류는 야심과 욕망이 너무도 크다. 그는 자신이 치른 희생과 대가로 그런 결과를 얻는 것을 절대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가 꿈에 그리는 것은 자기가 치른 대가와 희생으로 면류관과 이득을 얻는 것이다. 즉, 하나님 집에 어떤 이득이 있든 그의 몫이 있어야 하고, 다른 누군가의 몫은 없어도 상관없지만 그의 몫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야심과 탐욕이 이렇게 큰 사람이 무상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혹자는 “그에게 진리를 추구하라고 하십시오. 그가 들은 진리가 많아지면 그럴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고, 또 혹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형벌하고 심판하시면 바뀌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렇겠느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형벌하거나 심판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을 구원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도태시키려는 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내 말과 방금 너희의 말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 너희가 말한 것이 그의 진실한 심리 동향이냐? 이 부류 사람의 본질의 모습이냐? (아닙니다.) 그럼 너희가 말한 것은 무엇이냐? (느낌이자 공허한 이론입니다.) 너희의 말에는 분석과 판단의 성질이 들어 있다. 너희는 이론적인 기초 위에서 그를 판단하고 정의했다. 그것은 그 본인의 진실한 생각과 표출이 아니고, 그의 진실한 관점도 아니다. 이는 적그리스도 본질을 지닌 이 부류 사람의 한 가지 모습이다. 이득이 있는데 얻지 못하고, 혜택이 있는데 누리지 못하며, 잇속을 차리지 못하면 머리 끝까지 화를 내면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할 믿음을 잃는다. 또 하나님 믿기를 원치 않고 도망가고자 하며, 나쁜 짓을 저지르려고 한다. 나쁜 짓을 함으로써 분노를 발산하고 보복하며,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원망을 발산하려는 것이다. 이 부류의 사람에게는 처분을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가 계속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하도록 해야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이 부류의 사람에게는 어떤 처분을 내려야겠느냐? (출교해야 합니다.) 해외에 나가지 못하게 됐다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없느냐? (있습니다.) 그런 부류는 어떤 사람이냐? (불신파입니다. 그는 오직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습니다. 자신의 야심과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배반하지요.)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 그런 사람에게는 진실한 믿음이니 거짓된 믿음이니 운운할 것도 없다. 그는 인품이 너무도 저열하다!
사례3. 시골집으로 돌아가자 적응하지 못하다
시골에서 태어나 집안 사정이 여유롭지 않고, 간단한 가재도구만 갖추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집 안에 딱딱한 침대 하나와 옷장 하나, 책상 하나 외에 다른 가구는 없고, 바닥은 벽돌 바닥이나 흙바닥으로, 시멘트조차 깔려 있지 않아 무척 누추하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면서 잘사는 지역에 가게 되었다. 그곳 형제자매 집에는 대부분 널마루 아니면 타일이 깔려 있었고, 벽은 도배가 되어 있고, 무척 깨끗했다. 또 매일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집 안에는 가구도 많았다. TV장에 커다란 옷장, 소파와 에어컨까지 있었고, 침실에는 시몬스 침대가 놓여 있었으며, 주방에는 냉장고, 전자레인지, 오븐, 가스레인지, 레인지후드 등 갖가지 가전이 있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 외에도 이런 대도시의 일부 지역에는 건물에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그곳에서 시야를 넓힌 그녀는 한동안 사역하고 복음을 전하고 나니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왜 그랬겠느냐? 그녀는 생각했다. ‘고향의 그 토담집은 여기보다 나은 데가 하나도 없어.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데, 이곳 사람들은 왜 우리 집보다 훨씬 잘사는 거지? 여기 사람들은 천상의 삶을 사는데,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돼지우리에서 살고 있어. 이곳 사람들보다 너무 뒤처진다고!’ 이렇게 비교하자 마음이 괴로워졌고, 그 지역에 더더욱 미련이 생겨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하게 되면 집에 안 가도 되지 않을까? 그 토담집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동안 대도시에 머물면서 도시인들처럼 먹고 입고 즐길 줄 알게 됐고, 도시인들처럼 사는 법을 배웠다. 그러자 그녀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좋았고, 사람은 돈이 있어야 좋은 거고 가난하면 못난 거라고, 그런 사람은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무시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어 돌아가야만 했다. 고향에 돌아간 그녀는 마음이 복잡하고 몹시 괴로웠다. 