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10) 제 2 부
적그리스도는 겉으로 보면 하는 말이 매우 온화하고 우아하며 품위가 있다. 그는 누가 원칙을 어겨도, 누가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해도 폭로하거나 질책하는 법이 없다. 게다가 어떤 일이든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하게끔 못 본 척한다. 사람이 어떤 패괴를 드러내고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 그는 관대하게 넘어가며 포용할 뿐, 성내거나 화내지도 않는다. 또 그는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 하나님 집의 이익에 해를 끼쳤다고 해서 성내고 화를 내거나 상대를 질책하지도 않는다. 누가 악행을 저질러 교회 사역을 교란하든 마치 그 일이 자신과는 무관한 양 거들떠보지 않고, 그 일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법도 없다. 적그리스도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얼마나 많은 이가 자신을 우러러보는지, 자신이 고난을 겪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마음속 깊이 찬사를 보내는지 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절대로 헛되이 고난을 겪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난을 겪고 어떤 대가를 치르든, 어떤 좋은 일을 하든, 남들을 얼마나 관심 있게 보살피고 사랑으로 대하든 그는 남들 앞에서 행동해서 더 많은 사람이 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행동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함이다. 이렇게 해서 더 많은 사람이 그의 행동이나 사람됨, 인품에 찬사를 보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게 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적그리스도는 이런 겉면의 좋은 행위로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듦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그에게 찾아와 도움을 구하게 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연약해진 어떤 사람은 대부분 사람들이 사랑하는 마음도 없고, 다들 이기적이어서 남을 잘 돕지 않고 따뜻한 마음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는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그 ‘좋은 사람’을 떠올린다. 어떤 사람은 사역 과정에서 어려움을 만났는데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모른다.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데 가장 먼저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그 ‘좋은 사람’을 떠올린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기가 싫고, 세상을 추구하며 출세해서 돈도 벌고 자기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는 이렇게 소극적이고 연약해졌는데도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고 어느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그 역시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그 ‘좋은 사람’을 떠올린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람들은 일이 닥쳐도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도 읽지 않고, 그저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그 ‘좋은 사람’에게만 의지해 도움을 받으려 한다. 그들은 이 무골호인에게만 마음을 터놓고 속마음을 얘기하며 그에게 자신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한다. 이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따른다. 이렇게 되면 적그리스도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적그리스도가 이 목적을 이루었을 때, 교회에서의 그의 지위가 일반 사람보다 높아지지 않겠느냐? 그가 교회에서 서열 1순위가 되어 우두머리가 되면 만족하겠느냐? 아니다. 그가 이루려는 목적은 무엇이냐? 그는 더 많은 사람이 속으로 자신에게 찬성하고,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기를 바란다. 사람들 마음속에 자기 자리가 생기고, 특히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자신을 앙망하고 의지하고 따르기를 바란다. 이는 교회에서 서열 1순위가 되어 우두머리가 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어떤 점이 심각하냐? (그는 사람 마음속에서의 지위를 두고 하나님과 다투고 직접 하나님을 대신하려 합니다.) (이런 사람은 분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는 겉면의 좋은 행위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그 결과 상대는 어떤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 말씀 안에서 진리를 찾지도 않고, 진리를 교제하지도 않고, 무조건 그에게 의지하고 앙망하며 그를 찾아 문제를 해결하고, 그의 말을 진리로 여기게 됩니다. 