집에 들어서자 흙바닥이 보였다. 방구들에 앉으니 엉덩이가 배겼고, 벽은 만지기만 해도 흙이 묻어났다. 뭔가 맛있는 걸 먹고 싶어서 이름을 말해도 아무도 못 알아들었다. 저녁에는 샤워를 하고 싶어도 그럴 여건이 못 됐다. 그녀는 그런 삶이 너무 비천하게 느껴져서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가난한 부모를 원망하고, 늘 부모에게 성질을 냈다.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식구들을 봐도 눈에 거슬리고 집 안 어디를 봐도 눈에 거슬렸다. 정말이지 너무 촌스러워서 이 집에서는 살 수가 없을 것 같고,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답답해서 죽어 버릴 것 같았다. 먼 곳에 나갔다 와서 식견을 키웠는데 그것이 오히려 악재로 작용해 부모의 속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당시 그녀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부모님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또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우리 집 형편이 분명 지금보다 좋았겠지. 시몬스 침대에서 자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좀 좋은 걸 먹고, 바닥에 타일이라도 깔 수 있었을 거야.’ 그녀는 그것이 하나님을 믿어서 그렇게 된 거라고, 하나님을 믿으면 가난해진다고, 하나님을 믿으면 잘 살 수 없고 호의호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한때 몇 개 성(省)을 호령하던 이 ‘여장부’, ‘여걸’은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한 채 맨날 나른해져 있었다. 아침이면 간신히 일어나 가장 먼저 단장하고 화장한 후 도시 사람들이 즐겨 입는 옷을 입고는 어두운 얼굴로 언제쯤 시골 생활에서 벗어나 도시인의 삶을 살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녀가 전에 했던 설교, 예전에 세운 다짐은 전부 사라져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변했다. 식견이 좀 쌓이고 생활 환경과 삶의 질이 좀 달라진 것 때문에 한 사람이 드러난 것이다.
전에 그녀가 각지에서 전도 사역을 할 때는 의지가 강하고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다 겉모습에 불과했다. 그녀가 마음속 깊이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녀는 어떤 부류인지 그녀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 도시에 다녀온 경험은 그녀의 생활 상황을 완전히 바꿔 놓았으며, 풍족한 생활에 대한 잠깐의 체험이 그녀의 인생 방향을 철저히 변화시켰다. 그 원인은 대관절 무엇이겠느냐? 누가 그녀를 바꿔 놓은 것이겠느냐? 설마 하나님이겠느냐?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환경이 사람을 드러내고, 그 사람의 본성 본질을 드러내고, 또 그 사람이 추구하는 바와 걷는 길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가 걸은 길은 어떤 길이냐? 진리를 추구하는 길도, 베드로의 길도,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사람의 길도,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추구하는 길도 아닌 적그리스도의 길이다. 이 적그리스도의 길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명예와 지위, 물질적인 누림을 추구하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이 부류 사람의 본질이다. 만약 그녀가 추구하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사소한 환경의 변화에 그녀가 드러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마음속이 좀 연약해지고 얼마간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거나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는 데 그칠 뿐, 이렇게 만신창이로 드러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추구하는 바의 본질은 무엇이냐?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이방인과 동일하고, 이 세상에서 명리와 사악한 흐름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과 동일하다. 그들은 이방인의 세련된 차림새를 좋아하고, 사악한 흐름에 대한 이방인의 추종을 좋아하며, 나아가 육적으로 사치스러운 삶에 대한 이방인의 미련을 좋아한다. 그래서 환경이 바뀌자 그녀의 인생관, 이 세상과 삶에 대한 태도가 철저히 달라진 것이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땅히 육과 삶을 누리고 시대의 흐름을 추구해야 한다고, 사회에서 카리스마를 가진 걸출한 인물들처럼 지나가던 사람들이 뒤돌아볼 정도로 부러움을 사고 숭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환경과 각 부류 사람을 접해 식견을 키운 뒤,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고로 이 사악한 흐름과 인류를 더 분명히 간파하게 된다. 또 마음속으로 세상 사람들이 걷는 길을 더더욱 혐오하고 분별하고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을 걷고자 추구하게 된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 적그리스도 본질을 지닌 사람들은 일단 식견이 높아지고 다른 환경을 접하면, 야심과 욕망이 약해지기는커녕 더 팽창되고 커진다. 