결국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고요. 이런 수단이 더욱 음험하고 악독합니다.) 그렇다. 잘 이해하고 요점을 얘기했구나. 바로 적그리스도는 사람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을 찾아도 찾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려 해도 책이 너무 두껍고 말씀이 너무 많아서 답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를 찾으면 즉시 답이 나오죠. 편하기도 하고 실용적입니다.” 보아라. 그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그를 숭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그의 자리도 남겨 두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그런 일을 하는 목적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그의 그런 행동은 이미 초기 성과를 거뒀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이미 적그리스도의 자리가 있고, 일부 사람들은 이미 그를 숭배하고 앙망하고 있다. 적그리스도가 이루려는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이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기를 찾지 않으면 그는 속으로 언짢아한다. ‘당신은 어째서 하나님만 찾고 하나님만 떠올리지? 어째서 난 안 보이고 나를 떠올리지 못하냐고? 내가 이렇게 겸손하고, 인내심 있고, 버리고 헌신할 수 있고, 베풀 수도 있는데, 당신은 어째서 날 찾지 않지? 내가 그렇게 많이 도와주었는데, 어쩜 그렇게 양심이 없지?’ 그는 불쾌하고, 마음이 편치 않고, 속으로 화가 난다. 사람에게도 화가 나고 하나님에게도 화가 난다. 자신의 최종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는 계속해서 위장한다. 계속해서 베풀고, 인내하고, 포용한다. 겸손한 겉모습에다 말할 때도 선의를 보이며 남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인식할 때면 언제나 그 사람을 위로해 준다. “저는 패역합니다. 저는 마귀 사탄이에요.” 상대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마귀 사탄이 아닙니다. 그건 사소한 문제니까 자신을 그렇게 형편없이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를 너무 낮잡아 보지 마세요. 하나님도 우리를 높여 주셨으니 우린 다 일반 사람이 아니에요. 스스로를 경시하지 마세요. 당신은 저보다 훨씬 훌륭해요. 제가 당신보다 더 패괴되었죠. 당신이 마귀라면, 저는 사악한 마귀이고, 당신이 사악한 마귀라면, 저는 지옥에 떨어져서 몰락해야 합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돕는다. 자기가 하나님 집과 교회 사역에 손해를 입혔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본분 이행 과정에서 교회 사역에 손해를 입혀서 그 정도 굽은 길을 가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에 저는 당신보다 훨씬 큰 손해를 입혔어요. 당신보다 훨씬 더 심하게 굽은 길을 걸었죠. 이제부터 고치면 돼요. 괜찮아요. 만약 당신이 양심에 걸린다면 저한테 돈이 좀 있으니까 제가 대신 메울 테니 괴로워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일이 있으면 저를 찾아오세요.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와드리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두말하지 않고 도울 거예요.” 그가 이렇게 ‘의협심’까지 발휘하는 목적이 사실은 무엇이냐? 정말 너를 돕는 것이냐? 그는 너를 해하고 있다. 너를 수렁으로 이끌고 있다. 너는 사탄의 시험에 빠졌다. 그가 너에게 구덩이를 파자 너는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함정에 빠지고도 스스로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적그리스도에게 망쳐져도 알지 못한다. 어쩜 그렇게 어리석단 말이냐! 사탄,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사람을 대하고, 미혹하고, 모해한다. 그는 말한다. “당신이 하나님 집 이익을 좀 생각하면 되고, 앞으로 좀 조심하면 괜찮아요. 이 일은 만회할 수 있습니다.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람이 완벽할 수 있나요? 우린 다 완벽하지 않죠. 사람은 누구나 패괴가 있습니다. 저는 전에 당신보다 더했어요. 이제부터 우리 서로 권면하자고요. 게다가 하나님 집이 손해를 좀 입어도 하나님은 기념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사람에게 관대하고 너그러우신데요. 우리 사람도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더욱 너그럽게 대하시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우리 과오를 기념하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하시면 우리는 아무 과오도 없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의 편에서 얼렁뚱땅 가볍게 웃어넘기고, 그러면 그는 무척이나 마음이 넓고, 매우 어질고, 위대하고, 남에게 너그러운 사람처럼 보인다. 