그런 후에는 세상에서 호사를 누리는,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의 삶을 더더욱 부러워하는 한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은 마음속 깊이 경멸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대부분 사람이 세상을 추구하지 않으며, 돈도 지위도 세력도 식견도 없다고, 이방인들만큼 분위기가 있지도 않고 삶을 즐길 줄도 모르는 데다가 허세도 부릴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마음속 깊이 반발심과 적의를 느낀다. 따라서 적그리스도 본질을 지닌 많은 사람이 처음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에 이르는 동안, 너는 그가 과연 적그리스도 본질을 지닌 사람인지 아닌지 간파하지 못했겠지만, 언젠가 적당한 환경이 갖춰지면 그가 드러날 것이다. 과거에 드러난 사람들을 보면, 그들도 드러나기 전까지는 착실하고 성실했으며, 하나님 집에서 뭘 시키든 따랐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줄 알았다. 의무감을 갖고 바른길을 걷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과 품위를 지닌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겉으로 어떻게 행동하든, 사람의 본질과 걷는 길은 세월과 환경의 시련을 버티지 못한다. 얼마나 오래 하나님을 믿었든, 하나님을 믿는 데 얼마나 토대가 있든 만약 그가 적그리스도 본질을 갖고 있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물질적인 누림과 사치스러운 삶, 높은 물질적 대우를 추구할 것이며, 나아가 갖가지 이득을 얻고자 추구하는 한편, 세상 사람들의 생활 태도와 방식을 부러워할 것이다. 이는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니 지금은 모든 사람이 설교를 듣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본분을 이행하고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그런 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마음속에서 우위를 차지하다가 적당한 환경과 배경이 갖춰지는 순간, 그 욕망은 팽창하고 발작할 것이다. 이 지경에 이르면, 그 순간이 바로 드러나는 때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온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토대로 삼은 사람은 이러한 시험과 환경이 닥쳤을 때 올바르게 대하고 거부할 수 있으며, 굳게 서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또 이러한 시험이 닥쳤을 때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 분별할 수 있고,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남자가 쫓아다녀도 받아 주지 않는 여성처럼 말이다. 어째서 받아 주지 않겠느냐? 상대의 인품이 별로이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은 짝을 찾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기를 쫓아다니는 돈 많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돈 많은 사람이 쫓아다니면서 2만 위안짜리 명품 스커트를 선물하면 마음이 움직일 것이고, 또 10만 위안짜리 밍크코트나 커다란 다이아, 크고 멋진 집이나 차를 선물하면 당장 그 사람에게 시집갈 것이다. 그럼 예전에 결혼할 생각이 없다던 그 말은 진심이겠느냐, 거짓이겠느냐? 그것은 남들을 기만한 것이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자신은 세상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에 속한 장래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하는 건 그의 앞에 놓인 시험이 없고, 그런 환경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환경이 닥치는 순간, 그는 그 속에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사례처럼 말이다. 그 사람은 헤어 나오지 못했다. 도시에서의 삶을 한동안 누리고 나자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고 방향을 잃었다. 만약 그녀를 황궁에 데려다 놓았다면, 그녀는 자기 부모한테 자기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빨리 자살하라고 하지 않았겠느냐? 이 부류의 사람은 자신의 누림과 명예, 사치스러운 생활, 높은 삶의 질을 위해 어떤 어리석은 일이든 다 저지를 수 있으며, 가치도 없고 인격도 비천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진리를 추구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그녀의 설교는 어디에서 왔겠느냐? 그녀가 설교할 수 있겠느냐? 그녀가 한 것은 설교가 아니라 도리이다. 그녀는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으스대며 사람을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많이 설교한 그녀가 왜 자기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겠느냐? 그녀는 자신이 그 지경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겠느냐? 꿰뚫어 보았겠느냐? 그녀는 그렇게 많이 설교했지만, 한동안 도시 생활을 하고 나자 그 시험을 이겨 내지 못했고 굳게 서지 못했다. 그럼 그녀가 한 것이 설교겠느냐? 분명히 아니다. 이것이 세 번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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