반대로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을 폭로하기만 하고, 언제나 사람의 패괴 성품을 문제 삼고, 언제나 사람에게 시시콜콜 따지는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 사람에게 과오가 있고 패역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심판하고, 형벌해 하나님은 사람 뜻에 맞지 않지만 그는 언제나 사람에게 너그럽고, 사람을 이해해 주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위대하고 존경스럽게 보일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냐? 또 어떤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한다. “이방인들이 하는 말 중에 ‘재산 많고 가업이 잘 되는 집안은 좀 낭비해도 괜찮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집이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 축복도 풍성하고요. 낭비 좀 한 게 대수인가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게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가 낭비한 게 어디 적나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셨나요? 하나님은 포용하셨잖아요? 사람이 연약함과 패괴가 있는 건 하나님께서 진작부터 알고 계셨어요. 그런데도 왜 징벌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건 하나님께 인내와 긍휼이 있으시다는 증거죠!” 이게 다 무슨 소리냐? 그럴싸한 말, 사람의 관념에 맞는 말로 사람을 미혹해서 시험에 빠뜨리고, 사람의 시선을 교란하고 잘못 이끈 탓에 사람은 하나님에게 오해를 품고,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마음, 순종하고자 하는 바람마저 사라져 버리게 된다. 적그리스도의 부추김과 미혹, 오도로 사람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약간의 양심도 사라지고 그에게 복종하고 순종하게 된다.
적그리스도는 사람들 앞에서 특히나 위장을 잘한다. 바리새인과 마찬가지로 겉보기에 무척 너그럽고, 인내심 있고, 겸손하고, 온화해서 누구에게든 그렇게 관대하고 너그럽게 보일 수가 없다. 문제를 처리할 때 그는 늘 높은 지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지극히 관용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언제나 도량이 있고, 넓은 아량을 베풀고, 시시콜콜 따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 사람들 눈에 그는 무척이나 위대하고 인자하게 비춰진다. 사실 적그리스도가 이런 본질을 갖추었느냐? 그는 선의로 남을 대하고 사람들을 포용하고 언제나 남을 도울 수 있는데, 이런 행위의 이면에 숨은 목적은 무엇이냐? 사람 마음을 농락하고 매수할 목적이 아니라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감춰진 민낯이 정말 그렇겠느냐? 정말 그가 사람들 앞에서 보여 주는 겸손하고, 인내심 있고, 너그럽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돕는 그런 모습이겠느냐? 그에게 이런 본질, 이런 성품이 있느냐? 그에게 이런 인품이 있느냐? 전혀 없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꾸며 낸 것이다. 사람을 미혹하고 사람 마음을 매수해서 더 많은 이들이 속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자신을 떠올리며 자신의 도움을 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목적에 이르기 위해서 적그리스도는 온갖 궁리를 하며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며 옳은 말, 옳은 행동을 한다. 말을 꺼내기 전에 속으로 몇 번을 걸러 내고 가공하는지 모른다. 어휘나 표현, 어조와 목소리, 심지어 시선과 말투를 위해 온갖 궁리를 하고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한다. 말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지, 자기를 높이 평가하는지, 자기와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는지, 자기와 성격이 맞는지, 상대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지, 교회에서나 형제자매들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어떤지 등을 자세히 관찰하고 열심히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다양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생겨난다. 적그리스도가 다양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어떤지를 떠나 어쨌든 그가 도달하려는 목적은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을 같은 눈높이에서 보는 게 아니라 우러러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말할 때 더 많은 이가 그를 부러워하며 우러러보고, 그가 일할 때 더 많은 이가 그를 옹호하고 추종하고, 그가 잘못했을 때 더 많은 이가 그의 책임을 벗겨 주며 그를 위해 변호하고, 그가 드러나 버림받을 때 더 많은 사람이 그의 편을 들고 그를 위해 억울함을 토로하고 그를 위해 일어나 하나님에게 따지고 대항하게 하는 것이다. 그가 무너질 때 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성원, 보호를 얻을 수 있다는 건, 적그리스도가 온갖 궁리를 해서 교회에서 경영하는 지위와 권력을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심어 놓았다는 뜻이다. 그의 ‘고심’은 헛되지 않았다.
적그리스도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지위, 사람들 사이에서의 명망, 명예, 권위를 경영하고 다루는 데 모든 능력을 총동원한다. 느슨하게 대하거나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고, 소홀히 하는 법은 더욱 없다. 그는 사람들 각각의 눈빛을 관찰하고, 각각의 성격, 생활 규칙을 관찰하고, 각각의 추구, 긍정적 사물과 부정적 사물을 대하는 각각의 태도도 관찰한다. 나아가 각각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충성심,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본분을 이행하는 각각의 태도 등을 관찰한다. 이런 일에 그는 무척 공을 들인다. 따라서 그의 이런 태도에 기반할 때,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들을 피하거나 경계하고, 그런 사람들 옆에 있을 때는 조심조심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성격이 비교적 나약하고 늘 소극적이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 또 우매하고 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 앞에서는 늘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과시한다. 마치 서커스를 하듯 계속해서 모든 기회를 잡아 공연을 펼친다. 예를 들어, 예배 시간에 그에게 찬성하는 사람이 다수, 반감을 가지는 사람이 소수이고, 그에게 아무런 분별이 없는 사람이 더 많을 경우, 그는 공연을 한다. 기회만 생기면 교제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력을 교제하고 과거 자신의 ‘휘황찬란한 역사’를 교제하고, 자신이 하나님 집에서 세운 공로를 교제하고, 심지어 상부에서 자기를 어떻게 중시했고 어떻게 자기를 직접 책망하고 훈계했는지 등을 교제하는데, 이런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어떤 무리 속에 있든, 어떤 장소에 있든 적그리스도 부류가 하는 일은 단 하나, 바로 공연하는 것이다. 즉, 군중의 환심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인 진리를 싫어하는 것, 사악함, 뻔뻔함이다. 그들은 어느 정도로 공연을 하느냐? 아마 너희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공연하고 있고, 뽐내고 있고, 사람 마음을 농락하고 있고, 기회를 잡아 남들에게 높이 평가받으려 하고 있다는 게 뻔히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경멸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심지어 비웃는데도 그는 개의치 않는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무엇이냐? 그가 신경 쓰는 건, 이번 공연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서 사람들에게 자신은 용기 있게 말할 수 있고, 담력 있고, 지도자다운 면모, 지도자로서의 재능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어도 주눅이 들지 않는 배짱이 있고, 더욱이 어떤 일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를 이해하고 보게 되면 그는 만족한다. 그래서 이런 기회만 있으면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과시한다. 거침없이, 아무 거리낌 없이 뻔뻔하게 과시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이다. 내가 예배 때 정식 주제만 교제하면 어떤 사람들은 듣다가 졸기도 한다. 혹은 정식 주제를 교제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다른 곳에 있어 내 말이 마음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잡담을 좀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런 일, 이런 이야기는 통상적으로 사람이 생활 속에서 드러내는 특정 패괴 성품 및 내적 상태와 관계가 있다. 즉, 이야기나 우스갯소리를 이용해서 좀 더 분명히 알고 더 잘 깨닫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를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은 예배에서 설교하시면서 우스갯소리를 하시네요. 저도 할 수 있어요. 당신보다 못하지 않다고요. 내가 그냥 아재 개그 하나를 툭 던지면 다들 배꼽 빠지게 웃고 좋아할 거야. 그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 내가 마음대로 이야기를 들려주면 다들 예배 드리는 대신 이야기를 들으려 할 거야.’ 그는 이런 걸 비교한다. 이걸 비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내가 왜 이야기를 하겠느냐? 왜 잡담을 좀 하겠느냐? 잡담이나 이야기 중에는 들으면 거기서 뭔가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볍게 진리를 깨닫는 데 더 유리하다. 이것이 내 목적이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이것으로 트집을 잡는다. “예배 시간은 정말 핵심적이고 중요한 시간인데 당신은 잡담이나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저도 잡담을 하겠습니다.” 그게 같은 잡담이냐? 적그리스도 같은 인간들은 진리도 깨닫지 못했는데 그의 잡담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 수 있겠느냐? 이야기나 우스갯소리에서 어떤 내용이 나올 수 있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이런 짐승 같은 자들은 진리를 교제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런 진지한 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생각한다. 이건 어떤 부류가 하는 짓이냐? 적그리스도,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이런 짓을 쉽게 저지른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위장 행위는 형제자매 눈으로도, 더 많은 사람의 눈으로도 거의 문제를 잡아낼 수 없다. 왜 잡아낼 수 없느냐? 네 눈에 띄지 않도록 그가 문제를 가리고 숨기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악한 면, 방탕한 면, 나쁜 면을 이면에 숨긴다. 이면이란 어디를 말하느냐? 네 눈에 안 보이는 곳이다. 즉, 그의 집, 사회, 직장, 그의 친한 친구들 앞이다. 이와 같은 범위들은 네가 볼 수도 없고 접할 수도 없다. 네가 보고 접할 수 있는 그의 언행은 모두 그가 위장해 낸 면이고, 모두 그가 가공해 낸 것이다. 네가 볼 수 없는 그 면이 바로 그의 진정한 본질이자 진면목이다. 그의 진면목은 어떤 것이냐? 믿지 않는 가족들과 있을 때 그는 어떤 나쁜 말도 가리지 않는다. 원망의 말, 증오의 말, 사람을 적대시하는 말, 형제자매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말, 하나님 집이 공의롭지 않다고 원망하는 말을 모조리 내뱉는다.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전혀 삼가지도 않는다. 친구들 앞에서 사람들과 세속적인 얘기를 하고, 남의 집의 옳고 그름을 논하고, 이방인의 모든 세속적인 활동에 참여하고, 심지어 관혼상제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방인과 함께 옳고 그름을 따지고, 남을 판단하고, 욕하고, 뒤에서 소문을 퍼뜨리고 사람을 헐뜯는 등 이런 말을 그는 다 한다. 이방인 사이에서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고, 눈을 속이고, 몰래 빼앗고, 기만하고, 패거리를 만들고, 남을 공격하고, 일터에서 사람을 모함하고, 고자질하고, 남의 어깨를 밟고 올라서는 등 이런 일도 할 수 있다. 가족이나 이방인과 있을 때는 인내하지도 않고, 포용하지도 않고, 겸손하지도 않고 완전히 바닥을 드러낸다. 하나님 집에서 그는 양의 가죽을 뒤집어쓴 늑대이고, 이방인들과 있을 때, 믿지 않는 사람들과 있을 때는 철저하게 늑대의 얼굴을 내보인다. 이방인과 이익을 다투고, 말 한마디, 주장 하나를 다투고, 약간의 이익을 위해 얼굴을 붉히며 끊임없이 다툰다. 하나님 집에서 이익을 얻지 못하거나 책망을 받으면 집에 가서 억지를 쓰며 소란을 피우고 난리를 치는데, 가족들이 겁낼 정도로 난리를 친다. 이방인들과 있을 때 그에게는 크리스천의 품위는 눈곱만큼도 없고, 크리스천에게 있어야 할 간증도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늑대이지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 집에서, 그리고 형제자매 앞에서 그는 약속하고, 맹세하고, 다짐하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를 바라고 하나님에게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방인들 사이에 가면 그들과 똑같은 것을 추구하고 믿는다. 심지어 이방인들처럼 스타를 따르는 사람도 있다. 매일 스타의 차림새를 따라 하느라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머리는 산발을 하고, 짙은 화장을 하고 다녀서 사람인지 귀신인지 구별이 안 된다. 매일 세련된 옷을 입고 유행을 좇으면서도 사는 게 즐겁기만 하고, 마음 깊은 곳에는 이방인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전혀 없다. 적그리스도는 교회에서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 마음속에서 명망과 지위를 얻기 위해 많은 일을 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런 노력은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쏟는 것이고, 남들로부터 높이 평가받고 숭배받기 위해 들이는 것이다. 이런 행위와 행동 방법, 겉으로 표출하는 것은 그가 이면에서 살아 내는 것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그가 이면에서 하는 행동은 크리스천이 갖춰야 할 게 전혀 아니다. 이렇게 확연한 대비를 통해 우리는 그가 형제자매 사이에서 한 모든 것, 그 사이에서 드러낸 모든 것이 진실되고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 아닌 위장된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적그리스도가 위장할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절대 이렇게 자기 뜻을 굽혀 가며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이면에서 한 일, 이면에서 드러낸 성품, 그리고 그 본인의 추구를 근거로 볼 때, 그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고, 단정하고 반듯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고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은 더욱 좋아하지 않고, 크리스천의 길을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보여 주는 이 모든 좋은 행위는 내면에서 우러나온 것도, 본인이 원해서 한 것도, 진심으로 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본심에 어긋나는 것이고, 남에게 보여 주는 것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비위를 맞추고 남의 마음을 매수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남의 마음을 매수하면 그에게 무슨 이점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다. 그에게는 이 이점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렇다면 그 이점이 무엇이냐? 바로 그가 사람들 가운데 서면 누구나 그를 알고, 누구나 엄지를 치켜올려 주고, 누구나 칭찬하고, 누구나 숭배하고, 일이 생기면 그를 찾으면서 정작 하나님에게는 구하지도 기도하지도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들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 주위를 맴돌면 그는 속으로 어떤 기분이겠느냐? 자기가 비범한 사람이나 뛰어난 사람이라고 느끼고, 우쭐해지고, 구름 속에서 사는 기분일 것이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것과 다르다.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나 치켜세우고, 칭찬하고, 마치 달 하나를 별들이 에워싸듯 모두가 한 사람을 받드는데 그의 마음속에서 이 얼마나 황홀한 기분이겠느냐. 얼마나 즐겁고, 편안하고, 행복하겠느냐!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바라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들 가운데서 만약 아무도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자신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도 남들이 모른다면, 대다수의 마음에 자신이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면, 별다른 특징이나 장점, 뛰어난 부분도 별로 없고, 남들이 감복하거나 존경할 만한 부분도 없고, 남들 입에 오르내릴 칭찬 거리도 없다면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이를 불쾌하고 떨떠름하게 느낀다. 신선이 된 기분도, 우쭐한 기분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사는 건 너무나 재미없고, 너무나 편치 않고,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서 가치 없게 느껴진다. 그는 생각한다. ‘평생을 평범한 사람으로 살면서 본분이나 좀 이행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는 이런 삶이 무슨 재미가 있나? 사람이 하나님 믿는 일이 어쩜 이렇게 시시할 수 있지? 그 기준이 너무 낮으니 높여야겠어. 어떻게 높일까? 인지도를 높여 사람들에게 앙망받고 높이 평가받으면 사는 게 자랑스러울 거야.’ 그러니 그는 기도할 때는 집에서 혼자 기도하지 않고 교회에 나가 기도하고,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일 때 큰 소리로 기도하고, 문법에 맞게, 논리와 순서에 맞게, 조리 있게 기도하며 사람들에게 기도를 들려줘서 모두에게 자기가 말주변이 좋고, 생각도 분명하고, 추구하는 바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 줄 수 있도록 한다. 하나님 말씀을 읽더라도 집에서 혼자 읽지 않고 먼저 집에서 준비한 다음 다른 사람에게 들려줘서 자기가 읽는 말씀은 다 중요하고 핵심적이라는 걸 보여 줄 수 있도록 한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뒤에서 열심히 준비 작업을 하고, 제대로 준비한 다음, 남들에게 보여 줄 때 체면이 서고 수긍할 수 있어야 남 앞에 내놓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집에서 거울을 보면서 예습하고 준비한 다음 남 앞에 내놓는다. 남들 앞에 내놓을 때 그것은 가장 원초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 번 가공을 거친 것이고, 사람의 생각과 관점, 패괴 성품과 계략, 수단을 거쳐 가공된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교회와 사람들 사이에서 지위와 인지도를 얻으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갖 대가를 아낌없이 치러 가며 이런 일을 한다. 그러니 이런 일은 전부 뭐라고 할 수 있느냐? 진정한 표출이냐?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해야 할 실행이냐? (아닙니다.) 이런 건 모두 위장해 낸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위장은 역겹기 짝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드릴 때 교제하기 전에 반드시 미리 초고를 쓴다. 뒤에서 초고를 다 쓰고 여러 번 수정하고 가공과 윤색을 거쳐 준비가 다 된 후에야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교제한다. “다들 형제자매니까 예배드릴 때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속으로 생각하는 걸 그대로 얘기하면 좋잖아요!” 누군가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건 안 되죠. 그러면 형제자매들이 저를 얕잡아 볼 거예요.” 보아라. 그는 무의식중에 본심을 드러낼 때도 있다. 그는 어디서나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지키기 위해 일한다. 사회에서 엘리트나 교수, 대학생, 박사생인 사람도 있고, 또 과학 연구원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의 지위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 항상 행위를 위장하고 가공해서 사람들과 사귄다. 즉, 가면을 쓰고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다. 상대는 그가 정말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에게 연약함이 있는지, 그가 뒤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고, 그의 사생활, 됨됨이와 처세에 대해 항상 의문을 품고, 언제나 궁금해한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깊이 위장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너희는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그가 너에게 위장하면 너도 그에게 위장하는 건 어떠냐? 예를 들어, 그가 너에게 계속 빈말을 늘어놓고 너도 그에게 계속 예의를 차리는 것이다. 이래서야 되겠느냐?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울리는 게 적절하겠느냐? (그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발견하면 먼저 그를 폭로하고 그에게 그런 성품의 본성 본질이 무엇인지, 어떤 속셈에 지배받은 것인지 교제해 주어야 합니다. 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교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를 폭로해야 하고, 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멀리해야 한다. 이런 사람을 대할 때 너희 중에 미혹되어 그를 숭배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도 있느냐? 지금의 너희 분량이라면, 기본적으로 확실한 바리새인들은 그래도 조금 간파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재주가 좋고 위장도 할 수 있고 깊이 숨길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간파할 수 있겠느냐? 이를테면 그가 옳은 말만 하고 옳은 행동만 한다면, 겉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고 실수도 전혀 저지르지 않는다면, 너는 가끔 어떤 일에서 소극적이고 연약해지는데 그는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설령 소극적이게 되더라도 스스로 해결하고 얼른 빠져나올 수 있는데 너는 안 된다면, 네가 이런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찬성하고 숭배하며 그를 따라 하고 그를 따라갈 것이다. 분별할 줄 모른다면 미혹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위장한다’라는 항목에 대해 몇 가지 방면을 교제했느냐? 하나는 수고를 이용해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다. 속으로는 수고하기를 원하지 않고 그 일에 반발하면서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억지로 수고하고 버리고 대가를 치른다. 수고한 다음에도 여전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는 어딜 가나 떠들어 대면서 사정을 모르는 많은 이들에게 알린다. 결국 몇몇 사람이 알고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높이 평가하고 숭배하면 그는 목적을 이룬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좋은 사람, 착실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표방한다. 또한 이런 사람의 이미지와 신분, 성격으로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 상대가 그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다가서게 만들려고 한다. 그는 이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더 많은 이들로부터 칭찬받고 높이 평가받고, 이로써 인지도를 높이려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행동 방법을 통해 적그리스도의 위장 행위, 위장하는 본질 이면에 숨은 목적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떤 행동과 어떤 말을 했는지, 그들이 위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모습은 어떤 게 있는지 폭로하고 해부해 보았다. 이 항목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